[영상] KBS 32기 이지애 아나운서 첫번째 자작영상
- 제작년도
- 2010
테드 코넨트 (Theodore Conant)는 1952년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소속으로 한국에 왔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넨트(James Bryant Conant)는 하버드대학의 총장과 독일대사를 지냈고, 2차대전 중에는 미국 원자력위원회의 수석고문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한 바 있었다. 통신병으로 2차대전에 참전했던 테드 코넨트는 전쟁 후에 대학을 다녔고 로버트 플래허티의 조감독으로 < 루이지애나 이야기(Louisiana Story) >(1948)의 제작에 참여했다. 다수의 다큐멘터리 제작 경험을 갖고 있으며, 특히 아시아 쪽에 관심이 많았던 미국의 지식 청년 테드 코넨트는 국제연합한국재건단에서 역시 젊고 명민했던 이형표 를 만났다. 당시 화가이기도 했던 이형표 는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이 제작하는 선전영화 <고집>의 통역 겸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었다. 두 젊은이는 의기투합했고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함께 만들었다. 그 중에는 화가 이형표를 주인공으로 삼은 < 한국의 미술가(Korean Artist) >(1955)도 있었고 한국전쟁을 다룬 ‘다이렉트 시네마’ 스타일의 < 위기의 아이들(Children in Crisis) >(1955)도 있었다. <한국의 미술가>는 마닐라영화제에서, <위기의 아이들>은 베를린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후일 테드 코넨트 는 이형표와 매우 긴밀하게(very closely) 작업했다고, 이형표는 테드 코넨트와 9년 동안 함께 살다시피 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술회했다. 테드 코넨트가 군산에서 퀘이커교도의 구호활동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1955년부터 국립영화제작소의 녹음 분야 고문으로 일했던 1960년대 초까지, 그의 통역을 담당했던 박익순 또한 두 사람이 항상 함께 작업했으며, 특히 편집은 거의 이형표가 맡았었다고 증언한다. 나는 이 독특한 협력관계가 한국 다큐멘터리의 ‘잊혀진 기원’의 중요한 한 장면을 이룬다고 주장하고 싶다. 영화사연구자로서 나는 ‘기원’을 찾아내고 그 이후의 많은 것들을 그 ‘기원’으로 회수하고자 하는 연구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기원’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1980년대 말 민주화운동과 함께 독립 다큐멘터리의 흐름이 부상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국가기관이 독점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잊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어떤 다른 ‘기원’ 또는 ‘전통’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정적인 만큼 효과적으로 그 문제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한미 양국의 두 청년이 함께 작업했던 이 사적인 다큐멘터리들은,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관계만큼이나 복잡하고도 미묘한,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당시 한국사회를 규정했던 권력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를 투영하고 있다. 2004년 이형표 감독과의 생애사 구술을 하면서 처음 이 영화를 접했던 나는, 5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짧은 다큐멘터리가 구사하는 세련된 화법에 먼저 놀랐다. 국립영화제작소가 ‘문화영화’라는 이름으로 다큐멘터리를 독점하고 있을 때도, TV 방송이 다큐멘터리 제작의 주도권을 국립영화제작소로부터 빼앗아온 1980년대 이후에도,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실천적 방법으로 시도되었던 독립 다큐멘터리 운동에서도, 빌 니콜스가 분류한 이른바 “신의 목소리”가 지배하는 다큐멘터리의 설명적 양식은 도전받지 않았다. < 위기의 아이들 >이 나에게 가장 먼저 환기시킨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우리의 다큐멘터리 역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다이렉트 시네마의 관찰적 양식은 한국전쟁 당시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다른 다이렉트 시네마가 그러하듯이 현장음만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에 예외적으로 몇 번 끼어드는 한국 전통의 관악기 소리가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적인 관념의 소산이었을 것이라는 혐의도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벽돌을 나르거나 미군과 ‘양공주’를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거나 양식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서거나, 포탄을 맞아 뚫어진 학교 벽 안쪽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한글을 배우거나 이승만정권의 휴전반대 시위에 동원되거나 거리에 쓰러져 있거나. 이것이 이 영화가 그려낸 ‘위기의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을 전쟁의 와중에 놓인 그 전쟁의 당사자가 그토록 냉정하게 관찰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한국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미국 신문들의 몽타주 위로 이것이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story)이며, 특히 역사가들에 의해 이루어질 일반적인 전쟁과 전투의 기록이 아니라 “아이들의 얼굴에 투영된” “어떤 전쟁”을 바라보는 다른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영어 자막이 흐를 때, 우리는 이 영화가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관대한(tolerant)’ 태도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서구 인류학자의 태도에 의해 지배될 것임을 감지하게 된다. 아마도 테드 코넨트 는 그처럼 ‘관대한’ 서구의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박익순의 표현대로 한국인에게 근본적인 관심은 없었지만 한국을 “사랑”했으며, 이승만 정권의 공보실에 고용되어 있으면서도 공공연하게 이승만의 독재를 비난할 만큼 용감한 민주주의자였다. 그런데 그의 한국인 파트너였던 이형표 는? 그는 서울 사대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였고, 테드 코넨트 도 인정했듯이 자신보다 더 “민첩하고 훌륭한 카메라맨”이었지만, 미국문화의 수혜를 열렬히 원하는 제3세계의 지식인이었다. 그에게 있어 미국문화는 자신의 10대를 지배했던 일본의 식민지 문화에서 벗어나 동시대의 세계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했다. 미국 유력인사의 아들이었던 테드 코넨트는 이 총명하고도 열정적인 제3세계 친구를 위해 자신의 특권을 활용해서 서구의 최신 다큐멘터리들을, 음반들을, 영화이론서들을, 그리고 최고급 인쇄의 화집들을 외교 행낭을 통해 실어날랐다. 2차대전 이후 미국 다큐멘터리를 지배했던 다이렉트 시네마 양식이 놀라울 만큼 세련된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는 < 위기의 아이들 >은 바로 그들이 나누었던 독특한 ‘우정’의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코넨트가 가져온 것은 한국에서 처음 보는 동시녹음이 가능한 휴대용 녹음기계나 다이렉트 시네마라는 최신의 영화경향만은 아니었다. 무릇 문화란 그 어떤 경우에도 단순히 도구일 수만은 없는 법이다. 한국 현실로부터의 거리두기, 전쟁이 낳은 비극에 대한 외부자의 관찰적 시선,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정권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 또한 이형표의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대목, 즉 정치적 목적으로 아이들을 휴전반대 시위에 동원했던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 때문에, 이형표 는 나이 80이 넘어서까지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영화 < 위기의 아이들 >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의 부역 전력 때문에 빨갱이라는 의심을 받고 부산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그는 “다시 떼들어갈까봐 무서워서” 코넨트에게 그 영화를 “줘버리고 말았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위기의 아이들>을 상영한 후 이승만 정권의 관료들이 코넨트에게 “어떻게 공산주의 영화를 한국에서 만들 수 있느냐”는 항의를 했다는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그것은 단지 이형표의 피해의식이 낳은 기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덧붙여서. 테드 코넨트 는 < 위기의 아이들 >을 포함하여 자신이 갖고 있던 한국 관련 다큐멘터리들, 각종 서류들, 자료들을 콜럼비아 대학에 기증했고 그 중 일부가 한국영상자료원에 공유되었다. 그리고 이형표 감독이 사망한 후인 작년에 한국영상자료원 수집부의 최소원 씨를 만난 코넨트는 자신이 기증한 자료들을 “테드 코넨트와 이형표 콜렉션”이라고 이름 붙여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것으로 이형표는 비로소 그 시절 자신이 했던 일들에 이름을 새길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