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윤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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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이지윤
- 참여 작품
- 당근수프와 함께한 화요일 (2016), 소꿉놀이 (2008), 꿈을 이루어 (2006), Happy Delivery Service (2004), 골목의 끝 (2004), 아기나무 (2004)
이지윤
- 참여 작품
- 유리벽 (2021), 인천모기멸종보고서 (2019), 커튼 뒤에서 (2018), 바나나 거북 (2018), 휴일의 평화 (2017), why me? (2015)
이지윤
- 참여 작품
-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 1947 보스톤 (2023), 뜨거운 피 (2022), 한산: 용의 출현 (2022),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2021), 킹덤: 아신전 (2021), 스텔라 (2021), 음양사 : 청아집 (2020), 그녀가 죽었다 (2020), 유체이탈자 (2020),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020), 남산의 부장들 (2019), 승리호 (2019),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 (2019), 몽키킹3: 서유기 여인왕국 (2018), 천문: 하늘에 묻는다 (2018),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2018), 물괴 (2017), 신과함께-인과 연 (2017), 쿵푸 요가 (2017)
수집자료
[코난][영상] 서울대법인화 본부점거해제까지 기록과 이지윤총학생회장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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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난][영상]서울대 법인화 본부점거 해제까지 기록과 이지윤 총학생회장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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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방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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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영화 15편 미국 순회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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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민 끌고 류승룡 밀고...'NEW'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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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방의 선물' 관객 1천만 돌파..최고 수익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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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KOFA 추리반장] 오발탄과 수영장
한국영상자료원 수장고에 있는 무궁무진한 자료 중에는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비장한’’ 가치를 품은 원석들이 있습니다. 그런 원석을 골라내고 잘 다듬기 위해! 아키비스트들은 오늘도 여러 단서를 모아 추적에 나섭니다. 하찮아 보이는 자료가 역사적 의의를 지닌 원석 으로 발굴되기까지, 자료의 맥락을 추적하는 KOFA 추리반장 의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익히 봐온 < 오발탄 >(유현목, 1961) 포스터. 제일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포스터 상단, 입 주위를 손으로 감싸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배우 김진규 의 얼굴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한 배우 최무룡 의 표정이다. 그런 후 천천히 시선을 옮기면, 포스터 왼쪽으로 수영복을 입은 배우 김혜정 의 전신이 보인다. 곰곰이 생각하면, 포스터 속 김혜정의 모습은 다소 의아하다. 영화에서 김혜정이 이런 모습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처음엔 이 포스터를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포스터 속 김혜정의 모습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포스터를 그다지 주의 깊이 보지 않았던 탓도 있다. 만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더라도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영화에 없는 장면일지언정 이걸로 관객을 모을 수만 있다면, 포스터는 그 자체로 소임을 다 한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포스터 속의 이 장면을 기대하며 극장을 들어섰는데 기대한 장면이 안 나오기로서니, 일단 집계된 관객 수는 물론이고 관객이 지불한 영화 값은 되돌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뻔뻔하게 만들어내는 AI 시대의 함정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을 벌일 만큼의 과감함이 과연 그 옛날에 있었을지 의심했어야 했다. 이상하리만치 이상하지도 대수롭지도 않던 이 포스터가 불현듯 의아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련의 사진들을 접한 때부터였다. (좌) DST702647_01 / (우) DST702648_01 사진에는 ① 배우 김혜정과 감독 유현목 , 촬영기사 김학성 이 등장한다. 아마도 셋이 함께 참여한 작품과 관련된 사진일 것이다. 사진 아래에는 ② “1960.8” 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는데 이는 사진이 촬영된 날짜로, 해당 시기에 촬영 중인 작품과 관련된 사진일 것이다. 또한 ③ 김혜정이 수영복을 입고 있어 , 이 작품에는 김혜정이 수영복을 입고 등장하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자, 이제부터는 이 단서들을 가지고 사진과 관련된 영화가 무엇인지 추적해야 한다. 먼저 ①과 ②의 단서로, 이 사진들이 영화 <오발탄>과 관련된 것이라는 추론을 쉽게 내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대의 신문 기사들이 이 같은 추론에 강력한 근거로 작용했다. 1960년 4월, 여러 신문 기사는 유현목(감독)과 김학성(촬영), 김성춘 (조명 및 제작)이 동인제 방식으로 <오발탄> 촬영에 곧 들어갈 예정이라고 보도했고, 같은 해 6월에는 영화가 촬영 중이며 배우들이 무보수로 출연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영화가 드디어 완성돼 1961년 초에 개봉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당대의 기사를 종합하면, 영화 <오발탄>은 1960년 4월 무렵부터 12월까지 촬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사진들은 그들이 <오발탄>을 한창 촬영하고 있던 때에 찍은 사진 이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③에 있었다. 영화 <오발탄>에서 김혜정(극 중 영호의 애인이자 영화배우인 미리 역)이 수영복을 입은 모습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사진들을 처음 본 순간, 아주 잠깐이나마 이런 가설을 세워 보기도 했다. ‘이 사진은 그들이 <오발탄>을 한창 촬영 중일 때 찍은 것이기는 하지만, 촬영 현장에서 찍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8월이라는 한여름, 때가 때인 만큼 어쩌면 촬영 중에 잠시 짬을 내 피서를 갔던 것은 아닐까?’ 그러다 문득 주의 깊이 보지 않았던 포스터를 다시 보게 되었고, 거기에 그려진 김혜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961년 2월과 3월, <오발탄> 개봉을 예고하는 신문 광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사진 속 김혜정이 입은 수영복의 무늬가 포스터와 신문 광고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까지 확인되었다. 이 사진들이 두말할 나위 없이 <오발탄> 촬영 현장 사진 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추리를 마쳐서는 안 된다. 아키비스트의 추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 사진들이 <오발탄> 촬영 현장이라는 것은 영화 <오발탄>에 미리가 등장하는 수영장 신이 있었다는 것을 일러준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오발탄> 영상에 해당 장면이 없다는 것은 이 장면이 어떤 이유에서든 삭제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쯤에서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첫째, 지금은 확인할 수 없는 <오발탄>의 수영장 신은 무슨 내용이었으며, 둘째, 이 장면은 언제 무슨 이유로 삭제되었을까? 현재 남아 있는 <오발탄> 영상에서 삭제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미리의 수영장 신이 무슨 내용이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영화 시나리오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해답은 의외로 쉽게 찾아졌다. 유현목 감독의 부인, 박근자 작가가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한 “ 영화감독 유현목 연출 자료 컬렉션 ”에서 말이다. 이 컬렉션에는 여러 판본의 <오발탄> 시나리오가 포함돼 있는데, 그중 「<오발탄> 대사대본(녹음대본)」(이하 ‘녹음대본’, 관리번호 DCKN002163_01)에 문제의 이 장면이 남아 있었다. 「<오발탄> 대사대본(녹음대본)」(관리번호 DCKN002163_01), 68~69쪽. (여우 미리를 회견하는 기자군. 계단을 내려오든 미리, 얼굴을 가리며) 미리: 아… (머리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바쁘신데도 불구하시고 이러한 기회를 베풀어 주신 여러분의 앞날에 행복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기자들과 회견하는 미리) 기자: ⓔ 예술에 대해서 좀… 견해를 듣고 싶은데요. 미리: 예술이 뭐냐구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마치 인생이 뭐냐고 캐묻는 질문처럼… 기자A: 어려우실 줄 압니다만 간단히 요약해 말씀하시면… 미리: 우리들 인생이 최대한으로 즐길 수 있는 꿈결! 기자A: 아주 명답이었습니다. (녹음기가 돌아간다) … 그런데 현대 과학이 우리들 꿈에 미치는 영향이란 무엇일까요? 미리: 특히 전 어린 시절에 별을 좋아했어요. 저 반짝이는 어린 별을 타고 은하수를 건너 하늘나라에 가 봤으면… 그런데 오늘날 그 어린 별마저 권태로운 이 땅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과학의 소리를 들었을 때 난 막 울고만 싶었어요. 기자 A: 미스 고의 그 울고만 싶어지는 감정 속에 저이들도 한몫 끼고 싶습니다. 하하하하… (수영장 조약대에서 선수들이 다이빙한다. 풀에서 나오는 수영복의 미리, 기자들이 몰려든다) 기자 A: 다음은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 좀… 미리: 적어도 현대 여성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변치 않을 거예요. 기자 A: 왜 그럴까요? 수영장에서 스타 배우인 미리가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장면이다. 녹음대본에서 이 장면은 미리의 주선으로 배우가 될 기회를 뿌리치고 은행강도를 계획 중인 영호(최무룡)가 경식( 윤일봉 )이 잠적했다는 소식을 듣는 장면과 설희( 문혜란 )의 아파트 관리인에게서 간밤에 설희가 추락사했다는 소식을 듣는 장면 사이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타가 된 미리와 그런 기회를 박차고 절망 속에서 그릇된 길로 들어서는 영호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장치가 된다. 또한 이 장면은 미리가 생각하는 예술 그리고 그것이 추구하는 ‘꿈결’이 현실과 모순되는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역설함으로써 동시대 예술의 역할에 대한 감독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도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언제 그리고 왜 삭제되었을까? 혹시 유교적 도덕관에 입각해 풍기문란을 우려한 검열관이 삭제를 지시한 것일까? <오발탄>의 검열 서류를 찾아봐야 할 시점이다. <오발탄>을 제작한 대한영화제작주식회사(대표 김성춘)는 1961년 2월 9일, 문교부에 영화 상영 신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문교부는 2월 15일, <오발탄> 상영을 허가하면서도 “개천 하수도에서 어린이를 업은 여인이 목매단 장면”이 잔인하므로 삭제할 것을 지시했다. 아마도 제작사는 이를 받아들여 해당 장면을 삭제하고 4월 13일부터 서울의 국제극장 에서 상영을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장면 외에 검열에서 삭제 지시된 장면은 더 이상 없다. 물론 영화 <오발탄>의 시련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개봉(4월 13일) 다음날부터 시작됐다. 4월 14일, 문교부 문화국 예술과는 내무부 치안국장과 법무부 검찰국장에게 <오발탄>에 관한 재심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대해 내무부 치안국은 4월 19일과 5월 28일, “공산주의 선전 색채가 농후하여 반공 국시에 위배되며 사회적인 악영향이 심하다”라는 의견을 문교부에 보냈고, 결국 <오발탄>은 재심의를 거쳐 7월 20일, 국내 상영 보류 결정을 통보받았다. 제작사는 그 후 수차례 재심의를 신청했지만, 번번이 기각되었다. 그러다 1963년 7월, 공보부 영화과는 <오발탄>에 대한 국내외 긍정적인 여론을 반영해 마침내 상영 보류를 해제했다. 단, 극 중 노모( 노재신 )가 “가자!”라고 외치는 대사와 화면을 삭제하고 미군이 명숙을 희롱하는 장면을 단축하는 조건이었다(관련 내용은 “ 유현목 검열자료 컬렉션 ” 내 <오발탄> 심의서류 참조). 그런데 여기에서도 미리의 수영장 신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런 점에서 수영장 신은 검열로 삭제된 것이 아님 이 분명하다. 극중 노모가 “가자”를 외치는 장면 당국의 검열로 인한 삭제가 아니라면, 혹시 감독의 연출적 판단이었을까? 촬영을 했으나 편집 과정에서 불필요한 장면으로 판단해 거둬내는 일은 사실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이 가설 역시 곧바로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잠정적인 추정이기는 하나, 미리의 수영장 신이 남아 있는 <오발탄> 녹음대본은 제작사가 1963년 당국에 재심의를 진정하면서 작성된 것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제작자 김성춘은 1963년 6월 11일에 공보부와 중앙정보부에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노모가 ‘가자’라는 헛소리하는 구절이 대중에게 오해될 우려가 있어 그 구절을 ‘저 푸른 벌판의 양 떼를 따라가자’라는 내용으로 간결 명확히 하여 인간의 평화스러운 유토피아를 그리워하는 본심을 강조”하는 등의 수정 부분을 열거하며 상영 허가를 간청하고 있다. 그런데 이 녹음대본에는 김성춘이 진정서에서 밝힌 수정 방향과 일치하는 다음의 대사가 등장한다. “얘야 가자! 어서들 짐을 싸고 나서렴! 저 양 떼를 따라가야지. 모두들 모두들 푸른 곳으로 가는데 얘야 어서들 가자!(녹음대본 76쪽)” 이 점에서 <오발탄> 녹음대본은 1963년 재검열 진정을 위해 영화를 재편집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판본일 수 있는데, 여기에 수영장 신이 있다는 것은 1963년까지도 해당 장면이 영화에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임을, 따라서 감독의 연출적 판단만으로 삭제된 게 아니었을 것임 을 방증한다. 당국의 검열에 의한 것도, 감독의 연출적 판단에 의한 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이는 영화 프린트가 여러 목적으로 복사, 복제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보는 것이 좀 더 합당할 듯하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현재 감상할 수 있는 영화 <오발탄>은 1963년 11월에 개최된 제7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를 위해 영어 자막을 입힌 후 1975년 영화진흥공사가 주최한 ‘광복 30주년 기념 한국영화 감상회’를 위해 복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프린트를 원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러하기에 <오발탄> 녹음대본에는 존재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영화 판본에는 부재한 미리의 수영장 신은 1963년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출품용 프린트가 만들어지는 과정, 혹은 1975년 ‘광복 30주년 기념 한국영화 감상회’를 위해 그것이 또다시 복제되는 과정(이때의 <오발탄> 상영은 결국 무산되었다)에서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해당 장면이 삭제된 이유가 무엇인지, 그러한 삭제를 결정하기까지 연출자 유현목의 의도가 얼마만큼 반영되었는지는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 [1] 김기호, 「<오발탄> 디지털 복원 과정에 대해」, 한국영상자료원, 『<오발탄> 블루레이 소책자』, 2016.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 1993년 여름, 신문 ‘정치면’을 뜨겁게 달군 영화가 소식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어쩐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은 현장. 물론 그 ‘중요한 일’이란 사진을 보는 순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다. 사진 속 장소가 어디인지, 언제 찍은 것인지 모른다손 치더라도, 사진 속의 인물만으로도 이곳은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다. 1993년 7월 12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영화관 단성사 는 이날따라 매우 들뜬 분위기다. 역대 한국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울 것으로 기대되며 연일 만원사례를 기록하고 있는 < 서편제 >(임권택, 1993)가 상영 중이기도 했지만,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유독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한껏 들뜬 분위기를 가득 안은 단성사를 찾은 특별한 손님은 이 사진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인공, (당시) 야인/정치인 김대중이었다. 한편 사진에서 김대중의 오른팔을 가볍게 붙잡고 함께 계단을 오르고 있는 이는 영화 <서편제>에서 한국적 아름다움을 필름 위에 새긴, 사진의 원 소장자인 정일성 촬영감독이다. “ 촬영감독 정일성 컬렉션 ”에는 이 사진 외에도, 단성사 휴게실에서 김대중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정일성과 오정해 의 사진도 포함돼 있는데, 이들의 표정에는 거물 인사와 함께 자리한 데서 오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이즈음의 김대중은 연일 화제의 중심에 있던 참이었다. 그는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후, 정치 은퇴를 선언하고 돌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산하 국제문제연구소의 객원교수로 떠났다. 그 사이에 여러 언론은 그와의 접촉을 수없이 시도했지만, 정계를 떠나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외부와 거리를 두고 통일문제 연구에 집중했다. 그가 6개월가량의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1993년 7월 초, 언론은 또다시 그의 거취에 대한 보도를 연일 이어갔다. 그러던 차에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이뤄진 그의 <서편제> 관람은 사회의 모든 관심이 집중된 은퇴 정치인의 행보에서 꽤나 튀는, 돌출 이벤트였다. 그가 단성사에서 <서편제>를 관람한 것은 “제작사 측의 초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1] 제작사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일 거취 문제로 주목받고 있는 ‘야인’ 김대중을 초청했고, 김대중 역시 이에 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태흥영화사는 왜 김대중을 단성사에 초청했을까? 김대중은 모든 외부와 거리를 두면서도 왜 태흥영화사의 <서편제> 관람 초청에 응했을까? 제작사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혹시 태흥영화사는 화제 속 인물의 <서편제> 관람이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서편제>는 이미 1993년 5월, 문화체육부 중개로 청와대 시사회를 개최했고 김영삼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 관계자들의 찬사를 받아 화제가 되었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종교인, 김수환 추기경이 <서편제>를 보러 단성사를 찾은 일도 있었다. 단성사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과 그를 맞이하는 <서편제> 제작팀(구체일 미상) 다시 말해, 정치계를 비롯해 종교계까지 <서편제>를 관람하면서, 영화의 우수성과 작품성, 화제성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1993년 7월 12일의 이벤트는 단순히 영화 홍보를 위한 목적만은 아니지 않았을까? 어쩌면 ‘김대중’ 그 자체가 태흥영화사에 그리고 영화 <서편제>에, 나아가 한국영화계에 특정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계와 김대중의 관계 내지는 영화계에서 ‘김대중’이라는 키워드가 가지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이로부터 약 5년 전, 노태우 정권을 출범시킨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87년 12월 16일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의 첫 대통령 직접선거로,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당시 대표적인 민주 인사 김영삼(통일민주당)과 김대중(평화민주당; 이하 평민당) 역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대중은 민주정권 수립을 위해 양김(김영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으나 결렬되었고, 이들은 각자 독자 후보로서 대선 레이스를 치렀다. 영화계 내에서도 국내 영화시장 보호 및 창작과 표현의 자유, 영화인 복지 향상 등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김영삼, 김대중에게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2] 단일화가 결렬되자 평민당 김대중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다. [3] 이에 평민당은 「평화민주당에서- 이 땅의 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4] 로 영화인의 요구에 호응했다. 여기서 평민당이 제시한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기본 원칙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평민당에서- 이 땅의 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1987. 12.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영화계 현안문제를 고루 다루는 가운데서도,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한국영화 보호 및 육성을 위해 평민당이 가장 먼저 제시한 극장 스크린쿼터 확대안이다. 1986년 12월에 개정되어 1987년 7월부터 시행된 제6차 개정영화법에는 외국인의 국내 영화업 허용 조항이 신설돼, 외국 영화사가 국내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사실 이는 1985년부터 시작된 미국 통상압력의 한 결과로, 이를 토대로 1988년부터 UIP를 시작으로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1989년~), 콜럼비아 트라이스타(1990년~), 월트디즈니(1993년~) 등의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국내에 영업 등록을 하고 자사의 영화를 직접 배급(직배)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직배는 한국영화계에 위기로 다가왔다. 세계 영화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할리우드 영화가 국내에 직접 배급되면, 자본력이 상대적으로 영세한 한국영화가 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설 자리가 좁아진 한국영화를 보호해줄 장치는 스크린쿼터 제도뿐이었지만, 이 역시 미국의 레이더망에서 안전할 리는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크린쿼터 일수를 확대하겠다는 평민당의 공약은 생존 위기에 놓인 영화인들의 희망이자 기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시 사진 속 1993년 7월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1993년의 한국영화계는 스크린쿼터 문제, 나아가 영화 시장 개방 문제로 또다시 분주한 해를 보내는 중이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1988년에 시작된 ‘제2차 한미영화협상’에서 한국 정부는 1989년 1월부터 외국영화 프린트 벌 수 제한을 연차별로 완화해 1994년 1월부터 전면 폐지할 것에 합의했다. 이는 쉽게 말해 외국영화 상영 필름의 극장 공급량을 무제한 허용하는 것으로, 국내 영화시장 개방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1994년으로 예고된 영화시장 확대 개방을 목전에 둔 1993년의 영화계는 그해 1월, ‘스크린쿼터 감시단(위원장 정지영)’을 발족하고 전국 극장 상영 실적과 스크린쿼터 위반 실태를 조사, 감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한국영화 보호의 마지막 보루인 스크린쿼터 사수에 매진했다. 이런 맥락에서 1993년 7월 12일, 단성사에서 <서편제>를 관람한 ‘야인’ 김대중은 한국영화 보호 및 육성을 공약으로 내세운 1987년의 ‘대선 후보’ 김대중과 교차한다. 미국 통상압력의 결과로 예고된 외국영화 프린트 벌 수 제한 전면 폐지의 위협에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는 1993년 현재에, 미국 통상압력의 결과로 예고된 할리우드 거대 영화사들의 직배 위협에서 스크린쿼터 확대를 약속했던 1987년 정치인 김대중이 마치 소환되기나 한 듯이.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이 예고된 <서편제>를 야인 또는 정치인 ‘김대중’이 관람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자체로 한국영화를 위한 상징적인 이벤트였다. * 단성사에 김대중을 초청한 호스트,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는 그해 10월, 문체부의 스크린쿼터 20일 추가 감경 발표에 대응하고자 출범한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시나리오 작가 최금동 , 감독 유현목 , 임권택 , 당시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유동석과 함께 공동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93년 10월 27일에 예정된 영화의 날 기념행사 취소 및 제작 활동 중단 등의 공동 행동을 전개했다. 한편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와 맞물려 한국 경제는 IMF 금융위기를 맞았고, 갓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에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을 제안했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약칭 비대위)’를 발족하고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했는데, 이때 역시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는 배우 김지미 , 감독 임권택과 함께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영화계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은 노무현 정부 시기까지 이어졌으나, 그들의 투쟁으로 지켜온 스크린쿼터 146일은 결국 2006년 7월, 연간 73일로 축소되었다(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 참조). *** [1] 《동아일보》, 1993. 7. 13., 5면. [2] 애국영화인 일동, 「 민주화를 갈망하는 애국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II 」, 1987. 12. 11.,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관리번호 DZZ0001349_01. [3] 이 땅의 영화인들, 「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애국시민에게 드리는 영화인의 글 」, 1987. 12. 14.,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관리번호 DZZ0001350_01. [4] 한국영상자료원, 『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 관리번호 DZZ0001351_01.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 소설 연재를 위해 배우를 캐스팅해 사진까지 찍었다고?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영화평을 쓰는 것이며, 세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라는, 프랑스 누벨바그 시네마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이 유명한 말은 한국의 수많은 시네필에게 영화 사랑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주1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반드시 영화 창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 창작 욕구가 없다고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영화 사랑 정도가 트뤼포가 말한 저 세 단계 중 어느 경지에 있는지 재본 적이 있지 않을까? 게 중에는 실제로 영화 창작의 꿈을 펼치는 이가 있을 것이고, 영화에 관한 글 혹은 영상을 쓰거나 만드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저 영화 보는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사랑의 정도를 단계로 매겨 고수와 하수로 평가할 일은 사실, 아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각자의 방식이 있을 뿐, 정해진 단계란 있을 수 없다. 트뤼포가 말한 세 단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이도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할 ‘사진첩’의 소장자, 고(故) 홍영철(1946~2016) 선생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여느 영화팬과 마찬가지로 영화 보는 걸 즐기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영화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이윽고 자신이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며 영화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영화를 즐겨 보면서 입장권을 버리지 않고 모았다. 포스터와 신문광고 같은 것을 함께 모으다 보니 재미가 있더라. 그러다가 체계적으로 자료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1년이다. 영화에 빠지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접하려 했지만 어려웠다. 변변한 자료집 하나 없었으니.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이것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시작했다. - “ 한국 영화사 연구가 홍영철에게 ‘영화도시 부산’의 길을 묻다 ”, 《부산시보 부산이라 좋다》, 2014. 8. 25. 194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으로 부산에 정착했다. 젊은 시절, 영화를 즐겨 보며 입장권을 모으던 데서 시작해, 영화 포스터와 스틸, 전단 등 영화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직접 카메라를 들고 부산의 여러 영화관을 돌아다니며 극장 간판 사진을 찍었고, 영화관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수집을 했다고 하니, 201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꼭 45년 동안 수집한 자료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당연히 그는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해 『한국영화도서자료편람 1925~1990』(한국영상자료원, 1991)과 『부산영화 100년』(한국영화자료연구원, 2001), 『부산근대영화사: 영화상영자료 1915~1944』(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산지니, 2009), 『부산극장사』(부산영상위원회·한국영화자료연구원 엮음, 부산포, 2014) 등의 책을 편찬했다. 그리고 2017년, 홍영철 선생의 유족은 그가 반평생을 넘게 수집한 자료들을 부산시에 기증했다. 자료의 원본은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에서 보존·관리하기 시작했는데, 2019년에 한국영상자료원은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과 업무협약을 맺고 일부 자료를 디지털 복사본의 형태로 기증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이번에 공개한 “ 영화 수집가 홍영철 소장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 컬렉션(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은 바로 이들 자료 중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을 정리해 해제를 덧붙인 것이다. 이 컬렉션에는 1923년 하야카와 고슈(早川孤舟)가 연출한 < 춘향전 >부터 1944년 방한준 감독의 < 거경전 >까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제작된 극영화 70여 편의 스틸 132점이 디지털 파일의 형태로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에는 언뜻 영화 스틸 같아 보이지만 영화 스틸이 아닌 것도 섞여 있다. 사진 속에는 그 유명한 영화 < 아리랑 >(1926)의 감독이자 배우로도 인기 많았던 나운규 가 등장하고, 그와 함께 <아리랑>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 남궁운 과 주인규 가 출연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사진들은 심훈 이 1926년 11월 9일부터 12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영화소설 「탈춤」의 스틸이다. 극의 한 장면을 실사(實寫)로 촬영한 스틸인데 영화가 아닌 소설의 스틸이니, 그렇다면 ‘소설 스틸’이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할까? 그런데 잠깐만! ‘소설 스틸’이 무슨 말이냐고? 문자를 존재의 수단으로 삼는 ‘소설’이라는 장르에 시각 요소가 핵심인 ‘스틸’이라는 용어가 붙은 합성어가 말이 되냐고? 하신다면…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1920년대 중반에 등장한 ‘ 영화소설 ’이라는 문화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0년대까지 ‘영화 관람의 시대’를 보낸 식민지 조선의 영화계는 1919년 < 의리적 구토 >를 시작으로 본격 영화를 만드는 시대를 맞았다. 이와 함께 영화의 대중적 인기도 날로 높아졌다. 이를 반영이나 하듯, 1920년대 중반부터 여러 신문은 연재 소설에 삽화 혹은 연출된 사진을 수록하고, 여기에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영화소설’이 일련의 공통된 양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왕의 신문 연재 소설과 다른 특별한 양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보다 당시 신문들이 앞다투어 사용한 ‘영화소설’이라는 표제에는 나름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영화소설을 문학 장르가 아닌 ‘문화현상’이라 언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신문에 연재된 것은 김일영의 「삼림의 섭언」이라는 작품으로, 이는 《매일신보》를 통해 1926년 4월 4일부터 5월 16일까지 총 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1920년대는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민간 신문 발행을 허용했던 때로, 1910년대까지 총독부 기관지로 독주했던 《매일신보》는 이제,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민간 신문과 경쟁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1926년에 《매일신보》가 처음 도입한 ‘영화소설’은 당시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신문 판매 부수로 견인하려는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등도 잇달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단 작품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주2 영화소설을 신문 마케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은 《매일신보》에 「삼림의 섭언」이 연재되고 약 6개월 후, 《동아일보》에 연재된 「탈춤」(1926. 11. 9.~12. 16., 총 34회 연재)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탈춤」 연재를 시작하기 하루 전, 다음과 같은 홍보 기사를 게재했다. 사진: " 창작 영화소설 탈춤(예고) 심훈 작 ", 《동아일보》, 1926. 11. 8., 3면 심훈의 「탈춤」을 “조선서 처음되는 영화소설”이라고 홍보하고 있지만, 이미 수개월 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연재된 작품이 있기에,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이 홍보 기사에서 방점을 찍어 주목할 부분은 따로 있다. 기왕의 신문 연재 소설과 다를 바 없이 삽화를 수록했던 최초의 영화소설 「삼림의 섭언」과 달리, 「탈춤」은 “매일 삽화 대신으로 미려한 실연 사진”을 수록한다는 점이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차용했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에 대해 최초라는 타이틀은 다른 신문 다른 작품에 뺏겼지만, 《동아일보》는 처음으로 소설에 “실연 사진”을 도입하는 차별화 전략으로 신문 독자들에게 영화 관람 못지않은 기대감을 심으려 했을 것이다. 비로소 그 실상이 공개된 「탈춤」의 스틸은 화려한 캐스팅마저 자랑했다. 연재 첫 화의 스틸에는 같은 해 공개돼 화제를 모았던 영화 <아리랑>의 감독이자 스타 배우 나운규가, 또 같은 해 < 장한몽 >(이경손, 1926)의 심순애 역으로 스타 반열에 오른 김정숙 을 안고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어지는 회마다 차례로 공개된 스틸에는 <아리랑>에서 현구 역으로 큰 인기를 끈 배우 남궁운과 악역 연기의 일인자로 정평이 난 주인규가 등장했다. 스틸 캐스팅만으로도 당대 소설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영화소설 「탈춤」을 읽는 재미는 이뿐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재되는 사진 위에는 상황을 요약한 지문 내지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말풍선으로 제시되었다. “영화 수집가 홍영철 소장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 컬렉션(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속 영화소설 「탈춤」 스틸 역시 연재 당시에 다음과 같은 말풍선과 함께 실렸다. 소설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 말풍선으로 제시되는 대사로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재미까지 의도한 듯한 구성은 어느새 독자들에게 ‘진짜로’ 만들어진 혹은 만들고 있는 영화라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았을까? 특히 보통의 소설처럼 서술되던 내용이 연재 후반부에 이르러 갑자기 영화 시나리오 형식으로 제시되었을 때, 이러한 의심(?)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 심훈은 연재 중 불쑥 등장해,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기도 했다. 결혼식까지 하게 되기 전에 여러 가지 층절이 잇서 좀 더 세밀한 묘사를 해야 할 것이나 “스티-ㄹ”(삽화 사진)이 부족 해서 부득이 겅정겅정 뛸수밧게 업시되얏고 결혼식 장면은 전문용어만 쓰지안코 원 영화 각본을 꿈이는 체로 시험삼아 써봄니다. - " 탈춤(26) ", 《동아일보》 1926. 12. 6., 3면 그런데 작가의 이 말은 또 다른 혼란을 가중한다. 심훈은 극 중 혜경이 준상의 강압으로 그와 결혼식을 치르는 과정을 세밀하게 전개하지 못한 이유를 스틸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스틸의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이다. 소설의 스토리를 뒷받침해 주는 보조 수단이 스틸이어야 하는 것이 마땅할 텐데, 이 순간부터는 역으로 소설이 스틸의 스토리를 보완하는 장치가 되어버린다.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 연재가 기획된 것인지 아니면 연재하던 중에 영화화가 결정된 것인지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영화소설 「탈춤」은 연재가 끝난 그 이튿날, 영화 제작 소식을 전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할 영화 < 탈춤 >은 원작자 심훈이 각색을, 나운규가 감독을 맡을 예정이었다. 나운규를 비롯해 소설 스틸에 출연한 남궁운과 주인규가 영화에서도 그대로 출연할 계획이지만, 여배우만큼은 전격 신인으로 교체하리라고 발표되었다. *주3 그러나 영화 촬영은 예고했던 것처럼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7월, 《조선일보》는 그간의 각색 작업을 마치고 계림영화사 제작 아래 심훈이 감독을 맡을 것이라고 알렸다. 배우 역시 선정 중이라고 밝혀, 영화소설 「탈춤」 스틸에 출연한 배우들마저 전격 교체될 것임을 시사했다. *주4 그러나 영화 <탈춤>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주5 대신 심훈은 1927년 9월, 자신이 쓴 시나리오 < 먼동이 틀 때 >를 촬영하며 첫 메가폰을 잡았다. 심훈의 연출 데뷔작 <먼동이 틀 때>(1927) * 공교롭게도 영화소설 「탈춤」이 신문에 연재 중이던 때에 「탈춤」 스틸에 출연한 나운규, 김정숙, 남궁운, 주인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제작, 나운규 연출의 < 풍운아 >에도 출연했다(1926년 11월 19일 크랭크인, 1926년 12월 18일 조선극장에서 개봉). 그 때문인지 나운규가 자동차 뒤에 매달린 스틸은 훗날, 영화 <풍운아>의 스틸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스틸이 영화소설 「탈춤」에 수록된 날짜(1926. 11. 15.)가 <풍운아>의 공식 크랭크인 날짜보다 나흘 앞선다는 점에서, 그 정보는 수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주1. 정성일에 따르면, 이 말은 일본을 경유하며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사실 트뤼포는 ‘시네필로서 어떤 순간에 감독 혹은 비평가가 되려 했는가’라는 질문을 반추하며, 자신의 비평집 『내 인생의 영화(Les Films de ma vie)』에서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첫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영화관을 나서면서 감독을 적어 두는 것이며, 세 번째는 연출의 자리에 가서 내가 선택한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성일, 「트뤼포, 영화를 사랑한다면 이 사람처럼」,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을유문화사, 2006, 980~981쪽. 주2. 《매일신보》의 영화소설 게재 배경 및 특징에 대해서는 배현자·이혜진, 「근대 영화소설의 처음과 끝- 『매일신보』 영화소설」, 『한국 근대 영화소설 자료집: 매일신보편 上』, 소명출판, 2019, 3~34쪽 참고. 주3. 《동아일보》 , 1926. 12. 17., 5면. 주4. 《조선일보》, 1927. 7. 23., 2면. 주5. 심훈은 “촬영을 개시하기 6일 전에 초지(初志)를 뒤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탈춤」은 부르주아의 생활 이면을 유치하게나마 그린 것이 되기 때문에 스케일이 여간 크지가 않고 출연 인원도 엄청나게 많은 동시에 한 이천 원 한도하고 촬영비를 내게 되는 터라 그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도저히 실현시킬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라고 회고했다. 심훈, 「『먼동이 틀 때』의 회고-조선영화감독고심담」, 『심훈문학전집 1』, 탐구당, 1966, 577쪽; 주인, 「영화소설 정립을 위한 일고- 심훈의 탈춤과 영화평론을 중심으로」,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어문연구』, 34권 2호, 2006, 267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