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깅
- 감독
- 이지현
- 제작년도
- 2008
한국적인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 < 한네의 승천 >(1977)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 하길종 감독의 어떤 다른 영화보다 덜 표현적이지만, 이 작품은 더 전통적인 표면을 가지고 있다. 극작가 오영진이 발표한 ‘의례3부작’ 중 동명의 이야기를 각색해 완성된 시나리오로, 주인공은 동네 머슴 만명( 하명중 분)이다. 그는 신세를 비관해 자살하려고 하는 한네( 전영선 )를 구해내 자신의 움막으로 데려온다. 언뜻 소재 면에서는 영화는 전통극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런데 연이어 등장하는 ‘환상 시퀀스’가 내러티브의 구조를 바꾼다. 모더니즘 방식으로 몽타주된 무성의 모노톤 화면들이 영화의 전체적인 감상을 뒤흔든다. 단언컨대 <한네의 승천>은 관객들의 기대를 거스르는 영화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장르적인 ‘초현실주의’나 ‘환상영화’ 등으로 소급해서 소개하기는 어렵다. ‘문예영화’라고 분류되는 것에서 짐작하듯, 특정한 영화언어를 구현하기 위해 만든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恨)’을 소개하는 통속적 민속극과 다르게, 영화는 인물이 아닌 ‘이야기’ 중심으로 서사를 다룬다. 기억의 ‘주체’가 일정하지 않고 바뀌어서 소개되는 것도 특징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현대성은 당대 ‘<영상시대> 그룹’이 도전했던 ‘새로운 영화언어 찾기’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총 두 가지의 회상장면 중 첫 번째는 한네가 주인공이다. 그녀에 따르면 자신은 어떤 ‘아저씨’의 선택으로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게 됐다. 이후 원치 않은 곳을 떠돌며 살았고, 그 과정에서 삶의 목표를 찾았다. “어디로 가려고?” 묻는 아저씨의 질문에 그녀는 “꽃신을 신어야지요”라고 답한다. 추상적이지만 숭고한 이상향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회상은 만명의 것이다. 어린 만명을 보면서 “쌀밥 먹고 싶지?”라 묻던 다정한 어머니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어느 바람 부는 아침에 그녀는 ‘선녀’가 되어 그의 곁을 떠났다. 만명의 기억에서 어머니는 한네의 얼굴과 동일하게 묘사된다. 그런 그를 보면서 한네가 말한다. “서방님은 나와의 인연이 아니라, 어머님의 아들일 뿐이다”라고. 이 두 번째의 회상 이후에 일상은 조금씩 어긋난다. 영화에는 ‘환상 같은 현실적 장면들’이 차례로 등장하는데, 그 장면들 모두에 ‘한네와 닮은 여성들’이 나타난다. 만명이 마주치는 빨간 옷의 ‘술집작부’가 대표적이다. 그녀가 살해당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혼돈스럽게 그려진다. 그리고 한네를 ‘만명의 어머니’라 착각하는 재수 영감( 황해 )의 환상에도 그녀의 얼굴이 등장한다. 기필코 감추려던 늙은이의 불순한 만행이 그 여린 얼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한네’는 단 한 번도 땅 아래에 뿌리내린 적 없는 캐릭터다. 실존적 인간으로서 그녀는 소개되지 못한 채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애초 ‘놀이패’ 생활을 하던 어린 시절도 그랬고, 아저씨를 따라 나선 이후에도 그녀는 정착한 적이 없었다. 이곳 ‘선녀동’에 당도한 후로도 마치 선녀처럼 생활했다. 단적으로 그녀의 새 공간인 ‘만명의 방’으로 카메라는 다가가지 못한다. 마치 ‘헤스티아의 신전’을 그리듯 영화는 그곳은 금줄 쳐진 터부시된 공간으로 묘사한다. 욕망 그득한 프리아포스들이 그 장벽을 깨려고 하지만, 모두 내쳐진다. 그녀는 상징적인 처녀로서 생을 마감한다. 만일 표현이 아닌 기억이나 주관적 시점 등의 ‘환상 시퀀스’가 이 영화의 특이점을 드러낸다면, 영화 외향이 내부적 요인들과 상충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길종 감독은 마치 아이스킬로스라도 된 듯 한국식 리얼리즘을 그리스식 비극으로 연출한다. 그가 운명을 선호하는 감독이라 생각했던 적은 없지만, 적어도 이 영화의 양식에서 우리는 서구 비극의 운명성을 감지한다. <한네의 승천>이란 제목부터 아이러니를 감추고 있다. ‘로망스’를 꿈꾸며 시작된 영화가 ‘불안’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어쩌면 감독이 전작 < 수절 >(1973)이나 < 바보들의 행진 >(1975)에서 겪었던 과격한 행정 검열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미학적인 자기검열을 행한 것인지 모른다. 소재가 아닌 구조의 영역에서, 이 모든 내부의 이야기들이 상쇄되어 가리어진다. 주인공이 겪는 자기징벌적인 사랑의 행로는 결국 외향적인 전통의 틀과 어긋난다. <한네의 승천>을 한국적 영화라고 소개하기 어렵다는, 간단하지만 역설적인 첫 인상을 소개하려고 먼 길을 돌아온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작품의 과격하고 구조적인 발상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최근의 한국영화가 겪는 경계에서의 함정을, 이 작품은 기묘하게 비켜나간다. 고의적으로 작성된, 날카롭고도 잔인한 프레임을 지닌 심플한 드라마를 바라본다. 이 극이 비록 설득력을 갖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하더라도, 시대가 비켜야할 함정을 영리하게 뛰어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건 일종의 게임일 수 있다. 점점 더 지능적이 되어야만 하는 새로운 시대의 영화에 대해 <한네의 승천>은 일종의 우화로서 작용한다. >> 한네의 승천 VOD 보러가기 <<
인식( 임형국 )이 출근을 준비하는 사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송광자)와 딸 소진( 권잎새 )은 ‘사물 맞추기’ 놀이를 한다. 날마다 반복되는 이 게임에서 한 사람은 반복을 인식하지만, 다른 사람은 매번 잊어버린다. 그래서 이 행위는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 단순하지만 고통스러운, 그럼에도 견딜 만한 일상은 그렇게 지속된다. 그러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들 태진의 물건을 어머니가 끄집어낸다. 기억하는 자와 기억하지 못하는 자의 갈등이 서서히 고조된다. 어느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지만, 어떤 이는 피해자가 되고 또 다른 이는 처형자의 위치에 오른다. 기억이 침범한 내면의 경계는 인물 사이의 골을 파고든다. 누군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 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인물들 각자의 내면에 한숨으로 남을 뿐이다. 처음에는 몇몇 장면의 연출이 아쉬웠다. 정면 원쇼트의 대화 표현은 어색했고, 리듬감 없이 등장하는 인서트도 거슬렸다. 그런데 자꾸만 생각이 났다. 내게 있어 장병기 감독의 < 할머니의 외출 >(2019)은 마음에 남아 뭉글뭉글 떠오르는 영화였다. 그러던 중에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다. “처음에는 컬러라고 생각하고 촬영한 작품이다. 그런데 편집을 마친 뒤 화면을 보는데 처음의 의도를 화면이 가리는 것 같았다.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지는 10월의 가을 화면이 영화와 안 맞았다.” 계속될 수 없는 게임을 인지하게 된 남자 주인공의 체념을 영화는 흑백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의 선택에 동의하게 됐다. 영화 속 모든 모티브는 ‘과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아들의 ‘운동화 한 짝’이 그렇다. 이 물건의 등장으로 울음을 터트리는 자는 없다. 이미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절대 옅어질 수 없지만, 영화는 ‘슬픔’이나 ‘애정’ 같은 진부한 단어로 이 감정들을 꾸미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곳에는 클리셰가 없다. 불같이 화를 내는 인물도 없고, 감정에 취하는 자도 없다. 진짜 아픈 감정이 그렇게 천천히 바깥으로 드러난다. 일상에 기대어서, 흘러가는 사건을 관망하며 영화는 아픈 기억을 어루만진다. 죽음에 이르는 예고 역시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현재’라는 틀에 갇혀, 인물들의 마음이 도덕적인 딜레마에 휩싸인다. 잠재적이고 가상적인 감정이 시간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남자 주인공에게 이야기가 집중되는 구성은 적절한 선택처럼 보인다.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가정이 모두 그로부터 시작된다. 말 그대로 이 인물은 ‘인식’하는 자이다. 뜨겁고도 무거운 가을의 온도가 그를 거쳐 형상화된다. 진정한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남자는 존재하고 있다. 만일 <할머니의 외출>이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수채화였다면, 영화가 품은 시간의 뼈대는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회하여 산만하지 않은 방식으로, 영화는 흑백의 그림자를 내민다. 폭발적 내면을 보여주지 않고서도, 달콤한 시간을 끄집어내지 않고서도, 관객들은 그저 선험적으로 무해하고 관조적인 감상에 이른다. 때문에 이 작품은 시간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무언가의 회귀를 간절히 바라면서,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집중한다.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할머니의 상황에 대해 아버지는 딸에게 전화 너머로 설명하는 중이다. 그의 목소리에서, 바라보지 않아도 전달되는 아이러니한 감정을 깨닫는다. 영화에 드리워진 암흑의 실루엣은 어느새 새벽을 향한 밤의 그림자가 되어 있다. 현실이란 악몽에 덧입혀진 어설픈 레이어는 이제 곧 벗겨질 것이다. 생각해보면 누구도 옳지 않은 자는 없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간혹 실수하고 공황에 빠지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은 영화의 결말은 그렇게 가느다란 희망과 만난다. 예민한 주인공이 약한 숨을 내쉬고, 단호한 ‘생략’이 모든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우리 주변을 떠돌던 일상의 어두움은 극복될 것이다. 이 결말을 딱히 아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가 품은 모호한 형상은 사실 우리들 자신과 몹시 닮아 있다.
1960년대 한국영화는 지난 시절 유행했던 멜로드라마의 감정적 흐름을 딛고 조금씩 변화하는 중이었다. 전통 신파의 줄기에 미묘하게 균열이 생긴 것이다. 195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끌었던 감정 주도적 드라마의 원형은 새로운 10년을 맞아 사실적이고도 사회 반영적인 태도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작은 틈새의 움직임은 서서히 우리 영화 전반으로 확대되어 갔다. 영화 < 마부 >( 강대진 , 1961)의 주인공 춘삼( 김승호 )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소개하는 지표적 인물이라 부를 만한 캐릭터다. 가업을 이어서 마부로 살아가는 이 인물은 홀로 자식 넷을 건사하며 겨우 살림을 꾸려간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변화하는 도시 ‘서울’에서 그는 기어이 살아남고자 한다. 그가 도시의 하층부를 끈질기게 헤매는 것은 모두 ‘가족’ 때문이다. 가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끈질긴 생명력의 뿌리를 지금 내려야만 한다. 춘삼의 다섯 가족은 그렇게 가난하지만 암울하지는 않은,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일상을 이어간다. 춘삼을 주축으로 가족들의 이야기가 영화 <마부>의 중심이 된다. 그가 수원댁( 황정순 )과 소박한 연애를 하는 사이,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큰 아들 수업( 신영균 )과 허영에 부풀어 시행착오를 겪는 둘째 딸 옥희( 엄앵란 ), 그리고 출가했지만 소박맞아 집으로 쫓겨 오는 큰 딸 옥례( 조미령 )의 에피소드가 차례로 이어진다. 이들과 비교해서 막내 대업( 김진 )의 이야기는 소소한 편이다. 꾸준히 작은 말썽을 일으키지만 이 아이가 ‘사건’이라 부를 만한 큰일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사춘기 막내아들에 대해 생각하며 영화에 접근해야 할 것 같다. 스크린의 문이 열리자마자, 대업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인도하는 흰 토끼 마냥 정신없이 관객들을 ‘마부의 집’이란 토끼굴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모티브는 중요해 보인다. 좀도둑질과 자전거의 빠른 속도로 시작되는 세부 세계로의 인도, 말하자면 황홀한 인트로 시퀀스를 통해 관객들은 지극히 사회반영적인 드라마 <마부>를 꿈꾸면서 볼 수 있게 된다. 확실히 1960년대의 서울, 변화하는 이 도시의 주인을 자처한 것은 영화 <마부> 속의 캐릭터들이 아니다. 차라리 도시의 진짜 주인은 새롭게 나타난 자본가들, 과거에는 말을 소유했지만 이제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그들에 더 가깝다. 반면 우리 주인공들은 도시 한편에 보이지 않은 채 뒤덮여서 살아가고 있다. 작은 방에 모여서 아버지와 딸은 등을 맞대고 잠을 청하고, 등불 하나가 켜진 책상 앞에서 큰 아들은 밤새 공부한다. 이들의 내면에는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서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영화가 이들 각자의 소망을 성취해 보여주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러서 비로소 숨통이 트일만한 작은 성취가 있긴 하지만, 이 사실이 그토록 원했던 개인적인 소망의 완성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소박한 해피엔딩이 한국적 따스함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보아야 한다. 시작과 결말의 역설, 어찌 보면 이 패러독스야말로 당대 한국형 멜로드라마가 말하고자 내면의 진짜 중심인지 모른다. 춘삼의 에너지, 미래를 향한 자양분이 되고자 하는 그의 율동, 현실적이지 않은 긍정의 원천에 대해 생각한다. 밥상에 마주앉은 춘삼의 가족들을 보면서 문득 우리 정서의 근원으로서 ‘한국인의 밥심’을 떠올린다. 천천히 트랙 인되며 드러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표정, 그들이 공유하는 수북한 밥 한 그릇의 무게는 그 자체로 영화의 표상처럼 느껴진다. 수원댁과 김서기( 김희갑 )가 나눠먹는 한 그릇 국수의 질감 역시 마찬가지다. 춘삼이 수원댁에게 몰래 건네는 떡고물의 부피와 더불어 극장에서 나온 뒤 휘적거리는 국밥 뚝배기 등 이 모든 물체들이 정서의 감각을 향유한다. 밥 한 그릇 나눠줄 수 있을 정도의 행복감, 딱 그 만큼의 성취가 어쩌면 영화 <마부>가 지향하는 해피엔딩의 깊이인지도 모른다. 서구화되는 서울의 표면을 파헤친 결과 드러나는 한 그릇 끼니의 정서, 이가 바로 앨리스가 찾아낸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마음을 점령하는 ‘한국적 해피엔딩’의 만족감, 그 실체는 영화 <마부>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실마리가 서서히 이어져서 한국적 리얼리즘의 줄기가 된다. 이토록 건강한 육체의 따스함, 그 시작은 배우 김승호의 작은 얼굴이지만 모두의 손을 거치는 흙으로 빚은 국그릇의 질감과 만나 리얼리즘의 심상은 정확히 관객의 마음으로 되돌아온다. 같은 시기 만들어진 다른 영화들, 이를테면 유현목 의 < 오발탄 >(1961)과 <마부>를 비교하면 그 차이점은 좀 더 명확하게 보일 것이다. <오발탄>이 지닌 멜랑콜리한 사실성의 깊이에 비교해서, 영화 <마부>의 신파적 로망스는 가볍고 평범하며 그래서 마음 편한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이중적이기에 회피할 수 있는 상상력의 깊이, 딱 그만큼 시대의 불안은 상쇄된다. 1961년 베를린영화제에서 받은 ‘한국영화 최초의 유의미한 국제 영화제 수상’이란 은곰상의 성취는 그 훈장으로 여겨도 될 것 같다. 진짜 한국에서 존재하고 작동하는 사람들의 속마음, 그 따사로운 근원을 <마부>는 쫓는다. >> 마부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