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항로
- 감독
- 이만흥
- 제작년도
- 1948
- 출연
- 이집길, 유계선, 이강천, 김영희, 최한진, 이향운, 임남식
<성벽을 뚫고>의 육군 하사로 시작 1미터 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황해(黃海)가 극장 화면에 처음 얼굴을 비친 것은 1949년 한형모 감독의 데뷔작 <성벽을 뚫고>(김보철프로덕션 제작)부터였다. 이 영화는 해방 후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을 배경으로, 육군 소위(이집길)인 처남과 공산주의자(권영팔)인 매부 사이에 벌어지는 이념의 갈등과 반목을 그린 것이다. 매부는 처남을 매수하려 하고, 처남은 매부를 설득하려 하지만 실패하자 서로 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황해는 이 작품에 조연급인 육군 하사 역으로 출연했다. 남북 분단이 가져온 동족상잔의 비애를 담은 최초의 영화였다. [사진]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서의 황해 이렇게 영화계에 나왔으나 황해는 한동안 후속 출연작을 내지 못했다. 6.25전쟁과 연극 때문이었다. 그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한 것은 ‘뚱뚱이 양훈’과 겨룬 코미디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이었다. 이후 <나는 고발한다>(김묵, 1959)를 비롯한 <안개 낀 서귀포>(임한림, 1959), <햇빛 쏟아지는 벌판>, (정창화, 1960),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현상 붙은 사나이>(김묵, 1961), <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권택, 1962), <폭력지대>(김묵, 1965),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 등 액션물과 <한많은 청춘>(권영순, 1958), <자장가>(하한수, 1958), <목포의 눈물>(하한수, 1958), <울지 마라 두 남매>(서석주, 1960), <울려고 내가 왔던가>(김화랑, 1960) 등 신파 멜로, <박서방>(강대진, 1960), <마부>(강대진, 1961) 등의 서민영화,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 <심봤다>(정진우, 1979) 등 문예영화에 출연했다. [사진] <자장가>(하한수, 1958)의 황해. 왼쪽은 배우 한미나(사진제공: 김종원) 황해가 <자장가> 유의 신파와 액션 연기에 강한 것은 일찍이 악극단 등에서 쌓은 15년 경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버라이어티 쇼적 재능과 과장된 표정연기는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차츰 탈색돼 69년 <독짓는 늙은이>를 계기로 내적 연소의 연기양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단지>(이원세, 1975), <부초(浮草)>(이한욱, 1978)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신장의 한계 극복한 무대 경험 황해는 1920년 3월 6일 동해의 푸른 물을 끼고 뒤쪽으로는 외금강 줄기가 뻗어나간 강원도 고성군 장전읍 경동(京洞)에서 태어났다. 정어리 기름공장을 경영하는 전병근(全炳根)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큰 아들과 네 살 터울인 그에게 홍구(弘玖)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아들을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는 큰 아버지 댁에 보내 주교(舟橋)국민학교를 다니게 했다. 졸업 후 경신중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3년제인 경성상공업 기계과에 들어갔다. 졸업(1936년) 후에는 미쓰비시(三菱)백화점 식료품 점원을 거쳐 중앙우체국 집배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집배원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변두리 로 나설 때면 무료를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어느새 동료들 사이에서 ‘노래하는 집배원’으로 통했다. 하지만 이 일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형과 함께 아버지가 하는 정어리 가공 일을 도왔다. [사진]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에서 황해와 윤정희 그런데 이 무렵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회가 찾아왔다. 열여덟 살 되는 해 봄이었다. 서울의 성보(城寶)악극단이 전국순회 공연 중에 이 고장을 찾아온 것이다. 악극단은 관객동원의 수단으로 공연 첫날 노래자랑대회를 열었는데, 홍구 청년도 참가했다. 그의 노래를 들은 한 여단원이 소질이 있으니 서울에 가서 가수의 길을 걸어보라고 권했다. 그녀가 바로 ‘성보의 간판스타’인 가수 신 카나리아였다. 이에 용기를 얻어 성보악극단의 연구생 모집광고를 보고 응모, 1천 2백여 명의 경쟁자 가운데 12명을 뽑는 성보악극단의 제1기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들어간 극단에서 처음 출연하게 된 것이 신 카나리아 주연의 <춘풍일가>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는 공연 때마다 객석에 나와 다른 배우들이 하는 동작이나 대사, 표정을 관찰하고, 화장술을 익혔다. 그런 열성 탓인지 그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지방공연의 주연 배우로 발탁되었다. 지방공연은 밤차에서 새우잠을 자는 등 고달픈 일이었지만 무대에 서기만 하면 신명이 났다. 이렇게 시작한 연극이 1938년부터 4년 동안 10여 편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신 카나리아의 부군인 김화랑이 제일악극단을 조직하자 성보악극단을 떠났다. 2차세계대전으로 해초 가루로 만든 빵이나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그는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제일악극단에 머물렀다. 그런데 계속 조여 오는 징용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결국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천진에 내리자 미리 와있던 신 카나리아, 박단마 등과 함께 손목인이 이끄는 신태양악극단에 입단했다. 백파진(白波進)이란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사진] <인간단지>(이원세, 1975)에서의 황해(사진제공: 김종원) 군예대원으로 아내와 평양까지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잠시 수용소에 갇히기도 했으나 해방 이듬해인 1946년 6월 그는 간절히 기다리던 귀국선에 오르게 된다. 인천항에 내린 그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토록 그리던 황해 바다, 밟고 싶던 조국의 땅이 아닌가. 그는 “한국남자는 황해 바다처럼 넓고 거센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했던 한 광복군 노인의 충고를 떠올리며 예명을 다시 황해(黃海)로 바꾸었다. (황해, 「藝에 살다(13) 최초의 액션 스타(13)」, ≪일간스포츠≫, 1979년 11월 7일자) 이렇게 3년 만에 서울 돈암동 집으로 돌아오자 다시 신 카나리아 부부가 만든 새별악극단에 가담했다. 이 무렵 <자유만세>(1946)를 찍은 한형모(韓瀅模) 촬영기사가 만나자는 기별을 보내 왔다. 이번에 <성벽을 뚫고>라는 영화로 ‘입봉’하게 되었는데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해는 이렇게 하고 싶었던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연극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새별악극단을 인수하고 전성기로 올려놓을 무렵 가수 백설희(白雪姬)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자 동거생활을 결행하였다. 그들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살림을 꾸린지 15년 만인 1960년 서대문 밖 백련사(白蓮寺)에서였다. 그는 6.25전쟁을 겪으며 아내와 함께 군예대(軍藝隊)에 들어가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사진] <부초>(이한욱, 1978)에서의 황해와 윤세라(오른쪽)(사진제공: 김종원) 배우로서는 불리한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승부욕으로 관객 앞에 다가선 ‘작은 거인’ 황해는 1965년 장동휘, 허장강과 함께 동인프로덕션을 설립, 파월장병의 용맹상을 그린 <맹호작전>(1965)을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2월 9일 슬하에 노래하는 배우 전영록을 남기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사진] <성벽의 뚫고>(한형모, 1949)에 출연한 이집길 이집길(李集吉)은 한림, 최은희와 간발의 차이로 1947년 <그들이 가는 길>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무성영화시대 나운규의 <아리랑>(1926)과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 마부와 건축기사로 나왔던 단역배우 임운학이 처음 만든 감독 진출작이었다. 세트장치 없이 뚝섬 근처의 절에서 야외 촬영한 이 16밀리 영화는 부친(정민)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친구의 아들을 데려다 길러 평양감사가 되도록 만들었으나 키운 보람도 없이 외면당하자 암행어사가 된 그의 아들(임운학)이 배은망덕한 평양감사를 응징한다는 얘기다. 권선징악적 요소가 강한 이 이조(李朝) 야사의 악역인 평양감사에 이집길이 발탁된 것이다. 엑스트라가 모자라 경동중학 연극부 학생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임운학 「예(藝)에 살다(16) 영화배우 55년」 일간스포츠, 1979.8.11) 일본대학 산업경영과를 다닌 한림과 마찬가지로, 일본국제음악학교에서 공부한 해외 유학파인 이집길이 영화배우가 된 것은 당시로선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무튼 그는 이듬해 이만흥 감독의 <끊어진 항로>(1948)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밀수범으로 변신한다. 성실히 살아가는 직장인인 친구(이강천)는 바르게 살자고 설득하지만 이집길은 정부(유계선)와 공모하여 밀수품을 실어놓은 배로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끈질긴 친구의 노력으로 생각을 바꿔 당국에 자수한다. 그의 친구 역할과 함께 미술을 담당한 이강천은 5년 후 <아리랑>으로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이집길은 1년 후 <자유만세>를 찍은 촬영기사 한형모의 감독 데뷔작 <성벽을 뚫고>(1949)의 출연을 계기로 연기에 열정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이 가는 길>이나 <끊어진 항로>가 16밀리 무성영화인데다 반응이 좋지 않았던 반면 이 영화는 이미 검증 받은 한 감독의 35밀리 영화였기 때문이다. 1948년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에 의해 촉발된 제주 4,3사건과 10월 19일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계기로 일기 시작한 공산주의 배격의 흐름은 결국 <성벽을 뚫고>와 같은 반공영화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산주의자인 매부(권영팔)는 육군 소위인 처남(이집길)을 매수하려 하고 또 처남은 처남대로 매부를 설득하려 들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서로 총을 겨누게 되는 상황에 놓인다. 이 영화에 이어 그는 이만흥 감독의 <애정산맥>, <청춘>(이상 1953), <탁류>(1954) 등 3편과 홍성기 감독의 <출격명령>(1954), <열애>(1955) 등 2편에 출연하여 편수는 많지 않으나 꾸준히 배우의 길을 걸었다. <애정산맥>은 전투 경찰과 공비로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 친구의 이야기로 <성벽을 뚫고>와 같은 유형에 속한다. 다만 그들 사이에 마을 처녀와의 삼각관계가 설정되고 그의 배역이 육군 장교에서 전투경찰관으로 바뀌었을 정도의 차이다. <청춘>에서는 음악교사인 여선생을 둘러싸고 영어교사(황남)와 사랑싸움을 벌이는 체육교사로, <탁류>에서는 공비들에게 공급할 무기를 들여오려던 간첩단을 일망타진케 하는 방첩대원으로, <출국명령>에서는 적탄에 맞아 떨어진 라이벌인 조종사(전택이)를 죽음을 무릅쓰고 구출해내는 공군 조종사로 등장한다. <출격명령>(홍성기, 1954)에 출연한 이집길, 왼쪽은 배우 전택이 그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어버린 <열애>에서는 나병을 앓으면서도 한 여인(염매리)을 포기하지 못했던 화가 박혁의 불우한 삶을 온몸을 사르다시피 연기했다. 그는 간장염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 그의 아버지 박혁 목사 역을 맡은 나운규 시대의 배우 이금룡도 이 영화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고, 그 역시 같은 해 11월 세상을 떠났다. 술에 젖은 말년의 삶 이집길은 1923년 서울 혜화동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고향이 전라북도 군산이라는 말도 있다.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제국음악학교 성악과를 다니다가 일본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한다. 데뷔 당시에는 ‘교양을 갖춘 침착하고도 겸양한 인품, 근대인으로서의 지성과 샤프한 신경, 무엇보다도 천성적으로 타고난 굴곡 있는 입체적인 선 등이 조화된 한국영화계의 호프’로 기대를 모았다 .(한국일보, 「금주의 스타, 이집길」 1954, 11,29) 그러나 그는 배우로서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키가 작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단점을 메우기 위해 열심히 연기에 임했고 구두 뒤축을 두 개나 달고 다닐 정도로 키에 신경을 썼다. 말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젖어 지내다시피 했다. 이즈음 시골에 있던 아내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상경하여 병간호를 했다. 그러나 <열애>를 유작으로 11월 11일 오후 2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운명하였다. 한창 활동할 나이인 32세였다. 원인은 간장염이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아내의 손을 잡고 과거의 무절제한 생활과 과오에 대해 사죄했다고 한다 .(한재수, 「배우로 본 한국영화 광복 50년」 『월간 영화』 1975년 3월호. 78쪽) 유작이 된 <열애>(홍성기, 1955)의 한 장면(아래쪽이 이집길) 뒷날 감독이 된 영화평론가 유두연은 그의 죽음에 대해 “영화인들이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겨우 장만한 소나무판 관을 메고 가서 해골 같이 말라버린 시체를 끌어안고 ‘영원의 출연’을 위한 메이크업을 시켜주고 있는 뼈 저리는 마음을 알고 있기에 이 붓을 들었다‘며 다음과 같이 추도문을 마무리했다. -그 몸뚱이와 넋을 원통 필름에 발라버렸다. 그가 생전에 출연했던 영화를 더듬어 보면 그 얼마나 대중들의 마음이 그가 움직이는 그림자 속에 뭉쳐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성벽을 뚫고>에서의 이집길은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정신의 심벌이었다. 지리산 암벽에서 공비로 화한 친우와 대결하는 국군 소위의 검은 눈동자는 우정도 감상도 범할 수 없는 정의에 번쩍이고 있었다. <출격명령>의 항공 대위는 그 두꺼운 가슴팍에 자유를 갈구하는 민족의 마음을 안고 적진에 포탄을 퍼붓다가 드디어 산화하고 말았다. <열애>의 이집길은 파멸하여가는 육신을 이끌고 인간성의 존엄을 긍정하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생을 찾는 문둥병 환자였다. 모두가 다 절실한 환경의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 얼마나 성실하게 대중들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이렇던 이집길도 가버렸다. - 「젊은 배우의 죽음 , 곡(哭) 이집길의 사(死)」 조선일보, 1955.11.15-
한마디로 한형모 (韓瀅模) 감독은 ‘한국 최초’라는 몇 가지 기록을 남긴 유별난 한국영화계의 예인(藝人)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 성벽을 뚫고 >(1949)에서 처음 기계식 자동촬영을 시도했고, < 운명의 손 >(1954)에서는 국내 최초로 키스신을, < 청춘쌍곡선 >(1956)에서는 최초로 뮤지컬 코미디를 선보이며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촬영부 조수 한형모 , 메가폰을 잡다 < 성벽을 뚫고 >는 대학 동기 동창이자 처남 매부 사이인 이집길과 권영팔이 각기 육군 소위와 공산주의자로 갈려 서로 총을 겨누게 되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그린 영화다. 한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 영화의 연출은 당초 < 마음의 고향 >(1949)을 만든 윤용규 감독이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사양하는 바람에 안진상 (安鎭相)을 거쳐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진상 은 일본의 동보영화사 수업 시절 윤용규, 한형모 와 같이 고생한 ‘도호파(東寶派) 삼총사’ 중 한 사람이었다. 유명한 도요타 시로(豊田四郞) 문하의 제2조감독이었는데, 제1조감독이 바로 윤용규였다. 당시 한형모는 촬영부 조수였다. 현해탄을 넘어 동보에 자리 잡은 세 명의 촉망받는 한국인 영화학도들은 앞으로 기회가 오면 조국에서 힘을 모아 좋은 영화를 만들자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이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진상은 경찰의 밀수 근절을 다룬 최철(崔鐵?배우 최불암 의 부친) 제작의 < 여명(黎明) >(1948)에서 첫 메가폰을 잡은 뒤 유엔군의 인천 상륙 때 거리에 나왔다가 후퇴하는 인민군 총에 맞아 절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성벽을 뚫고>에 대한 두 친구의 연출 고사는 결과적으로 촬영기사인 한형모를 감독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최초의 키스신, 그리고 최초의 뮤지컬 코미디 그뿐만 아니라 기계식 자동촬영으로 완성케 하는 기회마저 얻게되었다. 그가 < 마음의 고향 >( 윤용규 , 1949)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는 수동식 촬영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발보카메라가 그 수단이었다. 수동식 촬영은 회전 속도가 고르지 않아 화면이 껌뻑거리거나 연기가 튀는 현상이 나타났다. 노출계 없는 수동식 카메라는 영상효과도 떨어졌다. 화면의 움직임이 실제 사람의 동작과 같게 하기 위해서는 초당 24장의 화상이 돌아가도록 찍어야 하는데, 수동식이다보니 그렇지 못했다. 수동촬영의 성패는 노련함과 호흡에 달려 있었다. 1분 동안 숨을 쉬지 않은 채 단숨에 찍어야 하는 게 수동촬영의 요령이었다. 그래서 촬영기사들은 수동촬영을 가리켜 ‘1분 승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형편이 이렇다보니 촬영뿐만 아니라 현상, 영사까지 남의 손에 의존해야 했다. 일본은 1940년 이후 자동현상기가 도입됨에 따라 수동으로 현상하는 불편을 덜었으나 우리나라는 6?25전쟁 이후에야 실현되었다. 그 첫 결실이 바로 < 운명의 손 >이었다. 이 영화는 술집을 무대로 활동하는 여간첩(윤인자)과 고학생으로 가장한 방첩대 대위(이향)의 상반된 역할을 통해 전시하의 남북 대결 상황을 그린 것이었다.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키스신이라지만 남녀가 입술을 포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아울러 여간첩이 처음 등장한 영화라는 데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병원의 환자로 왔다가 의사의 권유에 따라 서로 생활환경을 바꾸게 된 고등학교 동창 친구 간의 상황 변화와 에피소드를 담은 < 청춘쌍곡선 >은 의사 역을 맡은 작곡가 박시춘 의 기타 반주에맞춰 간호사(김시스터즈)들이 노래를 부르는 등 악극 코미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공윤 시절 한형모 감독과의 인연 내가 한형모 감독과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1988년 전후, 공연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영화 심의위원으로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분이 영화계를 대표해 들어와 자리를 같이하게 된 것이다. 한형모 감독에 앞서 이강천 감독이 영화심의를 맡았었다. 영화심의는 국내외를 포함 일곱 분이 했는데, 일주일에 4회 정도 진행되었다. 그런데 영화등급을 놓고 그분과 의견 충돌이 많았다. 한형모 감독은 선정적인 애정 표현이나 폭력적인 장면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다. 특히 한국영화에 대해서는 질을 따지며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 당시만 해도 ‘문제의 장면’을 ‘삭제’하거나 ‘여과’ 시키는 일이 관행처럼 이루어졌다. ‘삭제’를 뜻하는 가위질과 ‘여과’라는 화면 단축 사이에서 고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래서 그나마 차선책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등급의 ‘상향 조정’이었다. 즉 ‘중학생관람가’ 신청작을 ‘연소자 관람불가’ 로 한 등급 올려 수용한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 생각나는 게 외화 < 생도의 분노 >(해럴드 베커) 심의 때의 일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명예를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온 퇴역장군 출신 사립 사관학교 교장(조지 C. 스콧 분)이 티모시 허튼, 톰 크루즈 등 학생들과 합세해 정부의 학교 폐쇄 방침에 맞선다는 얘기인데, 경찰과 대치하는 장면이 문제가 된 것이다. 어느 여심의위원이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으므로 관련 부분을 단축하고 등급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반대했지만, 한 감독이 이 같은 강경론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바람에 그대로 통과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한 감독에게 영화감독으로서 그럴 수 있느냐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 영화는 개봉 후 국영 TV방송에 방영됨으로써 사실상 아무나 볼 수 있는 ‘연소자 관람가’ 등급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그와는 이런 식으로 의견이 대립될 때가 많았다. 보수적인, 하지만 언제나 혁신을 꾀한 감독 한형모 감독은 이처럼 보수적이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변하는 사회현상,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는 민감했다. 당시 70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를 몰고 다녔다. 그래서 강북에 살았던 나는 그분의 차에 편승할 때가 많았다. 그런 덕에 그분의 영화계 입문 전후의 귀중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때 선생은 고속터미널 앞 한신2차아파트에 살았다. 그는 계산에 철저한 일면을 보여 주기도 했다. 어느 날 선생에게 그동안 만든 작품의 스틸을 부탁하자 복사해 줄 테니 필름을 사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흑백 코닥필름 2통을 사들인 결과로 < 마음의 고향 >을 비롯한 < 여명 > 등 촬영 작품과 < 성벽을 뚫고 > 등 그의 감독 작품 10여 편, 50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뒤 심의위원의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자신이 그린 동양화 산수실경(山水實景) 한 폭을 승용차에 싣고 와서 기념으로 간직하라며 주기도 했다. 정통적인 산수화와는 다른 유화풍의 강렬한 터치를 느끼게 하는 그런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