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엄마들
- 감독
- 이철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이은미, 이채담, 민우, 이준석
1984년 9월 23일 저녁, TV에 등장한 한 벽안(碧眼)의 남자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스라엘 출신의 마술사 유리 겔러는 KBS 1TV에서 방송한 ‘세기의 경이 초능력 유리 겔러 쇼’에 출연하여 숟가락을 구부리고, 시계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초능력을 부려 충격을 주었다. 방송을 본 원근각지의 시청자들 중에서는 숟가락 구부리기 기적에 동참한 사람들의 체험담이 답지했는데, 이 불가사의한 순간에 유리 겔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중요한 걸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숟가락을 구부린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보일 수도 있죠. 그러나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대관절 웬 헛소리인가? 숟가락 구부리기가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니. 유리 겔러의 초능력 쇼는 88 서울올림픽 30주년을 기념하여 KBS에서 제작한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 88/18 >에 삽입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간절히 염원하는 것은 이루어지고 만다, 는 의지를 칭송한 초능력자 혹은 사기꾼이 남긴 선문답은 이 혁신적인 다큐멘터리의 핵심을 향하는 메타포처럼 들린다. 방송 다큐멘터리의 영역을 개척했을 뿐 아니라 다큐멘터리 문법의 전형을 다시 생각하게 한 <88/18>는 2019년 ‘모던 코리아’ 연작으로 계승되어 올해 공개된 시즌3에 이르고 있다. 독립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이태웅이 기획, 연출한 <88/18>은 서울에서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1988년과 2018년 사이에 놓인 30년의 시간차를 왕래하며 1980년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를 정의하려 한다. 과거와 미래, 파괴와 재건, 거짓과 환멸은 그 시대를 규정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일까? 서울올림픽을 앞둔 한국인들에게 혼연일치된 마음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초능력자, 진짜로 우리에겐 초능력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가 말한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과 세계평화 사이의 상관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관계를 조직하는 것’은 기록과 보존, 배열, 편찬, 재배치, 해석, 재맥락화 등 동시대 다큐멘터리의 주요 의제들을 관통하는 이 문제적 다큐멘터리의 에센스이다. 기록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한 <88/18>는 공영 방송국 기록 보관실에 안장된 거대한 영상 아카이빙 자료들을 모아 현재 시점에서 연출된 인터뷰와 엮는다. 파운드 푸티지 또는 편찬 다큐멘터리의 관례들에 비추어 <88/18>의 참신함은 영상 아카이브 자료가 만들어진 시점의 문맥을 폐기처분하는 담대한 결정에서 나온다. 최초의 문맥을 폐기한다는 것은 새로운 문맥을 형성하겠다는 의지와 상통하는 바, 아카이브에 담긴 흔적을 모으고 이어 붙여서 재구성한 장면들은 본래 연결되지 않았던 푸티지들의 논리를 형성하여 원본에 속하지 않은 의미와 맥락을 창조한다. 환언하면, 이 다큐멘터리는 1980년대 영상 기록을 추출하여 2018년의 시점에 재배열한 뒤 시청자들에게 30년의 시간을 성찰하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가공과 재해석이라는 행위는 특정 시공간의 좌표에 놓인 기록에 부과된 고정적이고, 단일한 의미에 저항하면서 창조적 글쓰기를 실천한다. 재배열은 재해석을 요구하며 제3의 의미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집단기억 또는 악몽을 초월하여 새로운 사유의 경로를 개척하는 활동이다. 아카이브를 매개로 한 과거와의 네트워킹이 역사, 자료, 사실에 기초한다는 가설을 이 다큐멘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가공과 변형, 재구성을 지향하면서 자료의 역사는 창조적인 의미에 자리를 기꺼이 내어줄 태세가 되어 있다. 냉전과 근대화, 도시 개발, 기술혁명, 계급 분화 등 시대의 풍경들이 경쾌하게 흘러가며 시청자들은 말과 이미지 사이의 거리, 틈새를 메워야 한다. 올림픽을 다루고 있지만 경기 중계화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올림픽이라는 이벤트의 내외, 전후를 규정하는 다양한 맥락들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흡사 북한 방송을 보는 것 같은 어조로 말하는 사람들은 시간의 덧없음을, 그 위에 얹힌 그래픽 디자이너 김기조의 형형색색 타이포그라피는 충돌과 부조화의 파토스를 자아낸다. <88/18>의 또 다른 특성은 전지적 나레이션의 부재이다. 나레이션을 통한 설명이나 정리를 회피하고 하나의 의미에 이미지를 정박시키는 틀에 박힌 배열을 경계하면서 다원적인 출처들을 드러내는 것이 플롯의 목적이다. 나레이션이 없는 대신 시청자가 최소한의 이야기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은 하나의 주제와 방사형으로 얽힌 이들의 인터뷰이다. 아카이브와 인터뷰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지 않으며 독립적인 존재감을 가지며 투트랙으로 나란히 병치된다. 아카이브 이미지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말도 발화 시점의 의도를 배반하면서 다른 관점의 논평을 제공한다. 전체 서사를 주재하는 인물로 5공의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이었던 허화평, 건전가요 ‘아! 대한민국’을 부른 가수 정수라,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를 디자인한 디자이너 김현, 예술의 전당의 건축 설계를 맡은 건축가 김원,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정화의 명목으로 철거된 빈민촌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 상계동 올림픽 >(1988)을 만든 영화감독 김동원, 상계동 철거민 김진홍, 컴퓨터 엔지니어 이철수 등이 각자의 위치에서 증언자의 역할을 한다. <88/18>은 잠자는 이미지를 깨어나게 하고 자료에 생명을 부여한다. 프로듀서 이태웅은 시청각 이미지를 통해 지적인 의미를 생산하는 아이디어를 탐구하고자 한다. 상호 독립적인 두 쇼트 사이에서 파생하는 아이디어를 추적하면서 관객의 마음에서 실제로 펼쳐지는 연상의 순서를 뒤집는다. 도입부에 1988년과 2018년을 평행하게 놓아 30년의 간극을 묘사하는 한 시퀀스를 사례로 들 수 있다. 1988년 ‘제5 공화국 언론통폐합 청문회’에서 국회의원 이철은 증인석에 앉은 허화평을 “5공의 핵심적인 인물”로 지목한다. 1988년의 허화평은 이철이 들려준 세평(世評)을 수긍한다. 이어지는 쇼트에서, 2018년의 카메라는 의자에 앉은 초로의 노인이 된 허화평의 깍지를 낀 채 모은 두 손을 시발로 하여 헤드를 살짝 들어 그의 몸통을 찍는다. 얼굴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화면 바깥에서는 또 다른 국회의원으로 추정되는 성명불상의 목소리가 “보안사의 실세”를 이야기한다. 다시 쇼트는 전환되어 1988년의 청문회에서 허화평이 보안사의 실세들이 누군지 설명을 요구한다. “삼 허씨(허화평, 허문도, 허삼수), 이학봉 씨, 이런 것이 실셉니다, 알았습니까? 알았지요”라고 추궁하는 화면 바깥 보이스오버에 대항하여 허화평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립니다”라며 부인하는 취지의 답변을 한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1988년의 허화평과 2018년 허화평의 얼굴이 교차하면서, 2018년의 허화평은 “내 자신이 5공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을 해본 일은 없고, 다만 확실한 것은 5공을 이야기할 때 허화평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노라”고 말한다. 1988년의 허화평과 2018년 허화평의 나란한 배열은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이기도 한 ‘88/18’의 꼴을 제시하고 있다. “5공의 핵심적인 인물”과 “보안사의 실세”의 차이, 저 두 가지 수사와 “5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허화평”의 간극은 무엇인가?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과 “세계평화”사이의 거리만큼일까? 아카이브 자료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저 말들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다. 인과적 논리에 따라 조합되지 않는 요소들을 재구성하여 상상적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것, 기록을 생산하는 시점의 맥락에서 벗어나 그것의 처리방식이 의미를 생성하는 전기(轉機)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인간의 마음을 조형하는 이 접근법은 의미를 생성하는, 관습적이고 자의적인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생성의 과정을 활력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생각의 대상을 제시하는 것과 생각의 과정을 탑재하는 것의 차이를 보여주는 아카이브 다큐멘터리의 수사학은 의미에 대한 세뇌를 넘어 미묘하고, 보는 사람이 알아채기조차 어려운 지적인 체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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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소녀 역할로 변신 시도 이후 조미령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십대의 반항>(김기영, 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1959),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 <이별의 종착역>(박영환, 1960), <박서방>(강대진, 1960), <지상의 비극>(박종호, 1960), <마부>(강대진, 1961), <에밀레종>(홍성기, 1961), <골목안 풍경>(박종호, 1962), <견습부부>(이봉래, 1962), <원효대사>(장일호, 1962), <인목대비>(안현철, 1962), <아빠 안녕>(최훈, 1963), <로맨스가족>(최영철, 1963), <혈맥>(김수용, 1963), <신식할머니>(백호빈, 1964), <홀어머니>(홍은원, 1964) <비무장지대>(박상호, 1965), <주홍 스카트>(이봉래, 1965), <사랑보다 강한 것>(이규웅, 1966), <나운규의 일생>(최무룡, 1966), <역마>(김강윤, 1967), <안방마님>(고영남, 1967), <로맨스 마마>(최인현, 1968), <몽땅 드릴까요>(유현목,1968), <춘원 이광수>(최인현, 1969), <두 아들 2>(조문진, 1981) 등에 출연했다. [사진] <신식 할머니>(백호빈, 1964)에서 조미령 <아들의 심판>(1960, 안현철)에서는 기생(황정순)의 딸로, <원효대사>(62, 장일호)에서는 원효(최무룡)를 따르는 아사다로, <에밀레종>에서는 명종의 완성을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리는 참마루(김진규)의 아내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십대의 반항>(1959)을 전후하여 배역의 변화를 꾀한다. 숏커트의 헤어스타일로 건달과 사귀는 뒷골목의 불량소녀(필녀)에서 영문 주간지 『타임』을 읽고 가족들에게 성문제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신식 할머니>(1963)의 노인으로, ‘여존남비’를 앞세워 전통적인 삶을 거부하는 여성잡지의 독신 <여사장>(1959) 요안나로 나타난다. [사진] <여사장>(한형모, 1959)에 출연한 조미령, 왼쪽은 상대역인 배우 이수련 이울러 그녀는 이지적이기보다는 백치미를 추구한 작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졸지에 맹진사댁 규수를 대신하여 꽃가마를 타게 된 <시집가는 날>의 대리 신부는 물론, 남편에게 얻어맞고 친정으로 쫓겨 온 <마부>의 벙어리 맏딸(옥례), 재취를 미끼로 구두쇠 영감(김승호)의 전대를 훔치고 도망간 <혈맥>(김수용, 1963)의 벙어리 여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진] <혈맥>(김수용, 1963)에서 조미령, 오른쪽은 배우 김승호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미령은 현대적인 양장보다는 가냘픈 선의 맵시가 드러나는 전통적인 한복 차림이 더욱 돋보인다는 점이다. 학업마저 포기한 여덟 살 소녀의 도전 조제순(趙濟順)이 본명인 조미령은 1929년 2월 4일 경남 마산 출신이다. 일설에는 서울 효자동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덟 살 때 연극 팬인 언니의 권유로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 ‘청춘좌’에 들어가 <임자 없는 자식들>(1937)로 첫 발을 디뎠다. 김승호의 연극 데뷔작이기도 하다. 『한국연예대감』(1962, 성영문화사) 등 일부 인쇄물에는 중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다. (「비약을 꿈꾸는 여우 조미령, 그는 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나」, 『한국일보』, 1958.11.02) 여덟 살 때 이미 극단(청춘좌)에 들어가 동양극장 후반기의 최대 히트작 <어머니의 힘>(1943, 이서구 원작)에 출연하는 등 해방이 될 때까지 11년 동안 무대생활을 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조미령은 그 뒤 <해연(갈매기)>(1948)으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으나 6.25전쟁과 결혼으로 화면에 얼굴을 비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 등 연극 단체에서 활약했다. 서울 신당동에 신접살림을 마련하고 두 남매를 키우는 일에만 매달리던 조미령이 <춘향전>으로 다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해연> 이후 5년 만이었다. 남편이 전주(錢主)를 끌어들여 만든 이 영화는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미령의 실신소동이다. 여배우 숙소에 밥을 지어 나르던 중년의 아낙네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 소동은 의처증이 있는 이철혁이 아내가 남주인공인 이민과 심상치 않는 관계로 의심한 데서 비롯되었다. 화가 난 그가 집어 던진 목침이 조미령의 뒷머리에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숙소에 있던 석금성(월매 역) 등 배우의 간호로 한참 뒤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9)] 난산」, 『중앙일보』, 1980.02.20.)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 왼쪽은 이도령을 맡은 상대 배우 이민 그런 남편이 그로부터 3년이 채 안된 1958년 3월 16일 밤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당시 46세였다. (「문화소식, 이철혁씨 급서」, 『서울신문』, 1958.03.19) 장례는 20일 아침 열시부터 ‘영화인동지장’(장의위원장 안종화)으로 고인의 자택인 신당동 앞마당에서 거행되었다. (「내외문화단신, 영화인 동지장으로」, 『한국일보』, 1958.03.20)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영화출연을 삼가던 조미령이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화랑 감독의 코미디 <사람팔자 알 수 없다>(1958)를 전후한 시기였다. 잇따라 중매결혼을 반대하고 자유결혼을 구가하는 <자유결혼>(1958, 이병일)의 셋째 딸 역을 맡아 종전과 다른 활달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박암 사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을 들어온 조미령은 남편이 죽은 지 4년이 채 안 돼 하와이 이민 2세 최동원과 결혼(1962년)하고 6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 역시 김소영, 김신재 등 선배배우와 마찬가지로 말년을 타국에서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볼 수 있는 뉴욕으로 옮겨 10여년을 지내고 1988년 아들딸이 사는 하와이로 건너가 토산품점을 경영했다. 하와이 민속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지 2천 4백여 평, 건평 1백 12평 규모의 큰 가게였다. 그 사이 ‘영화의 날’(1991년 10월) 행사와 1958년 첫 개봉이후 11년 만에 다시 리바이벌하는 하한수 감독의 <눈 나리는 밤>(1969), 조문진 감독의 <두 아들 2>(1981)에 출연하기 위해 잠시 귀국하기도 했다. 조미령은 무성영화시대에 처음 나온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 감독의 <춘향전>(1923)과 발성영화시대를 연 문예봉 주연의 <춘향전>(1935)에 이어 한국 독립 후 최초로 만든 <춘향전>(1955)의 히로인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필름이 보존되지 않아 후대의 최은희(성춘향, 1961)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미령은 분명 해방 후 60년대 초까지 선배인 최은희, 후배 김지미와 더불어 삼각구도를 이루며 한국영화의 중흥에 이바지한 소중한 존재였다.
‘문예영화’ 표방한 <해연>의 여학생 극장 정원제(5월 1일)가 실시되고 입장료 제한(8월 1일)이 폐지된 1948년 11월 21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해연(海燕: 일명 갈매기)>(예술영화사 제작)은 해방 후 <똘똘이의 모험>(1946), <민족의 새벽>(1947), <그들의 행복>(1947)에 이어 이규환 감독이 내놓은 네 번째 작품이다. 문예영화를 표방한 해방 이후 첫 문교부 추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당초 일제 말기에 <처의 윤리>(1941)와 <우러르라 창공>(1943) 두 편을 만든 김영화 감독이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이철혁과 손잡고 만들게 돼있었다. 그런데 과도정부의 초대 공보처 영화과장 제의를 받은 김영화 감독이 연출을 사양하였고, 김영화의 추천에 의해 이규환 감독이 대신 연출을 맡게 되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4) : 황금기」, 『중앙일보』, 1980.02.15) [사진] <해연>(이규환, 1948)에서 조미령(오른쪽) <해연>은 계모의 구박을 피해 언니 정애(남미림)가 일하는 동해안의 소년원을 찾아온 여학생(정숙)이 말썽을 부리는 문제아들을 보고 그곳에 남아 봉사하며 계도한다는 얘기다. 그 여주인공 정숙 역을 20세의 조미령이 맡았다, 서울관현악단의 연주와 남성합창단이 부르는 노래를 배경으로 소년원생들이 여선생과 함께 곡괭이질 하는 마지막 장면이 뜻하듯이, <해연>은 국가건설기의 과업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 준다. 이 영화의 언니 애인 역으로 등장하여 서울에 올라가도록 만든 박학은 그 뒤 월북한 후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극영화) <내 고향>(1949)에 출연했다. 춘향 역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르다 한동안 영화계와 멀어져 있던 조미령이 다시 은막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7년 만인 19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부터였다. 그 사이 조미령은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의 창단 동인으로 활약했다. 아울러 그녀의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16년의 차이가 나는 <해연>의 프로듀서 이철혁과 결혼한 것이다. 스물두 살 때였다. 그러나 조미령이 처음부터 흔쾌하게 춘향 역으로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이규환 감독의 회고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8): ‘춘향물색’」, 『중앙일보』, 1980.02.19) 에 따르면, 이 역할은 당초 신인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땅한 얼굴을 찾기 위해 그는 유장산 촬영기사와 함께 신촌 이화여대 정문 앞으로 갔다. 몇 시간을 드나드는 학생들을 살펴봤으나 마땅한 후보가 눈에 들어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그 대안으로 키가 작아 제쳐두었던 조미령을 불러내기로 한 것이다. 이 감독은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신바닥을 10센티미터 가량 높이기로 하였다. 다행히 긴 치마가 이를 가려주었다. <춘향전>의 촬영이 시작된 것은 1954년 7월부터였다. 원작에 나오는 남원의 광한루가 아닌 풍광과 촬영 조건이 좋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冷泉洞)에서였다. 그런데 2주일 뒤 장마가 시작되면서 촬영이 중단되고 자금의 압박까지 받아 고리대금을 끌어다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9월 중순이 되어서야 촬영을 마친 <춘향전>은 2시간 15분(필름 길이 1만2천자) 분량의 편집과 명창 임방울, 박초월의 ‘춘향가’가 들어간 녹음과정을 거쳐 이듬해 1월 6일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그 결과 밀려드는 관객들로 하여 세 차례나 상영기한이 연장되며 24일까지 18만 여명을 동원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화제의 영화 춘향전, 한국영화사상 초유의 힛트」, 『한국일보』, 1955.12.06) 극장이 개관된 이래 최대 인파였다. 더욱이 <춘향전>은 이에 앞서 시행된 정부의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1954년)’라는 혜택까지 누려 제작자에게 돈더미를 안겨 주었다.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 촬영현장에서 조미령, 왼쪽은 이규환 감독 일반적으로 춘향이라면 갸름한 얼굴에 날씬한 키를 연상하기 쉬우나 조미령이 꾸며 보인 춘향은 그저 야무진 일편단심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금주의 스타 조미령」, 『한국일보』, 1955.02.0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주인공 이민과 함께 일약 영화계의 정상급 배우로 떠올랐다. 여기에는 아역 출신 셔리 템플이 결혼 후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춘 것과는 달리 소녀시절부터 ‘극장에서 크고 화장대에서 자라난 체험’이 큰 힘이 되었다. 조미령은 뒤이어 <춘향전>의 조감독 유현목이 첫 메가폰을 잡은 <교차로>(1956)를 비롯하여 <단종애사>(전창근, 1956), <여성의 적>(김한일, 1956),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 등 4편에 출연하게 된다. 이 가운데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시집가는 날>의 하녀 입분이 역이었다. 욕심 많은 맹진사(김승호)가 딸과 혼담이 오가는 세도가의 아들(최현)이 절름발이라는 말에 속아 대리 신부로 내세우는 바람에 행운을 잡게 된 여주인공이다. 더욱이 이 풍자극이 국내 최초로 해외영화제(제4회 아시아영화제 특별 희극상)에서 수상하면서 그 후광마저 입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미령의 연기는 무난했으나 신부다운 신선미가 없는 게 결점” (이봉래, 「희극영화의 가능성, 영화 ‘시집가는 날’에서」, 『조선일보』, 1957.02.19) 이라는 평을 듣는 수준이었다. [사진]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의 한 장면 그런데 김기영 감독의 <여성전선>과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이상 1957)에 이르면서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성전선>의 주인공 옥란 역이 현대여성의 타산적인 행위를 잘 표현 (김규대, 「발전의 소지 개척, 영화 ‘여성전선’에서」, 『조선일보』, 1957.03.09) 했다면, <아리랑>의 여동생 영희 역은 ‘시달림을 받는 처녀로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오빠의 친구이자 애인인 윤현구(윤일봉)에게 말하는 대사가 퍽 세련되었다는 평가가 따랐다. [사진] <아리랑>(김소동, 1957) 촬영현장에서 조미령, 왼쪽에서 두 번째는 상대역인 배우 윤일봉,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감독 김소동 이 무렵 그녀의 대중적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월간 대중지 『희망』(1957년 8월호)과 영화잡지 『국제영화』(1958년 8월호)가 독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희망』은 조미령이 주증녀와 양미희를, 『국제영화』는 주증녀와 최은희를 제치고 인기배우 제1위로 집계했다. 남배우 1위는 김동원과 최무룡이었다. 조미령이 다수표를 얻은 데는 왜소한 청순미가 관객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