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미녀
- 감독
- 김인식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이사비, 김혜수, 김태우, 윤찬, 한정수, 김난휘, 김영애, 박준명, 조동혁, 서윤아, 임지훈, 도용구, 진명선, 정인기, 이창, 노승진, 조문, 최유민, 노혜인, 노혜은, 박종무, 한재혁, 최창일, 오승조, 구미옥, 양지선, 채은석, 이미연, 김무령, 김추월, 정인성, 윤희현, 박보연, 소익수, 안성현, 곽경묵, 이철혁, 조경환
불량소녀 역할로 변신 시도 이후 조미령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십대의 반항>(김기영, 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1959),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 <이별의 종착역>(박영환, 1960), <박서방>(강대진, 1960), <지상의 비극>(박종호, 1960), <마부>(강대진, 1961), <에밀레종>(홍성기, 1961), <골목안 풍경>(박종호, 1962), <견습부부>(이봉래, 1962), <원효대사>(장일호, 1962), <인목대비>(안현철, 1962), <아빠 안녕>(최훈, 1963), <로맨스가족>(최영철, 1963), <혈맥>(김수용, 1963), <신식할머니>(백호빈, 1964), <홀어머니>(홍은원, 1964) <비무장지대>(박상호, 1965), <주홍 스카트>(이봉래, 1965), <사랑보다 강한 것>(이규웅, 1966), <나운규의 일생>(최무룡, 1966), <역마>(김강윤, 1967), <안방마님>(고영남, 1967), <로맨스 마마>(최인현, 1968), <몽땅 드릴까요>(유현목,1968), <춘원 이광수>(최인현, 1969), <두 아들 2>(조문진, 1981) 등에 출연했다. [사진] <신식 할머니>(백호빈, 1964)에서 조미령 <아들의 심판>(1960, 안현철)에서는 기생(황정순)의 딸로, <원효대사>(62, 장일호)에서는 원효(최무룡)를 따르는 아사다로, <에밀레종>에서는 명종의 완성을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리는 참마루(김진규)의 아내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십대의 반항>(1959)을 전후하여 배역의 변화를 꾀한다. 숏커트의 헤어스타일로 건달과 사귀는 뒷골목의 불량소녀(필녀)에서 영문 주간지 『타임』을 읽고 가족들에게 성문제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신식 할머니>(1963)의 노인으로, ‘여존남비’를 앞세워 전통적인 삶을 거부하는 여성잡지의 독신 <여사장>(1959) 요안나로 나타난다. [사진] <여사장>(한형모, 1959)에 출연한 조미령, 왼쪽은 상대역인 배우 이수련 이울러 그녀는 이지적이기보다는 백치미를 추구한 작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졸지에 맹진사댁 규수를 대신하여 꽃가마를 타게 된 <시집가는 날>의 대리 신부는 물론, 남편에게 얻어맞고 친정으로 쫓겨 온 <마부>의 벙어리 맏딸(옥례), 재취를 미끼로 구두쇠 영감(김승호)의 전대를 훔치고 도망간 <혈맥>(김수용, 1963)의 벙어리 여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진] <혈맥>(김수용, 1963)에서 조미령, 오른쪽은 배우 김승호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미령은 현대적인 양장보다는 가냘픈 선의 맵시가 드러나는 전통적인 한복 차림이 더욱 돋보인다는 점이다. 학업마저 포기한 여덟 살 소녀의 도전 조제순(趙濟順)이 본명인 조미령은 1929년 2월 4일 경남 마산 출신이다. 일설에는 서울 효자동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덟 살 때 연극 팬인 언니의 권유로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 ‘청춘좌’에 들어가 <임자 없는 자식들>(1937)로 첫 발을 디뎠다. 김승호의 연극 데뷔작이기도 하다. 『한국연예대감』(1962, 성영문화사) 등 일부 인쇄물에는 중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다. (「비약을 꿈꾸는 여우 조미령, 그는 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나」, 『한국일보』, 1958.11.02) 여덟 살 때 이미 극단(청춘좌)에 들어가 동양극장 후반기의 최대 히트작 <어머니의 힘>(1943, 이서구 원작)에 출연하는 등 해방이 될 때까지 11년 동안 무대생활을 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조미령은 그 뒤 <해연(갈매기)>(1948)으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으나 6.25전쟁과 결혼으로 화면에 얼굴을 비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 등 연극 단체에서 활약했다. 서울 신당동에 신접살림을 마련하고 두 남매를 키우는 일에만 매달리던 조미령이 <춘향전>으로 다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해연> 이후 5년 만이었다. 남편이 전주(錢主)를 끌어들여 만든 이 영화는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미령의 실신소동이다. 여배우 숙소에 밥을 지어 나르던 중년의 아낙네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 소동은 의처증이 있는 이철혁이 아내가 남주인공인 이민과 심상치 않는 관계로 의심한 데서 비롯되었다. 화가 난 그가 집어 던진 목침이 조미령의 뒷머리에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숙소에 있던 석금성(월매 역) 등 배우의 간호로 한참 뒤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9)] 난산」, 『중앙일보』, 1980.02.20.)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 왼쪽은 이도령을 맡은 상대 배우 이민 그런 남편이 그로부터 3년이 채 안된 1958년 3월 16일 밤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당시 46세였다. (「문화소식, 이철혁씨 급서」, 『서울신문』, 1958.03.19) 장례는 20일 아침 열시부터 ‘영화인동지장’(장의위원장 안종화)으로 고인의 자택인 신당동 앞마당에서 거행되었다. (「내외문화단신, 영화인 동지장으로」, 『한국일보』, 1958.03.20)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영화출연을 삼가던 조미령이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화랑 감독의 코미디 <사람팔자 알 수 없다>(1958)를 전후한 시기였다. 잇따라 중매결혼을 반대하고 자유결혼을 구가하는 <자유결혼>(1958, 이병일)의 셋째 딸 역을 맡아 종전과 다른 활달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박암 사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을 들어온 조미령은 남편이 죽은 지 4년이 채 안 돼 하와이 이민 2세 최동원과 결혼(1962년)하고 6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 역시 김소영, 김신재 등 선배배우와 마찬가지로 말년을 타국에서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볼 수 있는 뉴욕으로 옮겨 10여년을 지내고 1988년 아들딸이 사는 하와이로 건너가 토산품점을 경영했다. 하와이 민속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지 2천 4백여 평, 건평 1백 12평 규모의 큰 가게였다. 그 사이 ‘영화의 날’(1991년 10월) 행사와 1958년 첫 개봉이후 11년 만에 다시 리바이벌하는 하한수 감독의 <눈 나리는 밤>(1969), 조문진 감독의 <두 아들 2>(1981)에 출연하기 위해 잠시 귀국하기도 했다. 조미령은 무성영화시대에 처음 나온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 감독의 <춘향전>(1923)과 발성영화시대를 연 문예봉 주연의 <춘향전>(1935)에 이어 한국 독립 후 최초로 만든 <춘향전>(1955)의 히로인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필름이 보존되지 않아 후대의 최은희(성춘향, 1961)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미령은 분명 해방 후 60년대 초까지 선배인 최은희, 후배 김지미와 더불어 삼각구도를 이루며 한국영화의 중흥에 이바지한 소중한 존재였다.
‘문예영화’ 표방한 <해연>의 여학생 극장 정원제(5월 1일)가 실시되고 입장료 제한(8월 1일)이 폐지된 1948년 11월 21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해연(海燕: 일명 갈매기)>(예술영화사 제작)은 해방 후 <똘똘이의 모험>(1946), <민족의 새벽>(1947), <그들의 행복>(1947)에 이어 이규환 감독이 내놓은 네 번째 작품이다. 문예영화를 표방한 해방 이후 첫 문교부 추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당초 일제 말기에 <처의 윤리>(1941)와 <우러르라 창공>(1943) 두 편을 만든 김영화 감독이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이철혁과 손잡고 만들게 돼있었다. 그런데 과도정부의 초대 공보처 영화과장 제의를 받은 김영화 감독이 연출을 사양하였고, 김영화의 추천에 의해 이규환 감독이 대신 연출을 맡게 되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4) : 황금기」, 『중앙일보』, 1980.02.15) [사진] <해연>(이규환, 1948)에서 조미령(오른쪽) <해연>은 계모의 구박을 피해 언니 정애(남미림)가 일하는 동해안의 소년원을 찾아온 여학생(정숙)이 말썽을 부리는 문제아들을 보고 그곳에 남아 봉사하며 계도한다는 얘기다. 그 여주인공 정숙 역을 20세의 조미령이 맡았다, 서울관현악단의 연주와 남성합창단이 부르는 노래를 배경으로 소년원생들이 여선생과 함께 곡괭이질 하는 마지막 장면이 뜻하듯이, <해연>은 국가건설기의 과업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 준다. 이 영화의 언니 애인 역으로 등장하여 서울에 올라가도록 만든 박학은 그 뒤 월북한 후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극영화) <내 고향>(1949)에 출연했다. 춘향 역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르다 한동안 영화계와 멀어져 있던 조미령이 다시 은막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7년 만인 19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부터였다. 그 사이 조미령은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의 창단 동인으로 활약했다. 아울러 그녀의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16년의 차이가 나는 <해연>의 프로듀서 이철혁과 결혼한 것이다. 스물두 살 때였다. 그러나 조미령이 처음부터 흔쾌하게 춘향 역으로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이규환 감독의 회고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8): ‘춘향물색’」, 『중앙일보』, 1980.02.19) 에 따르면, 이 역할은 당초 신인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땅한 얼굴을 찾기 위해 그는 유장산 촬영기사와 함께 신촌 이화여대 정문 앞으로 갔다. 몇 시간을 드나드는 학생들을 살펴봤으나 마땅한 후보가 눈에 들어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그 대안으로 키가 작아 제쳐두었던 조미령을 불러내기로 한 것이다. 이 감독은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신바닥을 10센티미터 가량 높이기로 하였다. 다행히 긴 치마가 이를 가려주었다. <춘향전>의 촬영이 시작된 것은 1954년 7월부터였다. 원작에 나오는 남원의 광한루가 아닌 풍광과 촬영 조건이 좋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冷泉洞)에서였다. 그런데 2주일 뒤 장마가 시작되면서 촬영이 중단되고 자금의 압박까지 받아 고리대금을 끌어다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9월 중순이 되어서야 촬영을 마친 <춘향전>은 2시간 15분(필름 길이 1만2천자) 분량의 편집과 명창 임방울, 박초월의 ‘춘향가’가 들어간 녹음과정을 거쳐 이듬해 1월 6일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그 결과 밀려드는 관객들로 하여 세 차례나 상영기한이 연장되며 24일까지 18만 여명을 동원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화제의 영화 춘향전, 한국영화사상 초유의 힛트」, 『한국일보』, 1955.12.06) 극장이 개관된 이래 최대 인파였다. 더욱이 <춘향전>은 이에 앞서 시행된 정부의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1954년)’라는 혜택까지 누려 제작자에게 돈더미를 안겨 주었다.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 촬영현장에서 조미령, 왼쪽은 이규환 감독 일반적으로 춘향이라면 갸름한 얼굴에 날씬한 키를 연상하기 쉬우나 조미령이 꾸며 보인 춘향은 그저 야무진 일편단심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금주의 스타 조미령」, 『한국일보』, 1955.02.0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주인공 이민과 함께 일약 영화계의 정상급 배우로 떠올랐다. 여기에는 아역 출신 셔리 템플이 결혼 후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춘 것과는 달리 소녀시절부터 ‘극장에서 크고 화장대에서 자라난 체험’이 큰 힘이 되었다. 조미령은 뒤이어 <춘향전>의 조감독 유현목이 첫 메가폰을 잡은 <교차로>(1956)를 비롯하여 <단종애사>(전창근, 1956), <여성의 적>(김한일, 1956),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 등 4편에 출연하게 된다. 이 가운데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시집가는 날>의 하녀 입분이 역이었다. 욕심 많은 맹진사(김승호)가 딸과 혼담이 오가는 세도가의 아들(최현)이 절름발이라는 말에 속아 대리 신부로 내세우는 바람에 행운을 잡게 된 여주인공이다. 더욱이 이 풍자극이 국내 최초로 해외영화제(제4회 아시아영화제 특별 희극상)에서 수상하면서 그 후광마저 입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미령의 연기는 무난했으나 신부다운 신선미가 없는 게 결점” (이봉래, 「희극영화의 가능성, 영화 ‘시집가는 날’에서」, 『조선일보』, 1957.02.19) 이라는 평을 듣는 수준이었다. [사진]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의 한 장면 그런데 김기영 감독의 <여성전선>과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이상 1957)에 이르면서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성전선>의 주인공 옥란 역이 현대여성의 타산적인 행위를 잘 표현 (김규대, 「발전의 소지 개척, 영화 ‘여성전선’에서」, 『조선일보』, 1957.03.09) 했다면, <아리랑>의 여동생 영희 역은 ‘시달림을 받는 처녀로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오빠의 친구이자 애인인 윤현구(윤일봉)에게 말하는 대사가 퍽 세련되었다는 평가가 따랐다. [사진] <아리랑>(김소동, 1957) 촬영현장에서 조미령, 왼쪽에서 두 번째는 상대역인 배우 윤일봉,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감독 김소동 이 무렵 그녀의 대중적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월간 대중지 『희망』(1957년 8월호)과 영화잡지 『국제영화』(1958년 8월호)가 독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희망』은 조미령이 주증녀와 양미희를, 『국제영화』는 주증녀와 최은희를 제치고 인기배우 제1위로 집계했다. 남배우 1위는 김동원과 최무룡이었다. 조미령이 다수표를 얻은 데는 왜소한 청순미가 관객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해방공간의 영화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으로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의 감격에 조선인들의 만세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직접 그린 태극기가 방방곡곡에 물결쳤다. 조선의 영화인들 역시 그 기쁨을 함께했는데, 직접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가 해방의 감동을 기록하는 것으로 응답한다. 물론 그들은 일제강점기 말 유일한 영화사이자 국책영화사였던 사단법인 조선영화사 소속이었고, 카메라 역시 ‘법인 조영’의 광희동 촬영소 창고에서 꺼낸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영화인들이 기록한 영상들은 <해방뉴스> 시리즈로 공개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어지럽게 진행된 좌와 우의 갈등은 영화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법인 조영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영화건설 본부가 1945년 9월 24일 창립됐고, 11월 5일에는 좌익 영화인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이 결성됐다. 12월 6일에는 두 조직이 해산하며 합쳐진 조선영화동맹으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은 영화인들의 좌우 분열과 통합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각 조직의 면면을 들여다본다면 인력과 기술을 더 중요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는 영화 제작 환경의 특수성을 읽어낼 수 있다. 지도부 외 구성원들은 좌우익 이데올로기와 정확히 밀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친일 부역 문제나 좌우익 갈등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조선영화계의 생존 그 자체였다. 해방기 영화계의 상황은 미국영화의 범람과 조선영화의 위기로 요약된다. 1948년 4월 시점의 「서울신문」 기사에 의하면, 1945년 11월부터 1948년 3월까지 미국 극영화가 422편, 미국의 뉴스영화는 298편이 수입되었는데, 그중 극영화 400편, 뉴스 250편이 중앙영화배급사(CMPE)의 영화였다. 당시 일본 도쿄에서 온 ‘중배’의 조선사무소가 미군의 보호를 받고 있어 미군정 소속인지 알았다는 증언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9대 영화사의 배급 대행 기관이었던 중배는 해방기 남한에서 미국이 전파하는 이데올로기의 첨병 역할을 했다. 같은 기간 조선 극영화는 17편에 불과했다. 해방 후 첫 극영화로 이규환의 <똘똘이의 모험>(1946)이 개봉하고,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가 상징적인 의미에서 ‘해방영화’로 인정받으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영화 제작의 기본이라 할 필름 구하기도 쉽지 않아 극영화 만들기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연극 무대에서 영화 장면을 활용하는 연쇄극이 다시 만들어지는가 하면, 16mm 필름에 변사를 써야 하는 무성영화들이 성행할 정도였다. 현재 필름이 보존되어 있는 영화 중에서, 16mm 발성으로 제작된 <청춘행로>(장황연, 1949), 16mm 무성으로 만들어진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48)이 대표적이다. ‘예술영화’라는 지향과 ‘건국 프로파간다’라는 현실 영화 <해연>은 1947년 말 촬영을 시작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에 완성되었고, 해방 이후 첫 문교부 추천영화로 인정받으며 11월 21일 중앙극장에서 개봉했다. 당시 일본 오사카부의 재일조선인단체에서 수입을 진행한 덕분에, 국내에서는 사라진 필름이 2014년 9월 고베영화자료관에서 발굴되었고, 개봉된 지 60년도 훌쩍 지난 시점인 2015년 7월에 다시 공개되었다. <해연>은 여러 의미에서 해방기 영화계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예술영화사는 동인제 성격의 영화사로 프로듀서 이철혁, 각본 이운룡 등 구성원 대부분이 연극 무대 출신이었다. 한편 촬영 현장은 김동규 등 배우들을 제외하면,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영화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로 감독 데뷔한 이규환이 연출을 맡았고, 촬영 양세웅, 녹음 이필우, 조명 고해진 등이 참가했다. 애초 <해연>의 감독을 맡기로 한 이는, 일본 도호영화사 출신으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법인 조영’의 전신)에서 국책영화 <우러르라 창공>(1943) 등을 연출한 김영화였다. “해방 후 3년간 자중하고 있던”(「예술영화」, 14쪽) 그가 과도정부 영화 과장으로 취임하면서 이규환이 대신 연출을 맡게 된 것이다. 식민지 조선영화 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규환은 <똘똘이의 모험>(1946. 09. 07. 개봉), <민족의 새벽>(1947. 04. 21. 개봉), <그들의 행복>(1947. 12. 02. 개봉)을 연이어 개봉하며 해방기 영화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일제 말기 법인 조영에 참가하지 못해 평택 비행장에서 징용 생활을 하다 해방을 맞았는데, 이후의 활발한 활동 배경에는 일제 협력에 대한 부채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개인의 판단과 영화계의 일치된 평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해연>의 제작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점은, 예술영화사가 이 영화의 착수 시점과 완성 시점에 잡지 「예술영화」와 「해연」을 각각 발간했다는 점이다. 영화사의 명칭 그 자체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들은 미국영화가 범람하고 ‘영화다운 영화’는 제작되지 못하는 해방기 상황에서, ‘예술영화’의 이론적 고찰과 실천을 모두 겨냥하며 잡지/영화를 동시에 내놓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이 오롯이 예술영화로만 수렴될 수 있었을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야 하는 바로 그때, 영화 역시 다른 매체들과 발맞춰 ‘건국 프로파간다’라는 노선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 <의사 안중근>(이구영, 1946), <윤봉길 의사>(윤봉춘, 1947) 등 일제강점기 애국지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들이 만들어졌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경찰 조직의 후원을 받은 <밤의 태양>(박기채, 1948), <수우>(안종화, 1948) 등 ‘경찰영화’가 다수 제작되었다. 계몽과 건국을 키워드로 한 ‘한국’영화의 등장은, 새로운 국가 만들기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몽타주와 할리우드 스타일의 공존 기본적으로 <해연>은 건국 도상의 조선 사회와 민중이 체현해야 할 가치들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 혼란한 정국을 틈타 모리배 짓을 일삼는 철수(박학)와 헤어지고 새로운 국가 건설의 사명으로 감화원 선생을 맡기 위해 떠나는 정애(남미림)의 모습이 압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어 영화는 불량소년들을 모아 계도하는 감화원(실제 촬영은 부산 수영소년학교)을 배경으로 새로운 국민 만들기를 묘사한다. 그리고 계모 때문에 가출해 불량소년이 된 수길과 계모의 구박을 피해 언니 정애를 찾아온 정숙(조미령)이 남매처럼 가까워지는 것을 통해 대중을 위한 멜로드라마적 사건을 만들어낸다. 식민지 영화감독 이규환이 연출한 <해연>이 영화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해방 이전 조선영화의 영화문법을 대표하는 소비에트 몽타주(Soviet Montage)와 해방 이후 미국화를 상징하는 고전 할리우드 영화(Classical Hollywood Cinema)의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전자는 감화원 실습지에서 원생들의 노동 장면을 통해 확인된다. 시나리오의 “괭이로 파는 소년, 삽으로 흙을 떠 던지는 소년들! / 박선생과 정애도 같이 일을 한다 / 정애의 고운 얼굴에 구슬 같은 땀방울! / 소년들의 합창소리! / 하늘에 나는 갈매기! / 멀리 반짝거리는 황금빛 바다물결!”이라는 문자는, 영화에서는 웅장한 남성합창단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선생들과 원생들이 황무지에서 곡괭이질하는 모습과 세찬 파도의 쇼트가 리듬감 있게 병치되는 것으로 영상화된다. 감독의 예술성과 국가 건설이라는 키워드가 몽타주 기법으로 만난 것이다. 한편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연속편집(continuity editing)이 영화 전반에 안정적으로 구사되고 있는 것도 무척 인상적이다. 특히 고전 할리우드 방식의 ‘몽타주 시퀀스’ 기법을 활용해, 수길이 공중으로 핸드백을 던지는 쇼트에 바로 이어 빠른 음악과 함께 해방 후 대도시 서울의 타락한 풍경과 소매치기 소년으로 변해버린 수길의 모습이 속도감 있는 쇼트들로 배치되는 장면이 그렇다. 완성도를 별도로 하자면, 영화의 말미 떠나는 정숙과 따라가는 수길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할리우드 스타일의 교차편집을 이용한다. 이처럼 이규환은 이 영화가 처한 정치적 기반에 동의하면서 예술영화 운동을 실천하는 주체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해연>은 예술영화를 지향하면서도 ‘건국 프로파간다’ 서사의 자장 속에 머무른다. 해방기에서 6·25전쟁기로 오리지널 영화음악을 사용한 것이 크게 평가 받는 등 <해연>이 개척한 예술성은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과 <푸른 언덕>(유동일, 1949) 등의 작품으로 이어졌고, 1948~49년 한국영화계는 매해 20편의 극영화를 내놓으며 제작 환경이 안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시련은 다시 닥쳐왔다. 6·25전쟁의 발발로 모든 영화 제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인들은 1·4 후퇴 이후 국방부 촬영대 등 군관의 기록영화 제작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나간다. 1952년 이후 피란도시 대구 등지에서는 <태양의 거리>(민경식, 1952) 같은 극영화도 제작되고 극장에서 개봉되어, 피란지 관객들이 전쟁의 아픔과 고단한 일상을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가 대중문화의 총아로 급부상하는 기반은 이때 마련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