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
- 감독
- 이태진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한해인, 강영구, 박신아
조선극장 흥행광고 3호 중 일부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조선극장 은 단성사 와 더불어 식민지기의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으로 손꼽혔던 곳이다. 그러나 ‘경성의 일류 극장’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조선극장은 유독 ‘스캔들’의 진원지로 호명될 때가 많았다. 객석에서 발생한 삐라 살포 사건이나 극장 주위에 진을 친 폭력단들의 범죄행위도 여러 차례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지만, 무엇보다 빈번했던 것은 극장 경영권을 둘러싼 내홍 에 얽힌 이야기들이었다. 실제로 조선극장의 운영 기록(1922~1936)을 살펴보면, 일시 휴관을 선언하고 극장 문을 닫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주된 원인은 경영권 분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며 극장이 재개관할 때는 대개 새로운 경영주의 취임 소식을 동반하곤 했다. [1] 이는 단성사가 경영주 박승필 의 수완과 카리스마에 힘입어 안정적인 경영 체계를 구축해 나갔던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조선극장의 경영권 분쟁은 탄생 시점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던 사태였다. 동양생명보험회사 경성지부장으로 근무하던 일본인 시택근차랑(矢澤近次郞)은 얼마간의 자금을 모아 사업에 뛰어들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때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업 파트너가 바로 황원균이었다. 두 사람은 극장업을 시작해보기로 의기투합한 후 본격적인 절차에 착수했다. 시택근차랑이 자금을 대고, 황원균이 흥행장 건축허가를 비롯한 실무를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인 지배권은 시택근차랑에게 있었겠지만 문제는 서류상의 소유주가 황원균의 이름으로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시택근차랑은 명의변경을 요구했고, 황원균은 영업 개시 전에 명의변경을 하면 신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이후 시택근차랑은 건물 소유권을 동경 건물회사에 판매한 후 조선극장에서 발을 뺐다. 다만 동경 건물회사는 조선극장의 흥행권, 즉 직접적인 운영에 관여하지는 않았고,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담당한 것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조선인 흥행주들이었다. 점차 흥행권은 소유권과 별개의 권리처럼 유통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양도했던 사례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2] 1926년에는 변사 김조성 이 새로운 흥행주로 취임하게 되었으나 극장 자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아 관원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3개월 만에 물러나게 되었고, 차영호, 현철, 김영식, 이필우 , 이태진 등이 공동 혹은 개인 명의로 경영권을 승계했으나 대개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만큼 1920년대 조선극장의 경영은 불안정했던 것이다. 심지어 1928년 8월에는 연이은 휴관사태 속에 위기의식을 느낀 관원들이 공동명의로 흥행주 역할을 맡아 1년간 경영을 이어나가기도 했을 정도였다. 조선극장의 경영이 비교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안봉호와 신용희 가 이태진으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1929년부터의 일이었는데, 안봉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영권을 넘기고 손을 뗐기에 실질적으로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행사했던 인물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신용희였다고 볼 수 있다. (좌) 조선극장의 모습 (사진: “ 조선극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 조선극장 개관 관련 신문 광고 (사진: “ 개장피노 ”, 《동아일보》, 1922. 11. 7.) 한편 조선극장의 경영구조는 1931년부터 기존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1931년 7월에 창립한 조선흥행주식회사 는 흥행업에 포함된 제반 사업들을 모두 아우르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즉, 제작, 배급, 상영의 수직적 통합 을 통해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극장은 개인 경영 방식을 벗어나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직영관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사장은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사업가 정완규가 맡았으며, 안봉호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정현국은 전무취체역을 담당했다. 그리고 신용희는 조선극장 지배인과 조선흥행주식회사 상무취체역을 겸임하게 되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창립과 직영관 제안은 조선극장 입장에서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사안이었다. 발성영화로의 전환 과정에 직면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들은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무성영화보다 과중한 필름 대여료를 지불해야 했고, 장비 설비에도 목돈을 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전면적인 발성영화 전환을 천명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관객들의 취향이 무성영화를 ‘재래의 저급 취향’으로 낙인찍는 경향이 현저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무조건 무성영화의 재탕 상영을 반복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금 8만원을 들여 출범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 줄 수 있었으며, 실제로 조선극장은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던 단성사보다 적극적으로 발성영화 전환을 시도 하며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해 나갔다. 재계 공황의 영향으로 말 못 된 흥행계는 예년에 비하야 참경에 빠진 셈인데 더구나 영화계는 조금도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지 않고 다만 재삼 상영한 영화를 최염가의 관람료로써 상설관의 수명을 연장시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형편이었으나 기신양행(紀新洋行) 겸 조선극장의 지배인 신용희(申鎔熙) 씨가 일본에 갔다 오고 일본 동화상사(東和商事) 사장이 구라파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화상사 조선지점장인 고윤묵(高潤黙) 씨와의 회견으로 기신양행 측에서는 순전한 『토-키-』 배급 , 동화상사 측에서는 구라파 특작 무성영화 로써 영화배급전이 개시될 모양인데 무성영화 측에서는 이미 명작을 계약하야 수입 중이라 하며 기신양행 측에서는 조선극장에 불일간 『토-키-』영사기계를 장치하여 일반의 목을 놀래일 예상 인데 실패한 기왕에 일본제의 『토-키-』영사기계와는 달라서 이번의 것은 순미국제를 사드려 임이 『파라마운트』 회사의 『모로코』를 위시하야 『명작 토-키-』를 계약하였으므로 조선극장에서는 가을에는 얼마동안 『토-키-』 전문으로 흥행- 『단성사』에서는 무성구라파영화로써 영화전이 개시될 모양이라 한다. 기신과 조극 측에서는 과연 완전한 토-키-를 보여줄 것이며 동화상사 측에서는 과연 구라파의 명작을 가지고 『토-키-』의 새 진영을 돌파할지 일반 영화『팬』의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한다. - 기사, “금추 흥행계는 발성 무성 영화전 - 기신 측엔 토-키- 상사 측엔 무성”, 《조선일보》, 1931. 8. 25.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1 』, 1,114쪽. 1931년 가을 흥행 시즌 당시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보여준 노선은 명확하게 엇갈렸다. 단성사가 명작 무성영화 전문관을 표방하며 유럽산 특작 영화들을 전면에 배치하려 한 반면, 조선극장은 기신양행과 손을 잡고 “순전한 토키”들로 프로그램을 채우고자 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조선극장이 기왕의 일본제 발성영사기보다 훨씬 우수한 미국제 장비(RCA)를 전격적으로 사들였다는 점이다. 구매 시기를 고려할 때, 조선극장이 이처럼 공격적인 설비 투자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자본력에 힘입은 바 컸다고 볼 수 있다. 조선극장과 달리 유럽산 특작 무성영화를 전면에 내세운 단성사의 모습 (자료 출처: 『大京城都市大觀』(朝鮮新聞社, 1937), 映畫常設館ノ部 / 사진: “ 단성사 ”,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역사박물관)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상반된 행보는 여러모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싸움의 승패는 곧 발성영화 전환 문제에 있어 향후의 행보를 결정지을 만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승부는 발성영화 전환이라는 과제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임을 각인 시키는 결과로 낙착되었다. 이듬해인 1932년 4월에 단성사와 우미관은 발성영사기를 구매하고 토키의 상영 비중을 늘려나가며 뚜렷한 노선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932년 7월에 지난 1년간의 사업 융창을 자축하는 의미의 기념 상영회를 열었을 만큼 조선극장과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렇기에 1932년 10월에 조선극장 지배인 신용희가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은 것 은 굉장히 갑작스러운 조치처럼 여겨질 만한 일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 측은 신용희가 배임 행위를 저질렀다고 지목하면서 지배인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했는데, 신용희가 격렬하게 반발함에 따라 조선극장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일시 휴관 사태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보도된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안내』 계약이 발단 / 정(鄭), 신(申) 양파로 대립 / 지배인은 건물 소유자와 악수 / 알력의 전말 내용 조선극장은 소화 四년 九월에 건물 소유자인 부내 황금정(黃金町) 二정목 五十九번지 동경건물주식회사(東京建物株式會社)와 임차계약(賃借契約)을 안봉호(安奉鎬) 씨가 체결하고 보증금(保證金) 六천 五백원을 내게 되었는데 그 후 소화 五년 七월에 정현국(鄭鉉國) 씨가 一만원을 내고 영업권리권(營業權利權)을 양수(讓受)하여 주식회사로 조직 후 조선흥행주식회사(朝鮮興行株式會社)를 조직한 나머지 정완규(鄭完圭) 씨가 사장(社長) 으로 취임하고 신용희(申鎔熙) 씨는 지배인(支配人) 으로 취임하여 정씨는 금전에 관한 일절 책임을 지고 신씨는 영업에 책임을 맡아 이래 경영을 하여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날로 업적을 나타내어 작년에는 二, 三천원의 순이익까지 보게 되어 주주들 간에 상당한 배당까지 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인생안내(人生案內)라는 영화를 상영하려고 영화배급소와 계약 체결을 할 당시 조선극장 간부의 승낙 없이 자기 개인으로 약 四백원에 계약을 하여 가지고 극장 간부와는 五할 배당을 하자는 조건을 제출하였는바 이에 극장 간부 측에서는 동 극장에 지배인의 지위에 잇는 사람으로 당연히 극장을 대표하여 계약을 체결할 것인데 불구하고 개인의 계약이라는 것은 배신 행동이라 하야 지난달 중순경에 신씨에게 해임장을 발송 하게 되었다. 이에 분개한 신(申)씨는 극장 건물 계약관계자인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실을 말하게 되자 전기 목미 씨는 신씨를 지지(支持)하는 터이라 결국은 정씨 일파와 신씨 일파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게 되어 페관의 운명에까지 이른 것 이라고 한다. 관객을 위하야 애석한 일 - 사장 정완규 씨 담(談) 금번 분규사건에 대하여 사장 정완규(鄭完圭)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에서 몇 개 안 되는 흥행계에 극장 간부들의 분쟁으로 휴관까지 하게 된 것은 조선흥행계를 위하야 일반 사회 각 방면 인사에게 진실로 미안하기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간부는 어떠한 일이 있든지 양보를 하고 원만 해결을 지으려 합니다. 극장세만 하야도 九월에 七백 五十원 하든 것을 十월에 八백원을 내라고 하야도 아모 이의도 업시 그대로 다 지불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회사 규정에 의하야 부정한 행동이 있는 지배인 하나를 처치하엿다고 극장 계약자가 흥행을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횡포한 일 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번에 처분한 신 지배인에 대하여도 처분을 관대하게 하기 위하야 九백원이라는 퇴직금까지 보내었습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목미(木尾) 씨가 극장을 사용치 못하게 한다는 것은 신씨와 어떠한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일반대중을 위하여 너무나 애석한 일입니다. 장래를 위하야 해결에 노력 - 지배인 신용희 씨 담(談) 일찍이 동 극장의 지배인으로 있던 신용희(申鎔熙) 씨는 말하되 금번에 소위 배임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번 인생안내(人生案內)를 계약하였을 당시에 四백원을 내 돈을 내어 계약을 하였다는 것이나 그것은 당시 간부들이 너무나 사진값이 비싸다고 계약하기를 주저하므로 만약 다른 극장에서 계약이나 하여 사진값이나 오르면 더욱 극장에 손해가 될 듯하기에 내가 먼저 계약을 한 것 입니다. 여하간 사실에 잘잘못은 어찌 되었든지 조선극장의 장래를 위하여 원만히 해결을 짓는 것이 좋을 듯하기에 해임장을 받고서도 정씨(鄭氏)를 방문하고 무조건으로 잘못하였다고 사과까지 하고 앞으로 사업을 계속하자고 하였으나 끝끝내 거절을 하므로 나는 부득이 극장 계약관계자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목미(木尾) 씨의 방침은 사리를 모르는 회사 당국과는 계약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며 회사라는 명칭을 떠나 개인으로 계약을 하고 싶다고 하는 중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미(木尾) 씨는 나를 신임하느니만큼 내가 빠지어 다른 사람과는 계약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중인데 현 간부 측에서는 나를 배척하니 앞으로 어찌될지 조선흥행계의 장래를 위하여 적지 아니한 걱정입니다 운운. - 기사, “『토키』영화의 전당 조선극장의 분규 - 휴관한 지 일개월에 아모 해결 업서”, 《매일신보》, 1932. 11. 28.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2 』, 1,382-1,383면. 사건의 발단은 한 편의 수입영화 계약을 둘러싼 이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소비에트 영화 <인생안내>(니콜라이 에크, 1931)의 흥행가치에 주목한 신용희는 간부들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개인 명의로 필름을 선구매했으며, 회사에는 추후에 수익금을 배분하리라고 통고했다. 그는 다른 극장과 경쟁이 붙어 필름 대여료가 폭등할까 우려했기에 불가피한 조치를 한 것이라 항변했지만,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이것이 엄연한 배임 행위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인생안내>가 신용희의 기대처럼 수익 창출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 부랑자 청소년들이 철도 노동자로 재탄생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한다는 이야기를 담아낸 <인생안내>는 ‘노력영웅’의 숭고한 희생을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을 뿐, 계급투쟁을 전면적으로 다룬 작품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신용희는 <인생안내>가 무난하게 검열을 통과할 것이라 보았고, 상영을 앞두고 주요 일간지에 특별광고를 커다랗게 게재했을 만큼 자신감을 보였다. [3] 그러나 <인생안내>는 개봉 다음 날 “사정에 의하야 중지”하게 되었다는 공지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린다. [4] 필름 검열은 통과했지만, 조선극장에서 자체 제작한 선전문이 문제시되어 압수됨에 따라 상영 불허 처분이 사후적으로 내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5] (좌) 조극 흥행광고 3호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우) <인생안내> 포스터 및 스틸 (사진: “Putyovka v zhizn( 1 , 2 )”, IMDb) 그러나 상영이 중지되었다고 해도 <인생안내>는 신용희가 개인 명의로 구입한 필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선극장 측의 손해가 아주 컸다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굳이 이 문제를 끄집어내어 신용희를 몰아내고자 했다. 아마도 이는 신용희의 개인 행동을 용인하게 된다면 장차 무척이나 불리한 선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극장업뿐 아니라 배급업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었기에, 신용희가 정상적인 배급 절차를 건너뛴 채 임의로 이익을 분배하게 되면 회사 측의 이익을 결정적으로 침해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위험의 싹을 미연에 잘라 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가 신용희를 쉽게 몰아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에 대해 완전한 장악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조선극장의 흥행권에 대해서는 일정한 처분 권한이 있었을지 몰라도, 최종적인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건물 소유주인 동경 건물회사 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해임장을 받은 신용희는 동경 건물회사 측 대리인을 맡았던 일본인 목미호지조(木尾虎之助)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고, 평소 신용희의 사업 수완을 신뢰했던 동경 건물회사는 즉각 극장 문을 닫으며 조선흥행주식회사를 압박했다. 동경 건물회사는 양자 간에 원만한 합의를 이루도록 종용했지만 신용희와 정완규의 협상은 끝내 결렬되었고, 조선극장은 조선흥행주식회사와 결별하는 길을 택한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투자가 주로 발성영화 상영 환경을 마련하는 데 집중되었으므로, 새롭게 설비된 장비들의 소유권 또한 조선흥행주식회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12월에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단성사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조선극장에 설비되어 있던 발성영사 상영 장비를 철거해 단성사로 옮겼다 . 단성사는 1932년 4월에 일제 발성영사기를 도입했지만, 음향이 희미하고 잡음이 많았기에 장비 개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이었다. 계약 체결 직후 단성사는 최신의 미제 RCA 상영기를 장만했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며 모리스 슈발리에 주연의 발성영화 <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Love Me Tonight) >(로우벤 마물리안, 1932)를 상영하게 되었다.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 포스터 및 스틸 (사진: “Love Me Tonight( 좌 , 우 )”, IMDb) 창졸간에 장비를 잃은 상황에서 신용희는 새롭게 영사기를 장만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때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 바로 극장 대관업 이었다. 1932년 12월에는 새롭게 창단한 명일극장과 문외극단이 조선극장에서 연달아 연극을 올리게 되는데, 이는 극장을 마냥 닫아둘 수만은 없었던 흥행주의 입장과, 명망 있는 큰 무대에 서기 원했던 신생극단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신용희는 1929년에 지배인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자체 레뷰단을 조직하여 공연을 올리고, 극단들에 무대를 대여해 주며 조선극장의 운영난을 타개해 나갔던 전력이 있었다. 영화 상영에 위기가 닥쳤을 때, 대관업을 적절히 병행하며 융통성을 발휘하는 데 능했던 그의 경영 노하우가 또 한 번 발휘된 순간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와 신용희의 갈등은 연예사업 종사자 간에 일어난 단순한 알력관계를 넘어 여러 흥미로운 논점들을 수면 위로 밀어 올린 사건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영화의 제작, 배급뿐만 아니라 상영까지 포괄 가능한 회사를 목표로 삼았으며, 이는 영화산업의 수직적 통합 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그러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신용희 해고사태가 함의하듯 경영권 (조선인) 과 소유권 (일본인) 이 분리된 식민지 극장의 특수성 은 이러한 통합을 불가능하게 한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신용희를 비롯한 조선인 극장의 경영자들이 발성영화 전환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서 대관업을 십분 활용 해 왔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즉, 1930년대 초반의 발성영화 전환기에 연극 흥행은 프로그램 운영의 윤활유 역할을 담당했으며, 극장업자들이 최소한의 자율성이나마 확보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 [1]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 7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2] 1929년에는 안봉호가 이태진으로부터 6,500원에 경영권을 인수했으며, 1930년에는 정현국이 안봉호로부터 1만원에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3] 조선극장 특별광고, 《동아일보》, 1932. 9. 1., 2면. [4] 조선극장 광고, 《동아일보》, 1932. 9. 3., 6면. [5] 이 선전문은 전량 압수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전해지는 “조극 흥행광고 3호”가 <인생안내> 특별편으로 구성되었으며, 9월 1일자로 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이 바로 문제가 된 선전문일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로 보는 일제강점기 극장문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20, 196쪽.) “조극 흥행광고 3호”는 <인생안내>의 예술성과 제작진의 우수성을 상찬하는 내용으로 서두를 꾸몄는데, 불온성을 지적할 만한 내용이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영화 줄거리에 대한 소개 역시 신문에 게재된 개요보다 약간 더 상세할 뿐 큰 차이가 없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인생안내>에 삽입된 노래들의 가사를 옮겨놓았던 부분이다. <인생안내>를 “젊은 노서아”의 太息이자 熱로 소개하면서 ‘권로가’, ‘유랑의 노래’, ‘철도사역’의 가사가 나열되고 있는데, “무로가 영원히 매장되도록” “진흙 속에 영원히 무너버리고저 한다”라는 선언이나, “ᄯᅡᆼ을 긁지만 말고 / 정말로 파 업흐라”라는 구호, “낡은 세계를 ᄲᅮ리채 / 단연히 잘나낼 것은 이 손이다” 등의 구절은 시각에 따라 직접적인 선동으로 해석될 만한 내용들이었다.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조선극장은 1922년 11월 6일 개관하여 1936년 6월 11일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인사동 입구에 위치했던 영화관이다. 조선극장의 설립자는 명월관 지배인 황원균(黃源均)이다. 그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11월, 독립운동 진영에 합류하기 위해 상해로 떠나려던 의친왕(義親王)의 행적을 일제경찰에 밀고하여 의친왕의 상해 망명을 좌절시킨 장본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경찰부장으로 승진한 치바 료(千葉了)는 의친왕의 행적을 제보하여 대동단(大同團) 단원들을 체포하는데 도움을 준 황원균에게 평소 바라던 극장 신설 허가를 내주었다. 뿐만 아니라 요코하마에 근거지를 둔 동양생명보험의 경성지사장 야자와 긴지로(矢澤近次郞)를 통해 극장 설립 자금까지 융통할 수 있게 도왔다. 황원균의 조선극장 설립 허가는 강점 이후 조선인에게 주어진 첫 번째 경우로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얻어낸 그 자체로 대단한 특혜였다. 황원균은 과거 연흥사가 있던 자리에 공사비 5만여원, 총비용 14만원으로 지상 3층 건물을 짓고 이름을 조선극장이라 정했다. 이렇게 완공된 조선극장은 총 8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객석 내부에는 박스석을 설치하고 엘리베이터를 설비했으며 옥상에는 레스토랑까지 갖추었다. 1922년 11월 6일 개관된 조선극장에서는 개관공연으로 윤백남이 연출한 만파회의 <장발장>과 경성 다섯 권번 기생들의 공연, 명창 이동백의 독창, 그리고 몇 편의 서양영화가 상영되었다. 개관식이 있은 후 황원균은 쇼치쿠영화사, 다이카츠(大活, 大正活映)영화사와 특약을 맺어 프로그램을 충실히 하는데 애썼으며 서양영화 수입사를 운영하던 알렌상회에게 잠시 극장운영을 위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채권자인 요코하마 동양생명보험의 야자와는 개관 3개월 후부터 원금 상환을 독촉했고 원금을 상환할 수 없었던 황원균은 야자와에게 조선극장을 빼앗기게 된다. 야자와는 조선극장을 부동산회사인 도쿄건물회사에 매각한다. [자료] 조선극장 개관피로 광고(《동아일보》, 1922.11.7.) 도쿄건물회사가 소유하게 된 조선극장을 운영한 주체는 한때 황금관과 유락관을 경영한 바 있고 1923년 <춘향전>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둔 하야가와 마쓰타로(早川增太郞)의 동아문화협회(東亞文化協會)였다. 동아문화협회에서는 1924년 7월 13일 내부공사를 마치고 조선극장을 활동사진관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하야가와는 그 사이 <비련의 곡>, <흥부놀부> 등을 제작하여 조선극장에서 상영하였다.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인수한 하야가와는 1925년 9월 예전 자신이 운영했던 황금관의 운영권까지 획득하여 조선 내 두 군데의 영화관을 운영하는 수완을 보였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불어 닥친 극심한 불황과 1926년 실시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에 의거하여 부과된 검열수수료로 인한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 건강까지 악화되자 하야가와는 결국 조선에서의 생활을 접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8년 7월 30일 교토에서 사망했다. 1926년 9월부터 하야가와를 대신해 조선극장을 운영한 이는 변사 김조성(金肇盛)이었다. 그는 하야가와가 세운 동아문화협회에서 활동하면서 동아문화협회에서 제작한 영화 <춘향전>의 이도령으로 출연했던 인물로 조선극장 경영에서 물러난 하야가와를 대신해 조선극장을 맡았다. 그는 공격적인 영업으로 업계에 파장을 일으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금 유용을 이유로 운영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1926년 12월에는 차영호(車泳鎬)가 조선극장의 새로운 운영자가 되었다. 상설관 운영 경험이 없던 그는 1927년 2월 나운규의 <풍운아>를 상영하면서 김조성을 주임변사로 다시 불러왔으며 1927년 6월에는 현철(玄哲)과 김영식(金榮植)을 공동경영자로 끌어들였다. 현철을 중심으로 잡지발간, 배우양성, 영화제작을 도모했지만 공동운영자들의 경영 미숙과 운영자와 관원들 사이의 갈등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 없이 문을 닫게 된다. 1927년 9월부터 조선극장은 주임변사 김조성이 이태진을 공동 경영자로 끌어들여 운영되었다. 단성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안정적인 운영을 이어오던 조선극장은 1928년 12월 주임변사이자 공동경영자인 김조성이 필름 임대업자인 임수호에게 210원에 필름을 임대해 놓고 이태진에게 370원의 돈을 이중으로 받아 160원을 착복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다시 복잡한 상황으로 빠지게 된다. 결국 조선극장은 문을 닫았고 이태진은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안봉호에게 인계하였다. 안봉호는 1929년 8월 신용희를 지배인으로 두고 극장운영을 시작했는데 신용희는 기존의 영화 상영만 이루어지던 영화관에 재즈밴드단과 여성무용단을 조직하고 영화상영 사이에 레뷰 공연을 넣어 다른 영화관이 갖지 못한 경쟁력을 갖추려 노력했다. 하지만 조선극장에서 제작하던 영화 <젊은이의 노래>에 대해 악단장 윤창순이 저작권을 위배했다며 항의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조선극장 측에서는 악단을 해산하고 레코드로 반주를 하게 된다. [자료] 화재를 당한 조선극장(《동아일보》, 1936.06.12.) 신용희가 지배인으로 영업을 책임진 이후 조선극장은 점차 안정을 찾아 갔다. 이에 따라 1931년 7월 조선극장을 중심으로 자본금 8만원의 조선흥행주식회사가 설립된다. 사장은 정완규, 전무취체역 전현국, 상무취체역 신용희, 정은규, 취체역 정현성, 김찬영, 감사역으로는 정현용이 선임되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최신의 토키설비를 구비하고 고급의 토키영화를 상영하여, 조선극장은 일명 토키영화의 전당이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조선흥행주식회사 간부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급기야 1932년 10월 조선흥행주식회사가 극장 지배인 신용희를 해고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자 건물주인 도쿄건물회사에서는 신용희와 계약한 흥행권만을 인정한다며 극장사용을 중지해 버렸고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에 설치한 토키 설비를 뜯어 단성사로 옮겨 영화상영을 계속하였다. 1932년 12월부터 기신양행의 김찬영과 손잡은 신용희가 조선극장을 운영하게 된다. 운영자 김찬영, 지배인 신용희 체제에서 조선극장은 김찬영이 소유한 영화배급회사 기신양행을 통해 안정적으로 필름을 공급받았다. 하지만 비싼 토키필름 가격에 비해 줄어든 관객으로 인해 극장 경영은 어려움이 많았다. 이때 신용희는 서울무대라는 극단을 조직하여 프로그램의 일부를 연극으로 채울 생각을 하였다. 1933년 조선극장의 추석 프로그램에서 공연된 서울무대의 <등대>에서 배우가 대본에 없는 대사를 했다는 이유로 공연이 정지되었고 관객들이 항의하는 일명 조선극장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배경은 임석경관의 횡포에 변사 성동호가 상부에 투서함으로써 발생한 것이었다. 결국 변사 성동호가 구속되면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김찬영과 신용희 체제의 조선극장은 결국 1934년 12월 김찬영이 영화업에 손을 떼면서 끝나고 만다. 1934년 12월, 종로 5가에 위치한 제일극장 소유자 미나토 큐기치(港谷久吉)가 조선극장의 소유권과 흥행권 일체를 약 10만원의 자금을 들여 인수하게 된다. 새로운 경영자의 등장으로 기존 조선극장 관원들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것을 염려하자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이들의 고용을 유지하라고 권고하여 대부분의 관원들이 그대로 극장운영을 이어갔다. 하지만 미나토 큐기치가 운영하던 조선극장은 1936년 6월 11일 방화로 전소되어 이후 복구되지 못했다. 조선극장은 잦은 운영자 교체로 인해 경영이 불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운영하던 이들 대부분이 서양영화의 배급사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서양영화의 전당”이라 불릴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조선인극장과 일본인극장을 통틀어 조선극장은 단성사와 더불어 서울에서 서양영화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로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극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토월회의 공연이 개최되면서 한국연극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장소로 기록되고 있다. 참고문헌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 《중외일보》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 72호, 2010. * [사진](상단) 조선극장 낙성 광고(《매일신보》, 1922.11.03) [자료] 《 매일신보 》 , 1922.11.7. 조선극장의 개관식 , 작일 오후 ᄒᆞᆫ시부터 셩대하게 거ᄒᆡᆼᄒᆡᆺ다 이번에 셔로 건츅한 부내 인사동 됴션극장 ( 朝鮮劇場 ) 은 예뎡한 바와 갓치 작 륙일 오후 한시부터 동 극쟝에서 ᄀᆡ관식을 거ᄒᆡᆼ하엿ᄂᆞᆫ바 인사동 드러가ᄂᆞᆫ 어구로브터 극장ᄭᆞ지ᄂᆞᆫ 만국긔와 오ᄉᆡᆨ긔며 뎐등으로 챤란하게 장식하엿고 극장 안에는 칠ᄇᆡᆨ여명의 ᄅᆡ빈이 상하층에 가득하였더라 . 관쥬 황원균 ( 黃元均 ) 씨의 ᄀᆡ관식사와 여러 변사와 극가의 예슐과 극장에 대한 말이 잇셧고 그 후에ᄂᆞᆫ 경셩 오번권 기ᄉᆡᆼ의 가무와 밋 셔양츔이며 현대 일류 명창 리동ᄇᆡᆨ ( 李東伯 ) 의 독창과 현대극계의 권위인 만파회 ( 萬波會 ) 의 신극 츌연이 잇엇고 계속하야 활동사진을 영사하야 ᄅᆡ빈의 이목을 즐겁게 하고 동 오후 네시에 폐회하얏ᄂᆞᆫ대 ᄅᆡ빈에게는 기념품까지 쥬엇는바 극쟝에 장관스러운 설비와 챤란한 쟝치ᄂᆞᆫ 조션에 쳐음이라 하겟다더라 . [자료] 《 매일신보 》 , 1922.11.7. 신축낙성 ( 新築洛城 ) 當 本月 六日 개장 ( 開場 ) … 프로그람 … ◎ 경성 오권번 ( 五券番 ) 의 가무 음곡 ( 音曲 ) 급 ( 及 ) 서양댄스 ◎ 일류 명우 ( 名優 ) 이동백 ( 李東伯 ) 군의 독창 ◎ 현대극계의 권위 만파회 ( 萬波會 ) 의 출연 ◎ 태서 ( 泰西 ) 저명한 고급 활동사진 이상 반도 유수 ( 半島 有數 ) 의 대극장 조선극장의 개장 경성부 인사동 전화 本局 三六二 ○番 [자료] 《 중외일보 》 , 1926.12.19. 영화 · 연예 《 나는 영웅이다 》 ( 全七卷 ) 조선극장 (18 日 봉절 ) ◇ 원명 …… ᄲᅥᆼ커 - 대왕 ◇ 원작 …… 레온 윌손 씨 ◇ 감독 …… 하리 ᄲᅩ - 몬 씨 --- 캬스트 --- ◇ ᄲᅥᆼ커삔 …… 마트 무어 씨 ◇ ᄲᅳ리드 …… 죠지 니콜스 씨 ◇ 카사노바 부인 …… 노라 세실 양 ◇ ᄲᅡ사쟐 대선생 …… 푸랑크 레이 씨 --- 이하 략 ( 畧 ) --- 사람 좋은 《 ᄲᅥᆼ커삔 》 은 그의 동무들이 그를 가리켜 《 나폴레옹 》 의 재생이니 혹은 녯날 《 애급 》 나라의 임금의 후신이니 하야 가면서 놀리는 것도 모르고 그것이 정말인줄만 알고 가진 공상을 다하고 있었다 . × 그리하여 한번만 그 공상하는 병이 시작되기만 하면 그는 중대한 재긔 회사의 일도 돌아보지 않고 천금을 아끼지 않고서 《 미 - 라 》 를 사오고 ᄯᅩ 그 외에 무엇 무엇 쓸대업는 것을 구해다 노코서 공상을 하기에 가진 진기한 사건은 다음에서 다음으로 생긴다 . 그는 확실히 자긔가 영웅인 것이나 가티 생각하는 것이었다 . × 그러나 결국 그는 자긔 애인인 사장의 딸과 야구선수들의 도움에 의하여 간신이 본정신을 차리고 공상에서 ᄭᅢ어서 견실한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하는 것이 이 재미있고 우스운 사진의 이야기입니다 . ( 사진은 《 나는 영웅 》 의 한 장면 ) ◇ 조선극장 개관 일시 경영 곤란으로 폐관하였든 시내 인사동 조선극장은 다시 유지들의 활동으로 《 조선키네마회사 》 제공 《 풍운아 》 ( 風雲兒 )( 全 7 卷 ) 과 《 나는 영웅이다 》 ( 全 7 卷 ) 기타 희극 등 재미잇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십팔일 밤부터 개관하게 되엇는데 료금 등은 종전과 같다더라 . [자료] 《 매일신보 》 , 1927.7.26. 조극개관기 ( 朝劇開館期 ) 아즉도 멀어 부내 인사동 ( 仁寺洞 ) 죠션극장 ( 朝鮮劇場 ) 은 지난 륙월 삼십일에 돌연히 폐관한 후 수십여명 관원ᄭᅡ지 젼부 해산을 식히고 경영자의 한사람인 현텰 ( 玄哲 ) 씨는 내지로 건너갓는대 그동안 관원들은 경영자 측에 대하야 휴관하여 잇는 동안에는 극장을 관원에게 빌려쥬워 관원의 손으로 당분간 영업을 계속하야써 관원의 생활을 보샹케 하여 달라하야 양방의 타협이 진행즁이더니 그것도 결국 파열되야 관원 일동의 ᄇᆡᆨ여명 식구는 목하 생활 곤난을 당하고 잇는 즁인바 동 극쟝은 ᄅᆡ월 십삼일경에나 이르러 젼 경영자의 경영 하에 개관될 모양이라더라 .
서양화가 청구(靑駒) 이마동(1906-1981)은 1932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와 1933년 7월부터 동아일보에 출근했다. 미술 분야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지만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는 것이 그의 주 업무였다. 그러던 1935년 여름, 이마동은 서울 시내 곳곳을 직접 돌아보고 풍경을 스케치해 '서울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1회부터 4회까지는 동아일보사 옥상에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바라본 서울을 스케치했다. 옥상을 내려와 그린 다섯 번째 서울풍경은 종로 네거리였는데 "종로의 옛 기억을 환기시키는 현존한 유일의 기념물"이자 "침묵의 종(鐘)으로서 이 서울의 몸부림을 응시" 1 하는 보신각을 스케치했다. 그다음 연재에서는 "점쟁이, 관상쟁이, 천냥만냥꾼들이 긴긴 여름날에도 해 기우는 줄 모르고 권태에 찌들은 푸념을 허구한 세월을 두고 하고 있는" 2 탑동공원(파고다공원)을, 이어서 7회차에서는 동관 네거리 풍경을 스케치했다. 이 동관 네거리 스케치에는 다음과 같은 경안(耿岸) 서항석의 감상이 덧붙여져 있다.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확장하는 이른바 ‘대경성(大京城)’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던 그때, 도시 생활자의 머릿속에서 경성은 이미 ‘대경성’이 돼 있는 듯 하다. 서울이 변하여 대경성(大京城)이 되고 대경성이 나눠져 남촌(南村), 북촌(北村)이 된 오늘 북촌의 번화처(繁華處)로는 종로 네거리가 첫째요, 거기 따르려는 것이 동관 네거리다. 십자로에 가로는 전차, 세로는 버스, 제법 교통도 빈번한 편이다. 그러나 여기는 종로 네거리와는 딴 냄새가 있다. 북향하여 바라보면 좌편으로는 명월관을 앞세우고 돈의동 일대의 색주가굴이 유위(有爲)한 청년의 고혈을 기다리고 있고, 우편으로는 단성사가 신장(新粧)을 말쑥이 하고 나앉아 외국영화 봉절관은 나뿐이오, 하면서 값싼 모더니즘, 아메리카니즘의 수입 선전에 저 혼자 바쁘다. 말하자면 여기가 북촌의 환락경(歡樂境)이다. 저기 서있는 망대야. 너는 서울을 화재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이 언저리에서 심연에 빠지는 자들을 또한 감시해 주어야하겠다. 아차, 내가 발 앞을 보고 잔소리하기에 저기 어마어마한 돈화문이 그 옛날을 잊은 듯이 입을 닫힌 채 말없이 서있는 그 심정을 모른 체 했구나. 3 동아일보 사옥에서 시작하여 종로의 보신각과 탑동공원을 지나 동관 네거리까지, 이마동의 북촌 스케치들은 오늘날 독자들의 눈에 그저 고요하고 적막하게 보인다. ‘작은 도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제국의 화려한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남촌에 비해, 조선인들의 북촌 거리는 소박하다. 근대 건축물이 들어서고, 전봇대가 늘어서고, 전차와 버스가 다니는 풍경 속에 조선왕조의 건축물이 조용히 서 있고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이마동의 스케치에 글을 보탠 동아일보 기자들의 감상에는 북촌 거리가 ‘번화한 풍경’으로 공들여 서술되지만, 종로 네거리 다음으로 북촌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동관 네거리가 서항석은 오히려 맘에 들지 않는 듯하다. 요릿집과 색주가와 극장으로 시끄럽고 요란한 이 뒷골목의 ‘환락경’은 재능 있는 젊은이들조차 ‘심연(深淵)’에 들게 하는 것이다. 그때 서항석의 시선이 자연스레 향한 대로, 동관 네거리에는 돈화문(창덕궁 정문)이 지키고 서있다. 보신각이 자리 잡은 종로 네거리처럼, 돈화문이 자리한 동관 네거리 역시 민족이라는 정체성 집단과 조선인을 매개하는 ‘기억의 터’임을, 서항석은 대경성 사업으로 한창 소란스러운 와중에 한번쯤 되새겨보았을지 모른다. 이마동이 스케치한 연작의 제목이 환기시키는 것은 그러한 기억의 장소들, ‘경성’과는 다른 ‘서울’의 풍경이었으리라. 다시 말해 이마동의 「서울풍경」은 도시 개발과 근대화가 진행되던 당시의 '경성'을 스케치의 여백 너머에서 읽게끔 두고, 현재 발 딛고 생활하고 있는 '서울'을 기억이 공간화되는 장소로 바꿔놓는다. 신축한 3층 건물에 RCA 발성영화 영사기를 들여놓고 토키라는 시대적 변화에 드디어 발을 맞춰가기 시작한 단성사는 몇 년 지나지 않아 큰 어려움에 봉착한다. 남촌에 화려한 외관의 명치좌와 약초극장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외국영화 봉절권은 나뿐이오"라고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관객들은 더 좋은 설비와 안락한 편의시설을 갖춘 극장에서 최신의 명화를 감상하고 싶어했다. 게다가 토키 시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인 극장'이라는 구획은 이전만큼의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채권자와의 분쟁으로 이미 안팎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단성사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외국영화 필름 임대료가 폭등하자 신작 상영도 힘들어졌다. 일본의 배급 체인과 손잡지 못한 채 필름 수급에 난항을 거듭하면서, "값싼 모더니즘, 아메리카니즘의 수입 선전"에 바쁘다는 서항석의 비아냥은 차라리 그리운 것이 된다. 사진1. 토키 극장으로 개축한 단성사 출처: 『조선과 건축』 1935년 2월호 사진2. 남촌에 신축 개장한 명치좌 출처: 『조선과 건축』 1936년 12월호 조선극장이 화재로 전소(1936)된 이래 북촌 유일의 개봉관이었던 단성사는, 결국 1939년 명치좌 관주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인수된다. 쇼치쿠 체인의 제2봉절관으로서 '대륙극장'이라는 새 이름과 함께 30여 년의 단성사 역사도 시대의 저편으로 기울어 간다. 제 기능을 잃은 보신각과 돈화문을 보며 조선왕조를 떠올리듯, 대륙극장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북촌의 밤을 지키는 단성사도 누군가에게 '기억의 터'가 되었으리라. 1) 이마동 그림·양산(凉山) 신남철 글,「서울풍경 (5)」《동아일보》 1935년 7월 2일자, 석간 3면 2) 이마동 그림·양산(凉山) 신남철 글,「서울풍경 (6)」《동아일보》 1935년 7월 7일자, 석간 3면 3) 이마동 그림·경안 서항석 글,「서울풍경 (7)」《동아일보》 1935년 7월 9일자, 석간 3면 상단 그림 1. 동관 네거리 출처: 이마동, 「서울 풍경」 연작 중에서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백암동인(白岩洞人), 「경성 북촌 극장가 성쇠기」『비판』1938년 10월호, 74~76쪽. 지금이나 조금 오래 전이나 사십만 부민 때나 칠십만 부민 때나 경성의 소위 북촌에 극장이라는 것은 늘은 것은 없고 오히려 불타 없어지지 않은 것이면 기생퇴물 같이 얼굴이 시퍼러둥둥한 헌 건물의 우미관과 싸움투성이의 단성사라는 것이 있고, 조선의 흥행극장이나마라도 기업적으로 연극단체를 조직해놓고 통제적으로 극장을 경영하는 동양극장이 새 깃발을 들고 나온 것뿐이다. 우리들이 무엇이나 지나간 것을 너무 캐고 비판한들 돌아오는 그 문제만큼은 신통할 것 없으니 조선극장, 단성사에 대해서는 현재가 너무 비참하니 윤곽만 잠시 말하고 동양극장에 대하여 아는 데까지 써보기로 하자. 조선극장이 처음 세워지기는 현재 불탄 자욱만 남은 인사정 [필자 주: 仁寺町, 인사동] 인데 내지인 조천(早川)이란 사람이 세워놓고 얼마하다 이태진(李泰鎭)에게 넘어가고 그 후 김찬영에게 그리고 현재 제일극장의 관주인 미나토(ミナト)에게 팔려 넘겼었는데, 물론 그 사이에 현철, 신용희, 김조성 등의 등장으로 여러 가지 추잡한 문제를 일으킨 적도 많고 또 어느 때는 양화(洋畫) 제일봉절(第一封切)로 경성에서 내로라 하고 행세한 적도 있었으나 그나마라도 지금 극장이나 있고 무엇을 한다면은 우리가 무엇이라고 문제라도 붙여보겠으나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아느니만큼 가정적으로도 불행한 일청년(一靑年)의 성냥불 장난으로 다 타버리고 땅덩어리만 남아 겨울에는 가련하게도 스케이트 장, 그렇지 않으면 시골로 다니는 곡마단 부스러기가 와서 지나가는 행인의 고개를 기웃거리게 할 뿐이요, 우미관이래야 5전 입장료를 받을 때를 최고로 지금은 경성 내에서 제일 더러운 집으로 소위 “겡가도리" [필자 주: 喧嘩どり, 싸움꾼이라는 의미] 의 소굴이던 우미관패의 잔해가 그저 남아있는 것 같고, 제일극장이래야 그 역 우미관류이며, 오직 북촌에서 문제되어 때로는 서로 경영상 혹은 영업상으로 경쟁도 하고 흥행방식을 때때로 꾀하는 것도 결국 동양극장과 단성사뿐이다. 단성사라면 조선사람의 머리에는 아직까지도 머리에 인상이 깊은 것은 고(故) 박승필 씨가 처음 시작해서 중간에 그 분이 돌아가고 박정현 씨가 맡아 하게 되고 그 후의 여러 가지 추문, 소문 등이 많았어도 경영체는 늘 박씨의 일파에서 해온 것으로 북촌에서 조선사람의 극장 경영은 오직 이 하나뿐이었고, 무성영화 시대의 조선영화는 거의 다 단성사에서 봉절했다. 그리고 수년 전에 극장을 신축하고 최신 RCA 영사기를 배치하여 한때는 전 경성(全京城)의 양화 봉절관으로 수위를 점령했던 것도 지금에는 옛 꿈, 갖은 비화(悲話), 애화(哀話)만 자아내고 있을 뿐이다. 단성사가 오늘날 이렇게 쇠퇴하게 된 제일의 원인은 물론 가급적 현대적 설비를 해놓은 명치좌, 약초극장 등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2류 극장으로 아니 떨어질 수 없었지만, 결국 단성사를 오늘날 비경(悲境)에 빠지게 한 것은 신무대 때문이요, 지엽적으로 조그마한 문제를 든다면 내부의 추잡한 문제를 들 수 있으나, 그것은 그만두고라도 단성사를 신축할 때에 그 설계의 빈약함을 지금 또 탓을 아니 할 수 없다. 일지사변 [필자 주:日支事變, 중일전쟁] 이 나기 전까지도 조선극장이 그 뒤터를 더 사서 늘여서 크게 지려다가 옆집에서 땅을 아니 파니까 할 수 없이 그냥 그 터로 4계(階)로 짓는다고 했고 구(舊) 종로서 터에 모(某)가 극장을 짓는다는 둥 또는 공평정 [필자 주:公平町, 공평동] 공설시장 비스듬히 건너편 광장에 내지(內地)의 재벌이 나와 극장을 짓는다는 소문의 소문이 돌아다녔으나 북지(北支)의 총소리 한방으로 그런 말은 꼬리를 없애버리고 오직 현재는 숨넘어가는 어린애와 같은 운명에 있는 단성사와 조선 흥행극계에 무적함대와 같이 돌진해가는 동양극장이 있을 뿐이다. 동양극장이 처음 개관식을 하기는 소화(昭和) 10년 가을인 모양인데 지금은 고인이 된 홍순언 씨가 극장 명의 관계로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 씨와 형식상으로 손을 잡고 실상의 극장의 경영은 한때 조선문단에 너무나 거탄적 존재이며 신문연재소설의 왕좌격이던 최독견 씨를 지배인으로 맞아들인 홍순언 씨의 두뇌의 명석함을 가히 짐작할 바니, 최독견 씨가 동양극장의 모든 일을 맡아가지고 오늘날까지 일하여 왔는데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연극은 기업적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조선에서 뚜렷이 보여준 이가 최씨이며 배우들도 연극으로 생활을 안정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넣어준 것도 최씨이니 현재 동극 [필자 주: 東劇, 동양극장의 줄임말] 에서 매월 월급을 먹고 있는 사람이 이백여 명이요, 배우들도 전부 매월 최저 사십오 원에서 최고 백여 원의 월급을 받고들 있다. 동극이 처음 탄생할 때에 큰 공로를 한 분이 현재 동극 문예부에 있는 이운방 씨인데, 그 분의 알선으로 청춘좌라는 것이 조직되었는데, 그의 멤버는 대개 토월회의 후신이라고 할 만한 송영, 서월영, 박제행 씨 등이 중요한 멤버이었다. 이 청춘좌는 주로 동양극장에서 경성 손님을 상대로 하려고 조직한 것이니 그 다음 지방순회극단을 조직하여야 하겠으므로 동극좌라는 것을 또 조직하였다. 그리고 또 새로운 시험으로 조선에서도 손님을 웃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을 조직해보겠다는 것이 주점(主點)으로 희극좌라는 것을 또 조직해서 수차 흥행을 하여보았으나 아직 조선에서는 일러(그렇다면 오늘의 조선의 연극팬은 눈물을 즐겨하는 모양이다.) 결국 실패하고 동극좌와 희극좌와 합병을 시킨 것이 결국은 금일의 호화선이라는 것인 게, 결국 동양극장의 달러 상(箱)은 청춘좌이다. 그러면 오늘날 연극을 궤도에 잡아 올리고 통제와 기업적 조직 아래에서 연극흥행을 해나가며 배우의 이상과 출세의 길을 열어준 것이 오늘의 동양극장이라면 그것을 운전해온 사람이 즉 최독견 씨이다. 조선의 연극흥행에 있어서 그의 공은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금년 봄에 들어가 동양극장에서는 이중흥행을 하여 낮에는 영화를 2회 상영하고 야간에만 평상대로 연극을 상연하는데 이것이야 재래의 연극 주야 2회 상연으로 인한 배우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피로에 완전히 구해냈다고 볼 수 있으며, 극장 경영상이나 연극의 질적 향상이나 사회적 문제로 보더라도 배우들의 보건을 위하여 크게 기뻐할 바다. 그런데 그 극장의 설계가 얼뜬 보기에는 객석을 너무 소홀히 한 것 같으나 실은 무대에 돈을 더 들이고 연구를 하여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회전무대라는 것을 만들어왔다. 이렇게 비약과 진전이 있는 데는 물론 여러 가지의 문제가 없을 수 없어, 혹은 청춘좌의 일부 배우가 탈퇴를 하여 중앙무대라는 것을 조직해서 중간극이니 무엇이니 해봤으나 결국 완전히 실패해 버리고 금년 5월 1일 동양극장은 여러 가지 풍문 속에서 극계의 성공아 최독견 씨의 손에 경영일체가 넘어가고 말았다. 과거의 동양극장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현재의 동극의 전권을 장악한 최씨의 수완을 크게 기대하여도 좋을 것이나 벌써 들리는 말에는 조선영화 배급계의 오소리티 [authority] 인 이창용 씨와 같이 경성촬영소를 매수하여 조선영화제작도 한다 하니 불행과 비운만 거듭하던 조선흥행계에서 기린아 최독견 씨의 앞날의 원대한 성공을 빌며 붓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