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제네티쿠스
- 감독
- 이호영
- 제작년도
- 2002
제일극장은 1930년 종로 4가에 미나토좌(ミナト座)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32년 제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까지 존속했던 영화관이다. 제일극장의 기원은 1922년 설립된 권상장 여흥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미나토 키쿠치(港谷久吉)가 세운 권상장은 종로 4가 대로변 780평 부지에 서양식 2층 벽돌건물로 만들어 진 것으로 1층은 130여 개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고, 2층에는 전시장과 함께 무료여흥장이 있었다. 조선인 고객들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설치된 2층 무료 여흥장에서는 조선의 구극 및 중국연극 등이 공연되었다. [자료] 권상장 개관 광고(《동아일보》, 1922.06.09) 권상장으로 큰 성공을 거둔 미나토는 권상장이 들어선 일대를 경성의 유흥가로 만들기 위해 종로 권상장의 개축과 함께 권상장 뒤편에 부지 330평을 마련해 미나토좌라는 영화관을 신축했다. 미나토진지(賑地)라 불린 이 일대에는 영화관 이외에 57개의 점포를 가진 미나토데파트, 카페 아홉 곳이 늘어선 미나토미인가(美人街), 800여평 규모의 댄스홀인 미나토홀 그 외 놀이시설이 설비된 미나토유원지 등이 설치되었다. 미나토좌는 1930년 6월 9일 활동사진관 설립 허가를 맡은 후 공사비 약 1만5천원으로 권상장 뒤편에 건설되었다. 8월 24일 개장한 미나토좌의 개관 프로그램으로는 스즈란좌(スズラン座) 여배우들의 댄스, 나운규 일좌의 소극 <아버지>가 공연되었다. 미나토좌에서는 개관 직후 조선인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영화를 상영하는 것 이외에 극장 내에 신극부를 두어 연극을 공연했다. 개관 초기 미나도좌 신극부는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운규 일좌가 포진하고 있었다. 이 극단에서는 최승일과 이백수가 연출을 맡았고 나운규는 직접 무대에 나와 연기를 펼쳤다. 그 외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연기를 함께 했다. 대표적인 공연작품으로는 1930년 9월 초 상연된 오토 뮬러의 〈하차〉가 있다. 이 작품은 최승일 연출, 심영, 석금성, 나운규, 김순희, 이호영, 이명우, 임운학 등이 출연했다. 9일부터는 이백수 연출, 나운규, 석금성, 심영 주연으로 <산중의 일야>가 상연되었고 18일부터는 루 메루덴(Lu Märten) 작 〈탄광부〉(Bergarbeiter)를 각색한 최승일 연출의 〈산〉이 심영, 나운규, 석금성, 이영철, 박갑득, 김종하, 박종, 이호영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9월 23일에는 가네코 요분(金子洋文)의 <언덕을 오르는 사람>이 엄시중, 심영, 나운규, 석금성, 김평숙, 김덕희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고 10월 1일에는 업튼 싱클레어(Upton Beall Sinclair) 원작의 <2층의 사나이>가 리백수 번역, 나운규, 심영, 석금성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공연하면서 미나토좌는 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보다는 연극 공연장으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미나토좌의 나운규 일좌 공연은 사상성을 이유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침체했던 미나토좌는 강천희가 이끄는 중외영화사가 직영하며 중외극장이라는 단체의 좌익극을 표방한 공연을 하게 된다. 1931년 12월 18일부터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공연한 작품은 <선로공부의 죽음>, <사람 좋은 형리>, <사랑이 깊어 갈 때>와 같은 작품이었는데 김유영은 중외극장이 공연한 작품들에 대해 프로극단을 표방한 신파극단과 다름 아니라는 날선 비판을 했다. 강천희의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철수한 이후 미나토좌에는 토월회의 후신으로 새롭게 조직된 박승희의 태양극장이 공연을 펼쳤다. 1932년 2월 1차 공연에서는 <명나라 원나라> 등이 공연되었는데 과거 토월회 출신들로 나운규 일좌에서 활약하던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포진해 있었다. 1932년 4월 12일 미나도좌는 2층을 개축한 기념으로 이름을 제일극장으로 바꾸었다. 제일극장에서는 증축낙성을 기념하여 조선연극사의 신춘대공연이 펼쳐졌으며 이어 6월 말부터는 태양극장의 2차 공연으로 〈춘향전〉을 비롯해 <대도전>, <애사> 등이 상연되었다. 이중 <춘향전>은 1925년 토월회에서 상연하여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박승희의 태양극장이나 조선연극사와 같은 조선인 극단의 공연을 비롯해 다양한 무대극을 공연하면서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던 제일극장은 1935년 3월 23일 오후 7시 15분 시사용 영사실에서 발생한 영사기사 이홍우의 실화로 전소되었다. 이홍우는 전기 휴즈가 끊어져 잠시 암전 된 사이에 성냥불을 켰는데 불이 필름에 옮겨 붙어 삽시간에 극장 전체를 태워 버렸다. 극장주 미나토는 화재로 전소된 제일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한다. 1935년 8월 23일 화재 발생 5개월 만에 제일극장의 공사를 마무리 짓고 낙성식을 거행했다. 흥행은 그 다음 날인 24일부터 재개했다. 화재 이후 제일극장은 영화상영에 주력했는데, 주로 상영된 지 오래된 필름들을 상영하는 등 영화관으로서는 2번관에 머물렀다. 1935년 동양극장이 들어서 연극 붐이 일기 시작하자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9년 동양극장의 주인이 바뀌게 되면서 발생한 내분으로 지배인 최상덕을 비롯해 연출자 박진, 극작가 송영, 임선규, 장치가 원우전, 배우 황철, 서일성, 양백명, 문정복, 박영신, 차홍녀 등 단원들이 대거 탈퇴하여 극단 아랑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를 제일극장으로 삼으면서 서울 동쪽의 제일극장, 서쪽의 동양극장이 대표적인 연극 공연장으로 각축을 벌이게 된다. 아랑의 첫 공연은 1939년 10월 부민관에서 공연된 임선규 작 <청춘극장>이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아랑에서는 부민관과 제일극장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1940년 1월의 첫 공연의 경우 부민관에서 임선규 작 <북두칠성>, <빈부>를 공연한 후 11일부터는 제일극장에서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으며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온 뒤 4월 28일부터는 송영과 임선규가 함께 쓴 <김옥균>의 공연이 제일극장에서 시작되었다. [자료] 1930년대 후반 제일극장(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제일극장은 아랑의 근거지였지만 다른 연극단체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0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옥루몽>을 비롯한 창극을 공연했으며 같은 해 6월 최남주가 세운 조선영화사 계열의 조선무대가 조직되어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조선무대에서는 1회작으로 송영 작 <방랑시인 김삿갓>을 안종화 연출로 공연했으며 2회작인 안종화 연출, 최독견 각색의 <춘향전> 역시 제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제일극장은 연극전용관으로 바뀌어 저렴한 입장료로 많은 관객들을 동원했다. 1943년 당시 1급 영화관들이 80전 내외의 저렴한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던 가운데, 제일극장은 입장료가 25전으로 가장 저렴했다. 일제 말기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악극, 창극 등을 공연했는데 대표적인 공연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월 평양대화숙 부설 청명극단에서 윤태순 작, 마완영 연출, 강호 장치의 <산울림>을, 라미라가극단은 1944년 10월 신추공연으로 이부풍 작, 김용환 곡의 <오동나무>를 공연했다. 특히 제일극장은 다른 극장들보다 창극단의 공연이 활발했는데 김연수, 오태석, 정남희 등으로 구성된 조선창극단은 1943년 11월 1일부터 박진 연출로 <장화홍련전>을 공연한바 있다. 조선창극단은 주로 이동연예단으로 활동했는데 공인극단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1945년 5월 2일부터 <어촌애화>, <장화홍련전> 등을 제일극장에서 공연했다. 그 외에 창극단 화랑(1940.12)과 동일창극단(1945.4) 등도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제일극장은 해방 후 영화업자 이창용이 적산관리인이 되어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창용이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주인이 없다가 전쟁 중 파괴된 광장시장 재건에 뛰어들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정재가 관리하던 것을 임화수가 인계받으며 이름을 평화극장으로 바꾸었다. 이어 임화수가 4월혁명 이후 체포되고 5.16 직후 사형 당하게 되자 이름을 한일극장으로 변경한 후 1977년까지 영업하다가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백두산, 「식민지 조선의 상업.오락 공간, 종로 권상장(勸商場)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42호, 2013.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미나토좌 외관 《조선신문》, 1930.8.23. [자료] 《 매일신보 》 , 1922.3.10. 도시의 미관 , 조선의 경성에 내선융화적의 공영과 호락기관 ( 互樂機關 ) 의 설비 , 장래 조선박람회에 최 ( 最 ) 히 적응 준비 , 조직적 백화상점 ( 百貨商店 ), 종로 권상장 매점신입 ( 賣店申込 ) ( 전략 ) 본관의 계상 ( 階上 ) 에ᄂᆞᆫ 내외의 미술품 병 ( 並 ) 상공업의 진로를 개척할 참고자료를 진열종람 ( 縱覽 ) 케 하며 우 ( 又 ) 무료여흥장 ( 無料餘興場 ) 을 설 ( 設 ) 하야 활동사진 기타의 오락기관을 사시 ( 四時 ) 일반에게 관람케 하ᄂᆞᆫ 등 원 ( 願 ) 히 경제적 오락적으로 조직ᄒᆞᆯ 뿐 아니라 특히 사회적으로 생활의 안전과 위안을 여 ( 與 ) 할 최진 ( 最珍 ) 최신의 차종 ( 此種 ) 의 상기관 ( 商機關 ) 은 아즉 일즉이 동양에서 기 ( 其 ) 유래를 견 ( 見 ) 치 못한 전대미문의 파천황의 사업이며 연 ( 然 ) 하고도 상 ( 常 ) 권상장의 위치는 문 듯 조선박람회에 적응키 위하야 각 방면에서 오락기관을 망라하야 잇는 조선유일 낙천지에 인접하는 즉 경성종로 사정목 조선인 상공업의 중추지에 실지하고 동대문시장과 상사 ( 相俟 ) 하야 은진 ( 殷賑 ) 을 극 ( 極 ) 하고 동아 ( 東亞 ) 의 일각에 신진의 대도시를 과 ( 誇 ) 할 조선수도에 일대미관을 정 ( 呈 ) 할 뿐 아니라 ( 후략 ) [자료] 《 매일신보 》 , 1930.6.12. 이현 ( 梨峴 ) 에 신설될 활동사진관 , 건축허가가 낫다 , 칠월말 개관 부내 종로 사정목 일번지 ( 鐘路四丁目一番地 ) 에 있는 권상장 주인 항구길 ( 勸商場 主人 港久吉 ) 씨는 전기 권상장의 단층 ( 單層 ) 일부를 헐고 부지 ( 敷地 ) 삼백오십평에 활동사진상설관 ( 活動寫眞常設館 ) 을 건축코자 소관 동대문서 ( 東大門署 ) 를 거처 경기도로 건축허가를 제출하였든 중 지난 구일부로 이의 허가가 나와 즉시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는바 이번 새로 건축될 활동사진 상설관은 공비 일만오천원으로 오백명 수용의 연와제 단층 ( 煉瓦製 單層 ) 으로서 늦어도 칠월 말경에는 개관하게 도리 터이라 하며 간간히 보는 바 권상장 이층에서 흥행되는 구극 ( 舊劇 ) 기타 중국연극 ( 中國演劇 ) 등도 새 극장에서 개연을 보게 되어 일반관객의 환영을 밧게 될 터이라 한다 . [자료] 《 동아일보 》 , 1935.3.24. 작석 ( 昨夕 ), 제일극장서 영사 중 돌연 발화 , 필름의 폭발로 내부가 전소 , 이백 관객은 전부 구출 , 시사실서 발화 휠림에 인화 폭발 이십삼일 오후 칠시 십분부터 종로사정목 일번지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돌연 발화하야 삽시간에 전관 이층 건물이 거의 전소되고 이어서 그 부근 큰 상점에 연소될 염려가 있어 방금 현장은 큰 수라장을 이루엇고 소관 동대문경찰서는 물론이오 시내 각서는 경찰부의 총 지휘아래 각 소방서 총출동으로 대경계중이다 . 아직도 ( 오후 칠시 반 ) 맹렬한 불길에 쌓이어 화광 속에 들어있는 일대의 혼잡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수라장이다 . 전차 자동차는 종로 3 정목 일대부터 동대문까지 완전히 차단되어 잇다 . 원인은 이날도 평시와 같이 오후 칠시부터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이날 밤은 약 이백명의 관객이 모였는데 첫째 사진을 상영중에 시사실에서 발화하여 필름에 곧 불이 당기자마자 폭발되어 발화한 듯 하다하며 동 팔시에 진화되었는데 원인 손해를 알 수 없고 이백 관중은 전부 구출되었다 한다 . ( 이상 호외 ( 號外 ) 재록 ( 再錄 )) [자료] 《 동아일보 》 , 1935.8.25. 제일극장 재축 ( 再築 ) 금년 봄에 화재로 인하여 건축중이든 부내 종로 ( 鐘路 ) 5 정목 제일극장 ( 第一劇場 ) 은 그동안 개축중이든 바 최근에 준공이 되어 금 24 일에 개관식을 거행하고 일반 관람은 명 25 일부터 개관키로 되었다는데 관람료는 역시 10 전 균일의 대중경영으로 한다고 한다 .
제일극장은 1930년 종로 4가에 미나토좌(ミナト座)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32년 제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까지 존속했던 영화관이다. 제일극장의 기원은 1922년 설립된 권상장 여흥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미나토 키쿠치(港谷久吉)가 세운 권상장은 종로 4가 대로변 780평 부지에 서양식 2층 벽돌건물로 만들어 진 것으로 1층은 130여 개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고, 2층에는 전시장과 함께 무료여흥장이 있었다. 조선인 고객들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설치된 2층 무료 여흥장에서는 조선의 구극 및 중국연극 등이 공연되었다. [자료] 권상장 개관 광고(《동아일보》, 1922.06.09) 권상장으로 큰 성공을 거둔 미나토는 권상장이 들어선 일대를 경성의 유흥가로 만들기 위해 종로 권상장의 개축과 함께 권상장 뒤편에 부지 330평을 마련해 미나토좌라는 영화관을 신축했다. 미나토진지(賑地)라 불린 이 일대에는 영화관 이외에 57개의 점포를 가진 미나토데파트, 카페 아홉 곳이 늘어선 미나토미인가(美人街), 800여평 규모의 댄스홀인 미나토홀 그 외 놀이시설이 설비된 미나토유원지 등이 설치되었다. 미나토좌는 1930년 6월 9일 활동사진관 설립 허가를 맡은 후 공사비 약 1만5천원으로 권상장 뒤편에 건설되었다. 8월 24일 개장한 미나토좌의 개관 프로그램으로는 스즈란좌(スズラン座) 여배우들의 댄스, 나운규 일좌의 소극 <아버지>가 공연되었다. 미나토좌에서는 개관 직후 조선인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영화를 상영하는 것 이외에 극장 내에 신극부를 두어 연극을 공연했다. 개관 초기 미나도좌 신극부는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운규 일좌가 포진하고 있었다. 이 극단에서는 최승일과 이백수가 연출을 맡았고 나운규는 직접 무대에 나와 연기를 펼쳤다. 그 외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연기를 함께 했다. 대표적인 공연작품으로는 1930년 9월 초 상연된 오토 뮬러의 〈하차〉가 있다. 이 작품은 최승일 연출, 심영, 석금성, 나운규, 김순희, 이호영, 이명우, 임운학 등이 출연했다. 9일부터는 이백수 연출, 나운규, 석금성, 심영 주연으로 <산중의 일야>가 상연되었고 18일부터는 루 메루덴(Lu Märten) 작 〈탄광부〉(Bergarbeiter)를 각색한 최승일 연출의 〈산〉이 심영, 나운규, 석금성, 이영철, 박갑득, 김종하, 박종, 이호영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9월 23일에는 가네코 요분(金子洋文)의 <언덕을 오르는 사람>이 엄시중, 심영, 나운규, 석금성, 김평숙, 김덕희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고 10월 1일에는 업튼 싱클레어(Upton Beall Sinclair) 원작의 <2층의 사나이>가 리백수 번역, 나운규, 심영, 석금성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공연하면서 미나토좌는 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보다는 연극 공연장으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미나토좌의 나운규 일좌 공연은 사상성을 이유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침체했던 미나토좌는 강천희가 이끄는 중외영화사가 직영하며 중외극장이라는 단체의 좌익극을 표방한 공연을 하게 된다. 1931년 12월 18일부터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공연한 작품은 <선로공부의 죽음>, <사람 좋은 형리>, <사랑이 깊어 갈 때>와 같은 작품이었는데 김유영은 중외극장이 공연한 작품들에 대해 프로극단을 표방한 신파극단과 다름 아니라는 날선 비판을 했다. 강천희의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철수한 이후 미나토좌에는 토월회의 후신으로 새롭게 조직된 박승희의 태양극장이 공연을 펼쳤다. 1932년 2월 1차 공연에서는 <명나라 원나라> 등이 공연되었는데 과거 토월회 출신들로 나운규 일좌에서 활약하던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포진해 있었다. 1932년 4월 12일 미나도좌는 2층을 개축한 기념으로 이름을 제일극장으로 바꾸었다. 제일극장에서는 증축낙성을 기념하여 조선연극사의 신춘대공연이 펼쳐졌으며 이어 6월 말부터는 태양극장의 2차 공연으로 〈춘향전〉을 비롯해 <대도전>, <애사> 등이 상연되었다. 이중 <춘향전>은 1925년 토월회에서 상연하여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박승희의 태양극장이나 조선연극사와 같은 조선인 극단의 공연을 비롯해 다양한 무대극을 공연하면서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던 제일극장은 1935년 3월 23일 오후 7시 15분 시사용 영사실에서 발생한 영사기사 이홍우의 실화로 전소되었다. 이홍우는 전기 휴즈가 끊어져 잠시 암전 된 사이에 성냥불을 켰는데 불이 필름에 옮겨 붙어 삽시간에 극장 전체를 태워 버렸다. 극장주 미나토는 화재로 전소된 제일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한다. 1935년 8월 23일 화재 발생 5개월 만에 제일극장의 공사를 마무리 짓고 낙성식을 거행했다. 흥행은 그 다음 날인 24일부터 재개했다. 화재 이후 제일극장은 영화상영에 주력했는데, 주로 상영된 지 오래된 필름들을 상영하는 등 영화관으로서는 2번관에 머물렀다. 1935년 동양극장이 들어서 연극 붐이 일기 시작하자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9년 동양극장의 주인이 바뀌게 되면서 발생한 내분으로 지배인 최상덕을 비롯해 연출자 박진, 극작가 송영, 임선규, 장치가 원우전, 배우 황철, 서일성, 양백명, 문정복, 박영신, 차홍녀 등 단원들이 대거 탈퇴하여 극단 아랑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를 제일극장으로 삼으면서 서울 동쪽의 제일극장, 서쪽의 동양극장이 대표적인 연극 공연장으로 각축을 벌이게 된다. 아랑의 첫 공연은 1939년 10월 부민관에서 공연된 임선규 작 <청춘극장>이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아랑에서는 부민관과 제일극장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1940년 1월의 첫 공연의 경우 부민관에서 임선규 작 <북두칠성>, <빈부>를 공연한 후 11일부터는 제일극장에서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으며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온 뒤 4월 28일부터는 송영과 임선규가 함께 쓴 <김옥균>의 공연이 제일극장에서 시작되었다. [자료] 1930년대 후반 제일극장(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제일극장은 아랑의 근거지였지만 다른 연극단체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0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옥루몽>을 비롯한 창극을 공연했으며 같은 해 6월 최남주가 세운 조선영화사 계열의 조선무대가 조직되어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조선무대에서는 1회작으로 송영 작 <방랑시인 김삿갓>을 안종화 연출로 공연했으며 2회작인 안종화 연출, 최독견 각색의 <춘향전> 역시 제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제일극장은 연극전용관으로 바뀌어 저렴한 입장료로 많은 관객들을 동원했다. 1943년 당시 1급 영화관들이 80전 내외의 저렴한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던 가운데, 제일극장은 입장료가 25전으로 가장 저렴했다. 일제 말기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악극, 창극 등을 공연했는데 대표적인 공연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월 평양대화숙 부설 청명극단에서 윤태순 작, 마완영 연출, 강호 장치의 <산울림>을, 라미라가극단은 1944년 10월 신추공연으로 이부풍 작, 김용환 곡의 <오동나무>를 공연했다. 특히 제일극장은 다른 극장들보다 창극단의 공연이 활발했는데 김연수, 오태석, 정남희 등으로 구성된 조선창극단은 1943년 11월 1일부터 박진 연출로 <장화홍련전>을 공연한바 있다. 조선창극단은 주로 이동연예단으로 활동했는데 공인극단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1945년 5월 2일부터 <어촌애화>, <장화홍련전> 등을 제일극장에서 공연했다. 그 외에 창극단 화랑(1940.12)과 동일창극단(1945.4) 등도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제일극장은 해방 후 영화업자 이창용이 적산관리인이 되어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창용이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주인이 없다가 전쟁 중 파괴된 광장시장 재건에 뛰어들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정재가 관리하던 것을 임화수가 인계받으며 이름을 평화극장으로 바꾸었다. 이어 임화수가 4월혁명 이후 체포되고 5.16 직후 사형 당하게 되자 이름을 한일극장으로 변경한 후 1977년까지 영업하다가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백두산, 「식민지 조선의 상업.오락 공간, 종로 권상장(勸商場)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42호, 2013.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미나토좌 외관 《조선신문》, 1930.8.23. [자료] 《 매일신보 》 , 1922.3.10. 도시의 미관 , 조선의 경성에 내선융화적의 공영과 호락기관 ( 互樂機關 ) 의 설비 , 장래 조선박람회에 최 ( 最 ) 히 적응 준비 , 조직적 백화상점 ( 百貨商店 ), 종로 권상장 매점신입 ( 賣店申込 ) ( 전략 ) 본관의 계상 ( 階上 ) 에ᄂᆞᆫ 내외의 미술품 병 ( 並 ) 상공업의 진로를 개척할 참고자료를 진열종람 ( 縱覽 ) 케 하며 우 ( 又 ) 무료여흥장 ( 無料餘興場 ) 을 설 ( 設 ) 하야 활동사진 기타의 오락기관을 사시 ( 四時 ) 일반에게 관람케 하ᄂᆞᆫ 등 원 ( 願 ) 히 경제적 오락적으로 조직ᄒᆞᆯ 뿐 아니라 특히 사회적으로 생활의 안전과 위안을 여 ( 與 ) 할 최진 ( 最珍 ) 최신의 차종 ( 此種 ) 의 상기관 ( 商機關 ) 은 아즉 일즉이 동양에서 기 ( 其 ) 유래를 견 ( 見 ) 치 못한 전대미문의 파천황의 사업이며 연 ( 然 ) 하고도 상 ( 常 ) 권상장의 위치는 문 듯 조선박람회에 적응키 위하야 각 방면에서 오락기관을 망라하야 잇는 조선유일 낙천지에 인접하는 즉 경성종로 사정목 조선인 상공업의 중추지에 실지하고 동대문시장과 상사 ( 相俟 ) 하야 은진 ( 殷賑 ) 을 극 ( 極 ) 하고 동아 ( 東亞 ) 의 일각에 신진의 대도시를 과 ( 誇 ) 할 조선수도에 일대미관을 정 ( 呈 ) 할 뿐 아니라 ( 후략 ) [자료] 《 매일신보 》 , 1930.6.12. 이현 ( 梨峴 ) 에 신설될 활동사진관 , 건축허가가 낫다 , 칠월말 개관 부내 종로 사정목 일번지 ( 鐘路四丁目一番地 ) 에 있는 권상장 주인 항구길 ( 勸商場 主人 港久吉 ) 씨는 전기 권상장의 단층 ( 單層 ) 일부를 헐고 부지 ( 敷地 ) 삼백오십평에 활동사진상설관 ( 活動寫眞常設館 ) 을 건축코자 소관 동대문서 ( 東大門署 ) 를 거처 경기도로 건축허가를 제출하였든 중 지난 구일부로 이의 허가가 나와 즉시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는바 이번 새로 건축될 활동사진 상설관은 공비 일만오천원으로 오백명 수용의 연와제 단층 ( 煉瓦製 單層 ) 으로서 늦어도 칠월 말경에는 개관하게 도리 터이라 하며 간간히 보는 바 권상장 이층에서 흥행되는 구극 ( 舊劇 ) 기타 중국연극 ( 中國演劇 ) 등도 새 극장에서 개연을 보게 되어 일반관객의 환영을 밧게 될 터이라 한다 . [자료] 《 동아일보 》 , 1935.3.24. 작석 ( 昨夕 ), 제일극장서 영사 중 돌연 발화 , 필름의 폭발로 내부가 전소 , 이백 관객은 전부 구출 , 시사실서 발화 휠림에 인화 폭발 이십삼일 오후 칠시 십분부터 종로사정목 일번지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돌연 발화하야 삽시간에 전관 이층 건물이 거의 전소되고 이어서 그 부근 큰 상점에 연소될 염려가 있어 방금 현장은 큰 수라장을 이루엇고 소관 동대문경찰서는 물론이오 시내 각서는 경찰부의 총 지휘아래 각 소방서 총출동으로 대경계중이다 . 아직도 ( 오후 칠시 반 ) 맹렬한 불길에 쌓이어 화광 속에 들어있는 일대의 혼잡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수라장이다 . 전차 자동차는 종로 3 정목 일대부터 동대문까지 완전히 차단되어 잇다 . 원인은 이날도 평시와 같이 오후 칠시부터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이날 밤은 약 이백명의 관객이 모였는데 첫째 사진을 상영중에 시사실에서 발화하여 필름에 곧 불이 당기자마자 폭발되어 발화한 듯 하다하며 동 팔시에 진화되었는데 원인 손해를 알 수 없고 이백 관중은 전부 구출되었다 한다 . ( 이상 호외 ( 號外 ) 재록 ( 再錄 )) [자료] 《 동아일보 》 , 1935.8.25. 제일극장 재축 ( 再築 ) 금년 봄에 화재로 인하여 건축중이든 부내 종로 ( 鐘路 ) 5 정목 제일극장 ( 第一劇場 ) 은 그동안 개축중이든 바 최근에 준공이 되어 금 24 일에 개관식을 거행하고 일반 관람은 명 25 일부터 개관키로 되었다는데 관람료는 역시 10 전 균일의 대중경영으로 한다고 한다 .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2006년까지 170편의 한국영화를 촬영한 베테랑 촬영감독으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땡볕>(하명중, 1984), <깊고 푸른 밤>(배창호, 1985),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1999)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는 1980년대 주목받던 신진 감독들의 데뷔작에 단골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 그는 신인감독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제작자들의 신뢰를 얻을 만큼 빠르고 노련한 촬영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50년대 중반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의 조명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장화홍련전>에는 조명감독인 함완섭의 조수로 참여했는데 이때 임권택 감독은 이 작품의 제작부 막내 스태프로 소품을 맡고 있었다. (사진1) 1956년 4월 15일 <장화홍련전>의 촬영장 사진을 보면 가운데 한복을 입고 여장을 한 인물이 임권택 감독이다. 테스트 촬영을 위해 장난처럼 여장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오른쪽이 서병수 조명감독, 왼쪽이 정광석 촬영감독이다. 후에 임권택 감독과는 <왕과 상노>(1965)에서 감독과 촬영자로 다시 만났지만 촬영감독으로서의 자의식과 자존심은 임권택 감독에게 뷰파인더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둘은 작품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중간에 결별한 뒤 단 한 작품도 함께 하지 않았다. 정광석은 일본 유학파 출신 김영순 촬영감독의 권유로 촬영부 조수로 옮겨간다. (사진2) 1959년 <부부>(곽건, 1960)의 촬영 현장이다. 카메라를 잡은 이가 김영순 촬영감독이고 왼쪽에서 장갑을 끼고 렌즈의 포커스링을 만지는 이가 당시 촬영 제1조수 정광석이다. 삼각대 옆에는 여성 스크립터가 앉아서 기록을 위해 초시계를 잡고 있다. 당시 제1조수는 노출과 포커스를 책임졌고 흑백필름용 현상통을 가지고 다니며 촬영현장에서 테스트현상을 해야 했다. 2조수는 트래킹 쇼트 촬영에서 이동차 밀기, 제3조수는 촬영기자재 운반을 맡았다. 그나마 카메라 같은 고가장비는 제2조수가 운반했다고 한다. 이후 <비련의 섬>(정창화, 1958),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1960) 등의 작품에서 김영순, 이성휘를 비롯한 여러 촬영감독의 조수로 14편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1962년 정광석은 이봉래 감독의 권유로 <새댁>을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새댁>은 김영수 작가의 KBS 인기 라디오 연속극을 영화화한 것이다. 당시 신문에는 <새댁>의 원작료를 30만원으로 밝히고 있는데, 정광석은 이때 촬영감독을 포함한 촬영부 전원의 인건비로 8만원을, 즉 천자 분량의 필름 세통 값과 비슷한 비용을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3년 12월 14일자 기사를 보면 당시 영화제작비 평균 중 총 촬영료는 20~30만원으로 여기에는 촬영기자재비용 12만원이 포함되어 있다 하니 그의 기억과 대체로 일치하는 금액이다. 이 조차도 주로 어음으로 받아 몇 달을 수입없이 기다리거나 급할 때는 많은 수수료를 떼고서라도 현금화시켜야 했기에 당시 많은 스태프들은 늘 빚을 지고 사는 형편이었다. (사진3) <새댁>(이봉래, 1962)은 흑백 시네마스코프 작품으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리플렉스 카메라에, 공보부에서 비공식으로 빌린 250미리 줌렌즈를 장착해서 촬영했다. 당시 초점길이가 긴 줌렌즈는 신필름과 정부 홍보영화를 제작했던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 밖에 없었기에 충무로 촬영감독들은 공보부에서 몰래 빌려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촬영 데뷔작인 <새댁>은 “물에 올라온 고기처럼 화면마다 생동이 퍼덕거리지만 시종 재미있다.”는 경향신문의 영화평처럼 3대의 대가족이 벌이는 에피소드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새댁>은 종로의 세운상가 3~5층에 위치했던 아세아극장의 개관작으로 1962년 12월 23일 개봉했다. 1965년에 그는 <성난 독수리>(김기, 1965)를 촬영한다. 이호영 공군 대령의 수기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가 대성공을 거둔 후에 만들어진 공군 전투영화이다. <빨간 마후라>는 비행장면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전투기 동체에 부착시켜 촬영했으나 제작비와 지원규모가 그에 못 미쳤던 <성난 독수리>는 정광석 촬영감독이 전투기 뒷좌석에 탑승해 비행장면을 모두 촬영했다. (사진4) <성난 독수리>(김기, 1965) 포스터 (사진5) <성난 독수리>(김기, 1965)는 원작자인 이호영 대령의 도움을 받아 대구 비행장에서 촬영되었는데, 실제 한국전쟁 때 사용한 전투기 T33이 이용되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은 전투복에 헬멧을 착용한 뒤 아리플렉스 ⅡC카메라에 필름이 담긴 200자 매거진 세 개를 여분으로 가지고 T33 뒷좌석에 탑승해, 핸드 헬드로만 항공촬영 전 분량을 촬영했다. 이 촬영으로 정광석 촬영감독은 25시간이 넘는 비행기록을 갖게 된다. 촬영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감독과 함께 화면의 비율을 결정해야 한다. 1968년에 개봉한 <황혼의 부르스>(장일호)는 정광석 촬영감독의 주장으로 스탠다드 화면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황혼의 부르스>는 일본을 배경으로 몰락한 일본귀족과 북한 간첩, 남한의 비밀요원이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여인을 둘러싸고 벌이는 첩보 액션영화이다. 1960년대 영화계는 TV와의 경쟁을 와이드 스크린으로 극복하고자 가로의 비율이 넓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탠다드 사이즈로 이 영화를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화려한 컬러의 색감을 보여주고 다양한 렌즈를 이용한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아나모픽 렌즈를 마스터 렌즈에 덧대어 구현했는데, 1960년대 후반 노후된 아나모픽 렌즈는 화면의 색감이나 선명도를 보장할 수 없었고 아나모픽 렌즈의 왜곡 때문에 사용 가능한 마스터렌즈의 구경이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파독광부 출신으로 독일에서 아리플렉스ⅡC 카메라를 구입해 온 신영필름 김태우 사장이 마침 정광석 촬영감독의 조수로 들어왔던 시기라 최신 카메라로 선명하고 깨끗한 화면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도 또한 더 해졌을 것이다. (사진6) 의사로 위장한 가네야마(오지명)기 여자주인공 시즈코(윤정희)를 도와 몰락한 일본 귀족인 가다키리 남작(박암)의 저택에서 도망치려는 장면이다. 망원렌즈로 인물들을 촬영해 전경의 배경을 흐리는 방식으로 인물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물론 윤정희의 심리적인 불안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다. (사진7) 이 영화에서 박암은 몰락한 일본 귀족임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내내 제대로 여미지 않은 유카타를 입고 있다. (사진8) 호텔 객실에서 윤정희는 원하지 않는 청혼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받고 있다. 윤정희는 이유를 모른 채 남자들에게 결혼을 강요당하고 살인사건에 연류 되고 협박받는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부친이 막대한 재산을 딸의 남편에게 주기로 했기 때문인데, 물론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도 모르고 있다. 오로지 ‘황혼의 블루스’라는 노래가 들리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뿐이다. 컬러영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60년대 후반의 컬러 작품에는 화려한 색감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언제나 세 가지 색으로 구성된 꽃꽂이가 탁자 위에 놓여있다. 이 작품에도 회사, 병원 등의 책상과 탁자 위에는 어김없이 삼색 꽃꽂이가 놓여있다. (사진9) 말끔한 양복에 뿔테 안경을 쓴 신사 오지명은 안경을 벗는 순간 북한간첩이 되어 윤정희 가족을 북송선에 태우려 한다. 심지어 오지명의 날카로운 두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줘 긴장감을 갖게 했다. (사진10, 11, 12, 13) 이 작품은 액션영화이다. 오지명의 정체가 드러나자 북한간첩단과 몰락한 일본 귀족의 하수인들이 총격을 벌이고 남한에서 온 공작원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결투장면이 등장한다. 한 간첩단이 윤정희를 찾으러 온 귀족의 하수인들에게 총질을 해대는 장면은 피격당하는 인물들의 화려한 리액션이 다소 단순한 동선을 무마해준다. 심지어 오른쪽 인물은 총에 맞아 엎어져 있다가 다시 총을 맞고는 일어나 휘청거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발포할 때마다 총구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는 90년대 <투캅스>(강우석, 1993)까지 등장한다.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액션장면 중 장동휘의 공격에 오지명이 360도 회전하며 쓰러지는 장면은 설정 상 어두운 실내에서 촬영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1968년부터 정광석은 매년 10편 내외의 작품을 촬영했다. 현재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작품수인데 그는 두 가지의 이유에서 다작 촬영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첫째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따라가기. 신성일, 김지미, 남정임 등 당시 인기 있는 주연들의 작품을 촬영하면 두, 세 작품을 동시에 가케모치 즉 겹치기 촬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제작자 또한 그런 겹치기 일정을 고려해서 주요 스태프를 고용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후시녹음으로 진행했기에 촬영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후시 녹음이 미완의 영화를 어떻게 완성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성우 고은정, 오승환의 구술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70년대에도 이러한 다작의 흐름을 이어갔다. 1971년에 개봉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액션영화이다. 물론 영화는 전편 다 국내에서 촬영되었다. (사진14)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애국지사와 갱 그리고 밀정이 처음 만나는 황량한 만주의 술집은 워커힐 호텔이 보이는 한강 상류의 모래밭 위에 세운 오픈세트이다. (사진15) 주인공들이 스키를 타고 일본군을 유인하는 만주의 눈밭은 강원도 횡계에서 촬영했다. 아찔하게 따라오는 일본군 스키부대원들을 찍기 위해 사각으로 기울기를 조정해서 촬영했다. (사진16) 위 장면을 찍기 위해 바닥에 바짝 붙인 카메라를 틀어 앙각으로 촬영하고 있다. 바닥에 누워 카메라를 잡고 있는 이가 정광석 촬영감독이고 그 바로 뒤에서 사진 밖 피사체를 응시하고 있는 이가 이만희 감독이다. 이만희 감독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 또한 영화에 대한 감각이 아주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앞뒤가 이러니까 이런 사이즈로 간다. 이게 아니라 한번 쭉 시켜본 다음에 그냥 나눠서 가니까.” (사진17) 장동휘가 촬영 중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로 구르게 되자 이만희 감독은 즉흥적으로 커트를 나눠 촬영해 사고로 NG가 난 장면을 살렸다고 한다. 콘티나 모니터 없이 즉석에서 머릿속으로 편집이 가능한 감독이었던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라면 기세가 등등한 배우들도 어려운 액션장면을 군말 없이 직접 연기했다. 물론 배우들도 인물을 줌렌즈로 당겨 찍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배우 황해가 한 겨울에 한강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장동휘가 오토바이에서 넘어지는 정도의 위험은 그리 과한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 그가 촬영조수로 참여한 <햇빛 쏟아지는 벌판>에서는 정창화 감독이 총격장면에서 실탄을 사용했고 이만희 감독 또한 대단한 사격실력으로 때로 배우 근처까지 직접 총을 쏘며 촬영을 진행 했다는 무용담 같은 증언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리얼한 장면에 대한 욕심과 부족한 안전장치로 인해 배우와 스태프들이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아찔한 시기였다. 그가 촬영한 전쟁영화인 <전우가 남긴 한마디>(이원세, 1979)에서도 군용보트를 타고 도강하는 장면에서 강 밑에 묻어놓은 TNT폭탄 위로 배우 장혁이 탄 보트가 지나가며 폭파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다행이 아무도 다치지 않아 며칠 쉬다 촬영을 재개했다고 한다. 정광석은 1960,70년대를 거치며 전광석화처럼 빠른 시간에 탁월하게 촬영을 끝낼 수 있는 노련한 촬영감독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다보니 1980, 90년대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에서 그의 이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곽지균 감독의 데뷔작 <겨울나그네>(1986), 박종원 감독의 <구로아리랑>(1989), 이현승 감독의 <그대안의 블루>(1992), 김성수 감독의 <런 어웨이>(1995),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1998)등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감독들의 데뷔작에는 늘 그의 이름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의 선두주자였던 배창호 감독과의 콤비로 유명한데 배창호 감독과는 <꼬방동네 사람들>(1982)부터 시작해 모두 8편의 작품에서 함께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판자촌의 모습을 리얼하게 담아 호평을 받았는데, 그는 성공적인 헌팅이 빛을 발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꼬방동네는 고척동 그러니까 당시 영등포에서 시흥으로 가는 길의 좌측 둑 너머 외딴 고지대에 있던 판자촌이다. 벌판 쪽에 우뚝 솟은 철탑, 저수지 같은 분위기를 내는 뚝방 등 그 동네 전부가 이 작품에 적절하게 맞아 떨어져 세트 없이 영화 전편을 그 곳에서 촬영했다. 스태프들은 인근 여관에 숙소를 잡고 2개월간 머물며, 동네 주먹들의 방해가 있으면 술값을 줘가며 밤낮으로 촬영했다. (사진18) 주석(안성기)이 검은 장갑(김보연)을 따라가며 꼬방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유려하게 훑는 장면은 스테디캠 처럼 느껴지지만 정광석 촬영감독이 광각렌즈를 사용해 핸드헬드로 촬영한 장면이다. (사진19, 20) 꼬방동네에서 열린 환갑잔치에서 공옥진 여사가 춤을 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 또한 사진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이 핸드헬드로 촬영했음에도 유려하고 안정적이다. 사진20번에 카메라를 든 이가 정광석이고 사진의 왼쪽 끝 안경을 쓴 이가 배창호 감독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배창호 감독과 한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적도의 꽃>(배창호, 1983)이다. 아파트에 혼자 살며 이웃들을 망원렌즈로 훔쳐보는 미스터M(안성기)은 맞은편 아파트에 이사 온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해 그녀를 스토킹 한다. 미스터M이 아파트를 훔쳐보는 도입부는 히치콕의 <이창>(1954)처럼 촬영되었다. (사진21,22,23,24) 미스터M(안성기)의 시점쇼트로 표현하기 위해 팬으로 앞 동 아파트 두어 가구를 훔쳐 보다 아래에 이사 오는 오선영(장미희)에게 시선이 닿는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현장에서는 이 모두를 한 컷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세트에서 촬영된 <이창>과 달리 <적도의 꽃>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여러 가구의 협조를 구하며 어렵게 촬영이 이루어졌다. 미스터M은 타락한 오선영을 구원하고자 그녀를 강으로 끌고 가 물에 빠트린다. 비정한 내용만큼이나 촬영 환경 역시 좋지 않았다. 구파발 근교의 일영에서 촬영이 이뤄졌는데 장마철에 물이 불어 있는 강에서 빗줄기가 잘 보이도록 역광으로 조명을 쳐야했다. 결국 조명 설치를 위해 10키로 조명기를 매고 강을 건너던 조명조수가 물에 휩쓸려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장면이자 작품이었다. <고래사냥>(배창호, 1984)은 2,3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3년 11월에 촬영이 시작되었다. 삼영필름 명의로 제작자 황기성이 대명 제작한 작품이다. 병태 역할에 적합한 배우가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안성기가 김수철을 단성사 2층 다방으로 불렀다. 황기성 대표, 최인호 작가, 배창호 감독, 정광석 촬영감독 모두 그 자리에서 김수철을 병태로 캐스팅했다. 로드무비인 이 작품은 서울역 앞 사창가에서 시작해 과거의 창경원을 거쳐 대관령 너머 임계, 강릉 변두리 시장 등지에서 촬영되었다. 영하 20도 날씨에 염소차에서 내려 걷는 곳이 임계 읍내였고 춘자(이미숙)가 어머니에게 줄 안경을 훔치고 민우(안성기)가 이를 구출하는 곳은 강릉 변두리 시장이었다. (사진25,26) <고래사냥>의 강릉 변두리 시장 장면은 엑스트라 하나 없이 시장 사람들 그대로 촬영했다. 사진25의 오른쪽 하단 동그라미 친 부분에 안성기와 이미숙이 있다. (사진27,28) 춘자(이미숙)가 안경을 훔쳐 소동이 벌어지는 장면도 시장에서 엑스트라 없이 자연스럽게 촬영되었다. 주인공들이 포주일당에게 쫓겨 석탄차에 기어 올라가 기차를 타고 도망가는 장면은 카메라 한 대로 촬영이 이뤄졌다. 석탄차를 대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유를 두고 여러 커트로 나눠서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진29) <고래사냥>에서 석탄차를 타고 도주하는 시퀀스는 한 대의 카메라로 줌렌즈를 이용해 원경에서 접사까지 한 커트로 촬영을 끝내고 편집과정에서 여러 커트로 나눠서 사용했다. 물론 석탄차 위에서 안성기가 “잘 있거라 나는 간다.”포주들을 놀리는 장면도 접사에서 원경까지 한 커트로 촬영해 나눠서 사용했다. 과거 충무로 촬영감독이 갖춰야할 덕목 중 하나는 제작자의 입장에 서서 효율 좋게 촬영해 예산을 줄여주는 것이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의미 있는 장면으로 꼽는 것이 <땡볕>(하명중, 1984)의 한 컷이다.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한 <땡볕>(하명중, 1984)은 일제강점기의 민족수난사를 다루고 있다. 무기력한 남성과 수탈당하는 여성의 신체가 수난의 알레고리로 영화 전편을 메우는데, 주인공 춘호가 죽어가는 순이를 지게에 지고 물길을 거슬러 가는 장면은 인물들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배치되어 잔인한 운명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은 임계의 산중턱에서 오후 4시쯤 촬영을 끝내고 철수 하는 중에 정광석 촬영감독이 우연히 바라본 풍경에 영감을 받아, 하명중 감독에게 제안하여 만들어 낸 장면이었다. 이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23회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다음해도 연이어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이다. 미서부에서 단시일 안에 올로케로 촬영했고 흥행에서도 성공한 작품이다. 모든 화면이 감각적이고 할리우드 작품 같다는 평을 받았는데 배창호 감독 또한 미국 수준의 기술력만 받쳐준다면 할리우드 만큼의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작품이라 말했을 정도로 촬영기술과 감각을 강조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제작비와 물량을 들이지는 않았다. 열다섯 명의 인원이 필름 4만 5천자로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년, 데스밸리, 자브리스키 포인트, 산타모니카, 말리부에서 로케하며 40일 만에 촬영과 현상을 모두 끝내고 귀국한 작품이었다. 한때 배창호 감독의 전매특허였던 현기증 나는 360도 트래킹 쇼트도 할리우드에서 완성된다. (사진30) 호빈(안성기)과 제인(장미희)의 말리부 해변 키스씬을 360도 트래킹 쇼트로 촬영하기 위해 준비하는 현장이다. “그때만 해도 원형이동차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어요. 제일기공사라고 청계천에서 반원형 그니까 160도, 180도 돌아가는 이동차를 쓰는 경우가 있었고. 360도가 꼭 필요하다고 감독이 생각하고 찍으려하면 다 핸드헬드로 찍는 수밖에 없었다고. 정밀하게 원형이동차로 돌아가는 차가 없었어요. 근데 막상 미국 가서 기재를 다 렌트해서 썼거든. 카메라를 BL2를 썼고 거기서 원형이동차 360도 돌아가는 걸 갖다 찍을 때 아주 정밀하게 제작이 돼 있더라고. <깊고 푸른 밤> 보면은 서울에 와이프한테 영주권을 땄다고 전화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이동을 갖다가 360도 두 번은 돌아갔을 거야. 마구 빙빙빙. 업 되는 감정으로 전화하는 상태거든, 안성기가. 그거를 원형으로 돌아주니까, 찍는 나부터도 감정이 올라가더라고. 그리고 말리부 해변가에서 둘이 키스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360도 원형으로 쓴 게, 저렇게 원형이 되는 구나하는 걸 처음 느꼈을 거야, 아마.” 1990년 작품인 <꿈>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겨울에 촬영이 이뤄졌다. 낙산사 대웅전 촬영을 위해 강릉에서 양양으로 가는 길에 폭설에 갇혀 눈으로 허기를 채우며 20시간이나 걸려 촬영장소로 갔다. 폭설예보가 있었지만 스케쥴 미룰 경우 추가 경비가 발생하기 때문에 촬영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인내와 순발력이 필요했다. 강릉과 낙산사 사이 삼팔선 경계가 있는 곳에 마치 해금강을 떠올릴 것 같은 해변에 조신의 판자집을 오픈세트로 만들었다. 2, 3일 동안 눈이 오기를 기다린 뒤 동트기 직전 약 한 시간 십분 사이에 여덟 컷을 찍어야 했다. (사진31) 조신(안성기)을 찾아온 모례아손(정보석)에게 조신이 용서를 비는 장면으로 동 트기 직전, 순발력있게 촬영한 장면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처음으로 전 편을 동시녹음으로 촬영한 작품은 <베를린 리포트>(박광수, 1991)이다. 신철이 기획을 했고 오정완이 제작부로 파리 촬영에 동참했다. 사실 촬영진이 모두 파리에 도착한 뒤에도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않아 파리 현지에서 스태프들은 열흘 넘게 박광수 감독이 시나리오를 탈고하도록 초조하게 기다렸다. 촬영현장에 미리 가 시나리오를 토대로 최적의 동선을 파악하는게 몸에 배어있는 정광석 촬영감독과는 작업방식이 잘 맞지 않았다. 스테디캠 장면은 독일 현지의 스테디캠 오퍼레이터를 고용해 촬영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은 <구로 아리랑>(1989) 이후 박종원 감독과의 두 번째 작품이다. 대동흥업의 도동환 대표가 제작했고 대부분 강원도 정선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영화의 절반을 정선의 국민학교에서 찍었는데 오픈세트로 진행된 엄석대(홍경인)의 아지트는 미술팀을 정선으로 데려오는 비용을 절감하고자 스태프들이 공간을 채워 만들었다. 기차가 달려오는 교각의 철로에서 오래 버티기 내기를 하는 인물들을 촬영하는 장면은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박진감 있게 잡기 위해서는 광각렌즈로 촬영해야만 했다. 누워있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찍기 위해 교각으로 들어가 달려오는 기차를 핸드헬드로 촬영하는데 광각렌즈 특성상 피사체와의 거리감이 길어 보이니 기차가 바로 앞으로 올 때까지 버티며 촬영해야 했다. 그래서 달리는 기차에 옷깃을 스치는 긴박한 상황도 겪었다. (사진32,33,34)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오래 버티는 내기를 하고 있는 엄석대(홍경인). 사진32와 33이 광각렌즈로 촬영한 커트이다. 1973년 정창화 감독의 <흑야괴객>촬영 현장에서 자동차 추격 장면을 가까이에서 촬영하다 질주하는 자동차에 부딪힌 삼각대에 머리를 맞고 결국 현장에서 숨을 거두고 만 최호진 촬영감독을 떠올릴 만하다. 1993년에 촬영한 <투캅스>(강우석, 1993)는 1990년대 코메디 영화의 부흥을 알린 신호탄이 된 작품이다. 제작은 이화예술필름이 시작해 어음으로 계약금을 받았으나 중간에 이화예술의 임상돈 사장이 제작을 포기한다. 그러다보니 제작경험이 있고 지방장사들과 안면이 있던 강우석 감독이 직접 제작을 진두지휘 하게 된다. 강우석 감독이 발행한 새로운 어음으로 계약을 진행하며 제작이 시작되었다. 이 작품의 촬영에 있어서 인상적인 장면은 악당과 투캅스가 싸우는 영화의 마지막 총격전이다. 몹씬이라 많은 엑스트라와 자동차, 경찰까지 동원되었고 TNT를 묻고 총기를 테스트 하는 등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장면이었다. 강우석 감독이 워낙 일을 빨리 하다 보니 하루에 120커트를 촬영하는 불가능한 일정으로 계획은 세웠으나 다음날로 촬영은 이어졌고 마침 폐공장인 촬영장소에 눈이 쌓이게 된다. 개봉날짜가 잡혀있고 촬영을 미루면 비용이 발생하고 어쩔 수 없이 모든 스태프가 눈을 쓸고 흙으로 묻어 촬영을 재개시켜 이틀간 총격씬 120커트의 촬영을 마쳤다. “왜 군에서는 무엇이든지 안 되는 게 없다고 하더니 영화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안 되는 게 없어들.” (사진35,36) 강형사(박중훈)와 조형사(안성기)가 악당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장면 중 일부로 눈이 쌓인 현장을 스태프들이 모두 치우고 촬영한 장면이다. 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촬영감독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열악한 기자재와 제작환경 속에서도 저비용으로 순발력 있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 한편을 촬영해내는 능력을 길렀다. 1980, 90년대에는 새롭게 대두하는 젊은 감독들이 믿고 작품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2000년대에는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생소했던 DP시스템을 시도한 원로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촬영담은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가 촬영한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사진37) 정광석 촬영감독이 아리플렉스 필름카메라를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