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환의 그림자
- 감독
- 김미영
- 제작년도
- 2005
- 출연
- 김동신, 구본진
봉준호 감독의 영화 < 마더 >(2009)에서 엄마 혜자에게는 남들보다 조금 부족해서 앞가림 못하는 아들 도준이 있다. 아들을 지켜보느라 손가락이 잘려도 아픈 줄 모를 만큼, 도준은 소중한 존재다. 그런 아들이 살인죄로 잡혀가자, 누명을 썼다고 철썩같이 믿고 결백을 밝히려고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결백을 밝힐만한 걸 잘 기억해보라는 혜자에게 아들은 묻는다. “엄마, 그때 왜 나 죽이려고 했어?” 혜자는 잠깐 “얼마나 힘들었으면 같이 죽으려고 했겠어”라고 말하지만 금세 아들 걱정으로 생각이 넘어가고, 그 일이 응어리가 되었을 거라고 면회실 유리벽 너머에 있는 아들에게 응어리가 풀리는 혈자리에 침을 놓아 주고 싶어한다. 혜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들은 신경도 쓰지 않지만. 남들은 미친 사람 취급하고 욕해도 내 자식은 무죄라고 외치는 엄마, 문제가 된 아들을 어쩌지 못해 자신의 응어리에 침을 놓고 잊어내려고 춤추는 엄마. 종일 아들만 쳐다보는 혜자의 얼굴에서, 김혜자 배우가 연기한 엄마의 다른 자식이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하루 종일 뭐, 엄마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란 말야?” 윤인호 감독의 영화 < 마요네즈 >(1999)에서 딸 아정이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엄마는 딸에게 전화해 불안하고 힘들다고 불평하고 관심 받고 싶어한다. 늦게 들어와서 내가 힘드니 딸에게 일 그만두라 말하며 응석 부리던 철없는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는 관객에게, 남의 아들에게까지 이입해서 “너 엄마 없니?”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영화 속에서 딸의 엄마는, 아들의 엄마와 다른 존재 같다. 꼽을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영화에 아들의 엄마가 나오는데 엄마가 아들에게 공감을 호소하는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 열한번째 엄마 >( 김진성 , 2007)처럼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자식으로 보듬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 < 우리형 >( 안권태 , 2004)과 같은 영화에서처럼 아들이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은 있어도, 깊은 이해와 고통을 나누는 사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딸의 엄마는 다르다. <마요네즈>처럼 엄마는 딸에게 자신을 이해하길 강요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그렸던 영화 < 애자 >( 정기훈 , 2009)처럼 보살핌을 받는 것은 아들이여도 엄마와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사람은 딸이라고 말하는 영화도 있다. 일단 엄마와 딸이 등장하면, 둘 사이를 특별한 관계로 묶는 것은 너무 당연한 듯이 보인다. 스릴러 영화 < 오로라공주 >( 방은진 , 2005)에서 순정이 죽은 딸을 떠올리는 회상 속에서, 순정은 어린 딸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다. “아빠 이제는 알아요. 인생은 외로운 거라고.” 어린 딸은 오로라공주를 좋아하고 그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엄마가 시키는 노래를 부른다. 가사는 아빠를 이해한다는 내용이지만, 엄마가 딸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이다. 순정의 표현대로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를 부르는 이 행동은 벌이다. < 비밀은 없다 >( 이경미 , 2015)에서도 노래로 엄마와 딸의 감정을 엮는다. 딸 민진과 친구가 부르는 노래는 아빠가 바람 핀 상대에 대한 분노고, 엄마를 지키기 위해 복수할 계획을 담고 있는 가사다. 오로라공주의 딸이 중학생이라서 자발적인 공감을 형성하기 어려웠다면, <비밀의 없다>에서의 딸은 중학생인 만큼 스스로 엄마에게 공감한다. < 미성년 >( 김윤석 , 2018)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중학교 2학년인 주리와 윤아는 미성년자이지만 정신은 영화 안의 어른에 비교해 매우 성숙해있다. 그리고 그 성숙한 정신은 엄마에 대한 이해나, 엄마의 부족한 역할을 대신해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주리는 바람 핀 아빠 때문에 엄마가 상처받을까봐 고민하고, 윤아는 바람 핀 상대의 아이를 꼭 낳겠다는 엄마를 세상의 비난 속에서 지키기 위해 고민한다. 주리의 엄마 영주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윤아는 처음부터 엄마가 겪을 고통을 이해하고 걱정하고 있었고, 윤아의 엄마 미희는 엄마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엄마가 아니라 여자로 이해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엄마와 딸이 이런 식으로 묘사되는 것에 관해서, 엄마와 딸의 신체적 유사성이나 같은 여성으로 사는 것에 동질감을 느낀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이상의 혐의를 찾을 수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미성년에서 미희가 윤아에게 “엄마는 아들이 생겨서 든든해”라고 말하는 부분 같은 지점이다. 윤아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엄마의 보호자 역할까지 하는 와중에, 엄마는 왜 아직 뱃속에 있는 아들에 대해 든든함을 느끼는 것일까. <마더>에서 혜자는 도준의 혐의를 밝히기 위해 변호사를 만나고, 형사를 만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구실을 할 수 있느냐고 조롱당하는 도준이지만, 반쯤은 남성무리 안에 들어가 있는데 혜자는 이들에게 “도준이와 형제같은” 사람들이라며 도움을 호소한다. 그리고 딱 그 절반만큼 형사는 혜자에게 친절하고, 진태는 돈을 받았지만 혜자를 위해 일을 해 준다. 그 덕분에 혜자는 남자 무리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권력이든 무력이든, 힘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남자무리이고, 혜자가 이 안에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은 아들의 존재다. <비밀은 없다>에서 연홍은 남편을 비롯해, 형사와 같은 권력을 가진 남성집단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단이 없다. 결국 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받는 존재는 권력과 무력을 가지지 못한 딸의 친구이다. 힘이 있는 집단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딸보다 아들의 존재가 필요해 보이는데, 이런 증거는 < 박쥐 >( 박찬욱 , 2009)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매주 수요일, 라여사의 집에서는 마작판이 열린다. 공간은 라여사의 것이지만, 마작판의 구성원은 아들 강우의 지인들이다. 그들은 각자 의사, 형사와 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상 밖에서는 의사의 아내인 이블린과 강우의 아내 태주 쭈그리고 앉아 김밥을 마는 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명백히 눈에 보이는 계급이 존재한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 < 공동경비구역 JSA >(2000)에서 남북한 군인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게임을 하고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 계급과 소속에 상관없이 수평적인 관계에서 교류하는 장면을 보여준 바 있다. 이런 예시까지 들지 않아도, 남자는 밥상에서 밥을 먹고 여자들은 부엌 바닥에서 음식을 장만하던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강우가 죽으면서 이 권력관계는 모호해지고, 부인들은 모두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혜자처럼 죽은 아들을 통해 입성한 권력 있는 남성들에게 도움을 처하면서도, 아들자식이 없는 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전복하고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것을 제지할 능력은 없다. 이런 의심 속에서, 영화 < 박화영 >( 이환 , 2017)에서 화영은 이런 영화들이 말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거스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영은 마치 아들의 엄마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화영은 엄마를 자처하며 엄마는 맹목적으로 자신의 편이 되어주고, 자식이 때리면 때리기 좋은 곳을 내미는 희생정신이 있는 사람이다. 화영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룹 안에서 화영은 여자로 여겨지지 않는데, 화영 또한 당연히 엄마를 이해하는 다른 많은 딸들처럼 엄마를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엄마를 찾아가 욕설하고, 인터폰 너머에 있는 엄마에게 침을 뱉는다. 영화 후반부, 자신이 지켜준 가짜 딸이 자신을 희생물로 삼고 도망간 뒤에 또 새로운 딸을 데리고 와, 그들이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얘기를 끊임없이 떠든다. 그 속에서 “너네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라는 대사는 오히려 반대로 나는 들어줄 딸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맹목적으로 희생하는 엄마가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엄마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토로할 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박화영은 아름답지 않지만, 딸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 특별한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고. 아들이 권력자에게 가까이 붙어있을 수 있는 도구로 존재할 수 있다는 짐작이, 엄마의 희생적인 애정이 정말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의심스럽게 느끼게 한다. 엄마와 딸은 정말 특별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 관계를 아름답고 특별한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들의 흐름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를 되묻게 한다. 그리고 이 영화들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한국의 딸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정말 이 영화들에서처럼 엄마를 이해하고 싶은지, 정말 딸이라서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지, 무엇보다 엄마의 사랑이 아들과 딸에게 동등하다고 느끼는지. 혹은 박화영처럼 딸은 가질 수 없는 아들의 엄마를 갈망하고 있는지를.
현서를 찾으려는 강두 가족의 사투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산업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계에 분 산업의 활기는 2006년 정점을 찍었다. 2003년부터 80편대를 기록하던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2006년을 기점으로 100편을 넘어섰다. 2001년 50%를 넘어 2004년부터 60%대에 육박하던 한국영화 점유율도 급기야 2006년 63.8%를 기록했다. 현재(2018년 기준 50.9%)까지도 가장 높은 수치로 기록된 비율이다. 이처럼 2006년이 한국 영화 산업에서 가능한 최대치를 보여준 해였다면, 2007년 이후는 위기 혹은 조정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 2006년 7월 긴 논란 끝에 결국 스크린쿼터 즉 한국영화 의무 상영제도가 73일로 축소되었고, 때마침 버팀목이라도 무너진 듯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세가 거세졌으며, 한국영화 관객은 감소했고 수익률과 수출 실적 또한 하락했다. 2007년 50%로 내려선 한국영화 점유율은 2008년 42.1%까지 떨어졌다. 2007년부터 시작된 산업의 하락세가 불과 2년 만에 극복된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2009년 시장과 관객의 신뢰를 회복하기 시작하더니, 2011년부터는 극장 관객과 매출액이 꾸준한 증가세를 보였다. 한국영화도 4년 만에 다시 시장점유율 50%대를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2012년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산업은 관객 수, 매출액, 수익성 면에서 도약하며 불황의 그늘을 완전히 떨쳐냈다. 한국영화 점유율도 다시 60%대에 육박하게 된다. 2013년 영화산업은 다시 호황을 맞이한다. ‘천만 영화’가 말해주는 것들 2004년 < 실미도 >(강우석, 2003)와 < 태극기 휘날리며 >(강제규, 2004)로 시작된 천만 관객 영화가 한국 영화 산업의 상승 국면과 연동되어 등장한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2005년 < 왕의 남자 >(이준익)가 1,200만, 2006년 < 괴물 >(봉준호)이 1,3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2000년대 중반 영화 산업의 활력을 대변했다. 그리고 2년간의 체질 개선을 거친 2009년 < 해운대 >(윤제균)가 천만 영화 대열에 다시 합류했다. 따져보면 천만 영화가 등장한 것은 산업이 회복됐다는 신호가 강해진 시기다. 이후에도 2012년 < 도둑들 >(최동훈) < 광해, 왕이 된 남자 >(추창민), 2013년 < 7번방의 선물 >(이환경) < 변호인 >(양우석), 2014년 < 명량 >(김한민) < 국제시장 >(윤제균), 2015년 < 암살 >(최동훈) < 베테랑 >(류승완) 등 매년 2편씩의 천만 영화가 잇달아 등장하며, 한국영화산업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한국영화의 천만 관객 동원은 무엇보다 영화산업의 양적 규모를 확대해나가는 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산업적 의미가 큰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천만 영화는 제작사의 역량이나 투자배급사의 물량 공세만으로 달성되기는 힘들다. 넓은 층위의 관객들에게 일정한 공감을 얻어야 하는 동시에 개봉 시점 한국 사회의 분위기나 관심사와도 들어맞아야 한다. 어쩌면 천만이라는 숫자는, 영화 자체가 가진 힘을 넘어선 일종의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천만 관객을 달성한 영화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하나의 장르나 경향으로 일별하기 힘든, 각기 당대의 복잡한 맥락이 새겨져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괴물>은 대형 배급사가 150억 원의 총 제작비를 투여하고 스크린 독과점 이슈까지 발생시킨 영화였지만, 영화적으로는 다른 천만 영화들이 목표로 한 대중적 화법에서 가장 벗어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봉준호라는 특별한 감독이 산업과 행복하게 결합한 덕분이었다. 봉준호 감독 영화광 출신의 감독, 글로벌 영화로 나아가다 한국의 ‘영화청년’은 어떻게 감독이 될 수 있을까. 봉준호 는 한국에서 감독이 되려는 영화청년들에게 하나의 롤모델이 된 감독이다. 영화광으로 출발한 그가 개척한 길은, 현재 영화감독을 꿈꾸는 이들에게 인상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이는 그의 구체적인 행보뿐만 아니라 독특한 감각의 영화 세계, 양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1969년생인 봉준호는 대학에서는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로 입학해 영화를 공부했다. 대학 동아리에서 첫 단편영화 < 백색인 >(1994)을 만들었고, 영화아카데미에서는 < 프레임 속의 기억 >(1994)과 졸업 작품으로 < 지리멸렬 >(1994)을 연출했다. 이후 충무로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다. <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 >(김유진·장현수·정지영·박철수·박종원·장길수·강우석, 1996)에서 각색과 연출부를 경험했고, < 모텔 선인장 >(박기용, 1997)에서 각본과 조감독을 맡았고, < 유령 >(민병천, 1999)의 각본도 썼다. 많은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6년가량 그저 버텨보는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감독 데뷔의 기회는 후자의 두 작품을 제작한 차승재의 우노필름에서 얻었다. 한 대학 시간강사가 일으킨 소동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빗대 보는 < 플란다스의 개 >(2000)는 개봉 당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인상적인 데뷔작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작품이다. 특히 봉준호 영화 세계의 원형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꼭 다시 확인해야 할 영화이기도 하다. 2003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1980년대의 시대상을 투영해 풀어낸 < 살인의 추억 >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성공하며 연출 역량을 인정받았고, 2006년 세 번째 장편 <괴물> 역시 국내를 넘어선 흥행과 비평적 지지를 받으며 봉준호는 21세기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의 반열에 오른다. 2009년 네 번째 장편 < 마더 >는 모성을 미스터리의 소재로 삼아 한국 사회의 단면을 포착하며 국내외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2013년 450억 규모의 다국적 프로젝트 <설국열차>로 글로벌 영화 신에 성공적으로 진출했고, 2017년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가 제작한 < 옥자 >로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처음 진출하기도 했다. 봉준호는 이제 한국영화를 넘어, 그의 이름 자체가 영화 브랜드가 된 국제적인 감독이 되었다. 현서가 갇혀 있는 하수구 공간 미학으로 승화된 스타일, 한국사회에 대해 발언하다 영화 <괴물>이 탁월한 지점은, ‘괴수영화’라는 장르적 표면(환상)과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에 대한 발언(리얼리티)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아낸 것이다. 이는 영화의 오프닝부터 정교하게 설계된다. 첫 장면은 2000년 시점의 미8군 용산기지 영안실, 감독은 수평 구도의 미장센과 인물의 어깨너머 쇼트를 활용해 관객을 영화 속으로 이끈다. 2000년 실제 발생한 사건인 주한 미군의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을 직접 인용한 영화는, 바로 2002년 한강에서 낚시하던 사람들이 돌연변이 물고기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2006년 한 중소기업 사장이 한강으로 떨어져 자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는 극 중 동료/관객에게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 잘 살아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한강 밑으로 빠져든다. 우리 소시민들은 도대체 어떻게 둔하게 살고 있는가. 빗물이 떨어지는 수직 구도의 한강을 배경으로 ‘괴물’의 타이틀이 나오고, 영화는 한강변 매점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노란 염색 머리의 남성 강두(송강호)를 보여준다. 아버지 희봉(변희봉)이 운영하는 매점에서 딸 현서(고아성)와 같이 사는 그는 한눈에 봐도 좀 모자란 사람이다. 하지만 강두는 딸에 대해서만은 절대적인 애정을 보이는 인물로, 이후 영화가 진행하면서 현서와 관련된 일이라면 순간적으로 똑똑해지고 괴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희봉과 현서가 매점 안에서 고모 남주(배두나)의 양궁 대회 중계를 보고 있는 동안 한강변에 괴생물체가 나타난다. 한강을 찾은 시민들과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 낀 강두는 그들과 같이 괴물에게 먹을 것을 던지는 등 장난을 친다. 우매한 대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평 구도가 인상적인 장면이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괴물이 지상으로 올라와 공격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혼비백산한다. 백주 대낮 살육의 아수라장이 펼쳐지는 가운데, 영화는 한강 다리 위 버스 속 할머니의 시점으로 그 전경을 보여주며 현실감을 놓치지 않는다. 강두는 현서의 손을 잡고 도망가다 놓치고, 현서를 꼬리에 감은 괴물은 한강 속으로 사라진다. 희생자들 가족이 집결한 단체 장례식장, 희봉의 말대로 현서 덕에 남주와 남동생 남일(박해일)까지 모든 가족이 모이게 된다. 죽을 힘을 다해 현서를 찾는 이들은 국가가 아닌 강두의 가족이다. 2014년 4월 전 국민의 비극이 된 사고처럼, 국가 시스템은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국민의 생존을 방해할 뿐이다. 시민들 역시 행동은 고사하고 감정적으로도 다른 이의 불행에 연대하지 못한 채, 강두 가족의 사투를 방관한다. 어쩌면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는 전광판의 TV 뉴스를 보며 횡단보도에 서 있는 퇴근길 직장인들의 모습에서 압축적으로 묘사된다. 역시 수평 구도를 활용한 이 장면에서 사람들은 실체도 없는 바이러스 보도에 이목을 빼앗겨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할 뿐이다. 과연 영화 속 괴물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자본주의, 국가주의 혹은 미국이라는 패권국에 대한 비판일까. 아니면 자각하지 못하는 대중, 개인의 이기심 나아가 휴머니즘의 상실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의 복합체가 괴물일 것이다. 권력 피라미드의 하층부에서 수평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민중은, 괴물에 잡히는 순간 수직 구도의 하수구로 떨어져 살아 나오지 못한다.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한강으로 떨어져 자살한 남성이 경고했듯이, 우리 소시민들은 서로 연대하지 못하고 자신만 챙기다가 계급 구도의 가장 밑바닥으로 하강해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를 앞둔 순간, 괴물은 현서와 남자아이를 삼킨 채 다시 땅으로 올라온다. 결국 괴물을 물리친 것은 현서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진한 강두 가족이다. 그리고 가족들은 현서의 시신을 찾는다. 끝내 감독은 해피 엔딩을 선택하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은 눈이 내리는 한강변의 매점이다. 이제 강두는 현서가 돌보던 남자아이와 단둘이 산다. 하지만 새로운 가족을 지키는 이는 여전히 총을 놓을 수 없는 검은 머리의 강두다. 에필로그 현재 한국영화는 150억 원 이상의 고예산을 투여하는 대작 영화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만, 2006년 <괴물>이 만들어낸 정점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지점은 바로 한국사회에 대한 발언과 작가주의적 연출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갔으면서도 천만 이상의 관객으로부터 응답받은 것, 즉 작품성과 흥행성을 완벽하게 충족시켰다는 의미의 성취다. 감독의 발언은 선동이라기보다 세련된 우화에 가까웠고, 섬세한 연출 스타일은 미학으로 승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중 상업영화의 오랜 경계까지 무너뜨렸다. 지금 ‘천만 영화’라는 욕망을 품고 선보이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과연 <괴물>이 도달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가? 흥행 성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주목받지 못하는 고예산 영화들이 반복되는 현재야말로, 산업의 양적 성장을 질적 수준으로 전환시킨 13년 전의 <괴물>을 복기해볼 시점일 것이다. 2016년 7월호부터 시작한 ‘한국영화사 100년’의 연재를 예정했던 20회보다 빠른 18회로 마치게 되었다. 한국영화 제작이 처음 운을 뗀 김도산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부터 2000년대 박찬욱과 봉준호의 작품까지, 이 연재는 각 5년의 시기마다 주목해야 할 감독과 그 영화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예술영화보다는 대중영화라는 장에서, 작가주의를 견지하면서도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을 선정했고, 대체로 그 작품은 시대를 대표하는 상업영화로 기록된 경우였다. 2010년대를 대표하는 두 감독과 영화를 선정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연재 초기부터 고민을 멈추지 못한 2010년대 이후의 두 감독을 선정하는 작업을 일단 유보해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물론 필자 역시 여러분이 떠올릴 몇몇 감독을 생각했고 그들이 훌륭한 작품을 선보였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대 박찬욱, 봉준호처럼 대중영화와 작가주의 영화의 경계를 지워낸 감독이 등장했느냐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기 힘들 것 같다. 남겨진 숙제는 다른 지면에서 보여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이 글을 마친다. 그동안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창작자가 통과한 세상은 독립영화에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어 왔다. 경험적 근접성에 기인해서일까. 교복 입은 10대의 이야기는 언제나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가족과 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서사는 유사한 구조와 전개 속에 있곤 하지만, 작은 사회로서 간단치 않은 문제를 품어 왔다. 가출팸을 소재로 한 영화 역시 그의 연장에 있다. 필자의 좁은 삶의 테두리에선 가출팸 청소년을 근접해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한국의 독립영화에서였다. 집인지 수용시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공간, 대개 청소년이지만 더러 어린아이와 어른이 끼기도 한 무리는, 때로는 여관을 전전하고 때로는 공공화장실에 몸을 의탁하며 불안한 주거를 이어갔다. 빼곡하게 쌓여 있는 신발들, 쓰레기더미 같은 방, 한 줄에 대화에도 섞이는 욕설 그리고 위험한 범죄들... 이상한 호칭만이 패밀리를 환기하는 유일한 끈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이해 불가였지만, 영화 속에서 자주 상황을 접하다 보니 간혹 이들은 안다고 생각했다. 창작자들이 자극적 소재를 너무 쉽게 차용하는 것 아닌가 의심하며 엄격한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꿈과 환상이라는 영화적 판타지로 우아하게 약자를 감쌌던 < 꿈의 제인 >(2016, 조현훈 )에 이르러선 소재적 절정에 이르렀다 싶었다. 하지만 이환 감독의 장편 데뷔작 < 박화영 >(2017, 이환 )은 내가 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친 주인공 박화영은 가족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집을 아지트 삼아 가상 패밀리를 구성한다. 친구들에게 그녀의 집은 가출의 근거지이자 일상적 놀이터이다. 박화영은 그들에게 엄마로 불리지만 사실은 권력의 제일 말단에 있다. 진짜 엄마와 악다구니 전쟁을 벌여 돈을 구하고 밥과 빨래에 청소까지 온몸을 다해 패밀리를 부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매 맞는 아내가 되어 자식의 흠결을 지킨다. 그룹의 우두머리인 ‘아빠(영재)’는 폭력의 화신으로 현현하고, 친구들은 기생충처럼 박화영을 착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화영)’에겐 예쁜 ‘딸(미정)’이 위안이다. 미정은 영악하게 철저히 그것을 이용한다. 패밀리의 관계는 끔찍하고 공허하다. 무리의 모두가 이를 알고 있다. 박화영만이 그것을 애써 모른 척할 뿐이다. 박화영은 왜 그토록 미워했던 엄마가 필사적으로 되고자 했던가? <박화영>에선 가족을 부정하는 이들은 스스로 가족이 되어 서로를 모멸한다. ‘패밀리’라는 퇴행적 놀이를 통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위악의 근거를 조롱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탈선한 10대 무리에겐 사실 세상이 온통 적이다. 예외적으로 등장하는 영화 속 어른들은 하나같이 나약하거나, 추악하거나, 비겁하다. 영화는 커다랗게는 무책임한 사회를 그 배경에 두고 있긴 하나, 이를 직접적으로 영화에 끌어들이지 않는다. 특히 이러한 구조를 통해 에둘러 캐릭터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인물의 진정성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대체 이들은 인물로서 개연성을 갖고 있는가?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 불량한 청년들의 일상이 저다지도 선정적인 필요가 있을까? 대답컨대 <박화영>의 힘은 무리의 인물들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리얼리티에 있다. 그들은 창조된 허구에 인물이면서 엄연하게 세상에 존재하는 자들이다. 난무하는 욕설과 폭력에 눈을 흘기기엔, 설득력 없는 센 장면의 연속이라 몰아가기엔, 진짜 현실이 강력한 알리바이로써 영화 저 너머에 버티고 있다. 그것을 현실의 하나로 인정하냐 마냐가 관객의 선택으로서 이 영화를 판단하는 혹은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이자 출발이 될 것이다. <박화영>의 영화적 시간은 미정 대신 곤경을 겪은 화영의 현재를 기준으로 한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과거 장면은 4:3의 좁은 화면비율을 택했다. 꽉 막힌 화면 안에서 인물의 난삽한 생활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 속에는 어떠한 여유도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현재의 화면은 상대적으로 넓고 비어 있다. 단 몇 개의 컷으로 짧게 등장하는 현재의 시간엔 극악한 과거의 무질서를 찾을 수는 없지만, 박화영이 겪는 외로움이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더불어 여기서 진짜 엄마가 등장하는데, 엄마는 화영에게 돈을 건네고 방을 구해주나, 화영을 단 한 순간도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는다. 한때 칼부림까지 했던 화영에 대한 넌덜머리 나는 반감으론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현재의 시간에서 등장하는 공간은 인물의 정서를 종종 대변한다. 새롭게 살아갈 텅 빈 방은 화영이 상실감과 고독을, 엄마의 황량한 일터는 생활의 고단함을, 화영과 엄마가 만나는 편의점은 차 한 잔 나눌 여유조차 없는 메마른 관계를 은유한다. 과거의 신이 인물의 퍼포먼스로 극단적인 극을 이어간다면, 현재는 지금 박화영이 처한 상황을 말없이 보여준다. 한편 그녀를 철저하게 이용한 주변인들에게서 잔인한 사회의 우화를 발견한다. 오랜만에 미정과 재회한 후 박화영은 자신의 인생이 미정에겐 그저 불장난에 불과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박화영은 끝까지 각성하지 않는다. 박화영에겐 ‘가족’ 놀이는 벼랑에 놓인 자의 절박한 선택처럼 보인다.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 속에서 그것이 진짜이던 가짜이건 자신이 그리워했던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은 그녀에겐 거의 본능에 가까운 무엇처럼 보인다. 그러하기에 박화영은 또다시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퇴행을 반복한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는 더욱더 기이한 슬픔이 동반된다. 다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의 반복은 어쩌면 새로울 수 있다는 기대 또한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