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문
- 감독
- 이용민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이민자, 이예춘, 이향, 김지미, 김석훈, 박노식, 김운하, 이빈화, 최남현, 황정순, 박암, 최성호, 김칠성, 남춘역, 서월영, 이업동, 백송, 이성일, 지방열, 박일, 박현화, 유춘, 김왕국, 문일봉, 김기범, 조석근, 전흑천, 김용학, 김양, 이영호, 정영수, 임해림, 박광진, 윤일주
<대불 +> 작년에는 전반적으로 흉작 또는 주목할 만한 영화가 없었다는 평들이 많지만, 아시아(독립)영화들로 보자면 나름대로 의미 있고 흥미로운 한 해였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겠다. 성장하는 영화산업 규모와 더불어 급격하게 변화와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등장하는 새로운 세대의 아시아 영화들 또는 주목할 만한 감독들, 혹은 어떤 경향을 보여주는 몇몇 작품을 통해 돌아보는 2017년 아시아독립영화에 대한 일종의 일람표이자 짧은 코멘트. 올해 중화권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영화는 <대불+>이다. 동명의 단편영화를 장편으로 확장하면서, 아이폰과 아이폰 플러스의 차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대불+>로 타이틀을 붙인 이 대담하고 어두운 블랙코미디 영화는 대만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오던 후앙신야오 감독의 첫 번째 장편극영화인 <대불+>의 탄생과정에는 <일로순풍>과 <실혼>의 감독 청몽홍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추앙신야오의 단편을 본 청몽홍 감독이 자신이 제작자로 참여할 테니 장편 버전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던 것. 각본가이자 감독인 청몽홍이 촬영감독으로 참여할 때는 ‘나카시마 나가오Nakashima Nagao’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데, <대불+>에는 제작자로 그리고 촬영을 맡으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리고 <일로순풍>에 출연했던 배우 대립인(다이리 런, 레온 다이-배우 계륜미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홍콩 우산혁명에 대한 적극적 지지 이후 중국에서의 활동에 상당한 제한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불상공장의 사장 케빈 역으로 출연해 중심을 잡아주었다. 영화는 거대한 청동 불상을 제조하는 공장이 배경이다. 공장 야간경비원 피클은 고물수집상이자 친구인 벨리 버튼과 함께 매일 밤 도색잡지나 뒤적이며 시간을 보낸다. 무료해진 둘은 공장 사장인 케빈의 고급차량에 달려있던 블랙박스 영상을 돌려보기 시작하는데, 사장의 은밀한 사생활과 불륜이 담긴 영상을 보던 중 살인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우연히 스치듯 만난 적이 있는 사장의 내연녀와 한밤의 살인사건, 사라진 그녀, 최근 공정보다 훨씬 빨리 완성된 거대한 불상, 그리고 피클과 벨리 버튼에게 다가오는 위협의 그림자. 세련된 만듦새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대담한 형식적 실험을 시도하는 <대불+>은 대만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코엔 형제를 연상시키는 블랙코미디,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확장하는 사건의 고리 등으로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두 가지 정도를 언급하자면 우선, 흑백과 컬러의 대비를 통한 계급 관계에 대한 노골적인 언급. 피클과 벨리 버튼이 등장하는 비루한 일상은 흑백으로, 사장 케빈이 등장하는 블랙박스 영상은 컬러로 처리하는데, 소외계층의 파토스를 담고 싶었다는 감독의 설명처럼, 영화는 둘의 비루함과 무력감은 단조로운 모노톤으로 담아내고, 사장 케빈의 일상이나 정치인, 종교인, 지역 유지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선명한 컬러로 담아내면서 분명한 의도를 드러낸다. 그리고 관음증의 세계. 자동차에서 벌어지는 내연녀와의 불륜 장면, 고속도로에서 싸우는 장면이나 러브호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는 장면 등은 실제 블랙박스 영상처럼 보이는데, TV에서나 접하던 가진 자들과 유한계급들의 은밀한 세계를 피클과 벨리 버튼과 함께 엿보면서 관객들도 두 세계를 함께 오가는 영화적 체험을 하게 된다.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2017년 단연 주목받았던 국가는 인도네시아다.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 몰리 수리야 감독의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은 한 여성이 자신이 살해한 남성의 잘린 머리를 들고 경찰서로 가서 자수한 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거장 가린 누그로호가 작업한 3페이지의 트리트먼트로 시작된 프로젝트이자 부산국제영화제 APM에서도 주목을 받았던 작품. 인도네시아 동부 숨바섬의 아름답지만 황량한 느낌의 사막을 공간으로, 복수와 구원이라는 서부극의 전통적인 모티브를 살짝 변형하고 여러 장르를 혼합한 독특한 형식과 색깔로 올해 최고의 아시아영화로 호평받았다. 잘린 남성의 머리를 들고 경찰서에 가기 위해 황토색 사막을 가로지르는, 서부극 카우보이 같은 말리나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영화로 인도네시아 예술영화를 주도하는 최고의 제작진이 참여해 프로덕션 디자인, 촬영, 음악까지 최상의 결과물로 완성했다. 상반기에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이 있었다면 하반기는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초청된 <거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로 세계를 매혹했던 카밀라 안디니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단연 주목을 받았다. 병상에 누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쌍둥이 남동생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어린 동생을 떠나보내야 하는 누나 탄트리의 내면과 불안한 심리가 춤과 노래, 그리고 놀이를 통해 환상적이고 마법적인 이미지들로 펼쳐진다. 3년전 론칭한 토론토국제영화제의 첫 경쟁부문인 플랫폼은 주로 서양권 영화들로 채워지는데(<문라이트>와 <재키>와 같은 영화들이 여기서 경쟁했다) 아시아영화로는 드물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초청을 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인도네시아 독립 예술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이자 든든한 후견인을 자임하는 가린 누그로호의 딸로도 잘 알려져 있는 카밀라 안디니는 족자카르타에서 감독, 제작자인 이파 이스판샤와 함께 족자카르타 영화학교에서 강의와 연출지도를 하고 있다. 족자카르타에서는 매해 12월이면 족자-넷팩아시아영화제가 열리는데, 가린 누그로호와 이파, 그리고 감독 이스마일 바스베스(<회전목마는 멈추지 않는다>)가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16년에 4천 명 정도에 불과했던 관객 수가 올해의 경우, 3배 가까운 12,000명 정도로 증가했고, 무엇보다 관객들이 대부분 20대나 대학생들이어서 역동적이고 열정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 2004년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마련한 특별전 <가린과 넥스트 제너레이션: 인도네시아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에서 가린 이후 그의 제자, 후배 감독과 제작자들이 새로운 산업적 토대와 미학구축을 통해 성과를 거뒀고 점점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적이 있는데, 당시 하나의 주요한 경향이자 동력으로 언급했던 ‘여성파워’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는 2017년이었다. <섹시 두르가> <뉴턴> 마지막으로 인도영화. 방대한 시장에 비해 독립. 예술영화는 여전히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인도영화는 2013년 <런치박스>의 국제적 성공(2008년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미친 영화도 아주 크다) 이후 새로운 변화를 위한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발리우드 상업영화의 자장 아래서 예술. 독립영화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테스트가 활발한데, 2017년의 경우는 그 가능성의 희망을 본 해이기도, 절망을 확인한 해이기도 하다. 시작은 로테르담영화제에서 타이거상을 수상한 사날 쿠마르 사시다란 감독의 <섹시 두르가 Sexy Durga>다. 시나리오는 물론 스토리도 없이 배우와 소규모 팀을 꾸려 22일 동안 촬영한 이 저예산 말라야람어 영화는 인도 북부출신 여성과 케랄라 출신 남성이 야반도주를 시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둠이 짙게 내린 도로를 따라 역을 향해 걷는 커플에게 지나가는 승합차의 남성들이 합승을 제안하고, 차량에 올라탄 이들은 지옥을 경험한다. 다문화, 다인종으로 구성된 인도 사회에 내재된 공포를 그로테스크하게 담아내며 호평을 받은 영화지만, 오랫동안 인도 영화계를 짓눌러온 검열의 날을 비껴가진 못했는데, <S. Durga>로 제목을 바꾸고 일부 장면을 덜어냈지만 지금까지 자국 내 상영은 물론 개봉까지 험난한 과정을 겪고 있다. 2017년 인도독립영화인들에게 가장 큰 희망과 기대를 안겨준 작품은 아미트 마수카 감독의 <뉴턴>이다.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에서 첫 공개된 이 영화는 마오주의 반군과 정부군이 대립하고 있는 차티스가르주 분쟁지역을 배경으로, 갓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대기 중인 뉴턴이 이 지역주민들의 투표지원 업무에 자원하면서 생기는 과정을 따라간다. 강직하지만 융통성 없는 공무원 뉴턴과 지역을 관할하는 정부군 소속 군인들, 그리고 선거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변방 마을 주민들을 통해 인도 사회를 재치 있게 풍자하는 이 블랙코미디는 인도독립영화인들과 시네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새로운 대안 영화로까지 평가를 받은 작품. 이후 개봉을 통해서 나름의 성과를 거뒀으며 특히 쟁쟁한 상업영화들을 제치고 2018년 아카데미영화상 외국어영화상 부문 인도 출품작으로 선정되어 화제를 모았다. 아쉽게도 <섹시 두르가>는 아직 한국에서 소개된 적이 없으며, <뉴턴>의 경우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된바 있다.
최하원 감독(1937-)의 인상은 참 편안하다. 넉넉하고 여유있어 보이는 외모와 조용한 목소리, 다소 느린 듯한 말투는 세상사의 번뇌에서 초탈한 것이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 역시 보통의 사람이고, 영화판 일이라는 것이 ''사람 좋다''는 평가만으로 해결되는게 아니며, 30여년이 넘는 세월을 그 영화계에서 꾸준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내공과 뚝심이 대가의 경지에 들었다고 할만하지만 그런 관록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천성에서 오는 것인지, 부단한 자기절제와 노력으로 얻은 결과인지는 선뜻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독실한 신심(信心)에서 우러난 수양의 결과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가 영화계에서도 손꼽을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가 만든 영화들 역시 그의 인상만큼이나 부드럽고 편안하다는 느낌이 든다. 최하원 감독은 1937년, 서울 삼청동에서 나서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교사인 부친 최근학과 어머니 김우순 사이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난 그는 재동 초등학교와 경복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그의 영화계 경력은 먼저 연극 분야에서 시작했다. 연극에 쏠린 관심이 결국 영화 인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연극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부터. 당시만 해도 연극이나 영화를 하겠다면 뭔가 바람든 경박 취향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심할 때였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연극은 현실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였다. 대본을 구해서 배역을 정하고 연기를 연습하고 무대에서 공연하기 까지의 과정은 언제나 즐거운 도전이었다. 연극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계속 이어졌다. 당시 연세대학교에는 연희 극회(현재 연세 극회)라는 극단이 있었고, 최하원 은 열렬한 단원이 되었다. 극단 활동에서는 주로 연출을 담당했으나 학과 공부에서는 희곡 쓰는 법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희곡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 시나리오 작업이었다. 연극을 구성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만큼이나 시나리오를 쓰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당시의 시나리오는 스토리와 대사를 중심으로 한 문학적 서사 구조를 갖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희곡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극 지망생 최하원 을 영화인 최하원으로 바꾼 것도 결국 시나리오 때문이었다. 그가 쓴 시나리오 <무승부>가 ''시나리오 문예''라는 잡지에서 시행한 신인작품 공모에서 당선된 것이다. 신진 시나리오 작가로 인정받는 계기였다. 군복무를 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때 본명 최승용 대신 필명인 최하원을 자신의 이름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시나리오 쓰는 일은 적당한 취미가 아니라 본격적인 작업의 대상으로 떠 올랐고 더 나아가 영화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시나리오 공모 당선을 계기로 군에서 제대한 그는 시나리오 문예사에서 편집 일을 시작했다. 영화계에 한발짝 더 다가서는 일이었다. 시간을 쪼개서 시나리오 쓰는 일을 계속했고, 그렇게 쓴 시나리오를 들고 여러 감독들을 찾아 다녔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신경균 , 이병일 감독을 비롯하여 신상옥 감독, 이성구 감독 등을 만났고, 그들은 젊은 영화 지망생의 열정과 재능을 호의로 받아주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이성구 감독은 그를 자기의 문하생으로 받아주었다. 최하원은 이성구 감독의 연출부에서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시작했다. 수년의 연출부 수업을 하며 영화만드는 과정을 익히고, 영화계 돌아가는 물리를 체득하는 과정을 거친 그가 한명의 감독으로 당당히 자립하게 된 것은 < 나무들 비탈에 서다 >(한국영화사 제작, 1968년)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다. 황순원 의 원작을 각색한 이 영화는 애욕의 열정 때문에 고뇌하는 젊은이의 갈등과 좌절을 묘사하고 있는 이 영화는 사건 중심의 스토리를 평면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리를 드러내는데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런 스타일은 그의 스승인 이성구 감독이 관심을 둔 표현 양식이기도 했지만 최하원 은 젊은 감각과 문학적 감수성으로 그것을 더욱 세련되게 만들었다. 한국영화계에서 오랫동안 예술적 성향의 관심을 상징하는 ''문예영화'' 계열에서도 주목할만 한 경우였다. 이같은 그의 경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화가 < 독짓는 늙은이 >(1969) < 무녀도 >(1972) 같은 후속자들이다. 역시 황순원 의 원작을 각색한 <독짓는 늙은이>는 평생 독을 굽는 일을 하던 도공이 인생의 마지막에서 맞는 애환과 허탈한 심정을 흙과 불의 이미지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난에 몰려 젊은 도공과 함께 도망친 아내에 대한 원망, 젊은이에게 밀려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닥치는 몰락의 쓸쓸함을 묘사하고 있는 원작의 비장함은 영화에서는 토속적인 열망과 갈등의 모습으로 시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이 묘사하고 있는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도 결코 원작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단순히 스토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적인 감성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작과 영화의 서로 다른 특성을 충분히 해석하고 있을 때 드러낼 수 있는 결과다. 문예감독 최하원 의 인상은 < 무녀도 >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김동리 의 원작을 각색한 이 영화는 캐스팅 과정에서 주인공 을화 역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윤정희 와 김지미 두 여배우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것으로 더욱 유명했다. 당시 내로라하는 인기와 명성을 지키고 있던 당대의 두 여배우가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경쟁을 벌인 일은 영화계는 물론 세인들의 관심에 크게 오르내린 사건이 되었지만 그만큼 영화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문예영화를 만드는 최하원 감독의 역량과 평가,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인정이기도 했다. 결국 윤정희가 주연을 맡은 <무녀도>는 70년대 문예영화의 성과작으로 꼽힐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감독 최하원 의 영화세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종교영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여러가진 사건을 소재로 한 종교영화, 보다 구체적으로는 천주교 박해사를 영상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 새남터의 북소리 >(1972)라는 영화를 통해 천주교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모습을 다룬 적이 있는 그는 < 초대받은 사람들 >(1981) < 초대받은 성웅들 >(1984)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종교 소재에 접근했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종교영화가 나름대로 흥행에서 기대를 걸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하기도 했겠지만 최하원 감독의 생각은, 본인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만큼 한국 가톨릭의 역사를 조명하는 일은 자신에게 부여된 중요한 과업이라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초대 받은 --->은 3부작으로 구상하고 있는 경우로, 두편을 만든 이후 세 번째 작품을 만들 기회가 없었지만 언젠가는 완성해야할 염원으로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196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이르는 기간의 한국영화는 양적으로는 전성기를 누리면서 질적으로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모순과 혼돈의 양상을 보였다. 1962년 영화법 제정을 할 때 정부가 의도했던 방향은 영화사의 대형화를 통한 기업적 성장과 경쟁력 확보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영화사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스튜디오와 촬영장비, 일정 기준 이상의 배우 전속 등의 기준을 갖추어야 했고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회사에 대해서만 외국영화를 수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영화사 설립은 등록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허가제나 다름 없는 상태로 운영되었다. 20개 내외의 영화사가 독과점 형태로 제작과 수입을 장악했다.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사에 한해 외국영화 수입권을 부여한 것은 한국영화 제작을 그만큼 성실하게 하라는 주문이었고, 그 과정에서 예측되는 경영의 부담을 외국영화 수입으로 보전하라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영화를 열심히 만들면 그 보상으로 외국영화 수입권을 주겠다는 이 정책은, 현장에서는 철저히 왜곡되었다. 외국영화 수입권을 따기 위해 마지못해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권력은 영화를 대중 선전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보였고, 이는 영화제작 경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좋은 영화''의 기준도 작품의 수준이나 미학적 가치보다도 반공이념의 강화나 ''국민총화''에 기여할 수 있는 선전으로서의 기능을 더욱 중요하게 여길 정도였다. 사회적 현실과는 무관하게 이른바 ''호스테스 영화''나 고등학생들의 학교생황을 소재로 한 ''하이틴 영화''가 유행했던 것은 그같은 상황의 반면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최하원 은 ''유망한 젊은 감독''으로 주목받았던 것은 영화적 논리나 감성이 누구보다도 분명했고, 여러 영화들을 통해 그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최하원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감독의 역할''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좋은 영화란 관객이 원하는 것만 보여주기 보다는 감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성실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관객만을 위한 - 흥행을 위한-영화가 관객에게 외면 당하면 그것은 그저 필름에 지나지 않지만, 진정한 작가 정신을 가지고 만든 작품이라면 흥행에서는 실패하더라도 그것은 작품으로 남을 것'이라는 믿음은 영화를 바라보는 최하원 감독의 인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말이다. <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이후 < 화랑대 >(1990)라는 영화를 연출하기까지 모두 27편을 만든 최하원 감독은 90년대 들어서는 영화진흥공사 부설 영화아카데미 주임교수를 비롯하여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교수를 역임하며 현장의 경험을 젊은 영화지망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했고, 영화진흥공사 전무로 재작하며 진흥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매사를 성실하면서도 무난하게 처리하는 그의 스타일이 영화 현장 밖에서도 중요하게 대우를 받은 셈이다. 희문 (영화평론가, 상명대교수) / 2002년 <프로필> 1937년 서울 생 경복고, 연세대 국문과 졸업 1968 < 나무들 비탈에 서다 > 데뷔 1985 영화아카데미 주임교수 1987 단국대 예술대 연극영화과 교수 1995 영화진흥공사 진흥이사(전무) 작품명 1968 나무들 비탈에 서다 1969 독짓는 늙은이 1971 고백 1972 새남터의 북소리 / 무녀도 1973 다정다한 / 서울의 연인 /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쓰 1974 갈매기의 꿈 1975 타인의 숨결 / 마지막 포옹 / 소 1976 학도의용군 / 나는 살아야 한다 / 비정지대 1977 표적 1978 비색 / 30일간의 야유회 1980 메아리 / 겨울사랑 1981 종군수첩 / 초대받은 사람들 / 미사해설 1982 경의선 1984 초대받은 성웅들 1990 화랑대 수상 경력 < 나무들 비탈에 서다 >-제5회 백상대상 신인감독상, 제8회 영화예술상 신인감독상 < 독짓는 늙은이 >-제7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작품상 , 제5회 인도영화제 특별상 < 무녀도 >-아세아영화제 작품상 < 다정다한 >- 제3회 테헤란영화제 특별상 < 초대받은 사람들 >-제20회 대종상 작품상
한국영화계에서 영화작가를 논할 때, 편애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작가영화를 거론하되 리얼리즘 색채가 강한 작가를 우위에 두는 것으로 멜로드라마 작품보다 사회성드라마를 연출하는 감독을 영화작가로 대접하겠다는 한국영화비평계의 편향성이다. 정진우 는 ''사랑의 부재''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랑의 작가''로 < 초우 >(1966년) 이후 멜로애정물에 애착을 갖고 있는 영화작가이다. 정진우가 말하는 사랑의 부재는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에서부터 일제와 민족분단 그리고 군부독재 권력에 의해 무너진 인간적 존재에 대한 물음까지 광범위하다. 어쨋든 사랑타령하는 영화를 주로 만들어 왔던 그의 영화에 대한 영화작가로서의 홀대는 영화비평계의 편견에 있다. 그러나 정진우 의 영화작가정신은 작품세계는 물론 한국영화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고취하는 그의 노력에서 더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수준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한국 영화작가로서 정진우의 작품평가가 인색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정진우의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부르짖는 실천력은 치열하였고 그 성과도 무시할 수 없었다. < 섬개구리 만세 >가 1972년 제 23회 베를린영화제에 참가할 때, 인도 레이의 <천둥소리>가 수상하고 <섬개구리>는 후시녹음때문에 대사와 입이 안 맞는 영화라고 현지의 매스콤에서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 정진우는 인도영화보다 기술적으로 뒤진 한국영화의 현실을 개탄하고 동시녹음만이 한국영화 세계화의 첫걸음임을 확신하였다. 결국 그는 < 율곡과 신사임당 >(1978년)에서 동시녹음을 시도하여 후시녹음을 전적으로 하였던 한국영화 제작풍토를 쇄신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이후 기술의 세계화에서 내용의 세계화를 모색하던 그는 < 심봤다 >(1979년) 등 일련의 향토물로 한국영화 세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정진우 의 한국영화의 세계화는 작품에만 승부를 걸지않았다. UIP파동 이후 미국메이저회사에 대항하여 한국영화 공급과 배급체계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시네마 콤플렉스 <시네하우스>를 건립하였고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멀티콤플렉스 극장은 한국영화 세계화의 경쟁력을 고취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정진우는 한국 사실주의 영화의 맥을 이어 온 최인규 의 문하생 정창화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하여 1963년 < 외아들 >로 감독 데뷔하였다. 이후 1969년 우진필름을 창립하기 전까지 무려 27편의 작품을 연출하였고 1970년부터 그가 운영하는 우진필름에서 직접 제작하거나 연출한 작품까지 계산하면 99편에 이르렀다. 여기에 타영화사에서 의뢰받아서 연출한 30작품을 합하면 무려 129편의 한국영화를 혼자서 만들고 제작하였다. 척박한 한국영화계에 뛰어들어 나름대로 한국영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 온 정진우 는 1938년 1월 17일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양곡리 골말에서 부친 정원모 鄭元謨와 모친 황을순 黃乙順의 4남 5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김포와 강화에서 36년간을 교육에 종사해 온 그 일대에선 존경받는 교장선생님으로 통했다. 정진우는 고향에서 양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김포중학교와 농사에 대한 야심으로 김포농고에 진학하여 축산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참가하게 된 학생연극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낙농의 꿈과 먼 다른 길을 열망하게 된 것이다. 그가 중앙대학 법대를 진학한 것은 연극영화학과가 없었던 당시 연극부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중앙대에 입학한 것이다. 그는 연극부 써클에서 활동하며 연극부 회원인 최무룡 선배의 소개로 영화계에 단역배우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영화계 입문은 1958년 박상호 의 < 장미는 슬프다 >에서 강범구 촬영기사의 조수로서 였다. 그는 촬영경험을 거치지 않고는 열악한 한국영화계의 제작여건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후 정진우 는 한국 액션영화의 거장인 정창화 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5세에 < 외아들 >을 연출해서 한국 최연소 감독이 되었다. ''신필름''의 신상옥 감독 이후 한국영화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겨냥해 다양한 장르를 연출하고 제작해 온 감독으로서도 기억되어야 한다. 정진우 의 한국영화에 대한 신념과 그 실천에 대한 한국영화인들의 공감은 1985년 그를 ''한국영화인협회''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자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실감한 정진우는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영화의 주체인 영화인의 복지향상을 증진하여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으며 지금도 ''한국영화인 복지재단''의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관주도로 거행되었던 ''대종상영화제''를 영화인협회 주관하에 영화인 손으로 영화제를 치를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정진우 의 작품활동을 시기별로 분류하면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963년 < 외아들 >로 데뷔한 이후 1969년 ''우진필름''을 설립하여 제작자로서 활동하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정진우 는 영화작가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이 시기에 자기 중심적인 인간드라마의 작품세계를 구축하였다. 영화 < 외아들 >은 정진우 의 자서전적인 영화임을 짐작케 한다. 정진우의 성장배경에서 들어나듯이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 정진우의 청소년 시절은 농촌에서 어머니와 농사지으면서 많은 고생을 겪었고 집을 떠나 온 이후 <외아들>로 감독 데뷰하기까지 숱한 사람을 만나면서 그가 경험한 인생공부는 인간의 이중적 심성인 선악의 갈등을 체험케 하였다, 그의 휴머니즘은 바로 인간의 양면성을 극복한 참 인간상의 표현으로 표출되었다. <외아들>의 주인공은 정진우의 이념으로 그려지고, 그의 이념으로 채워진 작품세계는 정진우의 현실적 삶에서 원동력을 얻어 그 중심에 자리잡은 정진우의 작가정신인 주제의식으로 강조되었다. 정진우 를 한국영화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첫 작품으로서 < 초우 >는 그의 초기영화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소재와 영화적 기법 그리고 주인공들의 연기가 눈에 띄게 신선하여 그 당시 비교적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 알려졌다. <초우>는 현실성이 부족한 인물묘사로 단점이 들어나기도 하였지만 영상기교의 놀라운 일면과 일상적인 규격 속에서 탈피해 보려는 두 주인공의 내면을 포착하였다. 청춘영화 <초우>는 흑백 영상의 밀도를 높힌 작가의 의욕으로 정진우 스타일을 구축하여 그의 영화작가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둘째, <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1970년)과 <동춘>(1970년)을 계기로 중견 감독으로 부상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정진우 는 역사의식으로 민족의식을 추구하는 한편 멜로드라마의 깊이를 모색하였다. 역사의식에 눈을 뜬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일제에 대한 반제국주의 의식을 피력하였고 < 국경의 밤 >(1970년)은 분단된 민족의 비극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렸다. < 동백꽃 피고지고 >(1970년)는 일제에서 6.25를 거친 근현대사를 통한 한민족의 한맺힌 마움을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통해 풀어 갔다. 정진우 는 척박한 한국 근현대사의 극복을 위해 일제침략과 동족상잔의 6.25동란으로 겪어야 했던 민족의 비극사를 그의 역사의식으로 조망하였다. 셋째, < 심봤다 > 등 향토물로 동시녹음과 영화기술의 세계화에 매진하여 < 무궁화꽃이 피었읍니다 >로 개화하던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모색하던 시기이다. 멜로애정물이나 민족의 비극사를 떠나 더 원류적인 우리의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한 정진우 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로 우리의 정체성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0년)는 정진우의 연출 기량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그 시작은 원시종교 무속을 내세운 < 석화촌 >(1972년)에서 시작하여 < 심봤다 >(1979년)부터 정진우의 향토물로 자리잡았다. 이 작품은 한국영화의 전통성과 정체성을 포착하기 위해 토속적인 경향을 띤 영화로 스케일보다는 깊이있는 내면을 탐색하려는 노력이 드러난 정진우의 다섯 번째 동시녹음 필름이다. 정진우의 향토물은 주인공들의 삶의 공간이 다를 뿐 부당한 힘의 횡포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가정신은 일맥상통하게 향토물의 모든 작품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이제 정진우 는 진화된 주제의식과 영화기술력으로 우리의 주체성을 주장하고 정체성을 정립하여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향한 주제의식을 탐구하고 있다. 김진명 원작 < 무궁화꽃이 피었읍니다 >(1994년)는 그 첫 시도로서 내용상으로는 ''침략자는 예고가 없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토아래 강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대내외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자는 의지를 과시한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기술상으로는 시각적인 특수효과와 동시녹음으로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매진하였으나 한국영화계의 현실은 정진우의 이상을 실천하기엔 그의 끈질긴 실천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정진우 의 영화작가 정신은 우리사회의 사랑의 부재를 극복한 사랑의 쟁취를 통해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인간군상들을 묘사하였다. 하지만 영화적 현실로 표현된 정진우의 영상은 그의 영화작가적 의지를 충분히 담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라는 정진우의 집념을 그의 작품세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김수남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38년 1월 17일 경기도 김포 출생 1960년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1962년 외아들 로 감독 데뷔 1967년 감독협회 창립 (부회장) 1969년 (주)우진필름 설립(대표이사) 1973년 영화진흥공사 창립 초대 제작 상임이사 문교부 교육의 날-< 섬개구리 만세 > 국민 훈장 수여 1981년 한국영화제작협동조합 수석 부회장 한국영화 자율정화 위원장 1985년 복합극장 '씨네하우스' 설립 한국영화 복지재단 설립(원장) 1987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원장 / 한국예술총연합회 이사 1994년 프랑스 문화훈장 기사장 수상 1999~ 현 한국영화인 복지재단 원장 ㅇ 정진우 감독 작품 1962 외아들 1964 배신 , 국경 아닌 국경선 , 목마른 나무들 1965 밀회 , 난의 비가 , 가을에 온 여인 , 무정의 40계단 1966 초연 , 8240KLO , 초우 , 하숙생 , 악인시대 1967 밀월 , 하얀까마귀 , 4월이 가면 , 춘희 , 폭로 , 정부마농 , 구름 , 별아 내가슴에 1968 파란 이별의 글씨 , 미로 , 여여여 1969 국경의 밤 , 황진이의 첫사랑 , 청춘 , 차라리 남이라면 , 항구무정 , 동백꽃 피고지고 , 돌아오지 않는 밤 1970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 동춘 1971 풋사랑 1973 황소타고 시집왔네 1975 애종 , 초연 1978 율곡과 신사임당 1979 심봤다 , 가시를 삼킨 장미 1980 바다로 간 목마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1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1982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4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 자녀목 1991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1 ,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 2부 1994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ㅇ 수상 경력 초우 -서울대학생 최악 영화상 동춘 -제7회 한국일보 연극영화상 작품상/부일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석화촌 -제9회 청룡상 최우수작품상/부일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섬개구리 만세 -제10회 청룡상 감독상/베를린 영화제 최초 본선 경쟁부문 진출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제10회 대종상 계몽 및 우수작품상/아시아영화제 최우수 청년감독상 율곡과 신사임당 -제17회 대종상 특별상(한국영화 최초 동시녹음 작품) 심봤다 -제18회 대종상 감독상/ 한국영화 기자상 작품상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제19회 대종상 우수작품상 자녀목 -제23회 대종상 작품상, 감독상/ 동경국제영화제 '세계영화 베스트30'선정 베니스영화제 본선 진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춘사영화예술상 심사위원 특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