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랑
- 감독
- 오키우라 히로유키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마이클 돕슨, 마이크 코프사, 폴 돕슨, 스코트 맥닐, 도그 아브라함스, 브라이언 드럼몬드, 론 핼더, 데이비드 카에, 콜린 머도크, 매기 블루 오하라, 모네카 스토리, 프렌치 티크너, 이후지키 요시카츠, 양석정, 무토 스미, 정미숙, 사카구치 요시다사, 김정호, 요시다 유키히로, 이승주 , 히로타 코세이, 장광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나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영화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한 인간의 업적과 과오, 명암이 고루 담긴 사실적 전기(傳記) 영화는 더욱 만들기 어려운 것 같다. 예전에 한 원로 가수의 전기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싶어 몇몇 제작자와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한 적 있다. 기획은 괜찮지만 내가 강조한 몇 개 에피소드 때문에 모두 힘들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분이 직접 TV에 나와 말씀하신 일화들인데요?” 하지만 당사자보단 그 일과 관련한 다른 이들의 반발이 거센 경우가 많다. 귀신같이 알고서 딴지를 걸어온다고 한다. 피해당사자보다 오히려 가해자 쪽에서 명예 훼손을 문제 삼고 나온다. 조용히 잘 살고 있는데 왜 옛날 일을 다시 끄집어내느냐? 내 자식들이 봐도 괜찮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 이런 입장을 가진 모두와 만나서 허락을 구하는 일은 힘들고 괴롭다. TV의 르포 프로만 봐도, 인터뷰만 요청했는데 경찰부터 부르는 장면을 우리는 자주 본다. 그렇다고 문제의 에피소드를 빼려니, 이 인물을 묘사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점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 “그럼 이 분의 전기를 만들 이유가 없는데요?”, “그냥 픽션으로 만들어. 그게 편해.” 실화를 모티브로 한 범죄물이 주로 이런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가명의 가해자와 익명의 피해자가 나온다고 근원의 현실이 휘발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고통이 전시에 그치거나, 2차 가해에 가까운 과도한 표현을 하거나, 연출의 시선이 가해자의 시점과 동일시되어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는 우를 범할 위험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극장을 나오면서 꼭 모티브가 된 사건을 검색해본다. 영화에서 현실성과 사실주의를 담보하려는 노력은 너무나 중요하다. 이것은 물론 표현의 자유이지만, 또한 윤리의 문제다. 내가 오로지 남자들만 나와서 치받고 죽이는 완전 픽션을 볼 때 좀 더 안심하는 이유가 있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현실을 모사(模寫)하는 매체이기에 특별히 민감하게 현실과 선을 긋는다. 그래서 외국 영화의 엔드 크레딧 말미에는 ‘This is a work of Fiction. 이 작품에서 묘사된 이야기, 모든 이름, 캐릭터 및 사건은 허구적인 창작입니다…’로 시작하는 문구가 꼭 들어간다. ‘허구의 면책’을 명시한 조항은 즉 과거에 있었던 소송의 결과다. 러시아의 괴승 라스푸틴 암살 사건을 영화화한 MGM의 1932년 영화 <Rasputin and the Empress>가 고소를 당한 이후로 할리우드 영화에 이와 같은 문구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역시 언젠가부터 비슷한 문구를 넣고 있다.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개인과 단체의 프라이버시와 명예 훼손을 피하다보니, 한국 영화에선 존재하는 고유한 지명조차 없는 지명을 만들어 대체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땅값이 떨어진다고 지역 주민이 반발한다는데, 의외로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영화 속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지역을 자주 접한다. 예민한 관객에겐 가짜 지명이 꽤나 신경 쓰인다. 2시간 동안은 이 픽션이 현실이라는 착각에 온전히 빠져들어야 하는데 적잖은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 입장에선, 현실에 없는 지명을 지어내는 순간 힘이 빠지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 한국사회 같은 핍진한 작품을 쓰려 했는데, 대신 어떤 한국적인 총체의 원더랜드를 그리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가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차라리 한국 영화용 지명을 미리 정해서 영화사나 작품별로 공유해 쓰면 어떨까? 가령 상남자 픽쳐스라는 제작사에서 만드는 모든 남성폭력영화는 ‘한남시’를 배경으로 한다던가. 그럼 굳이 ‘유니버스’를 따로 만들려고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 나는 농담을 하는 중이다. 한국 영화 전체를 하나의 유니버스로 받아들여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한국 영화는 왜, 이른바 “다이내믹”한가? 한국이 다이내믹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한국의 근대사는 영화화해서 보고픈 온갖 사건과 인물들로 가득하다. 이 다이내믹 코리아 유니버스의 세계관을 뒤흔들고 재정립한 몇 차례 이벤트가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영화와 드라마 등을 통해 여러 번 영상화가 이루어진 10.26이다. 1979년 10월 26일, 종신 집권에 함몰해있던 독재자가 야심한 밤 별채에 여가수와 모델을 불러다 놓고 최측근과 술 마시며 놀다가 정보기관장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였던 유신이 멱살 잡아 끌어내려지듯 막을 내렸으나 민주주의 대신 신군부라는 새로운 도둑들이 나타나 또 다른 유혈을 불러왔다. 그 잔재와 상처는 지금도 남아 현재진행형이다. 유신의 망령까지 오래 남아서, 그 부왕과 영애를 신격화한 추종자들 세력도 여전히 건재하다. 누구나 아는 내용이지만 정확한 내막은 아무도 모른다. 궁정동 안가는 독재자의 권력을 국가와 괴리시켜놓은 은밀하고 초현실적인 공간이었다. 그날 밤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나? 경호실장과 충성 경쟁을 하던 2인자이자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말고는” 못 하는 게 없었다고 할 만큼 서슬 퍼런 권력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의 우두머리가 왜 그날 갑자기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게 되었을까? 거사는 사전에 계획되었나, 순간의 충동이었나? 그는 “혁명적 민주 투사”였을까,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였을까? 사건의 맥락 혹은 복선을 찾다 보면 또 다른 미스터리만 만날 뿐이다. 토사구팽 당한 뒤 정권을 저격한 회고록으로 살 길을 노리던 이전 정보부장은 시체도 찾질 못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행방불명된 그는 양계장 모이가 되었을까, 외교행낭 컨테이너에 실려와 청와대 지하 벙커 사격장의 표적이 되었을까? 신상옥 감독의 < 증발 >(1994)은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모델로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며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는 바이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5.16 군사정변부터 10.26까지 18년의 시간을 밀실에 갇힌 사내들의 히스테리와 궁정동 여인들의 비소로 채운, 유신의 형이상학적 다이제스트다. 만약 한국판 <살로 소돔의 120일>을 찍는다면 바로 이 영화 같을지 모른다. 당시 독재자 역은 (누구도 맡으려는 한국 배우가 없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계 미국 배우 조지 타케이(초대 <스타트렉>의 ‘술루’ 역할로 유명하다)가 이강식 성우의 목소리로 연기한다. 주로 미국에서 찍은 걸로 알려져 있고, 배우의 동시 녹음과 성우의 후시 더빙이 알 수 없는 기준으로 뒤섞이며, 고증과 상관없이 현대 배경으로 옮겨 오프닝부터 곳곳에 80년대 시위 현장을 찍은 실제 기록 영상을 삽입한 이 영화는 아시아 어딘가에 있을 어느 정신 나간 독재정권을 그린 SF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러니까 조지 타케이가 극중에 그냥 영어나 일본어로 말해도 영화를 보는데 있어 위화감은 전혀 없었을 것 같다. 실제로 감독은 애초 이 영화의 배경을 남미의 가상 독재국가로 옮겨 찍을 계획이었다. 주연으로 진 핵크만을 내정했었다는 이야기가 옛날 뉴스 기록에 남아있다. 파리에서 붙잡혀 컨테이너에 실려 한국으로 온 전 국가보안부 장관( 김희라 )은 이 영화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그가 “혁명의 배신자”로서 독재자의 뜻에 반기를 든 계기는 과거 자신의 공작으로 파멸시킨 교수의 딸( 강리나 )과 우연한 조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당하는 끔찍한 폭력을 밀실의 모니터로 지켜보았다. 얄팍한 죄의식을 되갚아주기 위해 놓은 이중의 덫은 황당한 비약이지만, 파리에서 김희라가 요원들에게 붙잡히는 순간에 강리나의 피아노 연주는 인상 깊은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의 십자가”를 지겠다는 독재자 면전에 “누가 당신더러 십자가를 져달라고 했습니까?” 일갈한 친구의 처형을 목격한 현 보안부 장관( 신성일 )은 총구를 돌릴 대상이 누구인지 깨닫는다. 10.26을 다룬 작품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영화일 < 그때 그사람들 >(2005)은 “이 영화는 역사의 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모두 픽션입니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임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나온 영화들 중 단일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 정점에 도달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이 블랙 코미디는 이 글에서 다루는 10.26 소재의 작품 중 가장 희극적이지만, 의외로 객관적이고, 아마도 사실에 가장 근접한 해석이란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도, 한국 영화는 이 작품 이후 정치적인 소재를 놓고서 대범하게 낄낄거려본 적이 없다. 대책 없이 저질러진 거사는 예정된 실패를 향한다. 영화는 권력자와 2인자들 사이 암투보다는 그들 바로 아래의 하수인과 관련자들에게 집중한다. 엄한 시간 엄한 장소에 있었던 실무자들과 두 여인의 비애가 있다. 압권은 오프닝에서 “어르신”의 성은을 입은 딸의 몸값을 셈하러 왔던 극중 명칭 ‘철없는 엄마( 윤여정 )’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되는 에필로그 속 그들의 말로다. 저 철딱서니 없는 작자들이 한 짓들 보라는 식의 말투로, 관객의 입장에서 이 황당무계한 사건에 대해 진심으로 실소한다. 취조실에서 얻어맞는 정보부장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저 사내의 법정 최후 진술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는 설이 있습니다. 글쎄, 관심 있는 분은 찾아서 읽어보시도록!” 이렇게 말하고 끝이다. 어르신의 실제 장례 영상이 나오는 엔드 크레딧에서 오열하는 시민들까지 보면 관객의 실소는 웃다 못해 울고 싶은 기분으로 변한다. 공교롭게도 현 시점에서 코로나 직전의 마지막 극장 흥행작이 되어버린 < 남산의 부장들 >( 우민호 , 2019)은 앞의 영화에서 관심 있거든 찾아보라고 한 그의 진술을 마지막 장면에 실제 음성으로 들려준다. 먼저 나는 이 영화가 김충식의 논픽션이 바탕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을 실명으로 하지 않은 것에 실망했다. 이럴 거면 원작을 굳이 내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누구나 아는 그들의 이름을 이 시대에까지 볼드모트 취급을 해줘야 하나? 글 서두에서 장황하게 떠든 만큼,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쉬운 대목이었다. 겁쟁이들은 용감한 자가 먼저 간 길을 따라 가고 싶으니까. “이 영화는 1979년 대통령 암살 사건을 바탕으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 40일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 [남산의 부장들]을 바탕으로 실제 사건에 기초했으나, 일부 설정은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픽션임을 밝힙니다.” 나는 이런 자막으로 시작한 영화가 결말에서 굳이 실명의 인물들을 보여주며 끝내는 것이 영화적으로 옳은지 고민했다. 보안사령관의 수사 발표와 중앙정보부장의 최후 진술은 군더더기인가 아닌가? 논픽션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 끝에 가선 픽션 밖의 사실을 갈구한다. 어떻게든 사건의 의미를 찾으려는 발버둥처럼. 그러나 결국 이것도 영화가 선택한 해석으로서의 사실일 뿐이다. 결국 받아들이는 건 관객의 마음이다. 누구는 왜곡이라 할 것이고 누구는 정론이라 할 것이다.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소재를 다루는 영화는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 선택을 안 하는 류의 패착을 나는 오히려 완전 픽션인 < 인랑 >( 김지운 , 2018)에서 보았다. <남산의 부장들>은 연출자의 선택이 분명한 영화다. 그날 밤에 각하에게 총을 쏜 부장은 적어도 혁명과 민주주의를 나름대로 고민했다고 보는 믿음이다. 야간에 허가 없이 누구도 통행하지 못하는 불 꺼진 세계 속, 야근하는 부하를 불쑥 찾아와 손수 술을 따라주는 상관( 이성민 )이 살갑게 속삭인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손 안대고 코 풀기의 미학. 영화는 가장 야비한 용인술로서 권력자의 레토릭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클라이맥스에서 조명이 꺼지고 권총을 바꾸러 내려간 부장( 이병헌 )이 돌아와 거사를 마치고, 흥건한 피에 미끄러진 다음 일어나 안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롱테이크로 찍어낸 장면은 연기와 연출과 기술이 합쳐진 한국 영화의 밀도가 지금 어느 정도의 수준에 왔는지 가늠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그래서 10.26으로 야기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하게 집어주는 미덕이 있다. 나라를 훔친 새로운 도둑. 거의 사이코패스처럼 묘사된 보안사령관( 서현우 )이 어둠 속에 나타나 씬을 훔치고 나라를 훔치는 장면은 섬뜩하다. 10.26을 다룬 이들 세 편의 영화는 거의 10년 주기마다 나온 셈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10.26 소재 영화를 계속해서, 가능하다면 매년 보고 싶은 마음이다. 온갖 연출자와 작가와 배우들이 이 사건을 끊임없이 자유롭게 해석하고 표현해줬으면 좋겠다. 전 배역이 여배우들로만 이루어진 10.26은 나만 보고 싶은가? 완전히 작정하고 아이돌 주연의 BL로 만든 10.26은 어떤가? 가상 독재국가의 근미래 SF로 옮겨 외국 배우들이 연기하는 10.26도 재미있지 않을까? 그날 밤의 진실은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현실은 아마도 그 어떤 작품의 묘사보다 훨씬 더 엉망진창이고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역사의 활발한 해석은 역설적으로 끊임없는 진실을 요구한다. 10.26 사건은 근대사가 우리에게 준 한국 고유의 원천 스토리 콘텐츠다. 셰익스피어가 부럽지 않은 비극과 희극의 절묘한 조합이 여기 있다. 반인반신이었던 국가 원수가 총 맞아 죽는 이야기는 전 세계 관객 대상으로 전혀 부끄럽지 않다. 인류 보편적으로 재미있고 유익하며 교훈이 넘친다. 이미 죽은 자의 추종자들과 아직 살아서 침묵하길 원하는 자들은 실제 역사와 인물을 바탕으로 한 영화 만들기를 계속 어렵게 만들 것이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창작의 자유는 국가가 보안 아니 보호해주어야 옳다. 권력자들의 압제 아래 엄혹한 세월을 피와 눈물로 버텨온 피해당사자이자 그 후손으로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 보고 즐길 자격이 있다.
<어벤져스:엔드게임> 영화잡지에서 온라인 매체로 넘어와 일하는 동안 독자 반응이 신기했던 박스오피스 기사가 있었다. 2014년 개봉한 < 비긴 어게인 >(존 카니, 2013)이 200만명을 넘겼다는 기사였다. 역시 다른 매체들처럼 수치를 나열했을 뿐인 이 기사의 페이스북 피드에는 2,000개가 넘는 ‘좋아요’가 달렸다. 분명 영화를 보았을 그들은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의 아이디를 끌어와 꼭 보라며 추천했고, 댄과 그레타의 키스씬이 없어서 좋았다는 등의 감상평을 쏟아내는가 하면, 이 영화의 더 많은 흥행을 응원했다. 신기하기보다는 이상한 사례도 있었다. < 어벤져스:엔드게임 >(안소니 루소, 조 루소, 2019)이 개봉했고, 압도적인 스크린 수를 기록했다.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개봉 첫날 2,760개의 스크린을 점유했고, 4일 째에는 2,835개의 스크린 수를 기록했으며 개봉 10일째에도 2,490개의 스크린을 차지했다. 당연히 스크린 독과점에 대한 비판이 뒤따랐다. 하지만 <어벤져스:엔드게임> 이전에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일으켰던 < 군함도 >( 류승완 , 2017)와는 양상이 달랐다. <군함도>의 경우에는 스크린 독과점을 언급하지 않는 기사에도 스크린 독과점을 비판하며 영화를 비난하는 댓글이 많았다. 하지만 <어벤져스:엔드게임> 관련 기사에는 “3000만큼 사랑해”라는 댓글이 이어졌다. <군함도>는 개봉 첫날에만 2,027개의 스크린을 점유한 후 10일 째에는 1,018개로 떨어졌었는데 말이다. <비긴 어게인> <비긴 어게인>의 사례에서 체감한 후, <어벤져스:엔드게임>과 <군함도>의 비교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었다. 이건 '사랑'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관객들은 <비긴 어게인>을 사랑했다. <어벤져스:엔드게임>을 사랑했다. 하지만 <군함도>는 싫어했고, 조롱했다. 그 이후 < 리얼 >( 이사랑 , 2017)이 조롱당하더니, <리얼> 때문에 < 염력 >( 연상호 , 2017)과 < 인랑 >( 김지운 , 2018)이 ‘리얼급’이란 말로 조롱당했고, 최근에는 < 자전차왕 엄복동 >( 김유성 , 2018)이 조롱당하는 중이다. 그런데 조롱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조롱은 사실 혐오에 따른 행동이다. 사랑받는 영화인가? 혐오 당하는 영화인가? 흥행영화인가, 아닌가보다 더 가혹한 분류다. <리얼> 이전에 조롱당하는 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 클레멘타인 >( 김두영 , 2004)이나, < 맨데이트:신이 주신 임무 >( 박희준 , 2008) 같은 영화들이 '망작'으로 꼽혀왔지만, 적어도 이 영화들은 그때의 놀림 거리였을 뿐, 두고 두고 조롱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얼> 이후 관객들은 사랑하지 않는 영화의 기준을 <리얼>로 삼았다. 이후 여러 영화들이 '리얼급'이란 단어로 매도당했다. <리얼>이 조롱의 기준이라면, <자전차왕 엄복동>은 조롱의 숫자가 된 경우다. 총 관객 17만명이 들었고, 이 수치가 하필 1,700만명의 관객 동원을 기록한 <명량>의 기록의 100분의 1에 해당하면서 1UBD이란 가상의 놀림 수치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어벤져스:엔드게임>은 개봉 첫날에만 8UBD를 기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른 영화들의 흥행추세에 동원되면서 영원히 조롱당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포털사이트와 소셜미디어의 이용자들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사랑과 조롱으로 엇갈리는 이상 현실을 바꿀 수는 없을 것 같다. 영화를 만들고 마케팅하는 입장에서는 흥행을 위해서라도 일단 작품을 ‘사랑받는 영화’로 포지셔닝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수 밖에. 조롱 당하는 영화가 되면 흥행성적도 곤두박칠 치기 때문이다. 최근 조롱의 대상이 된 영화들의 사례를 보면 일단 겸손해야 할 것 같다. 슈퍼스타 캐스팅과 막대한 제작비를 굳이 애써서 티내면 사랑받을 가능성은 줄어든다. 비호감이기 때문이다. 개봉 전 홍보를 위해 배우들이 여러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도 사랑받기 좋은 전략은 아니다. <자전차왕 엄복동>도 제작자와 주연배우가 각종 예능에 출연하며 홍보를 하지 않았다면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져도 굳이 그렇게 조롱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규모를 과시했지만, 정작 관객에게 큰 매력이 없다면 더 위험하다. 과거에는 기대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고 끝났지만, 이제는 조롱당한다. 이렇게 볼 때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은 <극한직업>이다. 영화 자체의 매력과 함께 낮은 제작비로도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미담'이 되어 더 사랑받고, 수원왕갈비통닭까지 사랑받게 만들었다. 혹시라도 사랑받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어벤져스:엔드게임>을 비롯한 마블 영화의 사례를 참조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벤져스:엔드게임>은 스크린 수도 제일 많이 차지했고, 장충체육관을 통째로 빌려서 대규모 이벤트까지 열었는데도 비호감이 되지 않은 사례다. 마블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사랑은 11년에 걸쳐 쌓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저 ‘강림’해 주시면 감사한 영화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한 거다. 사랑은 편파적이고 배타적이며 맹목적이다. 만드는 이들의 마음과 달리 관객에게는 모든 영화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랑이란 게 원래 그렇다.
‘시네마테크 KOFA가 주목한 2018년 한국영화’의 리스트가 발표됐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이 리스트에 참여한 초기에는 열 편의 작품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 10편에 다 넣지 못한 작품의 수가 항상 대여섯 편 이상이 되었다. 그래서 매번 깊은 고심 끝에 그만큼의 작품을 제외시켜야 했다. 그런데 근래 몇 해에는 그런 작품의 수가 한두 편 정도밖에 안 된다. 글쎄다, 정확한 이유는 나 자신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계속 참여하다 보니 내 결정 기준이 단호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사이에 한국영화가 빈곤해진 탓인지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후자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말했듯이 올해도 10편을 선택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고, 내가 선택한 작품과 전체 결과는 언제나처럼 적당한 선에서 사무송(使無訟)한 모양새다.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해 아쉬운 작품의 리뷰를 의뢰받고 고민했다. 개인의 리스트를 별도로 발표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작품을 골라야 할지가 그 이유였다. 내 리스트와 상관없이 우선 몇몇 작품의 제목을 (ㄱㄴㄷ 순으로) 언급만 하자면 < 1급기밀 >( 홍기선 ), < 곤지암 >( 정범식 ), < 누에치던 방 >( 이완민 ), < 인랑 >( 김지운 ), < 춘천, 춘천 >( 장우진 ), < 파란입이 달린 얼굴 >(김수정)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독립영화, 상업영화의 구분과 별개로 각자의 영역에서 제 역할을 했고 또렷한 목소리를 낸 작품들이다. 위 작품들은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작년 한국영화를 풍성하게 만든 이름들임을 확신한다. 리뷰 대상으로 선택한 작품은 < 홈 >이다. 신인 감독 김종우 의 데뷔작인 <홈>은 작년 5월 30일에 개봉해 8천 명 정도의 관객을 모았다. 비평적인 수난은 더욱 심해서 이 영화를 제대로 조명한 글을 거의 보지 못했다. 연말에 발표된 리스트에서 이 영화가 언급조차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청소년 인물, 가족과 사회를 다루는 점잖은 태도나 영화가 이야기하는 소중한 주제를 감안하면 이 영화가 감내해야 했을 외면의 정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나는 작년에 정부 정책을 다루는 매체에 이 영화에 관한 칼럼을 보낸 적이 있다. 리뷰는 아니었고, 영화가 다루는 이런저런 문제를 놓고 정책적인 해결책 등을 물어보는 글이었다. <홈>의 특성은 그러한 데 있다.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을 받는 선에서 영화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런 경험이 실제 생활로 넘어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주인공 소년에게 닥친 환경의 안타까움이 질문으로 이어지고 해결 방안은 없을까, 라고 생각하는 데 이르는 것이다. 변화를 초래하는 경험을 보통 다큐멘터리로부터 얻곤 하던 나로선 각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줄거리를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홈>은 졸지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년의 이야기다. 고아는 아닌데 고아보다 더한 상황이 준호( 이효제 분)에게 일어난다. 소년의 가족 관계는 조금 복잡하다. 준호의 어머니는 준호의 아빠와 이혼한 상황에서 다른 유부남 강원재( 허준석 분)와 관계를 맺었고 그들 사이에서 성호( 임태풍 분)가 태어났다. 원재는 부인과의 사이에 딸 지영( 김하나 분)을 두었다. 어느 날 아침, 원재의 부인이 준호의 엄마를 찾아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교통사고가 발생해, 두 여인은 의식불명의 상태로 나란히 병실에 누워 있게 된다. 원재가 아들 성호를 데려가면서 준호는 홀로 집에 남는다. 소년의 처지를 가엽게 여긴 원재는 준호에게 두 동생과 함께 살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 원재의 착한 결정은 상황을 알아차린 처가의 분을 사고 만다. 청소년이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이 종종 범하는 실수는 아이와 성인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아이들은 지나치게 순수하고, 때가 묻은 폭력적인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파괴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더 이상 고전적이지도 않고 별다른 감동도 주지 못한다. 영화가 두 개의 세계 사이로 선명하게 그어놓은 선이 작위적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어른들의 시선 아래 만들어진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왜곡하기도 한다. 하지만 근래 만들어진 어린이 혹은 청소년의 성장영화는 영화의 시선을 인물의 눈높이에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홈>의 제작사인 ‘아토’는 이 영화 외에도 < 우리들 >(2016, 윤가은), < 용순 >(2016, 신준), < 살아남은 아이 >(2017, 신동석) 등의 작품을 연이어 제작해왔다. 내면적으로 충실한 작품을 통해 한국영화의 경계를 확장하는 방식은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중학생인 준호의 나이로 치면 <홈>은 <우리들>과 <용순> 사이에 놓인다. 두 동생 앞에서는 어른스러워 보이는 준호는 아직 성인의 세계가 낯설고 두려운 소년이다. 무엇보다 성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다. 그런 준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곧 <홈>의 태도다. 엄마가 병실에 누운 후, 준호가 처한 상황은 급변한다. 영화는 덜컹거리는 상황을 곱게 포장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영화의 태도가 불편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소년의 시선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극중 복잡한 어른들의 관계, 어른들의 처지가 상세하게 그려지지 않은 건, 그것을 대하는 소년에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친부는 딱한 상황에 처한 아들을 거두지 않으며, 원재는 처가와의 갈등을 소년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 준호가 주변 상황에 대처하는 수준은 더욱 어수룩할 수밖에 없다. 어찌하지 못할 때마다 소년의 어깨는 자꾸 움츠러든다. 원재의 호의에 보답한답시고 편의점 물건을 훔쳐간 아이들과 싸움을 벌이고 끝내 물건을 되찾아온 장면에서는 눈물을 감추기 힘들다. 소년은 상처투성이의 입으로 온 힘을 다해 “같이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아니라 소년의 마음을 따라가다 얻게 되는 그런 출렁거림이 <홈>의 미덕이다. 소년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행복하게 사는 일은 <홈>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후반부에서 소년은 아주 어두운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소년에게 어마어마한 시련이 닥치는 것으로 끝맺지도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로 전개되는 과정은 얼핏, 준호라는 어린 존재가 세상에서 홀로 서는 성장담을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도입부로 돌아가 보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준호는 패스를 하지 않고 홀로 골을 시도하려다 실책을 범해 친구들로부터 책망을 받는다. 엔딩에 앞서 영화는 소년이 거쳐온 공간들을 한 번씩 마주한다. 그 공간을 거치며 보낸 시간 속에서 소년은 성장했을까. 영화의 엔딩, 다시 운동장에서 선 준호는 별 무리 없이 친구들과 함께 호흡을 나눈다. 표정도 밝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만 하면 되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일순간의 응원에 스스로 만족하고 떠나려던 나를 돌려세우고 만다. 카메라는 줄곧 소년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으나, 문득 나를 향한 시선을 느끼게 된다. <홈>은 ‘함께 사는 것’을 박탈당한 소년의 외로움에 관한 영화다, 소년에게 그런 세계를 던져주고도 담담하게 지내는 나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하는 영화다. 끝으로 소년 준호를 아름답게 연기한 배우 이효제가 연기상의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은, 이 영화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묻힌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글을 다 쓴 뒤 김종우 감독이 「씨네21」과 나눈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8살 때 형과 헤어졌다. 형은 영천 시골에 있었고 나는 부산으로 이사왔다. 형이 고등학생 때였는데, 그때부터 형은 혼자 살았다. 왜 형이랑 떨어져 사는지 몰랐는데, 중학생 때 어머니가 우리 가족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돌이켜보면 그때 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족관계를 떠나 당시 형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너무 힘들고 아팠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밝혔다. 영화에서 유달리 진실함이 느껴졌는데, 감독 자신에게서 출발한 이야기라 더 그랬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