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아웃
- 감독
- 제프리 라이너, 리즈 보덴
- 제작년도
- 1991
- 출연
- Varda Appleton, Gavin Atkins, Terrence Atkins
※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교육 프로그램 '2021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선정작입니다. 디즈니와 픽사 스튜디오는 < 인사이드 아웃 >에서 이미 한차례 우리의 머릿속 세상을 비춘 바 있다. < 주먹왕 랄프 >를 통해 게임 속 세상은 물론 <토이 스토리> 시리즈로 우리가 알 수 없는 장난감들의 세계를 엿보는 기회까지 제공해온 그들의 시선은 이번에는 생전 세계를 향했다. 뉴욕 거리에서 맨홀을 타고 한순간 우주로 떨어진 주인공, `조`의 여정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고도 비슷한 세계로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영화는 한 중학교의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밴드부 교실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조`는 "음악은 내 운명"을 외치지만, 현실은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해할 마음도 없는 학생들을 데리고 애를 쓰는 음악 교사다. 그런 조에게 어느 날 유명한 뮤지션 도로테아 윌리엄스의 밴드에 합류하게 되는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꿈에 다가선 그 날, 누구 보다 살아있다고 느낀 바로 그날, 조의 삶은 막을 내린다. 한순간에 떨어진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조는 영혼 `22`를 만난다. 22는 몇 천억 번째 영혼이 태어나는 지금까지도 지구로 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영혼이다. 열정 가득한 조와 냉소로 똘똘 뭉친 22. 영혼들이 지구로 가는 데 필요한 `지구 통행증`의 마지막 조건, `불꽃`을 찾아야 지구로 갈 수 있지만 22는 모든 것에 심드렁하기만 하다.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영혼과 살고 싶지 않은 영혼의 동행은 시작된다. 누구도 상상해본 적 없는 세상 `태어나기 전 세상`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보다는 묘하게 단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하다. 해맑게 굴러다니고, 깔깔거리며 장난을 치는 어린 영혼들은 지구에서와는 달리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다. 그들은 경계 없는 흐릿한 형태를 가졌다.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은 맑고 깨끗한 영혼들이기 때문에, 무지개를 닮은 은은한 색으로 스스로 빛을 낸다. 반대로, 관리자인 제리와 테리는 오직 경계로만 존재한다. 그들이 표정을 짓고, 몸의 방향을 틀어도 경계를 짓는 선은 단지 구부러지면서 모양을 바꿀 뿐이다. 길을 잃은 영혼들이 모이는 영적 세계도 흥미롭다. 어두운 색의 반짝이는 모래로 뒤덮여 있는 세계에서 배는 모래 위를 항해하면서 영혼들을 구제한다. 지금까지 사후 세계를 그린 영화는 꽤 있었다. 웹툰 원작의 <신과 함께> 시리즈, 그리고 제작진의 전작인 < 코코 >. 하지만 < 소울 >은 그보다 훨씬 전,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사후 세계도 탄생하기 전의 생전 세계를 그려낸다. 영화는 스크린을 빛으로 가득 채우고 107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을 인간의 상상력 너머의 세계로 초대한다.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주인공 조는 디즈니 픽사 영화의 최초의 흑인 주인공이다. 영화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그의 현대 뉴욕에서의 삶을 그린다. 감독 켐프 파워스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픽사 문화 자문 위원회는 영화 제작 내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조라는 캐릭터의 깊이 있는 설정은 물론 그가 속해있는 사회까지 사실적으로 스크린에 담아냈다. <소울>에 담긴 다양함은 이뿐만이 아니다. 조가 `머나먼 저세상`에서 허둥지둥 도망치다 부딪힌 한 영혼은 "내 바지 어디 갔어!"라고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외친다. 22의 아지트 벽에 가득 붙어있는 멘토들의 이름표는 중국어, 아랍어, 힌디어 등 전 세계의 다양한 언어로 적혀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스크린에 담기 위한, 디즈니 픽사의 더 큰 세상을 위한 발걸음은 <소울>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들이 이야기를 전하는 방법 디즈니 픽사의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실 아주 흔한 존재들이다. 제작진의 전작 <업>에서는 시간이 지나도 부인을 여전히 사랑하는 남편, <코코>에서는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는 딸,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사춘기에 접어든 10대 소녀가 주인공이다. 그들의 영화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을 빌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무거운 질문의 답을 풀어낸다. <소울>은 깊은 영화다. 존재의 시작과 삶의 목적에 대한 답이 없는 질문을 탐구하는 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에게 엄청난 진리를 이해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사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삶 속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영혼들이 지구에서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찾아야 하는 `불꽃`은 사실 별거 아니다. 그저 `살 준비`가 되었다는 증표일 뿐이다. 조가 그의 인생 최고의 공연을 끝마친 뒤 자신이 상상했던 기분과 조금 다르다고 말하자, 도로테아 윌리엄스는 대답 대신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젊은 물고기가 나이 든 물고기에게 헤엄쳐가 물었지. 바다라고 하는 걸 찾는데요.” 나이 든 물고기의 대답은, “여기가 바다야” 라는 한 마디. 젊은 물고기는 그 말을 믿지 못한다. 조는 인생 내내 자신의 ‘불꽃’은 음악이고, 그게 자신이 태어난 이유이자 삶에서 이뤄야 할 유일한 목표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목표를 이뤄낸 후의 알 수 없는 감정은 뭘까. 그 순간 조의 깨달음은, 화려한 공연장 대신 단풍나무 씨앗과 먹다 남은 베이글, 막대사탕처럼 아주 일상적인 것에서 온다. 추상적인 꿈을 좇으면서도, 주어진 인생 속의 작은 순간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 그 두 가지가 통합되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중요한 뭔가를 깨닫게 된다. 디즈니 픽사는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 후, 삶 속에 있는 해답을 제시한다. 삶의 목적만 따라가며 살기에는, 우리의 일상 속에도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가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프리퀄 영혼들이 불꽃을 찾기 위해 모이는, 불꽃을 꽃피우기 위한 모든 체험이 모여있는 `모든 것의 전당`. 그곳에서 가장 첫 번째로 조가 22에게 권한 건 바로 제빵사다. 피자를 건네지만 아무 냄새도, 맛도 느낄 수 없는 22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모순적이게도, 피자는 22가 지구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가장 첫 번째 요소이다.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던 생전 세계와 반대로, 모든 것들이 매 순간 풍부하게 느껴지는 세상. 모든 감각으로 몰려드는 세상의 자극에 22는 수백 명의 위대한 멘토도 찾아주지 못했던 자신의 불꽃이 바로 이곳, 지구에 있음을 느끼며 말한다. "내 불꽃은 하늘 보기나 걷기 일지도 몰라."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하고 싶은 건 뭘까, 잘하는 건 또 뭘까.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가진 고민이다. “사람은 뭔가를 할 운명을 타고난다는데 그게 뭔지 어떻게 알아? 만약 잘못 고르면? 그게 다른 사람의 운명이라면?” 22가 조의 몸속에 들어가 지구에서 고백하는 속마음은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대변한다. 유별나 보였던 22는 사실 가장 일반적인 캐릭터다. 재능을 찾지 못할까 봐, 자신의 삶의 목적이 아무것도 아닐까 봐 무섭다는 22의 솔직한 고백은 알 수 없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위로를 건넨다. 지구로 간 22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소울>은 우리 모두의 프리퀄이다.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열정을 불태울 무언가를 가슴에 품고 태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해도, 우리는 모두 `살 준비`를 마치고 `지구 통행증`을 받은 어린 영혼들이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숨을 필요도 없다. 삶이 무의미해 보이고 갈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질 때. 22처럼 "나 잘 걷잖아." 씩씩하게 한 마디를 내뱉고 털어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나의 마음을 당신께 줄게요. 올해는 코로나19 탓에 보고 싶었던 영화, 봐야 할 영화들을 충분히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론 그 탓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선 평년보다 조금 더 많은 영화들을 만났다. 코로나19 인해 씨네21 데일리가 발행되지 않고 대부분 일정을 홀로 소화해야 했던 탓이다. 올해 부산에서 만난 영화들을 곱씹어본다. 가장 심금을 울린 영화는 디즈니·픽사의 <소울>이었다. 식상한 이야기를 가지고도 가슴에 불을 지피는 건 모든 서사 영화들이 바라는 꿈일지도 모른다. < 인사이드 아웃 >에 이어 피트 닥터는 그 비밀의 열쇠를 발견한 것 같다. 영화가 끝난 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작품은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의 < 운디네 >였다. 전설의 틀을 빌린 멜로드라마라는 빤한 단어들의 조합으론 이 영화의 신비를 미처 다 전할 수 없다. 바흐 협주곡 D단조 2악장 아다지오의 선율 사이사이 아직도 귓가를 간질이는 물의 소리가 들려온다. 깔끔한 만족감을 안긴 건 리 아이작 정 감독의 < 미나리 >였다. 높은 확률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연이 되리라 확신한다. 한국 영화들은 대체로 고르게 만족스러웠는데 그중 유독 오랜 앙금처럼 가라앉아 남은 건 이란희 감독의 < 휴가 >였다.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해선 앞으로도 여러 차례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사로운 리스트에 꼽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 스파이의 아내 > 이런 식의 리스트를 꼽아본다면 각각의 기준에서 모두 조금씩 모자랐다. 감동으로 휘몰아치는 종류의 영화도 아니고 치밀한 상징과 해석으로 독해가 필요해 보이지도 않았다. 대중, 상업적인 면모가 있지만 공식처럼 깔끔하게 떨어지진 않고, 그렇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에 감싸여 내내 들썩이지도 않는다. 물론 <스파이의 아내>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작품이란 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아는 영화에 대한 온갖 잣대를 들이대도 조금씩 아주 미묘하게 비껴나가는, 실로 곤란한 영화였다. 나는 나를 곤란하게 하는 것들을 사랑한다. 나의 짧은 안목과 한 뼘도 채 안 될 어휘의 촉수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음모들을 사랑한다. 자동필기처럼 의무감에 리뷰하는 반복되는 루틴에서 해방시켜줄 어긋남을 사랑한다. 그게 지금 <스파이의 아내>를 붙잡고, 되지도 않게 매달리는 이유다. 이 글은 분석도 비평도 해설도 아니다. 그저 내가 겪은 흥분되는 순간에 대한 거친 고백이다. <스파이의 아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판에 박힌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시대를 경유하는 멜로드라마이고, 2차 대전 말기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읽힌다. 의심과 집착, 불안과 갈망으로 얽힌 캐릭터의 관계도는 서스펜스 멜로의 정석이라고 할 수도 있다. 1950년대 일본 고전 영화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제된 화면들은 한 폭의 유려한 그림처럼 만족감을 안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가장 대중적인 영화”라는 설명도 일정 부분 납득 간다. 진흙처럼 진득한 감정의 덩어리로 뭉쳐진 전작들과 달리 보는 이를 의식하는 혹은 배려하는 조심스러움이 곳곳에 묻어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수식어의 총합이 <스파이의 아내>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이런 부스러기 같은 단어들을 모아봤자 껍데기만 훑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차라리 이 글에선 사소해 보이지만 범상치 않은 몇 가지 장면들을 놓고 마음을 풀어보겠다. 이 영화에는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는 가운데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이 있다. (서사적으로는) 의미가 지정되지 않은, 공백 같은 장면이라고 해도 좋겠다. 화면을 초과하여 영화에 대한 모든 설명을 무력화시키는 균열의 지렛대 같은 장면. 잊은 줄 알았는데 망막 안쪽에 새겨져 눈을 감으면 자꾸만 떠오르는 꿈같은 장면. <스파이의 아내>는 2020년 6월 NHK에서 방영된 스페셜 드라마를 화면 비율과 색상 등 극장용에 맞게 재구성한 영화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시대극을 찍어보고 싶어 시작했다는 이 영화는 그리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진 않는다.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0년 고베를 배경으로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한 쌍의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현대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보고 싶긴 했지만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중력을 벗어나진 않길 바란 결과라고 한다. 전쟁 막바지 전쟁의 기운이 일반 국민들에게도 실감으로 번져가던 시기까지 구로사와 기요시의 수비 범위 안쪽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고베의 무역상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는 국가를 신봉하는 대신 코스모폴리탄을 자처하는 남자다. 유사쿠는 사업차 만주에 갔다가 일본군 부대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목격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유사쿠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는 남편의 비밀이 행복한 가정을 파탄 내고 말 것이라 여기고 결사적으로 그를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하지만 사토코 역시 어떤 계기로 결국 남편의 뜻을 따라 ‘스파이의 아내’로 살 것을 결심한다. 한편 사토코의 어릴 적 지인이자 헌병대 대장 야스하루(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유사쿠를 의심하고 주변을 감시한다. 방영된 드라마를 직접 보지 못해서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도 내용 자체는 대동소이할 것이다. 보기 드물게 8K 카메라로 촬영된 화면을 영화에 맞춰 프레임과 색감 정도를 조정했을 거라 짐작되는데, 한편으론 그게 이 영화의 본질이기도 하다. 영화적인 프레임. 스크린에 착색된 듯 고운 색감. 그만큼 매 장면은 꽉 차있고, 리듬은 빈틈이 없다. 빈틈이 없다는 것이 꼭 칭찬만은 아니다. 쉽게 가는 장면이나 완급 조절 없이 정해진 속도로 뚜벅뚜벅 걷는 쪽에 가깝다는 의미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스파이의 아내의 시점에서 사건을 따라간다. 벌어지는 상황의 전모나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틀은 서스펜스물이라 볼 수 있다. 다음 장면이 궁금하게 만드는 것, 서스펜스는 사실 장르라기보다는 모든 영화의 동력이다. <스파이의 아내>는 서스펜스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색은 매우 옅은 편이다. 바로 이 점이 ‘구로사와 기요시의 대중적인 면모’가 아닐까 싶다. 빗대자면 장르에 대한 인지 부조화가 일어난다고 할까. 사실 이 영화는 전혀 대중적이지 못하다. 감독은 “전쟁을 배경으로 했지만 멜로드라마와 서스펜스라는 장르가 중요하다”고 항변하기도 했지만 정확히는 대중적이라고 믿어지는 어떤 틀이나 평균치를 끌고 와도 기요시는 기어코 자신의 호흡 안으로 끌어 당겨와 자기 색깔로 덧씌워 버린다. 서사적으로 볼 때 이 영화의 긴장감은 느슨한 고무줄 수준이다. 스파이 혹은 스파이의 아내가 일본 군부의 비윤리적인 만행을 알게 되고, 그것을 해외에 알리려는 과정은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편편하고 단조로우며 투명하게 진행된다. 반면 관객의 심장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건 감정, 멜로드라마의 기운이다. 유사쿠가 만주에서 무엇을 목격하고 왔는지, 야스하루는 유사쿠를 어떻게 의심하는지, 유사쿠와 사토코가 어떤 방식으로 일본군의 만행이 담긴 테입과 기록을 해외로 반출하려고 하는지 따위의 과정은 트릭도, 대단한 정보의 지연도 없다. 대신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심리적 정황은 대부분 불투명하게 가려져 있다. 투명한 전개와 불투명한 마음. 두 요소의 방향이 어긋나거나 충돌할 때마다 영화는 사건 안쪽에서 불꽃을 튀기며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비유하자면 인물의 내면에 불꽃이 튀고, 영화는 그것을 구태여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타카하시 잇세이와 아오이 유우의 저 곱고 반듯한 얼굴 가죽 뒤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내 마음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데 상대방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스파이’는 거짓말이란 행위를 위한 하나의 방편 내지는 표상에 불과하다. 유사쿠가 어떤 방식으로 첩보활동을 벌이는지는 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건 <미션 임파서블>이 아니니까. 중요한 건 그런 행동을 벌이는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스파이의 ‘아내’의 시점에서 전개된다는 건 핵심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사토코가 일본 내부의 시선을 대표한다고 밝혔다. “그녀는 일본 사회 안에 머물면서 행동한다. 사회의 압력을 마주했을 때 남성들의 행동은 둘 중 하나다. 패배하여 굴복하거나 튕겨져 나가거나. 하지만 사토코로 대표되는 여성들은 그 안에서 길을 모색한다. 사회 안에 머무르면서도 자신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면모를 부각시키고 싶었다.” 요컨대 <스파이의 아내>는 사토코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남편을 불안한 가운데에도 믿고, 믿는 가운데에도 불안에 떨며 마음의 형태를 그려가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진정 매혹적인 부분은 일련의 불안이 어떤 형태로도 쉽사리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요시는 인물이 감정을 토해내거나 어떤 이미지로든 요동치게 하는 대신 화면 안 쪽에 단단히 가둔 채 기다린다. 이윽고 얇은 살얼음 아래 흐르는 불안과 의심의 격류는 서서히 진동수를 올리며 표면 위로 스며 나오기 시작한다. 먼 길을 돌아왔다. 딱 세 장면만 이야기하겠다. 세 장면 모두 불안이라는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한 단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각기 다른 떨림 혹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쩍쩍 갈려진 균열들이다. 우선 첫 번째는 유사쿠가 만주에서 찍어온 필름을 확인하는 사토코의 표정이다. <스파이의 아내>에는 두 개의 필름이 나온다. 하나는 유사쿠가 사토코를 주인공을 찍은 극영화, 다른 하나는 유사쿠가 만주에서 찍어온 731부대의 만행이 담긴 기록이다. 관객은 두 가지 필름을 볼 때 사토코의 표정에 떠오른 미세한 차이를 목격한다. 그건 차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아니 표정이라고 할 것도 없는 비어있는 얼굴이다. 그런데 그 비어있는 얼굴 안에서 형용하기 힘든 감정들이 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관객의 머릿속에서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토코의 마음을 한 순간에 돌려세운 건 유사쿠를 향한 믿음일까, 함께 하고 싶은 애정일까, 아니면 유사쿠가 찍어온 기록의 힘일까. 영화는 끝까지 답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답을 비워두는 것이 구로사와 기요시 스타일의 멜로드라마 서스펜스다. 여느 서스펜스가 정보를 지연시킨다면 구로사와는 ‘왜’를 아예 지워버리는 것이다. 결국 관객은 내내 결과와 현상만 목격하고 원인을 제공받지 못한다. 설명되지 않는 것을 마주하는 불안. 불투명한 진실이 영화 내내 안개처럼 깔려있다. 두 번째 장면은 도항에 성공한 유사쿠가 배에서 유쾌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 장면이다. 유사쿠는 각기 다른 항구에서 함께 도항하기로 했던 사토코를 배신해 밀고한 뒤 아내를 미끼로 본인은 무사히 도항에 성공한다. 유사쿠의 진심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사코토를 온전히 믿지 못해 일부러 알리지 않은 걸까. 중반 자신의 조카를 밀고했던 사토코의 행위에 대해 복수를 가한 걸까. 아니면 아내를 아끼는 지극한 사랑으로 혼자 위험을 감수하고 해외로 떠난 걸까. 셋 중 하나 일수도 있고, 셋 다 아닐 수도 있고 세 가지 모두 일수도 있다. 답은 중요치 않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눈앞에 주어진 결과만 목격할 뿐 인물의 속내 따윈 짐작할 수도 없다. 이 장면이 특히 흥미로운 건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유사쿠가 자신을 밀고하고 혼자 도항했다는 걸 깨달은 사코토가 헌병대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외치는 대사, “대단해!”라는 단발마다. 관객은 오직 이 리액션만으로 모든 정황과 심리를 추측해야 하는데, 공간을 찢고 나오는 듯한 이 한 마디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통쾌함, 놀라움, 분노, 수치심, 안도감. 모든 감정이 범벅이 된 듯 감히 해석할 수 없는 이 목소리는 실로 곤란하다. 곤란해서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너무 사랑스럽고 뇌리 한 구석에 각인될 것만 같다. 다른 하나는 유쾌하게 손을 흔들며 배를 타고 가는 유사쿠의 이미지다. 일련의 편집은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것은 실제 유사쿠가 배를 타고 가는 장면의 재현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악몽을 꾸던 사토코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상상에 불과한 것인가. 그도 아니면 그저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 내지는 친절한 설명인가. 마찬가지로 알 길이 없다. 이것을 지정하는 건 오로지 관객의 판단이다. <스파이의 아내>는 사건과 정황을 나열한 뿐 매우 헐겁게 짜여있다. 매 장면은 서로 인과관계를 맺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관객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덕분에 서사의 서스펜스로는 상당히 밋밋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영화는 형용하기 힘든 불안들을 자아낸다. 이걸 두고 기분 좋은 불안, 행복한 유예라고 부른다면 과한 표현일까. 영화가 불투명해질수록 시야와 장면은 명료해지는 신기한 체험이 이어진다.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엔딩이다. 여기에 대해선 긴 설명을 붙이지 않겠다. 그럴 수 없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도시, 건물 사이를 가로질러 해변으로 나아가는 사토코는 끝내 바닥에 엎드려 절규한다. 용서하시길. 내가 가진 역량으로는 이 장면의 비장하고 아름다운 공기를 ‘울부짖음’ 따위의 추상적인 언어로 밖에 묘사할 수 없다. 어쩌면 묘사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스파이의 아내>는 서스펜스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그렇게 보고자 한다면 그럴 순 있겠지만 서스펜스 멜로드라마나 시대극, 역사물로 한정짓는 순간 범상한 무리 중 하나가 된다. 이 영화의 서사 행간이나 연결, 스토리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흥미롭지도 않다. 다만 나를 뒤흔드는 건 엔딩에서 사토코가 울부짖는 순간의 형태, 사토코의 실루엣, 그 몸짓과 화면의 색, 파도의 소리 등 스크린 위에 덧씌워진 이미지 그 자체다. 그 조형적인 결과물이 눈꺼풀 안 쪽에 자리 잡아 좀처럼 지워지지 않은 채 사정없이 나를 쥐어짜고 흔든다. 이것은 당신의 목격으로만 성립하는 장면이다. 그 어떤 설명도 본질을 훼손할 뿐, 오직 보는 것으로만 전달되는 감정의 덩어리가 거기에 있다. 유사쿠의 필름을 목격했었던 사토코처럼, 스크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음모들이 끝내 당신의 심경을 변화시킬 것이라 믿는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움도 두려움도 모두 경험하라. 그저 걸어가라. 생이 계속되는 한,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끝’은 없으니.”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추운 겨울, 독일 베를린의 한 광장. 파스텔빛 집들이 하얀 입김을 포근하게 둘러싼다. 어린 소년은 여느 날처럼 넉넉지 않게 먹을거리를 사오다가 ‘파란빛’으로 반짝이는 나비를 본다. 그 날갯짓이 유난히 예쁘게 마음에 들어온 탓에, 소년은 미소를 짓고 쪼그려 앉아 나비를 바라본다. 저 멀리 날갯짓이 사라지고 나서야 일어선 소년의 옆, 낯익은 구두가 허공에 떠있다. 그렇게 소년은 광장 한가운데서 엄마의 죽음을 마주한다. 반나치 활동으로 교수형을 당한 엄마의 죽음을.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차디찬 엄마의 발을 부둥켜안고 우는 일밖에 없다. 한없이 따뜻해 보였던 집들은 서늘한 눈이 되어 소년을 응시한다. 광장엔 매일같이 사람들이 매달리고, 아이들이 장난감 대신 총을 드는 비정한 거리. 제2차 세계대전 시대였다. <조조 래빗>은 신발 끈을 혼자 고쳐매지 못했던 소년이 신발 끈을 매어주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영화다. 엄마 ‘로지’(스칼렛 요한슨)와 단둘이 사는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열살 아이가 겪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는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조조는 어린 마음에 소속감이 갖고 싶어 나치 소년단인 유겐트에 입단하지만 작은 토끼조차 쉽게 죽이지 못해 겁쟁이 토끼라 놀림당한다. 상상 속 친구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 외에는 줄곧 혼자였던 조조에게 몰래 숨어 있던 소녀 ‘엘사’(토마신 맥켄지)가 우연히 나타난다. 그리고 소년은 소녀를 만나며 조금씩 변해간다. 엄마 손에 이끌려, 엄마가 매준 신발로 문밖을 나섰던 조조는 엘사의 신발 끈을 고쳐매 주고, 직접 문을 열어 세상을 마주한다. 안아주고 싶은 각색, 연출, 음악 <조커>, <아이리시맨>처럼 어마어마한 ‘어른들’을 제치고 <조조 래빗>은 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했다. 72회 미국 작가 조합상, 73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이어 각색상 부문에서만 세 번째 수상이었다. <인생은 아름다워>부터 <피아니스트>까지 전쟁의 비극을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끔찍한 제2차 세계대전의 이야기를 새롭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조조 래빗>을 선보였다. 원작인 크리스틴 루넨스의 소설 ‘갇힌 하늘(Caging Skies)’이 제국주의와 마초적 본성, 소유의 집착을 들이댄다면, 영화는 어린 소년의 얼굴에 난 상처로 전쟁의 비극을 그린다. 부디 마음만큼은 덧나지 않길 바라며 연고를 발라 주고 싶게끔. 동화적인 상상력과 따뜻한 색감이 돋보이는 연출도 원작의 어두움을 걷어낸다. 조조가 엄마와 함께 자전거로 꽃밭을 달리는 장면,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뱃속에 나비가 가득한’ 모습으로 비유한 장면, 그리고 쓰이지 않은 편지를 진심으로 읽는 장면에서 특히나. 이렇게 어린 조조의 순수함은 마이클 지아치노 음악감독의 넘버로 울려 퍼진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인크레더블>, <코코>, <인사이드 아웃>으로 전 세계 어린이, 어른이 마음을 빼앗았던 지아치노 음악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20명 규모의 작은 오케스트라와 협업했다. “오케스트라 규모가 작을수록 감정선을 잘 살려주는 사운드가 나온다”는 그의 말처럼 영화 속 넘버는 정서적인 울림을 더한다. 혐오를 물리치는 풍자 <조조 래빗> 음반 커버에 ‘혐오를 물리치는 풍자(An Anti-hate Satire)’가 적힌 건 우연이 아니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블랙 코미디’가 관통하기 때문. “‘하일 히틀러’는 생각 없이 뱉어야 제맛”이라는 꾸지람(?)에서 시작된 풍자는 비밀경찰인 게슈타포가 ‘하일 히틀러’를 티키타카 주고받는 영화 후반부에서 극대화된다. 이렇듯 <조조 래빗>은 80년 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진 비극을 재치있게 담아낸다. 전쟁과 폭력, 차별과 혐오, 가짜뉴스와 프로파간다는 우리 가까이 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영화 속에서 두드러지는 여성과 성소수자의 역할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사랑의 힘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말을 행동으로 증명한 엄마 ‘로지’, 조조의 세뇌된 공포를 거둬준 ‘엘사’의 존재감은 극단으로 치우친 전쟁 상황에서 여성의 용기와 강인함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은 바로 ‘클렌첸도르프’(샘 록웰)다.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훈련 교관 ‘클렌첸도르프’는 미친 세상에 술이 유일한 답인 양 매일 취해있다. 후배 병사인 ‘핀켈’(알피 알렌)과 있을 때면 왠지 모르게 묘한 기류가 감도는 그는 위급한 순간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조조를 보호해준다. 요란한 총성이 광장까지 울려 퍼질 때, 클렌첸도르프는 화려하게 커스텀된 전투복을 입고 등장한다. 어깨에는 빨간 망토를, 허리춤에는 커다란 스피커를, 가슴팍에는 분홍색 역삼각형 뱃지를 달고. 동성애자 홀로코스트가 만연했던 역사를 되돌아보면 클렌첸도르프의 장식은 ‘그냥’ 장식이 아니다. 캐릭터의 성격을 녹여내는 듯 유난히 돋보인다. 코드 연출이나 역할론에서 아쉬움은 남지만, 애초에 싸우려고 입을 전투복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입을 ‘상복’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장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군복’부터 벗어던질 수 있길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보이듯, 신발 끈을 고쳐맬 수 있다고 모두 바람직한 어른이진 않다. 또 다른 교관인 ‘람’(레벨 윌슨)은 죽은 독일 병사의 군복을 벗겨 조조에게 입히고는 총을 들고 싸우게 한다.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옷 중에서도 ‘군복’은 계급을 드러내고 이념을 드러낸다. 군복에 담긴 정체성을 생각하면 ‘꼬마 병정’처럼 무서운 단어도 없다. 이때 영화의 첫 장면에서 조조는 군복을 입고, 마지막 장면에서 군복을 벗는다. “나치가 아닌 나치의 상징에 열광하는, 웃기게 생긴 제복을 입고 무리에 어울리고 싶어하는 꼬마애”라며 팩트 폭격을 날린 엘사의 대사는 조조뿐 아니라 지금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춤이 전쟁을 비롯한 모든 비극으로부터의 탈출이라면 우리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몸에 걸치고 있는 군복은 무엇일지. 엔딩 크레딧이 오르면 신발 끈을 고쳐매고 춤출 준비를 해보자. ‘군복’부터 벗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