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시디어스: 두번째 집
- 감독
- 제임스 완
- 제작년도
- 2013
- 출연
- 로즈 번, 패트릭 윌슨, 린 쉐이, 타이 심킨스, 바바라 허쉬, 다니엘 비서티, 리 와넬, 마이클 비치, 호르헤-루이스 팰로
벽장 속의 괴물. 익숙한 소재다. 동화처럼 따뜻한 이야기도 가능하고, 아이를 잡아가는 섬뜩한 괴물도 가능하다. 단순하게 귀신의 통로로만 이용할 수도 있다. 김지운 감독의 < 장화, 홍련 >(2003)에 등장하는 옷장 장면은 정말 섬뜩했다. 리메이크작 < 폴터가이스트 >(2015)에서는 아이가 벽장을 통해 원령들이 사는 세계로 끌려간다. 밤에 잠을 자다가 혹은 일이나 공부를 하다가 뒤에 있는 옷장이나 벽장문이 끼익하고 열리는 순간의 공포를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익숙한 것이 한순간에 이면을 드러내거나 기괴한 것으로 변할 때의 공포다.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상원과 딸 이나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상원은 공황장애가 있고, 이나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이나의 치료를 위해 교외의 저택으로 이사를 갔지만 벽장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전형적인 설정이다. 과거의 상처가 있는 가족이 새로운 집, 공간에서 초자연적인 존재나 살인마를 만난다. 공포영화가 익숙한 설정을 갖는 것은 나쁘지 않다. 전형적인 설정과 캐릭터, 장면을 가지고도 섬뜩한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이 호러영화의 매력이니까. 그러나 클리셰를 명확한 이유 없이, 흐름에 관계없이 마구잡이로 갖다 쓰는 것은 최악이다. 무서운 장면이었으니까, 관객이 좋아한 설정이니까, 라는 이유만으로 기존 호러영화를 뒤죽박죽 베끼면 재미가 없다. 한국 공포영화의 태반이 그렇다. 공포영화에 관심 없는 제작자와 감독이 만나 공포영화 히트작의 익숙한 장면들을 다 끌어오면서 엉터리를 만들어낸다. 재미도 없고, 공포도 없다. 한두 번 놀라는 장면이 있어도 그뿐이다. < 클로젯 >( 김광빈 , 2020)을 보고 있으면, 다 어디선가 본 장면들이고 설정이다. 그것들이 합이 맞지 않고 삐걱거린다. 클라이맥스도 맥이 빠진다. < 컨저링 > < 인시디어스 > < 애나벨 > 등 제임스 완 연출, 제작 영화들이 계속 떠오른다. 벽장 속 이계는 <폴터가이스트>, 학대 받은 아이들의 복수는 시미즈 다카시의 < 코도모츠카이 >가 연상된다. <클로젯>의 도입부는 벽장 안에 있는 무엇인가 때문에 이나의 성격이 변하고 어딘가로 사라지는 이야기다. 까마귀가 창으로 날아들고, 벽장문이 끼익 거리며 분위기를 잡는다. 그리고 이나를 찾는 상원 앞에 퇴마사 경훈이 나타난다. 프롤로그에 나와 굿을 하다 죽은 무당의 아들이다. 경훈은 동양의 퇴마의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첨단 과학 장비를 활용하여 초자연적 존재를 추적한다. 농담과 너스레가 끊이지 않는 경훈이 등장하며 분위기가 조금 바뀐다. 지금 상황에서 웃어도 되는 것일까? 그러면서 영화의 톤이 오락가락한다. <클로젯>은 이나가 변하고 사라진 후, 경훈이 나타나 이나를 데려간 존재를 찾아가는 초자연적 미스터리로 볼 수도 있다. 상원과 경훈은 명진의 존재를 알게 된다. 왜 원한을 갖게 되었는지도 알게 된다. 1998년, 아마도 IMF 금융위기로 모든 것을 잃은 아버지의 학대로 명진은 옷장에 갇혀 목숨을 잃는다. 그 원한 때문에 죽은 후에도 ‘클로젯’을 통해 학대받는 아이들을 이계로 데려간다. 그렇다면 상원과 경훈은 명진의 한을 어떻게 달래줄 것인가. 상원은 이나를 구하기 위해 이계로 들어간다. 그런데 하는 일이 없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나를 학대했음을 알게 되는 정도다. 그것은 좋다. 상원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주니까. 하지만 그뿐이다. 모든 것은 갑자기 명진의 엄마가 나타나면서 해결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아이들을 이계로 데리고 간 명진은 엄마를 만나 원한을 내려 놓고, 모든 것이 해결된다.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개인적인 문제 특히 모성애로 진부한 답을 내리고 끝난다. <클로젯>은 한국 공포영화가 지지부진한 상태로 놓여 있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무서운 장면 몇 개를 만드는 실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스릴과 코미디와 신파를 다 섞어 놓은 공포영화를 만들겠다는 시도는 어리석다. 대부분은 실패한다. 장르물은 우선 장르의 본질을 확실하게 파고드는 것이 기본이다. 공포영화를 만들어 놓고도 미스터리와 드라마라고 우기지 말고. < 기담 >(2007)과 < 곤지암 >(2017)의 정범식 , < 검은 사제들 >(2015)과 < 사바하 >(2019)의 장재현 감독은 공포물에 대한 지식과 애정으로 전형적이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담은 공포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런 공포영화들을 더 보고 싶다.
2013년을 결산하던 중에 영화 관람 행태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 관람 2억 회(‘영화 관객 2억 명’보다 ‘영화 관람 2억 회’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라는 대기록은 이제 한국에선 ‘영화 관람’이 일상적 문화생활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더불어 흥행 영화보다 취향 영화를 선호하는 1인 관객, 즉 ‘나 홀로 관객’이 전체 예매 관객의 17%를 차지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기존의 ‘시즌 공식’을 깨는 슬리퍼히트 영화가 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관람 행태 변화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올해 ‘시즌 공식’을 박살 난 최고의 ‘슬리퍼 히트’를 꼽으라면 단연 제임스 완 감독의 < 컨저링 >이다. 스산한 가을에 조용히 개봉해 상상 이상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컨저링>과 그 뒤를 이어 개봉한 ‘이한치한’ 호러 < 인시디어스: 두 번째 집 >에 대한 호러 관객의 반응도 기대 이상이다. 제임스 완 감독의 호러 영화가 가진 재미는 익숙한 클리셰를 비틀고 뒤섞어 이종집합하는 기발한 발상과 그 아이디어를 밀어붙이는 배포에 있다고 본다. 이 모든 것은 ‘공포의 속성’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제대로 기를 못 펴는 최근의 한국 호러 영화들과 비교하면, 특히 아쉬움이 더 커진다. CG 기술과 특수효과가 제아무리 번듯해도, 공포의 속성과 맞닿지 못하면 소용없다. 매끈하되 무섭지 않은 최근의 공포 영화보다 투박하지만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무서웠던 옛 한국 공포 영화가 그리워지는 이유다. 한국 공포 영화는 ‘소복을 입고 산발한 여인네들의 원맨쇼’라는 오해를 ‘쩍’ 소리 나게 쪼개버린 영화가 있다. 한국 공포 영화의 전통적인 깜짝쇼 레퍼토리에 익숙해졌다고 자만하던 나를 얼어붙게 만든 장면. 도깨비불이 날아다니는 한밤의 공동묘지에서 무덤 하나가 뭉게뭉게 연기로 휩싸이더니, 쩍 하니 갈라지고 시신이 벌떡 일어났다. 압도적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무덤 트라우마를 남겼을 이 작품이 한국 공포 영화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권철휘 감독의 < 월하의 공동묘지 >(1967)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나중 일이다. 어린 시절에 섬뜩한 잔상을 복기하기 위해 <월하의 공동묘지>를 다시 본다면 뜨악할지도 모른다. 기억 속 무서운 장면들은 예상보다 훨씬 코믹하다. 오히려 상상 이상으로 촘촘한 드라마에 놀라게 된다. 때는 일제 말기 표독스러운 아내 난주( 도금봉 )가 전처 명선( 강미애 )의 어린 아들을 독살하려던 찰나 남편 한수( 박노식 )가 들이닥친다.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면 부부싸움을 하는 그들의 사연은 이렇다. 명선은 사랑하는 남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기생이 되었다가 병을 얻고, 그녀의 병간호를 위해 가정부로 들어온 난주는 재산을 가로채고자 의사 태호( 허장강 )과 짜고 명선을 죽인다. 끝내 한수와 어린 아들마저 없애려다가 무덤을 쪼개고 돌아온 명선의 원혼이 원수를 갚는다는 해피엔딩. 최신 막장 TV 드라마 뺨치는 줄거리를 1960년대 영화에서 만나는 것도 신선하지만, 더 놀라운 건 배포 좋게 섞여 들어간 실험적인 장치들이다. 괴기스러운 몰골의 변사가 등장해 주인공의 사연을 구구절절 읊기도 하고, 자결한 명선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유서는 산발한 여인들이 ‘창 뮤지컬’로 재연하는 식이다. 보석 같은 ‘퓨전 호러’라 칭하기에 충분하다. < 월하의 공동묘지 >가 탁월함은 ‘과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있다. 자고로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 했다. 사실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쩍 갈라지는 무덤이나 후반 10분간 공포 영화의 소임을 다하려는 듯 몰아치는 귀신의 깜짝쇼가 아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갓난아이건, 정을 통한 남자건, 음모의 협조자건 ‘뚝딱 죽여 버리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난주의 서늘한 욕망이다. 특히 난주가 죽인 줄로만 알았던 명선의 어린 아들이 살아나자 아이의 목을 덥석 움켜쥐는 장면은 특수효과나 분장의 도움 없이도 등골이 서늘하다. 원조 ‘호러 퀸’ 故 도금봉 여사(1930~2009)가 아니었으면 상상하기 힘들 공포. 그녀는 한국 공포 영화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여배우다. < 살인마 >(1965)를 시작으로 < 목 없는 미녀 >(1966) < 생명을 판 사나이 >(1966), <월하의 공동묘지>와 < 이조여인 잔혹사 >(1969) < 백골령의 마검 >(1969) < 악마와 미녀 >(1969)를 통해 원조 호러퀸에 등극했다. 1960년대에 한국 여배우 중 남자 피를 빠는 흡혈 마녀 역할을 누가 소화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뒤져봐도 대안 없는 선택이다. <월하의 공동묘지>는 한국 공포 영화계에 한을 품은 소복 귀신의 이미지를 정착시킨 첫 작품이자, 배우 도금봉의 육신을 빌어 현대적 의미의 욕망의 화신을 배출한 에로틱 스릴러로 재음미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