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상륙작전
- 제작년도
- 1950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흔히 ‘망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말 전설적인 망작이 되어 오래도록 ‘제일 망한 영화’ 리스트에 오르내리는 방법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컬트로 재정의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시에는 망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그 ‘망했다’라고 평가되는 지점이 후대에는 묘한 매력이 되어 이를 즐기는 팬들에게 숭앙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할리우드 영화 역사에서 < 인천(오! 인천) >(테렌스 영, 1981, 이하 <오! 인천>)은 전자에 해당하는 영화이다. 천문학적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개봉 이후 비평계와 대중 양쪽 모두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했고, 제3회 골든 라즈베리상 최악의 작품상을 수상하며 그 명성에 정점을 찍었다(최악의 작품상 외에도 최악의 남우주연상, 최악의 감독상, 최악의 각본상 등 4관왕에 올라 모름지기 당해 연도 최악의 영화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고 이 글을 통해 섣불리 <오! 인천>을 컬트로서 재평가하려 하거나, 혹은 그럼에도 영화팬들에게 감히 시간을 들여 한 번 즈음 볼 만하다고 추천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피할 수 있는 것은 그냥 피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는 오직 <오! 인천>을 둘러싼 외부적인 기록들, 그리고 여기에 참여했던 한국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영화로 기록된 이 작품이 한국영화계에 몰고 온 변화와 그것이 이후 한국영화들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도 역대급의 제작 규모 처음 <오! 인천>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는 1978년 3월 신문기사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남궁원 , 윤미라 *주 1 등 20여 명의 배우가 출연하고, 미국의 원웨이프로덕션과 일본의 동보영화사가 제작에 참여하며 각본은 <그린베레>(존 웨인, 레이 켈로그, 1968), < 프렌치 커넥션 >(윌리엄 프리드킨, 1971)의 원작자인 로빈 무어와 폴 사베지가, 감독은 < 서부로 가는 길 >(앤드류 V. 맥라글렌, 1967), <철인들>(앤드류 V. 맥라글렌, 1969)과 같은 서부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앤드류 V. 맥라글렌이 담당하기로 했다. 그렇게 5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는 영화는 그러나, 5월이 한참 지나도록 촬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7월이 되자 이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왔다. 기술협조를 하기로 한 일본의 동보영화사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든가, 시나리오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는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촬영 개시를 지연시킨 가장 큰 문제는 시나리오였다. 당시 각색을 담당했던 로빈 무어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 대해 “2시간 안에 담아내기에 너무 방대한 이야기였다. … 등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결국 다른 작가들이 투입되었다”라고 이야기했다. *주2 결국 1978년 5월에 촬영에 들어간다던 영화는 무려 1년을 더 기다려 1979년 5월, 새로 영입한 감독이 한국을 방문하며 다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교체된 감독이 무려 테렌스 영이었다. 테렌스 영은 국내에서 ‘007 시리즈’로 명성이 나 있는 감독이었다. 한국에서는 1965년에 < 007 제2탄 - 위기일발 >(테렌스 영, 1963)이 007 시리즈 가운데 가장 먼저 개봉했다. 실제 007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이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트렌드에 민감한 수입업자들은 서둘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 007 살인번호 >(테렌스 영, 1962)를 수입해 개봉했을 정도였다. 테렌스 영이 감독한 마지막 007 시리즈 < 007 썬더볼작전 >(테렌스 영, 1965)이 국내에 개봉하고도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테렌스 영은 여전히 국내에 다수의 팬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영화 촬영을 위해 방한한 테렌스 영 감독이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6.25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 한국이 공산당에 침략당했다는 것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리게 될 것(《경향신문》 1979.5.5)”이라는 발언을 한 이후, 북한에서 《로동신문》의 논평을 통해 이 영화가 “악랄하게 중상모독, 헐뜯는 반동 내용(《경향신문》 1979.5.16)”이라고 비난하며 제작 중지를 요구해왔다. ‘테렌스 영’이라는 스타 감독의 참여에 더해 친한(親韓)적인 그의 발언,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게 화제성을 확보하면서 <오! 인천>에 대한 기대는 더욱 높아졌다. 뒤이어 해외 출연진도 속속 명단이 발표됨과 동시에 배우들이 한국에 도착했다. 물론 제일 관심을 끄는 것은 과연 누가 ‘맥아더 장군’의 역할을 맡을 것이냐였다. 놀랍게도 그 역은 영국의 영화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돌아갔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 햄릿 >(로렌스 올리비에, 1948), < 헨리 5세 >(로렌스 올리비에, 1944), < 리차드 3세 >(로렌스 올리비에, 1955) 등 셰익스피어 작품을 기반으로 한 영화의 주연을 맡아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배우이고, 1947년에는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기사 작위를 수여받기도 했으며(국내 신문기사에서도 로렌스 올리비에를 지칭할 때는 꼭 올리비에 ‘경’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빅터 플레밍, 1939)와 < 애수 >(마빈 르로이, 1940),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엘리아 카잔, 1951) 등의 작품으로 국내 많은 팬을 가지고 있었던 비비안 리의 연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그가 ‘맥아더 장군’의 이미지에 잘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로렌스 올리비에’가 그 역을 맡는다는 것 자체로 이 영화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자, 미국에서 공수해온 장비와 동원된 스태프, 엑스트라의 스케일이 또 한 번 한국 측 스태프들과 언론, 촬영현장을 구경하러 온 시민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당시 촬영 현장의 분위기와 이 영화의 규모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 신문 기사와 구술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6.25 당시 피난민들의 행렬을 재현한 촬영 현장(《동아일보》 1979.9.5) 테렌스 영 감독을 비롯해서 로런스 올리비에 경,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등 세계 정상의 배우들이 우리나라에 몰려와 촬영 중인 영화 <오! 인천>은 스태프 캐스트 못잖게 엄청난 물량 작전으로 계속 화제를 뿌리고 있다. … 현역미군 등 5백명의 엑스트러와 탱크 4대, 장갑차 2대 등이 출연한 서울탈환 장면은 당시 서울 거리와 가장 비슷한 인천 신포동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됐다. … 지난 6월 28일 촬영을 시작한 영화 <오! 인천>은 용인 민속촌을 비롯하여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강원도 횡성비행장, 경북 왜관, 인천, 서울 등을 돌며 제작됐다. 이중 6.25 당시 낙동강 철교 폭파를 재현한 촬영에는 피난민 차림의 엑스트러 1천 3백명, F86 등 전투기와 탱크들이 동원돼 13일 동안 6대의 카메라에 담았다. *주3 인천에서도 폐기된 수인간(水仁間) 미니열차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고 영흥도에 3천만원을 들여 등대를 세우기도 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모습은 인천 제2부두에서 촬영됐는데, 군함 12척과 상선 10여척이 동원돼 장관을 이뤘다고. … 이 영화는 당초 1천8백만 달러(90억원)의 제작비가 계상되었으나 제작기간의 지연 등으로 이미 3천5백만 달러(1백75억원)가 투입됐단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물량이 동원된 이 작품에는 6명의 주연급 배우(남궁원 포함)와 테렌스 영 감독이 쓸 캠핑카 8대, 토일렛카, 링컨 컨티넨털 승용차, 지프 2대가 미국에서 운반됐다. 캠핑카는 침대와 화장실, 식당과 에어컨 장치가 돼 있어 촬영현장에서 주연 배우들이 쓸 수 있도록 했다. 또 높이 10m까지 올라가는 크레인 카도 제작자인 이탈리아인 기사가 직접 가져와 운전하기도. 이밖에 진행을 위해 1백30대의 차량이 국내에서 동원되고 영화에 등장할 40년대식 승용차 6대,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에 쓰던 차와 동형의 크라이슬러, 그리고 탱크, 장갑차, 소제(蘇製) 무기 등이 미국에서 옮겨져왔다. 칠순의 로런스 올리비에 경을 비롯해서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데이비드 젠슨(TV영화 <도망자> 주연), 리처드 라운트리,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 등 세계적인 배우를 포함, 한국인 1백명, 미국인 50명, 영국인 30명, 이탈리아인 30명, 일본인 30명 등 스태프가 참가한 이 영화는 인적 구성에서도 국제적인 성격을 짙게 띠고 있다. - “<오! 인천> 로케 한창, 엄청난 물량작전 한국동란 재현(《경향신문》 1979.9.14.) ” 그때 내가 <오! 인천>을 보고, 카메라가 아홉 대가 다 뭐냐하면, 다 파나비전 카메라예요. 아리플렉스가 아니라. 미국에서 원 파나비전 카메라, 제일 좋은 카메라예요! ( 구중모 , 2015, 212쪽) *주4 그때 하얏트 호텔 2층 일체를 썼죠. 그때 뭐 복사하는 데도 있었고, 뭐 신기하게 여겼죠. … 우선, 이 장비가, 장비가 많아, 양이.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없는 현대적인 장비. 특히 낮에 라이트를 킨다는 게, 이건 못 보던 거거든. ( 김호길 , 2016, 116쪽) *주5 그때 150대의 차가, 그러니까 자동차 배차하는 거 있잖아요? 배차요원을 홍콩에서 데려왔어요. 현장에서 차 관리하는 애가 스무 명. 또 뭐 관리하는, 여하튼 식당이 있잖아요? 식당이 두 팀. 얼마나 웃기냐면요,하얏트 호텔에서부터 문산까지 온다고 생각하면, 시내는 500미터, 긴 거리는 1키로마다 깃발을 꽂아놔요. 잊어먹을까봐. 한 팀이라도 늦게 나오면 안되잖아요. … 엄청난 돈이에요. 은행 차가 쫓아, 현장에서 줘. 은행 차가 다녔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럼 스태프들한테 시간 당 현찰로 줘버려요, 엄청난 돈을. ( 박광남 , 2023, 112~113쪽) *주6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서 촬영된 다리 폭파 장면의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중앙청 앞에서 진행된 서울 탈환 장면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통일교, 그리고 영화에 쏟아진 혹평들 특히, 당시 <오! 인천>에 참여했던 국내 스태프들은 구술에서 공통적으로 외국에서 온 스태프들이 하얏트 호텔의 한 층을 통째로 빌려 사용했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울 하얏트 호텔은 이 영화가 촬영되기 1년 전인 1978년 7월에 개장한 5성급의 미국 체인 브랜드 호텔이었다. 평소 한국영화 촬영을 다닐 때 “5천원짜리 여관방에서 댓 명이 한 방을 쓰는” *주7 환경에 익숙해져 있던 충무로 스태프들에게 최신식 시설이 갖춰진 호텔을 촬영 기지로 쓴다는 것은 꽤나 인상 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촬영을 끝낸 촬영팀에게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촬영팀의 출국을 앞두고, 하얏트 호텔의 숙박비 22,327,000원을 지불하지 못해 촬영 기자재 등의 유체동산에 대한 가압류 처분이 내려졌다. 당시 물가를 생각했을 때, 2천여만 원이라는 금액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지만 몇 백억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에서, 외국인 출연자들의 주급을 매주 헬리콥터로 실어나르고, 스태프들의 일당 지급에 은행차까지 동원해가며 그때 그때 현찰로 지급하는 등 제작비를 쓰는 데에 아낌이 없던 영화 제작사가 호텔 숙박비를 내지 못해 가압류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자금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며칠 뒤 제작사와 호텔 측이 합의에 도달하며 가압류 기간이 연기되었다는 짧은 기사로 이 사건은 정리가 되었고, 촬영팀도 무사히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 인천>를 둘러싼 구설들은 끊이지 않았다. 먼저 한국 체류 당시 테렌스 영의 손목시계와 필름 1,345피트(당시 시가로 350만원 상당)를 도난맞은 사실이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그러나 끝내 범인도 잃어버린 물건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1980년에 이미 모든 촬영을 다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개봉과 관련하여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다가, 1981년 2월에는 이성구 감독이 재편집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런 소문이 돌고 있는 와중에 5월에는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미국의 상류층 인사들을 모아놓고 <오! 인천>의 비공개 시사회를 개최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런데 시사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케네디센터 주위에서 통일교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며, 영화에 대한 가타부타 평가는 없이 모든 관심이 ‘통일교’에만 쏠려버렸다. 비슷한 시기 국내에서도 <오! 인천>을 둘러싼 아주 미스터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81년 8월 4일 용산구 원효로에 살던, 일명 ‘원효로 보살’로도 알려진 70대 노파가 그녀의 양녀⋅가정부와 함께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평소 유명 정치인들의 점을 봐주거나 복을 빌어주며 고위층과 인맥을 형성한 바 있고, 이를 통해 큰 부를 쌓았던 윤 노파가 살해당한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윤 노파의 <오! 인천>에 대한 투자 여부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주8 이렇게 <오! 인천>에 대한 관심은 작품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는 자꾸 그 주변부로 옮겨가고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관심이 이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개봉해서 흥행만 잘 된다면 이까짓 구설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대중에 영화가 공개된 것은 프랑스 칸에서였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제작사 측은 칸국제영화제에서 “25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영화 제목이 새겨진 키트 등을 나눠주고 16일 시사회가 끝난 후 호화파티를 열었는데 구매희망자가 나타나지 않았다(《조선일보》 1982.5.19)”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신문 기사는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외면당한 원인을 통일교와 연관 짓고 있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영화의 완성도 문제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영화는 해외 영화시장에서 전혀 판매되지 않았고, 1982년 9월 17일 미국 내 상영만이 힘겹게 성사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혹평 일색이었다. 급기야 통일교 측에서는 영화제작팀 이름으로 《뉴욕타임즈》,《워싱턴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LA타임즈》, 《뉴스 월드 인 뉴욕》, 《워싱턴타임즈》 등 6개 일간지 전면광고를 통해 “미국 기자와 평론가들이 <인천> 영화 자체의 가치는 평가하지 않고 이 영화의 특별후원자로서 문선명 목사의 이름만 강조하고 있는 데 대해 서글픔을 느낀다”라며 “영화 <인천>의 예술적 가치를 객관적 입장에서 냉정히 평가해줄 것을 미국 국민들에게 촉구(《동아일보》 1982.10.5)”했다. 그러나 영화 <오! 인천>의 흥행 실패를 통일교와의 연관성에서만 찾는 것은 오히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럼 처음 제작 때부터 그토록 큰 대중적 관심을 끌어모았던 <오! 인천>은 왜 한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던 것일까? <벤허>보다 (제작비가) 더 많이 들었다고 그랬어, 그 작품이, <오! 인천>. 근데 한국에서 상영 못한 거는 뭐냐 하면 너무 북한을 우상화 시켰다는 거야, 영화를. 그래서 안된 거예요. (구중모, 2015, 216쪽) 영화가 안 되는 이유는 … 정치적인 거예요, 그게. 국방부에서 3일 공연을 했어요, 국방부에서만. 그래 그 시대에 그거야, 이북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공연 못하게 한 거예요. 그거 잘했으면 문선명이 자기 일대기를 하겠다고 그랬다고. … 다 영화제작사에서 잘못한 거야. 일개 장교가 비행기 타고, 한국에 들어올 때 이승만 대통령 등때기 탕탕치고 하는데, 그렇게 푸대접을 하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은 사실 아니거든. 한국의 국익이 상하지. 그래서 나라에서 공연 못하게 했는데. 미국에서도 안 됐어. 전혀 안 됐어요. 한 일주일 하고 문 닫았어. (박광남, 2023, 154쪽) <오! 인천> 제작 당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던 박광남은 이 영화가 국방부 내에서 시사회가 이루어진 이후, 한국에서의 영화 상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만약 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 영화를 본 국방부 관계자들은 북한에 대한 미화는 둘째 치고, 일부 장면에서는 적군보다 더 나빠 보이는 데다가 *주9 전쟁 장면 내내 인민군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민중들보다도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한국군의 모습을 더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영화 속에 드러난 한국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나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고증 실패를 모두 눈 감아 준다고 하더라도 앞서 이야기했던 구설들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인 영화를 국내에서 상영하겠다고 나서는 업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무려 4,6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대작 영화는 조용히 사라졌다(IMDb 기준, 이 영화를 통해 벌어들인 총수익은 520만 달러에 불과하다. 이중 오프닝 수익이 230만 달러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여기서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같은 해 1천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영화 < 이티 >(스티븐 스필버그, 1982)는 미국 내에서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8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한국영화계에 <오! 인천>이 남긴 것들 하나의 작품으로서 <오! 인천>이 가진 수명은 여기에서 끝이 났지만, 한국영화계에서 이 영화는 또 다른 방향으로 계속해서 그 영향력을 이어갔다. 먼저 당시 <오! 인천>에 참여하면서 충무로 스태프들은 소품⋅의상⋅특수효과 등에 쓰일 재료들을 한 곳에 모아놓을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오! 인천> 촬영 이후 생긴 촬영 소품과 재료들을 같이 관리할 곳이 필요했다. 그때 <오! 인천>에서 재료를 내가 많이 받았거든. 그걸 그냥 활용했으니까. …<오! 인천>이란 영화, 그거 끝나고 인저 삼우회를 결성해가지고, 의상⋅효과⋅소품 해가지고 뚝섬에 큰 창고 건물을 직접 얻어 가지고 그걸 나눠서 썼는데, 1980년도에 큰 화재가 나면서… (김호길, 2016, 103쪽) 그때 어디냐면 뚝섬. 거기 우리 불났어. (웃음) 완전히 탔어. 의상도 완전히 타버리고. 의상하고 우리하고 창고를 하나로 같이 있었거든. 그때 <오! 인천>에 갖다 놓은 물건도 있었구나. 거기 사다리 같은 거, 그 좋은 것들이 몽창 다 탔어. 무기도 몽창 타고. 화약은 거기 안 뒀거든. (박광남, 2023, 127쪽) 구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창고에 화재가 발생해 많은 촬영 소품과 의상, 효과 재료들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당시 충무로 인력들이 <오! 인천>에 참여하며 배웠던 것들이 함께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이후 한국의 전쟁영화,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나 규모가 큰 영화를 촬영할 때 자신이 배웠던 것들을 최대한 살려 활약했다. 이게 촌길에 철조망이 깔려 있으니까 우체부가 자전거 끌고는 못 가는 거야. *주10 “책임지겠습니다. 지나가세요.” 그랬지. 그게 뭐냐 하면은 가짜 철조망이거든. 제가 만든 거예요. 그게 79년도 <오! 인천>이라는 영화 때문에, 거기서 그걸 배운 거야. 이렇게 해서 만드는구나. … <프로페셔날>인가? 전쟁터 나오는 장면에서 라스트가 막 가다가 철조망에 걸려 죽는 게 있어요. ‘야, 저거 되게 아팠겄다. 이렇게 어떻게 했을까’ 했는데, 바로 그런 거야. 그래 인제 79년도 <오! 인천> 영화를 하면서 배운 게 많았고. (김호길, 2016, 133~134쪽) 상륙작전 하는데, 카메라 아홉 대가 필요한 거예요. 거기서 그런데, 헌팅을 가서 어떻게 했냐면, 봐요. 거기서 뭘 배웠냐? 카메라 아홉 대를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거를 하루종일 하는 거야. A카메라 이렇게 부감대로 놓고, B카메라 하나, 둘 막 바꿔놓는데, 한국사람 같으면 그걸 연출을 못해. … 한국에서 만약에 이걸 동시녹음을 하게 되면 한 달은 더 찍어야 돼. 그런데 하루에 딱 끝나는 거야, 그날에. 예행하고 정식촬영할 땐 하루에 다 끝나더라고. 또 중요한 게 뭐냐, 폭탄이 터지는데 걔들은 각도를 다 살려놔요, 터지는 각도. 한국 특수효과들은 그걸 다 배우는 거예요, 거기서. 그러면 거기서 폭탄이 터지는 순간에 여기 카메라가 안 보일 거 아니냐고, 응? *주11 고런 머리를 다 써놨어요. 그러니 아홉 대라는 게 말이 쉽지 이걸 연출자가 계산을 할 정도면. (구중모, 2015, 212~213쪽) < 용가리 > 할 때 몸에 폭탄을 터트려야 하는데, 실제 화약이 안 좋아서 막 불이 붙기도 하고 그랬어요. *주12 <오! 인천> 할 때 보니까 미국사람이 완벽하게 하는 거, 미국사람들이 와서 터득을 했어요. 터득하면서 저는 저 나름대로 그거를 다시 응용을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많이 습득을 했죠. … <오! 인천>이란 영화, 외국사람 특수작업 같이 했기 때문에 많이 배웠고, 저희도 많이 응용했고. 저 나름대로도 그 사람들 기술 플러스 우리 기술을 어느 정도 포함시켜서 더 좋게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보기도 하거든요. ( 이문걸 , 2006, 40쪽) 그러나 이들의 구술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들이 약 20여 년(구술 시기에 따라 길게는 40년)이 흐른 뒤에도 <오! 인천> 촬영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에야 많은 한국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그 안에서 함께 작업을 하거나 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1979년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오늘날 블록버스터 급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영화에 참여하며, 할리우드의 기술과 시스템을 직접 경험했다는 것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그들만의 경력이다. 그리고 이때 참여한 스태프들이 모두 <오! 인천> 이후 더 많은 한국영화 촬영현장에 불려 다니며 1980~1990년대 내내 활동했다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저희가 <오! 인천>에서 영화발전에, 특수효과에 많이 발전시켰다고 자부합니다.(12쪽) … 한국영화계가 <오! 인천>이라는 거를 하기 위해서 차량이라든가 기동력이라든지 이런 거를 많이 배웠어요. 어떻게 보면 영화는 상영되지 못해도, 영화 개념적으로 많이, 영화 바뀐 것이, 제작자 바뀐 것이 <오! 인천>이지 않았나.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문걸, 2006, 21쪽) ※ 인용 구술 (인용된 페이지는 각 구술 뒤에 표기) 심혜경, 『2006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이문걸 편[특수효과⋅소품⋅미술]』, 한국영상자료원, 2006. 배수경, 『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김정란⋅이남기⋅구중모 』, 한국영상자료원, 2015. 이정아, 『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 한국영상자료원, 2016. 남기웅,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박광남』, 한국영상자료원, 2023. *** 주1. 윤미라는 후에 출연을 거부했다. 그리고 윤미라가 연기하기로 했던 배역은 리디아 레이(Lydia Lei)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에 참여했던 배우 남궁원의 구술에 따르면 당시 한국 측 출연 배우들은 직접 테렌스 영을 만나 오디션 비슷한 것을 봤는데, 이때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들을 제시했다고 한다. 주2. “<Inchon> Trivia”, IMDb, < https://www.imdb.com/title/tt0084132/trivia/?ref_=tt_trv_trv >. 주3. 신문 기사에서 상술한 장면은 경북 왜관에서 촬영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 해당 장면은 1950년 6월 28일에 있었던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다룬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술자들 역시 기억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 장면을 ‘한강 다리 폭파’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촬영기사로 참여했던 구중모의 구술에서는 테렌스 영이 원래 이 장면 촬영을 위해 실제 제3한강교를 폭파시키고 싶어했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 있는 다리를 폭파시킨 뒤 촬영했다고 말했다. (배수경,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 2권 김정란 이남기 구중모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5, 215~216쪽.) 주4. 구술자 구중모 는 <빨간 마스크의 여인>(김인수, 1971)을 통해 데뷔하여 <티켓>(임권택, 1986), <결혼이야기>(김의석, 1992) 등의 영화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하였으며, 1986년에는 <씨받이>(임권택)로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15년 <합작영화> 주제사를 통해 <오! 인천>에서 한국 측 촬영팀으로 참여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주5. 구술자 김호길 은 1960년대 연출부로 영화계 입문하여, 1968년 임권택 감독의 <몽녀>를 시작으로 한국영화에서 소품 담당 스태프로 일했다. <오! 인천>에서도 소품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6. 구술자 박광남 은 1950년대 후반 영화계에 입문, 1960년대 본격적으로 특수효과 스태프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80년대부터는 CF, TV드라마, 연극,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특수효과 전문가로 활약했다.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7. 이정하,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6, 73쪽. 주8. 사건의 내용이 다소 복잡한데, 당시 재판을 받던 피의자가 경찰에 의한 강압적인 수사와 고문이 있었으며, 자신의 자백은 모두 이 고문으로 인한 것이었다며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피의자의 결백에 대한 근거로 피해자의 사망시각이 중요한 쟁점이 되었는데,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찰이 주장하는 사망시각에 피해자가 <오! 인천>의 한국 제작총괄이었던 박경도와 원웨이프로덕션의 대표 이시이 미츠하리를 만났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피의자 측에서는 윤 노파가 <오! 인천> 제작에 20억의 거액을 투자했고, 이를 통해 한국 측 상영권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원웨이프로덕션 측에서 증인으로 나왔던 박경도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부정하며, 그들이 윤 노파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단지 ‘영화가 검열을 무사히 통과하고, 흥행이 될 수 있도록 불공을 부탁드리고자’ 했으나, 약속한 날 윤 노파는 나오지 않아 만나지 못한 채 이시이 씨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주9.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인도교 폭파 장면이다. 미군 장교의 부인이 자신의 차량 안에 한국인 어린이와 소녀들을 가득 태우고 다리를 빠져나가는 도중, 미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다리를 폭파시킨다. 끊어진 다리 끝에 걸린 차량 안에서 모두 무사히 구출되기는 하지만, 이것도 주위 피난민과 미군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주10. 영화 <뽕>(이두용, 1985)을 촬영할 당시 뽕밭에 친 철조망을 보고 마침 촬영장 쪽을 지나가던 우체부가 자전거를 멈추고 섰다는 의미이다. 주11. 어떤 각도에서 폭탄이 터져도 9대의 카메라 중 어느 카메라에도 다른 카메라가 잡히지 않도록 구도를 잘 맞춰놓았다는 의미이다. 주12.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촬영 당시 사람의 몸에 작은 화약을 넣고 터트려 총에 맞는 듯한 효과를 내야 했는데, 그 기술이 부족해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대괴수 용가리> 촬영 때는 일본의 특수효과 기술자들을 초대해 함께 작업을 했었는데, 본문과 이어지는 구술에서 일본 특수효과 기술자들도 ‘미니어쳐’ 전문가들이라 당시에는 작은 화약을 활용한 특효 기술을 잘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구술자 이문걸 은 박광남과 함께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1895년에 개관한 극장 1895년에 개관한 애관극장은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이자 13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한국 근대 문화예술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조선 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공연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란 점에서 애관극장의 연혁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895년, 인천의 사업가인 정치국이 애관극장의 전사인 협률사를 설립했다. 협률사는 서울 정동에 지어진 동명의 공연장인 협률사보다 7년, 종로의 영화관인 단성사보다 12년 앞선 시기에 세워진 극장이다. 정치국은 현재의 애관극장 터에 벽돌 건물을 쌓아 올렸고 협률사를 <박첨지> <흥부놀부전>과 같은 인형극부터 창극, 신파연극, 남사당패 등의 공연을 올리는 공연장이자 영화관으로서 활용했다. 이곳을 중심 무대로 활동했던 배우 서일성은 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에서까지 명성이 자자했으며 그를 중심으로 구성된 ‘7면 구락부’는 우리나라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극작가 진우촌과 함세덕 그리고 연출가 정암을 배출했다. 애관극장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통로 1911년, 협률사는 개항장 인천의 이미지에 맞춰 잠시 축항사로 이름을 바꿨다가 1921년경에 애관으로 개명했다. 이때부터 애관은 연극과 영화의 상설관으로 탈바꿈했다. 그로 인해 한동안 애관극장 부근의 경동거리는 ‘시네마 천국’과 다름없었다. 1927년 애관극장은 관객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증축됐으며 이 건물에서 1930년, 인천 최초로 발성영화인 <야구시대>가 상영되었다. 1935년에는 애관극장의 한 해 입장객이 총 15만 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남겼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사격으로 인해 인천의 경동 일대가 폐허가 됐다. 경동에 위치한 애관극장 또한 피해를 입었다. 사람들은 극장이 무너진 자리에 임시 건물을 올려 영화를 계속 상영했고, 1960년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 지금의 애관극장이다. 1972년에는 현 애관극장 대표인 탁경란 씨의 부친 탁상덕 전 대표가 애관극장을 인수했다. 1989년에는 인천 최초로, 그리고 전국에서 네 번째로 70mm 상영관이 개관했다. 이는 현재 애관극장의 1관이다. 1관은 영화 상영관인 동시에 나훈아, 하춘화 등 유명한 가수들이 돌아가며 공연을 펼친 무대였다. 당시 애관극장에 걸린 공연과 영화를 보고 박정자, 한명숙, 최불암, 전무송 등의 가수와 배우들이 꿈을 키웠다. 2000년에는 현 애관극장 대표인 탁경란 씨가 극장을 인수했다. 탁경란 대표는 멀티플렉스 극장에 대항할 목적으로 2004년 5개관으로 증축했다. 접근성이 좋은 극장 동인천역에서 신포역 방향으로 15분 정도 걸어 내려간 뒤 개항로로 좌회전해 올라가면 좌측에 파란색과 노란색의 구조물이 번갈아 놓인 애관극장이 나타난다. 애관극장의 본관 입구로 들어서면 1관과 휴게실, 작은 매점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애관극장은 본관과 신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관에는 1관, 신관에는 2~5관이 위치한다. 특히 1관은 공연장처럼 1, 2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스크린 아래에 큰 무대까지 마련되어 있는데 한때 공연장으로도 활용됐던 애관극장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본관과 신관은 긴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다. 해당 복도에는 애관극장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연표, 신문 기사, 포스터, 사진 등의 자료가 걸려있다. 한때 오락기가 놓여있던 신관의 휴게 공간도 현재는 오락기를 빼고 그 자리에 극장 관련 자료를 걸어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1,2층으로 구성된 애관 1관 내부 1895년 인천 중구 개항로에 신설된 애관극장은 계속 같은 곳에 터를 잡고 있다. 극장 근처엔 인일여자고등학교, 제물포고등학교, 송도중학교,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등 총 6개의 학교가 있으며 극장의 오른편에 인천중구청, 차이나타운, 동인천역부터 답동사거리까지 길게 뻗은 동인천 지하상가가 위치한다. 애관극장은 접근성이 좋은 극장이다. 동인천역과 인천역, 신포역에 둘러싸인 모양새인데 1호선 동인천역과 분당선 신포역에선 극장까지 도보로 10분, 1호선 동인천역에선 버스로 10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또한 840m 떨어진 곳에 인천항이 있어 애관극장 옥상에 오르면 바다를 볼 수 있다. 항구 근처에 자리한 경동은 오래전부터 인천의 문화적 중심지였다. 교통의 요지이자 답동성당, 능인사 등의 종교 시설도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동 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인형극장, 동인천극장, 동방극장, 키네마 등 한때 동인천 일대에 19개의 독립예술극장이 자리했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전부 문을 닫고 애관극장과 미림극장만이 남아있는 상태다. 미림극장은 애관극장에서 약 7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한국영화사의 과거와 현재가 오롯이 기록된 공간으로서, 애관극장은 128년째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존을 위한 움직임 2017년, 애관극장에 관한 다큐멘터리 <보는 것을 사랑한다>(2021)를 촬영할 당시 윤기형 감독이 탁경란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극장의 매각 소식을 전해 들었고, 유동현 굿모닝인천 전 편집장이 관련 칼럼을 게재하면서 애관극장의 경영난 소식이 처음 알려졌다. 인천 시민들과 인천시의 움직임으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하면서 2021년 애관극장의 매각 가능성이 다시금 거론됐다. 극장을 지키기 위한 일환으로 지난 2022년 4월 18일, 탁경란 애관극장 대표, 박남춘 전 인천광역시장, 이원석 인천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 이희환 대표가 모여 ‘애관극장 보존 및 활용을 위한 상호 협약’을 맺었다. 하나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 인천광역시장이 바뀌었고 애관극장의 향후 향방에 관해선 현재 명확히 정해진 바가 없다. "We ♥ 애관"이 적힌 현수막. 현수막에는 애관의 공공매입과 공공적 활용을 후원하는 개인 및 단체의 이름이 적혀있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인천 중구 개항로 63-2 2. 설립일: 1895년 3. 대표자: 탁경란 4. 규모: 264.4m² (스크린 크기 1관 16.4*7m, 2관 7.5*3.2m, 3관 8.5*3.5m, 4관 6.7*3.8m, 5관 6.3*3.3m) 5. 극장 구성: 총 5개관 (좌석수 1관 403석, 2관 114석, 3관 112석, 4관 98석, 5관 81석) 6. 운영시간: 평일 10:00~23:00 금토 9:00~23:00 (금, 토 심야 상영 있을 경우 9:00~2:00) 7. 입장료: 조조, 경로 5,000원, 학생 7,000원, 일반 8,000원 8. 공간 구성: 상영관 5관, 매점 1개, 휴게실 3개 (1관 휴게실 50석, 2~3관 휴게실 26석) 인터뷰: 윤기형 감독(<보는 것을 사랑한다> 연출) 윤기형 감독 조현나 _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윤기형 _안녕하세요. 저는 윤기형 감독입니다. 인천에서 태어났고요. 얼마 전에 <보는 것을 사랑한다>(2021)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조현나 _<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윤기형 _애관극장이 1895년에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고요. 최초의 극장인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잘 모를까.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고 5년 정도 극장에 관해 공부하고 관련 자료들을 준비하며 만들었습니다. 조현나 _애관극장에 관한 자료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으신가요? 윤기형 _개항장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지금의 극장 바로 위였어요. 다른 길이 없었고 서울로 가려면 무조건 이 도로로 가야 했기 때문에 그 길목에 극장이 설립됐어요. 당시 개항장 쪽은 일본인 마을, 지금 차이나타운이 위치한 곳엔 중국인 마을, 여기는 조선인 마을이 있어서 이곳에 조선인이 극장을 세운 거였죠. 1928년 <별건곤>이라는 대중잡지에 이 외리에 관한 묘사가 재미있게 돼 있는데요. “쨍쨍거리는 불당소리, 땡땡거리는 성당 소리와 기생의 장구 소리, 그리고 극장에서 관객들을 모으는 악대의 소리가 어우러진 곳이 이쪽 외리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옆에 능인사라고 절이 있거든요. 또 옆에 답동성당이 있고요. 그리고 인천 중구 용동 일대엔 기생집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또 극장이 있었고. 극장에서는 관객들을 모으려고 밥을 팔고 했거든요. 불당과 성당과 기생집과 극장이 한 거리에 어우러져 당시의 모습이 굉장히 재밌게 묘사가 됐던 거죠. 조현나 _애관극장은 인천 신포역과 동인천역 사이에 있고 근처에 학교나 상가도 많습니다. 인천의 번화가에 자리한다는 점으로 인해 생긴 특성도 있을까요? 윤기형 _동인천역, 신포동, 경동 이쪽이 인천의 명동이었죠. 현재는 옮겼지만 전엔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10여 개가 근처에 다 몰려 있었어요. 그러니까 늘 사람이 바글바글했죠. 인천에 70mm 상영관을 설립한 극장도 애관극장이 최초입니다. 서울에서 좌석제를 실시할 때 인천은 아직 좌석제를 실시하지 않았었거든요. 관객들이 하도 많아서 자리를 잡으려고 영화 끝나기 5분 전에 극장에 들어가고 그랬어요. 간신히 자리를 잡고 보면 이제 영화 결말을 두 번 보는 관객도 있었죠.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어요. 서서 보는 관객들이 앉아서 보는 관객의 두 배는 됐으니까요. 애관극장 4, 5관 영사실과 조상열 영사기사 조현나 _애관극장의 실내 시설에 관해서도 취재를 진행하셨습니다. 어떤 점이 인상적이던가요? 윤기형 _지금의 극장은 1950년대에 실추된 뒤, 1960년에 새로 지어진 거거든요. 옛 극장의 흔적이 사라진 게 좀 아쉬워요. 여기 영사실에 옛날 35~70mm 겸용 영사기가 있어요. 영사 기사님께서 아직 잘 돌아간다고 한번 보여주셨거든요. 디지털 영사기 옆에 옛날 아날로그 영사기가 있으니까 그런 점도 되게 신기했죠. 애관극장 1관 영사실에 보존되어 있는 필름 영사기 조현나 _다큐멘터리를 위해 100여 명 정도를 인터뷰하셨죠. 애관극장에 관한 추억이 있거나 애관극장에서 영감을 받아 꿈을 키운 영화인들이 영화에 등장하는데요. 어떤 분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셨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윤기형 _박정자 선생님은 어릴 때 극장 근처에 사셨고, 당시 극장에서 공연을 보며 감동 받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한명숙 선생님은 인천의 태양 악극단에서 활동하며 첫 데뷔 무대를 애관극장에서 올리셨죠. 전무송 선생님은 애관극장에서 간판 그리는 일을 하셨다고 하셔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조현나 _관객의 경우 주로 어떤 분들이 애관극장을 찾으시던가요. 윤기형 _젊은 사람들은 드물고 저같이 추억이 있거나 저보다 나이 드신 분들이 주로 오시죠. 제 아이가 여기에 왔을 때 극장에 대한 느낌을 들어보니 '매우 낡았다, 오고 싶지 않다, 여기서 영화를 보고 싶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조현나 _인천 시민들에게 애관극장은 어떤 공간인가요? 윤기형 _제 나이 또래의 인천 시민들에게 애관극장은 당연히 한 번쯤은 와봤던 극장입니다. 안 와볼 수가 없는 극장입니다. 저 역시도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연애 시절, 결혼 후에도 와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봤으니까요. 그러니까 인천 시민이라면 마음 속에 애관극장에 관한 추억이나 사연 하나씩은 무조건 있다고 보면 돼요. 조현나 _애관극장 말고 미림극장도 같이 취재를 하셨잖아요. 두 극장의 특성은 어떻게 다른가요? 윤기형 _애관극장은 최초의 극장이고 미림 극장은 1957년도 전쟁 이후에 생긴 극장입니다. 전쟁 후에 극장들이 동네마다 들어섰는데 그때 송현동에 들어선 게 평화극장이고, 1958년에 평화극장의 이름이 바뀌어서 미림극장이 됐습니다. 미림극장도 잠시 폐관했다가 '추억극장 미림'으로 재개관했으니까 그런 걸 따지고 보면 대단한 극장이죠. 애관극장 1관 로비 전경 조현나 _탁경란 대표 취재를 하면서 애관극장의 매각 소식을 접했고, 유동현 굿모닝인천 전 편집장이 관련 칼럼을 쓰면서 해당 내용이 대대적으로 알려졌죠. 이후로 극장을 돕기 위한 활동이 다양하게 이루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윤기형 _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극장 관객이 점점 줄어드니 경영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죠.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가 결성이 돼서 많은 분들이 애관극장을 살리고자 했고 인천시에서도 협상에 나섰습니다. 현재로선 인천시가 극장을 매입해 기증하는 방법이 가장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현나 _그밖에 애관극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윤기형 _가장 좋은 건 관객들이 많이 찾아주는 거죠. 근데 젊은 사람들은 극장에서 영화를 잘 안 보려고 하고, 나이 드신 분들이 추억 삼아 오시니까 그런 것들이 안타까운 거죠. 조현나 _애관극장은 어떤 의미를 지닌 그장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윤기형 _유일무이입니다. 다른 극장이랑 비교할 수가 없어요. 고일 선생님의 <인천석금>이라는 책 그리고 최성연 선생님의 <개항과 양관역정>이라는 책에서 '1894년~1895년 청일전쟁 때 정치국이 벽돌로 극장 협률사를 지었다'는 문구를 확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애관극장의 기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축항사, 애관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극장입니다. 조현나 _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윤기형 _아직 애관극장이 오랜 역사가 있는 최초의 극장인 걸 모르시는 분들도 많아요. 애관극장에 많이들 오셔서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애관극장이 이런 역사를 갖고 있는 극장이구나 같이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 이희환 교수(인천대학교,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 대표) 이희환 교수 조현나 _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희환 _저는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의 학술연구교수로 연구 활동하고 있는 이희환이라고 합니다. 조현나 _애관극장에 관해 오랜 시간 연구를 이어오셨는데요. 이를 토대로 애관극장의 변천사 그리고 역사에 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희환 _사실은 개항장이 제일 먼저 생긴 곳이 바로 인천이거든요. 또 조선인이 극장을 만든 것도 인천이 최초이고 그것이 바로 애관극장의 전신이었던 협률사라는 극장입니다. 협률사라는 극장은 청일전쟁 전후에 만들어졌다는 회고록이 남아있습니다. 1900년대 넘어가면서 여러 가지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다가 처음에 극장을 만들었던 정치국이라는 사람이 매각을 하면서 축항사로 이름이 바뀝니다. 거기서 이제 일본에서 유입돼 들어오는 신파 연극이 공연됐던 장소가 되는 거죠. 축항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신파 공연장으로 많이 활성화됐던 이 극장은 1910년대로 넘어가면서 일본의 무단 통치 속에서 많이 위축됩니다. 1920년대 새로운 인수자에 의해 지금의 애관이라는 이름이 극장명으로 사용되고, 애관극장이 조선 식민주의 시대에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문화시설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때 영화의 전신인 활동사진도 상영하고 때로는 학생들의 학예회, 정치적인 집회도 열리고 공간을 변형해 권투 시합도 하고 무용 발표회도 하고,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식민지 시대 내내 담당했던 극장인 셈이죠. 그래서 애관극장이야말로 살아있는 인천 근대 문화의 자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시대에 인천의 문화, 조선인의 문화를 일구는데 중요한 근거지가 됐던 곳이 바로 애관극장입니다. 1945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50년까지도 굉장히 많은 공연들이 여기서 펼쳐졌습니다. 전쟁 때 일부 피해를 받기도 했습니다마는, 1960년대 이후에는 극장도 새로 신축해서 더 확장되고 영화의 전성기를 거치면서 풍성한 시기를 거쳐 온 것 같습니다. 로비에 전시된 애관극장 연표 사진 조현나 _최초 애관극장이 경동의 현재 자리에 건물을 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희환 _애관극장 앞의 길이 인천 개항장에서 서울로 가는 육로였어요. 그리고 일본 조계와 조선인 조계의 경계가 바로 극장 앞의 도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일본이 전관 조계지역에 극장을 만들었고 정치국이라는 사업가가 ‘극장이 흥행이 되겠구나’라는 사업적 발상에서 시작해 조선인 조계에다 극장을 만든 겁니다. 이 거리를 사리재라고 하는데, 사리재는 일제시대에도 조선인 상권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 상권과 연결되어 있는 조선의 상권 지역에 극장이 만들어진 것이 의미가 있고, 1899년에 경인선이 만들어지고 전철역과 그렇게 멀지 않은 지역에 극장이 위치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극장 바로 앞에 프랑스 성당도 있고 또 길 건너에는 미국의 감리 교회가 있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에 극장이 만들어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조현나 _애관극장이 한국 영화사, 한국 극장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희환 _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극장으로서 전통 연희 공연을 시작으로 근대 공연장, 근대 영화관으로 바뀌어 간 극장, 식민지 시대 우리 극장의 역사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극장이 애관극장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인들이 1883년 인천을 개항시킨 다음에 인천을 교두보로 삼아서 경성으로 진출하려는 목적 하에 자기들의 극장 문화를 가져왔는데, 이것에 맞서서 조선인이 조선인 극장을 만들었다는 게 아주 실험적이면서도 획기적인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합니다. 근대 문화를 만들어 나가려고 했던 그 움직임이 애관극장의 전신인 협률사로부터 시작해 126년이 넘는 역사가 끊기지 않고, 지금까지도 이 단관극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굉장히 소중하고 귀중한 역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애관극장 2관 내부 조현나 _과거의 애관극장은 여러 공연을 올리고 다양한 영화를 상영할 만큼 번영했지만, 현재는 운영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교수님께선 현재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의 대표를 맡고 계시기도 한데, 애관극장을 위해 모임 차원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희환 _애관극장이 멀티플렉스 극장에 밀려서 복합상영관 형태를 만든 것까지는 지켜봤지만, 자주 오진 못했죠. 그런데 4년 전쯤 갑자기 매각 소식이 들려왔어요. 그렇게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저희가 나서기도 하고 또 인천시도 나서서 사정을 알아보면서 상황이 가라앉았었는데, 2021년 3월에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을 받아서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소식이 전해졌죠. 다시 2차 애사모 모임을 갖고 기자회견도 하면서 나서게 됐고요. 이번엔 극장주 개인에게 손해 보면서까지 이 극장의 역사를 유지하라고 해서는 안 되겠다, 인천시가 나서는 방법밖에 없겠다고 주장하면서 인천시와 민관협의체도 구성하고 협의를 계속 벌여왔죠. 그래서 이번 4월 즈음에 박남춘 전 인천광역시장님과 탁경란 애관극장 대표, 이원석 인천영상위원회 위원장과 모여서 애관극장이 역사를 이어나가도록 서로서로 역할을 분담해서 노력하자는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조현나 _마지막 인사 부탁드립니다. 이희환 _바뀐 시장님께서 꼭 애관극장을 인처의 소중한 문화공간으로, 공공 공간으로, 역사의 자부심을 지닌 공간으로 발전시켜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민들도 애관을 더 많이 찾아주시고, 영화 관람과 더불어 근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명소로 애관극장이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필자: 조현나(씨네21) 사진촬영: 최성열(씨네21) 인터뷰 일자: 2022년 6월 24일
이만희 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몇 안 되는 천재로 회자된다. 15년간 만든 51편이란 숫자도 놀랍지만, 작품 간 기복이 심하지 않고 꾸준히 일정 수준을 유지했다. 유독 비범한 영화도 있고, 1970년대 영화처럼 범작처럼 보이는 영화도 있지만 이만희의 치밀한 미장센과 유려한 리듬, 자기파괴적인 운명과의 싸움 같은 인장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1955년 제대한 후 조감독 생활을 했다. 이후 < 주마등 >(1961)으로 데뷔했고 (고작) 다섯 번째 영화인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을 통해 미학적 성취와 흥행 성적 모두를 성공시켰다. 그는 이 영화로 한국전쟁영화의 원형을 만들어냈으며, 그해 관객동원 1위의 기록을 갖게 되었고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다. 이만희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리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뛰어난 대중영화, 사실적으로 전쟁에 접근한 전쟁영화의 장인, 사실성을 위해 실탄을 쏠 정도로 영화에 미쳐 있는 완벽주의자, 반공 이데올로기에 타협하지 않는 강한 품성의 소유자, 높은 개런티를 받는 A급 감독으로의 도약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이듬해 느와르의 관습을 과감하게 몰아붙인 < 검은 머리 >와 호러의 법칙을 보다 치밀하게 고안한 < 마의 계단 >을 만들었는데, 두 영화 모두 고유한 무드를 따라 넘실거리는 정념과 가혹하고 파괴적인 운명과 대결하는 캐릭터를 보여줬다. 이만희가 연달아 발표한 걸작 < 물레방아 >(1966), < 귀로 >(1967), < 휴일 >(1968)도 전작들의 분위기를 이어받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과감하게 넘어선다. 귀기 서린 여인의 얼굴과 새하얀 버선, 그 아름다움에 홀린 남성의 집착과 파멸이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흐리고, 서울의 낮과 밤을 부유하며 자신이 정한 계율과 투쟁하다 죽음을 선택한 여인의 불안과 공허는 무심히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와 공명한다. 또 담배 한 개비조차 편히 피울 수 없는 젊은 룸펜과 그의 연인의 육체를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모래바람의 운동처럼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은 우연히 튀어나올 리 없는 창조적 역량과 그의 무드가 온전히 결합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유작 < 삼포 가는 길 >(1975)까지 이어지는 이만희의 영화들은 반공영화와 문예영화처럼 국가와 영화산업의 필요에 따른 규칙을 뛰어넘어 살아 생동하며, 원작과 다른 정취를 표현함으로써 고답적인 한계에 갇히지 않았다. 또 전쟁영화, 멜로드라마, 스릴러, 첩보물, 만주 웨스턴 같은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고 장르의 규범을 탈바꿈시켰으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넘나들며 인간과 삶, 가변적인 감정과 불변하는 운명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갇힌 인물의 도덕성을 가혹할 정도로 밀어붙였다. 이만희는 프레임에 인물의 감각과 감정을 새겨 넣고 그 시대의 무드를 기입했으며 빛과 어둠을 새롭게 조직하고 그만의 속도와 리듬을 창조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인간됨에 대한 믿음과 캐릭터의 생생함, 스펙터클과 정감을 조율하는 뛰어난 영화적 감각, 운동하는 존재와 갇힌 존재가 숏 안에 배치되고 격돌하는 미장센과 리드미컬한 편집을 갖추고 있다. 이 영화는 인천상륙작전에서 시작해 서울 수복을 거쳐 인해전술을 펼치는 중공군과 대치한 전선에서 끝을 맺는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가장 강력한 사건을 향해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만희는 마지막 참호전을 위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찍은 것처럼 느껴질 만큼 중공군과의 전투에 모든 힘을 쏟는다. 이를테면 첫 번째 전쟁 시퀀스인 상륙작전은 오프닝에 등장해서 이 영화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드러낸다. 두 번째 전투 시퀀스인 텅 빈 건물에서 벌어진 매복과 총격전은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시민들의 주검으로 이어지는데, 시선의 방향에 따른 빈틈없는 편집과 시각적 스펙터클 뿐 아니라 심리적 긴장까지 녹여낸 유장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압권은 마지막 전투 장면이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전선에 합류한 분대원들은 “적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진지를 방어하는”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한다. 영화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한 이 장면은 4번의 전투 시퀀스로 구성되어 휴지기/전투의 반복과 확장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증명하는 주검으로 뒤덮인 참호로 향한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에 개성이 강한 분대원들과 호랑이 분대장(장동휘)이 전쟁이란 무엇인지 자문하고,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체념을 수시로 체험하며,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전우애를 뼈저리게 느끼고, 후방에 맡겨둔 아이 영희(전영선)의 편지를 받고 눈물 흘리는 집단 초상화에 가까운 얼굴들이다. 분대원 각각의 클로즈업은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드러나는 반면, 군인이라는 유대감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사람 살아가는 곳 어디에나 있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총원 42명”이던 분대원들이 하나씩 프레임에서 사라져 2명만 남게 되는 순간, 우리는 분대장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얼굴에 압도된다. 마찬가지로, 죽어가면서도 “내가 없으면 누가 웃겨주니?”라고 너스레를 떨던 봉구(구봉서)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분대원들은 진흙과 피와 눈물로 얼룩진 개인의 얼굴로 포착된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든 분대원들에게 “14시 이후의 생존자는 집으로 돌아가라.”며 죽지 말고 살아남길 당부한 분대장의 말은 마지막 전투 시퀀스에서 살아남은 대원에게 “너희 둘만은 꼭 살아 돌아가서 전쟁의 증인이 되어라.”는 명령과 연결된다. 살아남으라는 말이 채 가시기 전에 구일병(이대엽)마저 죽어 엎드러질 때 눈물 흘리는 최해병(최무룡)과 흐느끼는 분대장의 얼굴은 전쟁의 실체를 겪은 자의 무참함을 드러낸다. 셀 수 없는 주검과 진흙과 피로 범벅이 된 분대원의 얼굴, 전쟁 후 복구되지 못한 당시의 황폐한 산천도 참담하고 고통스런 얼굴에 다름 아니다. 이만희의 실제 경험과 영화적 역량이 여실히 드러난 전투 장면과 전쟁의 무의미함에 대한 고백과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선언하는 것도 놀랍지만,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백미는 전투를 치르지 않는 후방의 막사나 럭키 클럽에서 드러나는 분대원 개개인의 놀랍도록 선명한 기질처럼 세부적인 것들이다. 영희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별명을 듣고 껄껄 웃거나 불만을 표하는 모습, 시가전에서 잡은 인민군 포로에게 그 흔한 매질 한 번 없는 모습, 눈이 녹은 땅을 보며 “전장에도 양지는 있구나.”라며 감탄하던 봉구의 구성진 말소리, 최해병이 건넨 총을 받아들고 그의 손에 이끌려가는 분대장의 휘청거리는 발걸음, 어린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심겨진, 민둥산에 가까운 산등성이의 나직하고 고운 모습 등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해병대원이 몇 천 명 참여했고, 탱크와 총기를 지원받아 실탄을 쐈다는 기록보다 귀중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실제를 방불케 하는 스펙터클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당대 영화인들의 노력과 이만희의 천재적인 연출력과 서정민의 역동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카메라 움직임처럼 다양한 힘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감동적이다. >> 돌아오지 않는 해병 고화질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