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크레더블
- 감독
- 브래드 버드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크레이그 T. 넬슨, 홀리 헌터, 사무엘 L. 잭슨, 제이슨 리, 진 싱크레어, 도미니끄 로이스, 메이브 앤드류스, 월리스 쇼운, 스펜서 폭스, 웨인 캐니, 조 다마타
“아름다움도 두려움도 모두 경험하라. 그저 걸어가라. 생이 계속되는 한,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끝’은 없으니.”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추운 겨울, 독일 베를린의 한 광장. 파스텔빛 집들이 하얀 입김을 포근하게 둘러싼다. 어린 소년은 여느 날처럼 넉넉지 않게 먹을거리를 사오다가 ‘파란빛’으로 반짝이는 나비를 본다. 그 날갯짓이 유난히 예쁘게 마음에 들어온 탓에, 소년은 미소를 짓고 쪼그려 앉아 나비를 바라본다. 저 멀리 날갯짓이 사라지고 나서야 일어선 소년의 옆, 낯익은 구두가 허공에 떠있다. 그렇게 소년은 광장 한가운데서 엄마의 죽음을 마주한다. 반나치 활동으로 교수형을 당한 엄마의 죽음을.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차디찬 엄마의 발을 부둥켜안고 우는 일밖에 없다. 한없이 따뜻해 보였던 집들은 서늘한 눈이 되어 소년을 응시한다. 광장엔 매일같이 사람들이 매달리고, 아이들이 장난감 대신 총을 드는 비정한 거리. 제2차 세계대전 시대였다. <조조 래빗>은 신발 끈을 혼자 고쳐매지 못했던 소년이 신발 끈을 매어주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영화다. 엄마 ‘로지’(스칼렛 요한슨)와 단둘이 사는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열살 아이가 겪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는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조조는 어린 마음에 소속감이 갖고 싶어 나치 소년단인 유겐트에 입단하지만 작은 토끼조차 쉽게 죽이지 못해 겁쟁이 토끼라 놀림당한다. 상상 속 친구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 외에는 줄곧 혼자였던 조조에게 몰래 숨어 있던 소녀 ‘엘사’(토마신 맥켄지)가 우연히 나타난다. 그리고 소년은 소녀를 만나며 조금씩 변해간다. 엄마 손에 이끌려, 엄마가 매준 신발로 문밖을 나섰던 조조는 엘사의 신발 끈을 고쳐매 주고, 직접 문을 열어 세상을 마주한다. 안아주고 싶은 각색, 연출, 음악 <조커>, <아이리시맨>처럼 어마어마한 ‘어른들’을 제치고 <조조 래빗>은 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했다. 72회 미국 작가 조합상, 73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이어 각색상 부문에서만 세 번째 수상이었다. <인생은 아름다워>부터 <피아니스트>까지 전쟁의 비극을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끔찍한 제2차 세계대전의 이야기를 새롭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조조 래빗>을 선보였다. 원작인 크리스틴 루넨스의 소설 ‘갇힌 하늘(Caging Skies)’이 제국주의와 마초적 본성, 소유의 집착을 들이댄다면, 영화는 어린 소년의 얼굴에 난 상처로 전쟁의 비극을 그린다. 부디 마음만큼은 덧나지 않길 바라며 연고를 발라 주고 싶게끔. 동화적인 상상력과 따뜻한 색감이 돋보이는 연출도 원작의 어두움을 걷어낸다. 조조가 엄마와 함께 자전거로 꽃밭을 달리는 장면,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뱃속에 나비가 가득한’ 모습으로 비유한 장면, 그리고 쓰이지 않은 편지를 진심으로 읽는 장면에서 특히나. 이렇게 어린 조조의 순수함은 마이클 지아치노 음악감독의 넘버로 울려 퍼진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인크레더블>, <코코>, <인사이드 아웃>으로 전 세계 어린이, 어른이 마음을 빼앗았던 지아치노 음악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20명 규모의 작은 오케스트라와 협업했다. “오케스트라 규모가 작을수록 감정선을 잘 살려주는 사운드가 나온다”는 그의 말처럼 영화 속 넘버는 정서적인 울림을 더한다. 혐오를 물리치는 풍자 <조조 래빗> 음반 커버에 ‘혐오를 물리치는 풍자(An Anti-hate Satire)’가 적힌 건 우연이 아니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블랙 코미디’가 관통하기 때문. “‘하일 히틀러’는 생각 없이 뱉어야 제맛”이라는 꾸지람(?)에서 시작된 풍자는 비밀경찰인 게슈타포가 ‘하일 히틀러’를 티키타카 주고받는 영화 후반부에서 극대화된다. 이렇듯 <조조 래빗>은 80년 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진 비극을 재치있게 담아낸다. 전쟁과 폭력, 차별과 혐오, 가짜뉴스와 프로파간다는 우리 가까이 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영화 속에서 두드러지는 여성과 성소수자의 역할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사랑의 힘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말을 행동으로 증명한 엄마 ‘로지’, 조조의 세뇌된 공포를 거둬준 ‘엘사’의 존재감은 극단으로 치우친 전쟁 상황에서 여성의 용기와 강인함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은 바로 ‘클렌첸도르프’(샘 록웰)다.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훈련 교관 ‘클렌첸도르프’는 미친 세상에 술이 유일한 답인 양 매일 취해있다. 후배 병사인 ‘핀켈’(알피 알렌)과 있을 때면 왠지 모르게 묘한 기류가 감도는 그는 위급한 순간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조조를 보호해준다. 요란한 총성이 광장까지 울려 퍼질 때, 클렌첸도르프는 화려하게 커스텀된 전투복을 입고 등장한다. 어깨에는 빨간 망토를, 허리춤에는 커다란 스피커를, 가슴팍에는 분홍색 역삼각형 뱃지를 달고. 동성애자 홀로코스트가 만연했던 역사를 되돌아보면 클렌첸도르프의 장식은 ‘그냥’ 장식이 아니다. 캐릭터의 성격을 녹여내는 듯 유난히 돋보인다. 코드 연출이나 역할론에서 아쉬움은 남지만, 애초에 싸우려고 입을 전투복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입을 ‘상복’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장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군복’부터 벗어던질 수 있길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보이듯, 신발 끈을 고쳐맬 수 있다고 모두 바람직한 어른이진 않다. 또 다른 교관인 ‘람’(레벨 윌슨)은 죽은 독일 병사의 군복을 벗겨 조조에게 입히고는 총을 들고 싸우게 한다.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옷 중에서도 ‘군복’은 계급을 드러내고 이념을 드러낸다. 군복에 담긴 정체성을 생각하면 ‘꼬마 병정’처럼 무서운 단어도 없다. 이때 영화의 첫 장면에서 조조는 군복을 입고, 마지막 장면에서 군복을 벗는다. “나치가 아닌 나치의 상징에 열광하는, 웃기게 생긴 제복을 입고 무리에 어울리고 싶어하는 꼬마애”라며 팩트 폭격을 날린 엘사의 대사는 조조뿐 아니라 지금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춤이 전쟁을 비롯한 모든 비극으로부터의 탈출이라면 우리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몸에 걸치고 있는 군복은 무엇일지. 엔딩 크레딧이 오르면 신발 끈을 고쳐매고 춤출 준비를 해보자. ‘군복’부터 벗고.
“캐릭터 디자인 시안 17-05번입니다.” “음.. 확실히 제일 처음 게 좋네, 01-02번 디자인으로 가시죠” “네... (침묵) 일단 파일명에는 파이널을 붙이지 않겠습니다” “아! 당연!” 작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TV용 애니메이션 만들기 두 번째. 프리프로덕션 과정이다. 운 좋게 기획단계에서 투자가 시작되거나, 지원사업에 선정되거나, 아니면 대출에 성공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작품의 디자인 수정과 시나리오 개발과정이 시작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당 프로젝트의 예산이 투입되며, 전문인력들의 가시적인 작업 성과가 등장하기 시작된다. 디자인은 작품의 내용과 캐릭터성, 그리고 메인 타깃 분석에 의해 수정되고, 기존의 기획 개발 단계에서의 컨셉아트가 배경 디자인으로 수정되기 시작하며, 작품의 기획 과정에서 갈팡질팡하던 이야기 구조들이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 등으로 확정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보통 이때 참여하는 인력은 아트디렉터, 프로듀서, 캐릭터 디자이너, 배경 디자이너, 시나리오 작가 등이라 생각하면 된다. 물론 이러한 예는 돈이 많은 또는 이전 작품에서 수익이 많았던 애니메이션 회사에만 한정된다. 보통 여기서 언급할 ‘우리 같은’ 우리들은 사정이 다르다. 일단 제작비 전체에 대한 투자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장님으로 대표되는 작은 스튜디오의 감독 또는 프로듀서들은 프리과정에서도 여전히 투자사 미팅과 방송국 미팅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당연히 그 도중에 디자인과 설정에 대한 의견도 등장하기 때문에 매번 디자인 수정과 이야기 구조도 변경된다. 이때부터 다시 지옥문이 열린다. 디자이너들은 수많은 시안들을 내놓는데, 보통 4~5번 정도 수정을 미친 듯이 진행한다. 어떤 경우는 싸그리 새롭게 엎어 버리기도 한다. 사실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는 아트디렉터나 디자이너의 꿈은 오토모 가츠히로나 브레드 버드, 아니면 와타나베 신이치로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성인 취향의 근사한 이미지를 디자인하고 싶어 한다. 우리도 < 아키라 >의 배경 설정과 < 인크레더블 >의 유니크함, < 카우보이 비밥 >의 하드 보일드한 캐릭터 디자인 등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적은 예산과 빡빡한 일정의, 어린이 또는 유아를 메인 타깃으로 잡고 있는 TV 시리즈용 애니메이션 작업”을 해야 하는 운명, 이를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취향과 일은 정말로 공유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프리단계의 또 다른 꽃. 시나리오다. 당연히 시나리오는 작가가 작업을 하는데, 보통 작은 스튜디오에서는 풀타임을 근무하는 작가를 두기가 어려워 단기간 또는 프로젝트 단위로 작가를 고용한다. 물론 사장님이 직접 작업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리 일반적이지 않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어린이/유아용 애니메이션의 작가들은 전업 애니메이션 작가를 포함해, 동화작가, 방송작가, 코미디 프로그램 작가, 쇼프로그램 작가 등이 있다. 물론 급할 때는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 아트디렉터, 프로듀서, 심지어 인턴들이 쓰는 경우도 있다. 보통 현역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경우 나이가 35세에서 45세 정도의 나이 또래로 세상의 고된 풍파를 겪었거나, 겪고 있는 세대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작가/프리랜서라는 미묘한 고용불안 상황까지.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비판적 사고에 익숙한 그리고 그러한 글에 더욱 자신감을 가진 천성의 글쟁이들이다. 지금 이 세대들이 < 은하철도 999 >를 보았고, < 바다소년 트리톤 >을 보았고, < 에반게리온 >을 철학적으로 분석을 들이밀며 봐온 세대들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준 오타쿠들과 함께 “5세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다. 정말 이런 게 프로정신 아닌가! 그러다 보니 시나리오 회의에서 가끔 이야기가 산으로 가기도 한다. 시나리오상으로는 착하고 착해빠진 캐릭터들을 이야기하면서도 속으로는 “마지막 화에서 우리의 5세 주인공 ○○이 지구인의 반 이상을 대량 살상하고, 우주도 괴멸시키는 이야기”를 상상한다. 국내 유아용/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7분 포맷, 15분 포맷, 25분 포맷 등이 주로 포진되어 있으며, 7분의 경우 시즌당 39편, 15분, 25분 분량은 시즌당 26부작 정도로 구성되어있다. 보통 작가들은 적게는 3명에서 많게는 6명 정도가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이들을 잘 관리하면 TV 시리즈 전체를 일정한 톤으로 유지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각 에피소드들의 이야기들이 널뛰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가끔 널뛰기 한 에피소드들이 괴작이자 명작들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일반적으로 시나리오는 프리과정에서 다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회사의 사정에 따라 20~40% 정도의 시나리오를 제작해 두고 본편 제작을 먼저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일정을 관리하는 제작 담당들과 시나리오 작가와 마감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배경 세팅과 콘티제작, 애니메틱이 순서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TV 시리즈 제작에서는 시나리오 원고 마감이 곧 일정의 관리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감독, 프로듀서, 대표 작가 1인과 함께 하는 시나리오 회의의 한순간. 커피 4잔과 하품이 이 회의의 진지함을 알려주고 있다. 결국 이 회의는 작가들에게 충격을 줬던 꿈의 시나리오 작품 <비밀결사 매발톱단>(원제:秘密結社 鷹の爪)에 대한 이야기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프리프로덕션 단계는 말하자면 작품제작의 근간을 이루는 과정으로 많은 노력과 의지, 열정이 필요하다. 탄탄한 과정이 이후 프로덕션 과정을 뒷받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애니메이션 회사는 이 과정을 통해 스튜디오의 제작 시스템을 정비, 개발하기도 한다. 예의 경우에서는 디자인과 시나리오 등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만 언급하였지만, 여전히 사장님과 대표님들은 작품 제작에 필요한 제작비를 만드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으며, 프로듀서들과 매니저 들은 일정을 체크하느라 여념이 없다. 콘티팀은 시나리오가 더 이상 황당하지만 않으면 하는 눈치며, 애니메틱을 만들어야 하는 담당자와 감독은 분량 체크와 연출 노트 작성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한 6개월에서 9개월 정도가 흘러간다. 그 사이에 투자사와 이야기도 잘 되었고, 공동 제작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파일럿 제작도 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프리단계가 끝나간다면 이제 제대로 된 팀을 꾸려서 작품 제작에 들어가야 한다. ③프로덕션 단계인 것이다. 더 많은 일감들과 마감일정, 그리고 체력전이 시작된다. + 위 사진 설명: 프리프로덕션이 시작되면서 디자이너는 수많은 디자인 시안을 개발하며 머릿속을 ‘하얗게 불태우곤’ 한다. 본 이미지는 실제 진행 중인 애니메이션 프로젝트의 디자인 시안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정작 하나도 선택받지 못했다. 레트로한 일본 애니메이션 풍의 디자인을 외쳤던 디자이너는 드디어 유아용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디자인을 하기 시작하는데... 결국 기획실은 처음 컨셉을 모두 뒤집기로 한다. 그사이 캐릭터 디자이너는 한 10년은 늙었다. ⓒCentral Animation Studio
1990년에 나온 < 캡틴 아메리카 >는 마블이 직접 그리고 제일 처음 손 댄 극영화였다. 사실 그보다 앞서 몇 차례 실사화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1979년에 나온 건 TV용 영화였고, 1989년에 모습을 드러낸 돌프 룬드그렌 주연의 < 응징자 >엔 정작 마블 딱지가 붙어있지 않았다. 따라 <사이보그>로 이름을 알린 알버트 파이언이 감독하고, 스탠 리가 처음 제작자 크레딧에 오른 이 작품이 실질적인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극영화 데뷔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조악한 완성도와 낮은 배우 인지도로 인해 극장 개봉은 하지 못한 채 비디오로 직행됐다. < 슈퍼맨 >이나 < 배트맨 >으로 일찌감치 샴페인을 터트린 DC 코믹스와 달리 마블에게는 영화적인 노하우가 부족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를 제작한 21세기 픽쳐스에 문제가 있었다. 영화화 판권을 산 매너햄 골란은 < 아메리칸 닌자 > 시리즈나 < 델타포스 >, <대특명>과 같은 척 노리스의 B급 액션 영화로 돈을 모은 이스라엘 출신의 제작자 겸 감독이었는데, 이 영화에 앞서 < 슈퍼맨 4-최강의 적 >을 제작해 슈퍼맨 시리즈에 종말을 고한 기념비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날아다니는 방패에 악당 레드 스컬까지 나름 원작 설정에 충실히 만들어졌지만, 예산 부족이란 약점을 커버하지 못한 채 눈 뜨고는 봐줄 수 없는 희대의 망작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두 번 다시 캡틴 아메리카를 큰 스크린에서 만나는 건 불가능한 일인 줄 알았다. 캡틴 아메리카(들) 반등은 마블이 영화 제작에 전면에 뛰어들면서 부터였다. 자신의 품을 떠난 < 엑스맨 >과 < 스파이더 맨 >이 놀랄만한 흥행기록을 세우며 전 세계적으로 히트하는 걸 보자 마블은 단순한 판권 장사나 공동 제공이란 한정된 크레딧에 만족할 수 없었다. 마블 영화에 깊게 개입된 프로듀서 케빈 파이기를 마블 스튜디오의 수장으로 앉히고, 2008년 < 아이언 맨 >을 필두로 < 아이언 맨 2 >, < 인크레더블 헐크 >, < 토르 >를 차례대로 선보이며 성공적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캡틴 아메리카의 화려한 은막 복귀작인 <퍼스트 어벤져> 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퍼스트’라는 제목과 달리 가장 마지막에 합류했지만 과거와 현재, 인간과 영웅, 신화를 아우르는 <어벤져스> 의 사전 포석으론 비교적 훌륭한 역할을 해냈다. 1990년 흑역사 이후 무려 21년만의 성공적인 부활이었다. 재미있게도 감독의 중책을 맡은 이는 조 조스톤으로, 그는 비슷한 시기인 1991년 역시나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만화 원작의 히어로 < 인간 로켓티어 >를 만들어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그는 고색창연한 전쟁 영웅을 현대로 데려와 미 패권주의와 내쇼널리즘이란 묵은 때를 벗겨내고, 보다 근본적인 자유와 평화에 몰두하는 진지한 성인군자 코스프레로 제목에 비친 선동적인 시각이나 오해를 피하려 노력했다. 이는 알란 실베스트리가 맡은 고전적이고 영웅적인 스코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DC코믹스와 마블의 영화화 <퍼스트 어벤져>는 바로 전에 개봉한 <토르>처럼 베테랑 작곡가의 힘을 믿었다. 신화적인 묵직함과 고대 비극을 연상케 하는 인물 간의 설정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세익스피어 극에 능통한 (캐네스 브래너 감독과) 패트릭 도일을 등용했듯, 전쟁영화의 외피를 두른 블록버스터 액션물의 진수를 전달하기 위해 밀리터리 사운드와 액션스릴러에 최적화된 작곡가 알란 실베스트리를 선택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B급 영화와 TV시리즈에서 주로 활동을 한 그는 국내에선 ‘기동순찰대’로 알려진 < Chips >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로맨싱 스톤 >에서 템프 트랙 작곡가로 고용되었으나 이 음악이 맘에 든 로버트 저멕키스가 그를 정식 작곡가로 고용하며 메이저 데뷔를 치뤘다. 이후 < 백 투 더 퓨쳐 > 삼부작과 < 포레스트 검프 >, < 콘택트 >와 < 캐스트 어웨이 >, < 폴라 익스프레스 > 등 30년간 저멕키스의 모든 영화음악을 담당하며 스필버그-윌리엄스나 버튼-엘프만 조합처럼 강력한 케미스트리를 발휘했다. 또한 코미디나 액션, 스릴러, 공포와 SF, 애니메이션과 서부극 등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활동했으며,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에 진취적이고 활력 있는 팝스 오케스트라로 보편화된 미국적인 사운드를 잡아내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유행처럼 번진 리모트 컨트롤 류의 사운드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작법을 오롯이 영상에 대입, 투영할 수 있는 음악 장인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알란 실버스트리 <퍼스트 어벤져>의 음악은 매혹적이다. 지난 몇 년간 반복해온 자신의 지루한 틀을 깨고 실베스트리는 과거 8-90년대 중반 최전성기 때의 모습을 떠오르게 할 만큼 최상급의 사운드를 완성해냈다. 최근 남발되어온 여느 슈퍼히어로 음악의 전형적이고 피로한 형태에서 벗어나 고전적이고 애국적인 진군가를 갖추며, 캡틴 아메리카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열망과 진지함을 그럴듯하게 꾸며주었다. 자칫 이 영웅적인 찬가가 유치하게 들리거나 팍스 아메리카나의 발현으로 오인 받을 수도 있지만, 선동적이고 노골적인 수식은 최소화한 채 다양한 액션 큐들과 드라마에 적절히 메인 테마를 혼용하며 밸런스를 맞추었다. 실베스트리는 유난히 밀리터리 사운드에 특화된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앞서 잠깐 언급된 매네햄 골란의 <델타포스>를 필두로 < 프레데터 >, 아카데미 단편상을 수상한 <투 솔져>, 코미디 < 말뚝상사 빌코 >와 , < A-특공대 >등 다양한 작품에서 발현한 군악대 행진곡 스타일을 여기서도 매끄럽게 녹여내며 특유의 활력을 부여했다. 그런 부분들이 2차 대전이라는 배경과 레드 스컬로 대표되는 흑막의 잔재를 암시하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곡조와 상충되며 묘한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현재 ‘슈퍼히어로’와 과거 ‘전쟁’이라는 전혀 다른 시공간과 장르가 뒤섞여 발생되는 하이브리드한 쾌감은 그 어떤 블록버스터 음악에서도 들을 수 없는 독특한 질감과 음영을 남긴다. 전자음을 배제한 대규모 심포닉 사운드의 위력은 사운드트랙 전반에 걸쳐 곳곳에서 드러낸다. 존 윌리엄스나 브루스 브루턴, 제임스 호너를 연상케 하는 장엄하고 영웅적인 메인테마가 바로 그 정점으로, 7-80년대 한참 유행하던 블록버스터 테마를 떠오르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할리우드 황금기에 활약했던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나 알프레드 뉴먼, 미클로스 로자 등의 선율까지도 환기시키게 만든다. 하지만 실베스트리는 영화상 최대한 이 테마를 숨겨놓았다가 엔딩 크레딧에 이러서야 행진곡 형태로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데, 낡은 프로파간다 포스터를 차용한 멋진 타이틀 화면과 함께 어우러지며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안타깝게도 ‘Captain America March’는 디지털 음원에만 포함되어 있고 CD에는 삽입되지 않았다.) 그 외 액션 큐들도 환상적이다. 금관악기를 위주로 스트링과 타악기가 보조적으로 받쳐주며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실베스트리만의 스피드하면서 박력 넘치는 액션 스코어는 <백 투 더 퓨쳐> 시리즈나 <프레데터>에서 활용되었던 이래 변함없이 장점으로 발휘됐던 스타일로 아드레날린을 과도하게 분비하게 만든다. ‘VitaRays’나 ‘Kruger Chase’, ‘Motorcycle Mayhem’과 ‘Hydra Train’ 등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캡틴 아메리카가 전쟁 선전에 이용되며 코러스와 같이 채권을 팔 때 흐르던 노래 ‘Star Spangled Man’도 잊을 수 없는 트랙. 전시 어빙 벌린이 만든 곡들에 대한 경의를 담아 디즈니 전담 작곡가로 유명했던 알란 멘켄이 데이비드 지펠과 손잡고 만든 노래로, 그 때 그 분위기가 물씬 살아 숨 쉬며 묘한 기시감을 전달한다. 알란 실버스트리의 OST 음악적인 완성도와 호평으로 인해 알란 실베스트리는 바로 다음해 마블 캐릭터들이 모인 <어벤져스>의 음악을 연달아 맡게 된다. 그는 두 개 이상의 마블 작품을 담당한 첫번째 작곡가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극장에서 절찬리에 상영 중인 속편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선 떠오르는 신예 작곡가 헨리 잭맨에게 바톤을 넘겨줬지만, 그의 팡파르가 여전히 등장하며 살짝 여운을 남겨두었다.(흥미로운 건 알란 실베스트리가 하차한 <지.아이.조>의 속편 음악도 헨리 잭맨이 넘겨받았다는 사실!) 하지만 언젠가 알란 실베스트리가 마블 영화에 다시 컴백할지 모른다. 70년 뒤에 깨어난 스티브 로저스처럼. 21년 뒤에 성공한 캡틴 아메리카처럼 말이다. ‘Captain America March’ Track List 1. Captain America Main Titles 2. Frozen Wasteland 3. Schmidt's Treasure 4. Farewell to Bucky 5. Hydra Lab 6. Training the Supersoldier 7. Schmidt's Story 8. VitaRays 9. Captain America "We Did It" 10. Kruger Chase 11. Hostage on the Pier 12. General's Resign 13. Unauthorized Night Flight 14. Troop Liberation 15. Factory Inferno 16. Triumphant Return 17. Invader's Montage 18. Hydra Train 19. Rain Fire Upon Them 20. Motorcycle Mayhem 21. Invasion 22. Fight on the Flight Deck 23. This is My Choice 24. Passage of Time 25. Captain America 26. Star Spangled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