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엔드게임
- 감독
- 조 루소, 안소니 루소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크리스 에반스, 크리스 헴스워스, 스칼렛 요한슨, 브리 라슨, 마크 러팔로, 폴 러드, 조쉬 브롤린, 세바스찬 스탠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 1959년부터 이어져 온 동두천의 터줏대감 1959년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에서 문을 연 동광극장 은 현재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상업용 개봉영화 단관 영화관(스크린을 하나만 갖춘 극장)이다. 전국에 단관 영화관들이 몇몇 있지만 예술영화 전용관, 실버극장 등으로 운영이 되고 있고 개봉영화 상영관으로 단관인 곳은 동광극장이 유일한데, 단독 건물이기까지 하다. 건물 자체가 영화관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1986년에 수리를 위해 천장을 뜯을 때 상량에 “1959”라고 쓰여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2024년 기준으로 2,500편이 넘는 영화를 상영했다. 현재 극장 대표인 고재서 씨가 1986년 인수하여 관리 및 운영 중이다. 동광극장이 오랫동안 지역에서 자리하게 되면서 극장 근처 다리 이름도 ‘동광교’라고 불리게 되었고, ‘동광’이라는 이름이 붙은 슈퍼마켓이나 카페 등이 영화관이 운영되는 긴 역사 내내 인근에 있곤 했다. 2024년 현재도 동광극장 백 미터 거리 안에 동광슈퍼, 동광호프, 카페동광, 동광여인숙 등이 있다. 2011년 도로명 주소가 생길 때(2011년 도로명 주소 고시, 2014년 전면 시행) 영화관이 있는 지역은 ‘동광로’가 되었다. 동광극장 인근에는 동광극장처럼 지역에서 오래된 ‘문화극장(2관 운영)’이 있으며 ‘양키시장(구 애신시장),’ ‘제일시장,’ ‘중앙시장’이 있다. 블로그,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 시대의 활성화와 더불어 이 지역으로 일명 ‘레트로 여행’을 체험하러 오는 젊은 층들이 시장과 영화관들을 둘러보곤 하는데, 그들에게 동광극장은 필수코스 중 하나이다. 지역 주민들의 추천에 의해 2023년 ‘경기도형 노포(오래된 가게)’ 중 한 곳으로 선정된 이후로는 개인뿐 아니라 지자체나 단체 등에서 공정여행이나 지역 역사 등을 주제로 여행 프로그램을 짜면서 지역의 명소로서 동광극장을 찾기도 한다. 경기 노포 같은 경우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가 ‘경기도만의 정서와 이야기를 발굴해서 생활 관광의 대표 콘텐츠로 발굴한다’라는 목적으로 2023년 처음 실시한 것으로, ‘가게 운영 기간 20년 이상에 지역 정서를 반영하고 있어야 하며 보존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선정 조건에 부합해야 하는데, 영화관으로서는 동광극장이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건물 외벽 “경기노포” 표지 1950년대부터 동두천시에 영화관이 여러 개 자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군 기지 도시였던 것이 주요했다. 동두천시는 원래는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이라는 작은 시골 면 소재지였으나 한국전쟁 중 미군이 주둔한 이후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동두천읍, 동두천시로 점차 승격되었다. 1951년에는 미국 육군 제24사단의 휴양소가 설치되었고, 1952년부터 1970년대까지는 미군 제7사단이 장기 주둔했다. 제7사단이 1970년 이후 본국으로 철수한 뒤에는 전방에 있던 미군 제2사단이 동두천으로 이전하고 총 6개의 미군 부대가 주둔해 왔다. 즉, 동두천시는 미군과 미군기지로 인해 인구가 늘고 지역 상권이 발전할 수 있었다. 1960~1970년대 동두천은 “리틀 시카고(Little Chicago)”라고 불리며 ‘동두천에 가면 한국 돈보다 달러가 더 많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의 호황을 누렸다. 1979년 당시 기준으로 동두천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36%가 미군을 대상으로 한 생업에 종사한 것으로 집계되었을 정도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미군 부대가 단계적으로 철수하면서 미군이 80% 감소하였고, 이에 동두천시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지역 경제를 지탱해 주던 미군들이 떠나면서 도심 상가들의 휴·폐업이 이어졌다. 미군에 의존해오던 동두천시 지역 경제가 쇠퇴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추억의 유물과 현재의 시스템이 공존하는 공간 동광극장 역시 호황기에는 영화 간판을 그리는 ‘화공’을 비롯하여 영화관 전체 직원이 10명에 달했다가 지금은 고재서 대표 1인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고재서 대표는 영사기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으며, 필름 영사기로 상영할 당시에 직접 영화를 틀기도 했다. 동광극장에 들어오면 보이는 ‘35mm 필름 영사기’ 같은 경우 영화 상영은 하지 않지만 지금도 작동 가능하게 관리되고 있다. 현재 영화 상영은 디지털 영사기로 상영되고 있는데 영사기는 모니터로 체크하고 매표기에도 전산화가 도입되어 있다. 한 번 영화를 틀면 최소 2~3주간 상영한다. 지금도 작동 가능한 로비의 필름 영사기 동광극장은 1993년 5월에 4개월간 문을 닫았다가 가을에 재개관했는데 그 당시 스크린과 음향 시설 등을 리모델링했고, 리모델링 이후 최신 영화를 가까운 곳에서 좀 더 쾌적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개봉관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2012년 7월부터는 디지털 영사기로 상영 시스템이 바뀌었다. 필름 영사기로 상영한 마지막 작품은 < 연가시 >(박정우, 2012)였고 디지털 영사기로 상영한 첫 번째 작품은 < 도둑들 >(최동훈, 2012)이었다. 필름 영사기뿐 아니라, 동광극장은 외부와 내부 모두 현재의 영화관들과는 달리 영화관 초창기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이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신선함을 준다. 이 때문에 영화박물관이나 촬영 세트장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입구 왼편에 매점이 있고 오른편이 티켓부스다. 그리고 나머지 전체가 휴게실인데 소파와 안마의자가 있고 영화관의 옛 사진들과 영화 포스터들이 구석구석 붙어 있다. 손으로 직접 쓴 관람 시 주의사항 표지는 물론 신문 기사 등도 있는데 동광극장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휴게실에 모두 있는 셈이다. 휴게실 공간의 맨 끝에 철문을 열면 상영관에 입장하게 된다. 상영관 안에는 관객의 보행을 돕는 파란 LED 조명선이 있고 조명선을 따라 들어간 뒤 원하는 좌석에 앉으면 된다. 리모델링 당시 스크린 아래 무대를 뜯어내고 소파를 놓았고 그로 인해 50석이 줄어들었는데, 대신 앞뒤 객석의 간격이 넓어져서 더 쾌적해졌다. 1층 같은 경우 2009년에 전석 갈색의 가죽 리클라이너 소파와 간이 테이블을 설치하였는데 테이블과 보조 받침대가 있고 핸드폰 충전이 가능하도록 콘센트까지 설치되어 있다. 동광극장 상영관 내부 전경 동광극장은 건물 하나를 영화관으로만 쓰고 있다 보니 2층 건물 외부 전체가 상영작 포스터 간판을 비롯해서 영화관 관련한 표지들로 덮여 있다. 건물 맨 위에는 관객 수 1,000만 명이 넘은 한국영화들이 필름 모양 속에 나열되어 있고 그 밑에 노란색 액자 모양으로 크게 현재 상영 중인 영화의 포스터가 있다. 상영작을 홍보하는 간판 그림은 1990년대 말까지 그려졌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사진으로 걸린다. 그 밑에 작게 “1959”라고 영화관이 문을 연 연도가 적혀 있다. 상영작 홍보 포스터 간판 밑에 전광판이 있고 그 밑에 “동광극장 상영 중”이라는 글자와 입구가 있다. 입구 같은 경우 도로가 새롭게 나면서 도로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옛 입구가 있는 건물 벽면에 극장 이름이 시멘트로 조각되어 남아있다. 동광극장 외관 간판 부분 근접 사진 이렇듯 예전의 모습을 가진 영화관 내·외부 모습 때문에 유명 드라마 촬영지로 등장한 바 있으며(드라마 <시그널>, 드라마 <응답하라 1988>) 김중미 작가의 자전적 소설 『나의 동두천』(2018)에도 등장한다. SNS상에서는 ‘와칸다 극장’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유튜버가 방문했을 2018년 당시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안소니 루소, 조 루소, 2018)가 개봉해서 전국적인 흥행을 하고 있었는데, 동광극장에서도 해당 영화를 틀고 있어서 영화 속 주요 배경인 ‘와칸다 왕국’ 이름을 따서 누리꾼들이 지은 것이다. “극장은 계속 열려 있어야 하니까” 현재는 설날이나 추석에 손님이 몰리는 편이고 흥행작이 개봉하면 지역 주민들이 극장을 찾아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역 주민들이 많이 보러 온 작품은 2023년 11월 22일에 개봉한 < 서울의 봄 >(김성수, 2022)이었다. 평소에는 영화관에 영화 자체를 보러 오는 손님보다 레트로 여행 등의 컨셉으로 인근 시장들을 둘러보고 오래된 영화관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더 많다. 동광극장 같은 경우 지역신문을 비롯해 다양한 매체에 여러 차례 소개되었으나 장기적인 효과를 불러오지는 못했다. 전체적인 지역 경제 쇠퇴와 더불어 인근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등장은 물론 코로나 시기 OTT의 급부상 등이 부진의 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광극장은 개봉관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친 극장 내부 리모델링 작업을 거쳤고, 매일 영화관을 열고 있다. 동광극장이 가진 소망은 1959년에 문을 연 이 자리에서 지금처럼 계속 개봉영화를 상영하는 상업영화관으로 지역에 남는 것이다. 극장주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고, 그러므로 극장은 계속 열려 있어야 하니까.” 동광극장 로비 전경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 경기도 동두천시 동광로 33 (생연동) 2) 설립일 : 1959년 3) 대표자 : 고재서 4) 규모 : 지상 2층, 면적 483.63㎡, 연면적 707.32㎡ 5) 극장 구성 (관수, 관별 좌석수, 훨체어석): 상영관 1개관 총 283석 (리클라이너 의자로 인해 실질적으로는 240석, 지정좌석제가 아닌 자율 착석) 6) 운영시간 및 정기휴무 : 자율적 운영, 정기휴무 없음 7) 입장료 및 할인 정책 - 일반인 주중 9,000원, 주말 9,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 군인, 간부, 소방공무원 주중 8,000원, 주말 8,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 청소년, 정복 군인 주중 7,000원, 주말 7,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 경로우대, 장애인, 국가유공자 주중 6,000원, 주말 6,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 어린이 주중 5,000원, 주말 5,000원, 문화가 있는 날 6,000원 8) 조직 구성 : 대표 1명 상근 9) 구성원 : 고재서 대표 1인 10) 주요 장비 (영사 장비, 음향): 디지털 영사기, 돌비 음향 시스템, 상영관 입구에 작동 가능한 필름영사기 취재 일자 : 2024년 6월 17일 글/인터뷰 진행 : 김문경 사진 : 허 성
< 완다비전 >은 OTT 플랫폼인 월트디즈니플러스(이하 ‘디즈니’)의 오리지널 드라마이다. 총 9화로 구성된 <완다비전> 시즌1은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 페이즈4(Marvel Cinematic Universe: Phase Four)의 첫 번째 드라마 시리즈다. 절대적 권능을 가진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 우주의 절반을 절멸시키려는 타노스와의 전쟁을 치룬 슈퍼히어로들의 모험을 그린 페이즈3는 < 어벤져스: 엔드게임 >(앤서니 루소·조 루소, 2019)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아이언맨, 블랙 위도우, 비전 등 여러 슈퍼 히어로는 자신들의 죽음을 통해 타노스가 절멸시킨 우주의 절반을 되돌린다.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은 비극성을 띠며 영웅서사를 완성한다. 페이즈4는 그 이후의, 특히 멀티버스를 강조한 세계관을 그리고 있다. 첫 시리즈인 <완다비전>은 멀티버스를 이용해 트라우마와 회복을 서사화 한다. 타노스는 급증하는 인구에 비해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최대다수의 행복을 위해 모든 행성의 절반을 단 한 번에 절멸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가 공익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야기한 재난은 전체주의적으로 인구를 통치하는 정치의 결과다. 그렇다면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영웅들의 세상을 구하는 방식은 어떤가? 그들 역시 사라진 인구를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 즉 숫자의 회귀에 집중한다. 그 이후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될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회귀는 회복과 같지 않다. 그렇기에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 시리즈로써 트라우마와 회복의 서사를 만들어 내는 <완다비전>은 분명 페이즈3와 다르다. <완다비전>은 미학적인 완성도나 세계에 대한 뛰어난 성찰을 보여주는 시리즈는 아니지만, 대중 플랫폼 시대의 메타서사와 팬덤으로서의 관객성을 텍스트 내외부에서 자기 반영적으로 현란하게 구사하는 놀라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것은 거의 MCU의 선언문과 같다. ‘사사로운 리스트’에 이 시리즈를 넣은 것은 이 시대의 대중 미디어 콘텐츠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놀라운 ‘아방가르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MCU가 그래픽노블, 피규어, 극장,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을 넘나들며 영화를 제작·유통하고 팬덤을 구축하는 방식은 새로운 관객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MCU의 팬덤은 민족국가를 비롯해 장소에 기반 한 지역 공동체들이 더 이상 크게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극장을 중심으로 한 관객성이 유지되지 못하는 가운데 국가경계와 플랫폼을 가로지르며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영상문화 공동체를 만들어 내고 있다. 고유의 개성과 능력을 갖고 있는 슈퍼 히어로 캐릭터들이 개별 영화와 드라마 시리즈를 가로지르며 서사를 상호교차하고 리부트하고 보철하고 있는 방식은 관람자들이 개입할 여지를 많이 남겨둔다. 슈퍼 히어로 캐릭터들도 상호교차 출연하면서 어떤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었던 이가 다른 영화에서는 조연이 되고, 또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주인공도 조연도 없다. MCU가 계속되는 한 언제든, 심지어 죽은 이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서사가 써 내려갈 수 있다. 캐릭터와 텍스트 모두 언제든 다양한 매체로 상품화될 수 있는 콘텐츠가 되고, 그 콘텐츠의 중심은 캐릭터들이다.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완결된 닫힌 서사가 아니고 언제든 변형가능하고 유연한, 그리고 평행 우주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은 콘텐츠로 이루어진 영화적 우주에는 끊임없이 생성하고 확장할 여지가 있다. 어떤 우주가 되었든 (미래에 캐릭터와 콘텐츠가 추가되면서) 늘 그보다 더 큰 우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더니즘 시대에는 기존 체제의 해체와 성찰 혹은 진리의 장소였던 개방성과 사이-공간은 이제 도래할 콘텐츠로 빼곡히 채워질 공간이 된다. 심지어 페이즈3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을 뿐 아니라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가장 극적인 영웅적 희생을 보여주며 진정한 주인공이 된 아이언맨도 다음과 같은 대사를 듣는다. “스타크 씨, 당신은 더 큰 우주의 일부일 뿐이에요. 아직 모를 뿐이지.” 늘 더 큰 우주로 열린 가능성과 그들의 복잡하면서도 유연한 관계성 때문에 MCU 팬은 슈퍼히어로들과 조연으로 보이는 캐릭터들의 네트워크에 참여 가능한 것처럼 느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노력과 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노력을 통해 얻은 특별한 ‘능력’이야말로 MCU의 영화적 우주 네트워크에 참여 감각을 높여준다. 그것은 바로 MCU를 읽어 내기 위한 리터러시이다. 끊임없는 확장을 위해 잉여공간을 만들고 그를 통해 이윤을 생산하는 자본주의가 영구엔진을 믿는 것처럼 MCU는 지속적으로 수많은 슈퍼 히어로와 서사들을 양산하고 있고 그들 간의 관계도 쉽게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멀티버스는 그러한 경향을 강화한다. MCU 팬은 그 우주에 참여하려면 해당 텍스트 그 자체만 소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매해 양산되는 영화와 시리즈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과 돈이 들지만, 별도로 해당 텍스트 밖에서 그들의 개성과 관계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더 나아가 남들의 이해를 돕는 콘텐츠를 부가적으로 생산한다. 그래서 MCU 팬은 기본적으로 메타적이고 생산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 영화학자는 이러한 MCU 관객성을 “연속성의 리터러시(literacy of continuity, 패리 댄츨러)”라고 개념화한 바 있다. MCU 팬덤은 MCU가 지속되고 확장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들은 개별적인 텍스트들이 복잡하게 연결되며 배치되는 가운데 그 빈 간극을 메워주며 연속성을 유지시켜준다. 이들은 다양한 장르, 매체, 플랫폼을 오가는 와중에도 그 모든 이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다양한 스타일들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키고 박식한 정보를 모으고 공유한다. 단순히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방식으로 서로 다른 텍스트들이 서로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각 텍스트가 지닌 상징, 기호, 의미를 적극적으로 밀도 있게 독해하며 그것들을 상호텍스트적으로 네트워킹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선 많은 에너지를 투자할 수밖에 없고 투자를 회수하기 위해 다시 MCU를 소비하게 된다. 그렇기에 관객의 적극적 리터러시는 MCU의 확장과 응집력을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또한 그들의 참여감각은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성을 시뮬레이션 한다. MCU의 관객성은 리터러시가 높고 메타적이지만 그렇다고 역사적 성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공동체 감각을 강화하는 연속성은 영화적 우주가 잠재적으로 확장 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세계 바깥을 더 이상 상상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역사적 성찰은 바깥의 사유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MCU 팬덤의 리터러시는 슈퍼히어로의 슈퍼 파워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슈퍼 파워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성장 가능한 것이다. 페이즈3에서 남성 영웅들이 장애를 갖거나 허약한 신체에서 기술적 보철을 통해 무적의 영웅으로 성장하는 서사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능력주의’ 성장서사, 팬들이 리터러시를 키워며 MCU에 점증적으로 몰입하는 활동, MCU의 확장은 그 자체로 평행/멀티 우주를 구성한다. 여기서 장애는 비정상성/능력 없음이 되고 비장애는 정상성/슈퍼 파워가 된다. 장애가 있는 신체를 대가로 MCU가 연속성과 확장성을 얻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나온 페이즈4의 <완다비전>은 매우 흥미롭다. 제목 ‘완다비전’은 다중적 의미를 갖는다. 스칼렛 위치 완다(엘리자베스 올슨)의 비전, 즉 완다가 바라보는/보고 싶은 세상일 수도 있고, 완다가 만든 연인 비전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완다와 그의 연인 비전이 만든 가상세계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드라마의 초반 에피소드들은 매우 낯설고 혼란스럽다. 미국 텔레비전 문화의 역사와 MCU에 대한 정보와 정동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시네필’과 같은 높은 리터러시를 요구한다. 완다는 ‘엔드 게임’에서 연인 비전(폴 베타니)을 잃는다. 그런데 비전을 잃는다는 문장 자체가 말이 안 될 수도 있다. 비전은 골격과 외장부터 세포단위까지 무한 재생력을 가진 비브라늄이라는 합성소재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포스트휴먼이기 때문이다. 사실 비전은 남성처럼 묘사되고 남성 배우가 연기하지만 그의 성별과 외양도 어쩌면 결정된 것이 아닐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트랜스젠더들은 가장 많은 영감을 받는 MCU 슈퍼 영웅으로 비전을 택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간 완다는 비전의 상실과 트라우마 그리고 애도를 주제로 드라마를 만들었다. 포스트휴먼을 상실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 드라마는 깊이 탐색한다. 완다의 트라우마는 비전만이 아니라 동유럽 이민자 가족으로서 오빠 퀵실버와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상실이 축적되어 발생한 것이다. 동유럽 이민자와 인공생명체의 애도는 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어떻게 애도가 가능한가. 왜 백인 남성영웅 아이언맨에 대한 애도는 ‘엔드게임’ 내내 중요하게 다뤄짐에도 인공생명체인 비전이나 러시아계 여성영웅 블랙 위도우는 그 죽음의 의미가 제대로 서사화되지 못했는가. 완다의 슬픔과 분노는 단지 비전을 잃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의 죽음이 공동체 내에서 제대로 애도되지 못했다는 것, 아니 애초에 애도불가능성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애도의 이중적 불가능성, 즉 애도불가능성이 애도되지 못하는 것이다. 비전은 비브라늄이라는 신소재만 있으면 언제든 재생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고전적인 죽음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완다는 비전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사건의 완료가 불가능하다. <완다비전>은 과잉된 메타성, 혹은 빠른 속도로 급증하는 하이퍼매개성을 특징으로 하는 MCU와 같은 콘텐츠들이 도래할 메타콘텐츠들로 인해 외부가 불가능하고 그래서 성찰적 비평이 불가능함을 텍스트 내적으로 서사화한다. 완다는 비전을 다시 만들어내 자신의 가상공간을 만든다. 그 가상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과 교외의 이성애 ‘정상가족’ 신화를 믿었던 시대에 만들어진 1950-60년대 시트콤을 오마주한다. 흑백에서 칼라까지, <Mary Tyler Moore Show>, <I Love Lucy>, <The Dick Van Dyke Show>, <Bewitched> 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정상성’에 편입되기 힘든 인공생명체인 비전과 마녀인 완다는 아이들까지 낳으며, 정상가족을 시뮬레이션 한다. 사실 그 시트콤들은 당시에도 정상가족이 신화라는 것을 이미 드러낸 바 있다. 이 코미디들은 ‘정상성’을 슬로건으로 걸면서도 넘어지고 부딪히는 신체 코미디와 말실수, 농담, 각자 맡은 성역할에의 무능함 등으로 ‘정상성’의 불가능성을 노출시킨다. 중산층의 존중받는 직업을 가진 모범적인 남편과 그를 보살피고 위로하는 전업 가정주부인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장난꾸러기인 귀여운 아이는 사실 그 자리에 잘 적응하지 못해 늘 해프닝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만들어 낸다. 완다의 아버지는 동유럽 이미자 출신으로 미국 텔레비전 쇼가 담긴 해적판 DVD를 파는 일을 했고, 완다와 오빠 퀵실버는 부모가 일을 하러 나간 사이 그 DVD를 보며 자랐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정상가족에 들지 못한 완다의 매체적 정동을 드러내는 콘텐츠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정상적인’ 백인 중산층 가족을 다룬 프로그램들이 된다. 회복을 위해 바깥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메타성을 작동시키며 완다는 점점 텍스트 내부로 진입한다. 완다의 비전은 결국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 시트콤에서 매우 중요한 장치가 되는 ‘제 4의 벽’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완다비전>은 매체성찰적이고 매체고고학적인 모더니즘 영화들이 해오던 작업을 진지하게 수행한다. 메타성의 바깥을 끊임없이 사유하고 텍스트 내로 끌고 들어온다. 외부가 되는 즉시 내부가 되는 그런 방식이다. 드라마에서 완다는 결국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제 4의 벽을 뚫고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외부의 사유, 즉 ‘비브라늄’이라는 소재의 조건(이중적 애도불가능성의 트라우마)과 ‘이민자’라는 위치를 사유할 여력이 남아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에게 또 다른 멀티버스가 도달할 것이고 또 다시 재현체계 안으로 주름 접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사유는 지연되고 성찰성은 포르노가 된다.
나의 <보이후드>를 떠나보내며 근래 본 영상 중 가장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 올해 블리즈컨에서 공개된 <디아블로4>의 시네마틱 트레일러였다. 호러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이 영상은 단편영화라 해도 손색없는 완성도로 보는 이를 홀린다. 트레일러는 게임을 위한 일종의 예고 영상이지만 게임 <디아블로>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영상 속 소환된 악마 릴리트의 오싹한 자태를 마주하는 순간 감각적으로 반할 만 하다.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시선이 아래로 흘낏 향할 때 형용하기 어려운 감흥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건 독립된 창작물로 충분히 즐길만한 영상이다. 하지만 <디아블로>의 설정과 사전 정보를 숙지할 때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쾌감을 선사하리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한 단계 나아가 이 영상을 접한 시청자는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 하면 릴리트의 오묘한 눈빛을 계속 떠올리며 또 다른 생생함을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본래 시네마틱 트레일러의 목적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디아블로>의 시네마틱 트레일러는 9분 20초의 단독작품인 동시에 안팎으로 연결되는 의미망을 통해 확장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엉뚱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비슷한 사례를 픽사의 애니메이션 < 업 UP >(피터 닥터, 밥 비터슨, 2009)에서 발견한다. <UP>이 픽사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하긴 어려워도 <UP>의 초반 칼의 인생을 압축한 무성 몽타주 시퀀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열 개 남짓한 쇼트로 구성된 이 몽타주 시퀀스의 역할은 이후 전개될 영화를 위해 캐릭터의 전사(前史)를 설명해주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감히 단언컨대 이 우아한 몽타주 시퀀스는 <UP>의 전체 서사보다 훨씬 격렬하고 효과적으로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고전무성영화를 연상시키는 이 몽타주 없이 <UP>의 정점은 성립되지 않는다. 반대로 칼의 70년 인생을 3분 남짓한 시간에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시퀀스는 <UP>을 다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완결성을 지닌 짧은 영상들에 감탄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문득 한 편의 영화를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한 편의 영화는 감독에 의해 창조된 고유의 호흡과 리듬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종종 단일영화에 구속되지 않는 순간들을 마주하며 ‘어떻게 즐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피어오른다. < 어벤져스: 엔드게임 >(2019)(이하 <엔드게임>에 별 네 개 반을 준 뒤 한동안 ‘영화 보는 안목이 형편없다’는 쓴 소리에 시달렸다. 별점은 최소한의 가이드라고 생각해온 입장에서 별점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비판이 따라올 걸 짐작하면서도 굳이 <엔드게임>에 높은 평가를 남긴 건 일종의 고백이자 포스트 시네마를 향한 탐색 때문이었다. <엔드게임>이 잘 만든 영화냐고 묻는다면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어렵다. 단순히 기계적인 완성도로만 놓고 봐도 전작인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2018)가 좀 더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인피니티 워>가 발상을 뒤집어 타노스를 중심으로 히어로들의 역학관계를 재배치했다면 <엔드게임>은 벌려 놓은 이야기들을 수습하는데 공을 들인다. 전 우주를 무대로 하면서 흩어진 이야기들을 모아나가는 방식 역시 <인피니티 워>가 <엔드게임>보다 좀 더 영리하고 실수가 적다. <인피니티 워>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대단원의 서막답게 이야기의 탁월한 균형 감각이 빛난다. 수많은 캐릭터를 적재적소 배치하는 조율 능력이야 말로 오늘날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완성한 원동력이다. 반면 <엔드게임>은 서사는 좋게 말해 안정적이고 나쁘게 보자면 다소 밋밋하다. 우연과 행운이 남발되는 등 이야기의 구멍이 꽤 있는 편이고 토니의 장례식과 캡틴의 은퇴 등 후반부 사족도 적지 않게 늘어진다. 무엇보다 <인피니티 워>가 깔아놓은 무대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놀라움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나를 뒤흔든 쪽은 <엔드게임>이었다. <엔드게임>에는 11년간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반칙 같은 감동이 있다. 나 역시 개별 영화는 각각의 성취로만 판단되어야 한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거장의 작품이라고 더 보탤 것도 없고 신인의 영화라고 얕봐서도 안 된다. 영화는 러닝 타임 안에 구축된 독립된 세계이며 온전히 영화 내적인 완성도로 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엔드게임>을 한 편의 영화로만 감상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상영 시간 내내 불쑥불쑥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다른 영화들이 치고 들어와 마치 추억의 앨범을 꺼내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간 토니 스타크가 아버지를 대면할 때 < 아이언맨3 >에서 홀로그램으로 재현된 자신의 기억을 마주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배불뚝이가 된 토르가 과거의 아스가르드로 몰래 잠입할 땐 < 토르: 라그나로크 >는 물론 고전 오페라 같던 < 토르 > 1편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캡틴 아메리카가 < 어벤져스 > 1편 시점의 스타크 타워로 잠입해 들어가는 장면은 또 어떤가. 캡틴이 귓속말로 “헤일, 하이드라”라고 속삭이며 < 윈터 솔저 >의 유명한 엘리베이터 씬을 재현할 때의 즐거움을 개별영화에서 느낄 수 있을까. <엔드게임>은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연속극의 최종장에 가깝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11년의 세월동안 개별영화 간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관을 이어 붙여 거대한 우주를 창조했다. 이건 단순히 설정과 정보를 공유한다는 차원을 넘어 관객의 시간이 축적되어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체험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들은 일견 매우 느슨하면서도 강력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개별영화로도 충분히 즐길 만 하지만 22편의 경험들이 축적되었을 때 발생하는 쾌감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이 새로운 종류의 어트렉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통적인 영화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혹은 평가 절하 할 수 밖에 없다. <엔드게임>을 철저히 개별영화로 논하자면 무난한 완성도의 기획영화의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3시간의 상영시간이 기계적인 조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 아이리시맨 >(2019)이 비슷한 3시간동안 한 호흡으로 감싸여 있다면, <엔드게임>은 1시간은 분절된 3편의 에피소드가 연속되는 형태다. 첫 1시간은 타노스의 핑거 스냅으로 전 우주의 절반이 날아간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상실감을 다룬다. 이 에피소드는 한적한 행성에서 소임을 마치고 농사를 짓고 있는 타노스의 목을 날려버리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문제의 원인을 제거했지만 상처는 회복할 수 없고 남겨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을 버텨야만 한다. 블록버스터 프렌차이즈 영화에서 이렇게 무겁고 정적인 분위기로 시작하는 건 이례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작에서 한껏 끌어올렸던 피날레의 분위기를 차분히 가라앉힌다는 점에서 영리하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이어지는 1시간은 시간여행을 통해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오는 미션을 보여주는데 <어벤져스> 초창기의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있는 에피소드다. 무엇보다 이 파트는 11년을 이어온 팬들을 위한 서비스라는 인상이 강하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지난 시간으로 돌아가 숨겨진 얼굴을 다시 대면하는 건 개별영화 바깥으로 체험을 확장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단원의 1시간은 그야말로 블록버스터답게 물량을 쏟아 붓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미리 본 미래의 계획이 발동하여 모든 히어로들이 한 자리에 집결할 때 짜릿한 전율이 관통한다. 이건 <엔드게임>의 피날레가 아니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11년 동안 준비한 피날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난한 완성도와 쉽게 가라앉히기 힘든 흥분 사이에는 거대한 괴리가 있다. 이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어떻게 설명할지가 나의 고민과 질문이었다. 다시 돌아가, 명쾌한 답을 낼 순 없었지만 우선 내가 느낀 ‘감정’에 충실하기로 하고 높은 별점을 매겼다. 시간이 지나 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얼마 전 마틴 스코세이지는 <아이리시맨> 개봉과 함께 마블영화에 점령된 극장가에 일침을 가하며 ‘시네마’ 논쟁을 촉발시켰는데 그가 자신의 견해를 밝힌 뉴욕타임즈의 기고문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글의 제목은 “왜 마블영화는 시네마가 아닌가”였지만 나는 거꾸로 거기서 마블영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마틴 스콜세이지는 말한다. “히치콕 자체가 하나의 프랜차이즈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그는 우리의 프렌차이즈였다. 새로운 히치콕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였다....(중략) 극장 안에 형성된 관객과 영화 사이의 팽팽한 교감 혹은 화학작용 때문이었고, 이를 실제로 체험하는 것은 가히 짜릿했다.” 여기서 ‘히치콕 영화’를 ‘마블 영화’로 바꾸면 이상한 짓일까. <엔드게임>은 21세기의 프렌차이즈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 <엔드게임>과 같은 종류의 영화들은 극장이란 한정된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 바깥으로 촉수를 넓혀나간다는 점이다. 개별영화가 가지는 팽팽한 교감과 화학반응은 분명 <아이리시맨>과 같은 시네마(좁혀서는 내러티브 영화)에 비해 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엔드게임>은 3개의 분리된 에피소드를 느슨하게 조립한 구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분리된 에피소드들, 조각난 시퀀스들은 몇 년 전 다른 영화에서 뿌려놓은 떡밥들을 회수하고 연결되기 시작한다. <엔드게임>은 관객의 체험 속에서 <아이언맨>의 특정상황과 연결되고, < 앤트맨 >의 장면들과 이어지며, < 닥터 스트레인지 >의 세계와 겹쳐진다. 요컨대 이것은 한 편의 영화가 아니다. 한 편의 영화, 극장이라는 밀폐된 시공간으로 볼 땐 느슨하고 조악해보였던 조각들이 11년의 세월동안 뿌려놓은 다른 조각들을 소환하며 전혀 다른 종류의 서사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엔드게임>을 한 편의 영화로 감상할 수 없다. 굳이 비슷한 사례를 찾는다면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12년 동안 촬영한 < 보이후드 >(2014)를 봤을 때 유사한 감흥을 느꼈다. <보이후드>에는 서사의 절정이 없다. 매 순간 진실이 묻어있고 각자의 정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관객을 향해 열려 있는 영화다. <보이후드>가 시간을 압축하는 방식을 통해 시간 흐름 자체를 목격할 수 있다면, <엔드게임>은 11년의 체험과 축적을 통해 각자의 시간을 기억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아이언맨>의 탄생을 목격한 내가 핑거스냅을 튕기는 아이언맨의 대사 ‘나는 아이언맨이다’를 듣는 다는 건 단순히 한 편의 영화 안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엔드게임>이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라고 칭송하고 싶진 않다.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미학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는지도 아직은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이른바 세계가 ‘변했다’는 사실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아니 <엔드게임>은 비록 영화의 껍질, 영화산업의 육체를 빌리고 있지만 이미 ‘(전통적인 개념의) 영화가 아닌 어떤 것’이다. 21세기 프렌차이즈의 결과물을 보며 새로운 종류의 체험이 당도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엔드게임>의 피날레에서 느꼈던 전율은 단지 3시간의 결과물이 아니라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 어느덧 11년의 세월동안 길들여진 끝에 나온 보상이었다. 가치판단을 잠시 미뤄두고 이야기해보자. 이제 영화를 온전히 영화라는 틀 안에 가둬놓을 수 있을까. 여전히 전통적인 개념을 갈고 닦아 나가는 시네마들도 있겠지만 동시에 이제 극장의 문이 열려버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우주의 탄생 역시 사실 우연이었다. <아이언맨>의 성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오늘의 결과를 낳았다.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끝은 필연과 의지의 산물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니 드디어 한편의 영화가 끝이 났다. 물론 또 다른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계속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다시 그 세계에 첫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교통사고처럼 나를 덮쳤던 2008년 <아이언맨> 이후 11년 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즐거움만큼이나 피로도 안겨주었다. 어쩌면 <엔드게임>을 향한 나의 찬사와 박수에는 이별의 홀가분함도 약간은 묻어 있으리라. 이렇게, 아니 이제야 한 편의 영화를 떠나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