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일
- 감독
- 김기덕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장린아, 이종필, 김동박, 박경민, 김재록, 이재수, 최찬숙, 김평조, 황승환, 최진, 김종우, 김민진, 김훈영, 장유빈, 김소현, 김미진, 최영미, 김종구, 이은우, 이이경, 마동석, 김영민, 안지혜, 조동인, 테오, 조재룡, 김중기, 주희중, 최귀화, 황건, 유연수, 손종학, 임화영, 박보영, 박소담, 신민주, 이인경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채플린은 언제 ‘위대한’ 채플린이 되었을까. 물론 채플린은 처음부터 훌륭했다. 심지어 맥 세네트가 연출하고 채플린이 주연을 연기한 초기 영화들부터 훌륭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을 위대하다,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마 누군가는, 여기에 해당하는 이들은 대부분 채플린의 전문적인 연구자들인데, 1915년에 < 방랑자(The Tramp) >에서 채플린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는 인물을 이미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세상 속의 버림받은 방랑자에서 그 관계를 반대로 뒤집어서 그 자신이 방랑자라는 선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만의 문제 설정을 발명했다고 설명할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방랑자로부터 주인으로서의 방랑자로의 전도. 하지만 나는 좀 더 뒤로 더 물러나고 싶다. 어디까지? <방랑자>가 훌륭하긴 하지만 잠시만 그 주변을 돌아보자. 여전히 여기에는 채플린이 자신의 희극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고정하고 일정 거리만큼 물러난 다음 영화 프레임을 무대처럼 사용해서 곡예사의 재주를 한껏 보여주는 데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남는다. 문장을 바꿔보겠다. 채플린의 영화를 모두 본 우리는 <방랑자>를 통해서 < 황금광 시대 >(1925)를 보지 않으며, ‘또 다른’ < 방랑자(The Vagabond) >(1916)를 통해서 < 시티 라이트 >(1931)를 보지 않는다. 반대로 < 서커스 >(1928)를 통해서 < 이민자 >(1917)를 볼 것이며, < 모던 타임즈 >(1936)를 통해서 < 개의 삶 >(1918)을 볼 것이다. 그 둘 사이에 어떤 도약이 놓여있는가. 장편 영화 < 키드 >(1921)가 놓여있다. 채플린이 카메라 앞에 선 1914년 첫해에 키스톤 영화사에서 35편의 단편 영화를 찍었다. 빠르게 영화를 배웠고, 그 해가 끝나기 전에 이미 채플린은 직접 연출을 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누구나 그랬다. 그리고 1919년 7월 20일 새로운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가제(working title)는 <방랑자(The Waif)>. 마치 단편 영화와 같은 간단한 줄거리. 미혼모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간절한 편지와 함께 고급 자동차에 놓고 자리를 떠난다. 그 자동차를 악당 두 명이 훔쳐 가고 아이는 길거리에 버린다. 그리고 그 아이를 방랑자가 떠안게 된다. 여차저차해서 방랑자는 아이를 키우게 된다. 그리고 둘은 마치 파트너처럼 이런저런 사고도 치면서 서로 아끼는 부자지간이 된다. 그리고 다시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고 방랑자와 아이는 행복하게 재회한다. 시작하자마자 이 영화는 채플린 없이 5분 동안 진행된다. 연출자 채플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채플린이 빈민가 골목에서 등장한다. 게다가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채플린이 아니라 ‘영화사상 가장 귀여운’ 아역이라고 해야 할 네 살 소년 재키 쿠간이 자기보다 큰 소년을 상대로 빈민가 작은 광장에서 일대일 맨주먹 권투를 하면서 혼내주는 씬이다. 이 장면은 아무리 반복해서 보아도 매번 웃게 된다. 그런 다음 채플린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 장면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키드> 중 (사진: “The Kid( 1 , 2 , 3 )”, IMDb / “ Charlie Chaplin – The Kid – Fight Scene ”, Youtube Charlie Chaplin) <키드>는 채플린의 68번째 영화이다. 필름 길이 5,250피트. 상영시간 1시간 8분. 이 상영시간에서 채플린은 1970년에 재개봉을 위해 15분을 단축했다. 새로운 관객들에게 일부 장면이 구태의연하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53분 판본은 1972년 4월 4일 뉴욕 링컨센터에서 프리미어 상영되었다. 이 자리에는 채플린이 참석했다. 이 상영본이 공식적인 <키드>의 판본이 되었다. 채플린의 나이 32살. 아마 이 영화에 담겨있는 모든 파토스와 유머, 그리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에피소드들, 아니, 보는 쪽에서도 계속해서 보고 싶다는 기쁨을 안겨주는 이 영화의 힘은 말할 것도 없이 재키 쿠간에게서 온 것이다. 그해 봄에 만든 < 양지바른 곳 >(1919)에서 오디션을 통해 재키 쿠간을 발견한 채플린은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재키와의 촬영이 끝나고 댄스홀에서 서로 마주 앉아 1시간 45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살 소년과 할리우드의 거물 사이의 다정한 대화. 재키를 돌려보낸 다음 채플린은 자신의 스탭들에게 말했다. “내 인생에서 만나 본 중에 가장 놀라운 사람을 지금 만났군.” <키드>의 촬영은 1919년 7월 21일에 시작되었다. 현장에서 채플린은 재키와 영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재키는 개미에 관심이 많았고, 채플린은 함께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자연의 신비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다음 촬영을 할 때 채플린은 재키가 해야 할 장면의 연기를 그 앞에서 실현해 보였으며, 재키는 그걸 그대로 흉내 내면 되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했지만, 재키 쿠간은 천재적으로 채플린을 ‘카피’하였다. 재키 쿠간(좌)과 찰리 채플린(우) (사진: “ The Kid ”, IMDb) 여기까지 읽으면서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키드>의 줄거리는 장편 영화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군요. 좋은 질문이다. 채플린은 ‘가제’ <방랑자>를 처음부터 장편으로 만들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채플린이 준비한 영화는 재키 쿠간과 함께 출연한 세 편의 단편 영화였다. 그때 채플린과 계약한 퍼스트 내쇼널 영화사도 그것을 원했다. 그래서 <키드>는 세 편의 영화를 하나로 이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채플린은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다. 이 영화는 한 편이 되는 쪽이 훨씬 깊은 감정적인 호소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퍼스트 내쇼널 영화사에 편집 일부를 먼저 시사하였다. 경영진은 채플린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좀 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그때 채플린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첫 번째 아내 밀드레드 해리스는 채플린의 재산을 가압류 신청하였다. 채플린은 자신의 첫 번째 장편 영화가 가압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여기에는 반대의 설명도 있다. 밀드레드 해리스가 가압류 대상으로 삼은 건 단편 영화들이었고, 채플린이 장편 영화를 제작할 것으로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채플린의 첫 번째 장편 영화 <키드>가 예술적 결단인지. 아니면 산업적 판단인지, 혹은 재산 분쟁을 둘러싼 변호사의 조언에 따른 것인지는 내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과 결정이 서로 실타래처럼 뒤엉킨 것일 수도 있다. 채플린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는 밀드레드 해리스 몰래 네거티브 필름을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유타 호텔로 가져가 편집실을 차려놓고 최종본을 완성했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비밀리 진행되어야 했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솔트레이크시티에는 현상실을 비롯한 후반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스튜디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0년 7월 30일에 작업이 끝난 <키드>는 1921년 2월 6일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키드>에 채플린은 만족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퍼스트 내쇼널과의 계약이 끝나자마자 그리피스,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세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로 옮긴 채플린은 이제 단편 영화로 돌아오지 않았다. 후일담.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된 것은 아니다. 채플린의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의 첫 번째 영화는 < 파리의 여인 >(1923)이었다. 이 영화는 채플린이 연출만 하고 출연하지 않은 두 편의 영화 중의 한편이다. 이 영화는 박스 오피스에서 재난을 맞이하였다. 채플린은 <황금광 시대>로 다시 돌아왔다. 영화가 길건 짧건 그건 상관없었다. 대중들은 채플린의 영화가 아니라 ‘방랑자’의 영화를 원했다. 후일담의 첨언. 하지만 나는 박스 오피스에 동의하지 않는다. <파리의 여인>은 걸작이다. <키드> 중 (사진: “ The Kid ”, IMDb)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오래전 인간은 손으로 사냥을 하고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도구를 찾기 전까지 오랜 시간 그랬다. 한 쌍의 포크와 나이프가 입과 손 사이를 벌려 그 안에 식탁이라는 문화의 공간을 형성하기까지 기나긴 세월이 흘렀다. 폭력과 야만을 본질로 하는 인간은 그렇게 천천히 문명화의 과정을 밟았다. 미술가 안규철은 「손, 인간의 조건」이라는 글에서 한 인간의 생애 역시 인류의 문명화 과정과 닮아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젖을 떼고 처음 배우는 숟가락질은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가기 위한 첫 규범이 된다. 숟가락질은 학교에 들어간 후 글씨를 쓰고 셈을 하는 방법과 때리거나 훔쳐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학습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그 지난한 훈련의 과정을 거쳐 인간은 손과 입 사이, 몸과 세상 사이의 “여백”을 얻는 것이다. 여백은 당연히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양육자에게 아이란 무엇보다도 밀착해 먹여 키워야 할 과제로서 존재하는 대상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난항을 겪는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존재만으로 자연스레 양분을 공급받다가 모체로부터 떨어져나온 뒤부터 자력으로 생명을 유지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밥을 먹는 행위는 독립된 주체로 홀로 선다는 것의 가장 원초적인 은유인지도 모른다. <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은 이 행위를 매개 삼아 모녀라는 관계의 가깝고도 먼 거리를 조망하는 영화다. 십여 년 전, 열다섯 살 채영은 섭식장애 진단을 받고 병동에 입원했다. 치료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거식증이 지나가자 폭식증이 찾아왔다. 엄마 상옥은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병의 근원을 이해하고자 씨름하는 시간을 보냈다. 김보람 감독은 원래 섭식장애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리서치를 진행하다, 오랜 시간 섭식장애를 앓은 당사자인 채영을 만나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이어트와 외모 강박이라는 익숙한 문법으로 이 질환을 읽으려는 시도를 일찌감치 거둔다. 대신에 채영 스스로 말하는 몸의 역사와 마음의 변화에 집중하며, 딸 채영과 엄마 상옥 두 사람의 관계를 다루기로 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섭식장애라는 표면적 징후 대신에, 삶의 밑바닥에서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내면의 문제, 즉 가족이라는 복잡한 실타래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채영과 상옥은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 오랜 시간 서로 말하지 않고 묵혀두었던 감정들이 카메라 앞에서 우연히, 어쩌면 카메라 덕분에 비로소, 조금씩 꺼내어진다. 섭식장애를 처음 앓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채영은 당시에 두려움이나 고통보다는 온몸으로 확신을 느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음식을 거부하거나 폭식을 하거나 구토를 하는 행위를 가장 적극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행위로 여겼다는 것이다. 상옥은 놀라움을 숨기지 않는다. “각본을 수백 가지는 써봤는데 지금 네가 말한 각본은 참 뜻밖이네.” 젊은 시절 사회운동에 투신했던 상옥은 1990년 이후 더 이상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지역으로 이주해 대안학교의 사감으로 일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데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다. 학교 특성상 그곳은 채영을 학교 구성원들과 함께 키우는 공동양육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관람할 무렵 나는 우연찮게도 비비언 고닉이 쓴 『사나운 애착』을 읽고 있었다. 평생에 걸친 어머니와의 애증을 다룬 이 자전적 에세이는 뉴욕 브롱크스가에 위치한 가난한 이민자들의 다세대주택을 배경으로 한다. 저자가 일평생 보고 자란 것은 엄마를 포함한 이웃 여성들의 삶이었다. 고닉은 타인들과 밀착된 그 어린 시절이, 그리고 벗어나고자 했으나 어느새 거울이 되어버린 엄마의 이미지가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채영 또한 남달랐던 유년 시절의 환경을 의미심장하게 복기한다. 채영은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서, 특히 그러한 공동체의 삶으로 자신을 이끈 엄마 상옥을 통해서 일찍이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한 환경이었다. 상옥은 주변을 돌보느라,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에 집중하느라, 어린 채영의 곁에 있어주지 못할 때가 잦았다. 세월이 흘러 카메라 앞에 선 채영은, 엄마가 상정한 기준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막연한 불안이 자신을 오래 괴롭혔음을 털어놓는다. 당신의 삶이 실패였음을 인정하길 원했었다는 날선 말을 뱉은 후였다. 섭식장애를 앓는 환자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성별화된 질병이라는 점에서 이 현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다. 『명랑한 은둔자』를 쓴 캐럴라인 냅 역시 자신의 삶을 추락시킨 알코올 중독과 섭식장애를 어머니와의 관계에 연결 지어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러한 서사와 종종 조우하는 것이 아마도 완전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 여성의 삶에서 매 순간의 선택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의 표명이자 실패이기 때문이다. 채영과 상옥의 회고는 세대를 넘어 할머니의 시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돌이켜보면 몸과 마음을 억압당하는 시대를 살았던 채영의 할머니도 먹은 것을 스스로 게워내곤 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자기 몸 하나밖에 없어서였다. 환경과 시대는 달라도 세상과 불화하는 여성이 자신의 육체라는 최전선 위에서 부대끼고 고전하는 과정은 서로 닮아있다. 괴로운 기억도 날선 말들도 공동의 식탁 위에 올려지고 난 뒤에는 조금쯤 무게가 가벼워진다. 성인이 된 채영은 일을 하러 호주로 떠나고 상옥은 딸의 진정한 독립을 응원한다. 흥미롭게도 채영이 선택한 일은 타인을 위한 식사를 만들고 식탁을 준비하는 일이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누군가 낯선 이를 먹이는 일이고, 다른 존재가 무사히 일상을 유지하도록 돕는 일이다. 채영은 자신에게 요리란 조금 더 괜찮은 사람, 조금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운동’이라고 말한다. 그 일 앞에서 도전과 실패를 감행하며 삶을 다시금 써 내려가는 채영의 모습은, 회복의 과정이란 결코 자기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실감케 한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조용히 듣는 귀의 역할을 고수하기에 함부로 진단을 내리지도, 첨언하거나 평가하지도 않는 미덕을 지녔다. 그러나 고민과 결단의 순간들을 짐작하게 하는 편집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족사를 다루는 인물 다큐멘터리가 흔히 취하는 전략에 비추자면 이 이야기는 사적인 정보를 무척 적게 말한다. 다큐멘터리가 결국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로 시선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그러한 선택과 집중이 이 영화를 여성들의 내면세계에 관한 보다 섬세하고 집요한 연구에 가깝게 만드는 것 같다. 재밌는 건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 어딘가 투명한 물음표가 계속 따라다닌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 피의 연대기 >와는 무척이나 다른 형식과 화법을 가졌는데도 그 인상만은 두 작품이 궤를 같이하는 느낌이다. 그건 영화가 지닌 시선이 정제되고 흐트러짐 없는 ‘서술자’의 시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물을 대하는 카메라는 조용하지만 존재감이 꽤 있다. 대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때로는 갈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이야기를 듣는다. 신중한 호기심이라고 할까. 그 특유의 시선 때문에, 카메라가 관찰과 기록의 도구가 아니라 함께 질문하며 답을 구하는 ‘동행자’의 역할로 여겨지는 것이다. 사실 이 카메라의 미묘한 존재감은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중요한 요소로 배치된다. 촬영 초반 일대일 상담에 응한 채영은 아직 카메라의 존재가 어색하고 낯설다. 지금 감정이 어떠냐고 인터뷰어가 거듭 묻자 채영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불편함이 드러난다. 이 시퀀스는 의도했든 아니든 인물 다큐멘터리가 지닌 근본적인 고난, 상처를 지닌 타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해야 하고 환부를 들추어야만 하는 어려움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김보람 감독의 영화에는 그 어려움을 딛고 개진해 내는 힘 또한 있다. 영화를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사이에 좋은 질문이 있는 한 카메라도 있고, 이 카메라가 언젠가는 양쪽 모두에게 답을 줄 것이라는, 어떤 믿음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영화가 완성되고 공개된 이후, 채영은 GV에서 영화를 통해 깨달은 사실 하나를 이야기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상옥의 눈빛이 그렇게 애틋한 줄 처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을 보아왔지만 스크린을 통해 새롭게 자각하게 된 엄마의 시선이다. 딸은 그 시선을 경유해 자신의 얼굴 또한 새롭게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중간에는 인서트컷으로 수영장 물속에 잠겨있는 채영의 얼굴이 잠시 등장한다. 이 이미지는 그가 최근 쓴 자서전 『이것도 제 삶입니다』의 표지로 사용된 사진이기도 하다. 눈을 감은 채영의 얼굴이 사뭇 편안해 보인다. 모녀 관계란 엄마의 뱃속에서 하나였던 두 몸이 별개의 개체로 분리된 직후부터 시작되는 분투의 여정이다. 채영은 이제 스스로의 삶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짐으로써, 새롭게 자각한 얼굴을 가짐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숨쉬는 법을 배우고 있는 듯하다. 영화의 엔딩은 채영과 상옥이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다. 간단하게 차린 제사상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술잔을 들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명복을 빈 뒤 상을 맞들고는 거실로 옮긴다. 죽은 부모를 위한 제사상은 살아있는 두 모녀의 아침식사를 위한 식탁으로 역할이 바뀐다. 이 식탁을 내리사랑의 은유로 읽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에 식탁이, 어쩌면 둘 사이의 공간이, 그렇게 언제든 임시적인 거처일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가 그러하듯이, 식탁은 두 타인의 사이에 잠시 어떤 공간을 마련해준다. 너무 크고 거창하지만 않다면, 둘러앉은 이들이 이렇게도 차려보고 저렇게도 차려볼 여지가 있다면, 식탁은 예절과 격식의 자리만이 아니라 적당한 환대와 우정의 자리도 될 수가 있다. 네모난 식탁을 사이에 두고 채영은 상옥과의 관계에 대해 잠정적 결론을 내려본다. “평행성도 좋지, 나란히 가는 거니까.” 평행선이 그려지는 곳에서 두 존재는 억지로 겹치거나 지나치게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거리에 서로를 두고서 오랫동안 같은 방향을 향해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비비언 고닉 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지탱해줄 튼튼하고 평평한 식탁 같은 것. 어떤 가족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사랑이나 헌신이 아니라, 바로 그런 중간지대의 존재다.
“(밀레니엄 세대가) 성인기에 이르는 과정은 지연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극단적인 경제 구조 조정, 심대한 문화 변동, 깊은 사회 불평등 때문에 근원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1) 사회학자 제니퍼 M. 실바는 미국의 밀레니엄 세대 100명을 인터뷰를 통해 연구한 저서 『커밍 업 쇼트』에서 위와 같이 적고 있다. 물론 2010년대 미국의 청년들과 2020년대 한국의 청년들을 일대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리스크풀링(Risk-pooling)이라는 사회안전망의 축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산업 노동계급의 쇠락, 급속한 문화 변동 2) 등 실바가 꼽은 문제점은 지금의 한국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 『커밍 업 쇼트』의 국내 서평들은 88만원 세대, N포세대, 흙수저, 헬조선 같은 단어들을 사용해가며 국내 청년의 상황을 책의 내용과 비교하고 있다. 미국의 청년들이 그러한 것처럼, 한국의 청년들 또한 독립, 취업, 결혼, 육아 등 전통적으로 성인기라 여겨지는 단계에 접근하는 것이 지연되고 있다. 이는 수준미달(Coming Up Short)의 개인들 때문이 아니라 수준미달의 사회와 제도 때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분석이다. 더 나아가 실바는 성인기가 “극적으로 새롭게 상상되고” 있다며, 전통적인 성인기의 지표들 대신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한 “고통의 치유를 성인 정체성의 기반” 3) 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홍다예 감독의 < 잠자리 구하기 >(2022)는 입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불안에 관한 고백이다. 고3이었던 2014년 입시생활에 관한 다큐멘터리 < 시발 .>(2014)을 시작으로 <개새끼>(2016), <관종쓰레기>(2018) 등으로 이어지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하나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감독은 고3 시기 학교에서 마주한 잠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창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반복해서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던 잠자리는 결국 떨어져 죽었다. 감독은 자살을 위해 찾은 한강 다리 위에서 그 잠자리를 떠올렸다고 고백한다. 대학은 지긋지긋한 입시생활의 탈출구로 여겨짐과 동시에 학생들을 구속하는 유리벽이기도 하다. <잠자리 구하기>는 “대학에 간다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긴다.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며,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감독과 친구들은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재수생활을 하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음에도 또다시 좌절을 경험한다. 대학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던 말들은 허상이었음이 드러난다. 대학에 간다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새로운 불안의 시작임을 깨닫는다. 자신을 규명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학생들은 성적과 대학의 이름으로 자신을 정의하기 시작한다. 각자의 상황을 토로하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절망과 불안을 토해낼 뿐 아무런 논의도 서로에 대한 공감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잠자리 구하기> 속 친구들은 서로의 불안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만, 그것을 서로 해소해줄 수 없다. <잠자리 구하기>는 < 공부의 나라 >(2015)와 같은 다큐멘터리처럼 입시 제도를 분석적으로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다. 고3, 재수생, 대학 신입생, 20대 중반인 현재 등 다양한 시간대의 모습이 계속하여 교차되는 영화의 형식은 ‘입시’와 ‘대학생활’이라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도 않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그러한 불안을 떨쳐내고 마침내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성장담도 되지 못한다. 감독 자신은 이 영화를 “20대 청년의 인류학적 반(反)-성장 보고서” 4) 라 말하고 있다. “잘 지내지 못한다는 고등학교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라는 시놉시스가 무색하게, 이 영화는 결국 편지를 부치지 못했다는 고백을 포함하고 있다. 불안 속에 놓여 있는 감독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다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이 영화로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촬영된 감정을 유일한 진실로서 제시한다. 홍다예 감독과 친구들이 입시 과정에서 어떠한 실패와 성공을 경험했는지는 그저 그들이 경험한 사실의 기록으로서 제시될 뿐이다. <잠자리 구하기>가 제시하는 기록은 입시라는 과정 속에서 경험한 사실들의 진술이 아니라,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적된 감정들이다. 자기 파괴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날것의 감정들을 파헤치고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반-성장을 고백한다. 이는 원하던 대학에 진학했음에도 여전히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끝없이 성장기에 머무를 뿐 성인기에 도달할 수 없는 청년의 초상이기도 하다. 대학 진학이라는 지표는 여전히 강력한 성인기의 지표임과 동시에, 너무나도 추상적이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반-성장을 고백하는 또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있다. 푸른영상에서 제작한 이효진 감독의 < 가단빌라 >(2022)다. 이 영화 또한 감독 자신의 자살사고를 고백한다. 흑백 화면의 작은 공원에서 시작한 이 영화는 한 빌라의 문을 열고 들어가 빌라 꼭대기의 집으로 향하는 카메라의 이동에서 시작된다. 그곳은 이효진 감독이 26년을 살아온 공간이다. 이어지는 장면 속 내레이션은 14살 때 부모를 대신해 빚쟁이들의 전화를 받으며 자라왔고, 그렇게 10여 년간 이어진 불행 속에서 자살충동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감독은 불행 속에서 살아온 할머니 또한 자살을 생각했을지 궁금해 카메라를 들었다고 영화 속에서 밝히고 있다.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지만, <가단빌라> 속 대부분의 푸티지에서 감독의 목소리는 삭제되어 있다. 할머니나 어머니 등과 감독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감독의 말은 사운드에서 지워진 채 자막으로만 처리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카메라 뒤로 자신을 잔뜩 숨긴 채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효진 감독은 ‘손녀’이자 ‘딸’로서 할머니와 어머니 앞에 서 있지만, 목소리를 지움으로써 온전한 관찰자의 위치로 물러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효진 감독의 모습은 가끔씩 등장하는 내레이션으로, 흑백 화면의 영화 속 몇 안 되는 컬러 화면의 홈비디오 영상으로만 등장한다. <가단빌라>는 할머니를 비롯한 여성 가족구성원들의 일상을 관찰한다. 이 일상에는 부동산과 돈의 문제를 두고 격앙된 목소리로 싸우는 가족구성원들의 모습 또한 포함되어 있다. 내레이션이 아닌 이효진 감독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는 화가 난 할머니가 칼을 드는 장면이다. “할머니 칼 들었어”라는 감독의 말은 감독이 자신의 목소리를 삭제함으로써 결심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배반하며, 자신에게 내포된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가단빌라>는 가족이 왜 싸우는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살아왔는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부동산과 돈의 문제가 전면화되는 다른 작품, 이를테면 마민지의 < 버블 패밀리 >(2016)와 같은 작품들이 IMF를 비롯한 국가적, 사회적 사건들을 끌어오고 뉴스화면 등을 차용하며 가족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해설하는 것과 대비된다. 다만 관객들은 어렴풋이 그 문제들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가족의 생계와 함께 육아와 가사노동까지 책임져야 했던 할머니의 과거, 딸의 기여를 무시하고 아들에게 먼저 이익을 물려주려는 할머니의 태도, 끊임없이 재산을 ‘날려먹음’에도 반성하지 않는 집안의 남성들. 한국 특유의 부동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이 영화의 내부에서 맴돌고 있지만, 이효진 감독의 카메라는 그곳에 집중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집안의 남성들을 거의 담아내지 않는다. 종종 프레임 속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할머니와 어머니의 말속에서 등장할 뿐이다. 이 영화는 집안을 말아먹고 감독에게 불안감을 심어준 가장 큰 이유가 되는 인물들을 담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온 여성 가족구성원에게 주목한다. 마치 “이런 끔찍한 집안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무엇인가요?”라며 묻는 것처럼. 영화의 제목인 ‘가단빌라’는 감독이 거의 평생을 살아온 집이다. 동시에 "집을 지어 성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할머니의 말처럼 자본주의적 성공의 지표이고, “삼촌이 말아먹을 수 있는” 투자가치를 지닌 상품이자,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싸움터이다. 가단빌라라는 공간에 담긴 한 가족의 역사와 정동, 수준미달의 사회와 제도가 만들어낸 집이라는 전쟁터는 반-성장을 추동한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단빌라의 평면도 위로 가족의 사진을 오버랩시키는 장면은 영화가 담아낸 반-성장의 근원을 갈무리하고 있다. <잠자리 구하기>와 <가단빌라>의 반-성장 서사는 그것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잠자리 구하기>의 마지막에서 홍다예 감독은 물에 빠진 잠자리를 나뭇가지로 건져 올려 구해낸다. <가단빌라>는 흑백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카메라 뒤에 숨어 있던 감독이 다시금 목소리를 내고 푸른색 하늘을 담아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모종의 결심이 담겨 있다. 혹은 그 모든 것을 견디고 자신이 아직 버티고 있다는 증거로 각자의 영화를 제출해낸 것만 같다. 실바의 말을 다시금 빌리자면, 두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 (정신적) 병리 현상의 숨겨진 원천을 찾고, 타인들과 의사소통하면서 겪은 고통의 이야기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해방되고 독립된 자아를 형상함으로써 과거를 극복” 5) 하는 것이다. 실바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마크 피셔는 『커밍 업 쇼트』의 논의를 확장하는 글 [반-치료]에서 실바의 분석이 "치료 서사는 더 이상 제도에 의지해 개인을 뒷받침하고 보살필 수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부여해 주는 유일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며, “치료 서사의 확산은 의식 고양 운동이 야기한 분자 혁명을 억누르고 개인화한 한 방식” 6) 이라 덧붙이고 있다. 두 영화가 각각 보여주는 우정의 붕괴와 가족의 파괴는 한 개인과 한 가족의 실패라 치부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감독은 그럼에도 살아있고 그럼에도 살아가며 카메라를 들고 자신과 친구들, 가족들을 찍는다. 두 영화는 그 실패 속에 놓여 있는 개인(들)에 집중하고, 각 개인이 놓인 상황에 관한 분석보단 감정의 기록을 택함으로써, 그 이면에 있는 사회와 제도를 생각하게끔 한다. 실바는 “이들이 성인이 된 이야기는 여전히 전개 중이며 이들의 미래는 아직 다 쓰이지 않았다.” 7) 며 책을 마무리한다. <잠자리 구하기>와 <가단빌라>는 90년대에 태어났고 2010년대에 성인이 되었지만 2020년대까지 성인기를 지연시키고 있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일기장이다. 이제 그 일기의 이면을 상상하고, 두 영화의 마지막이 내미는 손을 잡을 차례다. *** 1) 제니퍼 M. 실바 「커밍 업 쇼트」, 문현아, 박준규 옮김, 리시올, 2020, 32p. 2) 제니퍼 M. 실바, 같은 책, 38~38p. 3) 제니퍼 M. 실바, 같은 책, 33~35p. 4) 이우빈, "JeonjuIFF #2호 [인터뷰] 20대 청년의 반성장 보고서, '잠자리 구하기' 홍다예 감독", 씨네21, 2022, 출처: www.cine21.com/news/view/?mag_id=100062 . 5) 제니퍼 M. 실바, 위의 책, 50~51p. 6) 마크 피셔, "반-치료", 박진철 옮김. https://playtime.blog/2020/10/22/반-치료/ 7) 제니퍼 M. 실바, 위의 책, 28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