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전
- 감독
- 문지선, 최우형, 강두원
- 제작년도
- 1998
스페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을 꼽으라고 질문한다면 가장 먼저 대답할 이름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일 것이다. 첫 영화 개봉 이후 올해로 데뷔 41년을 맞은 그는 평균적으로 2년에 한 번씩 신작을 내놓으며 필모그래피를 꾸준히 확장하고 있다. 감독의 영화적 유니버스는 더욱 거대하고 견고해졌으며 이제는 많은 일반 관객을 그의 세계로 견인하고 있다. 알모도바르의 악동 기질이 드러나는 초창기 키치 영화는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약과 동성애 등 자극적인 소재와 묘사 또한 이에 한몫했다. 그러나 근래 작품들은 내러티브나 표현방식이 순화되고 세련되어졌다. 감독의 연륜과 함께 그의 영화도 성숙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일관된 관심이 여성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감독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상정한 영화에서 남성을 부재하거나 있어도 무능한 안타고니스트로 묘사한다. < 내가 뭘 잘못했길래 >, < 하이힐 >, < 귀향 >의 남편들은 폭력적이고 외도를 일삼아 아내와 딸에게 죽임을 당한다. <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에서 유일한 여주인공의 희망인 아들은 교통사고로 죽고, 남편과 친구는 성전환을 해서 가슴을 달고 나타난다. 심지어 수녀 로사의 아버지는 치매 환자다. 반면 여성은 외연의 유약함에도 불구하고 내면이 강인하고 억척스러운 캐릭터로 묘사된다. 여성들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남성으로부터 물리적, 정신적으로 독립해낸다. 오늘날 독립적 여성 캐릭터는 이미 정체성을 완고히 하고 있지만 80년대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들의 설정은 파격적이었다. <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에서 자신을 임신시키고 떠난 남자의 목숨을 구한 뒤 당당히 이별을 고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는 짜릿함 마저 느껴진다. 알모도바르는 여성이 자식과 어머니에게 갖는 애정을 최상위의 감정으로 생각함이 틀림없다. < 하이힐 >, < 귀향 >, < 줄리에타 >는 십여년 동안 떨어져 지낸 모녀의 관계를 기반하고 있다.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바라는 사랑과 그것의 결핍으로 인한 그리움, 비뚤어진 질투까지, 모녀가 느낄 수 있는 회환을 다각도로 그려낸다. “마약 중독자가 한번 약에 다시 손을 대면 몇 년을 끊고 살았더라도 다시 빠져들고 말지. 오랫동안 네 생각을 참으며 지냈지만 널 찾을 희망에 다시 빠져버렸어. 그 바보 같은 희망이 힘들게 쌓은 새 인생을 산산이 조각내버렸지. 내겐 남은 게 없어. 너만 존재할 뿐. 네가 없다는 공허함이 내 삶을 파괴하고 있어.” <줄리에타> 줄리에타의 일기 중. “난 평생 엄마를 따라하며 살았어요. 엄마가 떠난 이후로 모든 면에서 엄마랑 경쟁하려 했다고요. 하지만 단 한 번 내가 이겼었죠. 마누엘! 난 그와 결혼했죠. 엄마가 할 줄 알았는데! (…) 어렸을 때 난 귀찮게 하는 것 밖에 못했어요. 하지만 그때조차도 늘 엄마를 돕고 싶었다고요. 엄마를 너무 좋아했으니까.” <하이힐> 레베카 대사 중.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가슴 한쪽에 켜켜이 눌려있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남편에 대한 결핍은 영화의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 아픔일 것이다. 알모도바르 영화 속 여성들은 이 아픔을 다시금 여성간의 연대를 통해 극복한다. 동질감, 모성애로 응축된 그들의 의리는 남성들이 외치는 의리보다 더욱 소리 없이 끈끈하고 질기다. 여성들이 소파에서 모여 수다를 하는 장면들은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알모도바르는 미장센에 무척 공을 들이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80년대의 작품을 근래에 다시 보더라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주인공들의 의상과 세트, 그리고 갤러리에 와있는 듯한 회화의 향연은 내러티브에 종속되어 있는 영화를 거부라도 하는 듯 시각적으로 환기를 준다. 게다가 빨강, 파랑, 초록 등, 원색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애정을 넘어 집착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는 퀴즈,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이 타는 자동차의 색깔은? 눈치챘겠지만 정답은 빨강이다. <하이힐>의 저명한 아나운서 레베카(빅토리아 아브릴 扮)가 타는 차, <귀향>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扮)의 어머니가 트렁크에 숨어있던 차, < 브로큰 임브레이스 >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가 죽음을 맞이하는 차, <줄리에타>의 줄리에타(엠마 수아레스 扮)가 떠난 딸을 찾으러 갈 때 타는 차 등. 인물의 상황에 따라 기종은 달라지지만 여주인공의 승용차가 빨간색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감독은 종종 버드 아이즈 뷰로 도로를 지나는 여주인공의 자동차의 모습을 담는다. 특히 초록이 우거진 숲길을 종과 횡으로 지나는 빨간 자동차 장면은 보색의 대비로 더욱 잔상이 각인된다. 빨간 자동차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시대와 장르를 그야말로 종과 횡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관념이 아닐까? 빨간 자동차와 함께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영화를 연결하는 유니버스로 시야를 확장해보자.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반복적으로 다시 출연시키며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감독들은 새로운 배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특정한 배역을 더욱 진짜처럼 믿게 하고 싶어서 혹은 뉴 페이스를 통해 새로운 분위기로의 전환을 꾀하기 위해서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발굴한다. 그러나 알모도바르는 일루전의 고조나 분위기의 전환보다는 자신만의 색을 더욱 강조하는 편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의 영화에서는 주연부터 단역에 이르기까지 전작에서 봐온 익숙한 배우가 늘 다시 등장한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세실리아 로스, 페넬로페 크루즈, 카르멘 마우라, 마리사 파레데스는 대표적인 감독의 페르소나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 라이브 플레쉬 >에서 버스에서 아기를 낳는 창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임신한 연약하고 순수한 수녀, <귀향>에서 억척스럽고 강한 엄마,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매력적인 여배우를 연기했다. 변화무쌍한 역할이 무색할 정도로 수려한 연기를 보여준 그녀는 모두가 손꼽는 대표적인 알모도바르의 페르소나이다. 초기작 < 나쁜 버릇 >에서부터 꾸준히 등장했던 고(故) 커스 람프리브는 엄마, 할머니, 이웃 등 단역으로 출연하며 웃음을 주는 씬스틸러이기도 했다. 마블의 팬들은 마블 유니버스가 총 망라되어있는 < 어벤져스: 엔드게임 >에서 히어로들이 한 명씩 등장할 때마다 반가움의 환호성을 질러봤을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팬들 역시 그의 영화에서 새로운 캐릭터로 분하는 친근한 배우를 보며 가슴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배우를 통해 감독의 전 작품들을 상기하다보면 어느새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에서 유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페르소나 컨벤션 외에도, 감독은 독특한 방식들을 통해 자신의 전작들을 연결한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와 마테오 블랑코(루이스 호마르 扮)가 찍은 코미디 <여인과 가방>은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영화의 말미에 <여인과 가방>의 편집본을 다시 보는 장면에서 비로소 관객들은 알모도바르의 그로부터 20년 전의 개봉작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의 장면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며 무릎을 탁 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종국에 친구가 된 마뉴엘라(세실리아 로스 扮)와 위마 로조(마리사 파레데스 扮)는 3년 뒤 < 그녀에게 >에서 야외공연 관람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통해 깜짝 등장하기도 한다. 마치 관객에게 그녀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며 근황을 전해주는 것 같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아들 방에 걸려있던 피나 바우쉬의 포스터는 <그녀에게>의 베니그노(하비에 카마라 扮)의 손에 들려 다시 한번 영화는 연결된다. <욕망의 법칙>에서는 영화 감독인 파블로(유세비오 폰셀라 扮)를 통해 장 콕도의 희곡 <휴먼 보이스>에 대한 애정을 단편적으로 대리하게 하지만 13년 뒤 < 휴먼 보이스 >를 내놓으며 애정에 방점을 찍는다. 이처럼 감독은 자신의 영화, 인물, 오브제, 그리고 소재 등을 자신의 작품에 재투영하며 전작과 연결고리를 채운다. 악동과 성자, 고집불통과 재기발랄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은 알모도바르의 유니버스는 다음편에서도 계속된다. 3부작으로 구성된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의 1편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는 여기까지다. 앞으로 2편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3편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현실의 순환」가 연재된다. 나가며... “돌아온 과거와의 우연한 만남이 두려웠지. 내 삶이 흔들릴까봐. 추억으로 가득한 그 밤이 두려웠지. 내 꿈이 뒤 엉킬까봐. 하지만 도망치던 나그네는 곧 발길을 멈추리라. 모든 걸 앗아간 망각이 내 오랜 망상들을 죽였다 해도 내 마음속엔 아직도 실낱 같은 희망이 남아있지. 귀향. 주름진 이마 세월의 눈이 쌓인 백발이 되어 귀향을 하네. 인생은 한 순간. 뜨거운 눈빛은 널 찾아 그림자 속을 헤메고 생각하면 눈물만 흐르는 달콤한 추억에 의지해 내 영혼은 힘을 얻네 ” <귀향> 라이문다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 《귀향》의 가사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
< 기생충 >( 봉준호 , 2019)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자 국내외에서 극찬에 가까운 호평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대는 고조됐다. 더군다나 이번 영화는 < 설국열차 >(2013)나 < 옥자 >(2017)를 경유해 다시금 온전히 대한민국, 그 토착적 세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유독 한국적 삶을 풍속화처럼 포착해낼 때 지니는 생기와 활력, 치밀하고 지적으로 구조화된 영화적 세계 속에서 몽타주처럼 충돌하는 캐릭터들의 동물적이고 모순적인 에너지들의 조합(용맹과 불안, 선함과 악함, 잔혹과 연민)이 매혹적이다. 흡사 제목에서부터 김기영 과 이마무라 쇼헤이의 검은 마성과 육식동물의 괴이한 에너지를 연상케했던 이 작품, <기생충>에 대해 지금 시점에서 또 하나의 찬사를 보내는 것은 이젠 지루한 일일 것이다. 다만, 이 영화를 본 이후에도 지워지지 않았던 몇 가지 잔상들, 혹은 질문들은 남아 있다. 상징 혹은 페티시 “돌은 왜 그렇게 껴안고 있냐?” “이거요? 얘가 나한테 자꾸 달라붙는 거에요. 진짜로요. 얘가 자꾸 날 따라와요.” 폭우와 함께 역류하던 검은 오수가 기택의 가련한 반지하를 삼켜버리던 그 순간, 기택의 가족은 뭐라도 챙겨 이 집을 빠져나가야 하지만 정작 건져낼만한 무언가를 찾지 못한다. 기정은 다 체념한 듯 성난 짐승처럼 검은 물을 뿜어대는 변기를 누르고 앉아 담배나 태워야하고, 기택은 비루하기 그지없는 물건 몇 가지를 챙겨 어깨에 지고 두리번거릴 뿐이다. 그런데 이 순간 기우는 특별한 것에 사로잡힌다. 얼마 전 민혁으로부터 건네받은 산수경석, 그 수석이다. 재물과 합격운을 가져다준다는 그 돌을 건네받았을 때 기택은 “참으로 시의적절하구나”라고 감탄했고, 기우는 “상징적”이라고 응수했다. 삶의 모든 흔적들이 검은 물속으로 가라앉던 그 순간, 기우는 하필 그 산수경석 하나를 쥐고 나와 대피소에서 잠을 청할 때 조차 끌어안고 있던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각인의 기제로서 그 돌이 중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민혁은 초반에 사라지지만 계속 관객 눈앞에 어른거려야하는데 그 장치가 돌이다. 기우는 돌을 들고 있지만 사실은 깔려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 <기생충>에서 돌이 처음 이 집안으로 들어오던 순간에는 집중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사라졌는가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에필로그에 가까운 이 영화의 후반부에 산수경석은 망상에 가까운 기우의 내래이션(새로운 계획)이 시작되는 즈음, 어느 계곡 물 속에 조심히 놓여진다. 살해현장에 있었을 그것이 어떻게 기우의 손으로 되돌아갔는지, 왜 그 돌은 기어이 기우의 “계획”이 또다시 언급되던 순간에 계곡에 놓여져야만 했는지 감독은 구지 설명하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적 매력 중 하나는 이러한 서사적 구조 속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쉽게 눈에 띄진 않지만 치밀하게 서사적 변곡 지점에서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모티브가 있는 것이다. 가령 < 마더 >(2009)에서 엄마의 처연한 춤사위와 작두질(오프닝 타이틀 시퀀스, 후반부 고물상 노인의 살해 후 형사의 방문, 엔딩 관광버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 ‘산수경석’ 혹은 그저 무거운 돌덩이에 불과한 이것은 계획과 실패, 망상과 현실, 상징과 페티시가 작동하는 결정적 순간마다 기묘하게 움직인다. 그렇다면 그 돌은 왜 그 자리로 되돌아가야만 했는가? 서사의 필연성 보다는 감독의 무의식 혹은 의지에 가까운 이것은 정작 ‘상징적’이라고 찬탄하던 기우에게는 ‘물신(페티쉬)’으로 작동하고, 영화적 차원과 관객에게는 그야말로 하층 노동계급의 부재하는 ‘계급의식’과 망상(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물신은 존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거기 있다’고 믿는 환상의 구조(프로이드적 의미의 물신)이며 혹은 이데올로기적 효과(맑스적인 의미에서의 물신)이다. 한갓 돌덩어리에 불과한 이것에 대해 기우는 소망을 투사하고 주술적 효과를 기대한다. 당연히 그것은 실패한다. 현자의 돌, 반복된 실패 기우에게 그 돌, 산수경석은 흡사 연금술사들이 소망했던 “현자의 돌(철학자의 돌)”처럼, 결코 이룰 수 없는 소망 혹은 반복된 실패의 상징이다. 그 상징의 한 가운데 민혁이 존재한다. 앨리스의 빨간 토끼처럼 기우네 가족을 절망적 심연으로 안내하고 사라지는 민혁은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기우에게 계속 따라붙는 이름이다. 곤경 속에서 조차 ‘민혁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되뇌이던 그는 지속적으로 민혁을 모방한다. 그의 말을 따라하고(다혜에게 정식으로 사귀길 청하겠다는 것), 기세를 모방하고(노상방뇨하는 남자를 응징하는 것), 판단을 추정한다. 그러나 기우가 소망했던(물신화했던) 주술적 마법은 작동하지 않고, 그 돌은 그저 기우가 감당하지 못할 계획이나 폭력의 수단으로만 소용되며 그것마저도 번번이 실패한다. 영화 속에서 기우는 자신의 기세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 돌을 두 번 들고 나선다. 처음엔 반지하 창 밖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남자를 응징하기 위해 들고 나서지만, ‘오버한다’며 제지하는 아버지에 의해 돌은 ‘물벼락’으로 대체된다. (이 응징은 폭우와 수해가 되어 고스란히 그들에게 되돌아온다) 두 번째 순간은 다송의 생일파티, 2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순간에 등장한다. 그 돌이 자신에게 따라 붙어왔다고 믿는 그는 무모한 계획의 수단으로서 그 돌을 들고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돌은 그의 손에서 결국 미끄러져나가고, 감독의 말처럼 그는 결국 돌에 의해 깔리고 만다. 기우는 실패한다. <기생충>에서 그것은 거의 필연적인 결정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서 여러 순간 반복되는 “계획”이라는 단어는 실패의 동의어로 간주되며, 심지어 봉준호 감독은 기우가 계획과 소망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마다 냉혹하리만치 그것은 불가능한 현실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듯 다음 장면을 이어간다. 이 영화에서 기우가 자신의 은밀한 소망을 입 밖으로 꺼내는 두 번의 순간은 그래서 중요하다. 첫 번째 순간. 박사장 가족이 캠핑을 떠나자 기우네 가족은 그 부르주아의 저택을 제 집인양 향유한다. 그 쾌락과 모방의 놀이가 한밤중의 거친 술판으로 이어졌을 때, 기우는 다혜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것은 민혁이 그에게 고백했던 다혜에 대한 감정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대학교 들어가면 정식으로 사귀자고 하려고요.”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기우는 기정에게 “만일 이 집이 우리게 된다면”이라는 소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순간 이들의 부르주아적 삶의 망상은 예의 초인종과 함께 깨져나간다. 이른바 실재(the real)의 침입, 문광의 방문과 함께 새로운 지하공간이 열리는 그 순간 그들이 맞닥뜨리게 된 현실은 또 다른 하층 노동계급과의 적대와 경쟁이다. 그리고 더한 공포는 그들이 끊임없이 착하다, 좋은 분이다, 존경한다, 죄송하다고 읊조렸던 주인의 귀환, 진짜 부르주아의 당도와 함께 펼쳐진다. 선을 넘어버린 한밤중의 환상게임은 이내 당도한 ‘현실’과 함께 이 영화에서 가장 격렬하고 극적인 움직임들을 만들어낸다. 욕설과 폭력, 경쟁과 적대, 굴욕과 비참이 교차하는 이 활극은 부르주아의 교만과 섹스를 치욕적으로 참아내고 숨어야만 했던 거실 탁자를 벗어나는 순간 잠시 멈추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봉준호 감독이 이들에게 상기시키는 현실의 지위는 벌레처럼 기어 나온 저택으로부터 저 아래 반지하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하강 혹은 추락의 스펙터클(폭우와 와이드한 롱숏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비감),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절망의 또 다른 현장이었다. 수해로 잠겨버린 반지하의 처참한 몰골. 이들이 직면한 현실의 창은 겹겹이 처참하며,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비참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스펙터클로 전유된다. 에필로그, 도착하지 못할 편지 “아버지 저는 오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근본적인 계획입니다. 돈을 벌겠습니다. 아주 많이. 대학, 취직, 결혼 다 좋지만 일단 돈부터 벌겠습니다. 돈을 벌면 이 집부터 사겠습니다. 이사 들어가는 날에는 저는 엄마랑 그냥 정원에 있을게요. 햇살이 워낙 좋으니까요.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기우의 소망이 실패할 것임을 확정하는 두 번째 순간은 기우가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를 통해서이다. 이 편지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패할 것이지만, 더 큰 실패는 그 계획이 역시 부질없고 무모하며 무능한 것임을 확정하는 영화적 수사학을 통해 드러난다. 기우가 아버지에게 새로운 계획을 진술하는 순간 영화는 침잠된 톤으로 어쩌면 기우가 정말로 그 소망을 이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후일담 같은 이미지를 제시한다. 부동산 업자의 디테일한 호들갑, 조심스레 지하 계단을 올라오는 기택, 그리고 쏟아지는 햇살아래에서 말없이 이루어지는 재회. 그러나 이내 롱숏으로 아득하게 포착되는 그 재회는 다음 컷과 함께 현실로의 귀환을 촉구한다. 서서히 틸다운 되는 카메라는 반지하, 지상의 발아래 놓인 창과 그보다도 더 아래에 앉아있는 기우를 비춘다. 도달할 수 없는 편지를 읽고 있는 기우의 얼굴에서 우리는 그의 소망과는 정반대의 무력하고 비루한 실패자의 얼굴을 마주한다. 이 영화의 오프닝과 정확히 대구를 이루는 이 장면에서 기우는 여전히 발아래 세상, 양말과 변기 따위가 그나마 이 집의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할 수 있는 그런 현실로 다시금 돌아와 있는 것이며, 기우의 소망 이미지는 망상으로 확정되며 괄호 안에 묶여버린다. <기생충>은 계급상승이라는 비천한 욕망을 허용하지 않으며, 전복의 정치학은 상정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에필로그를 구성하는 감독의 선택 및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소소한 궁금증. 박사장에 대한 죄의식을 지닌 기택은 왜 현실적 단죄(사법적 처벌과 수형생활)보다 더 가혹한 지하 공간에 스스로를 감금해야만 했는가. 물론 이 선택은 공간의 정치학과 생존 게임으로 표명되는 이 영화에 있어서 보다 완결적이고 맞추어진 퍼즐(또다시 누군가 그 공간으로 전락해야만 하는 게임)처럼 보인다. 그리고 기우의 웃음. 몇 달 만에 의식을 회복한 기우는 얼마간 계속 웃는 표정을 짓는다. 병원 병상에서, 재판정에서 그리고 심지어 여동생의 영정을 마주하는 그 순간조차 그는 웃어야만 한다. 흡사 < 올드보이 >( 박찬욱 , 2003)의 엔딩에서 웃고 있던 오대수의 그것처럼, 기우의 웃음은 그가 직면한 현실과 충돌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우의 다음 선택지. 그는 왜 그 잔혹한 공간(대저택)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반복적으로 조망해야만 했는가(물론 영화에서 아버지의 모르스 부호는 그에게 전달되어야만 했기에), 왜 에필로그에서 여성들은 지워지고 아버지와 아들의 목소리와 정감에 집중하는가, 왜 산수경석은 그의 부질없는 계획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계곡 물 속에 다시 놓여져야만 했는가, 그리고 왜 기우의 망상은 괄호 안에 가둘 것임이 명백함에도 화면 안에서 관객들을 잠시 오인케 하며 재현되어야만 했는가. 사실 이러한 소소한 질문들은 장르적 구조를 침입해오는 현실적 실체들과의 긴장 속에서 생겨난다. 통상적인 장르 영화 속에서라면 사건이나 캐릭터의 극단성, 현실적 인과론 따위는 크게 질문되지 않는다. 장르적 포뮬라와 컨벤션 속에서 영화는 인위적 실체와 쾌락으로 간주되면 완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는 자꾸만 장르와 부딪히는 현실의 틈입, 그 사이 공간을 비집게 된다. 장르적 구조 안에서 창조된 현실적(비장르적) 인간의 캐릭터들, 일루전과 인공적 구조물로만 간주할 수 없게 만드는 감독의 집요하고도 정치한 현실적인 질문들. 부조리한 세계를 장르적으로 치환하되 극장 밖까지 짊어지고 가게 만드는 윤리적인 질문들, 불안의 감각들. 이 틈입 속에서 <기생충>은 자꾸만 영화에서 말해지지 않은 어떤 것들 혹은 감독이 구지 선택해서 제시했던 장치들에 대해 그 선택의 의지 혹은 무의식은 무엇이었는지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다. 계급 도식과 엑조티즘 <설국열차>와 <기생충>은 전면적으로 계급 문제를 제기한다.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질주하는 기차칸의 위치로 계급을 위계화하고 지배와 피지배, 저항과 억압, 절망과 희망의 문제를 배치했던 <설국열차>와 달리 이번 영화 <기생충>은 동시대 한국사회, 극단적 계급적 분할과 기시감 있는 현실의 풍경들을 절묘하게 교차시키며 서사를 구성한다. 그런 점에서 분명 <기생충>은 한국 관객에게 보다 촉각적인 풍경들이지만, 동시에 계급 재현의 전략에 있어서는 엑조티즘에 가까운 풍경과 타자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부르주아 엑조티즘(박사장 저택의 와이드한 공간과 값비싼 소품들) 혹은 프롤레타리아 엑조티즘(반지하를 가득 채운 빈곤의 흔적들. 방바닥의 끈적거림, 벌레와 소변)으로 간주될 수 있는 두 계급 공간의 시각적 재현은 이 영화에 응축된 공간의 정치학 혹은 계급 정치학을 위한 미장센이자 표상이지만 한편으론 관람자 위치에서 그 극단적 어느 계급과도 동일시 할 수 없는 미묘한 거리감 또한 만들어낸다. 이 영화가 기택네 가족 특히 기우를 중심으로 안내되는 카메라의 동일시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아마 이들이 영화적 사건을 통해 계급 의식을 성취해가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질서와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순응하고 포획된 주체들로 재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본질적 모순이 아니라 지배질서가 유포한 관념과 경쟁의 틀 속에서 말초적으로 반응하고 오인하는 자본주의의 선한 주체(good subject) 혹은 무지한 주체들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본주의 내 본질적인 기생자들인 부르주아들을 선하고 존경할만하다고 오인하며, 같은 계급을 적대한다. 봉준호 감독은 지옥도 같은 신자유주의 대한민국의 보수화되고 무력화된 계급 군상을 포착하되, 그들의 저항이나 연대와는 선을 긋는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은 올해 < 미안해요 리키 >(2019)로 다시 돌아온 켄 로치 감독의 작품세계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물론 봉준호 감독과 켄 로치 감독은 잔혹한 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폭력 속에서 불행과 생존의 위기로 내몰리는 개인을 묘사하고 그 폭력의 구조를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켄 로치가 창조하는 영화적 주인공들은 사회적 구조의 희생자들이고 공감과 연대의 명백한 대상이다. 최근작이었던 <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나 <미안해요 리키> 뿐만 아니라 그의 오랜 필모그라피 속에서 주인공들은 자본주의 구조 내 착취당하고 소모되며 희생되는 개인들임과 동시에 서사와 함께 ‘각성하는 개인’ 혹은 ‘관객’을 유도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계급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전도된 관념들로부터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계급적 의식을 터득하는 과정으로서의 주체들로서 그들은 ‘계급의식’을 성취하는 것이다. (켄 로치 영화 속에서 가장 처참하게 현실을 묘사했던 작품은 < 네비게이터 >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속에서 하루아침에 경쟁관계로 내몰린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동료의 비참한 죽음을 방치한다. 그러나 관객은 동료 노동자의 죽음을 방관하고 방치했던 그들을 비난하거나 미워할 수 없다. 극중 인물들의 무력함과 죄의식은 영화가 끝난 후 고스란히 동시대를 살고 있는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이상하게도 이번 영화 <기생충>의 캐릭터들이 당면한 비극은 일정부분 타자화된다. <마더>에서 아들을 지키기위해 살인까지 저지른 엄마에게조차 동일시되고 연민했던 것과는 분명 다른 체감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미 대한민국 현실에서 충분히 목도하는 무한경쟁의 각축장, 계급에 무지한 채 이기적인 생존 감각으로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들을 혐오하고 밀쳐내는 일상의 풍경들에 지쳐 영화 속에서 그러한 그들을 다시금 목도하는 과정은 결코 편치 않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군상들은 정확히 현실을 반영하거나 혹은 인간의 본질을 장르적으로 변형하고 있지만 (계급이기 이전에 인간이 지닌 분열적이고 모순적인 측면들, 그 복잡한 내면들이 특정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욕망하는지에 집중하는 것), 그것은 분명 불편한 진실이다. 계급과 폭력,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는 이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봉준호 감독이 언급했던 작품들 속에서도 다양하게 묘사되어 왔다. 20세기 초반에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파팽자매 살해사건(하녀로 들어간 어린 자매들이 영문 없이 여주인과 그 딸을 참혹하게 살해한 사건. 이들은 살해의 이유에 대해 명백하게 밝히지 않았으며, 다만 재판정에서 “우리도 그들의 피부를 갖고 싶었어요”라는 말을 함으로써, 이른바 계급 살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언급된다.)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클로드 샤브롤의 < 의식 >(1995)에서 하녀의 돌발적 살해행각은 계급적 착취를 교양주의와 호혜의식, 선의로 위장하고 있는 부르주아의 위선에 대한 폭로로서 자행된다. 조셉 로지의 < 하인 >(1963) 역시, 사회적으로 주어진 계급적 지위가 집안 내부 공간에서 어떻게 주인과 노예의 역할과 위계를 만들어내는지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특히 이 영화에서 부르주아 여성이 하인을 모멸하기 위해 그의 냄새를 노골적으로 지적하고 비하하는 순간은 <기생충>에서 계급 냄새로 환기되는 것과 겹쳐진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감독의 계급 정치학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중반부를 지나, 폐쇄적인 집안 내부에서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역전되면서부터이다. 집안 내부에서 계급이 지워지는 순간, 노동능력이 없는 부르주아는 무능함과 의존성, 유약함으로 간주되고, 실질적 자기 재생산이 가능한 노동계급-하인은 권력을 쥐게 된다. 미카엘 하네케의 < 퍼니 게임 >(1997)은 계급 호러 그 자체이다. 이 영화는 감독의 “스릴러 장르에 대한 패러디”라는 말처럼 장르적 컨벤션을 위반하고 재구성하는 형식적 기교를 과시하지만 더욱 섬뜩한 것은 오히려 살해극의 동기가 오로지 ‘계급 적대’ 그 자체만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호러 장르의 공식을 계급 정치학으로, 장르 패러디로 구성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소재나 문제의식이라는 측면에서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과 일정 부분 흥미로운 지점을 공유하지만 새로운 장르 자의식과 형식적 수사학을 구성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장르적 요소들을 탈구시키지만 하네케처럼 과시적이거나 관객심리를 공격하지 않으며, 켄 로치처럼 계급의식을 성취하거나 연대하진 않으나 무력하고 비참한 상황에 내몰린 그들에 대해 연민하고 응시한다. 조셉 로지의 <하인>처럼 공간의 정치학과 흡사 제 3의 시선을 구성하는 유려한 카메라 워킹을 캐릭터화 하지만 캐릭터들의 내적 심리에 보다 밀착하고 동기화한다. <기생충>은 표면적으로 명백하고 이분법적으로 도식화된 계급세계를 묘사하는 듯하지만, 감추어진 지하 너머 그 심연의 공간처럼 자신만의 형식 언어가 층층이 구조화된 세계이다. 그 구조의 심연 속에서 영화사의 궤적을 향유한 시네필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 또한 그것이 어떻게 오리지널리티를 지닌 자신만의 수사학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를 해석하는 것은 꽤 흥미로운 작업이다. 역시 시네필의 영화는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어야만 한다.
<덩케르크>의 패착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에는 전장의 광기와 폭력 그리고 비극이 승리의 기념비를 위한 영웅적이고 애국적인 헌신으로 전화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전장의 ‘1일’을 채우고 있는 민간 선박에 관한 에피소드는 그러한 영웅적 서사로 가장 강력하게 수렴된다. 항구에 정박되어 있던 민간 선박에까지 국가의 징발령이 내려진다. 그러자 큰아들을 이미 이 전쟁에서 잃은 한 아버지는 해군에 배를 넘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직접 자신의 다른 어린 아들과 동네 소년까지 태운 채 전장에 참여한다. 그 와중에 동네 소년이 불의의 사고로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지만, 그 아버지는 소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배를 돌려 항구로 되돌아가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한 사람의 소년보다는 덩케르크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무수한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을까? 크리스토퍼 놀런은 영화의 말미에 결과론적으로 아버지의 선택이 옳았다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한 아이를 잃는 대신 더 많은 병사를 구했으며, 그 소년은 바라던 대로 마을 신문을 통해 영웅으로 보도되었다. 주제적 차원에서 <덩케르크>는 영웅과 승리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전쟁 드라마이다.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헌신, 마지막 사병 하나까지도 챙기고자 했던 전투 지휘자, 위험을 감수하고도 끝까지 전투기를 몰았던 전투 조종사.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에 내래이션되는 승리의 오마주들. 그런데 이 순간 불현듯 떠올라 크리스토퍼 놀런의 국가와 역사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압도해버리는 영화가 있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쇼헤이는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체제에 순응하고 동화할 수 없는 자)이 유년기 겪었던 국가와 권력, 아버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전쟁 중 일본 역시 자국 민간 어선들에 대한 징발을 명령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유일한 생계수단인 어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군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통 사정을 하게 된다. 이 장면을 목격한 주인공은 아버지를 굴복시키며 생존수단을 강탈하려는 군인들에게 달려들고, 결국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는 징발에 수긍하게 되는 장면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쇼헤이에게 국가와 전쟁은 결코 애국이나, 대의, 승리로 설명될 수 없는 실체이다. 전범 국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전쟁이 위정자들의 게임이이고 권력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 생활을 했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컷트 보네컷의 『제 5 도살장』에는 부제가 달려있다.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이다. 그가 전장에서 마주친 적군-악의 실체는 사실상 이제 막 13-4살을 넘긴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아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전장의 게임은 그 어떤 승리의 명분도 수립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탄식만이 가능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거대하게 몰려드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공포로 자폭을 선택했던 일본 병사들 역시, 죽음 직전에 엄마와 가족에게 편지를 남기며 울부짖었던 어린 소년들에 불과했다. 이스트우드는 그들이 자발적인 애국주의에서가 아니라 국가의 강요된 대의와 명분에 의해 이끌려왔음을 묘사한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의 길> 역시, 전장의 최전선에 서 있는 병사들이 위정자들 혹은 권력자들의 승리를 위한 비인격화된 수단들로 간주되는지를 냉혹한 게임처럼 묘사한다. 세상에 대한 성찰의 시선을 가진 거장들에 의해 그려진 전쟁은 적과 아, 승리와 패배, 정복과 굴복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다. 모든 전쟁은 불모한 폭력에 불과하며, 그 무수한 이름 없는 죽음들 앞에 그 어떤 승리도 영광도 존재할 수 없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가 무려 6만 5천여 명이 죽어간 전장을 승리의 기념비로 다시 써 내려가는 순간, 이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우매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것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에도 흥미로운 지점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 이 영화가 적어도 중반에 이르기 전까지 전장은 공격하는 자가 의해서가 아니라, 공격받는 자들에 관한 세계로서 묘사한다. 사실 주류 영화뿐만 아니라 서방세계에 의해 지배되는 뉴스 미디어, 드라마 등은 언제나 공격하는 자의 입장과 정당성에 입각해 서술되고 조작된다. 반면 <덩케르크>는 영화의 본편이 공개되기 이전부터 트레일러를 통해 전쟁에 관한 새로운 체험 감각(불안과 공포)을 제안하였다. 잔교에 운집한 병사들이 폭격기 소리와 함께 공포에 사로잡히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는 안타깝게도 언제나 본편보다는 트레일러가 더 훌륭하다). 실제로 영화의 초반부 및 잔교에서의 1주일을 묘사하는 많은 장면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청년(토미)의 불안과 필사의 생존 의지를 묘사하는데 충실하다. 무엇보다도 호이테 반 호이테마가 촬영한 와이드한 전장의 풍경들은 그 드넓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시한폭탄처럼 짹각거리는 스코어 사운드와 더불어 주인공 및 관객을 심리적으로 고립시키는 효과가 탁월하다. 이 영화에서 더욱 흥미로운 두 번째 지점은 영화가 중반에 이르기 전까지 전개된 영화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흥미로운 아이디어들 때문이었다. 놀란 감독은 영화의 존재를 ‘시간’의 축으로서 구조화한다. <메멘토>로부터 <인셉션> <인터스텔라>, 그리고 <덩케르크>까지 그는 영화가 어떻게 아날로그적 시간에 대한 감감을 해체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덩케르크>는 이 영화가 초반에 제시하듯, 명시적으로는 3개의 시간을 병렬적으로 배치한다. 해안가 잔교에서의 1주일, 선박을 타고 병사를 구출하기 위해 나선 가족의 하루, 그리고 공중폭격을 위해 출격한 항공기에서의 한 시간. 명백하게 서로 다른 길이로 구성된 시간이지만, 놀런은 이 영화의 서사 구조 내에서 교차 편집을 통해 세 개의 시간 층위를 동등하게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야심을 피력한다. 물론 이러한 배치가 온전히 새로운 영화적 실험은 아니다. 사실 영화는 조르쥬 멜리에스의 ‘트릭’이 발생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시간의 구조물이었다. 영화의 모든 시간들은 생략되거나 연장될 수 있으며, 압축될 수 있다. 다만 이미 1930년대, 할리우드 고전기에 이른 성과는 그 시간의 트릭을 관객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 철저하게 인공적으로 선택되고 배열되는 시간의 파편들을 관객들이 서사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고 인과론적인 실체로서, 영화의 조작 가능성을 비가시화하는 심리적 구성물로 완성해냈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놀런의 시간 구조는 새로운 영화적 시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연화된 고전적 서사의 시간을 탈구시키는 것, 즉 선형적이고 인과론적 서사로 수렴되었던 시간을 비선형적 단위로 재구성하는 행위에 가깝다. 여기서 핵심은 그가 영화의 논리 혹은 시간의 논리를 분절적이고, 비선형적인 디지털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가 지독히도 아날로그적인 질료인 필름을 고집하고 있음에도 그의 영화적 시간 감각은 철저하게 디지털화된 감각이다. 선형적이고 물질적이며, 연속성과 원본(본질)성에 대한 감각인 아날로그와 달리 디지털적 감각은 비선형적이며 비물질적이며, 불연속성과 절대성의 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의 예술에 대한 분석적 이해를 시도하는 연구자 찰리 기어는 예술과 디지털의 상관관계를 자본주의적 형식논리(상품의 추상화, 표준화, 수량화의 논리. 그로 인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류의 새로운 분절적 감각과 논리) 속에서 파악한다. 자본주의가 가장 고도화된 형식논리로 작동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간과 공간의 가치와 크기는 근대 이후 형성된 서구적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가장 미시적으로 파편화하거나 압축하고 해체한다. 밀레니엄 시대를 전후로 고조된 디지털적 감각에 대한 예술의 인식은 당장은 비선형성(랜덤 액세스)과 상호작용성의 신화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경우의 수를 디자인하는 예술형식으로 무수하게 발현되어 왔다. 하나의 절대성, 하나의 인과론적 서사, 하나의 감각으로 통일된 시공간 구조의 수사학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덩케르크>에서 크리스토퍼 놀런이 디지털적 감각으로 시간과 공간을 구축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세 개의 시간(1주일, 하루, 한 시간)을 병렬적으로 분절해 제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덩케르크>는 사실 굉장히 관습적이고 장르적인 컨벤션과 스릴, 긴장 구성에 충실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관습을 배치하는 방법에서 눈에 띄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영화의 초반부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대의 인물들을 마치 동시적인 시간처럼 교차 편집을 통해 구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일주일의 시간을 대변하는 토미가 잔교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다른 이와 함께 함선으로 호송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거의 실시간적 시간 흐름을 가지고 서사에 배치되는데, 그 사건을 통해 관객의 긴장을 자아내기 위해 함선 장교의 출항 명령, 군집한 병사들로 인해 쉽게 나아가지 못하는 토미의 호송, 심지어 그 와중에 진행된 폭격과 진행을 가로막는 잔교의 끊어짐 등이 묘사된다. 이 순간들은 토미가 과연 배에 승선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지독히도 관습적인 긴장과 병렬의 편집방식을 채택한다. 그런데 이 장면의 트릭은 다시금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긴박한 순간과 교차편집된다. ‘하루’의 시간을 보여주는 민간 선박 출항의 긴박함(해군들이 배를 징발하기 위해 다가오는 순간, 그들을 따돌리고 출항해 버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연료계가 고장 난 폭격기의 불안한 항공 등이 그것이다. 표면적으로는 1주일, 하루, 한 시간의 시간 위에 배치된 인물과 사건들은 교차편집을 통해 마치 동시적 시간인 양, 그것도 거의 실시간적인 방식으로 구성된다. 만일 이 영화가 초반에 세 개의 인물군이 서로 다른 길이의 시간을 배분받고 있음을 자막을 통해 알려주지 않았다면 관객들은 분명히 동시적 시간으로 인식했을 순간이다. 그러나 서사의 정황상 이 시간들은 전혀 다른 시간대에 발생한 사건들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영화가 편집이라는 장치를 통해 서로 다른 시간대에 얼마나 랜덤하고 자의적인 방식으로 접근 가능한지를 실험한다. 이 실험에서 ‘놀라움의 효과’를 유발하는 것은 놀런의 영화 그 자체라기보다는, 관객의 고전주의적이고 관습적인 관람행위(인과론적이고 선형적인, 무엇보다도 편집의 이음매 없는 연결이 구성한 영화적 일루전의 리얼리티 효과) 그 자체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으로서 영화의 시간과 공간을 새롭게 구조화하는 장인이다. <트윈 픽스>의 25년, 과거 혹은 미래? 이러한 크리스토퍼 놀런은 야심 많고 흥미롭지만, 그는 언제나 특정 한계치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부한 주제의식도 여기에 한 몫 하지만, 영화적 트릭과 야심이 영화의 존재 그 자체를 재구성하는 전복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선형적, 랜덤 액세스 되는 시간이 서로 다른 서사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올해의 성취는 역시 25년만의 귀환,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 시리즈이다 노장의 예술가 데이빗 린치가 <트윈 픽스 3>를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놀랍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미학을 대변하는 호이테 반 호이테마의 웅장한 스펙터클의 위용이 없을지라도 그는 키치적이고 B급 영화적인 생략과 응축, 유머를 통해 감히 범접하기 힘든 불가해한 예술 세계를 달성한다. 린치에게 영화는 단순한 시공간적인 트릭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공간의 세계로 진입하는 ‘열린 문’이다. 25년 전 <트윈 픽스> 시리즈를 봤던 관객이라면, 시즌 2의 후반부 붉은 방의 로라 팔머가 쿠퍼 요원에게 25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것은 정말로 25년이 지난 2017년, 시즌 3를 시작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억해야만 하는 또 한 가지. <트윈 픽스 3>의 붉은 방에서, 외팔이 사내는 여전히 그 공간에 앉아 있는 쿠퍼에게 지금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질문한다.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를 결과를 미리 언급하자면, 시즌 3의 최종화에서 쿠퍼가 도달한 세계는 영화적 서사의 과거일까? 미래일까? 놀랍게도 시즌 3의 최종화는 전 에피소드들의 최종적인 귀착점이자 원점으로 돌려버린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트윈 픽스>는 영화의 안과 밖에서 두 개의 시간 구조를 제시한다. 영화 밖에 존재하는 첫 번째 시간은 정말로 25년의 공백 이후에 도착한 이 영화에 새겨진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다. 시즌 3에서 우리는 25년 만에 다시 뭉친 놀라운 출연진들을 거의 다 만나게 된다. 붉은 방에 갇혀 있던 쿠퍼는 말할 것도 없이 트윈 픽스의 보안관 사무실과 그 마을에서 살아가던 거의 모든 배우들이 시간의 흔적을 온 육체와 얼굴에 새기며 다시 등장한다. 그래서 이 시즌의 절대적 주제는 ‘시간’처럼 보인다. 시즌 3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서사와 상관없이 25년의 공백(혹은 점핑)이 주는 놀라운 연속성과 단절성을 지속적으로 상기하고 인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역시 영화적 구조가 내재한 미궁과도 같은 세계를 관통하는 시간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시즌 3의 최종화는 이 모든 이야기의 귀착점이자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쿠퍼와 주요 인물들은 불가해한 세계의 문을 통과해 초월적 우주와 붉은 방,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시간의 경계,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의 경계는 불가해한 미스터리로서만 제시될 뿐이며, 심지어 죽음이 존재의 끝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린치는 단일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우주로 통하는 문들을 통해 하나의 서사가 아니라 언제든 변용가능한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트윈 픽스 3의 최종화의 마지막 대사는 “지금이 몇 년인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별거 아닌, 그러나 거대한 매혹 철학자 들뢰즈로부터 영화 연구자 데이빗 노먼 로도윅까지 그들은 영화를 ‘공간에 기반한 시간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영화는 공간의 구성을 통해 시간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한 시간매체이다. 시간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시간이 영화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이며, 모든 시간이 시작되는 탄생과 소멸되는 죽음까지도 영화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로 작동한다. 올해 나의 사사로운 주목을 받았던 영화와 감독들은 모두 ‘시간’을 영화 그 자체로서 인식하는 감독들이자 영화들이다. 혹은 나에게 ‘영화적 시간’에 대한 사유를 재촉했던 작품들이다. 수십 년 만에 스크린으로 공개된 고다르의 <작은 독립영화사의 흥망성쇠>는 린치의 영화처럼 시간의 점핑과 함께 우리 앞에 도착했다. (당연히 이 영화 역시 여느 고다르의 영화들처럼 영화라는 매체의 자의식과 영화의 시간을 실험하는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순간은 이 영화 속에서 아직 젊었던 장 피에르 레오가 영화 상영 이후 실제로 극장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영화가 불멸의 시간을 소망한다던 바쟁의 말처럼 스크린 속 과거의 젊은 레오와 달리 그는 현실의 노쇠한 육신으로 관객들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장 피에르 레오 그 자신의 스타성과 영화적 역사들을 응축하는 것으로 점철되는 스와 노부히로의 영화 <오늘 밤 사자는 잠든다> 역시, 그가 죽음을 연기하는 장면으로 시작되고 종결된다. 그리고 극 중 영화 현장을 떠난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이 깃든 과거의 공간들을 여행하며, 그곳에서 역시 먼저 죽어간 이들의 유령을 마주한다. 스와 노부히로는 이 영화에서 영화야말로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을 기록할 수 있는 매체임을 새삼스레 상기한다. 그리고 언제나 나만의 베스트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구로사외 기요시는 전작 <은판 위의 연인>(사진과 죽음, 영화에 관한 고혹적 괴담)에 이어 세계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시간의 끝, 죽음과 영화가 온전히 만나는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디지털 시대에 영화는 그 스스로 디지털적인 속성(비록 아날로그였던 셀룰로이드라 할지라도 분절된 프레임으로 존재했던 영화적 이미지와 시간들)을 세상에 대한 인식론과 존재 그 자체로 현시한다. 파편화되고 불연속적이며 절대성의 위계를 상실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압축과 파편화. 최근 무수한 영화와 드라마들이 시간의 절대성을 넘어서는 서사들(평행적 세계, 4차원을 넘어 5차원의 세계, 우주적 시간, 비선형적 내러티브 등)은 포스트 모던을 넘어선 또 다른 예술적 시간의 재현능력을 탐닉하게 한다. 영화와 예술, 디지털적 감각과 영화적 시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수렴되는 형식 논리들. 이러한 것들이 요즘 나를 사로잡는 사사로운 매혹들, 사사로운 영화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