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정지, 시네마
- 감독
- 박주환
- 제작년도
- 2020
1929년 6월 12일. 휘슬스톱 카페가 지난주에 개업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우체국 바로 옆 건물이지요. 카페 주인인 잇지 스레드굿과 루스 제미슨의 말로는 장사가 잘되고 있다고 합니다. 잇지가 말하길, 자신은 요리를 하지 않으니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혹여 음식에 독이라도 들어 있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네요. 엄마가 몰래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발견한 내가 왜 또 우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당황한 척하거나, 나를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곤 했다. 엄마가 그럴 때마다 나도 매번 무안하고 울적해서 똑같이 고개를 돌리거나,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색적이고 수줍은 성품이라 늘 조용한 아버지나 동생과는 달리, 집안의 소음 데시벨을 담당하는 커플인 우리가, 서로에게 토라진 연인처럼 등 돌리기 시작하면 집안은 한겨울의 절간처럼 고요하고 추워졌다. 그러다 짜증이 날 때는 비디오테이프를 잔뜩 빌려와 주말이면 밤이 새도록 영화를 보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엄마가 내 뒤로 와서 자리를 잡아 앉았고, 영화가 재밌어질 무렵이면 쥐포를 구워 올 테니 일시정지를 해놓고 기다리라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딱딱한 어깨를 붙잡았다. 배꼽 잡게 웃기는 장면이 나올 때 엄마는 끅끅, 웃으며 내 등과 팔을 치거나 꼬집어댔고, 기분이 한없이 좋아지는 영화를 막 보고 났을 땐 묻지도 않았던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은근슬쩍 꺼내 놓곤 했다. “스무 살 무렵에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지. 당시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면서 짤막한 멘트를 곁들이는 디제이가 있었는데, 그 일을 내가 했단다. 너도 알다시피 내 목소리가 꽤 좋잖아. 아무튼 한일극장에서 왔다고 하면, 대구 시내의 어떤 극장에라도 공짜로 들어가서 영화를 볼 수 있었거든. 그래서 그 무렵에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는 거의 다 봤던 것 같아. 참, 내가 **대학교 연극영화과 시험 쳤다가 떨어진 거 얘기했었나?” 그러면서 한겨울의 절간 같았던 집 안에 숨어있던 온기가 차츰 돌기 시작하고, 조용한 거실을 벼락 치듯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온 가족이 비명을 지를 만큼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화해하고 토라지고를 수없이 반복하며 서로의 등과 팔을 후려치고 비틀고 꼬집으면서 함께 본 영화들이야말로, 피부처럼 붙어있는 내 취향의 통렬한 이정표이다. 그중에 하나가 지금 소개하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는 영화로, 비디오를 통해 먼저 보았던 이 영화는 연이어 원작소설을 구해 읽을 정도로 열렬한 팬이 되었다. 원작소설의 정확한 번역제는 「휘슬 스톱 카페의 푸른 토마토 튀김 Fried Green Tomatoes at the Whistle Stop Cafe」으로, 동명 영화의 흑백 포스터가 박혀있는 초록색 커버의 그 책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고 다니느라, 나중엔 두 권으로 쪼개졌던 기억이 난다. 빵빵 터지는 유머와 꼼짝없이 움츠려드는 스릴, 눈을 꾹 감게 만드는 비탄과 뻥 뚫리는 환호가 마구 뒤섞여 있는... (당시 그래봤자 중학생인 내가 보기에도) 끝내주는 재미의 책이었다. 루스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너는 꿀벌의 연인이야. 잇지 스레드굿, 그게 너란 사람이야.” 잇지는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눈에 비친 맑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녀는 이 여름 사랑에 빠진 그 누구만큼이나 행복했다. 1930년대 앨라배마의 작은 시골 마을과 80년대 중후반의 버밍햄이라는 도시의 시간들을 평행으로 놓고, 과거와 현재를 서로 교차해가며 다양한 개성을 가진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오밀조밀 풀어놓는 (디킨스 풍의) 대하소설이지만, 마을 우체국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의 내용 (시멘트에 찍힌 개 발자국 없애는 법을 아시는 분은 우체국에 들러 알려달라는 따위의 기사)를 매 챕터마다 끼워놓는다거나, 주변인물처럼 보이던 캐릭터를 한 챕터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게 하는 방식의 포스트 모던한 구성을 보여주면서, 은근히 풍성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이런 구조가 난삽하거나 시끄러워 보이지 않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서 닻을 내리고 있는, ‘잇지’와 ‘루스’라는 두 여성 캐릭터의 멜로드라마에 있을 것이다. ‘휘슬 스톱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인 이들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로, 루스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함께 키우는, 독립적인 자아와 경제력을 갖춘 젊고 용감한 여성들이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당시 미국 남부의 시골이지만, 흑인들과 부랑자들에게 음식과 거처, 때로는 직업을 내어주며 썰렁한 유머까지 덤으로 선물하는, (언뜻 들으면 이상적으로 탈색된 캐릭터 같겠지만) 거의 어이가 없을 정도로 생생하면서, 그 거침없는 활약상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쿵쾅대고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 그중에서도, ‘잇지 스레드굿’이다.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가 그를 가리켜 ‘허클베리 핀’이 결혼하고 싶을 사람이라며 추천사를 썼다던데... 글쎄? ‘잇지’가 허클베리 핀과 그딴 걸 하고 싶을지.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 (잇지) 메리 루이스 파커 (루스) 91년도에 만들어진 영화 버전에선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이 ‘잇지’를 연기했는데, 나는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그가 적어도 노미네이션은 됐어야 했다고 생각할 만큼 그의 ‘잇지’가 좋았다. 들짐승처럼 거침없는 소년의 매력도 충분하면서, 결코 숨기거나 가장하지 않는 감정들을 정확한 타이밍에 툭툭 터드리는 사랑꾼의 섬세한 얼굴도 훌륭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꿀벌의 연인’ 장면을 들여다보자. 원작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갑자기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가 싶더니 성난 벌 떼들이 구멍에서 떼 지어 나오면서 하늘이 새카매졌다. 순식간에 잇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수천 마리 벌들로 뒤덮였다. 잇지는 1분 정도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나무에서 손을 빼내고는 다시 루스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면서. 루스가 있는 곳까지 왔을 즈음, 벌들은 거의 다 날아가고 없었고 그 새카맣던 물체는 다시 잇지가 되어 서 있었다. 자연산 벌꿀이 담긴 병을 들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활짝 웃으면서. 잇지는 병을 루스에게 주며 말했다. “이거 받아, 너에게 주고 싶어.” 이어서 이 장면이 어떻게 영화로 옮겨졌는지를 살펴볼까. (55초경부터 시작된다) IMDb 트리비아에서 읽었는데, 이 장면을 연기하기로 되어있던 스턴트우먼이 촬영 직전에 (무슨 일 때문인지) 그만둬버리면서,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이 직접 그 연기를 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그가 보여주는 생생하게 조심스러운 얼굴과 몸짓은 그야말로 진짜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 ‘루스’로 나오는 ‘메리 루이스 파커’의 얼굴 위로 조용히 떠오르는 ‘얼어붙은 경탄’ 또한, 어디서 후보지명 정도는 받아야 하는 연기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원작소설에 등장하는 수없이 많고, 다양하게 재미난 캐릭터들 중에서 영화에서 유독 더 강렬한 빛을 발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 ‘메리 루이스 파커’가 연기한 ‘루스’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아름다운 외모와 따뜻한 성품의 주인공, 가정폭력의 안타까운 희생자에, 이른 나이에 병들어 죽는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히로인... 의 면모를 모두 다 가진 배우처럼 보이지만, 그 자신은 거기에 별로 관심 없어 하는 모습이 ‘루스’라는 캐릭터에 흥미로운 긴장과 위트를 불어 넣어주었다. 나중에, 그가 < 위즈 Weeds >라는 텔레비전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생계를 위해 마약을 유통하는 위험천만한 가정주부로 나오는 걸 보면서도 여전히 ‘멜로드라마의 비극적인 주인공’의 외모를 은근히 즐기면서, 동시에 킬킬대며 비웃는 그 무심함의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에 흐뭇하게 되더라.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이 두 젊은 여성의 이야기인 만큼이나, 80년대 중후반의 양로원에 거주하는 노인 ‘니니’와, 그로부터 ‘잇지’와 ‘루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이블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블린’은 자신의 삶이 회색빛 중환자 대기실이나 다름없다고 느끼며, 우물 밑바닥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사는 중년 부인이다. 영화 버전에선 캐시 베이츠가 영화사에 기록을 남길 만큼, 더 이상 적역일 수 없는 연기로 그를 체현해 보였고, 제시카 탠디가 이야기의 전달자, ‘니니’로 등장했다. 원작소설의 ‘니니’는 ‘잇지’의 시누이로, 존재감이 그닥 크지 않는 캐릭터지만, 각색된 영화에선 그가 어쩌면 나이 든 ‘잇지’일 수도 있다는, (원작을 읽은 독자들에겐 ‘Huh...?’ 하는 반응을 끌어내는) 미스터리를 남기며 끝나는데, 일견 이해가 가는 선택이라고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영화가 작아지고, 텔레비전 영화처럼 소박하게 느껴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분명한 커플이고 사랑하는 연인들인, 잇지와 루스의 관계를 강렬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 사이로 축소시킨 것이나, 양로원의 그 노인이 결국엔 ‘잇지’일 것이라는 결말이 대중적으로 효과적인 각색이었다는 사실에 반쯤만 동의하고, 나머지 절반이 주는 아쉬움 탓인지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한 번씩 각색을 해보고 싶어진다. 메리 루이스 파커 (루스),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 (잇지) 캐시 베이츠 (이블린), 제시카 탠디 (니니) 그래서 내가 가끔씩 굴려보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각색 버전은 (아직까진 설정만 있지만), 1950년대 전쟁 직후의 한국, 피난민들과 상이군인 가족들이 두 집 건너 한 곳에 살고 있는 대구를 배경으로 한다. 1954년의 대구 장관동을 배경으로 하는 「마당 깊은 집」을 최근에 읽어보았거나, 좋아하는 독자들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일 것이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으로 주요 공간을 이동하겠지만, 전후의 대구를 굳이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한국 전쟁 직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들여다본다는 뻔한 맥락과 더불어, 「마당 깊은 집」의 길남이처럼 나 또한 그곳에서 우습고도 고통스런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는 좀 더 익숙하게 수다를 떨 수 있을 거라는 편안함에서이다. 주요 공간은 ‘마루 밑 왕지렁이’라는 괴이한 이름의 식당이다. 원래는 대구 남구의 곱창/막창 골목으로 유명한, ‘안지랑/안지랭이’이라는 고개 이름을 빌려와서 <안지랭이 식당>으로 할까 했는데, 밋밋하고 별 특징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안지랭이’라는 이름이 ‘왕지렁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고 충동적으로 적용시켜 보았다. 이제 그렇다면 이 식당에도 ‘푸른 토마토 튀김’ 처럼 시그니쳐 메뉴가 있어야겠지. ‘왕지렁이 식당’의 대표 메뉴 역할을 하면서, 소울푸드 느낌이 물씬 나는 옛스런 단품 음식들을 찾아본다.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두메부추꽃전’,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팥고물 호박고지 떡’,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들깨순 통밀전무침’... 이거다 싶을 만큼 마땅한 메뉴가 생각나진 않지만, 이 부분은 언젠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면 쉽사리 영감을 받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넘어간다. 아무튼 ‘마루 밑 왕지렁이’라는 식당은 두 명의 젊은 여성들에 의해 운영될 것이다. ‘희야’라는 이름의 여자와 ‘옥이’라고 불리는 여자, 서너 살 이상의 나이 차가 있는 사이지만, 존대한다거나, 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불리진 않는다. 다정한 반말이 격의 없이 오가는 사이의 이들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자 세상 그 자체라서 정확하고 분명한 연인이다. 그들에겐 어린 딸이 있는데, ‘옥이’가 ‘희야’의 도움으로 남편으로부터 도망 나오면서 업고 나온 자신의 아이다. 그 남편은 서울에서 군수물품을 조달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데, 집을 나간 자신의 아내와 딸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며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미친놈처럼 중얼댈 것이다.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에는 두 여자뿐 아니라, ‘휘슬 스톱 카페’의 식구들처럼 다양한 크루들과 이웃들이 있는데, ‘길남이’라는 이름의 신문 배달 소년과 관계가 있는 사람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마당 깊은 집」의 에피소드와 연결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 책의 팬이라면, 교묘하게 숨은 재미를 이 영화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야말로 그 책의 대사들을 직접 소리 내 따라 해 볼 정도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곳에는 육체노동과 허드레 장사 일에 나서서 호구를 연명하는 이웃들과, 양키시장이라고 불리는 역전거리 시장에서 북한말과 중국말을 쓰며 보따리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간다. 다양하고 재미난 개성의 사람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겠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희야’와 ‘옥이’가 있을 것이다. 코미디와 스릴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영화 중반에 일어난 ‘옥이 남편’의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 또 그것이 어떻게 감쪽같이 해결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클라이맥스를 맞을 것이다. 사건조사를 위해 식당을 찾은 경찰이 별다른 소득 없이, 가마솥 국밥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맛있다는 말을 하고 자리를 뜨면, “비밀은 육수에 있지요.” 라고 중얼대며 비밀스런 시선을 교환하는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주인과 크루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등장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2017년 서울의 어느 요양원, 치매가 의심되는 노인에 의해 (이런 이야기가 몹시 필요한) 누군가에게 말해지는 구성으로 소개되는 거다. 물론, 그 노인의 정체는... 생각해볼 문제겠지.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를 두 시간짜리 영화 안에 다 집어넣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도 넷플릭스에서 투자받아 16부작 드라마로 만들 수 있고 싶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6.25 전쟁 직후에 피란민들로 가득한 대구를 배경으로 만든다는 얘기만큼 어이없으면서 호기심 돋는 기획이 또 어디 있을까? 그것도,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팥고물 호박고지 떡> 같은 정신 나간 제목의 드라마로 말이다. 엄마와 함께 극장에서 본 영화 중엔 < 에일리언 2 >가 있었다. 미취학 아동이거나, 그와 비슷한 정신상태의 어린이였을 때도 함께 극장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있어 조각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경험은 그 영화가 최초였던 것 같다. 물론, 조각이라 하면, 징그러운 괴물이 인간의 배를 뚫고 나오는 그 장면 말이지. 그날 거기서 받은 시청각적 쇼크는 내 무의식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나중에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제정신으로 다시 보면서 영화 전체를 새로운 감상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내 작은 손을 붙잡고, ‘성인 1장이요’, 하고 극장 계단을 뛰어 올라갔던 것일까. 물론... 재밌고 싶어서겠지. 그렇다면 나는 거기에 불만이 없다. 그래서 떠올려 본다. 거대한 기계 갑옷을 걸친 시고니 위버가 에일리언에게 경고하던 그 목소리를. “그 얘한테 당장 떨어져, 이 빗취! Get away from her, you, Bitch!” 엄마는 깔깔 웃으며 박수를 치고, 가만한 내 등과 팔을 후려치고 꼬집는다. 나는 몸을 비틀며 울상을 짓지만, 그래도 좋다. 엄마가 웃는 것. #1 펀 홈 #2 안녕, 내일 또 만나 #3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4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5 이모와의 여행, 그 외 몇몇
1929년 6월 12일. 휘슬스톱 카페가 지난주에 개업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우체국 바로 옆 건물이지요. 카페 주인인 잇지 스레드굿과 루스 제미슨의 말로는 장사가 잘되고 있다고 합니다. 잇지가 말하길, 자신은 요리를 하지 않으니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혹여 음식에 독이라도 들어 있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네요. 엄마가 몰래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발견한 내가 왜 또 우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당황한 척하거나, 나를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곤 했다. 엄마가 그럴 때마다 나도 매번 무안하고 울적해서 똑같이 고개를 돌리거나,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색적이고 수줍은 성품이라 늘 조용한 아버지나 동생과는 달리, 집안의 소음 데시벨을 담당하는 커플인 우리가, 서로에게 토라진 연인처럼 등 돌리기 시작하면 집안은 한겨울의 절간처럼 고요하고 추워졌다. 그러다 짜증이 날 때는 비디오테이프를 잔뜩 빌려와 주말이면 밤이 새도록 영화를 보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엄마가 내 뒤로 와서 자리를 잡아 앉았고, 영화가 재밌어질 무렵이면 쥐포를 구워 올 테니 일시정지를 해놓고 기다리라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딱딱한 어깨를 붙잡았다. 배꼽 잡게 웃기는 장면이 나올 때 엄마는 끅끅, 웃으며 내 등과 팔을 치거나 꼬집어댔고, 기분이 한없이 좋아지는 영화를 막 보고 났을 땐 묻지도 않았던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은근슬쩍 꺼내 놓곤 했다. “스무 살 무렵에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지. 당시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면서 짤막한 멘트를 곁들이는 디제이가 있었는데, 그 일을 내가 했단다. 너도 알다시피 내 목소리가 꽤 좋잖아. 아무튼 한일극장에서 왔다고 하면, 대구 시내의 어떤 극장에라도 공짜로 들어가서 영화를 볼 수 있었거든. 그래서 그 무렵에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는 거의 다 봤던 것 같아. 참, 내가 **대학교 연극영화과 시험 쳤다가 떨어진 거 얘기했었나?” 그러면서 한겨울의 절간 같았던 집 안에 숨어있던 온기가 차츰 돌기 시작하고, 조용한 거실을 벼락 치듯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온 가족이 비명을 지를 만큼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화해하고 토라지고를 수없이 반복하며 서로의 등과 팔을 후려치고 비틀고 꼬집으면서 함께 본 영화들이야말로, 피부처럼 붙어있는 내 취향의 통렬한 이정표이다. 그중에 하나가 지금 소개하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는 영화로, 비디오를 통해 먼저 보았던 이 영화는 연이어 원작소설을 구해 읽을 정도로 열렬한 팬이 되었다. 원작소설의 정확한 번역제는 「휘슬 스톱 카페의 푸른 토마토 튀김 Fried Green Tomatoes at the Whistle Stop Cafe」으로, 동명 영화의 흑백 포스터가 박혀있는 초록색 커버의 그 책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고 다니느라, 나중엔 두 권으로 쪼개졌던 기억이 난다. 빵빵 터지는 유머와 꼼짝없이 움츠려드는 스릴, 눈을 꾹 감게 만드는 비탄과 뻥 뚫리는 환호가 마구 뒤섞여 있는... (당시 그래봤자 중학생인 내가 보기에도) 끝내주는 재미의 책이었다. 루스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너는 꿀벌의 연인이야. 잇지 스레드굿, 그게 너란 사람이야.” 잇지는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눈에 비친 맑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녀는 이 여름 사랑에 빠진 그 누구만큼이나 행복했다. 1930년대 앨라배마의 작은 시골 마을과 80년대 중후반의 버밍햄이라는 도시의 시간들을 평행으로 놓고, 과거와 현재를 서로 교차해가며 다양한 개성을 가진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오밀조밀 풀어놓는 (디킨스 풍의) 대하소설이지만, 마을 우체국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의 내용 (시멘트에 찍힌 개 발자국 없애는 법을 아시는 분은 우체국에 들러 알려달라는 따위의 기사)를 매 챕터마다 끼워놓는다거나, 주변인물처럼 보이던 캐릭터를 한 챕터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게 하는 방식의 포스트 모던한 구성을 보여주면서, 은근히 풍성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이런 구조가 난삽하거나 시끄러워 보이지 않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서 닻을 내리고 있는, ‘잇지’와 ‘루스’라는 두 여성 캐릭터의 멜로드라마에 있을 것이다. ‘휘슬 스톱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인 이들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로, 루스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함께 키우는, 독립적인 자아와 경제력을 갖춘 젊고 용감한 여성들이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당시 미국 남부의 시골이지만, 흑인들과 부랑자들에게 음식과 거처, 때로는 직업을 내어주며 썰렁한 유머까지 덤으로 선물하는, (언뜻 들으면 이상적으로 탈색된 캐릭터 같겠지만) 거의 어이가 없을 정도로 생생하면서, 그 거침없는 활약상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쿵쾅대고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 그중에서도, ‘잇지 스레드굿’이다.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가 그를 가리켜 ‘허클베리 핀’이 결혼하고 싶을 사람이라며 추천사를 썼다던데... 글쎄? ‘잇지’가 허클베리 핀과 그딴 걸 하고 싶을지.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 (잇지) 메리 루이스 파커 (루스) 91년도에 만들어진 영화 버전에선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이 ‘잇지’를 연기했는데, 나는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그가 적어도 노미네이션은 됐어야 했다고 생각할 만큼 그의 ‘잇지’가 좋았다. 들짐승처럼 거침없는 소년의 매력도 충분하면서, 결코 숨기거나 가장하지 않는 감정들을 정확한 타이밍에 툭툭 터드리는 사랑꾼의 섬세한 얼굴도 훌륭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꿀벌의 연인’ 장면을 들여다보자. 원작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갑자기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가 싶더니 성난 벌 떼들이 구멍에서 떼 지어 나오면서 하늘이 새카매졌다. 순식간에 잇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수천 마리 벌들로 뒤덮였다. 잇지는 1분 정도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나무에서 손을 빼내고는 다시 루스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면서. 루스가 있는 곳까지 왔을 즈음, 벌들은 거의 다 날아가고 없었고 그 새카맣던 물체는 다시 잇지가 되어 서 있었다. 자연산 벌꿀이 담긴 병을 들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활짝 웃으면서. 잇지는 병을 루스에게 주며 말했다. “이거 받아, 너에게 주고 싶어.” 이어서 이 장면이 어떻게 영화로 옮겨졌는지를 살펴볼까. (55초경부터 시작된다) IMDb 트리비아에서 읽었는데, 이 장면을 연기하기로 되어있던 스턴트우먼이 촬영 직전에 (무슨 일 때문인지) 그만둬버리면서,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이 직접 그 연기를 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그가 보여주는 생생하게 조심스러운 얼굴과 몸짓은 그야말로 진짜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 ‘루스’로 나오는 ‘메리 루이스 파커’의 얼굴 위로 조용히 떠오르는 ‘얼어붙은 경탄’ 또한, 어디서 후보지명 정도는 받아야 하는 연기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원작소설에 등장하는 수없이 많고, 다양하게 재미난 캐릭터들 중에서 영화에서 유독 더 강렬한 빛을 발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 ‘메리 루이스 파커’가 연기한 ‘루스’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아름다운 외모와 따뜻한 성품의 주인공, 가정폭력의 안타까운 희생자에, 이른 나이에 병들어 죽는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히로인... 의 면모를 모두 다 가진 배우처럼 보이지만, 그 자신은 거기에 별로 관심 없어 하는 모습이 ‘루스’라는 캐릭터에 흥미로운 긴장과 위트를 불어 넣어주었다. 나중에, 그가 <위즈 Weeds>라는 텔레비전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생계를 위해 마약을 유통하는 위험천만한 가정주부로 나오는 걸 보면서도 여전히 ‘멜로드라마의 비극적인 주인공’의 외모를 은근히 즐기면서, 동시에 킬킬대며 비웃는 그 무심함의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에 흐뭇하게 되더라.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이 두 젊은 여성의 이야기인 만큼이나, 80년대 중후반의 양로원에 거주하는 노인 ‘니니’와, 그로부터 ‘잇지’와 ‘루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이블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블린’은 자신의 삶이 회색빛 중환자 대기실이나 다름없다고 느끼며, 우물 밑바닥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사는 중년 부인이다. 영화 버전에선 캐시 베이츠가 영화사에 기록을 남길 만큼, 더 이상 적역일 수 없는 연기로 그를 체현해 보였고, 제시카 탠디가 이야기의 전달자, ‘니니’로 등장했다. 원작소설의 ‘니니’는 ‘잇지’의 시누이로, 존재감이 그닥 크지 않는 캐릭터지만, 각색된 영화에선 그가 어쩌면 나이 든 ‘잇지’일 수도 있다는, (원작을 읽은 독자들에겐 ‘Huh...?’ 하는 반응을 끌어내는) 미스터리를 남기며 끝나는데, 일견 이해가 가는 선택이라고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영화가 작아지고, 텔레비전 영화처럼 소박하게 느껴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분명한 커플이고 사랑하는 연인들인, 잇지와 루스의 관계를 강렬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 사이로 축소시킨 것이나, 양로원의 그 노인이 결국엔 ‘잇지’일 것이라는 결말이 대중적으로 효과적인 각색이었다는 사실에 반쯤만 동의하고, 나머지 절반이 주는 아쉬움 탓인지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한 번씩 각색을 해보고 싶어진다. 메리 루이스 파커 (루스),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 (잇지) 캐시 베이츠 (이블린), 제시카 탠디 (니니) 그래서 내가 가끔씩 굴려보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각색 버전은 (아직까진 설정만 있지만), 1950년대 전쟁 직후의 한국, 피난민들과 상이군인 가족들이 두 집 건너 한 곳에 살고 있는 대구를 배경으로 한다. 1954년의 대구 장관동을 배경으로 하는 「마당 깊은 집」을 최근에 읽어보았거나, 좋아하는 독자들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일 것이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으로 주요 공간을 이동하겠지만, 전후의 대구를 굳이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한국 전쟁 직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들여다본다는 뻔한 맥락과 더불어, 「마당 깊은 집」의 길남이처럼 나 또한 그곳에서 우습고도 고통스런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는 좀 더 익숙하게 수다를 떨 수 있을 거라는 편안함에서이다. 주요 공간은 ‘마루 밑 왕지렁이’라는 괴이한 이름의 식당이다. 원래는 대구 남구의 곱창/막창 골목으로 유명한, ‘안지랑/안지랭이’이라는 고개 이름을 빌려와서 <안지랭이 식당>으로 할까 했는데, 밋밋하고 별 특징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안지랭이’라는 이름이 ‘왕지렁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고 충동적으로 적용시켜 보았다. 이제 그렇다면 이 식당에도 ‘푸른 토마토 튀김’ 처럼 시그니쳐 메뉴가 있어야겠지. ‘왕지렁이 식당’의 대표 메뉴 역할을 하면서, 소울푸드 느낌이 물씬 나는 옛스런 단품 음식들을 찾아본다.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두메부추꽃전’,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팥고물 호박고지 떡’,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들깨순 통밀전무침’... 이거다 싶을 만큼 마땅한 메뉴가 생각나진 않지만, 이 부분은 언젠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면 쉽사리 영감을 받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넘어간다. 아무튼 ‘마루 밑 왕지렁이’라는 식당은 두 명의 젊은 여성들에 의해 운영될 것이다. ‘희야’라는 이름의 여자와 ‘옥이’라고 불리는 여자, 서너 살 이상의 나이 차가 있는 사이지만, 존대한다거나, 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불리진 않는다. 다정한 반말이 격의 없이 오가는 사이의 이들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자 세상 그 자체라서 정확하고 분명한 연인이다. 그들에겐 어린 딸이 있는데, ‘옥이’가 ‘희야’의 도움으로 남편으로부터 도망 나오면서 업고 나온 자신의 아이다. 그 남편은 서울에서 군수물품을 조달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데, 집을 나간 자신의 아내와 딸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며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미친놈처럼 중얼댈 것이다.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에는 두 여자뿐 아니라, ‘휘슬 스톱 카페’의 식구들처럼 다양한 크루들과 이웃들이 있는데, ‘길남이’라는 이름의 신문 배달 소년과 관계가 있는 사람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마당 깊은 집」의 에피소드와 연결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 책의 팬이라면, 교묘하게 숨은 재미를 이 영화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야말로 그 책의 대사들을 직접 소리 내 따라 해 볼 정도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곳에는 육체노동과 허드레 장사 일에 나서서 호구를 연명하는 이웃들과, 양키시장이라고 불리는 역전거리 시장에서 북한말과 중국말을 쓰며 보따리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간다. 다양하고 재미난 개성의 사람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겠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희야’와 ‘옥이’가 있을 것이다. 코미디와 스릴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영화 중반에 일어난 ‘옥이 남편’의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 또 그것이 어떻게 감쪽같이 해결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클라이맥스를 맞을 것이다. 사건조사를 위해 식당을 찾은 경찰이 별다른 소득 없이, 가마솥 국밥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맛있다는 말을 하고 자리를 뜨면, “비밀은 육수에 있지요.” 라고 중얼대며 비밀스런 시선을 교환하는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주인과 크루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등장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2017년 서울의 어느 요양원, 치매가 의심되는 노인에 의해 (이런 이야기가 몹시 필요한) 누군가에게 말해지는 구성으로 소개되는 거다. 물론, 그 노인의 정체는... 생각해볼 문제겠지.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를 두 시간짜리 영화 안에 다 집어넣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도 넷플릭스에서 투자받아 16부작 드라마로 만들 수 있고 싶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6.25 전쟁 직후에 피란민들로 가득한 대구를 배경으로 만든다는 얘기만큼 어이없으면서 호기심 돋는 기획이 또 어디 있을까? 그것도,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팥고물 호박고지 떡> 같은 정신 나간 제목의 드라마로 말이다. 엄마와 함께 극장에서 본 영화 중엔 <에일리언 2>가 있었다. 미취학 아동이거나, 그와 비슷한 정신상태의 어린이였을 때도 함께 극장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있어 조각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경험은 그 영화가 최초였던 것 같다. 물론, 조각이라 하면, 징그러운 괴물이 인간의 배를 뚫고 나오는 그 장면 말이지. 그날 거기서 받은 시청각적 쇼크는 내 무의식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나중에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제정신으로 다시 보면서 영화 전체를 새로운 감상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내 작은 손을 붙잡고, ‘성인 1장이요’, 하고 극장 계단을 뛰어 올라갔던 것일까. 물론... 재밌고 싶어서겠지. 그렇다면 나는 거기에 불만이 없다. 그래서 떠올려 본다. 거대한 기계 갑옷을 걸친 시고니 위버가 에일리언에게 경고하던 그 목소리를. “그 얘한테 당장 떨어져, 이 빗취! Get away from her, you, Bitch!” 엄마는 깔깔 웃으며 박수를 치고, 가만한 내 등과 팔을 후려치고 꼬집는다. 나는 몸을 비틀며 울상을 짓지만, 그래도 좋다. 엄마가 웃는 것.
춘천에서 다양한 단편영화와 독립, 예술영화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일시정지시네마를 만들고 운영한 지 어느덧 1년이 되어간다. 지역에서 독립예술영화를 볼 수 없다는 분노,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무모한 실천,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한발 두발 내딛는 인내. 참 많기도 많은 감정들을 섞으며 흘려보낸 1년이다. 크고 작은 관심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여러 영화인들과의 협업, 느릿하게나마 변화를 꾀하며 성장해가는 공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무얼 하는 공간인지 알지 못하지만 나름의 작은 성과들을 이루어내고 있다. 지역사회와 영화계에 작은 일렁임을 만들어냈다고나 할까.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이 문화를 정착시키고 유지해 갈지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다. 이러한 고민들이 뒤엉켜 독특한 향기를 풍기는 일시정지시네마의 방향성과 고민들. 간단하게 소개해 본다. * 포기로부터의 시작 본래 일시정지시네마는 독립예술영화 전용관 건립을 목표로 했다. 지금도 그 목표는 변함이 없지만 당시 씨네코드 선재, 스폰지하우스 광화문의 폐관과 강릉 독립예술극장 신영의 잠정 휴관은 공간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그리 좋은 답변을 내놓지 못했고, 마침 알게 된 곳이 이태원에 위치한 6석 영화관 극장판이다. 극장판은 영화제가 아니면 별도 채널이 없어 지속적으로 만날 수 없는 단편영화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단편영화도 유독 좋아했던 주인장은 전용관 건립이라는 거대한 꿈을 잠시 뒤로 미루고 현실적으로 운영 가능한 극장판의 형태를 벤치마킹, 18석의 작은 영화관을 만들게 되었다. 이 차선책은 도리어 시장성이 거의 없는 단편영화를 보다 더 지속적으로 볼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요즘은 단편을 다루는 영화제 및 다른 단편영화관들과의 협업을 통해 단편영화의 안정적 유통에 대한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있다. 4월 한 달간은 극장판, 자체휴강시네마와 함께 공모, 선정된 다섯 작품을 함께 상영한다. 이것이 단편영화계의 멀티플렉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독립,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것. 작년 11월, 화제의 독립, 예술영화 10편을 선정하여 상영했던 ‘굿 이브닝 시네마’를 기획할 때 즈음, 한 통의 문의 전화가 왔다. “거기에 가면 < 우리들 > 볼 수 있나요?” 나는 대답했다 “꼭 보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실제 영화 상영이 끝나고 전화했던 사람이라며 인사를 건네셨을 때, 이 공간을 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GV 현장 * 관광객들도 오가는 영상문화 공간 서울의 웬만한 구 하나보다도 인구가 적은 도시 춘천. 더 넓게는 강원도가 영화 유통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 남짓이라고 한다. 이러한 척박한 환경에서 무모한 영화관 운영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 없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나름대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화지로 춘천만큼 좋은 곳이 없다. 춘천은 연극, 마임, 공연 등 무대 공연예술의 잔뼈가 굵은 곳이며 춘천 가는 기차의 낭만을 업고 많은 관광객들이 유입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Romantic 춘천’이라는 슬로건에 어울리는 다양한 콘텐츠 중 영화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여행 프로그램 ‘퍼즈그라운드’를 개발, 영화가 여행객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만난 인연이 일시정지시네마를 운영하는 일원이 되기도 했다. 그만큼 매력적인 프로그램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또한 지역에서는 독립예술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시각예술 장르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와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점을 착안, 작년 11월에는 인터랙티브 전시 ‘흥력발전 : 즐거움, 예술을 움직이다’를 선보여 색다른 영상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지역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며 다양한 영상문화를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그 정체성을 확장해 가고 있다. * 누구나 영화인이 될 수 있는 아지트 공간을 열고 나서 지역에 숨어 있던 재야의 고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연출 전공 취준생부터 다양한 영화를 섭렵한 씨네필 직장인까지. 보다 더 심도 깊은 영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즐거움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치이겠지만, 지역에 대부분인 독립예술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확산시키기란 쉽지 않다. 독립예술영화는 멀티플렉스에서 보는 영화보다 어렵고 지루하거나 만듦새가 깔끔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나도 아직 예술영화를 보면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이다. 그래도 이런 영화가 좋아진 이유. 나는 이런 영화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는 잘 알리지도 못하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사라져 버리는 비정한 운명을 지녔지만, 만나기만 한다면 삶을 돌아보고 긴 여운을 선사하는 영화들. 이런 영화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고귀한 권위를 가지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기를 바란다. 좌석도 좀 불편하고, 가끔 불을 안 끄는 귀여운(?)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정겨운, 매일 지나다니는 시장골목 좌판 역할을 하는 곳이 일시정지시네마였으면 좋겠다. * 일시정지시네마는 꼭 자립해야 할까? 영화관에서 만나는 소중한 관객들은 나에게 이 공간을 지켜야 하는 명분으로 쌓인다. 하지만 명분만으로 이 공간을 지키기에는 현실적인 벽이 너무나 단단하고 높다. 나 자신에게 ‘우리가 자립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많이 했다. 답도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다. 시작할 때부터 지원 사업을 받았고 지금도 준비를 하고 있다. 자립을 하지 못한다는 것, 어딘가에 기대야만 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괴감마저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요즘은 그 질문을 바꿔버렸다. ‘꼭 자립으로 힘들게 운영되어야 할까?’ 진정 영화라는 매체가 우리들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그것이 꼭 필요하다는 열성적인 지지가 있다면 당연히 국가나 지자체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일시정지시네마의 색을 잃지 않는 선에서 다양한 지원을 받아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이러한 사례를 발판삼아 더 다양한 기회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 ‘봄내’라는 뜻을 가진 춘천이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시기이다. 여러모로 새로운 봄을 맞이한 이때, 더 많은 분들이 새로운 영화를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영화계에 계신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올해는 보다 다양한 영화를 소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든다. 따스한 바람과 꽃향기 느끼며 영화 한 편 보시면 어떨지. 새로운 것를 만나고 싶은 당신에게 일시정지시네마는 (휴무일을 제외하고) 언제나 열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