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외로워
- 감독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모니카 비티, 알랭 들롱, 프란시스코 라발, 루이 세이그너, 시러스 엘리아스
※ “잊혀진 미래의 영화” 본문( 링크 )에 대한 각주들을 모은 페이지입니다. 위 링크의 본문 페이지와 나란히 놓아두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주1. ‘포스트-시네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필름 매체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며 기술 장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선형적으로 살펴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 문화 산업으로 생산된 경제 상품으로서의 가치, 혹은 권력의 정치적 작동 수단으로 도구화된 역사를 추적하는 것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시네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포스트-시네마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영화의 원형으로 돌아가 다가올 ‘포스트-시네마’의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주2. 앙리 쥐베르, 「조선 원정기」,《세계 일주(Le Tour du Monde)》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군인 앙리 쥐베르(M.H Zuber)는 사관으로 강화도 원정에 출정하였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며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 및 풍습을 소개하는 글과 그림을 남겼고, 그 기록은 1873년 프랑스 여행 전문 주간지 《세계 일주(Le Tour du Monde)》에 「조선 원정기(Une expédition en Corée)」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주3. 프랑스의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크리스 마커(Chris Marker)는 1958년 프랑스 대표단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다음 해 그는 이때 남긴 사진과 글을 엮어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을 쇠이유(Seuil)출판사를 통해 발간하였다. 한국에는 눈빛 출판사가 1989년 「북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진집을 번역 출간하였다. 주4. 크리스 마커는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를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 마지막에 실었다. 주5. 움직이고 변하는 그림자로서의 영화; 끊임없이 여러 존재를 변증법적으로 비추고 반영하는 영화. 고유한 각자의 이야기 직물을 짜고, 풀고, 다시 짜기를 반복하는 영화. 우리 안의 타자를 위한 빈 공간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영화. 복수의 힘과 규칙이 복합적으로 배치되는 사회적 혼합물로서의 영화. 움직이는 시적 감각과 사유가 다양한 생태계를 이루는 가변적 구성물로서의 영화. 주6.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서 진도 9.0 지진에 의해 발생한 쓰나미는 총 12개국에 전례 없는 사상자를 낸 인류 역사상 최악의 쓰나미다. 사망자 숫자만 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주7. 2019년 12월 26일 오전 8시 10분부터 11시 26분까지 스리랑카에서 금환일식이 관측되었다. 달이 태양의 중심을 완전히 가리지만, 달의 그림자가 태양보다 작아 태양의 가장자리가 원형 빛으로 남는 불의 고리는 9시 38분부터 2분 43분 동안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는 두 사건의 시점을 교차하여 이야기한다. 주8. 기원전 400년경 중국의 철학자 묵자는 빛이 바늘구멍을 통해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면 바깥에 있는 대상의 반전된 이미지가 어두운 방 안에 만들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핀홀 현상(Pinhole effect)을 최초로 기록한 역사로 여겨진다. 주9. 기원전 350년경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식 때 나뭇잎의 겹쳐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핀홀 현상이 관찰된다고 기록하였다. 주10. 기원후 935년경 태어난 아랍의 물리학자 이븐 알 하이삼은 현대 광학의 아버지이다. 세계 최초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만들어 일식을 관찰하고, 다양한 실험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11. 『한국인(Coréennes)』의 여섯 번째 장 「아홉 뮤즈」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썼다. 주12.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의 연가곡 ‘태양 없이(Song cycle Sunless, 1874)’의 첫 번째 곡 ‘네 개의 벽 안에서(Within Four Walls)’를 인용하였다. 주13. 스코틀랜드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에는 1836년 이래로 지금까지 작동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메라 옵스큐라가 있다. 처음에는 천문학 협회의 연구용으로 사용되었지만, 1851년부터는 박물관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였다. 주14. 1997년 크리스 마커는 『한국인(Coréennes)』을 재발간할 때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간 후기를 추가한다. "알렉산더 메드베드킨(Alexander Medvedkin)에게 헌정한 영화에서 그는 이 강력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인류 역사상 우리와 같은 세대는 없었습니다... 마치 천문학에서의 ‘검은 별들’과 같아요. 제 삶은 이런 블랙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운 좋게도 블랙홀 반대편에서 폭탄을 맞을 수 있었던 우리는 블랙홀의 실패의 깊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주15. 요한복음 9장 41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주16. 1983년 크리스 마커의 영화 < 태양 없이 Sans Soleil (Sunless) > 속 문장을 다시 썼다. 주17. 크리스 마커의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 속 문장을 인용하였다.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 본문에 삽입된 각주를 별도 페이지( 링크 )로 정리했습니다. 위 링크에 연결된 각주 페이지를 본 페이지와 나란히 놓아두고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이 글은 2000년 겨울, 언젠가 영화로 만들기 위해 써두었던 글을 2024년 겨울에 수정한 글이다. 과거, 문자로 남겨진 이 미완성 영화를, 현재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읽고 듣고 보며, 미래의 눈과 귀로 만들어지길 희망하였다. 이 가능성을 하나의 ‘포스트-시네마’ *주1 로 꿈꾸며 이전 글을 다시 손보고 주석을 추가하였다. ‘이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면, 어쩌면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이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의 강과 산들을 둘러보셨으면 이제 부디 돌아가 주십시오. 그래야 모든 백성이 마음을 놓을 것입니다.” 1866년, 조선을 찾아온 이유를 그에게 물으니, 그는 ‘며칠 후에 있을 월식을 관찰하러 왔을 뿐’이라고 답했다. *주2 1958년, 그 *주3 는 다시 조선을 방문한다. 그는 시대에 취해 있지 않은 유예된 순간들을 좋아했다. 그는 지나가며 마주친 얼굴들, 기적들, 감각들, 구석들을 낯설고도 낯익은 시선으로 새겼다. 낯선 존재를 낯익은 감각으로, 낯익은 존재를 낯선 감각으로- 그는 파편적 순간 속 길 가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취약한 슬픔을 바라보았다. 나의 슬픔과 같은 너의 슬픔이 있는지. 너의 슬픔과 같은 나의 슬픔이 있는지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눈부신 어둠 속에서 월식을 관찰하던 그에게 ‘어떻게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볼 수 있는지’ 묻자, ‘빛나는 해와 그 빛을 반영하는 달이 만들어내는 어둠의 시간을 찾아보라’라는 말을 나에게 남겼다. 그리하여 나는 2019년 겨울, 어둠 속의 월식이 아닌 밝음 속의 일식을 찾아 스리랑카의 동쪽 해안 도시 트링코말리(Trincomalee)로 떠났다. 이 여정은 그의 시선에 대한 나의 답장이다. 그의 편지 *주4 는 ‘인간의 얼굴과 선한 고양이는 태양이며 달’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나의 편지는 조선이라는 낯선 땅에서 그를 향해 돌아보던 하나의 얼굴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마주친 낯선 궤적을 사라져가는 우리의 언어로 담는다. 우리의 언어는 지진 통신(seismic communication)이다. 그중 영화는 움직이는 빛의 그림자로 태어났다. *주5 하지만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로 인해 영화는 빛을 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영화는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섬광을 더듬지 않는다. 그림자 없는 빛으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희망과 절망을 엮어 어떤 기억을 다시 쓰고 있을까?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도둑맞은 편지 속 이야기다. 트링코말리의 한 작은 마을, 이곳에서 우리는 2004년 12월 26일 *주6 에 일어난 금환일식을 추적한다. 어둠 나라에서 파견된 불개가 이번에는 태양을 삼켜보지만, 너무 뜨거워 다시 뱉어낸다. 일식의 그림자는 15년 후 같은 날 *주7 이곳을 휩쓴 지진 해일을 기억하며 노래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를 부른다. 해와 달이 나뭇잎을 연주하며 지구에 떨구는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카말 알-딘 알-파리시(Kamal al-Din al-Farisi), 이븐 알-하이삼의 『광학의 서』 개정판 Kitab Tanqih al-Manazi (The Revision of Ibn al-Haytham's Optics) 필사본, 1309. “이것은 시각이 작동하는 원리- 수천 년 전 까마귀가 본 것을 중국에서 묵자(墨子) *주8 가 메기가 본 것을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주9 가 두꺼비가 본 것을 아랍에서 이븐 알 하이삼(Ibn al-Haytham) *주10 이 기록하였네” 까마귀는 쉬운 희망과 값싼 절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노래한다. 메기는 후퇴하여 돌아온 곳을 새로운 곳으로 만들며 다시 나아가기 위해 노래한다. 두꺼비는 동굴 신화 속 그늘 아래 은총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래한다. 게임의 규칙 1. 세 개의 산(山) 정상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바라본다. 2. 눈을 감는다. 겜마 프리시우스(Gemma Frisius), 천문학과 기하학 광선(De radio astronomico et geometrico), 1545. - 그 순간 색이 반전되고, 하늘은 어두워지며, 그림자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주11 어둠이 실종된 밤 - 구석과 구석 사이에서 우리는 귀 기울여 침묵을 끌어안는다. 새로운 것을 능숙하게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관점을 서툴게 취하며- 적정 거리를 찾기 위해 시선의 속도를 끊임없이 바꿔가며- 빛으로 시든 눈을 드러나는 어둠으로 씻는다. 우리는 절망과 희망을 엮고 찰나의 시간 축을 빌어 겹쳐진 실천적 기억 속 마주친 얼굴들, 기적들, 감각들, 구석들을 낯설고도 낯익은 시선으로 새긴다. 낯선 존재를 낯익은 감각으로 낯익은 존재를 낯선 감각으로- 코다(Coda) - 네 개의 벽 안에서 *주12 조용하고 소박한 작은 방, 뚫을 수 없는 그림자, 응답 없는 그림자; 깊은 생각, 슬픈 노래; 뛰는 마음 속 소중한 희망 순간 순간의 고요한 비행; 먼 행복에 대한 움직임 없는 시선 많은 의심과 많은 인내심 여기, 나의 밤, 고독의 밤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도둑맞은 편지 속 이야기다.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 카메라 옵스큐라 광고 홍보물 (사진: Museum Crush )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덤프리스(Dumfries), 1836년 덤프리스와 맥스웰타운 천문학 협회 (Dumfries and Maxwelltown Astronomical Society)는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인 풍차를 개조하여 핼리 혜성(Halley's Comet)을 관측하기 위한 망원경과 카메라 옵스큐라를 설치하였다. *주13 우리는 이 오래된 어둠의 공간 안에서 실종된 밤을 탐색한다. 어두울수록 이미지가 선명하게 보이는 이곳에서 우리는 물구나무를 서고 내부의 바깥쪽과 외부의 안쪽을 바라본다. 우리는 파편적 순간 속 길 가는 사람으로서 취약한 슬픔들을 바라본다. 순간 순간의 고요한 비행 가운데, 나의 슬픔과 같은 너의 슬픔이 있는지. 너의 슬픔과 같은 나의 슬픔이 있는지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우주의 구멍 아닌 구멍 지각할 수 없는 기묘한 천체 - 블랙홀로 만들어진 카메라 옵스큐라 우리는 이곳에서 블랙홀 *주14 의 그림자를 겹쳐가며 그 적정 속도와 거리를 찾는다. 어둠이 더 이상 빛을 증언하지 않는 이 위태로운 시대를 말하지 않고 말하며, 보지 않고 바라본다. 우리는 조용하고 소박한 이 작은 방 에서 우리의 회환을 감광제와 섞고 톱밥을 가득 채워 박제한다. 사건의 지평선 속 기억이 유일한 언어가 되는 이곳에서 우리는 공명하는 순간들을 현상한다. ‘너희가 눈멀었다 하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 너희가 본다고 말하므로 너희 죄가 남아 있느니라’ *주15 라는 외침에 조응하며- 우리가 오랫동안 마음 속 깊이 새긴 기억조차 떠도는 섬망의 언어인 것을 기억하며- 광기로부터 반성적 성찰을 건져내 지나간 그림자의 반영을 이어 붙이며 - 언젠가 그는 행복이라 부르던 순간을 화산재로 짠 장막으로 덮으며 말했다. ‘그들이 여기에서 행복을 볼 수 없다면 적어도 어둠을 볼 것’ *주16 이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비균질적인 이미지의 표면 위에 어둠을 함께 밝힌다. 우리의 밤은 이 암흑의 빛 속에서 후퇴한 그림자의 목소리를 말없이 조절한다. 우리의 지각이 후퇴하고 탈선하고 겹쳐질 때 이 어둠 속 구멍 이면에는 어떤 잔상이 있을까? 우리는 이 유예된 그림자에 여전히 같은 감각을 적용할 수 있을까? 이 병렬하고 교차하는 시간은 우리의 취약한 기억을 다시 쓸 수 있을까? 겸허하면서도 눈부신 시선들 사이를 우리는 어떻게 함께 걸어갈 수 있을까? 이 여정의 끝에는 우정이 있다. 나머지는 침묵이다. *주17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경계는 없지만 한계가 있는 끝은 없지만 유한한 -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연다. 어둠과 침묵 속 다정한 밤 - 그 운동과 정지 사이 현전과 부재 사이 도둑맞은 우리의 편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필자 제공, 2019년 12월 29일 금환일식, 트링코말리 *** 주1. ‘포스트-시네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필름 매체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며 기술 장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선형적으로 살펴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 문화 산업으로 생산된 경제 상품으로서의 가치, 혹은 권력의 정치적 작동 수단으로 도구화된 역사를 추적하는 것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시네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포스트-시네마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영화의 원형으로 돌아가 다가올 ‘포스트-시네마’의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주2. 앙리 쥐베르, 「조선 원정기」,《세계 일주(Le Tour du Monde)》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군인 앙리 쥐베르(M.H Zuber)는 사관으로 강화도 원정에 출정하였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며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 및 풍습을 소개하는 글과 그림을 남겼고, 그 기록은 1873년 프랑스 여행 전문 주간지 《세계 일주(Le Tour du Monde)》에 「조선 원정기(Une expédition en Corée)」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주3. 프랑스의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크리스 마커(Chris Marker)는 1958년 프랑스 대표단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다음 해 그는 이때 남긴 사진과 글을 엮어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을 쇠이유(Seuil)출판사를 통해 발간하였다. 한국에는 눈빛 출판사가 1989년 「북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진집을 번역 출간하였다. 주4. 크리스 마커는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를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 마지막에 실었다. 주5. 움직이고 변하는 그림자로서의 영화; 끊임없이 여러 존재를 변증법적으로 비추고 반영하는 영화. 고유한 각자의 이야기 직물을 짜고, 풀고, 다시 짜기를 반복하는 영화. 우리 안의 타자를 위한 빈 공간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영화. 복수의 힘과 규칙이 복합적으로 배치되는 사회적 혼합물로서의 영화. 움직이는 시적 감각과 사유가 다양한 생태계를 이루는 가변적 구성물로서의 영화. 주6.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서 진도 9.0 지진에 의해 발생한 쓰나미는 총 12개국에 전례 없는 사상자를 낸 인류 역사상 최악의 쓰나미다. 사망자 숫자만 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주7. 2019년 12월 26일 오전 8시 10분부터 11시 26분까지 스리랑카에서 금환일식이 관측되었다. 달이 태양의 중심을 완전히 가리지만, 달의 그림자가 태양보다 작아 태양의 가장자리가 원형 빛으로 남는 불의 고리는 9시 38분부터 2분 43분 동안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는 두 사건의 시점을 교차하여 이야기한다. 주8. 기원전 400년경 중국의 철학자 묵자는 빛이 바늘구멍을 통해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면 바깥에 있는 대상의 반전된 이미지가 어두운 방 안에 만들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핀홀 현상(Pinhole effect)을 최초로 기록한 역사로 여겨진다. 주9. 기원전 350년경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식 때 나뭇잎의 겹쳐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핀홀 현상이 관찰된다고 기록하였다. 주10. 기원후 935년경 태어난 아랍의 물리학자 이븐 알 하이삼은 현대 광학의 아버지이다. 세계 최초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만들어 일식을 관찰하고, 다양한 실험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11. 『한국인(Coréennes)』의 여섯 번째 장 「아홉 뮤즈」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썼다. 주12.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의 연가곡 ‘태양 없이(Song cycle Sunless, 1874)’의 첫 번째 곡 ‘네 개의 벽 안에서(Within Four Walls)’를 인용하였다. 주13. 스코틀랜드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에는 1836년 이래로 지금까지 작동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메라 옵스큐라가 있다. 처음에는 천문학 협회의 연구용으로 사용되었지만, 1851년부터는 박물관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였다. 주14. 1997년 크리스 마커는 『한국인(Coréennes)』을 재발간할 때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간 후기를 추가한다. "알렉산더 메드베드킨(Alexander Medvedkin)에게 헌정한 영화에서 그는 이 강력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인류 역사상 우리와 같은 세대는 없었습니다... 마치 천문학에서의 ‘검은 별들’과 같아요. 제 삶은 이런 블랙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운 좋게도 블랙홀 반대편에서 폭탄을 맞을 수 있었던 우리는 블랙홀의 실패의 깊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주15. 요한복음 9장 41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주16. 1983년 크리스 마커의 영화 < 태양 없이 Sans Soleil (Sunless) > 속 문장을 다시 썼다. 주17. 크리스 마커의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 속 문장을 인용하였다. 임고은(영화감독, 시각예술가) l 영화를 둘러싼 시선의 주체와 객체, 과거와 현재, 진실과 허구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엮어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최근에는 야생을 회복하기 위한 시적인 언어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몰두하고 있다.
① 표관(飄館) 1915년에 설립된 영화관으로 인천부 신정(新町) 18번지에 있었다. 영화관을 세운 이는 인천여관을 운영하던 시미즈 슈조(淸水周藏)이다. 개관 당시 황금관을 경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에서 영화관 운영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정관을 소유하던 닛다연예부가 운영권을 인수했으며 뒷날 대정관 소유주 닛다 고이치(新田耕市)가 소유권마저 인수하여 동생인 닛다 마타헤이(新田又平)에게 경영을 맡겼다. 표관은 인천을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1937년 한해 관람객이 18만 2640명, 입장료 수입이 48,132원에 달했다. 1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닛다 마타헤이, 지배인은 오오타(太田時雄)였으며 672석의 영화관이었다. 2 해방 후에는 문화관으로 개칭되어 시영으로 운영되다가 한국전쟁 시 소실되었다. ② 애관(愛館) 인천의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이다. 1921년 초, 인천부 경정 238번지에 김성근(金成根)이 세웠다. 3 축항사(築港社)의 흥행권을 인수하여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용하가 운영하던 1923년 1월부터는 알렌상회와 계약을 맺고 활동사진관으로 운영했다. 4 조선인 경영의 영화관으로 조선의 연극과 악극 등도 공연했다. 1926년 애관을 인수한 김윤복(金允福)은 1927년 신축을 결정하고 약 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르네상스식 외관의 영화관으로 개축했다. 5 1928년 10월 1일부터 외화 수입사인 기신양행(紀新洋行)이 경영권을 인수하여 직접 운영하였다. 1936년 1년간 약 12만명의 관람자와 28,284원의 입장수익을 얻었으며, 6 1937년에는 1년간 관람자 총 14만 5천명, 43,480원의 입장료 수입을 얻었다. 7 기신양행이 운영하던 애관은 그 흥행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인천키네마를 세운 미쯔이 토라오(三井寅男)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③ 락우관(樂友館), 인천동보영화극장(仁川東寶映畫劇場), 인천키네마(仁川キネマ) 1937년 인천부 신정 19번지에 지어진 2층 콘크리트로 형태의 영화관으로 처음 이름은 락우관(樂友館)이었다. 극장을 세운 사람은 당시 애관을 경영하고 있던 미쯔이 토라오(三井寅男)였다. 「한국극장사」를 쓴 박노홍에 의하면 표관과 마주한 자리에 애관을 경영하는 미쯔이가 극장을 짓자 표관의 주인 닛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전한다. 8 1938년 11월 31일부터 도호(東寶)영화를 상영하게 되면서 이름을 인천동보영화극장(仁川東寶映畫劇場)으로 바꾸었다. 이후 인천동보영화극장은 인천키네마(仁川キネマ)로 개칭되었는데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미쯔이 토라오(三井寅男), 지배인은 와카야마(若山幸吉)였다. 정원은 370석으로 그리 크지 않은 영화관이었다. 해방 후 적산 처리되었으며 이름을 동방극장으로 바꾸었다. ④ 인천영화극장(仁川映畫劇場) 1942년 7월 5일 개관한 인천의 문화영화 전용관으로 2층 벽돌 건물이었다. 위치는 인천부 용강정 22번지, 지금의 동인천역 앞에 위치했다. 설립자는 인천지역에서 활약하던 일본인 실업가 아오시마(靑島鋪作)였다. 1943년 당시 흥행주 역시 아오시마, 지배인은 후루카와(古川文道)였다. 해방 후 적산 처리되었으며 보통 인영(仁映)극장이라 불렀다. ⑤ 개성좌(開城座) 개성좌는 1912년 10월 개성부 소로동(小路洞)에 이기세(李基世)와 일본인 토미타((富田重治)가 함께 세운 극장이다. 초기에는 청년파일단(靑年派一團)이나 이화단(以和團)과 같은 신파극단의 무대로 활용되었으며 이기세가 세운 유일단(惟一團)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1930년 10월 개축된 개성좌에서는, 9 1932년 이동식소형극장의 공연이 계획되기도 했다. 10 1932년부터 최익모, 박철희, 김찬우 등이 맡아 경영하던 개성좌는 1935년 5월 박봉진, 공진태, 김재삼, 백순성, 이우균 등 5인이 3천원씩 내서 총 1만 5천원으로 극장을 인수한 후 발성영화장치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영화 상영에 나섰다. 11 하지만 낡은 시설과 설비는 개성 관객들의 원성을 샀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시라이(白石誠一)이며 지배인은 고바야시(小林榮)였다. 이들은 창씨를 한 조선인이었다. 해방 당시 개성좌는 560석의 객석을 보유한 개성 유일의 영화관이었다. [자료] 개성좌 개축 피로연예회(《조선신문》, 1930.10.29) ⑥ 풍창관(豊昌館), 수원극장(水原劇場) 수원의 최초의 극장은 1913년 11월 개관한 풍창관(豊昌館)이다. 수원 성내 유지들이 세웠다. 1918년 2월 수원군 기생조합의 연주회를 개최한다는 기사가 남아 있다. 풍창관이 사라진 후 수원지역에 들어선 극장이 수원극장이다. 수원좌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이 극장은 1920년대 초반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공연과 영화를 상영하던 수원극장은 1933년 10월, 양규룡(梁奎龍)을 대표로 하는 주식회사로 조직을 변경하고 극장을 신축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다(苧田甫), 지배인은 미야모토(宮本日出夫)이며 객석 수는 494석이었다. 해방 이후 까지 존속했다. ⑦ 애원극장(愛園劇場) 경기도 안성읍 석성리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6년 안성 유지 박형병(朴衡秉)이 작고한 동생 박항병(朴恒秉)의 별호인 애원(愛園)이라는 이름으로 극장을 지었다. 건축비는 2만원이며 2층 벽돌 건물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형병(창씨명 朴原衡東), 지배인은 나카이(中井一成)였으며 객석 수는 556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다음은 황해도의 극장이다. ⑧ 해주좌(海州座), 해주극장(海州劇場) 해주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극장은 해주좌(海州座)로 1913년 무렵 설립되어 10년 정도 운영되었다. 낡고 오래된 해주좌를 대신하여 1925년 10월 31일 해주극장이 만들어졌다. 해주 지역의 유일한 흥행장이었다. 1934년 10월 24일 신축에 버금갈 정도의 개축을 단행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히구치(樋口泰貫), 지배인은 아오야마(靑山)이며 객석 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겸이포좌(兼二浦座), 겸이포극장(兼二浦座) 겸이포읍 본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0년대 초반부터 신문지상에 이름이 발견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후시야(伏屋三治), 지배인은 기타지마(北島七郞)이며 객석 수는 62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⑩ 욱좌(旭座), 공락관(共樂館) 사리원 지역에는 1920년대 초반 무렵 욱좌(旭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욱좌가 사라지고 난 이후 사리원에 들어선 극장이 공락관(共樂館)이다. 1932년 5월 개관한 공락관은 야스다(安田靜雄)가 설립했는데, 부지 300평에 건평 140평, 2층 양관 모양으로 영화관 겸 극장으로 건설되었다. 공사비 2만 5천원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다, 관리인은 이시가와(石川晩得)이었다. 객석 수는 560석이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⑪ 연안극장(延安劇場)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횡정리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7년 무렵 연안극장 조합에서 설립했다. 1943년 운영자와 조합간의 갈등으로 조합직영으로 바뀌었다. 조합에서 선정한 대표는 쿠니모토(國本丸農)였다. 객석 수는 560석이었으며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수좌(壽座) 황해도 신천읍 교화리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4년 11월 신천 유지 박성률(朴聖律)이 1만여원의 비용을 들여세웠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다카시마(高島勇), 지배인은 시라가와(白川不二雄)이다. 객석 수는 550석이었다. ⑬ 태평극장(太平劇場) 황해도 안악읍 훈련리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3년 안악 유지 박봉서(朴奉瑞)가 7천원의 예산으로 건축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봉서(창씨명 山本奉瑞)이며 객석 수는 456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1. "이제야 채산(採算)맛는 인천의 흥행업계", 《동아일보》, 1938.02.02. 2.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3. " 인천독자위안", 《조선일보》, 1921.04.01. 4. "인천에 상설 애관", 《조선일보》, 1923.03.21. 5. "인천 애관극장 십일에 낙성(落成)", 《매일신보》, 1927.10.14. 6. "영화관출입인원 삽(卅)여만명 돌파", 《동아일보》, 1936.01.11. 7. "이제야 채산맛는 인천의 흥행업계", 《동아일보》, 1938.02.02. 8. 김의경·유인경 편, 『박노홍의 대중연예사 1』, 연극과인간, 2008, 271쪽. 9. "開城座改築披露演藝會", 《朝鮮新聞》, 1930.10.29. 10. "이동식 소형극장 개성서 첫 공연, 오는 이십칠일에", 《중앙일보》, 1932.02.25. 11. "유일한 오락기관 개성좌를 매수", 《중앙일보》, 1935.05.08. [자료] 《매일신보》, 1942.07.02. 인천영극개관(仁川映劇) 개관 인천부 상인천역전(前)에 건축 중이든 인천영화극장(정원 600)은 이번에 준공되어 7월 9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었다. 뉴-스, 문화영화 등 전문관으로 전선에서 제 7번째의 신관이다. [자료] 《매일신보》, 1927.10.14. 인천 애관(愛舘)극장 십일에 낙성(落成) 【인천】 지난 십일에 낙성된 인천극장 『애관(愛館)』은 넉넉히 800명을 수용할만한 우미(優美)한 『루네상스』 식으로 인천 조선인 시가에 일(一) 이채(異彩)를 방(放)하게 되엇스며 내용의 설비도 완비무결(完備無缺)하야 조선 전도(全道) 어느 곳의 그것에 비하여 손색이 무(無)한바 관주 김윤복(金允福) 씨는 공익에 관한 『모됨』에는 무료로 제공할 터이라고 언명하얏다하며 사용료가 태고(太高)한 가무기좌(歌舞伎座)를 사용하다가 실패만 당하든 인천 극계(劇界)로는 동관의 신축으로 새로운 서광을 엇게 되엇더라. [자료] 《매일신보》, 1937.05.05. 인천에 신극장, 금추(今秋)까지 낙성(落成) 【인천】 십여만 인구가 살어잇는 대(大) 인천에 오락기관으로는 조선인으로는 애관(愛館), 내지인으로는 표관(瓢館)의 이개소 ᄲᅮᆫ인데 금번 인천부 신정(新町) 19번지에다가 송전좌시(松田佐市) 씨 경영으로 거(去) 28일 극장 건축 착공식을 성대히 거행하얏는데 늦어도 금추에는 준공을 보게 되리라고 한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4.11.30. 신천(信川) 수좌(壽座) 낙성(落成) 【신천】 신천(信川) 상설극장 수좌(壽座) 공사 준공은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그간 전반 시설이 완성되엿슴으로 지난 이십육일 락성식을 거행하엿다. [자료] 《매일신보》, 1932.05.29. 사리원 안전(安田)씨가 공락원(共樂館)을 신축, 입일일(卄一日)부터 개업 【사리원】 사리원 대중적 오락기관으로 당지(當地) 안전정웅(安田靜雄)씨는 희생적 봉공(奉公)사업으로 구(舊) 식산은행지점 적(跡)에 영화관 겸 극장 상설 공락관을 신축하야 지난 이십일일 오후 삼시부터 관민 백여명을 초대하여 신축피로연을 거행한 후 동일 오후 육시부터는 가무기(歌舞伎) 중촌리엽(中村鯉葉) 일행 30여명을 초청하여 시즙흥행(柿葺興行)이 잇섯으며 동이십삼일, 이십사일에는 경성에 있는 조선연극사(社) 일류 배우를 청하여 일반에게 개연하얏다. 본 공락관은 안전씨(安田氏)가 전연 영리사업으로 건축한 것이 안이고 지우(知友)의 간망(懇望)으로써 봉사적 신념하에 거대한 공비(工費)를 투자하야 신축하얏다. 차(此) 건물 급(及) 설비의 개요는 여좌(如左) 一, 위치 사리원 본정통(本町通) 二, 공사 소화 육년 십일월 기공, 칠년 오월 준공 三, 구조 ᄲᅡ라벗-도 식 관 이 계(階), 건(建) 일백사십평 四, 공비 이만오천원 五, 설비 영화상설 겸 극장으로 최신식 고급영사기 이대, 시사기 일대, 전기무대 회무대 도구 일식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5.05.08. 유일한 오락기관 개성좌를 매수, 유지(有志) 오씨(五氏)가 합자(合資)회사를 조직, 활동사진상설관으로 【개성】 부제 실시 후 상수도(上水道), 하수도(下水道) 부설과 시구개정(市區改正) 등의 급속도적 개성부의 토목사업으로 개성의 도시미관(都市美觀)을 향상하고 잇는 신흥도시 개성의 인구(人口)는 5만 이상을 포용하고 전서에서 멧재 안가는 대도시이나 그날그날 각자의 근로한 피로의 위안을 바들만한 곳 즉 오락기관(娛樂機關)이라고는 옥돌장(玉突場) 일개소, 마작(麻雀)구락부 2개소와 개성좌(開城座)라는 극장(劇場) 일개소 밧게는 없어서 항상 부민 일반이 개성좌를 더욱 내용을 충실히 하야가지고 활동사진상설관을 맨든다면 그들의 피로된 정신을 하로 몃시간에 자연의 위안을 밧고 질길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늣겨오든 중 이에 대하여 크게 동감을 일으킨 박봉진(朴鳳鎭), 공진태(孔鎭泰), 김재삼(金在三), 백순성(白順成), 리우균(李雨均) 오(五)씨는 3천원씩 출자하여 1만 5천원의 합자회사(合資會社)로 조직하야가지고 지난 사월 십일 동 극장을 매수하야 전부 수리를 거듭하고 일즉이 개성좌에 설치하지 못하던 (로라) 발성영화활동사진긔(發聲映畵活動寫眞機)를 사천 오백원에 매수하야 오월 일일에 장치하고 시사(試寫)를 행한바 성적이 대단 량호하야 삼일부터 일반 펜에게 공개하고 잇는데 이 긔계는 전선에서도 별로 보지 못하든 최신(로라)긔라 하며 앞으로는 명편의 영화만 특약하야서 공개한다고 하는 바 이로부터 신흥 개성도시도 한 개소의 오락기관일 망정 모든 시설이 완비되여서 5만 부민의 유일한 위안 할 곳이 될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