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춘몽
- 감독
- 송예진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김혜민, 정희정, 김녹연, 이우현, 김경민, 푸른솔 유치원 아이들
<춘몽> 촬영 현장, 감독 유현목과 배우 박수정.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만희를 옹호한 유현목,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다 1965년 초 <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이만희, 1965) 사건으로 이만희 감독이 옥고를 치르고 반공법 위반 혐의 조사가 진행되며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도중 또 하나의 검열 관련 사건이 발생했다. 1965년 3월 23일,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 본부가 신문회관에서 주최한 ‘은막의 자유’라는 세미나에서의 유현목의 발언이 문제 되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현목 은 헌법 제14조 에 의해 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규정되어 있음에도 “후진국이면서 ‘미묘한 사정’에 처해있는 나라의 국민은 아니 작가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라며 당대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의 일단을 내비쳤다. 이와 같은 발언이 정권 당국자를 불쾌하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다음의 인용 구절들이 문제가 되었다. 또 이를 즈음해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로서 반공사상을 보다 고차원적인 면에서 제공․주입할 시점에 놓여 있다. 일련의 반공법 위반혐의 사태는 이러한 때의 변화에 대해서 외면했거나 아니면 편협적인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 애국행위라 해둠이 옳을 것이다… 최고의 예술은 최고의 정치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그래서 생명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반공이라면 언제까지나 영화예술의 차원을 높여갈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영화예술의 차원 높은 표현의 수단을 빌지 않고 국시를 최고로 주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1 - 유현목, “은막의 자유”, 《경향신문》, 1965. 3. 24.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운운이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의 감독 이만희가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 된 정황 을 겨냥하고 있음은 누가 보더라도 손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고, 특히 “반공을 국시로…” 운운의 발언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1965년 초 반공법 위반 혐의로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상영이 중지되고 감독이 투옥되었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감독이 투옥된 첫 번째 사례다. 발표 후 3개월 반이 지난 7월 13일 유현목은 서울 지검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문제 삼은 대목은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일 수 없다. 한국의 작가는 국가적 현실 때문에 주체로서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였다. 또한 그가 그간 감독한 < 오발탄 >(1961), < 잉여인간 >(1964), < 순교자 >(1965) 등 일련의 영화 역시 문제가 되었다. *주2 이러한 검찰의 입장 발표로 인해 유현목은 반공이 한국의 국시임을 부인한 감독으로 이후까지 유명해졌다. 당시 원문이 없는 상태에서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검사가 인용한 이 워딩이 정확한지 의문이 든다. 당시 기사의 축약본에서 유현목은 반공이 국시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있고, 이후 판결문 역시 검찰의 논고 내용을 인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검찰 측이 문제를 과장하기 위해 인용문을 왜곡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시 검찰이 근거로 삼은 법규는 반공법 제4조 (“찬양 고무 등”)였는데 이는 이만희 감독에게 적용되었던 조항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검찰이 입건을 발표한 시기가 상당히 절묘하다. 반공법 위반과 함께 음란죄로 동시에 기소될 유현목의 연출작 < 춘몽 >(1965)이 개봉 중이었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춘몽>의 검열과정 유현목의 연출작 <춘몽>은 일본영화 <백일몽>(테츠지 다케치, 1964)의 리메이크작으로 원작 자체가 상당한 수위의 노출을 포함하는 문제작이었다. 애초 유현목은 이 영화의 파격적 노출 수위가 부담되어 거절하였으나 표현상의 전권을 부여하겠다는 제작사 측의 설득으로 결국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주3 치과에 들렀다 잠이 든 남성이 꿈속에서 병실에 있었던 여성이 치과의사에게 육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그녀를 구해내고자 하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과 노출, 독일 표현주의를 연상케 하는 실험성으로 주목받았다. 그 검열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우선 이 영화가 일본영화 <백일몽>의 번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남아있는 <춘몽>의 서류철 에 포함된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라는 내무 보고 문서를 통해 보건대 남아있는 제작신고 서류 이전(1964년 12월)에 이미 “일본인 원작 ‘백일몽’ 제작신고”가 접수되었으나 이듬해 1965년 1월 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반려되었다. 아마도 일본 원작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5년 2월 16일에 원작을 개작한 후 <춘몽>으로 제목을 바꾸고 제작신고가 되었으나 4월 22일 공보부는 다시 <백일몽>의 표절이라는 점과 내용이 비속하다는 점을 들어 반려하였다. 이에 제작사는 “전위적인 영화 표현”이라는 작품의 취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열네 군데의 수정 사항을 기재한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이후 공보부는 제작신고를 수리하였다. 영화 완성 후 본편의 검열신청은 1965년 5월 1일(접수는 5월 24일)에 이루어졌다. 본편 검열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5월 26일에 있었던 초심에서 중앙정보부는 이 영화에 대한 재심을 판정했고, 5월 31일 재심에서 역시 허가를 보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공보부 자문위원회는 3개처 제한 후 상영허가를 하면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6월 5일 “당부에서 영화 춘몽에 대한 재심 결과 그 내용이 자학적 변태성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한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244조 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공보부는 “본 작품이 외설이라 판단되는 부분을 대폭 삭제하고 상영허가 조치”할 것을 중앙정보부에 통보한 후, 상영을 허가했다. (좌)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반려" (<백일몽>의 표절, 내용의 비속으로 제작신고를 반려한 문서) (우) "방화 '춘몽' 상영허가 경위" (<춘몽>의 본편 검열경위를 기록한 공보부 내부 문서) 음란죄로 기소되다 지난한 검열과정을 거친 <춘몽>은 마침내 1965년 7월 3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가 개봉 중인 7월 14일 유현목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1966년 1월 4일 검찰은 유현목을 반공법 위반뿐 아니라 음화반포(혹은 제조) 혐의까지 더하여 기소하기에 이른다. *주4 한 감독이 반공법과 음란조항 위반으로 동시에 기소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영화 사상 감독이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경우는 이만희에 이어 두 번째, 음란죄로 기소된 것은 첫 번째 사례였다. <춘몽> 개봉 당시 신문광고(《조선일보》, 1965. 7. 2.) 이 영화가 음화반포(제조)죄 혐의를 받은 구체적인 정황은 영화를 제작할 당시 신인 여배우를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만들어 그녀의 뒷면을 촬영, 음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혐의는 논쟁의 여지가 다분했다. 촬영 당시 신체의 앞부분은 가린 상태였고, 뒷모습의 누드를 담은 6초 정도에 해당하는 이 분량은 검열 신청 전 이미 감독에 의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주5 즉 이 장면은 대중은커녕 검열관에게까지 공개되지 않은 장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검찰은 징역 1년 6개월 및 자격정지 1년 6개월의 유죄 취지로 구형한다. 판결은 1년이 지난 1967년 3월 15일 내려졌는데,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유죄 취지로 벌금 3만원을 선고하였다. 반공법 위반 부분에 대해 법원은 “①유피고인의 연설내용이 적성국가를 이롭게 할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추상적인 것이었고 ②영화 「7인의 여포로」에 대해서도 어느 특정 장면을 지적한 것이 아니며 단지 예술가의 일반자세를 논한 것이기 때문에 반공법 위반죄를 물을 수 없다”라고 판시했던 반면, *주6 음화반포(제조)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유죄의 취지를 밝혔다. 이 영화는 상대방 여자에게 폭행, 린치, 전기고문 등 가혹한 행위를 하여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현상을 보고 또 이와 같은 행위를 당하고 남녀가 서로 성적인 자극과 만족을 얻는 것을 그린 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변태성욕자에게 기어 완전 나체로 달아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므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양식에 비추어 정상인에게 이상한 성적 자극을 주고 수치, 혐오의 감정을 일으키게 함에 족하다고 인정된다. 헌법에서 보장된 학문•예술 및 표현의 자유도 헌법 제32조가 정한 공공복리에 의하여 제한되고 이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므로 이 범위를 벗어난 권리행위는 권리 남용에 해당하여 헌법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주7 - 서울형사지법 판결, 1967년 3월 10일 선고. 이 판결에 대해 당시 언론을 비롯한 법조계와 예술계 인사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제가 된 장면을 검열 전에 삭제했다면 그것은 음화 반포로 볼 수 없고, 촬영 당시 불과 10여 명의 스탭 앞에서 나체로 여배우가 등장했다고 했던 점 역시 음란물의 전시에 해당할 수 없으며(제243조 관련), 해당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해도 검열 전 삭제된 이상 그것은 완성품인 영화라 볼 수 없으므로 음화 제조라 볼 수 없다(제244조)는 것이다. *주8 이에 검찰과 유현목 감독은 공히 항소하였고, 항소의 결과는 다시 2년이 훌쩍 지난 1969년 10월에 나왔다. 당시 항소심을 맡은 서울형사지법 합의 2부는 반공법에 대해서는 역시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영화예술에서도 예술성과 음란성이 양립될 수 없으며 아무리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라도 음란성이 있을 때는 외설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취지로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주9 비록 선고유예이긴 하지만 유죄가 판결된 것이다. <춘몽> 중 한 장면 반공과 음란의 결합 “은막의 자유” 세미나 발표와 <춘몽>을 엮은 이 사례는 한 재판 대상에 반공과 음란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은 단순히 우연한 별개 사건에 대한 병합 재판의 사례일까? 아니면 일정한 연관관계에 의해 검찰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일까? 굳이 음모론의 입장에 서지 않더라도 두 사건의 연관성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세미나 발표의 불온성을 문제 삼고 싶었던 검찰의 입장에서 해당 사건만으로 사법적 처벌이 내려지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비슷한 시기의 <춘몽>에 대한 음란죄를 함께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검찰은 이러한 『춘몽』에 대한 판결에는 대체로 만족했다. 유감독을 반공법 위반으로 다루다가 우연히 인지하여 부산물(?)로 기소했던 것이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산물인 반공법 위반 부분이 무죄가 되었으니 시무룩… - “춘몽의 일장춘몽, 음화라고 유죄판결 나오게 된 사연”, 《신아일보》, 1967. 3. 16. ‘주산물’과 ‘부산물’을 나누고 있는 위 인용문은 당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권당국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말하자면 반공법을 비롯한 사상 혹은 사회적 문제는 정권당국이 ‘주’되게 관심을 가진 영역, 풍속은 ‘부’수적인 관심을 가진 영역이라는 의미일 터다. 이는 당대에 사상통제가 엄격히 이루어졌던 반면 풍속에 대한 검열은 상대적으로 완화되어 있었다는 검열 연구자들의 인식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 분리되어 보이는 두 주제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풍속에 대한 통제는 사상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거나 구실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효과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은막의 자유”와 <춘몽>의 병합 사례라 할 것이다. 검열은 최종적으로 인적 통제를 통해 완성된다. 검열의 최후의 수단이자 목표는 창작자를 향해 있다. 그것은 단일 작품에 대한 검열과 달리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사건의 유죄 판결 이후 동료인 김수용 은 “감독의 입장에서는 이 판결이 있은 이후 표현에 많은 심리적인 제한을 받게 되어 부득이 예술적으로 필요한 러브신이나 나체 면의 제작이 위축될 것 같다”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주10 그러나 이러한 위축은 유죄를 선고받은 음란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 주1. 이 기사에 실린 내용은 발표문의 원본이 아니라 축약본이다. 주2.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은막의 자유 발표”, 《동아일보》, 1965. 7. 14,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말썽”, 《조선일보》, 1965. 7. 14, “만물상”, 《조선일보》, 1965. 7. 15 등. 주3. “인터뷰, 40년만의 감개무량한 복원, <춘몽>의 유현목 감독”, 맥스무비, 2004. 7. 29. 주4.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음란죄의 근거로 삼았던 조항은 형법 제243조(음화등의 반포)였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감안컨대 음화 등의 제조를 규정한 244조 역시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법 제 243조는 “음란한 문서, 도화 기타 물건을 반포, 판매 또는 임대하거나 공연히 전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44조는 “전조의 행위에 공할 목적으로 음란한 물건을 제조, 소지, 수입 또는 수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주5.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열 전 삭제했다는 기사와 나일론 네글리제를 입힌 같은 신의 다른 대체 장면을 썼다는 기사가 병존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정황 서술의 구체성을 감안할 때 아마도 후자가 진실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주6. “영화 춘몽 음화로 판결, 유현목 감독에 벌금 3만원 선고”, 《한국일보》, 1967. 3. 16. 주7. 김재훈, 「음란성 개념 변화에 관한 연구: 대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전남대학교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100쪽. 주8. “영화 춘몽의 법 적용 시비, '공개 전 삭제... 유죄론 보기 힘들어'”, 《조선일보》, 1967. 3. 21. 주9. “춘몽은 '외설영화', 유현목 감독 선고유예”, 《서울신문》, 1969. 9. 25. 주10. “법 이전의 검열기구 활용을, 표현에 심리적인 제한”, 《동아일보》, 1967. 3. 18.
영화계에서는 지사의 풍모를 가진 엄격한 선배로, 가정에선 자상하고 인자한 아버지로 알려진 전창근 (全昌根) 감독은 고혈압으로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평소 자주 드나들던 남대문 근처의 다방에서 친구들과 담소하며 구상 중인 작품에 대해 설명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의 호방하고 다정다감한 기질은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두드러졌다. 그가 있는 자리에는 늘 활기가 넘쳤다. 동작의 폭도 컸고 사람을 끄는 힘도 있었다. 그의 몸짓 가운데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말할 때 상대방의 어깨를 툭 치는 일이었다. 이 버릇은 친근감을 나타내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이분을 반년 가까이 한 직장에서 모신 적이 있다. 창립 초기 서울 만리동에 자리 잡은 동성영화공사(대표 정병준 ) 시절이었다. 1962년 봄부터 가을이었을 것이다. 영화사 이름보다 만리동 촬영소로 더 잘 알려진 동성영화공사에는 고문인 전창근 선생 외에 시나리오작가 이정선 씨가 기획실장으로 근무했다. 기획실 벽에는 알랑 레네, 유현목 공동감독의 <파리에 간 한국여대생>(알랑 로브그리에 원작)을 비롯한 6편의 호화 라인업을 자랑하는 작품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 가운데 안익태의 교향악적 환상곡 ‘<코리아 판타지>(1936)’를 원작으로 한 <한국환상곡>이 창립 기념작으로 결정돼 제작발표회를 열었다. 조선호텔에서였다. 이 자리에는 작곡가 안익태 씨는 물론 주한 외교관들과 노기남 대주교까지 참석했다. 당시로선 유례없는 행사였다. 사회는 이 영화의 각본을 담당한 이진섭 씨가 맡았다. 그는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작곡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데다 프랑스어에도 능했다. 나는 이전에 그가 구사하는 프랑스어를 들은 적이 있다. 명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의 내한 공연 때였다. 그런데 전창근 선생이 <한국환상곡>의 연출을 맡게 된 것이다. 나는 다음 날 그를 따라 안익태 씨가 묵고 있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로 찾아가 앞으로 나올 시나리오의 방향에 대해 의견을 들었다. 그러나 록 허드슨과 필립 안을 출연자로 내세워 홍보한 <한국환상곡>은 얼마 못 가 작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과욕이 빚어낸 일장춘몽이었다. 아니, 한국영화제작사(史)에 남을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 회사의 기획실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정병준 사장의 친구이자 문학도였던 대학 선배 김희로(전 부산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 씨의 소개로 시나리오의 집필을 부탁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회사가 마련해준 만리동 고개의 영화촬영소 앞 봉래여관에 묵으면서 나는 미리 정해준 <아내 일곱 가진 사나이>라는 제목에 맞춰 시나리오 집필에 매달렸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도 마무리할 수가 없었다. 글을 쓰는 짬짬이 회사의 일을 도와야 하는 데다 밤늦게 영화의 녹음을 끝낸 성우들이 여관으로 몰려와 술자리나 포커판을 벌이는 바람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야간 통행금지 제도가 있어 여관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보니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대개 이런 날엔 전창근 선생의 우렁찬 목소리가 아침부터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김군, 아직도 자나?”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방 앞에까지 와서 “종원이, 방에 있나?” 이렇게 깨우곤 했다. 그는 비록 <한국환상곡>은 무산되었지만, 대안으로 내놓은 자작 시나리오 < 운명의 골짜기 >에 대한 소감을 묻고, 촬영에 들어가면 아내( 유계선 )와 딸( 전향이 )을 출연시킬 생각이라는 계획까지 들려주었다. 그는 보통 나를 “김군!”으로 지칭하다가도 얘기가 마음에 들거나 기분이 좋을 때면 농담조로 “어이 내 사위!”하며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다. 이런 나에게 시나리오 대신 부여된 일이 기획실 상근이었다. 무엇보다 글쓰기의 족쇄에서 풀려난 데다 유명한 감독과 한방을 쓰게 된 것이 더욱 기뻤다. 게다가 제작 현장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전 선생은 평소에도 입이 건 편이었다. 그전에도 그가 친구들과 나누는 농담을 들은 적이 있는데, 특히 영화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던 명동 나일구다방 시절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가깝게 지낸 유두연 (劉斗演) 감독(영화평론가 유지나 교수의 부친)과 얘기를 나누던 중에 “자네, 미로뎁보 맞아보니 어때? 죽여주지?”이런 말을 하며 크게 웃던 모습이 대표적인 예다. 미로뎁보는 1960년대 초 일부 남성들 사이에 성행한 정력제 주사였다. 쾌활한 투사의 이미지로 남은 영화인 1908년 1월 18일 나운규를 배출한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전창근 선생은 회령소학교를 다녔다. 그가 고등과 시절부터 활동사진과 연극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이런 선배들의 영향이 컸다. 그가 나운규 의 도움에 힘입어 윤백남프로덕션의 연구생으로 들어간 것은 < 심청전 >( 이경손 , 1925)을 끝내고 다음작품을 준비할 때였다. 그때만 해도 고향의 어머니로부터 매달 30원의 학비를 받는 학생 신분(중앙고보 2학년)이었다. 그런데 고려키네마와 공동 제작한 이 프로덕션의 두 번째 작품 < 개척자 >(이경손, 1925)에서 미치광이 역을 맡아 카메라 앞에 선일이 알려지면서 송금이 끊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운규가 광대가 된 자식 때문에 낙심해하는 회령의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다시는 활동사진에 나오지 못하도록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뒤에 야 겨우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나운규는 전창근 선생보다 여섯살 위였지만, 친구처럼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전 선생의 학비는 물론 하숙집 밥을 축내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팬티까지 얻어 입을 정도였다. 01) 전창근 청년은 윤백남프로덕션이 해산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는 이후 정기탁 감독의 <애국혼>(1930)과 이경손 감독의 < 양자강 >(1931) 등에 출연하고, 1938년 고국으로 돌아와 < 복지만리 >(1941)를 각본, 감독, 주연을 맡아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관객에게 심어준 인상은 각본을 쓰고 연출하는 영화작가로서보다는 < 자유만세 >( 최인규 , 1946)의 지하 독립운동가나, <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전창근, 1959), < 아아 백범 김구선생 >(전창근, 1960)의 경우처럼 항일 독립투사의 이미지였다. 항상 스포츠형의 짧은 머리와 혈색 좋은 모습으로 장년의 힘을 과시했던 만능 영화인 전창근 선생은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1973년 1월 19일 요양 중이던 경기도 고양군 삼각산의 작은 절효자암에서 예순여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장호 감독의 필모그라피 가운데 < 별들의 고향 >으로 시작된 1기에 대해선 그다지 깊이 있게 조명되고 있지 못하다. 최인호 의 소설을 데뷔작으로 만들어 한국 영화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풍운아가 된 이래 좌충우돌 생맥주와 통기타로 대변되는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던 이장호의 그 시기는 짧은 일장춘몽처럼 끝났다. 대중문화계에 불어 닥친 대마초 파동으로 이장호는 군사정권으로부터 활동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 바람 불어 좋은 날 >로 재기하기 까지 이장호는 생애 가장 왕성한 상상력을 발휘할 시기를 울분과 좌절로 보냈다. 그 결과 사회적 의식에 눈떠 정치적으로 좀 더 진보적이고 형식적으로도 훨씬 전위적인 2기 이장호 필모그라피가 시작될 수 있었다, 라는 것이 대체로 공인된 비평적 시각이다. 이장호 가 대마초 파동으로 타의에 의해 영화감독 활동을 잠지 접지 않았더라면, 이장호의 영화세계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얼마 전 < 어제 내린 비 >를 스크린으로 처음 본 후 이장호에게 강제된 휴지기가 없었다면 또 다른 근사한 필모그라피가 생겨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내린 비>는 이장호의 두 번째 연출작이자 이장호의 동생 이영호 의 데뷔작이며 < 별들의 고향 >으로 스타가 된 안인숙 의 마지막 영화출연작이다. 크레딧 시퀀스의 자막이 화면에서 다 씻겨 나갈 만큼 부실한 제작여건 속에서 오로지 감각으로 들이밀며 좌충우돌 찍어낸 흔적이 역력한 이 영화가 개인적으로 나는 좋았다. 수일한 완성도는 아니지만 1970년대 당시 새롭다고 느껴질 만한 감성이 도드라지게 있었다. 정치적으로 퇴행적이고 패배주의적이며 당국으로부터는 퇴폐적이라고 지적당할 만한 부분이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좋았다. < 어제 내린 비 >는 오늘날 텔레비전에서 막장 드라마라고 불리는 유형의 스토리로 펼쳐지는 영화이다. 김희라 가 연기하는 영후는 스물 두 살의 청년인데 어느 날 아버지가 본가로 데려간다. 영후는 흔히 말하는 첩의 자식이었다. ‘멍텅구리 새끼야’를 입에 달고 살았던 친모로부터 살가운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자란 그는 눈치 10단이다. 가슴에 뜨거운 불덩이를 안고 있지만 겉으로 발산하지는 못한다. 만능 스포츠맨이지만 실제 경기에는 나서지 못한다. 경기에 나서면 승부에 지는 것이 두려워 지레 포기한다. 그런 영후가 들어간 본가는 유복한 상류층 생활을 누리고 있고 천사같은 외모로 마음에 주름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복동생 영욱이 있다. 이영호 가 연기하는 이 인물은 대지에 발을 딛고 사는 것 같지 않은, 늘 먼 곳을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아마추어 가수이며 세상으로부터 구겨지지 않은 청년이다. 영후는 눈치 빠르게 새 생활에 적응한다. 이복동생 영욱의 신뢰를 얻고 새 어머니의 마음도 훔친다. 영후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 영욱의 여자친구인 민정이다. 민정을 보고 첫 눈에 반한 영후는 민정을 따라다니지만 그녀가 영욱의 약혼녀로 양가 집안에서 공인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자기 사랑을 접는다. 처음에 영후의 접근을 거부했던 민정은 영후의 사랑받지 못한 거친 파괴적 면모에 스르륵 마음이 이끌려 나중에는 그녀가 자발적으로 영후에게 다가온다. 축복받지 못할 이들의 관계는 예상했던 대로 파국으로 치닫는다. 약간의 반전과 굴곡이 더해지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서 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고아의식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 고아의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물질에 삶의 모든 걸 걸고 매진한 부모세대로부터 느끼는 이물감과 성공지상주의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면 다른 것은 방임하는 도덕적 진공상태와 스스로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반항감을 넘쳐나는 청년의 에너지로 끌어안고 파괴적인 질주로 나아가는 그 무정형의 의식과 행동이 묘한 친밀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 어제 내린 비 >는 들쑥날쑥한 완성도와 상관없이 감독의 터치를, 배우들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청년 이장호 에게는 아직 매체를 장악할 만한 능란함이 없으나 영화 매체의 관습을 거꾸러트리겠다는 야심만은 화면 곳곳에 묻어난다. 김희라 는 뭉툭하고 강인한 몸짓으로 청년기의 거센 기운을 화면에 뿜어낸다. 자기방임적인 꽃미남의 개방된 연약함을 드러내는 이영호 의 존재감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그런 매력은 인생의 특정 시기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안인숙 의 매력은 명불허전이다. 그 시기 영화에 곧잘 나오는 겉으로는 도도하지만 속으로는 순진한 전형적인 청춘여성의 전형인데, 허물어질 아름다움을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있는 불가항력의 몸짓을 화면 가득 채우고 있다. 그 밖의 보너스라면, 최인호의 소설에서 빚졌을 대사, 이를테면 “난 네 엉덩이가 좋아. 망아지의 엉덩이처럼 예뻐.”와 같은 말투도 마음에 든다. 이런 감성은 이제 이 시대에선 사라져버린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 영화가 주는 매력의 전부 다가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