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
- 감독
- F.W. 무르나우
- 제작년도
- 1927
- 출연
- 조지 오브라이언, 자넷 게이너, 보딜 로싱, J. 파렐 맥도날드
경성고등연예관은 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흥행사 가네하라 긴조(金原金藏)가 황금정 제63통 7호에 세운 조선 최초의 활동사진전용관으로 1910년 2월 18일 개관했다. 《국민신보》에 게재된 광고를 보면 경성고등연예관은 1909년 10월 영업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면서 다음해인 1910년 2월까지 개관이 연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고등연예관이 처음 자리한 ‘황금정 제63통 7호’는 원래 남부(南部) 조동(棗洞), 즉 대추나무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경성고등연예관은 여기 농상공부(農商工部) 건너편, 지금의 기업은행 본점 자리에 세워졌다가 1911년 9월, 맞은편인 황금정 3번지로 신축 이전했다. 현재 모 증권회사빌딩이 자리한 곳이다. 그러나 1912년 6월 황금정 도로 확장으로 건물의 일부가 헐리게 되자 영업을 중단, 개축하여 1912년 9월 16일 영업을 재개한다. 경성고등연예관의 설립자 가네하라 긴조는 태국에서 와타나베 토모요리(渡邊智賴)라는 사람 밑에서 활동사진업을 했는데, 조선에 건너와 경성고등연예관을 세우고 와타나베가 운영하던 ‘K다이아몬드’ 회사 배급작을 들여와 상영했다. 와타나베는 태국의 초기 영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태국에 일본식 흥행 문화가 정착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와타나베나 가네하라처럼 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눈을 돌린 배경에는, 태국에서의 흥행 경험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던 조선의 활동사진 흥행업 진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개관 직후 경성고등연예관의 프로그램은 다양한 장르의 단편영화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 사이사이 간단한 무용 등의 여흥이 곁들여졌다. 이 프로그램은 영화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프로그램의 교체 주기는 시기마다 차이가 있는데, 개관 이후 1910년 5월까지는 월 2회(매월 1일, 15일) 교체되었고 6월부터는 월 3회(매월 1일, 11일, 21일) 교체됐다. 1912년 3월 1일부터 1913년 3월 말까지는 다시 월 2회(매월 1일, 15일)가 되었으나, 경쟁 영화관들이 1주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체하기 시작하자 1913년 4월부터 폐관되는 9월까지는 일주일마다 프로그램을 바꿨다. [자료] 경성고등연예관 개관 광고(《황성신문》, 1910.02.18) 앞서 언급했듯이 경성고등연예관에서 상영한 필름은 태국의 영화회사 K다이아몬드가 배급한 것이었다. K다이아몬드는 1910년 쭐랄롱꼰 국왕의 장례식을 기록하는 등 태국의 왕실 행사를 담은 실사영화를 여러 편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를 따라 경성고등연예관 또한 조직을 정비하고 환등 및 활동사진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11년 8월 경성고등연예관의 신축 이전을 앞두고 조선에 건너온 가네하라는 활동사진 제작과 상영을 위해 가네하라상회를 신설, 산하에 연예부, 사진부, 판매부를 두었다. 연예부에서는 경성고등연예관과 활동사진순업대를 운영하고 사진부에서는 환등과 활동사진을 제작하며 판매부에서는 활동사진 필름이나 환등 기계 등 다양한 물품들을 판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경성고등연예관에서는 1912년 9월 16일 재개관을 맞아 촬영부를 개설하고 본격적으로 환등과 활동사진 제작에 나선다. 더 나아가 1913년 2월에는 여흥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전기응용 방식을 대신할 키네오라마(キネオラマ)를 설치했다. 키네오라마는 일출(日出), 석립(夕立, 소나기), 석효(夕燒, 저녁노을), 명월(明月) 등의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치였다. 1913년 전후로 대정관을 위시하여 우미관, 황금관 등 세 곳의 활동사진 상설관이 등장하자 경성고등연예관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에 1913년 4월 1일을 기해 경성고등연예관은 대대적인 혁신을 선언한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구(新舊) 일본극을 더하여 매주 프로그램을 바꾼다. 둘째, 입장료를 저렴하게 개정한다. 셋째, 도쿄에서 변사 후지모토 류코(藤本龍光)를 초빙하여 다나카 아사히유(田中旭湯)와 함께 활동사진 설명을 맡겨 변사 진용을 강화한다. 다섯째, 관객의 대우를 한층 새롭게 한다. 이러한 조치는 조선인과 일본인 관객을 모두 유인하려던 기존의 전략을 포기, 일본인 전용관으로 바꾸겠다는 뜻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전용관으로 전환하며 대대적인 혁신을 시도했음에도 경성고등연예관은 치열한 상설관 사이의 경쟁에서 도태되었고, 결국 1913년 9월 1일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을 선언한다. 경성고등연예관의 건물과 흥행권은 대정관을 운영하던 닛타 고이치(新田耕市)에게 매각되었으며, 이후 경성고등연예관은 제2대정관이라 이름이 바뀌어 1913년 10월 31일부터 운영을 재개했다. 제2대정관 개관 광고에는 주임 변사 이마이 요시카(今井芳香), 차석 변사 와타나베 마쓰카제(渡邊松風)라 기록되었다. [자료] 제2대정관 개관 광고(≪조선신문≫, 1913.10.30) 제2대정관이 개관하면서 경성의 일본인 상설관은 제1대정관(대정관), 제2대정관, 황금관 세 곳이 된 반면 아직 조선인 상설관은 우미관 한 곳뿐이었다. 닛타 고이치는 대정관, 제2대정관, 황금관 3개관이 6~7만 명에 불과한 경성의 일본인 관객들을 나누는 것보다는, 하야가와연예부의 필름을 제공받아 20만 명의 조선인 관객을 독점하던 우미관을 견제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제2대정관을 조선인상설관으로 전환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1914년 6월, 제2대정관의 유일한 조선인 변사였던 김덕경(金悳經)을 변사장에 임명하고, 설명 주임 이병조(李丙祚), 차석 최병룡(崔炳龍) 등의 변사진을 꾸려 조선인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한다. 당시 제2대정관에서는 일본인 상설관에서 상영하던 방식대로 여러 명의 변사들이 출연하여 마치 오늘날의 성우와 같이 각자 주어진 배역을 맡아 스크린 속 배우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그뿐 아니라 여변사 강경옥(康鏡玉)과 소년변사 이병호(李丙浩)를 두어 여자 배역과 아이역의 연기를 담당하게 했다. 이처럼 영화 속 어떤 배역의 목소리를 도맡아 연기하는 변사를 연극변사 혹은 성색(聲色)변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조선인 상설관은 활동사진의 배경을 설명해주거나 타이틀을 읽어주는 역할의 소위 설명변사가 독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제2대정관의 연극변사 제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듯 보인다. 제2대정관을 조선인 상설관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려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닛타연예부는 대정관의 경쟁 상대인 황금관을 견제하기로 전략을 바꾼다.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로부터 필름을 제공받던 우미관을 공략하여 하야가와연예부 대신 제2대정관의 필름을 함께 사용하는 동시에 제2대정관을 일본인 전용관으로 되돌리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1915년 4월 제2대정관은 조선인 상설관에서 다시 일본인 상설관으로 전환되어 세계관(世界館)이라고 이름까지 바꾼다. 특약에 따라 제2대정관을 운영하던 닛다연예부는 우미관으로부터 매달 2백원의 보상금을 받기로 했으며, 우미관은 세계관과 같은 필름을 매월 5백 원의 싼 가격으로 공급받아 사용하기로 했다. 이로써 닛다연예부에서 운영하던 세계관은 경성 서쪽의 일본인들을 주요한 관객으로 삼을 수 있었고, 닛다연예부의 필름을 공급받는 우미관은 경성의 20만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유일한 조선인 상설관이라는 지위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 전용관으로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관은 폐관한다. 1915년 9월 20일 본정 한복판에 유락관(有樂館)이 들어서면서 활동사진 흥행 권리를 유락관에 넘기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경성고등연예관을 시작으로 제2대정관, 세계관으로 이어진 영화관의 역사가 사라지고 그 권리만 유락관으로 옮겨갔다. 경성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은 훗날 영화관과 상관없는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더 이상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99~134쪽. [사진](상단). 경성고등연예관 외관(《국민신보(國民新報)》, 1909년 10월 5일자.) [자료] 《황성신문》, 1910.02.20. 世界 苐一 活動冩真 開館 ● 本舘新築落成 에 就 야 二月 十八日(陰曆 正月 九日) 로 開館 ● 二月 二十日(陰曆 正月 十一日 午后 六時 브터 年中無休 로 一般 顧客 의 觀覽 에 供 ● 本館 의 寫眞 은 佛國 파데 會社 의 最新 器機 를 使用 고 每週 輸入 世界 各國 의 最 히 壯觀 에 極 山水 의 風景、人事 의 現象 은 勿論、滑稽、奇術 及 世界 有名 의 諸般 珍事 를 映寫 야 一般 活動寫眞界 에셔 斷 히 企及 키 能 치 못 것을 明言 ● 本館 은 寫眞 의 外 에 日本 美人 의 花 와 如 電氣踊 을 間間 히 行 고 且 韓國 妓生 의 舞踏 를 加 야 錦上添花 의 觀覽 이 有 ● 本舘 의 建築 宏壯 은 內部 의 完全、 장 篩 의 美麗、待遇 의 懇篤、衛生 設備 의 整然 이 模範的 演藝舘 이 될 것을 一般 에게 誇張 ● 本館 의 擔任 技師 靑森縣人 中村初太郞 이니 活動寫眞業 의 本邦 創業 以來 로 吉澤商店 及 파데 會社 에 技師 兼 敎授 의 任 에 在 야 精巧 老鍊 의 技術 이 有 야 斯界 의 錚錚 의 評 이 有 바 其 映寫 의 巧妙 本館 의 壯談 바요 ● 高尙 고 優美 活動寫眞 은 敎育 又 家庭 의 一時 娛樂 이 此 에 優 것이 無 니 開舘 後 陸續 御來覽 심을 深 히 希望 入場料 四等 金拾錢 三等 金貳拾錢 二等 金參拾錢 一等 金伍拾錢 特等 金一圓 每日 午後 六時 開舘 但 五人 以上 組合 觀覽者 에게 一割引 十人 은 二割引 京城黃金町(農商工部通) (南部東洞) 京城高等演藝舘 [자료] 《황성신문》, 1910.04.10. ● 銀甁 下賜 大皇帝 陛下 게 셔 去七日 에 高等演藝館 에 活動寫眞 을 招入 御覽 심은 已報 어니와 該 館主 日本人 宮田伊助 에게 銀製 花甁 一個 를 下賜 셧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1.08.11. ● 金原商會 의 新設 目下 黃金町 三番地 에 新築 落成 은 九月頃 인 故 로 卽時 開業 다 向者 에 館主 金原 氏 가 來鮮 야 營業 의 方針 을 變更 고 京城高等演藝館 은 仝會 의 演藝部 가 되야 今後 에 大改良 을 加 고 昔年 東京 에셔 郵便局長 으로 勤務 던 成淸 氏 를 招 야 演藝部 로 敎育的 活動寫眞 으로써 全道 에 巡業 케 며 又 寫眞部長 에 工山 氏 招聘 며 又 東京 三越吳服店 의 寫眞部 에 在 야 技術 이 卓越 大庭 氏 超 야 一般 寫眞 의 撮形 은 勿論 고 活動畵 及 幻灯 도 製作 케 며 販賣部 活動寫眞畵 及 幻燈器械 外 에 日鮮人 의 實用品 도 薄利 로써 販賣 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4.06.03. ● 第二大正館 新面目 ▲ 구리 뎨이대졍관에셔 ▲ ▲ 슌젼 죠션인을 위 활동 ▲ 이왕 , 구리개 고등연예관을 , 뎨일대졍관에셔 사드린 후 , 일홈을 뎨이대졍관 ( 第二大正館 ) 으로 곳치고 , 활동사진을 영샤 즁이더니 , 시셰의 요구를 응 여 , 오 날 지 , 디인의 경영으로 , 디인 변 ( 辯士 ) 지 두고 , 뎐업 던 것을 , 일톄 페지 고 , 죠션사 으로 야곰 , 사진 셜명을 계 야 , 죠션인 젼문 ( 專門 ) 으로 뎡 고 , 참신 긔발 , 셰게 인졍 풍속 등 , 여러 가지 사진을 가져다가 , 오 밤부터 , 시작 다 오 밤부터 흘 동안은 , 입장료 ( 入場料 ) 를 특별히 감 야 , 웃층은 평균 십젼으로 , 아 층은 , 평균 오젼으로 다 며 , 젼덕경 ( 全德經 ) 최병룡 ( 崔炳龍 ) 두 변 의 류챵 쾌활 설명이 , 잇슬 터이라더라 .
구술사로 조명하는 1960~1970년대 액션영화 연간 200여 편이 넘게 제작되며 대중문화의 유행을 선도하고 산업적인 전성기를 이끈 1960년대 한국영화는 다양한 방면으로 연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와 깊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급속도로 확대‧성장한 매체의 특성으로 짧은 시간 동안 유입된 영화계의 많은 인력을 살펴보는 것은 녹록하지 않은 일이다. 영화산업 성장의 근간이 되는 제작규모와 그에 따른 인력 배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그나마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장르별, 제작사별, 시기별로 구분해 흐름을 살피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불안정한 제작 시스템과 상영관 규모 대비 과도한 제작 편수로 인해 분류화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규모에 상응하는 방대한 영상사료와 문서사료를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수행되어야 할 방법론이 구술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구술사방법론은 역사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사건이나 주변부의 인물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또 다른 방면에서 역사를 바라보게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 구술사 프로젝트에서 다양한 직능별로 이루어진 인력 구술은 이와 같은 여러 방면에 걸친 새로운 방식의 역사쓰기에 일조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배우 김영인의 구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1960~1970년대 액션영화의 흐름과 변화이다. 2016년 한국영화 주제사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한국영화산업의 변화’에서 장르영화의 배우를 대표하여 이루어진 이 구술은 문서사료에는 기록될 수 없는 세밀한 현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의 구술은 특히 1960~1970년대 여러 장르가 번성하는 가운데 제작편수의 큰 부분을 차지한 액션영화를 다채롭게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시기별로 변화하는 액션연출과 액션연기의 변화에 대한 설명은 장르영화의 성장과 확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특정 사례가 될 수 있다. 일례로 그는 1대1 액션과 군중신의 촬영비화, 무술지도의 원칙 등을 큰 틀로 하여 1960~1970년대 액션영화의 특징을 구술한다. 그가 데뷔한 1961년부터 활발하게 활동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우연히도 액션영화의 성장과 쇠퇴와 맞물려있는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1960년대 규모가 확대되기 시작한 한국영화산업의 성장 이면에서 인력의 유입과 이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그림1) 김영인 한국영상자료원 구술에서 특징적인 점 중 하나는 영화의 특성상 다양한 분야의 스태프 구술이 상당수 이루어졌다는 점인데, 특정 감독이나 배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뒷스태프’는 방대한 사료가 무색할 만큼 제대로 된 기본자료 하나 찾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의 크레디트에 기록되지 않은 경우도 자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오롯이 구술자의 기억과 필름이 보존된 영화를 중심으로 구술을 완성해가야 한다. 때문에 영화의 기본 제작정보를 기반으로 구술자와 연구자가 내용을 쌓아 구술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네트워크를 그려내야 한다. 배우 김영인의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활동 기간이 비교적 긴 반면에 조연으로 오랜 기간 활동한 탓에 매체 노출이 거의 없었고, 구술이나 회고록 등의 작업물도 없어 1차 자료를 수집하기가 어려우며 한국영상자료원의 데이터베이스 자료와 영상물 외에는 참고할 자료가 미비하다. 이럴 경우 최선의 방법은 예비접촉을 통해 질문지를 구성하는 것인데, 이러한 예비접촉을 바탕으로 구성한 김영인 구술의 큰 항목들은 첫째, 영화계 입문 배경, 둘째, 배우 데뷔 후의 연기활동, 셋째, 무술지도에 관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데뷔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력을 회고함으로써 액션배우 김영인의 활동이 완성되었다. (그림2) 액션영화 촬영현장에서 ‘날으는 배우’의 탄생과 액션영화의 생생한 현장이야기 1) ‘스턴트맨’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도 않던 시절, 김영인은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에서 주인공들의 액션 장면을 대신하며 ‘날으는 배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본인이 출연한 장면이 대역이란 것도 모를 정도로 영화제작 시스템에 어두웠던 그는 1966년 김기덕 감독의 조언으로 <불타는 청춘>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중 있는 배역이란 언급에 큰 맘 먹고 빚까지 내 신사복 세 벌을 맞췄다. 하지만 그가 맡은 역할이 ‘깡패’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맞춤옷들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결국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한 구제 점퍼가 ‘유니폼’이 되었다. (그림3)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신문광고 데뷔작 이후 김영인은 <어명>(강조원, 1967), <실록 김두한>(김효천, 1974), <동백꽃 신사>(이혁수, 1979) 등의 영화부터 2000년대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 2002), <아라한 장풍대작전>(류승완, 2004)까지 지난 반세기 동안 다수의 액션영화에서 활약했다. (사진 4)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 2002)의 백골 역의 김영인과 불곰역의 백찬기 (사진 5) <아라한 장풍대작전>(류승완, 2004) 왽쪽부터 김영인, 김지영, 안성기, 윤주상, 백찬기 1940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한 그는 학창시절에는 권투를 비롯한 다양한 운동을 섭렵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특히 1960년대 유명한 권투선수들을 배출한 한국체육관에서는 꽤 높은 순번인 ‘27번’을 받아 아마추어 시합에도 출전할 정도였다. 이 때 익힌 권투와 유도, 가라테 등은 후일 본인의 액션 연기뿐만 아니라 액션 지도를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김영인의 구술은 본인이 출연하고 지도한 영화들의 액션 장면과 관련한 에피소드들을 세세하게 풀어놓는다. 그의 구술로 1960~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관습적인 장면이 어떤 배경으로 탄생했는지 알 수 있다. 죽고 싶지 않은 배우와 필름을 아끼고 싶은 감독 사이의 신경전으로 “‘으아아악!’ 하구 그냥 멫 바꾸 돌아가서 그런 척을 했다가 쓰러져 가주구선 그냥 죽어야 될 텐데 안 죽구 풀 있는 거 풀 다 뽑구선 일어났다가 죽었다”는 에피소드나 한겨울 촬영한 사극에서 “말이 뛰구 돌아야 하는데 대개! 횃불 있는 데 가서 다 죽어” 있는 에피소드는 당시 한국영화 제작현장의 열악함이 만들어낸 장르적 관습을 보여준다. (그림6) <어명>(강조원, 1967) 포스터 액션영화에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조직원들’의 반응 쇼트는 카메라를 한 번이라도 더 받기 위한 조·단역 배우들의 열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팔에 찬 단도를 보여주기 위해 괜스레 소매를 한 번 걷어 올린다거나 일부러 눈에 띄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보이더라도 양 손목에 시계를 찬다거나 단추라도 하나 더 달았다거나 하는 에피소드들은 그만큼 카메라 뒤에서 벌어지는 경쟁이 치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소품 전쟁”에서 18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은 구술자가 액션 영화에서 꾸준히 활약하는 데 자산이 되었다. 액션 연기와 지도에서 구술자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현장감과 타이밍 그리고 약속이다. 이를 바탕으로 아무리 작은 장면일지라도 실제 ‘싸움’에서 볼 수 있는 ‘몸짓’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액션 영화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과장이 필요하더라도 실전과 너무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액션 지도를 할 때 가장 강조한 것 중의 하나가 리허설을 통한 ‘약속’이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실록 김두한>의 박치기대장 성팔이의 액션과 <동백꽃 신사>의 클라이맥스 액션은 이러한 약속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실록 김두한>의 대미를 장식하는 종로 거리 액션은 안양촬영소에서 3일에 걸쳐 촬영했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중요한 장면이었다. 성산일출봉에서 촬영한 <동백꽃 신사>의 마지막 장면은 “틀림없이 죽어야 되는 장소”인 벼랑 끝에서 한 촬영이라 감독은커녕 카메라조차 대동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이러한 악조건 때문에 이대근과의 생동감 넘치는 일대일 액션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림7) <동백꽃 신사>(이혁수, 1979) 포스터 1960~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성장과 변화 1960년대 초중반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 정창화, 이만희 등을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스릴러와 만주물 등이 관객의 사랑을 받으며 한국 액션영화의 성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형사극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사극영화의 군중신 등도 액션영화가 다양화되는 데 역할을 했다. 다양한 액션영화의 등장에 맞춰 액션연출도 시기별로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김영인의 출연작을 큰 줄기로 하여 액션연출과 액션연기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구술자가 한국영화 역사상 ‘거의 최초’의 스턴트맨으로 활약한 <5인의 해병>에서 주인공 5인의 액션연기는 지금 보면 단순한 움직임에 불과하지만 그 시기 전쟁 액션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기본적인 액션의 상황들을 보여주고 있다. 포탄 폭발, 전투 사격 등에 맞춰 몸을 좌우 혹은 상하로 움직여주는 연기들은 다양한 앵글로 표현되지 못한 탓에 액션의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군중 신의 경우도 롱 쇼트로 지나가는 경우가 많기에 그 규모를 세밀하게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날으는 배우’의 진면목은 여간해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시기 전쟁액션의 제작스타일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불과 2년 후에 제작된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에서 이만희 감독과 서정민 촬영감독의 스타일로 완성된 화려한 전쟁액션과 비교해본다면 1960년대 초기의 액션의 규모가 가늠될 것이다. (그림8)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군중 액션 <어명>을 통해서는 1960년대 중후반 수입되기 시작한 홍콩 무협영화와 한국에는 수입될 수 없었지만 흥행이나 스타일면에서 아시아 각 전역의 영화에 영향을 끼친 <자토이치> 시리즈를 필두로 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이 한국 액션영화에 미친 파급력을 추측해볼 수 있다. <어명>은 영화의 스타일 자체가 홍콩 무협영화와 일본 검객영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일본인 무술감독 나카하라 신(中原伸)의 영입은 이와 같은 스타일의 영향을 한국 액션영화에 녹여내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영인은 구술에서 나카하라 신이 연출한 액션 신을 언급하며 홍콩영화와 일본영화에서 활용하는 ‘검술액션 연기’를 “세밀한 동선을 기본으로 지도하는 무용과도 같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의 구술을 통해 일본인 무술감독의 영입이 한국의 검객영화에서 액션을 좀 더 유려하게 연출하는 데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9) <방랑의 결투>(호금전, 1966) 신문광고 (그림 10) <자토이치> 포스터 (그림11, 12, 13) <어명>(강조원, 1967)에서 나카하라 신이 지도한 액션 장면 1960년대 후반 영화 <샹하이부르스>와 <사나이 삼대>를 통해서는 한국 현대물 액션영화에서 액션연출이 좀 더 세밀해지고 화려해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아마도 1960년대 <007> 시리즈와 마카로니 웨스턴 시리즈로 대표되는 서양 액션영화의 폭발적인 인기가 한국의 영화 관객과 한국 액션영화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대 후반 영화계에 새롭게 유입된 젊은 남성 배우들은 대규모 군중 신을 필수로 하는 현대물 액션과 무협 액션이 다수 제작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인력의 확대는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해봤을 때 규모면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었으며, 액션 연출의 측면에서도 규모의 성장뿐만 아니라 좀 더 깊이 있고 화려한 액션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14, 15, 16, 17) <샹하이부르스>(김기덕, 1969) 액션 장면 (세번째 사진에서 왼쪽이 김영인) <김두한> 시리즈(김효천)는 이러한 액션연출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TV 연기자까지 인력의 풀을 확대한 이 영화는 제작 규모도 컸지만 다양한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대규모 액션 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전의 영화들에서 군중 액션 신의 조연 연기자들이 단체로 명시되거나 인식될 뿐 각각의 캐릭터 액션은 힘들었던 것에 비해 이 영화는 급격하게 커진 액션 규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군상들의 캐릭터들을 창조해 액션의 특기를 하나씩 부여함으로써 ‘캐릭터 액션’을 만들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인 <실록 김두한>의 엄청난 흥행은 이러한 캐릭터 액션의 성공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었으며, 캐릭터의 성공적인 안착은 시리즈물이 연달아 성공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김두한> 시리즈의 성공은 1970년대 합작액션영화들과 함께 캐릭터를 기반으로 하는 시리즈 액션물이 유행하는 데 도화선이 되었다. 따라서 1970년대 후반 이후의 액션영화들이 이야기 중심보다는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시리즈 액션물 중심으로 번성한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실록 김두한>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사진 18, 19, 20, 21, 22)<실록 김두한>(김효천, 1974) 종로거리 액션. 마지막 사진의 가운데가 김영인 김영인 구술의 의미와 평가 상기한 것처럼 김영인의 구술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액션영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와 더불어 그의 구술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학창시절 외국영화 관람의 경험이다. 1회라는 한정된 시간 때문에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짧은 시간 구술자가 예로 든 관람 환경과 예시로 든 영화는 흥미롭다. 학생 입장에서 개봉관은커녕 2번관도 가기 힘들어 3번관 이하의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했는데, 이 영화들은 주로 서부영화였으며, 데뷔 후 이 영화들의 액션을 많이 참조했다는 내용이 그것인데, 이러한 구술은 외국영화가 배우의 디테일한 연기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군중 신의 촬영 뒷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액션영화 촬영현장의 풍경이다. 액션영화의 특징 중 하나로 조직 대 조직의 대결을 들 수 있겠는데, 구술자는 장면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동시에 카메라에 띄기 위해 노력하는 조·단역 배우들의 모습들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재현한다. 소품과 미술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조·단역들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 극 중 인물을 표현했는지가 구술을 통해 자세하게 드러난다. 1960~1970년대 한국영화 환경의 특성상 한정된 배우 풀로 여러 장르를 생산해야하는 현실 안에서 동일한 배우들이 장르영화에 어떻게 적응하고, 표현해내는가를 지엽적이나마 살펴볼 수 있는 구술이라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1970년대 액션지도 방식이다. 구술자는 학창시절 권투와 가라테를 수련했고 영화계 입문 전 자칭 주먹 좀 쓰는 ‘개구쟁이’ 시절을 거쳤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의 싸움과 액션 연기의 차이를 구별하되, 연기에서 ‘리얼함’을 살리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액션 연기를 구성하고 지도했는지를 설명한다. 1대1 액션 장면, 현장에서의 소도구 이용 등의 구체적 예에서 구술자의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었는지 자세하게 드러난다. 말하자면 실전의 경험을 열악한 영화제작 환경에서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액션지도는 즉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감독과의 사전 협의 하에 액션 콘티를 작성할 만큼 면밀히 이루어졌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1) 이 부분은 『영화천국』Vol. 55에 실린 「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액션영화의 뒤편에서 뛰다」를 수정·보완했다.
< 버블 패밀리 >는 도시 개발의 붐을 타고 ‘중산층’ 대열에 합류했지만 IMF 외환위기 이후 모든 것이 거품처럼 사라진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 사회의 부동산 문제를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울 뿐 아니라, 화려했던 시절부터 ‘거품’이 사라진 현재까지 한 가족의 풍경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부동산 붐과 경제 호황의 흐름을 타며 전성기를 누리다가 1997년 IMF와 함께 호황의 절정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 감독의 부모는 15년째 허름한 연립에서 ‘올림픽 아파트’ 시절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며 살아간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던 감독은 강남에서 멀리 떨어져 혼자 살고 있다. 여전히 부동산에 집착하는 부모를 이해할 수 없지만, 어느 순간 남처럼 살고 있는 가족의 균열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찾으려는 감독은 가족이 가장 행복했던 1988년으로 돌아가 부모의 삶과 자신의 유년 시절을 불러오고, 부모가 선택했던 삶이 한국 사회의 커다란 흐름과 도시의 개발이라는 구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마주한다. < 버블 패밀리 >는 중산층에서 갑작스레 내리막길을 걷게 된 가족 구성원의 갈등과 고충, 혹은 가족 개개인의 내면에 남겨진 상처와 기억으로 들어가는 대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한국 사회의 부동산 개발과 도시의 변화라는 큰 틀 안에 놓인 부모의 삶을 정렬시킨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울산을 중화학공업 도시로 개발하고, 당시 화학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와 평범한 주부였던 엄마는 아파트값이 몇 배나 오르는 기적적인 경험을 하며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다. 88년 올림픽 개최와 서울 개발 속에서 잠실은 코리안 드림의 메카가 되고, 중소건설사를 차려 집을 설계하고 파는 일을 했던 부모는 1년에 몇 십 억을 버는 성공과 부를 누린다. 하지만 90년대 부암동 고급 빌라를 지으려던 아버지는 정부의 규제 강화로 전 재산을 잃고 사업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 포레스트 검프 >의 주인공처럼, <버블 패밀리>의 부모는 한국 사회의 부동사 투기와 호황, 재개발의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과 함께하며 삶의 변곡점을 지나는 것이다. 하지만 < 버블 패밀리 >는 부동산 투기와 개발의 수혜자였다가, 일순간 규제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부모의 욕망과 선택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대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아빠의 사업은 강한 자들에 의해 밀려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며 자본 친화적 경제 구조가 강화되고, 대규모 건설사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중소 건설사를 운영하던 아빠는 사업을 중단했어야 할 것이다. 경제의 흐름 속에서 게임의 룰을 쥐고 있던 것은 결국 더 많이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부동산에 집착하는 부모를 이해하려는 감독은 어느 순간 자신의 처지와 부모의 삶이 다르지 않으며, 우리의 선택지는 정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나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부모님이 선택한 부동산이라는 해법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해법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는 지는 게임을 하도록 정해져 있다.”) 가족은 다시 재결합해 함께 살게 되고, 가족사진을 찍고, 외식도 하고, 일출을 보며 새해 소망을 빌어보기도 한다. 1997년 이후 멈춰진 홈비디오 대신 이제는 딸이 엄마의 손에 카메라를 쥐여준다. 이 모든 것들은 이사나 학자금 대출 등 가족의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감독의 의지와 선택일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본 우리가 바라게 되는 것은, 이 ‘버블 패밀리’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엄마가 몰래 사 둔) 감독의 명의로 된 땅값이 올라, 그녀가 학자금 대출을 갚고, 아버지의 빚도 갚게 되는 것이다. 이 땅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소유의 땅을 보면서 이상하게 내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감독을, 나의 부모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감독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게임의 룰, 그 자체에 질문을 던지고 균열을 내지 않는 한, 현실은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고, 돌파구 역시 쉬이 찾아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