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청춘
- 감독
- 유현목
- 제작년도
- 1957
- 출연
- 최무룡, 이경희, 변기종, 노재신, 전옥, 문정숙, 정애란, 최남현, 김승호, 조항, 조석근, 박암, 장민호, 고선애, 강계식, 김웅, 강효실, 신동훈, 노강, 백송, 조해원, 박성대, 강영수
해방 후 스무 번째 배출된 배우 최남현(崔湳鉉)은 해방 후 스무 번째 영화계에 진출한 배우이다. 주증녀(<돌아온 어머니>(이규환)), 황정순(<여성일기>(홍성기)), 주선태(<청춘행로>(장황연)), 황해(<성벽을 뚫고>(한형모))와는 1949년 데뷔 동기인 셈이다. 그가 첫 선 보인 <돌아온 어머니>는 남편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간 사이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던 아내(김연실 분)가 아편중독으로 죽고, 원양어선에서 돌아온 남편은 고아가 된 아들을 어렵게 찾게 된다는 얘기다.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내 역을 맡은 김연실(1911~1997)이 월북하고 최남현은 연극으로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가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기영(金綺泳)의 감독 데뷔작 <죽엄의 상자>(1955)부터였다. 이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1955)을 비롯,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유전의 애수>(유현목, 1956), <아리랑>(김소동), <잃어버린 청춘>(유현목), <봉이 김선달>(이상 1957, 한홍렬), <돈>(김소동), <자유결혼>(이병일), <인생차압>(이상 1958, 유현목), <오 내고향>(김소동), <젊은 아내>(이강천),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이상 1959, 전창근), <흙>(권영순, 1960), <어부들>(강대진, 1961), <인목대비>(안현철, 1962), <또순이>(박상호, 1963), <혈맥>(김수용, 1963), <추풍령>(전범성, 1965), <하숙생>(정진우, 1966), <싸리골의 신화>(이만희, 1967), <망각>(이만희, 1967), <내시>(신상옥, 1968) 등에 주연과 조연으로 기용된다. [사진] 영화 <돈>에서의 최남현, 왼쪽은 배우 김승호 최남현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최무룡 주연)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진섭은 그의 역할에 대해 “전 화면을 통해 압권이며 무대경험에서 쌓은 액팅이 오버함이 없이 적으나 자연스러운 연기” ( 「능한 연출, 능한 연기 / ‘유전의 애수’를 보고」, 『한국일보』, 1956.07.26) 였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런 호평에 힘입어 1년도 안 돼 타이틀 롤을 맡은 <봉이 김선달>로 ‘최남현이라는 배우의 하나의 지위를 주장’ (「비교적 정돈된 야담영화 / 최남현의 ‘봉이 김선달’」, 『한국일보』, 1957.10.25) 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이후 탈세와 횡령을 일삼다 법망에서 벗어나려 거짓 자살극까지 꾸민 아우(김승호)에게 "생눈 파먹은 날도적"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형 이중건(<인생차압>),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에 맞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스승(<이름 없는 별들>), 드센 아내의 성화 속에 품팔이로 어렵게 살아가는 남산기슭 해방촌의 ‘3.8따라지’ 깡통영감(<혈맥>), 국군 낙오병을 숨겨줘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결단을 내려야하는 산골마을의 강노인(<싸리골의 신화>) 등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진] <혈맥>에서의 최남현과 김승호(왼쪽) 이를테면 <봉이 김선달>, <인생차압> 등에서 보인 해학적인 요소, 처녀를 유린하고, 남의 애인을 가로챈 <유전의 애수>의 건달(인수 역), 피폐한 농촌에서 고리대금으로 농민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돈>의 억조, 딸(윤정희)을 왕의 후궁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을 시켜 딸이 사랑하는 하급 관리의 아들(신성일)을 성불구자로 만드는 <내시>의 김찬판 등 악역과 <이름 없는 별들>의 역사 교사 송선생,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싸리골의 신화>의 주인공 강노인이 보인 카리스마적 면모가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최남현. (사진제공 : 김종원) 그러나 최남현은 배우로서 절정기에 이른 1968년 어느 날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져 카메라 앞에 다시 나서지 못하게 된다. 10여 년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1977년 유현목 감독의 <문>을 계기로 재기, <한네의 승천>(하길종, 1977), <고가(古家)>(조문진, 1977), <족보>(1978, 임권택), <심봤다>(정진우, 1979), <짝코>(임권택, 1980), <물보라>(김수용, 1980) 등에 출연했으나 예전과 같은 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화의 물결 속에 전통을 고수하려는 <고가>의 주인공 김노인, 아집에 사로잡힌 <물보라>의 지초시, 뜬 구름 같이 살아온 <심봤다>의 조연, 인생을 달관한 <짝코>의 배역에서 열연하였다. [사진] <물보라>에서의 최남현. 아래는 하용수 광물성의 카리스마와 최다 출연 기록 노경에 접어들면서 기세가 많이 꺾이긴 했으나 누가 뭐라 하든 최남현은 개성이 강한 성격파 배우였다. 그의 연기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갱도의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광물성의 낮은 울림- 최남현 연기의 장점은 누구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내려 한 데에 있다. (김종원, 「인물영화사 / 중후한 조연 최남현」, 『일간스포츠』, 1987.07.08) 하지만 그에게는 1미터 75센티의 훤칠한 키와 상대를 꿰뚫어 보는듯한 눈매, 중후한 외모가 풍기는 무게감이 있는 반면 유연성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그 대신 뛰어난 연기감각과 형상력,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이런 결과는 결국 제1회 부일영화상 조연남우상(1958, <인생차압>), 제4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화부문 대상(1967, <싸리골의 신화>), 대종상 남우조연상(1966, <추풍령>) 등의 수상으로 나타났다. [사진] <싸리골의 신화>에서의 최남현. 왼쪽 박기태 최남현은 1918년 1월 7일 김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최찬수와 박이윤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나온 후, 법관이나 은행가를 지망하는 급우들과는 달리 무대를 동경했다. 해방 이듬해에 월남하여 극예술협회(신협의 전신)에 들어갔으나 한동안 잔심부름을 하며 따분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런 그에게 출연의 기회가 온 것은 1944년 스물여섯 살 때였다. <은하수>라는 연극이었다. <범선 천우호(帆船 天佑號)>(1949)의 무대에 오를 무렵 영화 <돌아온 어머니>에 발탁됐으나 6.25전쟁으로 후속작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 대신 <명우 추해당(秋海棠)>(상록극회, 1951), <통곡>(극협, 1952) 등 연극 활동을 하며 어려운 전란기를 보냈다. 영화 촬영이 계속된 뒤에도 <한강은 흐른다>(신협, 1958) 등에 출연하여 연극과의 인연을 끊지 않았다. 공연이 없는 날엔 주선태, 박암 등 극협 단원들과 술로 회포를 풀었다. [사진]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에서의 최남현 최남현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외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80년대 이후에는 술과 마작, 화투놀이로 소일하다시피 했고, 장기간의 투병으로 고급주택 등 모든 재산을 날렸다. 말년에는 양로원 생활을 하며 병상에 있는 아내까지 뒷바라지하다가 1990년 1월 7일 일흔 한 살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은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 사건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마유미>(1990, 단역)였다. 30대 초반부터 노역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스크린을 누볐던 최남현은 40여 년 동안 720여 편에 출연하는 최다 기록을 세웠다. *
강범구 감독은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지옥화>(1958)의 촬영을 맡아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12편을 촬영 후, 1962년 개봉한 <북극성>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연출자로서 그는 액션스릴러 혹은 범죄추리물에 특기를 보여 ‘아주 타프한 작품을 만드는 신인’ 1) , “액션 감독으로 정평이 높은 준재 강범구 감독” 2) 이라는 평을 받았다. 또한 그의 초기작들이 1960년대 초반 대만에서 흥행에 성공하였고, 1966년에는 한국·대만 합작영화의 연출을 맡아 대만에서 작품을 만들었다. 강범구 감독 작품의 대만 흥행은 이후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영화 시장에 진출하는 데 기폭제가 되었다. 강범구는 일제강점기 황해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친척이 운영하던 사진관을 드나들며 카메라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 해방 후 홀로 월남하여 한국전쟁을 겪고, 휴전 이후 국민대학교에서 연극부 활동을 한다. 이 시기에 연극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박상호 감독이 영화 <젊은 그들>(신상옥, 1955)의 조감독을 맡았는데, 강범구에게 엑스트라 출연 및 동원을 부탁한다. 이를 계기로 영화 현장을 처음 접하게 된 그는 영화 촬영 카메라의 작동 원리가 자신이 다루던 사진 카메라와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고 남다른 관심을 갖는다. (사진1) <해정>(박상호,1956) 포스터. 강범구는 이 작품에서 촬영부로 참여하며 영화 일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1956년 박상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해정>에서 촬영부 일을 시작했고, 이어서 유현목 감독의 작품에서 김명제 촬영감독의 조수로 일한다. 김명제는 미국의 미첼(Michell) 카메라를 모방하여 국내 여건에 맞게 개조한 ‘코첼’이라 불린 카메라를 만들어 사용했다. 강범구는 김명제와 같이 손수 촬영 기재를 고안해낼 정도로 기술력이 출중한 영화인 밑에서 촬영 기술을 익히는 동시에 일본영화촬영자협회에서 펴낸 『 일본영화촬영편람 』 을 보면서 영화 전문 지식을 습득했다고 한다. 그가 촬영 조수로 참여한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1956)와 <잃어버린 청춘>(1957)은 전후 한국영화의 새로운 수준을 이룩한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3) “카메라 앵글에도 많은 노력의 자취가 보인다”, “한국영화의 공통적인 폐단인 느린 템포가 시정되어 있어 유쾌”하고 “이동촬영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비교적 화면에 안정성이 있고 매끈”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잃어버린 청춘>은 ‘묘사가 착실’하고 ‘모방에서 독창으로’, ‘수준에 이른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제1회 영화평론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강범구는 전후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인 “현대극영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젊은이들” 4) 의 일원으로 작업하며 영화인으로 단련되었다. (사진2) <지옥화>(신상옥, 1958)의 한장면. 왼쪽부터 배우 최은희(쏘냐 역), 김학(영식 역), 조해원(동식 역) 강범구는 1958년 <지옥화>(신상옥)의 촬영을 맡아 촬영 감독으로 데뷔한다. 전후 걸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에서 그는 위험을 무릎 쓰고 달리는 기차 위에서 액션 장면을 찍었다. 덕분에 속도감 있는 기차 추격 장면이 박진감을 더 했고, 촬영 데뷔작에서부터 대담하고 힘 있는 스펙터클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진3) <지옥화>(신상옥, 1958) 기차 액션 장면. 영식 일당이 미군 수송 열차를 털기 위해 기차에 올라탄 것을 기차 지붕 위에서 찍은 화면 이어서 강범구는 신상옥 감독의 첫 번째 멜로드라마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을 안정감 있게 촬영하였고, 이 작품은 서울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하여 흥행에 성공한다. 그는 촬영 감독으로 데뷔한 후 1961년까지 약 3년 동안 총 12편의 영화들을 촬영하는데, 그 중 정창화 감독의 <지평선>(1961)을 촬영하면서 이 작품을 제작한 한흥영화사(대표 최관두)와 연을 맺게 된다. 그리하여 한흥영화사가 제작한 <지평선>(정창화, 1961), <현상 붙은 사나이>(김묵, 1961), <슬픔은 없다>(김묵, 1961)를 촬영했고, <북극성>(1962)으로 감독 데뷔하여 연출작 <동굴 속의 애욕>(1964)까지 최관두가 제작한 8편의 작품을 함께 한다. (사진4) <현상붙은 사나이>(김묵, 1961). 갱스터 범죄물로 한흥영화사(대표 최관두)가 제작하고 강범구가 촬영했다. (사진5) <현상붙은 사나이>(김묵, 1961) 크레딧 (사진6) <지평선>(정창화, 1961) 포스터 만주를 배경으로 한 독립군의 활약을 담았고 강범구가 촬영했다. 액션 장면을 속도감 있는 몽타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지평선>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거대 제작비를 들여, 우이동에 4만 평의 대지를 잡고 건평 3천의 오픈 세트를 세워 독립군의 근거지가 된 만주의 한 소도시를 만들고, 일본군과 독립군의 전투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 5) 강범구는 영화제작자 최관두를 “한국영화 액션 원조”라고 칭했는데, 그가 운영한 한흥영화사는 “한국 유일의 서부극공장 ‘액숀·스릴러’의 총본산” 6) 이라고 불렸다. 한흥영화사는 주로 대륙물과 액션, 범죄 스릴러물 제작에 주력했다. 최관두는 특히 만주 대륙물의 효시인 <지평선>(정창화, 1961)부터 대륙 액션물의 완결판이라 불리는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까지 제작한 한국 액션영화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960년대 초부터 당시 주류 멜로드라마 장르와는 다른 궤적을 그린 작품들을 개척해온 한흥영화사에서 강범구도 자신의 감독작들을 연출하기 시작한다. 강범구는 촬영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연출자의 역량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가 좌우되는 점을 체감하고, ‘카메라맨’ 역할에만 만족하기 보다는 주체적으로 작품을 지휘할 수 있는 ‘연출자’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북극성>(1962)을 직접 제작하고 연출하여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 작품은 주동운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것으로 한흥영화사 이름으로 개봉되었지만 눈에 띄는 반응은 얻지 못했다. (사진7) <북극성>(강범구, 1962) 포스터. 강범구가 제작하고 연출한 감독 데뷔작이다. 강범구가 두 번째로 연출한 <검은 꽃잎이 질 때>(1962)는 이경재 원작의 서울중앙방송국(HLKA) 라디오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신문기자인 주인공이 서울에서 활동하는 간첩을 쫓는 이야기로 “본격 추리영화”, “본격적인 스릴러물”이라 불리며 평단과 흥행 면에서 두루 성공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7) , “강범구는 처녀작 <북극성>에서 평조하였으나 <검은 꽃잎이 질 때> 한편으로 이를 완전히 만회해서 기염을 토했으며” “지난날의 명 ‘카메라맨’답게 훌륭한 카메라워크를 보여주고”, “우리 영화풍토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본격적 추리극을 시도”하여 “제법 박력 있게” 연출했다는 호평을 받는다. (사진8) <검은 꽃잎이 질 때>(강범구, 1962) 포스터. 하단에 경찰기동대 오토바이와 백차가 등장하는 추격 장면이 보인다. 강범구는 이 작품에서 기존 영화들에서 등장했던 총격전과 차별되는 새로운 액션 스펙터클을 선보이길 원하던 차에, 당시 서울 시경에서 외제 오토바이를 새로 장만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수도경찰청은 경찰의 기동력을 강화하기 위해 1961년에 미국에서 사십 대의 오토바이를 들여왔으며, <검은 꽃잎이 질 때>의 엔딩에 해당하는 간첩 추적 장면은 시경의 협조로 백차 5대, 시경 특별기동대 오토바이 20대, 세단 2대 등을 동원하여 서울 을지로, 종로, 돈암동을 빠져 의정부, 포천까지 내달리며 백주의 추격을 카메라 세 대로 촬영했다. 8) 감독 입장에서는 작품의 스펙터클 연출과 홍보 면에서 이득이었고, 경찰 입장에서는 방첩 의식 고취 및 시경을 선전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즉 상업극영화를 통해 대중성과 정부 시책 양쪽을 만족시키는 협상이 흥행 성공으로 이어진 경우이다. 그리고 강범구는 <검은 꽃잎이 질 때>의 흥행으로 인해 “액숀·스릴러의 총본산”인 한흥영화사의 ‘감독’으로 입지를 얻게 된다. 다음 작품 <안개낀 거리>(1963)는 그가 한국전쟁 및 전후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연출한 영화이다. 전쟁터에서 생사를 함께한 전우가 전후 복귀한 사회에서 범인과 형사로 조우한다. 한국전쟁 당시 전선에서 범인(이향 역)은 뛰어난 사격술로 형사(황해 역)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런데 현재 형사는 지난날 자신의 생명의 은인을 체포해야하는 입장에 처한 것이다.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의 ‘기차 승강구 결투씬’이 백미로 꼽히는데, 형사와 범인이 서로의 손목이 수갑으로 묶인 채 달리는 기차에 매달려서 결투를 벌이는 액션 장면이다. (사진9) <안개낀 거리>(강범구, 1963) 포스터. 중앙에 두 주인공의 손목이 묶인 수갑이 빨강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안개낀 거리>는 1963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수갑(手銬)>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우수한 흥행 성적을 올렸으며, 당시 대만 언론에서 강범구 감독을 ‘액션·스릴러’의 귀재로 주목했다. 대만에서 발간된 영화 서적 『 세계영화감상 』 (1967) 한국 편에는 <안개낀 거리>에 대해 “인물의 심리와 성격부터 감정의 노출 등이 전편에 걸쳐 긴장감 있게 그려지고, 인간의 인지상정의 모순된 점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기교가 훌륭하다. 카메라 워크와 컷트의 극적 운영이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 감독들의 작품에 비해 손색이 없다.” 9) 고 평하고 있다. 강범구는 <창살없는 감옥>(1963)에서도 전쟁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이 겪는 모순적인 상황을 통해 한국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전작 <안개낀 거리>의 인물 설정 및 주제가 변주된 것으로 보이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형사(황해 역)가 범인(이향 역)을 쫓는다. 범인은 수사망을 피해 한국전쟁 유격대로 잠입하는데, 형사가 뒤따라 자원입대하여 그를 추적한다. 둘은 격전지의 한복판에서 조우하고 목숨이 걸린 딜레마 상황에 처한다. 영화 제목은 동족상잔의 전쟁터를 ‘창살없는 감옥’에 갇힌 처지로 비유한 것이다.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창살없는 감옥>을 이만희 감독의 전쟁영화와 함께 다음과 같이 평했다. “군대는 단순한 아이언 오거니제이션(철의 조직체)이 아니라 인간의 결합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떠들고 있는 점은 무척 대견한데, 나는 지난 2년동안 3천만 인구가 모두 군복 착용을 강요당하는 듯 한 환각에서 이런 작품들을 본 것은 적으마한 위안으로 여기고 있다.” 10) (사진10) <창살없는 감옥>(강범구, 1963) 포스터. 배경에 낙하산 부대가 보인다. <창살없는 감옥>에서도 강범구는 특색 있는 액션 스펙터클을 연출하길 원했고, 그 결과 당시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낙하산 부대가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적진에 투입되는 인물들이 진격하는 모습보다는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수직 낙하 이미지에 착안하여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그리하여 공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낙하산 부대를 촬영했고, 비행기와 카메라 두 대를 동원하여 공중 촬영을 진행했다. 이 작품 또한 대만에서 <제3특공대(第3特攻隊)>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더불어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불렀던 주제가도 중국어로 번안되어 동남아 지역까지 인기를 끌어모았다. 이듬해, 1964년 강범구는 연이어 한국전쟁으로 인한 비극이 전후 사회에 지속되고 있는 문제를 짚어내는 작품들을 연출한다. 원제가 ‘목격자의 증언’이었던 <당신만을 위하여>(1964)는 가부장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이 주인공이고, <동굴 속의 애욕>(1964)은 한국전쟁 당시 남편을 찾으러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빨치산 생활을 하게 된 여성을 그려냈다. (사진11)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 왼쪽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옥녀(배우 김난영)와 오른쪽 끝에 동록(배우 박노식)이 공모하여 옥녀의 남편을 살해한 혐의에 관해 심문이 진행된다. <동굴 속의 애욕>은 권순영 판사의 수필집 『법창의 봄』(1955)에 실린 같은 제목의 재판 실화가 원작이다. 한국전쟁 당시 현재의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주민들이 겪은 전쟁 체험을 다룬 이야기로, 이 지역은 본래 북한 땅이었다가 휴전 이후 남한으로 편입된 수복지역이다. ‘수복(收復)’의 사전적 의미는 잃었던 땅이나 권리 따위를 되찾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수복 지구’가 대한민국에 속했던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본래 북한 주민이고 본인의 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분단선의 이동이라는 순전히 외부적 요인 때문에 남한 사람으로 귀속이 변경된 비자발적 월남인들이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공식화된 월남 동기인 ‘북괴가 싫어서’나 ‘자유를 찾아서’라는 반북·반공주의가 적용될 수 없는 사례이다. 강범구는 이러한 수복 지구 주민의 경험을 자신의 월남인 의식에 빗대어 설명한다. “난 이북사람이고 그래서. (중략) 그게 굉장히 가슴에 사무친다고. 그건 우리의 그 사상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게 아니거던, 예. 그 권력 잡은 사람들이 자기네들 권력 싸움 위해서지, 우리하곤 아무 관계 없는 거야. 내가 지금 해석을 해도 그래요. 그래서 인제 그걸 바탕에 두고 인간의 그 본성을 한번 그려볼라구 했던 거죠. 그 굉장히 그땐 새롭드라구, 그 책을 보니까.” 11) <동굴 속의 애욕>은 젊은 부부가 신문에 대서특필된 살인용의자 옥녀의 재판을 구경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재판은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옥녀의 유죄 여부를 가리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피고인인 동록과 옥녀 및 증인들이 진술하는 내용이 과거시점의 액자 구성으로 재현된다. 즉 액자 구성의 가장 안쪽에서 재현되는 이야기가 옥녀와 같은 북한 인민이 겪은 한국전쟁이고, 이들이 전후 현재 시점에서는 죄수복을 입고 재판을 받고 있는 남한 주민이다. 영화는 제3자의 시선을 통해 주인공들의 전사(前事)를 액자 속으로 들여다보도록 배치함으로써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고 신문 헤드라인이 담지 못한 진실을 이해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사상 때문이 아니라는’ 감독의 의도와 같이, 옥녀를 북괴의 꾀임에 속고 뒤늦게 깨닫는 어리석은 빨치산으로 도식화하지 않고, 전쟁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무고한 양민의 전쟁 경험으로 열어둔다. 강범구는 <동굴 속의 애욕>이 한국전쟁을 그리는 데 있어 오래 남을만한 이야기라고 여기며, 기회가 된다면 리메이크 해보고 싶은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12)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옥녀의 재판을 보러 온 사람들이 법원에 모여있다. 영화의 오프닝을 여는 젊은 부부를 비롯한 ‘재판 구경’ 대중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들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주인공을 이해와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진13)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심경의 변화를 겪는 옥녀. 극한 상황에서 분투하는 인물의 생존 본능과 욕망, 그에 따른 복잡한 심리를 표현해낸 배우 김난영의 연기가 돋보인다. <소만국경>(1964)은 강범구가 다시 액션 연출의 특기를 살려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활약을 담은 영화이다. 소련과 만주 접경지역을 배경으로 독립군과 일본군, 비적떼 등이 출몰하여 다양한 액션을 펼치는 장르적 쾌감을 선사한다. (사진14) <소만국경>(강범구, 1964) 포스터 <탈출명령>(1966)은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가 강범구 감독에게 연출을 의뢰하여 만든 한국·대만 합작영화이다. 고인하는 1960년대 초반부터 한국영화계와 교류하며 한국영화들을 대만에 소개하는 데 관심을 쏟았고, 강범구가 연출한 작품들이 대만에서 흥행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앞서 언급한 <창살없는 감옥>을 수입하여 대만에서 <제3특공대>라는 제목으로 개봉하고, 대만뿐만 아니라 동남아 지역에서도 큰 수익을 거둔 인물이 바로 고인하이다. 그는 평소 존경하던 강범구 감독과 함께 대만에서 대규모 전쟁 액션 영화를 만들길 원했다. 한국 측에서는 기획자 박민이 대영영화사 소속으로 참여하여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감독과 배우, 조감독 등이 대만으로 향했다. <탈출명령>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일본군이 세운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는 인물들을 탈출시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대만 아리산(阿里山) 밑에 야외세트장을 짓고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하여, 일본에서 필름 현상을 했다. 대만 촬영현장에서 강범구와 주요 대만 영화 스태프들은 일제식민지 시기 성장 배경을 공유하는 동년배들이었고, 서로 일본어로 소통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대만 중앙전영공사의 대규모 영화 스튜디오와 최신 영화 기재, 일본 영화인들과의 기술 교류 등을 접하고 당시 한국영화계에 비해 격차를 느꼈다고 한다. <탈출명령>은 <최후명령(最後命令)>이라는 제목으로 대만에서 개봉했으나 흥행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만 영화인 고인하는 이후 강범구를 비롯한 한국영화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과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영화 시장 간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15) <탈출명령>(강범구, 1966) 포스터. 배우 신영균, 박노식, 이대엽, 손미희자 그리고 대만배우 왕모초(王莫愁) 등이 출연했다. <탈출명령>의 필름 현상 작업이 일본 도에이 현상소에서 진행될 때, 이곳에 들렸던 신상옥 감독이 <탈출명령>의 해외 로케 촬영 화면을 보고 강범구에게 베트남전 영화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 제작하는 <여자베트콩 18호>의 연출을 맡아 베트남으로 향했다. 이 작품은 당시 베트남전에 파병된 국군 비둘기부대의 협조를 받아 촬영했다. 촬영 중 전투 장면을 위해 묻어둔 폭탄이 뜻하지 않게 폭발하여 조명기사 이계창이 현장에서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고, 강범구 역시 부상을 당하여 한쪽 눈의 시력을 잃는다. (사진16) <여자베트콩 18호>(강범구, 1967) 포스터. 전시 중에 제작된 영화이고, 베트콩 등장 장면을 촬영 중 실제 베트콩으로 오인 받아 미군으로부터 포위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후 강범구는 가수 남진 주연의 <울려고 내가 왔나>(1967)부터 직접 제작한 <항구의 왼손잽이>(1971)까지 음악영화, 검객영화, 반공영화, 갱스터 범죄영화 등의 다양한 작품들을 연출한다. (사진17) <울려고 내가 왔나>(강범구, 1967) 포스터. 당시 가요계의 스타 남진이 주연을 맡았다. (사진18) <대검객>(강범구, 1968) 포스터. 당시 홍콩무협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호응을 얻으면서, 이른바 ‘칼싸움 액션’이 펼쳐지는 검객영화가 유행했다. 이 작품은 정통검술을 익힌 배우이자 무술감독인 안일력이 검술지도를 맡고 고증에 충실하여, 한국 검객물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다. (사진19) 1960년대 활동 당시의 강범구 감독 출처:“한국감독의 50인”,[1970 영화연예연감], 국제영화사, 1969 1974년에 개봉한 <일대영웅>(강범구·팽장귀)은 한국의 동아수출공사와 홍콩 영화제작사 골든하베스트가 합작으로 만들었다. 동아수출공사는 강범구와 대만 영화인 고인하를 통해 골든하베스트에서 제작한 이소룡 주연작 <맹룡과강>(이소룡, 1972)을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골든하베스트와 돈독한 거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 대표 이우석과 이웃 관계로 일찍이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 초중반 동아수출공사 기획실에 근무한다. 이 시기에 그가 참여한 <일대영웅>의 홍콩측 감독 팽장귀는 한국어에 능숙한 화교였고, 한국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 (사진20) <일대영웅>(강범구·팽장귀, 1974)의 한장면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 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작품 기획, 시나리오 작가 섭외 및 완성, 감독과 스태프 구성, 캐스팅, 제작 현장 및 후반작업 진행 등 작품을 구상하여 완성하기까지 전 과정을 총괄하였다. <마지막 다섯 손가락>(김선경, 1974)부터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 1976)까지 9편을 기획했는데, 그 중 <남사당>(이규환, 1975)은 이규환 감독의 은퇴기념영화로 제작되었다. 이규환 감독은 일제강점기 <임자없는 나룻배>(1932)로 데뷔하여 한국영화사 초창기부터 활동한 원로 감독이었고, <남사당>은 선배 영화인에 대한 존경과 예우를 담아 기획된 작품이다. 같은 해에 강범구는 김기영 감독이 <만추>(이만희, 1966)를 자기만의 색깔로 리메이크한 <육체의 약속>(김기영, 1975)을 기획하였고, 정소영 감독의 <애수의 샌프란시스코>(1975)를 기획하여 미국 로케 촬영까지 담당했다. 또한 <걷지말고 뛰어라>(1976)로 소설가 최인호를 감독으로 데뷔시키는가 하면, 1976년에 개봉한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는 관객의 호응을 얻어 ‘진짜 진짜 시리즈’로 후속편이 이어지며 하이틴 영화 붐을 이끌었다. (사진21)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 1976)의 배우 임예진, 이덕화. 이후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를 떠나 해외로 눈을 돌려 국내보다 나은 영화제작 여건을 찾고자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는 대만 광고영화 프로덕션 회사에서 활동 중에, 한국영화진흥공사 홍콩 법인과 연계되어 대만에 수출하는 한국영화들을 관리하기도 했다. 당시 <증언>(임권택,1973),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1974), <섬개구리 만세>(정진우,1972) 등의 한국영화들이 대만에서 상영될 수 있도록 관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대만에서 만난 로웨이(羅維) 감독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도 거주하며, 중화권 작품 거래를 위해 서울-홍콩-대만을 오가며 지냈다. 강범구는 홍콩 골든하베스트를 비롯한 중화권 작품들을 한국에 소개하고 거래를 중개하는 역할을 했으며 골든하베스트 대표 레이 초우, 홍콩에서 활동한 제작자이자 감독 로웨이, 이한상, 오사원 그리고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 대만 영화 감독 유가창 등의 아시아 영화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강범구는 1980년대에도 한국과 홍콩 혹은 한국과 대만 영화사와 연계된 일종의 합작 형태의 작품들에 참여한다. 1988년에 개봉한 <칠소여복성>(강범구·맥담웅)까지 협업하고, 1986년경부터 1995년경까지 중화권 외화 수입 거래 중개자 역할을 해왔다. (사진22) <괴시>(강범구, 1981) 한국 최초의 좀비영화라고 불리는 미스터리 공포물 강범구가 홍콩에서 관람했던 서구 좀비영화를 한국 실정에 맞게 변용하여 연출했다고 한다. 대만 배우 유광옥, 강명이 출연했다. 강범구는 1960년대 초반 “액숀·스릴러의 본산” 한흥영화사에서 활동하면서 일찍이 액션영화 감독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는 1960년대 중반에 한국·대만 합작영화의 연출을 맡아 해외 활동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냉전 시기 분단된 영토 안에 국한된 시야에서 벗어나 보다 ‘다른’ 영화 환경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6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200편을 넘어가면서 한국영화 전성기의 정점을 찍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 이면에는 상영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작품들과 정당한 처우를 받지 못하는 영화인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유신 이후 1970년대 국가주의 영화 제도 및 규제 하에서 영화 제작 환경이 더욱 악화되자 그는 한국을 떠나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를 비롯하여 홍콩과 대만에서 영화계 네트워크를 형성한 강범구는 ‘한국의 중국통’이라고 불리우며, 한국영화와 중화권 및 아시아 영화 시장 간의 본격적인 교류에 앞장섰다. 한국영화계에 1960년대 후반부터 홍콩 검객물과 무협물이 인기를 끌면서 액션영화가 부상되었지만 정부의 영화시책 제도 관점에서는 저속, 저질영화로 저평가되었다. 하지만 관객의 부응은 이와 반대였기 때문에 한·홍 합작 액션 영화 등이 70년대를 거쳐 80년대까지 제작되었다. 이 시기 강범구의 연출작 목록을 살펴보면 당대 한국영화 시장에 홍콩 무협물과 액션물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의 경험을 통해 과거 한국-홍콩-대만 간 다양한 방식의 합작 혹은 협업 제작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과 경위에 관해 들여다볼 수 있다. 즉, 이러한 제작 관행이 각자 정책적으로 혹은 자본력 측면에서 자국 영화시장 내에서 부족한 지점들을 보완하는 자구책으로 기능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각기 합작 주체의 입장에 맞게 완성한 작품들은 자국 영화로 변용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 무국적성이 비난 받기도 하지만, 이들은 애초 기획부터 내셔널시네마 범주에서 미끄러져 비본질적이며 경계가 없고, ‘경계 없음’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위장 합작이라는 명명으로 단정하기 보다는, 당시 영화 제작 환경과 영화 시장을 둘러싼 생동하는 문화 경제 및 다층적인 문화 협상을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다. 강범구는 문화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영역이나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점에서, 폐쇄적이거나 제한적인 문화 규제 및 정책을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한국전쟁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신의 영화 인생에 있어 ‘풀지 못한 숙제’로 품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반공이 국시’인 시대에 활동하면서 남북관계에 관한 성찰적인 영화 창작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장차 그는 이북으로 교류하며, 여전히 영화를 통해 폭넓은 시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아무쪼록 그의 염원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바란다. 1) 이영일,「특집 한국영화 1963년」,《국제영화》 1964년 1·2월호, 63쪽. 2) 『 1970 영화연예연감 』 , 국제영화사, 1969, 434쪽. 3) 〔신영화〕 묘사 착실한 멜로드라마/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 《한국일보》, 1957년 9월 21일; “[단평] <유전의 애수>”, 《경향신문》, 1956년 7월 30일; “[신영화] 모방(模倣)에서 獨創(독창)으로/ <잃어버린 청춘>”, 《조선일보》, 1957년 9월 21일; “[신영화] <잃어버린 청춘> 수준에 이른 작품”, 《서울신문》, 1957년 9월 22일 참고. 4) “[신영화] <유전의 애수>, 한성영화사에서 제작 완료”, 《조선일보》, 1956년 6월 13일. 5) “1천만환의 오픈·센 본격화하는 제작태도”, 《경향신문》, 1960년 11월 14일 4면 참고. 6) “재재정비된 영화사순력(巡歷) ① 한국유일의 서부극공장 ‘액숀·스릴러’의 총본산 ” , 《영화세계》, 1962년 11월호, 92쪽. 7) 《영화세계》, 1962년 8월호, 45쪽; “[새 영화] 처음 시도된 본격 추리극 / 검은 꽃잎이 질 때”, 《경향신문》, 1962년 6월 7일 4면; “[새영화] 본격적인 추리극의 시금석 / 강범구 감독 <검은 꽃잎이 질 때>”, 《서울신문》,1962년 6월 6일 4면; “본격적인 스릴러물 기획 <검은 꽃잎이 질 때>”, 《경향신문》,1962년 3월 30일 4면 참고. 8) “[방울새] 때 아닌 기동대/ 영화촬영에 총동원”, 《경향신문》, 1962년 4월 29일 4면; “[스타디오 소식] <검은 꽃잎이 질 때>/ 경찰기동대도 등장/ 백주의 추격전“, 《동아일보》, 1962년 4월 29일 4면 참고. 9) 魯稚子(LU CHIH-TSE), 『世界電影欣賞 APPRECIATION OF THE WORLD FILMS』, BOOK WORLD CO., 1967, 61~62쪽. 10) 이영일, 앞의 글, 1964년. 11) 박진호,「강범구」,『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2009, 한국영상자료원, 198쪽.
한국여배우사를 훑어볼 때 '착한 여자 콤플렉스', '천사표 콤플렉스'로 관객들의 눈물주머니를 터뜨려 놓은 배우들이 있었다. 그 이름은 '눈물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졌던 전옥 을 필두로 김연실 , 김소영 , 문예봉 , 유계선 , 김신재 , 이경희 , 고은아 , 전계현 , 문희 등 기라성 같은 명성을 떨친 여배우들이었다. 이들 여배우들 중에서도 특히 '눈물과 천사표의 페르소나'로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준 여배우가 전옥에 이어 '제2의 눈물의 여왕'으로 알려진 이경희(李璟姬)였다. 이경희 는 1932년 9월 29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한성여고 졸업 수 한때 레코드가수 및 악극단에서 활동하다가 영화연기자로는 1955년 김성민 감독의 < 망나니 비사 >로 데뷔하였다. 이 영화에서 이경희는 전택이 , 노경희 와 트리오로 공연했다. 이경희는 어린 소년시절부터 재학 당시 서울방송국에 출연하는 기회도 자주 가졌으며 졸업 후 레코드사의 요청을 받아 <서울의 거리>, <서울 부기> 등의 히트곡을 취힙하기도 했다. 그 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 그곳에서 악극단 <희망>에 입단하여 <루루태자>, <라 콤파르시타>, <분홍치마>. <클레오파트라> 등의 연극에 출연하였다. 그녀가 애수에 젖은 음감으로 <라 콤파르시타>를 불러 젖힐 때 관객들은 주저없이 '순정의 가희', '눈물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던 것이다. 이경희 의 데뷔작 < 망나니 비사 >에 따른 에피소드(<여성영화인사전>69쪽 이경희.2001년 도서출판 소도)를 살펴 보자. 55년 서울 수복 후 여배우를 물색하던 김성민 감독은 이경희가 적역이라는 조언을 듣고 당시 국도극장에서 황해 등과 <님의 품에 안기리>라는 연극을 하고 있던 그에게 찾아봤다. 노경희 , 전택이 , 이민 등 당대의 빅 스타들과 함께 <망나니 비사>에 출연하게 된 이경희는 정조을 지키려던 자신 때문에 모함에 빠지게 된 아버지와,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목을 쳤지만 자신을 사랑하게 된 망나니 ''먹''(전택이)의 죽음까지 묵묵히 지켜보아야 하는 비운의 여인 ''채''로 분했다. 장옷를 뒤집어쓰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채''의 모습은 너무나 단아해서 잡시 발성영화에 잘못 캐스팅된 무성영화의 슬픈 페르소나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이 영화 이후 청순가련한 비극의 히로인은 이경희 에게 일종의 숙명처럼 고착되었다. 영화 < 망나니 비사 >에서 여주인공 '채'로 분한 이경희 와 역시 여주인공 '달'로 분한 노경희 는 양반집 규수(전자)대 술집 작부라는 상반된 신분의 여인으로 등장하였다. -어느 고을의 교리( 이민 )가 그 고을 진사의 딸 '채'( 이경희 )를 좋아한다. 그러나 진사는 자기 딸을 교리의 소실로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다. 교리는 갖은 모함을 다해서 진사를 역적으로 몰고 그의 딸을 차지하려 했다. 그랬지만 딸은 도망을 쳤다. 그 딸이 도망친 곳은 바로 망나니인 '먹'( 전택이 )이네 집. '먹'은 그 딸을 숨겨주었다. 그것을 인연으로 망나니 '먹'은 진사딸 '채'를 짝사랑하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눈치챈 술집작부인 달은 사랑하는 '먹'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쓴다. - 이른바 삼각형 연애가 벌어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이경희 가 청순가련형의 여인상을 연기한 반면 노경희는 특유의 빈정거림으로 '먹'을 다루는 능동적인 하층민 여인상을 선보였다. 노경희는 이 영화의 '달'역으로 1955년 제1회 금룡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관객들의 가슴에는 '채'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마지막 대목에서의 이경희 연기가 아프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경희 는 이밖에도 < 모정 > '58. 양주남 감독 , < 육체의 길 > '59. 조긍하 감독, < 삼여성 > '59 박성복 감독, < 연산군 >'61 신상옥 감독, < 김약국집 딸들 > '63 유현목 감독, < 단종애사 >'63 이규웅 감독, < 모란이 피기까지는 > '63 김기덕 감독, < 혈맥 > '63 김수용 감독, < 추풍령 > '65 전범성 감독, < 신설 > '74 조문진 감독, < 들국화는 피었는데 > '74 이만희 감독, < 여자를 찾습니다 > '76 하길종 감독, < 깃발없는 기수 > '79 임권택 감독, < 내가 버린 여자2 > '80 홍성기 감독, < 아가다 > '79 김현명 감독>, < 영웅연가 > '86 김유진 감독, < 이장호의 외인구단 > '86. 이장호 감독, < 아다다 > '87 임권택 감독 등에 출연하였다. 이경희 의 대표작을 들라고 하면 < 망나니 비사 >, < 잃어버린 청춘 >, < 찔레꽃 > 등 3편을 통해서 보여준 연기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게된다. 그 가운데서 대표작 중 1편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에서 보여준 이경희의 연기(정애 역)를 평가하고자 한다. 영화 <잃어버린 청춘>의 주인공인 위진구( 최무룡 )의 직업은 전기공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전선 수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괴한과 맞부딪쳤다. 상대방은 바람처럼 달아나버리고 그 자리에는 돈다발이 떨어져 있었다. 위진구가 조심스럽게 돈다발을 집어들었을 때 근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진구가 그 사람을 발견, 일으켜 세우려고 할 때, 그가 갑자기 '강도다!'라고 소리치며 칼을 뽑아들었다. 진구는 옷소매를 붙잡고 달라붙은 그 자를 때려눕히고 위기를 벗어난다. 하지만 피를 많이 흘린 그는 죽었고, 진구는 억울하게도 살인범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단절된 진구는 신을 의지하는 애인 정애 이경희 )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결국 젊은 전기공은 경찰에 자수하지만 애인의 따스한 눈물만으로는 냉엄한 현실의 절망감을 밀어젖힐 수 없었다는 내용의 드라마가 6.25전쟁 후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서울의 도심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의 운명이 리얼한 영상 속에서 속절없이 농락당한다는 ''쫓기는 인생''의 삶이 비정하게 묘사된 영화에서 여주인공 정애의 마지막 내뱉은 말은 '이젠 울지 않겠어요'였다. 필자는 < 잃어버린 청춘 >이 제작된 지 45년이 지난 며칠 전 유현목 감독을 만나 영화배우 이경희 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유감독님이 < 잃어버린 청춘 >을 연출한 당시 연기자로서 이경희 씨는 어떠했습니까?' '한 마디로 해서 청순가련형의 동양적 이미지의 배우였지요. <잃어버린 청춘>의 라스트신을 찍는데, 비오는 장면이었습니다. 때가 엄동설한이라 우중 신을 찍기가 용이치 않았어요. 소방차를 동원 호스로 물을 뿌렸는데, 물이 잘못 뿜어져 고압선에 닿으면 위험한 형국이었어요. 나는 이경희 씨에게 추우니 비닐 옷을 입으라고 권했지요. 그런데도 2시간 이상 촬영하는 동안 이경희 씨는 끝내 비닐 옷을 걸치지 않고 꼬박 혹한 속에서 물세례를 받았어요. 나는 속으로 그녀가 인내력은 물론, 프로 의식이 강한 외유내강형 연기자로구나 생각했지요. 성실하고 싹싹했고, 외모도 나무랄 데 없는 미인형이였지요.' < 눈내리는 밤 ''58>, < 목포의 눈물 ''58> 등 신파극 멜로 드라마를 연출한 바 있는 하한수 감독도 이경희 에 대해 연기평을 했다. '내 영화에 출연한 후 <눈물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진 전옥 씨는 정말 전설적인 여배우로 연기에 대한 열정은 가히 ''불꽃''이라고 부를만 했어요. 거기에 비해 이경희 씨는 소극적이며 내향적인 성품의 연기자였지요. 그의 매력은 항시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연약함에 있습니다.' 1958년 초여름 결혼했던 남편 김영건과 1963년 사별한 이경희는 딸 혜정의 강한 어머니로서 모정의 세월 속에서 연기생활에 전념했다. 이경희 가 출연한 최근 작품으로는 < 세상 밖으로 >''94 여균동 , < 닥터 봉 > ''95 이광훈 , < 도둑과 시인 > ''95 석래명 , < 애 > ''99 이두용 , < 가위 >2000 윤종찬 등이 있다. 영화배우 이경희 .... 그녀는 1950년대 중반에 데뷔한 이래 45년간을 현역 연기자로 활동하였다. ''눈물과 천사표의 페르소나''는 늙음도 마다 않고 항상 우리 곁에 있다. 변인식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출 생 : 1932. 4. 27 서울 데 뷔 : 1955년 김성민 감독 < 망나니 비사 > 주요 작품 : < 찔레꽃 >, < 망부석 >, < 두남매 >, < 잃어버린 청춘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