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 감독
- 임은경
- 제작년도
- 2012
유튜브에 ‘< 시실리 2km > 명장면’이란 검색어를 넣어보자. 임창정 과 우현 이 ‘나이’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창정이 연기한 양이가 우현이 맡은 조직의 막내 해주에게 나이를 묻는다. 해주는 ‘개띠’라고만 말한다. 양이는 그를 1982년생, 1970년생으로 추측하다가 둘 다 아니라는 말에 “앞으로 나에게 형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며 화를 낸다. 해주는 “왜요?”라고 묻는데, 이때 양이는 “그럼 니가 94냐?”라며 신경질을 부린다. 흘리듯 들리는 이 대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우현의 얼굴 때문에 꽤 웃기다. '성숙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나이’를 연결 짓는 이런 유머는 <시실리 2km>를 연출했던 신정원 감독의 신작 <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 >에서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이번에도 ‘94년생’이 언급된다.) 이 장면에서 피식 웃고 나서야 새삼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이 꽤 오랜만에 보는 신정원 감독의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목부터가 신정원 감독의 전작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서 ‘죽어도 죽지 않는다’란 설정은 기괴한 긴장감과 웃음을 터트린다. 엄청난 신체 능력을 가진 외계인이 그런 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인간도 그런다. 언뜻 별 특이할 게 없어 보이는 설정이다. 그런데 신정원 감독의 영화에서는 죽여도 죽지 않는 인간이 딱히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가 왜 죽지 않았는가를 아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특별한 설정이 된다. <시실리 2km>에서 권오중 이 연기한 석태가 겪는 ‘죽음의 연대기’를 돌이켜보자. 변기에 뒤통수를 부딪혀 쓰러진 그를 모두가 죽은 줄 안다. 그런데 안 죽어서 삽으로 쳤더니 쓰러졌길래 또 죽은 줄 알았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그는 애타게 구조신호를 보내는데, 하필 머리에 못이 박혀서 또 죽은 줄 알았다. 이번에는 땅에 묻었는데, 그래도 그는 살아난다. 어디에도 그가 왜 죽지 않았는 가란 설명은 없고, 관객도 그걸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단지 석태의 끈질긴 생명력과 그보다 더 끈질긴 불운이 <시실리 2km>의 웃음을 이끄는 리듬이었을 뿐이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서 죽지 않는 인간의 불운은 인공지능 스피커와 스타일러 덕분에 더 밀도 높은 긴장감과 웃음을 주고 있다. 신정원 감독의 영화가 가진 또 다른 특징은 관객의 예상과 상관없이 ‘불쑥’ 등장하는 순간들이다. <시실리 2km>에서 귀신이 된 송이( 임은경 )가 나뭇가지를 톱으로 자르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인서트가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로는 < 차우 >에서는 포수 천일만( 장항선 )이 가른 멧돼지의 배에서 커피믹스 봉지가 나오는 장면을 최고로 꼽는다. 백만배( 윤제문 )가 자신의 개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 또 백만배가 변수련( 정유미 )과 우유와 연양갱 등을 나눠 먹는 장면 등이 모두 딱히 이야기의 흐름과는 상관없지만, 키득거리게 되는 장면이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에도 이런 순간은 곳곳에 있다. 죽은 연인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뜬금없이 흘러나오는 ‘<모래시계> 혜린의 테마’, 주인공 남편의 쉬지 않는 여성 편력을 설명하다가 등장하는 ‘3만 원어치의 경유를 마시는 장면’, 잠시 기억을 잃은 인물이 반복하는 ‘초등학교 어디 나왔어요?’란 대사. 정교한 계산으로는 배치할 수 없는, 그저 ‘어쩌다 하필 그 자리에 놓여 있다’고만 말할 수 있는 그런 장면이 신정원 감독이 영화가 가진 개성이다. 종합하자면, 신정원 감독의 영화는 너무 뻔뻔해서 뻔뻔하다고 지적할 생각조차 나지 않는 뻔뻔함의 영화다. <시실리 2km>에 나온 마을 주민들의 캐릭터와 흡사하다고 할까?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치기’ 위해 일부러 라면 국물을 들이켰던 그들의 모습처럼 신정원 감독의 영화에서는 가장 뻔뻔한 순간에 가장 크게 웃을 수 있다. 그래서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의 아쉬운 부분 또한 ‘뻔뻔하지 못한’ 순간들이다. 외계인의 존재 이유와 그들의 목적을 설명하는 ‘지구 외 생명체 검역 관리소’ 같은 설정이 꼭 필요했을까? 왜 굳이 그들을 등장시켜 외계인과의 한 판 액션을 벌이게 했을까? <차우>에서 ‘백백교’ 교주의 죽음을 멧돼지와 연결시켰던 것처럼,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도 더 뻔뻔하게 외계인을 이용했다면 어땠을지. 그랬다면 <시실리 2km>와 <차우>를 보았던 그때처럼 웃었을 것 같다.
2002년 | KM컬쳐 감독: 조근식 | 원안: 조근식 이지형 | 각본: 이해준 이해영 이지형 정진완 | 제작: 박무승 | 촬영: 조용규 | 미술: 이철호 | 음악: 노영래 CAST 중필: 류승범 | 나영: 공효진 | 민희: 임은경 | 상만: 김광일 | 수동: 봉태규 | 영만: 최우혁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는 ‘르네상스’를 맞이하면서 영화계 전반이 급격한 변화를 겪기 시작합니다. 연기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로운 이미지를 지닌 배우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는데요, 류승범은 이런 흐름을 대표하는 배우입니다. 연기를 배운 적 없는, 야생 그대로의 배우였던 류승범은 형인 류승완 감독의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0)로 데뷔해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주목을 받으며 급성장했습니다. 이때 만난 영화가 바로 < 품행제로 >(2002)였고, 이 영화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이야기할 때 아직까지도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촬영 공개는 2002년 8월에 이뤄졌습니다. 공개된 장면은 그 롤러 스케이트장 신. 나영(공효진)과 민희(임은경)가, 박혜성의 ‘경아’와 김승진의 ‘스잔’을 놓고 대결하던, 그리고 중필(류승범)이 그 사이에 끼어 있던, 그 장면이죠. 1980년대 롤러 스케이트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찾던 제작진은 광주 송정리에 있는 ‘송정 롤러 스케이트장’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에 천장에 만국기를 달고, 세트로 실내 매점을 만들었습니다. 매점의 떡볶이와 어묵 그리고 DJ 부스입니다. 그 시절 ‘롤러장’을 다녔던 분들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죠. 정란여고 ‘오공주파’의 ‘짱’인 나영과 최고의 ‘범생이’인 민희는, 롤러 스케이트를 타는 스타일 자체가 다릅니다. 나영이는 공중 회전 점프나 뒤로 타기 그리고 기차 놀이 등을 하며 롤러장을 휘젓습니다. 반면 민희는 친구 손을 잡고 얌전하게 즐기죠. 공효진은 공중 회전 점프 장면을 위해 와이어에 매달려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스잔’이었습니다. 민희가 신청한 김승진의 ‘스잔’이 흐르자, ‘경아’의 박혜성 팬인 나영의 패거리는 DJ 부스로 가 노래를 바꿔버립니다. 그러자 민희는 감히(!) ‘짱’인 나영에게 따지고, 일촉즉발의 상황에 마침 롤러장에 왔던 중필이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묘하게 형성되는 삼각관계. 그렇다면 중필의 선택은? 음… 결국 중필은 ‘스잔’을 선택하게 됩니다. 나영과 ‘오공주파’의 모습입니다.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배우가 낯이 익는데요, 바로 < 추격자 >( 나홍진 , 2008)의 오 형사로 유명한 박효주 입니다. 류승범은 <품행제로>의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중필이라는 캐릭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었죠. 여태껏 제가 연기한 배역 중 저와 제일 많이 닮은 캐릭터인 것 같아요. 제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죠. 그리고 중필은 사실은 굉장히 약한 인물이에요.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정면으로 대면하기보다는 피해가려는 측면이 강하죠. 저도 사실은 그렇거든요.” 그러면서 “도심 속에 떠 있는 섬 같은 아이”라는 시적인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 민규동 김태용 , 1999)로 데뷔한 공효진은 이 시기 한참 떠오르는 스타였습니다. 특히 2002년에 출연한 TV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는 결정적이었고, <품행제로>는 그 상승세를 이어가는 작품이었습니다. 거친 여고생 장나영 역할을 맡았지만, 정작 학창 시절엔 “소심하고 겁도 많고, 친구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 하는” 소녀였다고 하네요. 어느 이동통신 광고 모델로 급부상했지만 첫 영화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 장선우 , 2002)가 크게 아쉬운 평가를 받았던 임은경에게 <품행제로>는 의미 깊은 작품입니다. 1984년생인 임은경에게 그 시절의 십대를 연기하는 건 쉽지 않을 일이었겠지만, 정작 힘들었던 건 중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연애의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민희 역을 준비하며 시를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세 배우. 그리고 당시 류승범과 공효진은 실제 연인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아카데미 출신인 조근식 감독은 장선우 감독의 < 거짓말 >(2000) 연출부를 거쳐 <품행제로>로 데뷔했습니다. < 나쁜 영화 >(장선우, 1997)의 카메라맨 중 한 명이었던 조용규 촬영감독은 이후 < 미술관 옆 동물원 >( 이정향 , 1998) < 플란다스의 개 >( 봉준호 , 2000)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류승완, 2000) <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 박흥식 , 2000) 그리고 <품행제로>까지 데뷔 감독들의 든든한 카메라가 됩니다. 이후 < 효자동 이발사 >( 임찬상 , 2004) < 가족의 탄생 >(김태용, 2006) < 천하장사 마돈나 >(이해영 이해준, 2006) < 밀양 >( 이창동 , 2006) 등에서 작업했습니다. 조근식 감독과 류승범 공효진이 현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류승범은 감독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품행제로>를 선택하지 못했을 거라고 하는데요, 조근식 감독은 시나리오가 수정될 때마다 류승범을 찾아와 중필 역을 맡아달라고 설득했다고 하네요. “몸은 지쳐가도 의지는 줄어들지 않는 감독의 간절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이토록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뭔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요.” 류승범의 말입니다. 영화 속에선 연적이자 ‘짱 VS 모범생’의 관계지만, 공효진과 임은경은 카메라 밖에선 친자매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