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 감독
- 김태곤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이주희, 이지혜, 이수연, 하수연, 김아람, 원일구, 임형국, 양은용, 류현빈, 최정우, 길해연, 이성민, 김현아, 이서원, 정의순, 김왕근, 임천순, 정계순, 박중신, 신덕호, 구자승, 노치영, 김정은, 김아림, 김용호
이완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 사랑의 고고학 >(2022)에서 주인공 영실(옥자연)은 고고학을 공부하고 30대에도 여전히 현장에서 흙을 털어내고 고르며 유물을 찾아내는 연구원을 하고 있다. 지도교수를 비롯해 같이 공부한 사람들이 이제 아카데미로 들어와 일을 찾으라고 해도 영실은 시간을 직접 만질 수 있는 현장이 좋다. 유적 안에 있는 옛 건물과 주거지가 변경되었음을 알려주는 지표인 유구선(遺構線)을 직접 붓으로 하나하나 흙을 털어내며 만지는 것은 시간의 과거와 접촉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영실이 자기의 삶 자체를 멀리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지층처럼 중첩된 과거, 현재, 미래가 발굴된 유적 현장처럼 그 시간들과 시간들 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는 마음들의 유구선을 끈질기고 집요하게 털어내고 고른다. 그것이 무엇이고, 언제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마음으로 변해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해갈지 지켜보면서 말이다. 때로는 그러한 고고학적 실천이 영실 스스로를 상처 내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영실은 모두가, 심지어 함께 사랑을 확인하고 미래를 약속했던 연인이 떠나고 그 남자가 야기한 폭력으로 폐허만 남은 후에도 그 감정의 결과, 약속의 의미와, 폭력의 메커니즘의 유물을 섬세하게 손끝으로 감각하며 끝끝내 자신의 삶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시간을 응시하는 자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뒤늦음’의 시간이나 ‘후회’라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고학 현장에서 ‘이후의 시간’은 뒤늦지 않고 언제나 적당한 때이기 때문이다. 이완민 감독의 첫 번째 장편 < 누에치던 방 >도 두 번째 작품처럼 시간과 마음의 지층들을 보살핀다. <사랑의 고고학>이 40대에 다다른 여성이 30대의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발굴하는 데 집중하는 영화라면, <누에치던 방>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만큼 큰 상처가 각인된 청소년기의 시간의 방에 갇혀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힘든 이들이 서로를 지켜봐주고 증언하고 그 지층의 실들을 발굴하는 영화다. 그렇게 교차적으로 목격된 시간들은 사회를 만든다. 독립된 인간이란 사회에 참여하면서 사는 인간이다. 이 영화는 30대, 40대가 된 성인들이 서로의 청소년기를 목격하고 상대에게서 우연히 자신의 흔적을 찾아내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10년 째 고시공부를 하다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실패한 미희(이상희)는 남자친구와도 헤어진다. 고등학교 때부터 오로지 공부를 목적으로 친구 관계도 모두 끊어내고 고립되어 살아온 미희는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미희는 고치에서 나오지 못한 애벌레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하철에서 볼펜과 메모지를 나눠주며 자기한테 하고 싶은 말을 그게 뭐든지 적어달라고 호소하는 고등학생 유영(김새벽)을 만난다. 유영 역시 이 사회 속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이 있지만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는 데 서툴다. 유영을 쫓아간 미희는 아파트 문을 두드리고 성숙(홍승이)을 만나게 된다. 미희는 충동적으로 한 번도 본적 없는 성숙에게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단짝친구라고 한다. 성숙은 그런 미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느끼면서도 집안으로 들여 다독여준다. 이 영화에서 성숙은 유일하게 사회에 참여하는 이다. 성숙은 미희에게서 자신과 자신의 진짜 어린 시절 단짝친구인 유영의 흔적을 읽어낸다. 미희는 부모의 만족을 위해 평생을 자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단절해온 상처를 갖고 있고, 성숙과 성숙의 남자친구 익주(임형국)는 단짝친구 유영을 잃은 상처를 안고 산다. 성숙과 익주는 유영이 죽은 이유를 알 수 없다. 유영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말을 하고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유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성숙은 이제 겨우 고치에서 탈출해 사회로 나오려고 하는 미희에게서 그런 유영의 흔적을 처음부터 본다. 그리고 진짜 단짝 친구였던 것처럼 관계를 맺는다. <누에치던 방>은 30대인 성인도 뒤늦게 고치에서 나올 수 있다고 다독여진다. 그럴 때 아무 말 없이, 이유도 묻지 않고 친구로 받아들여주는 성숙 같은 주변인이 있다면 실패하고, 늦었더라도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연극배우인 성숙은 거리에서 어떠한 인위적인 무대장치나 소품도 없이 돈키호테를 연극하는 실험적인 공연을 한다. 관객도 지나가는 거리의 행인들이다. 그럼에도 성숙이 칼을 들고 풍차를 향해 달리는 연기를 하자 사람은 말이 되고, 지저분하고 무미건조한 회색도시의 풍경은 초원이 된다. 성숙은 사회에 참여하는 동시에 자기 주변의 사회를 바꾸는 사람이다. 미희는 과거에 자신이 모질게 굴어 단절했던 고등학교 친구와 대학교 선배를 찾아가 시간과 관계를 회복해 보려 한다. 그러나 선배와의 만남은 다소 허무하고 고등학교 친구는 만나주지 않는다. 결국 자살까지 시도하려던 미희는 수술을 하게 됐으니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느냐는 성숙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자살을 포기한다. 늘 보호와 관심을 요청하던 미희는 돌봄의 요청을 받는 자가 된다. 독립적으로 사회 속에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성숙은 사실 미희만큼은 아니지만 유영이라는 상처와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미희는 그런 성숙을 알아봐준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유영을 알지 못했던 미희는 유령처럼 다른 시간대에 출현한 유영을 알아보지만, 성인이 된 성숙과 익주는 유영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한다. 아마도 미희가 만난 유영은 진짜 유영이기 보다는 유영과 같은 상처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등학생일 수도 있다. 그리고 미희가 그녀에게서 유영의 흔적을 읽어낸 것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있는 이들이 교차하면서 서로의 이야기의 흔적을 찾아주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서사 속에서 그래도 미희와 성숙은 살아남아 미희의 고등학교 친구 근경을 찾아간다. 그러나 근경은 미희에게 ‘그만 스토킹을 하라’며 화를 낸다. 근경은 ‘이제 와서 무엇을 함께 할 수 있겠냐?’며 반문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얽인 실타래처럼 혼재되어 살아가는 미희, 성숙과 달리 근경은 이미 오롯이 현재의 시간을 산다. 근경은 미희에게서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없다. 그리고 영화는 그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미희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흘러가고 그 시간이 언제나 맞아떨어질 수 있으리란 염원은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낙관을 말하기보다는 성숙이란 존재가 고대유물처럼 얼마나 희귀한 존재인지를 역설한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인식( 임형국 )이 출근을 준비하는 사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송광자)와 딸 소진( 권잎새 )은 ‘사물 맞추기’ 놀이를 한다. 날마다 반복되는 이 게임에서 한 사람은 반복을 인식하지만, 다른 사람은 매번 잊어버린다. 그래서 이 행위는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 단순하지만 고통스러운, 그럼에도 견딜 만한 일상은 그렇게 지속된다. 그러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들 태진의 물건을 어머니가 끄집어낸다. 기억하는 자와 기억하지 못하는 자의 갈등이 서서히 고조된다. 어느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지만, 어떤 이는 피해자가 되고 또 다른 이는 처형자의 위치에 오른다. 기억이 침범한 내면의 경계는 인물 사이의 골을 파고든다. 누군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 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인물들 각자의 내면에 한숨으로 남을 뿐이다. 처음에는 몇몇 장면의 연출이 아쉬웠다. 정면 원쇼트의 대화 표현은 어색했고, 리듬감 없이 등장하는 인서트도 거슬렸다. 그런데 자꾸만 생각이 났다. 내게 있어 장병기 감독의 < 할머니의 외출 >(2019)은 마음에 남아 뭉글뭉글 떠오르는 영화였다. 그러던 중에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다. “처음에는 컬러라고 생각하고 촬영한 작품이다. 그런데 편집을 마친 뒤 화면을 보는데 처음의 의도를 화면이 가리는 것 같았다.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지는 10월의 가을 화면이 영화와 안 맞았다.” 계속될 수 없는 게임을 인지하게 된 남자 주인공의 체념을 영화는 흑백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의 선택에 동의하게 됐다. 영화 속 모든 모티브는 ‘과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아들의 ‘운동화 한 짝’이 그렇다. 이 물건의 등장으로 울음을 터트리는 자는 없다. 이미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절대 옅어질 수 없지만, 영화는 ‘슬픔’이나 ‘애정’ 같은 진부한 단어로 이 감정들을 꾸미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곳에는 클리셰가 없다. 불같이 화를 내는 인물도 없고, 감정에 취하는 자도 없다. 진짜 아픈 감정이 그렇게 천천히 바깥으로 드러난다. 일상에 기대어서, 흘러가는 사건을 관망하며 영화는 아픈 기억을 어루만진다. 죽음에 이르는 예고 역시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현재’라는 틀에 갇혀, 인물들의 마음이 도덕적인 딜레마에 휩싸인다. 잠재적이고 가상적인 감정이 시간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남자 주인공에게 이야기가 집중되는 구성은 적절한 선택처럼 보인다.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가정이 모두 그로부터 시작된다. 말 그대로 이 인물은 ‘인식’하는 자이다. 뜨겁고도 무거운 가을의 온도가 그를 거쳐 형상화된다. 진정한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남자는 존재하고 있다. 만일 <할머니의 외출>이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수채화였다면, 영화가 품은 시간의 뼈대는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회하여 산만하지 않은 방식으로, 영화는 흑백의 그림자를 내민다. 폭발적 내면을 보여주지 않고서도, 달콤한 시간을 끄집어내지 않고서도, 관객들은 그저 선험적으로 무해하고 관조적인 감상에 이른다. 때문에 이 작품은 시간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무언가의 회귀를 간절히 바라면서,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집중한다.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할머니의 상황에 대해 아버지는 딸에게 전화 너머로 설명하는 중이다. 그의 목소리에서, 바라보지 않아도 전달되는 아이러니한 감정을 깨닫는다. 영화에 드리워진 암흑의 실루엣은 어느새 새벽을 향한 밤의 그림자가 되어 있다. 현실이란 악몽에 덧입혀진 어설픈 레이어는 이제 곧 벗겨질 것이다. 생각해보면 누구도 옳지 않은 자는 없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간혹 실수하고 공황에 빠지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은 영화의 결말은 그렇게 가느다란 희망과 만난다. 예민한 주인공이 약한 숨을 내쉬고, 단호한 ‘생략’이 모든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우리 주변을 떠돌던 일상의 어두움은 극복될 것이다. 이 결말을 딱히 아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가 품은 모호한 형상은 사실 우리들 자신과 몹시 닮아 있다.
이상한 영화다. 이완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 누에치던 방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상 수상)말이다. 영화를 처음 보고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과거와 현재가 병치돼 있는데다 현재의 시간대에 꿈이었을 장면이 불쑥 들어오기도 하고 또 갑작스럽게 ‘이벤트’에 가까운 장면의 난입도 있다. 영화는 이 당혹스러운 많은 것들을 제 안에 넣어두고는 관객에게 요리조리 퍼즐을 맞춰보라고 하는 듯했지만 정작 관객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싶어 하는 지점들에선 일절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부정확한 것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길 영화는 정말로 바라는 것 같았다. 아직도 <누에치던 방>에 대해선 많은 것들이 의문인 채로 남아있다. 서사는 덜컹댔고 매끄럽지 않게 나아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두 번째로 다시 영화를 봤을 때 나는 그 덜컹대는 이야기의 마디마디에서 서로를 껴안아 주는 여자들이 보였다. 마음이 아팠다. 아픈 그녀들의 마음을 지켜보는 일로 이 덜컹댐을 견뎌보게 됐다. 영화의 과거와 현재는 이상한 방식으로 만난다. 그 기이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두 여자가 있다. 현실 속 미희( 이상희 )와 현실 속 소녀( 김새벽 )다. 소녀는 지하철 승객들에게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자신에게 한마디를 부탁한다며 종이와 펜을 건넨다. 미희는 소녀를 보자마자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회피하고 싶은 뭔가가 있다는 듯 받아든 종이와 펜을 서둘러 자신의 가방에 넣고는 눈을 질끈 감는다. 왜 그랬을까. 잠실나루역에서 내리는 소녀를 따라 가보던 미희는 누군가의 집 앞에 홀리듯 이른다. 성숙(홍승이)의 집이다. “미안해. 그런데 우리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였잖아.” 느닷없이 찾아온 낯선 여자 미희의 이 말에 성숙은 의아해하지만 피하지 않는다. 미희가 진짜 친구인 양 편히 대해준다. 하지만 다음 신에서 성숙은 자신의 동거인이자 미희가 말한 단짝 친구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익주(임형국)에게 말한다. “어떤 모르는 여자가 집에 찾아왔어.” 성숙은 어째서 완벽한 타인인 미희를 내치지 않고 집에 들였을까. 이어서 성숙은 익주에게 이름 하나를 말한다. 유영(김새벽)이었다. 고교 시절, 유영과 성숙( 이주영 )은 단짝이었다. 유영은 학교를 그만두고 싶고, “억압돼 있는 걸 표현” 하고 싶어서 글을 쓰며, 세상을 향해 투사처럼 달려들고도 싶다. 자신 앞을 가로막고 선 것들이 죄다 거추장스럽다. 하지만 그녀는 그 시절을 지나오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니 유영은 오직 과거의 시간에만 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성숙 앞에 나타난 미희는 유영일 수가 없는 일이다. 미희도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인 척) 사칭한 적 없다”고. 그렇다면 미희는 어쩌려고 처음 보는 성숙에게 그런 말을 한 걸까. 미희가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한때는 시집을 읽고 연극도 보러 다니던 미희였지만 지난 10여 년간 세상과 단절된 채 낙담할 일들만 겪어왔다. 영화에 등장하는 고교 시절의 미희에게서는 이미 신경질적이며 강박적인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 미희 역시도 단짝 친구 근경(정원)과 단절을 경험했다. 아픈 미희가 성숙을 보자마자, 혹은 지하철에서 소녀를 보자마자 과거의 근경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또는 미희의 즉흥적인 속내를 내치치 않고 받아들인 성숙의 태도에 관해 말해 볼 수도 있겠다. 생판 모르는 미희가 불쑥 자신의 과거(더 정확히는 유사 과거)를 끄집어 들고 왔을 때 그 예상치 못한 침입/방문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성숙의 기질과 성정에 기댄 일일 수 있다. 그 짧은 순간, 성숙은 미희를 내치지 않고 품어버린다. 홍승이라는 배우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 이어서 모든 걸 다 말하는 것과 모든 걸 다 말하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가를 두고 미희와 성숙이 나누던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안 주려면.” 성숙의 이 말은 그대로 미희를 다독이는 말이 되었다가 미희를 향한 바람이 되기도 한다. 두 사람은 미희의 방에서 나란히 누워 성숙이 미희를 안아주고 미희가 아픈 성숙의 보호자로서 달려가고 있다. 연고 없던 두 사람 사이에는 신기하게도 미더운 연이 생겨나 있다. 시제의 오고감 속에서 관객을 당황스럽게 하는 또 하나는 유영과 소녀의 동일한 얼굴이다. 김새벽 배우가 1인 2역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과 관객의 머릿속에 유령처럼 따라붙던 유영이라는 과거의 인물이 현재 실존하는 인물로 출현할 때마다 보는 이는 긴장이 된다. 서로 다른 인물을 어떻게든 연결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미끄러지는 것 같아 애가 탄다. 성숙과 익주의 과거 속에 존재하는 유영보다도 현실 속 소녀의 존재가 더 미스터리하다.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유영을 대신해 현재에 진짜 살아있는 유영의 얼굴을 보는 일은 귀기가 느껴지는 서늘한 일이다. 이 소녀는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었을까. 영화의 후반, 소녀의 마지막 한마디 앞에서 느끼는 또 한 번의 당혹이란. 관객은 이 소녀를 어떤 존재로 봐야 할까. < 누에치던 방 >은 다 지나 가버린 과거를 끈덕지게 붙들고서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얘기다. 그들의 과거는 과거가 됐기에 낡고 쇠락했으며 쓸모 하나 없는 것으로서 고루하다고 말해진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게 다 낡아 버리고 빛이 바랬다 해도 중요한 건 중요한 것 그대로라고 말한다. 세련될 수 없는 일이다. 그 촌스러움이 아프다. 그런 아픔을 민감하게 감지하며 사는 이들을 용감하게 안아주려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다. 불현듯 꿈에서 미희가 소녀에게 건넸던 메모지의 말이 생각난다. ‘용기를 가지고 살자.’ 텅 빈 메모지를 돌려받았던 소녀에게 미희의 이 말은 전달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메모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희에게 수신됐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2018년 1월 개봉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