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봉 가는 길
- 감독
- 임흥순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임흥순, 지보이스, 이향
1 인간은 영화관에 가는 동물이다. -조르조 아감벤 2 정상적인 관객은 자신이 욕망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사람이며, 자신이 이미 인생에서 싫어하는 것을 영화관으로 보러 가지 않은 사람이다. -세르쥬 다네 3 일요일의 충무로는 처음이었다. 직접 차를 운전해서 간 것도 처음… 한때 매일같이 충무로에 가던 시절이 있었다. 충정로에 있던 회사에서 퇴근해 7011번 버스를 타고 매일경제본사 앞에서 내려 영한빌딩까지 걸어가 여자친구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던 20대 후반의 몇 년, 그리고 은평구에 있던 집에서 3호선을 타고 6번 출구로 나와 매일경제본사 맞은편에 있던 ‘동화삘딍’ 4층 사무실에서 아저씨들과 머리를 맞대고 한숨과 담배연기를 번갈아 내뱉으며 시나리오를 쓰던 30대 후반의 일 년.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그때 충무로는 내게 해질 무렵의 골목, 커피와 생맥주, 닭꼬치, 돼지껍데기, 철판스테이크, 복지리, 통북어, 하루종일 가시지 않는 지독한 담배 냄새, 낡은 당구장, 서지 않는 택시 같은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영화였고(여자친구가 참여한), 그리고 영화였다(내가 연루된). 그리고 오늘, 40대가 되어 처음 가는 충무로 역시 영화가 될 예정이었다. 나를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람들의 영화. 영화들. 얼마나 다행인가? 내 영화가 아니라는 게… 4 영화란 무엇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장 루이 뢰트라와 수잔 리앙드라 기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코 앞에서 볼 수 있는 진정한 악마의 소굴, 왕관을 다투는 시장, 배움의 장소—말하자면 감정교육, 많은 사람들의 오락, 일부 사람들의 직업, 어떤 사람들의 열정, 여기저기서 채취해 온 1-2시간의 소재, 별 아래서 보내는 온종일, 대낮 같은 밤, 어두운 밤으로 빨려드는 불빛, 친구와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토론, 계속되는 이야기들, 역사의 단편, 움직임-지속의 덩어리, ‘현실’과의 아주 특별한 관계 설정(현실을 회피하시오, 그러면 현실이 당신을 따라가고, 현실을 따라가시오, 그러면 현실은 당신에게서 도망간다!), 위험할 정도로 서로가 닮아 있는 영화 속의 얼굴과 신체들, 진부하거나 기상천외한 대상들과 풍경들, 마치 우리가 항상 살았던 듯한 느낌을 갖는 상상 속의 저택과 또 다른 화려한 저택들, 일시적인 경험, 은밀하고 격렬한 열정이나 몸짓들, 나를 끌어들이고 빨려 들게 하는 방식, 또는 단숨에 혹은 한순간에 불확실하거나 형성중인 사고나 상상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방식, 사회, 사람들이 말한 것, 타인과 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꿋꿋한 시선… 5 나는 이 목록에 두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브루스 윌리스와 니콜라스 케이지. 내게 영화는 브루스 윌리스다. 동시에 내게 영화는 니콜라스 케이지기도 하다.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다. 블록버스터와 컬트무비와 허섭쓰레기를 오가는 그들의 긴-긴 필모그래피에서 함께 출연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그나마 브루스 윌리스가 출연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 플래닛 테러 >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 데쓰 프루프 >를 ‘동시상영’으로 묶은 <그라인드 하우스> 중간에 삽입된 4편의 가짜 영화 예고편 중에서 롭 좀비가 연출한 <나치의 늑대여인Werewolf Women of the S.S.>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한 경우가 가장 근접함). 따라서 브루스 윌리스가 실어증으로 은퇴를 선언한 2022년 3월 31일은 영화가 죽은 날(the day the movie died)이다. 적어도 반쯤은 그렇다… 6 충무로를 다시 찾은 건 『마테리알』이 주최한 릴레이 발표대회 [오픈 스페이스: 영화를 가르는 패스]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아침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4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모두 여섯 명의 발표자가 발표를 한다고 했다. 토요일 한국 독립 영화 사운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 최지영(사운드 디자이너) 언제나 밝은 방에서 여러개의 창을 틀어놓고 / 윤원화(시각문화 연구자) 정당화하는 관점: 임흥순에 대한 불만 / 윤아랑(비평가) 일요일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 / 함연선(마테리알 편집인) 문화로서 영화: 누가 도대체 진지한 표정으로 영화 이야기를 들을까? 당신도 / 강덕구(작가,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 운영자) 해적질과 영화 문화 / 한민수 모두 매력적인 주제들 가운데서 특히 내 눈을 잡아끈 것은 함연선의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였다. 때마침 JD와 나는 봉준호, 홍상수, 이창동 같은 이름에 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관객수로 줄을 세우지도 않으면서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이야기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그 모든 영화들이 없었던 것처럼 굴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모르는 영화를 우리가 ‘발굴’한 것처럼 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행사 안내 페이지를 캡쳐해서 JD에게 보냈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수학 학원 선생님의 질문에 "화산고"라고 대답한 학생은 망신을 당하고 맙니다. '차라리 <스파이더맨>이라고 말했다면 괜찮았을까...?' 수치의 순간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한 사춘기 청소년은, 결국 유사-스노브로 성장하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영화 경험의 근원에는 "비천한 영화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원고를 위해 저는 여기에 가야겠어요, 그리고 어쩌면 임창정에 대해 쓸지도 모르겠네요, 쓰고 싶지 않지만요. 쏘옥, 소리와 함께 아이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답장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지를 작성 중이라는 말풍선조차 뜨지 않았다. 나도 구태여 오픈 스페이스 날짜가 원고 마감일 이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원고 마감일을 어길 수밖에 없다는 말은… 7 왜 모든 영화 관련 이벤트(GV, 강연, 세미나, 기타 등등)는 내가 가기 힘든 시간만 골라서 열리는지 모르겠다. 씨네필들은 가정이 없나? 아니면 가정이 없는 것처럼 가정하고 살아가거나… 다네는 말한다. “영화 팬은? 헛되이 두 눈을 크게 껌뻑거리는 사람이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며, 프로다운 ‘영화 팬(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는 삶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행위들이다.” 뢰트라와 기그는 여기에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을 지으면서 최대한 아주 늦게 도착하는 것이 틀림없이 사람들이 영화 팬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이라고 덧붙인다. 물론 나는 영화-어쩌고가 아니며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영화 팬의 핵심을 수행하긴 했는데, 짧게 이야기하면 이렇다. 내가 차를 몰고 갔다는 사실은 앞서 말했다. 오픈 스페이스를 마치고 처갓집으로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철거된 동화빌딩과 매일경제본사 사이에 있는 노상공영주차장(주말과 공휴일에는 무료개방)에 주차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빈자리가 없었고 그래서 (저렴한 금액으로) 주차할 곳을 찾아 빙글빙글 돌다보니 시간이 흘렀다. 결국 (구)극동빌딩 (현)남산스퀘어빌딩에 차를 세우고 오픈 스페이스가 열리는 대한극장 뒷골목의 서울지역영화교육허브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분도 더 늦은 시간이었다. 문앞에 선 채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일정에 따르면 첫 번째 발표에는 2시간이 배정되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 을 지으면서 발표회장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설상가상, 빈자리가 없어 발표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맨 앞자리까지 빽빽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으며… 8 한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발표가 끝나버렸다. 스탠리 카벨은 누구나 자신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 자신의 인생이 이 시간과 장소라는 지점에 이르게 된 것, 자신의 역사가 펼쳐져서 이 방에, 이 길에, 이 곳에 이르게 된 것을 잠깐이나마 기이하게 여긴 적이 있을 것이라고 썼는데, 그때 내가 그랬다. 질의응답이 시작되었지만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다는 생각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문윤기를 보았고—나와 그는 JD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실은 나와 ‘트친’인 영화평론가이고, 그밖에도 이 좁은 장소에 내가 타임라인에서 보아 왔던 사람들이 득시글하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기이함the uncanny은 영화에서는 보통의 경험이다, 라고 스탠리 카벨은 계속해서 쓴다. 도주, 구출, 우연의 만남이나 근처에 있는 탓에 인생이 변모해버리는 것—이러한 우연과 만남은 영화의 모든 장르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연한 만남은 우연한 만남일 뿐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 건 또 아닌데, 모든 만남은 크건 작건 우리 안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위대한’ 영화가 우리의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백 편의 ‘비천한 영화’는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제법 높은 확률로… 9 카벨은 음악이나 문학과 달리 영화의 경우에는 보통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를 진정으로 좋아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영화를 모른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보통의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다. 카벨 스스로 이미 ‘보통의 영화’와 ‘높은 레벨의 영화’를 구분 짓고 있는 판에 하물며 ‘비천한 영화’는 또 어떻게 말할 것인가? 질의응답 시간에 이어진 것도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2000년대 초중반에 몰려 있는 비천한 영화들, 혹자는 OCN 영화들이라고도 부르는 그것들이 영화 경험의 근원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굳이 복원시킬—비평적 공론장으로 끌어올릴—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나왔고, 현재의 영화 담론이 특수한 세대적 경험을 보편으로 인준하는 시스템 속에서 작동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영화들을 비평의 언어로 끌어들여 담론장에 균열을 낼 필요가 있다는 반론이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00년생이어서, 02년생이어서, 90년대 후반생이어서 오늘 언급된 < 달마야 놀자 >, < 신라의 달밤 >, < 두사부일체 >, < 조폭 마누라 > 같은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여기서 내가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인가?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 나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10 항상 12살 짜리가 있는 법이고 그들에게 맞는 책이 역시 있는 법이다. 스탠리 카벨은 말한다. 하지만 영화는, 걸작이 아닌 다음에야, 예전 그대로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어지는 카벨의 목록: 찰스 로튼과 클라크 게이블의 <전함 바운티>, <십자군>, <유니온 퍼시픽>, <새벽의 성찰>, < 캡틴 블러드 >, <알제리>, <찰리 챈>, <폭풍의 언덕>, < 스텔라 달라스 >, <킹스 로우>, <교수와 미녀>, 로날드 콜만의 < 젠다성의 포로 >, < 마음의 행로 >, < 잃어버린 지평선 >, <후아레즈>, <데드 엔드>, <모히칸족의 최후>, <부러진 화살>, <장군, 새벽에 죽다>, <밀드레드 피어스>, <오페라의 유령>, < 스트라이크 업 더 밴드 >, <비에 노래하며>, < 캣 피플 >, <환상의 여인>, <도시의 절규>, <안녕, 내 사랑>, <화이트 히트> 등 그밖에 백 여편의 다른 영화들. 카벨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 영화들과 보낸 시간은 정말 전율의 시간이나 나날이었다. 중대한 순간이었지만 아주 일순간이었다. 기억과 회상에서만 포착 가능한 시간으로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다. 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카벨은 지금 정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지식이나 교양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영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렇다: < 동감 >, < 번지 점프를 하다 >, < 친구 >, < 엽기적인 그녀 >, < 킬러들의 수다 >, < 공공의 적 >, < 결혼은, 미친짓이다 >, < 후 아 유 >, < 라이터를 켜라 >, < 연애소설 >, < 광복절 특사 >, < 품행제로 >, < 클래식 >, < 동갑내기 과외하기 >, < 선생 김봉두 >, < 와일드 카드 >, < 싱글즈 >, < 오! 브라더스 >, < 황산벌 >, < 그녀를 믿지 마세요 >, < 어린신부 >, < 효자동 이발사 >, < 늑대의 유혹 >, < 바람의 파이터 >, < 시실리 2km >, < 알포인트 >, < 슈퍼스타 감사용 >, < 귀신이 산다 >, < 말아톤 >, < 잠복근무 >, < 혈의 누 >, < 사랑니 >, < 광식이 동생 광태 >, < 태풍 >, < 작업의 정석 >, < 싸움의 기술 >, < 흡혈형사 나도열 >, < 음란서생 >, < 달콤, 살벌한 연인 >, < 사생결단 >, < 구타유발자들 >, < 천하장사 마돈나 >, < 미녀는 괴로워 >, < 1번가의 기적 >, < 좋지 아니한가 >, < 이장과 군수 >, < 즐거운 인생 >, < 스카우트 > 기타 등등… 이것은 내가 왓챠피디아에 평가한 1499편의 영화 중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를 구작순으로 필터링한 것 중에서 봉, 홍, 박, 이 등의 작품과 여기에 제목을 쓴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작품을 빼고 나열해본 것이다. 모든 영화가 내게 전율을 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한두 장면이라도 재미를 느낀 부분이 있었다고 말해야겠다. 나 역시 빙크스 볼링처럼 “못 만든 영화라도 일단 빠져들면 무척 행복”한 관객이기 때문이다. 11 다시. 문제는 이런 영화를 어떻게 말하느냐다. 카벨은 모든 시대의 12살에게 맞는 공통의 책들이 있는 반면, 서로 다른 시대의 12살에게는 그때그때의 영화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걸작 리스트는 공유가 가능하지만 어쩌면 평범하거나 비천한 영화들의 리스트는 공유 불가능한 게 아닐까(“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사진에 대한 바르트의 구분처럼, 걸작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스투디움의 영역이지만 비천한 영화는 보는 사람의 주관에 달린 푼크툼 같은 게 아닐까? 여기에는 다양한 층위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을 위해서는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만이 (여전히) 남아 있다. 걸작을 나열하지도, 천만 영화 목록을 훑지도 않으면서. 다시 한 번,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우리는 한국 사람… 12 우리가 하려는 게 비평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둬야겠다.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내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카메라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 오픈 스페이스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곱씹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보다는 오픈 스페이스 현장을 찍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말이다. 에세이 필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영화 그 자체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니콜라스 케이지가. 최근 케이지는 < 참을 수 없는 무게의 미친 능력 >에서 한때 잘나가던 슈퍼스타였지만 이제는 빚더미에 올라 아무 영화나 막 찍는 ‘닉 케이지’를 연기했다. 그가 자신의 광팬이자 억만장자 마약왕인 페드로 파스칼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가 예기치 못한 소동에 휘말리는 이야기라는데 내가 본 건 트위터에 돌아다니는 짧은, 그러나 영감으로 넘치는 클립이다. 으리으리한 페드로 파스칼의 집. 파스칼이 소파에 앉아 있는 케이지에게 와인을 따라준다. 케이지 고마워. (사이) 말 좀 그만 돌리고 대답해봐. 세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가 대체 뭐야?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파스칼, 결심한듯 내뱉는다. 파스칼 패딩턴 2 . 비명을 지르며 잔을 내려놓는 케이지. 케이지 뭐?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랑 <패딩턴 2>?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 말은, 잘난 척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파스칼 영화 보는 내내 울었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고. 케이지 야, X까! 장면 바뀌면, 화면을 바라보며 코를 훌쩍이는 케이지의 모습. 나는 JD에게 링크를 보내고, 기다린다. 여전히 답이 없다. 말풍선도… *다음 책들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 [영화를 생각하다](장 루이 뢰트라.수잔 리앙드라 기그, 김영모 옮김, 동문선, 2005) [눈에 비치는 세계](스탠리 카벨, 이두희.박진희 옮김, 이모션북스, 2014)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애초 작성한 리스트에는 23편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10편만 선정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여러 편의 영화를 제외해야 했다. 2014년의 영화로 선택한 < 보이후드 >의 리뷰에 앞서 전체 리스트를 수정 공개함을 알려 드린다. 이용철 영화평론가의 23편 2014년의 영화 보이후드 Boyhood ,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4 다섯 편의 장르영화 나를 찾아줘 Gone Girl , 데이비드 핀처, 2014 더 홈스맨 The Homesman , 토미 리 존스, 2014 다크 밸리 Das Finstere Tal , 안드레아스 프로차스카, 2014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The Wolf of Wall Street , 마틴 스콜세지, 2013 콜드 인 줄라이 Cold in July , 짐 미클, 2014 로버트 패틴슨이 나온 두 편의 영화 더 로버 The Rover , 데이비드 미쇼드, 2014 맵 투 더 스타 Maps to the Stars ,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2014 다섯 편의 아트하우스 더 원더스 Le meraviglie , 알리체 로바허, 2014 도원경 Jauja , 리산드로 알론조, 2014 실스 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 올리비에 아싸야스, 2014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 장 뤽 고다르, 2014 에덴 Eden , 미아 한센 로브, 2014 두 편의 다큐멘터리 야만의 땅 Pays Barbare , 예르반트 지아니키안/안젤라 리치 루키, 2013 위로공단 , 임흥순 , 2014 두 편의 한국 드라마 절경 , 남근학 , 2014 한여름의 판타지아 , 장건재 , 2014 여섯 편의,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한 영화 호스 머니 Cavalo Dinheiro , 페드로 코스타, 2014 사랑스러운 자매 Die Geliebten Schwestern , 도미닉 그라프, 2014 프랑스 공주 La Princesa de Francia , 마티아스 피녜이로, 2014 아프리오리 Mula sa kung ano ang noon , 라브 디아즈, 2014 신이 되기는 힘들다 Trudno Byt Bogom , 알렉세이 게르만, 2014 위플래쉬 Whiplash , 데미언 차젤, 2014 (링클레이터는 < 스쿨 오브 락 >의 개봉 후에 아역 배우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영화지 「사이트 앤 사운드」와의 인터뷰 도중 그 편지에 관한 질문을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멋진 시간을 함께 보냈음을 상기시키는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배우의 길을 걸어가라고 부추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의 인생에서 보낸 하나의 좋은 챕터가 곧 가장 좋은 시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당신 곁에 머무는데, 나는 그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긍정적인 순간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그게 완성된 것이 아닌 경험을 위한 것이라 여긴다. 부모의 이혼으로 메이슨과 누나 사만다는 엄마와 함께 산다. 아빠는 멀리 알래스카에서 일한다고 했다. 뒤늦게 학업을 시작한 엄마는 공부와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친정이 있는 휴스턴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한다. 때마침 아빠도 근처로 거처를 옮긴 차였다. 이후 12년 동안의 시간 흐름을 담은 < 보이후드 >는 제목 그대로 메이슨의 소년기이자 누나 사만다의 소녀 시절 이야기이고 엄마와 아빠의 이혼의 기록이다. 촬영은 실제로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사실만으로도 <보이후드>는 충분히 감탄을 불러낼 만하다. 링클레이터는 이미 ‘비포 연작’을 통해 (동일한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과 그들의 관계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잘 보여주었던 감독이다. 그리고 < 스쿨 오브 락 >(2003)이나 < 배드 뉴스 베어즈 >(2005) 같은 장르영화를 만들 때면 어김없이 어린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던 사람이다. 그에게 <보이후드>가 뜬금없는 작업이 아니란 이야기다. 기실 영화가 12년 정도의 시간 흐름을 담았다고 해서 무조건 열광할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이클 앱티드는 1964년부터 지금까지 50년이 지나도록 ‘업(Up) 연작’을 계속 연출하고 있다. 소년의 성장을 20년 넘게 극화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투안 두아넬 연작’은 또 어떤가. 그래서 <보이후드>에서 우선 관심이 갔던 것도, 시간 속에서 인물을 포착하는 감독의 태도였다. TV 프로그램의 한 코너로 시작된 ‘업 연작’은 매번 유명한 문구 - ‘7살 때까지 아이를 맡겨 달라. 그러면 인간을 보여주겠다’ - 로 문을 연다. 이 문구를 살짝 바꾸면 곧 < 보이후드 >의 모토가 된다. ‘7살짜리 꼬마를 맡겨 달라. 그러면 소년 시절을 보여주겠다.’ <보이후드>를 본 평자들은 누구나 ‘업 연작’의 영향을 이야기하며, 링클레이터 또한 인터뷰에서 앱티드의 영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처지였음을 내비친 적이 있다. 2012년의 <56 업>까지 매 7년마다 한 편씩의 영화로 발표된 ‘업 연작’은 현실의 인물에서 ‘가족, 친구, 애정, 교육, 계급, 타자, 빈부, 정치, 기회, 종교, 도덕, 꿈’을 읽어내 영국의 미래를 논하고자 했던 작품이다. 사회의 축소판이자 거대한 실험장으로 발전한 ‘업 시리즈’의 감동은 삶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나온다. 신비롭게 자유자재로 흘러가는 삶의 전개 방향이야말로 다큐멘터리로서 ‘업 시리즈’가 드러낸 진정한 가치인 것이다. <보이후드>의 주인공 엘라 콜트레인은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는 평범한 6살 아이였으며 영화가 만들어지는 12년 사이에도 배우로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보이후드>는 콜트레인과 직업 배우들이 서로 소통하며 찍은 반 다큐의 느낌을 준다. 링클레이터는 매해 소년에게 일어난 변화를 영화에 반영했음은 물론 콜트레인이 직접 소년기의 대사를 풀어낼 수 있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업 연작’이 시간의 경과 위로 사회와 문화의 지도를 그리려 한 작품이라면, <보이후드>는 한 소년의 얼굴 그리기에 더 치중한 작품이다. 긴 세월에 걸쳐 콜트레인이라는 배우와 메이슨이라는 인물이 은연중에 작가처럼 참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년의 성장을 연대순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 보이후드 >는 ‘앙투안 두아넬 연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트뤼포는 앙투안 역할을 맡을 배우로 어린 장 피에르 레오를 선택했고, 감독과 배우와 인물이 어우러진 다섯 편의 영화 - < 400번의 구타 >(1959), < 앙투안과 콜레트 >(1962), < 훔친 키스 >(1968), < 부부의 거처 >(1970), < 사랑의 도피 >(1979) - 가 긴 시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그런데 트뤼포 자신이 말했듯이 ‘앙투안 두아넬 연작’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드라마이며, 그러한 성격은 <보이후드>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지향점과 어느 정도 상치되는 부분이다. 꼭 그 점이 아니어도 나는 <보이후드>와 비교되어야 할 작품이 ‘앙투안 두아넬 연작’이 아니라 장 외스타슈의 < 나의 작은 연인들 >(1974)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소년 다니엘의 딱한 형편은 <보이후드>의 메이슨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니엘은 할머니와 살다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 남부로 이사 가게 된 소년이며, <나의 작은 연인들>도 소년 다니엘이 성장해 어른의 문턱에 이르기까지를 다룬다. 단, 외스타슈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링클레이터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보이후드>와 상반되게) <나의 작은 연인들>은 극 중 소년의 외모가 별로 변하지 않은 상태를 지속시키며 외부의 세계와 단절된 인상을 강화한다. ‘앙투안 두아넬 연작’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나의 작은 연인들>을 굳이 불러내 비교하려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짧은 장면 때문이다. 다니엘은 한 소녀와 노변 풀밭에 누워 있다. 곧 어른이 돼 순수의 시대와 작별을 고할 소년은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서 금방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다. 이 장면은 <보이후드>의 첫 쇼트 - 여섯 살 메이슨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 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흡사 링클레이터는 고통스럽고 아픈 소년 시절을 보낸 다이넬의 시간을 돌려 메이슨이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른 태도로 새롭게 쓰려는 듯하다. 그는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애쓴다. 자신을 포함해 당신들도 소년 시절의 통증을 겪었음을 알고 있는 까닭에, 극에 뛰어들어 아파하는 척하지도 않는다. 링클레이터 영화의 특징은 ‘단순한 자연미’다. 장르 영화를 찍을 때도 그렇지만, 그것이 더 잘 드러나는 경우는 그만의 소품을 찍을 때다. < 비포 미드나잇 >(2013)이 몇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었는지 확인해보라. 영어에 ‘Don’t make a scene(야단법석을 떨지 마라)’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의미는 달라도 링클레이터 영화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매년 사나흘 동안 제작진과 배우들이 모여 15분 분량의 촬영을 거듭한 < 보이후드 >에는 사건이라 부를 만한 게 일어나지 않는다. 상업영화로서 너무 심심해 보일까 걱정해야 할 판이다. 어느 날 어느 십 대 소년의 집을 방문해서 목격한 장면을 손질하지 않고 내놓는 것, 그 이상을 영화는 욕심 내지 않는다. 지금 장면이 어떤 해에 벌어진 일인지 구분해 밝히지 않기에, 흐르는 음악과 열중하는 게임과 구경 간 스포츠 경기와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이야기 등으로 대충 어느 정도 지점의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어떤 장면에서는 배우가 카메라를 보는 실수를 하는데도 숨기지 않아 자연스러운 맛을 강조하기도 한다. 부모를 비롯한 인물들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소년이 겪을 성싶은 일들이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게 다인 것 같은데 <보이후드>는 시간의 에센스를 놓쳤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건 소년의 얼굴 덕분이다. 그냥 몸이 커지고 머리 스타일이 바뀌는 게 다가 아니다. 시간이 흘러가고 세상이 변화하면서 흘린 흔적은 차곡차곡 쌓여 메이슨의 얼굴에 자국을 남긴다. 16살 생일을 맞는 해에 메이슨의 얼굴은 밉다. 이전까지 오랫동안 사랑스러운 모습을 유지했던 콜트레인은 무슨 일인지 잔뜩 우울한 표정과 지저분한 얼굴로 메이슨이란 인물을 연기한다. 사춘기여서 그랬을 터인데, 링클레이터는 일부러 예쁘게 분장하지 않았고, 콜트레인도 통과 중인 시기가 입혀준 표정을 거짓 마스크로 가리지 않는다. 링클레이터는 < 보이후드 >를 찍는 과정이 결과물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끝을 맺을지 궁금했다. 상영시간이 165분인 영화가 대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에서 막을 내릴까. 평범한 영화였다면 메이슨이 차를 몰고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끝났을 것이다. <보이후드>로 인해 유명해진 인디그룹 ‘패밀리 오브 더 이어’가 부른 <히어로>가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나는 당신이 바라는 큰사람이 될 마음이 없어요. 나는 여기저기서 사람들과 싸우고 싶어요. 나를 놓아줘요’라는 가사가 엄마의 품을 떠나는 장면과 썩 어울려 이 정도면 엔딩으로 훌륭하다 싶었다. 끝없이 뻗은 텍사스의 도로를 보며 누구나 감동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링클레이터는 그런 감상을 빚을 생각이 없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소년은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며, 배경음악으로 ‘콜드플레이’의 <옐로>가 흐른다. 노래의 가사는 ‘별을 바라봐, 별은 너와 너의 행동을 모두 보고 있어’이다. 소년이 무엇을 보는지 모르는 나는 대낮인데 설마 별을 보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다. 또는 내 생각과 달리 소년이 자신만의 별을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소년이 보는 것은 화면 바깥에 놓인 무엇이었다. 곧 누군가 소년을 부르고 소년은 극 중 현실로 돌아온다. 이어 12년의 시간을 산다. 내성적인 소년은 사진을 사랑하는 청년으로 자라 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이제 소년은 하늘이 아닌 자기 앞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조금 슬픈 얼굴의 여섯 살 소년은 엷은 미소를 띤 열여덟 살 청년으로 컸다. 변하지 않은 것 하나, 첫 장면처럼 마지막 장면에서도 메이슨은 화면 바깥을 응시한다. 청년이 된 메이슨이 바라보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또 다른 메이슨에 해당하는 자신을 바라본다고 말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앞에 펼쳐진 미래를 기대하는 게 아니겠냐고 말할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보이후드>는 시간을 과거에 흘러간 어떤 것이라는 개념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시간은 언제나, 살아가야 할 매 순간이자 현실이라고 <보이후드>는 말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나의 소년기를 향수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나의 소년기 혹은 삶의 한순간을 다시 한 번 더 살고 있었던 거다. 메이슨의 알싸한 성장통이 나의 것인 양 내 몸이 반응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고다르의 첫 번째 장편 3D 영화 < 언어와의 작별 >에 대해 무언가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0월에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단 한 번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한 번의 감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라는 식의 편리한 변명은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일단 보고 나면 그것에 관해 자꾸 무엇인가 말하고, 쓰고 싶게 만든다. 우리를 언어를 향해 돌려세운다. 그렇게 다시 돌아서서 언어와 마주하고 나면 고다르적 연상의 벡터를 따라 온갖 상념이 흐르고, 갈라지고, 또 퍼져나간다. 이건 작별(‘언어여 안녕’)의 말 한가운데 자리한 모음이 돌아서면 환대(‘언어야 안녕’)의 말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고 나니, 한국어로는 ‘언어와의 작별’보다는 ‘안녕, 언어’라는 제목이 영화의 무드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원제 ‘adieu au langage’는 고다르의 언어유희를 따라 ‘Ah dieux, Oh langage’(오 신들이여, 오 언어여)로 읽히는 데 그치지 않고 - 그런데 왜 신은 단수가 아닌 복수로 호명되는 것일까? 왜 언어는 여전히 하나로 남아 있는 것일까? - ‘a dieu, au langage’(신에게로, 언어에로)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작별, 호명 그리고 지향. D: 차원(Dimension) 고다르가 즐겨 인용하는 앙드레 바쟁의 금언 가운데 하나는 “원근법은 서구 회화의 원죄”라는 것이다. < 언어와의 작별 >이 3차원의 환영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입체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겠지만, 이토록 단순한 방식으로 3D의 개념을 전복하는, 혹은 혁신하는 영화가 될 거라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다르는 때로 (‘3D 안경’을 쓰고 볼 때) 좌우 양쪽 눈에 아예 서로 다른 이미지가 입사되도록 함으로써 중첩(superimposition)의 효과를 내기도 하는데, 이는 입체적이라기보다는 ‘입체파적’(cubist)으로 여겨진다. 두 대의 분리된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를 두 개의 눈에 각각 입사시켜 3차원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스테레오스코프의 원리는 고스란히 차용하되, 좌우 양안에 비치는 두 이미지가 반드시 시각적으로 유사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순진한, 하지만 매우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고다르가 3D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방식은 이미지의 특성에 대한 그의 오랜 사색의 노정에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사각의 프레임 안에 담긴 시각적 정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미지란 사실 반드시 시각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무엇보다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상이한 리얼리티의 ‘관계’이자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그것을 통한 ‘생성’이다. 이미지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그가 < 열정 >(1982), <리어 왕>(1987), < JLG/JLG: 12월의 자화상 >(1995) 그리고 < 영화의 역사(들) >(1988~1998) 등에서 즐겨 인용해 온 피에르 르베르디의 「이미지」(1918)에 잘 나타나 있다. “이미지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이다. 그것은 얼마간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리얼리티에 의해 생성되는데 그들 간의 비교가 아니라 조화를 통해서다. 이러한 두 개의 리얼리티의 관계가 멀고 진실한 것일수록 이미지는 더욱 강력해지고 보다 감정적인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 유추(analogy)는 창조의 매개체이다.” 두 대의 카메라,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두 개의 눈이 지향해야 할 것은 시각적인 깊이의 환영이 아니라 유추를 가능케 하는 거리를 둔 둘(deux)의 관계로부터(만) 생성되는 정신적 이미지, 사유의 이미지다. 말라르메가 자신의 시에서 선언했듯, “모든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를 불러낸다.”(Toute pensee emet un coup de des) 하지만,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폐지하지 못할 것이다.”(Un coup de des jamais n’abolira le hasard) 그리고 “아무것도 [...]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그 장소 밖에서는 [...] 아마도 [...] 하나의 별자리 [...] 를 제외하고는.”(rien [...] n’aura eu lieu [...] que le lieu [...] excepte [...] peut-etre [...] une constellation) 여기서 이어지는 생각, 주사위 던지기와 별자리. D: 주사위(Dice) < 언어와의 작별 >에 대한 예고편과도 같았던 3D 단편영화 <세 가지 재앙>(2013)에서 고다르는 ‘3D’의 ‘D’를 ‘재앙들’(desastres)로, 거기서 더 나아가 ‘주사위들(des)―별들(astres)’로 바꿔 읽었다. 말라르메적 상상? 물론이다. <세 가지 재앙>에서 고다르는 말라르메의 시와 수리철학자 고트롭 프레게의 언급을 다음과 같이 (멋대로?) 포갠다. “프레게는 사유가 수(數)를 생성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를 구성한다고 했다.” 그런데 고다르는 왜 말라르메의 주사위―별자리에서 프레게를 떠올린 것일까? (혹은 프레게에서 말라르메로 간 것일까?) 혹시 프레게의 다음과 같은 언급 때문이었을까? “주사위의 네 눈(目)에 대한 표상에서 우리는 ‘넷’이라는 낱말에 대응하는 그 무엇이 나타난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다. [...] 수는 자립적 대상으로도 외부 사물의 성질로도 표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는 감각적인 것도 외부 사물의 성질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수 0의 경우 가장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0개의 별을 표상하려고 해보아도 소용없을 것이다. 우리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상상할 수는 있으나, 이 경우 ‘별’이란 낱말이나 0에 대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지금 아무 별도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황을 표상할 뿐이다.”(「산수의 기초」 제59절) <세 가지 재앙>은 세 개의 주사위를 통한 세 번의 주사위 던지기로 진행된다. (위 사진 참조) 의미심장하게도, 세 번째에 가서는 텍스트가 주사위들의 이미지와 함께 나타나지 않고 그저 검은 화면 위에 떠오른다. (3D는 아직 그에 걸맞은 가능한 이미지 생성의 방식을 배우지 못했다는 고다르식의 일갈일까?) 이 주사위 놀이 클립 영상은 1977년에 고다르가 안느-마리 미에빌과 함께 만든 12부작 시리즈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두 명의 아이들을 통한 프랑스 여행’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에서 차용한 것이다. 심지어 영상 위에 입혀진 내레이션까지 고스란히 가져왔다. “괴물의 진화는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미시적 사건들과 돌연변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개념은 시간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에서는 이 뒤로 “계속되는 주사위 던지기, 하나의 하부단위에 이은 또 다른 하부단위의 생성, 이러한 우연의 게임으로부터 괴물의 신체를 형성할 수십만 번의 연쇄작용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태양계의 수명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 괴물들과 관련된 두 개의 가장 중요한 발명은 섹스와 죽음이다.”라는 내레이션이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의 주사위 놀이가 세 개의 주사위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3D 테크놀로지에 대한 숙고의 과정에서 고다르가 사후적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에 따라 ‘괴물’의 의미도 달라진다.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의 대중에서 디지털 독재로. 이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 언어와의 작별 >에서 고다르는 (다시 세 개의) 주사위로 놀이를 하고 있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 사진) 다시 한 번, 근본문제(Grundproblem)에 대한 접근은 순진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D: 디지털(Digital), 0과 1이라는 거짓된 둘 <세 가지 재앙>에서 고다르는 “디지털은 독재자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한 바 있다. 디지털 영화, 폭넓게는 디지털 문화에 대한 고다르의 사유는 텔레비전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과 맞닿아 있다. < 언어와의 작별 >에서 그는 블라디미르 츠보리킨이 텔레비전을 발명한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선출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츠보리킨이 텔레비전 시스템을 고안한 것은 사실 1933년이 아닌 1923년이다. 이러한 연대 착오는 두 개의 일견 무관해 보이는 역사적 사실을 몽타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 영화의 역사(들) >에서 텔레비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은 오늘날 디지털 문화에 대한 고다르의 진단으로 고스란히 연결된다. “전 세계의 스펙터클을 허름한 침실들로 가져간다는 레옹 고몽의 꿈이 텔레비전을 통해 실현된 것이라면, 그것은 목동의 머리 위의 광활한 하늘을 엄지동자 톰(Tom Thumb)의 높이로 축소시킴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 (문장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언어와의 작별>에서 한 등장인물은 스마트폰 화면의 아이콘을 엄지동자 톰이 길을 찾기 위해 사용한 조약돌과 비교한다.) ‘텔레-비주얼’(tele-visual)이 도처에 존재하는 것(독재)이 된 것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서이다. 고다르는 1970년대부터 그의 작업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노이즈’에 대한 관심을 전면화하는 것으로 그에 맞선다. 디지털적 이미지가 우리의 보는 방식을 표준화한다면, 고다르는 디지털적 이미지 생산의 기제들을 총동원해 그것들을 충돌시키고 각각의 차이와 부조화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즉 디지털적 이미지 내부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는 <언어와의 작별>을 제작하기 위해 일곱 가지 다른 종류의 카메라 - 캐논의 DSLR, 파나소닉의 Lumix 그리고 ‘웨어러블’(wearable) 카메라인 GoPro에 이르기까지 - 를 활용했는데, 촬영된 영상들은 균질하게 마름질되지 않은 채 뒤섞여 가히 ‘시각적 노이즈’의 카니발이라 할 만한 광경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도래하는 건, 적어도 예견되는 건, 오직 이 소란 속에서다. 적잖은 평자들이 <언어와의 작별>을 보며 스탠 브래키지의 < 독 스타 맨 >(1964)을 떠올렸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자연으로 향하는 통로로서 은유를 활용”(블레이크 윌리엄즈)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 영화는 닮아 있다. 또 하나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D: 만남으로 개시되는 둘(Deux) 은유(metaphor)란 무엇인가? 그것은 응축된 픽션이다. 그것은 픽션의 한계이자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픽션이다. < 언어와의 작별 >이 하나의 시청각적 ‘실험’에 그치지 않는 것은 여기서 고다르가 어떻게든 이야기(하기)의 가능성을 붙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두 커플에 대한 두 번의 같지만 다른 이야기라고 한 고다르의 말을 믿어야 한다. <필름 소셜리즘>(2010)에 출연한 바 있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고다르와 작업한 경험을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고다르의 차기 작품에서 저는 어쩌면 호화 유람선 횡단에 참여한 철학자-강연자 역할을 맡아 한 장면에 출연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다르에게는 사랑이 거의 모든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사랑과 저항 사이의 접속에서 고다르와 저의 차이는 바로 멜랑콜리인데, 이것은 고다르에게 모든 것의 색깔을 의미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사랑 예찬」) <언어와의 작별>과 관련해서, 여기에 바디우의 다른 텍스트를 겹쳐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만남을 통해 개시된 둘, 사랑이 그 진리를 실행하는 둘은 그 자신에게 닫힌 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둘은 통로이고 중심점이며, 최초의 수적 성격이다.”(「베케트에 대하여」) <언어와의 작별>을 구성하는 한편 작품 곳곳에 산포된 여러 ‘둘’들, 영과 무한, 자연과 은유 그리고 고다르적 픽션에 관한 이야기는 이 영화를 다시 본 다음에나 가능하겠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남아 있다. 고다르적 멜랑콜리? < 언어와의 작별 >이 고다르의 고별사일까? 이 글에서는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고다르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원기 왕성하며 활력으로 넘쳐난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 네 멋대로 해라 >(1960)를 당대에 보았던 이들은 꼭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하고 멋대로 상상해 보곤 했다. 영화의 폐허 속에서 ‘영화 같은 무엇’의 섬광이 춤추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유운성 영화평론가의 16편 영화천구 Celestial Sphere of Cinema (2013년 11월 1일부터 2014년 10월 31일까지) [북극]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장-뤽 고다르, 2014 야만의 땅 Barbaric Land, 예르반트 지아니키안 & 안젤라 리치 루키, 2013 서유 Journey to the West, 차이밍량, 2013 물 속의 도시, 김응수, 2014 [황도] 시인 요아브 The Kindergarten Teacher, 나다브 라피드, 2014 도원경 Jauja, 리산드로 알론소, 2014 자유의 언덕, 홍상수 프랑스 공주 The Princess of France, 마티아스 피녜이로, 2014 [적도] 더 홈스맨 The Homesman, 토미 리 존스, 2014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 웨스 앤더슨, 2014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The Wolf of Wall Street, 마틴 스콜세지, 2013 맵 투 더 스타 Maps to the Stars, 데이빗 크로넨버그, 2014 [남극] [TV 시리즈] 트루 디텍티브 True Detective, 캐리 후쿠나가, 2014 [필름 퍼포먼스] 간섭의 셀룰로이드 Cellule d’intervention, 메탐킨 평행 I~IV Parallel I~IV, 하룬 파로키, 2012~2014 사진측량, 변재규, 2013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요청한 것은 개봉작과 미개봉작을 모두 고려해 2014년 11월 1일부터 2014년 10월 31일까지 제작, 공개된 영화의 베스트 10 리스트를 꼽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있지 않은 이상, 지난 1년 간 나온 영화들을 신속히 폭넓게 접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고민 끝에 나는 가능한 이 설문의 취지를 존중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리스트의 각 ‘구역’이 (그저 ‘최고의 영화들’의 나열이 아니라) 제한적인 범위에서나마 지난 1년 간 내가 관측할 수 있었던 ‘영화천구’의 짜임을 추정케 하는 별자리들이 되게끔 구성해 보았다. (황도의 4편의 영화들 가운데 2편은 천구의 북반구 쪽에, 2편은 남반구 쪽에 자리할 것이므로, 관측자는 북극 쪽을 향하건 남극 쪽을 향하건 10편의 영화만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관측자가 북극이나 남극 어느 쪽을 향하건 항상 보이는 것은 적도의 영화들이다.) 이 리스트를 작성하기 위해 그간 미처 보지 못한 영화들을 일부러 찾아보려 하지는 않았다. 즉, 위 리스트의 영화들은 베스트 10 설문에 참여하게 될 것을 굳이 염두에 두지 않고 편견이나 강박이 없이 본 것들이다. 또한 영화관에서 본 작품들과 (부득이한 경우) HD 화질로 모니터한 작품들 가운데서만 골랐다. 기회가 없어 보지 못했거나 적절한 환경에서 감상할 수 없었던 것들 가운데 특별히 다음의 영화들은 조만간 꼭 영화관에서 (다시) 보고 싶다. 페드로 코스타의 <호스 머니 Horse Money>, 라브 디아즈의 <아프리오리 From What is Before>,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 조 단테의 <베링 디 엑스 Burying the Ex> 그리고 임흥순의 <위로공단>. 이 리스트를 작성하기 전(11월 13일 이전) 가장 최근에 본 개봉작은 데이빗 핀처의 <나를 찾아줘>였는데, 보는 이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시리즈물 <하우스 오브 카드> 첫 번째 시즌에서 그가 연출한 첫 두 에피소드처럼) ‘스타일적 장치이자 서사를 위한 구실로서의 냉소주의’가 지나쳐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