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하
- 감독
- 이덕찬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탕준상, 서종봉, 권귀빈, 안지희, 박채원, 이호연, 최장현
전지적 독자시점 포스터 클릭시 확대 클릭시 확대 클릭시 확대 '전지적 독자 시점' 영화에 대한 리뷰는 세 파트 1 로 나누어서 쓰였습니다. 1. 스포일러 2 없는 리뷰 (원작과 상관없는 평가) 2. 스포일러 있는 리뷰 (원작과 상관없는 평가) 3. 스포일러 있는 리뷰 (원작과 상관있는 평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지 참고하려고 이 글을 클릭했다면 아래 1. 부분만 읽으면 됩니다. 2.와 3.은 각자가 목적에 맞추어 필요한 경우에 참고하면 됩니다. 아래 3. 부분에는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에 더하여 웹소설과 영화 매체 자체에 대한 논의가 포함될 예정입니다. 글 시작합니다. 1. 스포일러 없는 리뷰 (원작과 상관없는 평가) 1) 나와 가족은 재미있게 봤나? 재밌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평작 이상이다. 영화 값이 아깝지 않은 영화였다. 제 돈 주러 보고 가도 괜찮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괜찮다고 대답할 것이고, 민생지원금이나 요즘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영화관 할인 쿠폰을 쓰면서 보러 갈만 하냐고 물어보면 완전히 추천하고 싶다. 나는 2번 봤다. 곡성 작은영화관에서 개봉 당일 오후 1시에 한 번, 이후 메가박스에서 한 번. 곡성에서 본 건 현금으로 현장결제해서 봐서 따로 모바일 기록이 없다. 곡성에서는 맨 앞자리에서 70대 아빠, 30대 누나와 같이 봤다. 나를 포함해서 셋 다 재미있게 봤다. 아빠는 영화관에서 자주 꾸벅꾸벅 조신다. 아빠가 안 졸았으면 아빠가 재미있게 봤구나 하고 이해하면 된다. 아빠는 최근 쥬라기공원을 보면서 안 졸고 재미있게 보셨다고 말했는데, 이 영화가 쥬라기공원같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누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은 물론이고 살면서 읽은 웹소설이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고 말했다. 2) 어떤 이야기인가요? [전지적 독자 시점]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의 현대 판타지 영화다. 예고편에 나와 있는 내용 수준에서 배경을 설명한다. 더럽게 재미없는 웹소설이 있었다. 얼마나 재미없었냐면, 그 웹소설이 3,000회가 넘게 연재됐는데 100회가 넘어가고부터는 그걸 읽은 사람이 1명밖에 없었다. 학창 시절에는 일진들에게 괴롭힘당하는 소위 "찐따"에, 성인이 되어서도 변변찮은 정규직 직장을 얻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 김독자는 그 인기 없는 소설이 자신의 삶을 위로해 주는 것 같다고 느껴서 꾸준히 읽었다. 그는 그 소설을 끝까지 완독한 유일한 독자가 됐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소설이 현실이 되어서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다면 김독자는 그 소설의 주인공으로 빙의한 걸까? 아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은 그대로 있다. 현실이 된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 소설을 끝까지 읽어서 주인공의 운명을 알고 있는 김독자와 김독자의 주변인물들이 현실에서 그 소설의 이야기를 다시 써가는 게 이 영화의 줄거리다. 김독자는 소설의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하게 될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소설의 이야기를 다시 써갈까? 3) 액션, 그리고 성장을 담은 영화. PS. 나나 멋있어요! 영화의 주인공 김독자와 주변 인물들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다. 저마다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모난 곳이 있는 사람들이다. 영화는 주요한 이야기로 김독자와 주변 인물들의 성장을 다룬다. 저마다 모난 곳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서로를 성장시킨다. 어떤 캐릭터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캐릭터들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살펴보는 게 좋은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드라마적인 휴먼스토리에만 집중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이 영화의 중심은 액션이다. 전독시는 휴먼스토리를 보여주면서도 이를 액션으로 풀어낸다. 지금까지 한국 판타지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블록버스터 액션이 펼쳐지는데, 잘 만들었다. 장소가 바뀌면서 이야기의 진행이 바뀌는 구성인데, 대부분의 장소에서 굵직한 액션 씬이 나온다. 액션의 구성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고 생각한다. 애프터스쿨/오렌지카라멜 출신인 가수이자 배우 '나나'의 액션씬이 특히 돋보였다. 김독자(안효섭)과 유중혁(이민호)의 액션은 당연히(?) 많이 나오고 또 괜찮게 구성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려니 하고 봤는데, 나나의 액션이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아시아판 존윅 스핀오프를 찍는다면 그 주인공으로 나나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나나는 롱테이크까지는 아니지만 꽤 길게 테이크를 가져가는 액션씬을 보여주는데,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액션 이외의 대사 씬의 연기도 좋았어서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다. 4) CG가 어색한가요? 그렇지 않다. 판타지 속 괴물 같은 게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제작비의 한계가 있으니 마블 수준의 CG를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영화를 즐기는 데 방해되지 않을 좋은 수준의 CG를 보여준다. 다만, 특정 인물이 공중을 넘어 이동하는 씬에서 어색한 장면이 3번 있는데, 그것 때문에 CG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닐지 생각한다. 그 인물의 얼굴이 훌륭하다 보니 이동 중에 얼굴을 강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카메라 구도를 그렇게 잡은 것 같은데, 배경과 조화되지 않는 면이 있어서 다소 아쉬웠다. 더 자연스러운 카메라 구도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 5) 원작 웹소설이나 웹툰을 봐야 이해할 수 있는 영화인가요? 웹소설을 안 보면 영화의 진행을 이해하기 어렵냐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이 영화는 원작에 나오는 다양한 설정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불만 어린 항의가 있을 만큼 복잡한 설정들을 다 쳐내고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구성으로 각색했다. 다만, '힘이나 민첩성, 근력이라는 능력치를 올린다'라는 개념과 시나리오(퀘스트)를 깬다는 것같이 주로 게임에 많이 사용되어온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영화 초반에 저게 무슨 이야기인지 어색해할 수는 있다. 영화에서 다양한 장면들로 그런 게임적인 설정들이 어떤 뜻인지 유추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이것도 문제는 안 된다 생각한다. 이 영화는 설정을 많이 쳐내고 바꾸면서까지 이 영화 한 편이 나름의 기승전결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나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한다. 영화라면 모름지기 당연히 가져야 할 특징이기도 하지만, 긴 분량의 원작을 가지고 있는 영화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원작 웹소설이나 웹툰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이 영화 하나만 보면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가 짜여졌기 때문에, 원작이 있는 작품을 볼 때 흔히 하는 걱정(가령, 원작을 봐야 하는 건가?)은 하지 않아도 좋다. 6) 아쉬운 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작 이상의 영화 아쉬운 점도 있다. 몇몇 장면들에서 아쉬운 연기가 있었다. 연기의 톤이 다른 인물들과 조화되지 않는 배역이 있었다. 분량이 많지 않어서 그렇게 신경 쓰이지는 않지만, 앞으로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CG가 어색했던 장면 3개(어떤 배우의 공중 이동 장면)도 분명 아쉬웠고, 중간중간 보이는 인물들의 성격 변화가 영화에서 충분히 개연성 있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도 아쉬웠다. 분량 때문에 몇몇 컷이 삭제되면서 생긴 현상으로 추측한다. 크게 거슬리지는 않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도 아니긴 하지만 영화가 전체적으로 걸리는 부분 없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오래 기대했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명작이라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평작이라는 평가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평작이라고 평가한다면 판타지 영화를 도대체 얼마나 잘 만들어야 평균 이상의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평작보다는 잘 만든,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다닌다. 7) 이 영화를 통해 웹소설/웹툰 문화 엿보기 이 외에 '주인공 혼자만 알고 있는 소설이 현실이 되었고, 주인공이 자신이 아는 지식을 활용해서 성장해간다'라는 설정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꽤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비슷한 장르의 웹소설이나 웹툰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유치한, 허무맹랑한 설정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그렇기에 이 영화가 그런 익숙하지 않은 설정들에 다가가 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은 웹소설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터 현대 판타지 영화다. 영화의 원작이 되는 [전지적 독자 시점] 웹소설은 캐릭터들의 성장을 가시화해서 보여주는 수단으로 상태창(주로 게임에서 활용되는)을 사용하고, 환생하거나 회귀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소설에 빙의하는 것 같은 설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지금 웹소설/웹툰에서 한창 인기를 끄는 한국의 현대 판타지 장르의 특징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영화 또한 원작에서 보여주는 현대 판타지 장르의 특성을 상당히 많이 가져오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 웹소설과 웹툰에서 유행하는 설정이나 개념이 뭔지 엿볼 수 있다. 한국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24년 출판시장 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22개 출판 기업의 2024년 단행본(웹소설, 만화, 교육 출판물을 제외한 일반적인 책) 매출액은 약 4,653억 원이고, 같은 기관이 조사한 [2024년 웹소설 산업 현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주요 플랫폼 사업체의 웹소설 분야 매출액은 1조 3,129억 원이다. 아주 직관적으로 말해서 이제는 책보다 웹소설에 돈을 쓰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인데(웹툰까지 더하면 차이가 훨씬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웹소설은 정말 보는 사람만 본다. 내 주위에도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글로 써진 소설이니까 단행본(일반적인 책)과 비슷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르다. 매체의 특성이 너무 다르다. 권 단위의 분량으로 출판되는 소설은 1회 5천 자 내외의 분량으로 매일 혹은 격일로 연재하는 소설은 호흡이 다를 수밖에 없다. 독자들이 주로 어떤 상황에서 읽는지, 작품의 호흡과 전개 방식 등이 많이 다르다. 웹툰과 출판 만화의 연출법이 상당히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양 시장은 많이 분화되어 있다. 서로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종종 비난하기까지 한다. 내가 이상한 것일 수도 있는데, 나는 주위에 웹소설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게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 힘들다. 나는 웹소설과 웹툰, 단행본을 모두 좋아하는데, 각자가 다른 매력을 가진 매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는 서로서로를 이해하고 즐길 거리를 늘릴(?) 때도 되지 않았냐고 되묻고 싶다. 평소 웹툰이나 웹소설이 뭔지 궁금했는데 기회가 없어서 혹은 오그라들어서 보기 힘들었다면, 거부감이 덜한 영화를 보면서 그쪽 세계를 엿보는 경험을 하는 것은 어떨까?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은 엿보기를 위한(말이 좀 이상하네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스포일러 있는 리뷰 (원작과 상관없는 평가) 1) 목차를 이렇게 나눠놓은 이유 이 부분을 읽는 사람들은 아래의 3. 부분도 읽을 확률이 클 것이기 때문에 왜 원작과 상관있는 평가와 없는 평가로 목차를 나누어 놓았는지 설명하고 넘어간다. 나는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라고 한다)의 원작을 읽었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원작과 비교하면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과의 관계에서 내리는 이 영화에 대한 평가와 이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작은 원작이고 각색된 작품은 각색된 작품이다. 같은 작품이 아니다. 웹소설과 영화라는 다른 매체로 만들어진 별개의 작품이고, 각 작품은 고유한 의미에서 좋거나 나쁠 수 있다.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한 영화라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되는 게 아니고,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않은 영화라고 해서 좋지 않은 영화가 되는 게 아니다.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했지만 좋지 않은 영화가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않았지만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내가 영화를 평가할 때 일반적으로 활용하는 기준을 활용해서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에 대한 리뷰를 작성할 것이고, 그 기준에는 원작을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되었는지가 포함되지 않는다. 원작의 반영 여부와는 별개로 영화는 훌륭하거나 비루할 수 있으므로 나는 최대한 이 영화를 있는 그대로 평가할 것이고, 원작과의 관계에서 본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아래 3. 목차를 통해 별도로 이야기한다.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작을 본 사람이고 원작에 대한 애정이 큰 사람이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원작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감정이 이 영화에 대한 평가에 반영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반영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하겠지만, 나는 무의식적인 영역까지는 온전하게 통제할 수 없으므로 이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영화에 대한 리뷰를 시작한다. 2) 미술 (1)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 영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그러니까 멸망한 혹은 멸망하고 있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좀비영화나 SF영화의 배경으로 자주 사용된다. 멸망한 세상의 모습을 얼마나 개성 있고 독창적으로 그리는지에 따라 영화의 미술적 표현에 대해 가산점을 줄 수도, 감점을 줄 수도 있다. 영화 전독시는 멸망한 세상을 묘사하면서 개성 있는 표현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직 완전히 멸망한 게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멸망하고 있는 중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그 배경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영화 내에서의 배경(지하철, 동호대교, 금호역, 충무로역)이 멸망한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상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전독시는 현실이 그 상태 그대로 멸망한 게 아니라 일종의 판타지적 세계관이 덧씌워져서 멸망한 세상을 그린다. 그 때문에 거의 유일한 야외 배경이었던 동호대교와 동호대교에서 괴수에게 먹히고 땅으로 올라왔을 때의 장소에서도 폐허나 멸망의 모습을 강조하기보다는 판타지적인 배경을 강조한다. 동호대교에서는 노을빛을 강조하고 대교를 잇는 마법적인 다리를 묘사했고, 땅으로 올라왔을 때 역시 폐허가 된 강변 아파트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바다 쪽으로 카메라를 잡으면서 날아다니면서 빛나는 해파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미술은 이 영화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배경보다는 판타지적인 배경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판타지적인 묘사는 어떠했는가? (2) 판타지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었다. 금호역에서 괴수를 죽이는 미션을 하던 중 이길영의 능력으로 반딧불이를 불러서 지하철을 밝히는 장면은 아름답고 신비롭게 묘사되었는데, 이 지옥 같은 세계관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움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함을 불러일으킨다. 해당 장면 이후에 이어지는 어둠 파수꾼 장면과 화룡종을 레이드할 때 시나리오의 난이도가 올라가서 지하철 외부의 공간이 우주적인 공간으로 바뀌는 장면은 전독시의 세계관이 게임적인 설정을 가미한 판타지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땅강아쥐 제사장에 진입한 후 공간이 바뀌어 전후좌우상하가 구분되지 않는 360도의 공간이 펼쳐지는데, 게임에서 던전에 진입한 상황 같은 느낌을 잘 보여준다. 제사장에서의 CG에는 어색함이 전혀 없었고, 이전에 다른 영화들에서 본 미술적 장치도 아니었으며, 전독시의 게임적 세계관을 잘 드러내 주는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화룡종 레이드 장면에서 지하철 외부의 공간이 우주적인 공간으로 바뀌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지하철 플랫폼의 외벽이 해체되면서 공간이 우주로 확장된다. 형형색색의 우주를 배경으로 전투가 펼쳐지고, 이 부분의 CG도 어색함 없이 등장인물들과 잘 어우러진다. 전독시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성좌들이 등장하고, 이 내용은 영화 내에서 설명되지만 아래 화룡종 레이드 장면 이전까지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주인공 일행이 화룡종을 공격하기 위해서 우주 공간으로 올라가는 부분에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눈알이 등장하는데, 이 세상을 관조하고 있는 외부적이며 신적인 존재(성좌)가 있다는 점을 미술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다. 웹소설/웹툰에 자주 활용되는 성좌물 설정을 처음으로 실사영화에서 표현한 것이었는데,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3) 횡스크롤 액션 몇몇 액션들이 횡스크롤 형식으로 보여지는 것도 색달랐다. 고전영화까지는 잘 모르겠고, 내가 본 영화 중에서는 킬빌을 제외하고는 횡스크롤 형식의 액션을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가 없었다. 횡스크롤 액션이란 공간의 3가지 방향을 다 활용해서 액션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의 Y축과 Z축에서의 위치를 고정한 후 X축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식으로 액션을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횡스크롤은 주로 게임에서 활용되는 디자인이다. 게임을 실행할 수 있는 장치의 성능에 제한이 많았던 시절에는 게임 내 공간의 3가지 방향을 다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2D 구조인 횡스크롤 방식으로 이동하면서 액션을 보여주거나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식이 많았다. 장치의 성능이 많이 올라가서 3차원 공간을 모두 활용할 수 있게 된 이후에도 횡스크롤만의 고유한 느낌(이야기 혹은 공간이 진행된다는 감각, 속도감, 횡스크롤에서만 가능한 난이도 조절 등)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게임들이 횡스크롤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전독시에서는 금호역 전투 장면 중 주로 정희원의 액션 장면에서 횡스크롤 방식이 활용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하철역의 공간적인 특성상 여러 방향으로 확장되는 게 아니라 한 쪽 방향으로 길게 늘어져 있기 때문에 횡스크롤이라는 표현방식이 어울리기도 했고, 전독시의 게임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장치로서도 기능한다. 정희원의 액션 시퀀스는 횡스크롤 방식의 액션에서도 그렇고 횡스크롤이 아닌 3차원을 모두 활용하면서 테이크를 늘어뜨리는(롱테이크 까지는 아니지만 꽤 길었다) 장면 모두에서 훌륭했다. (4) 아쉬운 폐허 묘사 다만, 게임적인 세계관을 드러내야 한다는 목표에도 불구하고 회상이나 상상으로 나오는 폐허 장면들에 대한 표현은 아쉬웠다. 약 3번 정도 온통 배경이 빨간색인, 딱 보면 지옥같이 생긴 공간이 나온다. 유중혁이 혼자 살아남아서 이 이야기의 결말을 봤고, 그 혼자 살아남은 곳은 폐허였다는 점을 드러내 주는 배경이다. 폐허 + 지옥 느낌을 주려고 황폐한 모습을 표현하려고 한 의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표현이 다소 촌스러웠다. 온통 세상이 빨간색이고 아래에 괴수가 쓰러져있고, 주위가 울퉁불퉁하게 묘사된 배경은 지옥을 표현할 때 아주 흔하게 활용되는 미술이다. 세련되지도, 독창적이지도 않았다. 거기에 유중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인데(검은 머리에 검은 착장) 배경은 채도가 높은 빨간색이다 보니 유중혁이 배경에 잘 어우러지기보다는 배경에 얹혀진, CG 같다는 느낌을 많이 준다. 해당 장면은 전독시만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미술을 드러낼 좋은 기회였는데 다소 아쉽게 활용되었다고 생각한다. 배경에 활용된 빨간색의 채도만 많이 낮췄어도 배경과 사람이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을 덜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5) 화룡종 묘사 더해서, 미술의 문제이기도 하고 연출의 문제이기도 한 부분인데, 영화의 마지막 보스인 화룡종에 대한 묘사도 아쉬웠다. 화룡종이 진화(?)한 모습을 구상하면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스에 나오는 스테판 울프를 많이 참조한 것 같았다. 처음에 등장하는 화룡종은 용이나 고질라와 비슷한 모습을 띄고, 이후에 진화된 모습이 그 스테판 울프가 조금 더 우락부락해지고 지옥물에 몇 번 담가진 것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진화된 모습이 기존의 용/고질라와 같은 묘사에서 인간형에 가까운 묘사로 바뀌어야 하는 명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렇게 묘사해서 얻어지는 효과가 있다면 모르겠는데, 딱히 더 위압적으로 바뀐 것 같지도 않았다. 더해서, 그 화룡종이 최종 빌런이니까 위압적인 모습, 막막한 모습이 더 잘 느껴지게 그려졌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한 연출이 아쉬웠다. 위압적인 모습이 덜 드러나기 때문에 극적으로 화룡종을 물리쳤을 때 얻어지는 희열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화룡종에 대한 묘사가 상대적으로 아쉬워지면서 초반부에 등장하는 약한(?) 괴수인 땅강아쥐의 묘사가 오히려 인상 깊게 됐다. 땅강아쥐는 초반부터 등장하고 그렇게 강하지 않은 괴수로 설정됨에도 불구하고 되게 무섭고 강하게 생겨서 저거 한 100마리만 있어도 화룡종보다 훨씬 무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강아쥐 뿐만 아니라 땅강아쥐 제사장에 등장하는 어둠 파수꾼에 대한 표현도 좋았다. 사방으로 돌기가 쫘악~ 펼쳐지면서 더럽게 무서운 악마처럼 등장하는데, 나라면 진짜 바로 도망갔을 것 같이 생겼다. 뭔가 비슷한 게 생각이 날 것 같으면서도 생각이 안 나는 괴수 디자인이었다. 다음 영화가 제작된다면 새로운 괴수들이 다양하게 등장할 텐데 어둠 파수꾼의 디자인같이 개성있으면서도 위압적인 디자인이 나와주면 좋겠다. 3) 서사와 연출 (1) 전독시의 특색 전독시는 주인공인 김독자만 읽은 소설이 현실에 펼쳐지면서 김독자가 소설 속 여러 난관들을 겪어가는 이야기다. 여타의 빙의 소재의 작품들과 다른 점은 주인공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소설이 현실에 펼쳐지며, 주인공이 소설 속 주인공으로 빙의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은 그대로 따로 있으며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 등장해서 소설의 이야기에 끼어든다는 것에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유중혁이 회귀 능력을 가진 회귀자라는 설정이 등장하는데, 1편에서는 해당 설정이 본격적으로 활용되지 않아서 회귀의 소재를 다룬 영화라고 보기는 힘들다. 전독시는 주인공이 동료들과 함께 난관을 겪고 이를 극복한다는 평범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특색을 만들어주는 건 영화의 주인공인 김독자가 미리 난관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점과, 김독자가 소설을 통해 자신과 함께 할 동료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설정을 활용해서 난관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만의 특색이 생긴다. 영화는 이 두 가지 설정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한다. 김독자가 미리 이 이야기의 주연이 될 등장인물들에게 접촉해서 동료가 될 계기를 만들고, 김독자가 혼자 혹은 같이 겪는 난관들마다 본인이 미리 알고 있는 정보를 활용한다. 특히 후자의 설정 때문에 주인공과 동료들이 겪는 고난이 다소 심심해 보일 수도 있는데, 영화는 등장인물이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어서 이를 활용해 과거를 바꾸면 그 순간 미래가 바뀌기 때문에 주인공이 모르는 방식으로 난관을 전개시켜서 주인공과 동료들이 겪는 고난이 쉽지 않은 고난처럼 보이게 만든다. 영화 내에서는 '모든 회귀자는 언젠가 반드시 자신이 모르는 미래를 살아가야 한다'는 대사로 이런 내용들이 표현된다. (2) 시나리오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출의 부족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연출이 충분히 극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면서 이 난관이 쉽지 않은 난관이라는 것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 충분히 성공하는지는 모르겠다. 보면서 '그래, 힘들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어찌어찌 하면 될 것 같은데'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차피 주인공이 극복해 낼 걸 알아도 스릴있게 연출할 수 있다. 최근 영화 미션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에서의 미션들이 그랬다. 전독시에서는 마지막에 유중혁이 사망해서 세상이 사라지는(마블 엔드게임에서 타노스의 핑거스냅 장면 혹은 드라마 로키 시즌2에서 시간 선이 붕괴하는 장면의 미술을 참조한 것 같다) 장면은 망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괜찮은 연출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장면 이후에 김독자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짧게 그려지면서 좋은 장면을 충분히 잘 활용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3) 사람이 사람과 영향을 주고받는 이야기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의 작품들은 '인간'의 속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인간의 이기심이나 탐욕을 많이 다룬다. 좀비나 SF 배경의 생존 영화에서 그런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많이 그려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배경이 아닌 익숙하지 않으며 극단적인 환경에 인간을 던져놓고 이를 관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인 우리들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인간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여타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인간의 속성 탐구에 몰두하지 않는다. 금호역에 있는 민간인들과 천인호를 비추면서 인간의 탐욕이나 이기심, 잔인함에 대해 다루긴 하지만 전독시는 이를 주인공과 동료들이 겪게 되는 난관의 배경과 맥락으로 제시할 뿐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거나 탐구하려 들지 않는다. 전독시는 인간 군상 일반을 다루기보다는 주인공과 주인공 동료들 개개인에 집중한다. 주인공과 동료들이 성장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주인공인 김독자와 그 동료들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진 보통의 사람들이다. 영화에서는 그 보통의 사람들이 각종 난관을 겪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서 상처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보여진다. 김독자와 일행인 이현성, 정희원, 이지혜, 이길영, 유상아 중 이길영과 유상아의 상처/트라우마는 영화 내에서 주어지지 않고,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유상아와 이길영의 각성 혹은 성장의 모습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유상아와 이길영은 전독시에서 성장하기보다는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김독자와 이현성, 정희원과 이지혜의 경우 직접적으로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정희원의 경우 눈앞에서 친구를 잃은 트라우마를 극복해서 악인을 물리치면서 각성한다. 이때 보여주는 액션들이 진국이다. 이현성은 본인이 군 간부이던 시절 수류탄 투척 훈련을 하던 훈련병이 수류탄을 놓치는 실수를 했을 때 그 훈련병을 구하지 않고 본인만 살아남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본인은 그 수류탄 소리의 트라우마와 이전 전투에서의 부상 때문에 귀 막으면서 피하고 있는데, 열 살도 안 된 것으로 보이는 어린 이길영이 손으로 자신을 꼭 안아주고, 그 이길영이 코피를 흘려가며 동료들을 구하는 싸움에 참전한다. 이현성은 이길영을 보면서 자신이 구하지 못했던 어린 훈련병을 떠올리고, 이에 이길영을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참전해 화룡종을 막으면서 특성 진화(강화)를 하게 된다. 이지혜는 친구를 죽이고 살아남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작중에서 이지혜는 계속해서 "어쩔 수 없었잖아. 어쩔 수 없었다고"라는 말을 한다. 같은 말을 두 번 연속으로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지혜는 스스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계속해서 되놰야 하는 마음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때 자신의 모습이 악한 모습이여서는 안되었기에 이지혜는 영화 초중반에 다소 이기적이고 소시오패스적인 모습으로 행동한다.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이전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 되지 않으므로 하는 발악으로 보인다. 이후 이지혜는 김독자로부터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아. 하지만 혼자 살아남으려다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잖아"라는 말을 듣고, 김독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발 아래에 설치된 그린 존(안전한 공간)을 파괴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에 혼자 살아남으려고 친구를 죽였던 것과는 다른 미래를 꿈꾸게 된다. 이지혜의 각성은 이지혜가 김독자의 그린존에 총알을 발사하면서 이를 터뜨리는 것으로 그려진다. 김독자의 각성은 이지혜의 각성 직전에 이루어진다. 김독자는 직전까지 계속 갈팡질팡한다. 일단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김독자가 읽었던 멸살법에서 유중혁 빼고 다 죽은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결말을 쓰고 싶어 한다. 동료들을 돕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김독자만 알고 있는 그린존 위에 서서 나가고 싶지 않아 하면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 동료들이 그린존 밖에서 괴수들과 싸 우는 모습을 보면서 죄책감 반 이타심 반에 그 싸움에 참여하게 된다. 김독자는 동료들을 살리고 환영 감옥에 빠져서 본인도 살아남으려는 방법을 선택하는데 와중에 동료들이 밤새 괴수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그 와중에 이현성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어린아이인 이길영도 탈진한 모습을 보게 된다. 김독자는 자신의 동료들이 목숨을 바쳐서 자신을 위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해서 바보같이 죽은 게 아니라 살아남은 모습을 보면서 동료들에게 말한다. "어젯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뭘 해야 할지 알게 됐어요." 이전에도 김독자는 자신이 읽은 소설의 결말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그 마음이 정확히 뭔지, 소설이 현실로 펼쳐진 세계에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자신이 해야 하는 게 뭔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동료들이 사진을 위해서 희생하고, 힘을 합쳐서 살아남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자신이 이 세계에서 원하는 게 뭔지, 해야 하는 게 뭔지 알게 되어서 각성한다. 이후 김독자는 자신이 희생하면서 죽는 전략까지 짜게 되는데, 이는 그린 존 시나리오에서 자신만 아는 그린 존으로 가서 밖으로 나오기 주저하면서 괴로워하던 김독자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김독자가 확실하게 성장하고 각성했음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김독자와 주변인물들이 성장하거나 각성하고, 그 과정에 주변 동료들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좋았다. 완전 따뜻한 이야기다. 물론 아주 개성 있거나 독창적인 성장 서사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다른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영화와는 다른 전독시만의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인간 일반에 대한 일반론을 다루는 게 아니라, 김독자와 동료들이 겪는 모험 이야기인 것이다. 결국 사람을 구원하는 건 사람이고, 사람을 반성하게 하는 것도 사람이며, 사람을 성장하고 극복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 아니겠나. (4) 액션에서 소외되지 않는 캐릭터들 액션에서 소외되는 캐릭터가 없었다는 것도 장점이다. 주연 캐릭터라면 소비되거나 소외되지 않고 합당한 역할을 부여받아야 하는데, 전독시는 이야기 진행에서뿐만 아니라 액션에서도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금호역의 화룡종 레이드 장면에서는 유중혁, 김독자, 이지혜, 이현성, 유상아, 이길영 모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전투에 참여한다. 인물들이 많아서 명확한 역할을 끼워 넣어 주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액션의 구성에 많은 고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진화한 화룡종을 잡는 계획에서 '모두가 참여하는 액션'이 잘 드러났는데,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계획에 따르면 유상아가 실로 화룡종을 묶어두고, 김독자가 화룡종의 가슴을 찔러서 껍질을 깨도록 시도하고, 이지혜도 총으로 이걸 돕고, 껍질을 깨면 김독자가 죽을 텐데 그걸 뒤이어서 정희원이 화룡종의 코어를 깨는 게 계획이었다. 아, 계획을 짤 때는 이현성과 이길영이 전투 불능 상태였던 것으로 간주돼서 참여하지 않지만, 실전에서는 둘 다 열심히 참여해서 동료들을 구해낸다. 하여튼, 이런 식으로 모두가 각자의 개성 있는 능력을 활용해서 전투에 참여하는 액션을 구상하려는 시도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5) 캐릭터들이 성장하는 연출에 대한 아쉬움 위에서 길게 이야기했듯이 영화 전독시의 메인 테마는 주인공과 동료들의 상호 성장 서사다. 이 점이 영화에서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길영과 유성아의 성장 서사가 1편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후에 다룰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후의 작품들까지 이길영과 유상아의 이야기가 1편의 다른 주연들 이야기처럼 깊게 다뤄지지 않는다면, 그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 평가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아쉬웠던 건 이현성과 이지혜의 성장 부분에서의 연출이었다. 먼저 이현성. 이현성 역을 맡은 배우의 작품을 여럿 봤는데, 표정 연기를 못하는 배우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현성이 특성 진화를 하는 과정에서의 연기 혹은 연출이 조금 아쉬웠다. 이지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다. 이지혜의 성장 서사는 매력적이었지만 너무 짧게 등장해서 서둘러 성장의 결론만 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두 배우의 연기 문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 분량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화 한 편에서 줄거리는 줄거리대로 다 진행하고 설정도 여러 개를 풀면서 동시에 김독자/이지혜/이현성/정희원 네 명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이현성과 이지혜의 이야기가 다소 적은 분량으로, 압축적으로 묘사된 것 같다. 보다 많은 분량이 주어졌으면 충분한 연출이 가능했을 것 같은데, 이 점이 아쉽다. 이 두 배우의 연기 문제였든 아니면 분량의 제약으로 인한 연출의 문제였든 아쉬운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니 지적해 둔다. (6) 그 외 아쉬운 연출 이 외에도 두 부분이 아쉬웠다. 동호대교에서 떨어진 김독자가 해수종에게 먹혀서 위장 안으로 들어가 처음 비형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김독자가 갑자기 능숙해진다. 이 전까지는, 그리고 이후 장면에서도 자주 갈팡질팡하고 확신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위장 안에서는 갑자기 비형을 능숙하게 다루면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원작을 알고 있으니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어색한 건 아니지만, 직전의 모습과 잘 연결되지 않는 이질적인 모습이라서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는 혼잣말이라도 넣어줬으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을 것 같다. 그 해수종을 죽이고 탈출하고 곧바로 정희원을 만나서 함께 금호역으로 가게 되는데(정확히 말하면 정희원을 구하면서 간다), 금호역에서 이기적인 사람들을 대면하게 된다. 이 소설 속 세상에 잘 적응한 평범한 사람들인 건데, 문제는 언제 이렇게 적응했냐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김독자가 괴수의 위장 안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있었는지가 제시되지 않는다. 저녁놀이 생길 즈음에 위장으로 들어가서 밖으로 나오니까 밤이 되는데, 그러면 자연스럽게 아, 몇 시간 안 지났나? 반나절 정도 지난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나절 정도 지난 것 같은데 금호역에서 만난 민간인들은 이 세상에 너무 잘 적응해서 이기적으로 굴고 있다. 뭔가 어색한 거다. 영화를 같이 본 누나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이런 이상한 판타지 세상이 펼쳐진다면 적어도 며칠은 지난 후에 사람들이 서서히 적응해야 할 것 같은데, 반나절 만에 너무 잘 적응한 것처럼 보이니 어색하고 이질적이다. 그런데 영화를 잘 보면 사실 반나절이 지난 게 아니라 며칠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호역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생존비를 납부하지 못한 사람은 죽게 된다'라는 설명이 나온 후 철로의 한쪽에서 많은 시체들이 수북하게 쌓여있고 이를 태우면서 가족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타는 시체들 앞에서 우는 장면이 나온다. 생존비를 납부하지 못한 사람이 죽게 되는데 저렇게 시체가 많이 쌓여있는 것을 보면 최소한 며칠은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금호역에 있는 사람들이 이 상황에 잘 적응한 맥락, 그러니까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는 맥락을 주면서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문제는,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는 맥락'을 알아채는 유일한 수단이 쌓여있는 시체들을 보고 추론하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 단번에 그 장면을 포착해서 이를 추론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도 영화를 두 번째 보면서 그 장면을 포착했다. 김독자가 괴수의 위장에서 탈출하면서 혼잣말하든 아니면 다른 장치를 보여줘서 며칠이 지났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한 후에 금호역의 사람들을 마주하게 했다면, 금호역 사람들이 이 세상에 충실하게(?) 적응한 모습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줄어들었을 텐데, 이 시간의 흐름에 대한 표현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 역시 아쉬운 부분이었다. 4) 총평 몇몇 연출에서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좋았던 점이 훨씬 많았던 영화였다.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한국형 현대 판타지에 대한 첫 영화화 시도인데, 미술적으로 보나 서사적으로 보나 좋았고, 잘했다. 후속작이 만들어진다면 난관은 각색에 있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던 연출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을 다듬는 건 오히려 큰 문제가 아니다. 전독시의 원작이 워낙 방대하므로 이를 5편으로(5편에 대하여 판권 계약이 이루어진 것으로 안다) 줄이려면 엄청나게 과감한 각색이 필요할 것이다. 영화는 장기적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킬수 있는 웹소설과는 다르게 2시간짜리 한 편에 기승전결이 모두 담겨야 한다. 1편은 일단 그것에는 성공했다. 2편도 그렇게 기승전결을 담아서 각색한 후에, 위에서 말했던 미술적으로/연출적으로 아쉬웠던 부분들을 보완해서 장면 진행이 자연스럽게 구성된다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3. 스포일러 있는 리뷰 (원작과 상관있는 평가) 1) 결론부터 이해가 되는 각색이었다. 많이 고민한 흔적이 보이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일부 팬들의 아쉬움이 있는데, 이해한다. 이 주변의 많은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2) 저 전지적 독자 시점 원작 웹소설의 팬 맞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원작도 안 읽은 놈이 혹은 팬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영화를 호평하는 리뷰를 썼다고 오해할까 봐 미리 밝혀둔다. 나는 웹소설 전독시를 3.n회독 했다. 네이버 시리즈로 2회독 했고, 단행본으로 1회독 했으며, 이 외에는 정주행한 게 아니라 중간중간 읽었기 때문에 3.n회독이라고 표현했다. 웹툰도 읽고 있다. 웹소설 외전은 325화까지 읽었다. 구매는 357화까지 해놨는데 조금 더 나오면 몰아볼 예정이다. 물그릇 올려놓고 제발 해피엔딩이기를 기도하면서 이학현 혹은 김독자의 이야기를 읽어가고 있다. 전독시를 1회독 하고 리뷰를 썼고1), 2회독 하고 리뷰를 또 썼다2). 2회독 하고 쓴 리뷰는 22,478자 분량이고, 나름대로 전독시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까지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보면 많이 부족해서 외전이 끝난 후에 혹은 그전에라도 다시 리뷰를 쓸 예정이다. 내가 처음으로 읽은 웹소설이 전독시다. 전독시 이후에도 수많은 웹소설을 읽었는데, 내가 가장 사랑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소설은 전독시다. 영업에 성공한 적은 없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도 여러 차례 전독시를 추천해 왔다. 세부적으로 몇몇 순서가 틀릴 수는 있지만, 굵직굵직한 에피소드별로 구분한다면 눈 감고도 진행 순서를 외운다. 나보다 전독시를 더 여러 번, 더 자세하게 읽은 사람도 많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도의 사람을 전독시 찐팬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전독시 찐팬 맞다. 그러니까 전독시 원작도 안 읽은 사람이, 찐팬도 아닌 사람이 쓰는 글이라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3) 웹소설과 영화 매체의 차이 (1) 호흡, 전개 속도, 한 편의 완결성 웹소설과 영화는 다르다. 웹소설은 1회에 5,000자 내외의 분량으로 연재되는 연작소설이다. 1주일에 많으면 7회, 적으면 3회 정도 연재된다. 당장 이번 편이 재미없으면 다음 편을 보지 않게 되기 때문에 매 회마다 다음 회가 궁금해지는 내용이 들어가야 하고, 그러니 작품의 호흡이 굉장히 빠르다. 웹툰과도 다르다. 정기적으로 연재되는 작품이고 호흡이 빠르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1주일에 3~7편 정도 볼 수 있는 작품과 1주일에 1편 정도 볼 수 있는 작품의 호흡은 같을 수 없다. 웹소설 1회 분량을 웹툰 1회로 만들면 웹툰은 반드시 어느 시점에는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 최근의 화산귀환 웹툰이 그렇다. 화산귀환 원작 웹소설은 분량 늘리기(?)가 심한 웹소설이다. 지금 1,800화 이상 연재되었는데, 1,800화 기준 일반적인 소설책 약 65권 분량이다. 웹소설 초반부는 전개가 빠른 편이라 각색을 최소화한 채 웹툰에 이식되었어도 괜찮은 평가를 받았지만, 초반부가 지나자, 웹툰의 전개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웹소설이 웹툰으로 이식될 때는 원작보다 전개가 더 빨라져야 하고, 압축적으로 전개가 일어나야 한다. 각색을 잘했다고 평가받는 웹툰 역대급 영지 설계사나 웹툰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을 보면 원작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압축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생략도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는 또 다르다. 웹소설이나 웹툰과는 다르게 빠른 기간 안에 연재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한 편 한 편이 온전한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원작이 되는 웹소설이나 웹툰의 전체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기승전결이 있는 특정한 에피소드만 다루는 방식을 취하거나, 전체 내용을 다루려면 엄청나게 많은 압축/생략이 담긴 각색이 있어야 한다. 특정한 에피소드만 다루더라도 상당한 생략과 압축, 각색이 있을 수밖에 없다. (2) 개연성의 요구 정도 작품이 대중에 공개되는 방식(연재, 개봉 등)뿐만 아니라 글, 이미지, 영상이라는 매체 자체의 차이도 있다. 실사에 가까운 형태의 매체를 접할수록 사람은 전개의 자연스러움 혹은 개연성을 더 크게 요구하게 된다. 실사에 가까울수록 상상의 여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조금 더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매체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감각의 종류(시각, 청각, 촉각, 후각 등)가 적을수록 우리는 스스로 나머지 감각을 채워가면서 매체를 감상하고, 감각의 종류가 많을수록 우리는 이미 주어진(전달된) 감각들이 짜임새 있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스스로 채워서 완성도 있게 감상할 여지가 없으니까 주어진 것 자체가 완성도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읽을 때면 자연스럽게 묘사된 부분과 생략된 부분을 스스로 상상하면서 감상한다. 만화 같은 이미지 기반 매체를 즐길 때도 같은 상상이 이루어지지만, 이미 이미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상상의 여지가 줄어든다. 우리가 스스로 상상을 통해 완성도를 채울 여지가 줄어든 만큼, 주어진 이미지에서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 실사 기반의 영상 매체로 가면 더더욱 그렇다. 같은 내용이더라도 글로 읽을 때보다는 이미지로 볼 때, 이미지로 볼 때보다는 실사 영상으로 볼 때 생략된 부분이 더 적고 개연성 있게 구성되어 있기를 요구하게 되고, 그렇게 되어야 감상하면서 자연스러움을 느낀다. (3) 분량 분량의 차이도 있다. 작품의 공개 방식(연재, 개봉 등)의 차이와 맞물려있는 이야기인데, 글이 분량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자유롭다. 적은 분량으로 완성도 있는 글을 쓰는 게 일반적으로는 더 훌륭하다고 평가받지만, 많은 분량으로 글을 쓰더라도 완성도가 있으면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화산귀환 웹소설 1,000화 이전까지가 그랬다. 다른 일반적인 웹소설에 비해서 분량 늘이기가 심한 웹소설이었지만, 그만큼 세밀한 감정묘사가 이루어졌기에 이를 장점으로 꼽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니까 글은 분량이 적어도 괜찮고 많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영화는 분량이 많아도 괜찮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다. 정말 길어야 3시간이다. 크레딧과 광고 시간을 제외하고 2시간 반 이상의 러닝타임을 확보하는 건 제작비와 상영 비용 차원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발생시킨다. cg와 편집, 촬영 비용이 늘어나고 영화 개봉을 위해서 상영관에 지불해야 하는 로열티가 늘어날 수 있다. 상영관 입장에서는 러닝타임이 길수록 하루에 상영할 수 있는 영화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같은 문제가 웹소설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2시간 반 이상의 영화는, 잘 안 본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짧은 영상에 익숙해지고 긴 영상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일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가족들과 영화를 보려고 할 때 2시간 반 이상의 영화는 상당히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몇 번이나 느꼈다. 그러니 영화는 2시간 내외의 분량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 분량 안에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집어넣어야 하는데, 역설적으로 글로 전달할 때보다 더 짜임새 있고 개연성 있게 보여야 한다는 제약이 생긴다. (4) 소비자층 소비자층도 다르다. 상업영화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겨냥하고 만들어지지만, 웹소설은 취향 분야가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회/빙/환과 무협, BL과 로맨스, SF 등 장르와 소재가 다변화되어 있고 각 장르/소재마다 인기를 끈 작품들이 있지만 장르와 소재를 넘나들면서 읽는 경우는 많이 없다. 일반적으로 남성 소비자들에게 잘 어필하는 무협 장르는 여성 소비자들이 거의 소비하지 않고, 여성 소비자들에게 잘 어필하는 BL이나 로맨스 장르는 남성 소비자들이 거의 소비하지 않는다. 웹소설 안에서도 취향 분야가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웹소설 소비자들과 영화의 소비자들도 같지 않다. 웹소설 소비자들이 상업영화를 소비하는 경우는 꽤 많지만, 상업영화 소비자들이 웹소설을 소비하는 경우는 그만큼 많지 않다. 전독시도 게임 판타지/빙의나 회귀, 환생 소재의 이야기를 용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는 작품인데 이러한 소재들은 상업영화에서는 거의 쓰인 적이 없다. 그러니 영화의 관객들은 전독시의 소재를 보고 일단 익숙하지 않은 어색함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5) 소재와 장르 웹소설을 많이 읽는 사람들에게 회/빙/환/게임 판타지는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고 전개해도 이해될 수 있는 소재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도 그렇지는 않다. 주변에 문학적인 소양이 뛰어난 친구가 있는데, 회/빙/환 이라는 소재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매우 힘들어한다. 애초에 각 매체를 소비해 왔던 방식, 각 매체의 주류적인 표현 방식이 다른 것이다. 웹소설에서 회/빙/환은 이유가 제시되지 않아도 받아들여지는 장르적인 소재로 이해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회/빙/환은 이유 없이 제시되면 '개연성 없는 뜬금없는 설정'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본다. 웹소설 재벌집 막내 아들이 드라마화 되었을 때 마지막 화에 환생의 이유가 후회라는 윤리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식으로 환생이라는 소재에 윤리적인 맥락과 이유를 부과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반대로 일반적인 드라마 소비층들은 환생이라는 소재에 윤리적인 맥락과 이유가 부과되지 않는 것에 대해 어색함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끝까지 환생의 정당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고 드라마가 끝났다면, '뭐야, 이거 끝난 거야? 그럼 애초에 왜 환생한 건데?'라는 평가가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6) 종합 여기까지가 매체의 차이에 관한 이야기다. 웹소설, 웹툰, 영화의 매체적 차이는 각 매체의 작품이 다른 매체로 이식될 때 따라야 할 각색의 방향을 결정한다. 전독시는 웹소설 원작이 영화로 이식된 경우다. 분량의 제약, 한 편에 기승전결 있는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는 조건, 몇 년 후에 밝혀질 떡밥이 최소한으로만 제시되어야 하고 영화 한 편에 이야기가 완성도 있게 다 담겨야 한다는 조건, 서사가 더 개연성 있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더해진다. 여기에 전독시 원작 자체의 특성도 고려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작품들에 비해 훨씬, 훨씬 더 설정이 많은 작품이다. 웹소설을 읽다 보면 분량의 1/3 가까이가 작품의 설정을 설명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그 설정들도 일반적인 영화 관객들에게는 익숙하지 않고 생소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 원작처럼 계속해서 혼잣말이나 상상을 통해 설정을 읊어대는 방식으로의 영상화는, 적어도 지금 상업영화의 문법에 있어서는 성공을 장담하기 힘든 전략이다. 4) 각색 매체의 차이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영화 전독시에서 이루어진 각색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각색된 내용을 전부 다 다룰 수는 없다. 너무 많다. 주요한 내용을 위주로 다루고, 마이너한 각색은 짧게 다루고 넘어간다. (1) 지구에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유 ① 원작의 설정이 폐기되었나? 영화 초반부에서 김독자가 읽었던 원작 멸살법을 설명하면서 '신들이 타락한 인간을 벌하기 위해'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다는 언급이 있다. 원작에는 없는 내용이다. 이런 설명은 영화에서 현실에 갑자기 시나리오가 펼쳐진 현상에 대한 맥락을 제시해 준다. 나는 전독시 영화의 후속작이 만들어진다면 1편 초반부에서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유는 신들이 타락한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라는 설정이, 지금 김독자가 사는 세상에 시나리오가 펼쳐진 이유로 그대로 이식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영화 전독시는 치밀하다. 영화를 잘 보면 멸살법에서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유가 신들이 타락한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라고 제시하기는 하지만, 김독자가 사는 세상에서도 같은 이유로 시나리오가 펼쳐졌다고 확언하지 않는다. 영화는 독자들로 하여금 지금 시나리오가 펼쳐진 이유를 영화 초반부에 제시된 멸살법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면서 개연성 있다고 느끼기를 의도하고 있지만, 이 설명이 향후에 반전을 통해 바뀔 가능성을 막아두지 않고 있다. 영화 내에서 유중혁이 김독자에게 '왜 세상이 이렇게 됐을까. 왜 인간이 벌을 받게 되었을까?'라고 묻는 장면이 있는데,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제시되지 않는다. 김독자도 중간중간 이기적인 인간들을 보면서 위 대답을 회상하곤 하지만, 역시 명확한 대답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멸살법의 세상에 시나리오가 펼쳐진 이유를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신들로부터 벌을 받았다라고 각색했다'라는 문장은 사실이지만, '김독자가 사는 세상에 시나리오가 펼쳐진 이유도 같은 식으로 제시되었으므로 한수영이 김독자를 위해 멸살법을 만들었다는 전독시의 주요한 설정은 폐기되었다'라는 문장은 사실이 아니다. ② 이렇게 각색한 이유가 뭘까? 설정이 폐기되지 않았다면, '멸살법의 세상에 시나리오가 펼쳐진 이유는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신들로부터 벌을 받았다' 는 설정을 더하고 이를 설명하는 방향으로 각색한 이유는 뭘까? 원작에서 멸살법의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유는 본편과 에필로그의 끝에 가서야 설명된다. 멸살법이라는 소설은 김독자의 동료인 미래에서 온 한수영이 김독자가 계속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서 작성한 소설이다. 이 내용이 소설에서 엄청난 반전으로 제시된다. 전지적 독자 시점 단행본이 20권 분량이니까, 1편에서 이 세상이 시작된 이유가 20권을 다 읽는 시점에 제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한참 이후에 밝혀질 내용이니 지금은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상업영화의 문법에서 용서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설정이면 몰라도 애초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없이 갑자기 생소한 판타지 설정을 제시해 버리면 서사에 이입하지 못할 관객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와는 또 다르다. 드라마는 일단 만들어지면 대부분은 끝날 때까지 제작이 되고, 1편에서 제시되지 않은 내용들이 이후에 풀리는 것은 이미 일반적인 한국 드라마의 문법으로 자리잡혀 있다.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를 보더라도 거의 다 이런 식으로 전개가 된다. 영화 초반부에 설명되지 않은 내용이 있는 경우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는 건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문법에 해당하지만, 1편 이야기의 전체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수년이 지나고 개봉하는 5편에 와서야 밝혀지는 게 용납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현실에 갑자기 소설이 펼쳐진 현상이 발생한 이유가 1편이 끝날 때까지 제시되지 않는 건 상업영화에서 받아들여지는 문법이 아니다. 영화판은 웹소설이나 웹툰에서와 다르게 회/빙/환이나 시나리오라는 소재가 어떠한 설명도 없이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장르'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 이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다면 관객들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환생의 이유를 제시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한수영이 김독자를 위해 멸살법을 썼다는, 아기 김독자의 상상으로 이 모든 게 시작되었다는 전독시의 핵심적인 설정과 반전이 폐기된 상황도 아니다. 그러니 나는 이러한 각색을 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고, 괜찮은,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2) tls123의 역할, 안나 크로프트, 김독자 어머니, 김독자와 동료들의 트라우마 ① tls123의 역할변화 tls123의 역할변화도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설명된다. 원작에서 현실에 소설이 펼쳐지는 현상은 갑자기 발생하지만, 영화에서는 tls123이 '김독자에게 결말이 마음에 안 든다면 독자님이 직접 결말을 써보세요'라고 답장을 보내면서 소설이 펼쳐진다. 영화 초반부에서는 멸살법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타락에 신이 벌을 주는 것을 이유로 제시하면서 그게 이 영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tls123의 답장은 이 영화에서 소설이 현실에 펼쳐진 이유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맥락을 제시한다. 영화 초반부 멸살법의 설명과 tls123의 답장을 본 관객들은 아, 이런 배경으로 인해 이제 현실에 소설이 펼쳐지겠구나 예상할 수 있고 앞으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맥락을 이해하게 된다. 다만, '배경'이 제시된 것은 맞으나 이것이 '소설이 현실에 펼쳐진 이유'에 대한 영화의 명확하고 확정적인 답은 아니다. tls123이, 그러니까 원작에 따르면 미래에서 온 한수영이 저렇게 답장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시나리오가 현실에 펼쳐진 이유에 대한 원작의 설정이 폐기되는 건 아니다.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tls123과 영화 초반부 멸살법에 시나리오가 발생한 이유에 대한 김독자의 나레이션이 모순되지 않는다. 나는 시나리오가 발생한 이유에 대한 원작의 설정과 한수영이 tls123이라는 설정은 각색될 수 있는 성질의 설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후속편이 만들어진다면 차차 원작의 위 설정과 최종장에서의 반전이 전개될 것으로 추측한다. 영화 1편에서는 이 추측을 깨뜨릴 만큼 명확한 이야기가 없었다. ② 안나 크로프트 생략 tls123은 원작에서의 안나 크로프트와 비슷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때 tls123, 그러니까 한수영이 하는 짓은 전독시 외전에서 다른 세계선의 한수영이 이학현의 세계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원작에서는 김독자가 비형을 통해서 자신이 획득한 어룡의 핵과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안나 크로프트와 교환하고 백청강기를 구매해서 완성템 무기를 만든다. 영화에서는 김독자가 비형을 통해 어룡의 핵과 신념의 에테르를 tls123과 교환하고, 어둠 파수꾼 레이드를 통해 획득한 보상으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얻어서 완성템 무기를 만든다. 결과적으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뭔가가 더해져서(원작에서는 백청강기, 영화에서는 신념의 에테르) 완성템 무기가 만들어진 것은 같다. 왜 이렇게 각색했을까? 나는 1편에서 '안나 크로프트'를 빼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에서는 극초반부에 어룡의 핵을 교환할 때 메세지를 통해서 한 번, 그린 존 시나리오에서 스펙터 영석을 먹고 나서 환상 속에서 한 번 안나 크로프트가 등장한 후 별자리 연회 에피소드인 150화 근처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일종의 떡밥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렇게 긴 미래에 확인될 떡밥을 뿌려놓고 설명도 안 한 후 영화를 끝내는 건 상업영화에서 허용되는 문법이 아니다. 상업영화의 관객들이 '나중에 밝혀질 거니까 설명 안 하고 대충 넘어가서 상관없지. 암. 그렇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법이 아니다. 따라서 1편에서 설명될 가능성이 없는 안나 크로프트라는 미지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1편에서 등장시켜서는 안 됐고, 안나 크로프트를 등장시키지 않는다면 김독자가 부러진 신념을 베이스로 한 완성템을 얻는 방식을 바꿔야 했다. 그 이유로 이 방향의 각색이 이뤄졌다고 판단한다. ③ 김독자의 트라우마 새롭게 제시, 김독자 어머니 생략 영화는 안나 크로프트를 빼야 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김독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빼야 했고, 그래서 김독자의 트라우마를 바꿔서 제시해야 했다. 김독자는 원작 초반부에서는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본인 입으로도 그렇게 말한다. 김독자의 트라우마는 원작의 중반 부분이 되어서야 슬슬 밝혀지기 시작하고, 그 트라우마는 김독자의 엄마와 관련되어 있다. 영화는 김독자와 동료들의 성장을 주된 주제로 하므로 주인공인 김독자에게도 어떤 트라우마를 제시해야 했다. 그런데 원작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가져오게 되면, 1편의 이야기의 흐름과 어울리는 내용으로 김독자에게 그 원작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에 적절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더 중요하게는 1편에서 설명될 가능성이 없는 김독자의 엄마를 등장시켜서는 안 됐다. 안나 크로프트를 빼야 했던 것과 같은 이유다. 1편이 완결성 있는 영화이기 위해서는 1편에서 제시되는 트라우마는 1편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김독자, 정희원, 이지혜, 이현성의 트라우마는 모두 1편의 이야기 안에서 해결된다. 따라서 김독자의 트라우마에 엄마 이야기를 넣는 순간 1편 영화에 김독자의 엄마라는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켜야 하고, 본래는 한참 뒤에 가서야 역할을 시작할 엄마 이야기를 금호역과 충무로역을 둘러싼 극초반부 시나리오에 끼워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영화는 김독자와 엄마의 관계가 아닌 김독자의 다른 트라우마를 새롭게 만들어서 영화에서 제시했고, 있을 법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극복의 계기를 만들어줘서 적절하게 각색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위에서 이 세상에 시나리오가 펼쳐진 이유에 대한 설정이 폐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듯이 나는 김독자와 엄마의 관계에 대한 설정 또한 아직까지 폐기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후속편이 나온다면 얼마든지 후속편에서 제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④ 김독자의 트라우마와 멸살법 결말에 대한 김독자의 반감 김독자의 각색된 트라우마는 멸살법의 결말에 대한 김독자의 반감과도 연결된다. 영화에서는 멸살법의 결말을 유중혁 혼자 살아남는 것으로 각색했다. 김독자는 어린 시절 친구를 죽이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김독자가 봐왔던 멸살법에서 유중혁 또한 동료를 버리는 비슷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남았을 것이다. 김독자는 멸살법을 보고 유중혁이 본인과 비슷한 선택을 하는 것을 보면서 김독자 자신의 행동(민석이를 죽게 만든 것)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유중혁을 보면서 위로받았다는 취지로 말한다. 그런 김독자에게 멸살법의 결말은 너무나도 중요했다.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결말을 미리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각색된 멸살법의 결말은 유중혁 혼자 황폐화된 폐허 같은 곳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미술적으로도 지옥이 떠오르게 묘사한다. 그 결말을 보고 아름답다,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독자는 그 멸살법을 보면서 자신의 결말 또한 지옥이 아닐까 두려워했을 거다. 그래서 영화에서 김독자는 "저는 이 결말이 너무 무섭습니다"라고 말한다. 김독자에게 새로운 트라우마가 주어지고 멸살법의 결말이 각색되면서 김독자가 멸살법의 결말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게 설명되고, 그러면서 김독자와 작가인 tls123 간의 대화가 설명된다. 1편 영화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내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고민이 엿보인다. ⑤ 이현성과 정희원의 트라우마 이현성과 정희원의 트라우마도 마찬가지다. 이현성은 군대 내에서 적응을 잘하지 못한 눈치 없는(?) 장교였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과거가 제시되지 않는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이현성에게 별도의 트라우마를 제시해서 극복의 계기를 만들어주고, 그 트라우마 극복의 계기를 이현성의 특성 진화 계기에 대한 각색과 맞물리게 만들어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이건 원작보다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길영을 보면서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이현성의 모습은 이현성에게 주어진 트라우마에 대한 말이 되는 극복의 계기로 작동하고, 오히려 이현성이 동료들의 칭찬(?)을 통해서 그룹 내에서 자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맞이하는 특성 진화의 계기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이현성이 원작에서 맞이하는 특성 진화의 계기는 그게 글의 형태로 쓰여 있으니까 적당히 말이 된다고 넘어갈 수 있지, 그게 영상화된다고 했을 때 개연성 있다고, 이해가 된다고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의문이다. ⑥ 정희원과 이지혜의 트라우마 정희원과 이지혜 또한 마찬가지다. 원작에서 이지혜는 이후의 극장 시나리오에 가서 트라우마 극복의 계기를 맞이한다. 이지혜가 원작에서보다 빠르게 트라우마 극복의 계기를 맞이하도록 각성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1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영화는 무리하는 게 보일 만큼 최대한 다양한 주연들의 성장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 그냥 등장만 시켜 놓고 밍숭맹숭하게 넘어가 버리면 주변 인물들이 소비되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1편에 주연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깊게, 잘 다뤄야겠다는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 이유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거나 각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극장 던전의 이야기가 이후 영화에서 등장할지 의문이다. 전독시 전체의 이야기를 5편으로 줄이려면 엄청나게, 아주 엄청나게 많은 각색과 함께 시나리오를 많이 생략해야 하는데 하는데, '극장 던전' 이야기가 생략되지 않고 남아있는 시나리오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따라서 후속편에서 극장 던전 이야기를 하기로 확실하게 마음먹은, 계획이 짜인 상황이 아닌 이상 이지혜에게 별도의 트라우마 극복의 계기를 만들어줘야 했고, 영화는 김독자의 행동에 감화받아서 원작에서보다 일찍 극복의 계기를 맞이하는 것으로 각색했다고 생각한다. 이지혜의 극복에 대한 주요 기여자는 김독자인데, 영화는 이지혜가 특히 김독자에게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한다. 김독자는 충무로 시나리오에서 이지혜의 각성을 촉구하며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아. 하지만 혼자 살아남으려다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잖아." 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김독자의 말이 특히 이지혜에게 울림이 있는 이유는 김독자 또한 스스로를 '친구를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독자는 자신의 트라우마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전 제가 살기 위해 제 친구를 죽인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김독자가 친구인 민석이와 싸워서 민석이를 팬 건 학교에서 일진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했던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 일이 있은 다음 날 민석이는 자살했다. 김독자로서는 자신이 민석이를 죽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지혜가 시나리오1에서 친구를 죽이고 살아남은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서 친구를 죽였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김독자와 이지혜의 트라우마는 유사한 구조로 되어 있다. 김독자는 이지혜와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김독자가 이지혜에게 건네는 "전 제가 살기 위해 제 친구를 죽인 적이 있습니다"라는 말이 이지혜에게 더 와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이지혜에게 1편에서 각성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계기가 주변 인물들의 과거와 맞물려서 자연스럽게 설명되도록 각색했다. (3) 정희원의 설정 변화 원작에서 정희원은 멸살법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고, 영화에서 정희원은 멸살법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정희원의 설정을 이렇게 각색한 이유는 영화 분량상의 문제가 컸을 거라고 생각한다. 원작에서는 김독자가 정희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에 여러 과정을 통해서 김독자가 정희원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마련된다. 영화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영화는 원작의 주요 인물들을 모두 다루면서 또 그 인물들의 성장의 계기까지 만들어줘야 했기 때문에 정희원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소개하면서 천천히 친해지는 선택을 하기 현실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희원을 뺄 수는 없다. 정희원은 명실상부하게 원작의 주요 인물이고, 에필로그에서까지 계속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한다. 매력 있는 캐릭터고, 원작의 정희원 캐릭터에 대한 팬층도 두텁다. 따라서 정희원을 등장시키면서 정희원에 대한 설명을 최소화해서 분량을 압축할 방법이 무엇인가 떠올려보면, 다른 캐릭터들과 함께 정희원 또한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로 각색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정희원에 대한 각색이 문제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희원을 영화처럼 각색할 경우, 원작에서 김독자와 정희원 사이의 몇몇 장면들이 사라진다. 그 장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아쉬운 일이지만(나도 김독자와 정희원 사이의 티키타카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장면들이 전독시의 핵심적인 내용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보기는 힘들다. 만약 원작에서 정희원에 대한 설명이 영화에서와 같았다 하더라도 원작은 여전히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곁가지로 조금만 더 이야기해 보면, 원작에서는 정희원은 편의점에서 철두파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뻔한 사람이었다는 설정이었고 영화에서는 편의점에서 자신의 친구가 죽은 사람이었다는 설정이었다. 원작에서 정희원의 분노는 자신을 성폭행하려고 했던 일에 대한 분노였고, 영화에서 정희원의 분노는 친구의 죽음에 대한 복수였다. 자신을 위해 분노하는 것이 친구를 위해 분노하는 것으로 바뀐 건데, 바뀐 분노의 계기도 충분히 멋있었다. (4) 총을 사용하는 유중혁과 이지혜 유중혁과 이지혜의 무기가 조금 바뀌었다. 원작에서는 둘 다 칼을 쓰는데, 영화에서는 유중혁의 경우 칼과 총을 다 쓰고 이지혜의 경우 총만 쓴다. 원작에서 유중혁은 시나리오 중후반부에 가면 메인 무기들(천총운검, 흑천마도 등)이 생기는데, 초반부에 보조적으로 총을 사용하는 것으로 각색한다고 해서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화에서도 유중혁은 총을 보조적 무기로만 사용하고, 주요한 피해를 주는 장면에서는 항상 칼을 쓴다. 유중혁과 이지혜에게 칼이 아닌 총을 쥐여준 이유는 다른 주요 등장인물들이 주로 근접 무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액션의 다채로움을 더해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지혜가 총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다채로움을 확보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은데, 설정상 총을 쓰는 게 어색하다고 할 수도 없다. 이지혜의 배후성은 해상전신인 이순신인데, 이순신은 조총 개발을 주도한 사람일 만큼 총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1593년 5월 12일 편을 보면 "새로 만든 정철총통을 비변사로 보냈다(新造正鐵銃筒 送于備邊司)"라는 대목이 있고, 자신의 수군 각 진영과 각 고을에서 조총을 만들도록 지시하기도 했다.3) 원작의 설정상 이지혜는 이순신의 친구(전우)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께서 자신의 친구의 후손이 자신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좋은 무기라고 여겼던 총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분노할 거라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원작의 이순신 장군을 봐도 그렇게 평가하시지는 않을 것 같다. 따라서 액션의 다채로움을 위한 각색이었다고 가정하면, 나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각색이었다고 생각한다. (5) 김독자의 '제4의 벽'과 '전지적 독자 시점' 스킬 원작에서 '제4의 벽'과 '전지적 독자 시점'은 김독자의 중요한 스킬이다. 영화에서는 김독자가 금호역 터널 시나리오에서 뭘 그렇게 아는 게 많냐는 동료들의 질문에 '저는 별다른 스킬도 없잖아요. 그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조금 알 수 있어요'라는 취지로 대답한다. 영화에서만 보면 '제4의 벽'과 '전지적 독자 시점'의 스킬을 못 쓰는 것 같기는 한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김독자가 '제4의 벽'을 못 쓰면서 발생하는 중요한 효과는 자신의 상태창을 못 보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김독자가 자신의 상태창을 볼 수 있는지 혹은 없는지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영화 초반부 지하철에서 김남운과 싸울 때 자신의 능력에 코인을 투자할 때는 상태창이 올라와서 보여지는데, 금호역에서 방철수 파와 싸울 때 "근력 1,500코인 추가"라고 말을 했을 때는 상태창이 올라오지 않는다. 또한, 지하철에서 김남운과 싸울 때 김남운의 공격 패턴을 미리 마음속으로 예측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이게 원작을 읽어서 아는 건지 아니면 '전지적 독자 시점' 스킬을 써서 알게 된 건지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일단 1편의 전개만 놓고 보면 2편에서 '제4의 벽'과 '전지적 독자 시점'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식으로(나중에 발견하거나 아니면 나중에 설명하는 방식) 영화가 전개되어도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두 스킬이 빠진 것으로 각색된 게 아니기를 바란다. 2회독을 하고 쓴 전독시 리뷰에서도 썼는데, 나는 원작의 주요한 테마 중 하나가 김독자의 독자(讀者)로서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 게 김독자가 가진 위의 두 스킬이기 때문에 후속편에서 이 스킬이 명확하게 등장하면 좋겠다. + 책갈피 스킬도 등장하기를. (6) 유중혁이 회귀하면 세상이 사라진다. 암흑성 마왕 에피소드에서 유중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회귀해도 이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세계가 리셋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소리다.” 원작의 설정은 분명하다. 유중혁이 회귀해도 이 세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다르다. 유중혁이 회귀하면 그 세상은 사라진다. 이렇게 각색한 이유는 김독자에게 행동의 동기를 부여해주면서 영화의 마지막 빌런인 화룡종과의 전투에 더욱 긴박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유중혁이 죽더라도 세상이 사라지지 않으면 김독자가 계속 유중혁을 살리려고 노력할 이유가 사라진다. 김독자가 자신이 아는 정보들을 활용해서 유중혁의 역할을 대신하면 되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도 초반부 김독자는 유중혁이 죽어서 회귀하면 이 세상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유중혁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설정할 수도 있었겠지만, 영화에서 다르게 설정한 이유는 화룡종 에피소드에서 실제로 유중혁이 죽어서 세상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때 느껴지는 절망감, 막막함을 통해 화룡종을 물리쳐서 다시 세상을 복원시키는 에피소드가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더해서 초반부터 명확하게 '이중혁이 죽으면 이 세상이 다 망한다'라고 못 박고 진행할 때 김독자에게 더욱 명확한 동기를 부여해줘서 관객들로 하여금 김독자의 행동이 더 잘 와닿게 만드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이 각색은 상당히 과감한 각색이다. 향후 줄거리를, 특히나 최후반부나 에필로그 혹은 외전에서의 이야기를 원작과 다르게 가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설정 변화다. 1편에서 이렇게 각색한 것 자체는 이유 있는, 이해할 수 있는 각색이지만 후속편들에서 바뀔 이야기의 방향이 재미있지 않다면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각색이기도 하다. (7) 기타 각색들 짧게 다루고 넘어간다. 1) 김독자와 유상아의 성격 변화 김독자와 유상아의 성격이 조금 바뀌었다. 원작에서 초반부의 김독자와 유상아는 다소 딱딱하고 사람 냄새가 덜 나는(?) 캐릭터였는데, 그대로 영상화시켰을 경우 자연스럽지 않게 보일 우려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공통적으로 유상아와 김독자 모두 감정 표현이 더 풍부해졌고, 유상아는 보다 장난기가 많고 김독자는 덜 능숙하게 각색됐다. 금호역 시나리오에서 유중혁 이야기를 하면서 유상아가 정희원을 바라보며 "잘생겼어!"라고 하는 장면은 원작의 유상아라면 하지 않았을 대사가 확실하다. 유상아의 각색된 모습도 충분히 매력 있었다. 김독자의 경우 더 인간미가 느껴지게 각색했다는 장점이 있는데, 김독자의 능숙함은 김독자가 가진 제4의 벽 스킬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후속편에서 관련된 설정을 어떻게 정리할지 주목할 생각이다. 2) 지하철 시나리오의 메뚜기 -> 개미 지하철 시나리오에서 원작의 김독자는 메뚜기를 잡는데 영화의 김독자는 개미를 잡는다. 메뚜기를 개미로 바꾼 건 개미알의 시각효과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원작에서는 김독자가 메뚜기알을 여러 개 터뜨리면서 많은 생명을 죽인 효과를 얻어 코인을 많이 획득하는 기회를 얻는데, 메뚜기알은 메뚜기 배 안에 있기 때문에 김독자가 그걸 터뜨려도 정확히 뭘 했는지가 영상으로 표현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면, 개미알은 밖에 드러나기 때문에 개미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김독자가 뭘 해서 어떤 효과를 얻었는지가 보다 명확하게 영상을 통해 드러날 수 있었다. 다만, 이 각색은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메뚜기알은 매뚜기 배 알에 있으니까 메뚜기 배를 갈라서 그 알을 나눠서 가져서 모두 살아남는 시나리오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데 개미알은 사람 수대로 나누는 게 어렵지 않게 보이기 때문에 김독자는 그 지하철에서 아주 쉽게 모두를 살릴 방법이 있었음에도, 심지어는 모두를 살린 이후에도 수많은 코인을 얻을 수 있었는데도 이를 하지 않은 다소 싸이코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별생각 없이 넘어가면 넘어갈 수 있는 씬이지만, 되돌아서 생각해 보면 김독자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3) 기타 작은 부분들 초반에 7급 해수종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원작에서 사용된 '망치 해마의 점액' 설정을 없애서 사냥 방식을 간소화했고, 이후 안국역에서 화룡종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얻게 될 청빙환을 7급 해수종 사냥에 따른 보상으로 바꿨다. 이후 독이 퍼진 외부에서 마스크 역할을 할 엘라인 원숭이의 허파를 구매하는 것을 7급 해수종 사냥에 따른 보상으로 바꿨다. 엘라인 숲의 정기 아이템을 사용하는 장면도 뺐다. 원작에서는 그린 존 시나리오 이후 안국역으로 가서 선지자들의 밤에 참석하고 사도들의 계략에 당하는 과정에서 화룡종을 만나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그린 존 시나리오 이후에 충무로역에서 화룡종이 등장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쿠키영상에서 다른 역에서 뭔가 무시무시한 것들이 온다고 암시하는데, 한수영이 등장하지 않을가 추측한다. 이러한 각색들은 모두 '설명이 필요한 설정을 최소화해서 분량을 줄이고 압축적인 전개를 해나가는 방향'으로 설명된다. 이런 각색이 없었다면 화룡종을 잡는 데까지 이야기의 진도를 뺄 수 없었을 것이다. (8) 원작의 팬들께 전하는 말 : 영화는 원작의 핵심을 훼손시켰는가? 이런 주장이 많으니까 하지 않을 수 없는 논의이기는 한데, 가장 하기 싫은 논의이기도 하다. '핵심'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걸 규정한 권한이 누구에게 있을까? 핵심이 뭔지 논증할 방법이 있기는 할까? 이제 막 영화 1편이 개봉했을 뿐이다. 소설로 따지면 이제 막 안국역 에피소드가 끝났다. 소설 60화 정도에 막 도착했을 뿐이다. 전독시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전독시의 핵심 메세지나 철학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있을 텐데, 소설 60화를 읽으면서 벌써 그 결론을 냈었나? 아닐 거다. 완결을 보고 에필로그까지 읽으면서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니 영화에 대해서도 관용을 가져주면 어떨까? 지금 1편의 진행이 당신이 생각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의 핵심적인 요소와 맞물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더라도, 앞으로 이야기를 어떻게 진행해 나갈지 지켜봐 주는 건 어떨까?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영화 1편은 향후의 진행에 대해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고 있다. 그러니 이번 재해석이 어떻게 나올지를 지켜봐 주고, 실망하더라도 이 영화 시리즈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윤곽이 나온 이후에 실망하면 어떨지 제안하고 싶다. . 이 논의에 관심 있는 사람은 전독시 원작의 팬들일 가능성이 크니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김독자나 김독자 컴퍼니의 동료들이 [전지적 독자 시점]이 가진 핵심 철학을 자신들만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까? 아니면 [전지적 독자 시점]에 대한 오독도 있을 수 있고 엇나간 이해도 있을 수 있고 무리가 있는 해석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읽히고 이야기되고 재해석되기를 바랐을까? 원작에서 김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분명한 전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에필로그에서 가장 오래된 꿈이 된 김독자는 수많은 전독시의 세계선들을 살펴봤을 텐데, 그 세계선들은 시나리오에 대한 각 세계선의 주인공들의 해석이 담겨있다. 그중 많은 세계선들의 시나리오 전개는 가장 오래된 꿈인 김독자가 원하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전개와 달랐을 것이다. 김독자가 그 세계선들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원하는 전개와 다르다고 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시나리오의 핵심에 어긋난다고 해서 매번 개입하거나 비판하면서, 이 세계선은 진정한 멸살법 세계선이 아니고 전독시 세계선이 아니라고 날서게 비판하면서 그 세계선들을 바라봤을까? 아닐 것 같다. 김독자라면 보는 것만으로 좋았을 것이고, 두근거리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봤을 것 같다. 같은 마음이어주면 좋겠다. (9) 각색과 원작에 대하여 : 각색이 중요한 게 아니다. 잘, 재미있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각색할 때는 반드시 논란이 뒤따른다. 각색을 왜 했냐? 혹은 왜 저렇게 했냐는 논란이다. 원작 팬 중 일부는 각색된 작품이 원작의 어떠한 점도 바뀌지 않고 원작을 그대로 드러내기만을 바라기도 한다. 원작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원작에 대한 마음이 깊으면 원작의 모든 면의 의미를 곱씹고, 있는 그대로의 원작을 좋아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원작이 바뀌면 그건 작품의 훼손이자 원작에 대한 모독, 나아가서는 원작 팬에 대한 모독이라고 느낀다. 전독시는 훌륭하지만 다소 덕스러운 소설이기도 하다. 설정이 엄청나게, 엄청나게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거의 매회마다 설정을 줄줄 읊는 장면이 있을 정도다. 관점에 따라서는 마이너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클 수도 있고,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원작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 남다를 수도 있다. 이런 작품을 각색할 때는 일단은 반드시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설정이 바뀌는 것, 어떤 이야기가 생략된 것 자체를 원작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색한 작품이 모두 욕을 먹고 망하는 것으로 끝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원작을 각색해서 어떤 내용을 빼거나 바꾸었다는 점에서 기분이 상한 사람들을 설득할 만큼 독자적인 매력을 보여주면 된다. 좀 더 편하게 말해보면, 엄청나게 재미있게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해도 화를 낼 팬들은 화를 내겠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원작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훌륭한 작품'으로 이해해 주기도 한다. . 매체는 매체의 고유한 표현 방식, 호흡, 작품의 공개 방식, 소비자층 등이 모두 다르므로 원작이 있는 경우 반드시, 반드시 각색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주 드물게는 각색을 최소화하고 그대로 충실하게 이식하기만 해도 훌륭한 작품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주아주 작다고 생각한다. 원작이 훌륭한 경우 그 매체의 표현 방식을 잘 활용했기 때문에 훌륭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다른 표현 방식의 매체에 와서도 원작의 표현 방식이 그대로 훌륭한 방식이 될 가능성은 작다. 따라서 각색은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고, 각색했다는 것 자체가 비판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설정을 빼거나 바꾸었다는 사실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구체적인 각색의 방향을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매체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비판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비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에 인어공주 영화를 리뷰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작 이상이었다. 이걸 평작 이하라고 평가하면 평작인 영화는 거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어공주 영화를 많이 싫어한다. 인어공주에 대한 비판으로 PC주의(정치적 도덕주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영화 리뷰에도 쓴 내용이지만, 나는 그 비판의 내용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내용이 아주 듬뿍 들어간 영화도 훌륭할 수 있고, 반대로 아주 별로일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내용이 전혀 없는 영화도 훌륭할 수 있고, 반대로 아주 별로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영화가 훌륭하고 재밌는 건 그 영화가 PC주의를 담고 있냐 담지 않고 있냐와 별개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어공주를 비판할 때 PC주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물론 그건 디즈니의 최근 행보와 연관지어서 '디즈니가 PC주의에만 집중하고 작품의 퀄리티는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면 의미 있는 맥락이 생기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PC주의 자체는 영화가 못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멋지고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이 나오는 매드맥스를 누가 뭐라고 하는가? 나는 인어공주가 욕먹는 이유는 그 영화가 충분히 재미있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든지 인어공주는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인어공주를 싫어한 이유가 주인공이 흑인이어서라는 아주 언PC한 이유일 수도 있지만, 주인공이 흑인이어서 원작과 다르다는 이유로 반감을 느끼더라도 영화 자체를 아주 재미있게 만들어서 그 사람들의 반감을 안아줄 수 있었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다르지 않았을까? 일단 싫은 감정이 먼저고 사람들은 그 이후에 그 싫은 감정에 대한 이유를 찾게 되고, 그러다 보니 PC주의든 뭐든 보이는 것들을 집어내서 이를 비판하기 시작하는 게 아닐지 생각한다.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2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였다. 그 게임을 싫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는데, 중간중간 이상한 비판들도 많이 끼어있었다. 엘리의 잔근육이 비현실적이라느니 어떤 주인공이 스테로이드를 쓴 것 같다느니 하는 비판들이 있었는데, 그게 게임이 못난 이유가 될 수 있는지 심각하게 의문이었다. 여태껏 다른 게임들을 판단한 기준이 된 적도 없다. 인어공주 때와 비슷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유에서 사람들은 더 라스트 오브 어스2를 싫어하게 됐고, 일단 싫어하게 되었으니, 이유를 만들어서 제시하는 것이다. 전지적 독자 시점 영화에 대한 비판이 많은 것을 안다. 그중 상당수는 합리적인 비판이지만, 나는 그 영화에서 각색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두고 비판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어떤 설정이 사라졌거나 바뀌었다는 점 자체에 분개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위에서 말했듯이 다른 매체에 작품을 이식할 때 각색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전독시같이 설정이 많은 작품은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각색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비판하는 내용에는 동의할 수 없다. 다만, 이러한 비판을 위에서 말한 인어공주나 더 라스트 오브 어스2에 대한 설명과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을 좋아한다. 평작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주위 사람들에도 여럿 추천했다. 다만, 명작이나 수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작과 무관하게 눈에 보이는 아쉬움들이 여럿 있었고, 이 글에서 성의 있게 표현해 놓았다. 미묘하다기보다는 다소 눈에 띄는 아쉬움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하고, 흥행하기를 바라고, 후속작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면서도 명작이나 수작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재미있다고 느낄 가능성이 크지만, 재미있어서 미치겠다고 느낄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만약 이 영화가 아주 훌륭했다면, 미칠듯이 재미있었다면, 원작/각색과 별개로 눈에 보이는 아쉬움들이 적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일부 원작 팬들의 강한 비판이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다. 나는 위에서 몇몇 각색에 대해 왜 그렇게 각색되었는지, 그래서 괜찮은 각색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뭔지에 대한 내 생각을 적었다. 각색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서 한 이야기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의미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각색을 비판하는 이유가 정말 각색돼었다는 사실 자체에 분노해서일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몇몇 설정이 바뀌고 삭제되면서 느껴지는 서운함을 달래줄 정도로 영화가 충분히 재미있지, 충분히 훌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더 재미있게 만들었으면 없었을 비판이지 않았을까. 원작의 개성이 강한 작품이라면 원작 팬들의 각색작에 대한 기준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더더욱 재미있게 만들어야 했다. 전독시의 흥행도 어느 정도는 원작 팬들의 사랑에 기반한 것 아니겠는가. 어느 자리에서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훌륭한 영화는 취향을 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취향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취향은 있겠지만, 다른 취향마저 설득할 수 있는 영화가 진짜 훌륭한 영화라는 것이다. 각색작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영화는 원작을 얼마나 각색했는지와 무관하다'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원작을 많이 각색했다면 원작 팬들은 슬퍼하겠지만, 정말 훌륭한 영화라면 그 슬픔마저 보듬어주고 달래주며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을 좋아하고,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고, 주변에 추천도 하고 다닌다. 다만, 각색으로 인해서 슬퍼하는 원작 팬들의 슬픔을 보듬어주고 달래주며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영화인지 묻는다면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힘들다. 4. 김독자의 마음으로 후속작이 만들어진다면 위에서 언급한 아쉬운 점들을 잘 보완해서 완성도 있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전독시 원작의 팬들과 팬들이 아닌 사람들에게 모두 사랑받기를 바란다. 김병우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과 배우들 모두를 존경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이렇게 영화로 만들어줘서 내가 상상만 하던 세계를 두 눈으로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에필로그에서 김독자는 희생한다. 누군가는 이 세상을 보고 있어야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일부를 나누어서 이 세상을 보는 역할을 한다. 세상을 보는 역할을 하는 김독자는 점점 더 무의식의 영역으로 침잠해 가고 파편화되고 쪼개져서 세상으로 흩어진다. 김독자의 동료들이 김독자를 되찾을 방법은, 흩어진 많은 김독자들이 김독자의 귀환을 바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김독자의 상상은 현실이 되기에 그렇다. 흩어진 김독자들이 [전지적 독자 시점]을 읽고 김독자의 귀환을 상상하면 김독자가 돌아올 수 있다. 나는 흩어져서 김독자의 귀환을 상상하는 김독자의 마음으로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을 보고 있다. 더 많은 김독자들이 전지적 독자 시점을 본다면, 김독자가 다음 영화로 되돌아올 수 있다. 소설에는 김독자 컴퍼니가 '그렇게 해서 돌아온 김독자가 우리가 아는 김독자가 아니면 어쩌지'라며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확신이 없더라도 김독자 컴퍼니는 김독자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해서 돌아온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 내가 아는 [전지적 독자 시점]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고민을 했었는데, 내가 아는 [전지적 독자 시점]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단 하나의 [전지적 독자 시점]을 규정할 권한을 가지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보고 듣고 읽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나는, 설령 그것이 나의 이해와 다르더라도 누군가가 이해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다시 보고 싶다. 그리고 이야기하고 싶다. 다시 김독자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출처]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 리뷰 - 영화 추천 여부, 각색 등 이 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것|작성자 아라미루 테스트 파일: 개인정보 처리방침 변경(전,후)_260710.pdf 테스트 파일: HWP_테스트.hwp test-lock.hwp 1) 주석 처리 테스트 설명입니다. 2) 두번째 주석 테스트입니다.
사진: Cambridge Community Foundation , Photo by Wolfgang Wesener 프레더릭 와이즈먼 영화의 러닝타임은 길었고, 와이즈먼의 생애 역시 러닝타임만큼이나 길었다. 하지만 1967년 < 티티컷 풍자극 >으로 시작하여 2023년 < 메뉴의 즐거움 - 트와그로 가족 >까지 이어진 와이즈먼의 이력은 한 작가의 세계가 어떻게 성립되고, 완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와이즈먼의 영화는 주요 영화제에서 크게 주목받은 적이 없고 따라서 덜 탐구되었지만, 2017년 제89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역사적인 공헌을 인정받기도 했다. ‘평생공로’라는 상투적인 수사에 와이즈먼만큼 어울리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그가 남긴 개성적인 작품들은 교육적 가치를 지니며, 수도사적인 열정으로 만들어진 그의 영화들은 인간의 복잡성과 인류의 풍습. 제도를 끈기 있게 기록함으로써 영화와 삶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을 풍요롭게 했다. 촬영과 편집의 반복된 루틴을 벗어난 예외적인 작품이자 와이즈먼의 최고 작업 중 하나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이어진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화들은 폭넓게 배급된 적이 거의 없지만 이 역사적인 복원 작업은 더 많은 사람들이 와이즈먼의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티티컷 풍자극>부터 <주 의회>(2006)에 이르는 33편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가 복원의 대상이었다. 와이즈먼의 영화를 관리하는 지포라 필름(Zipporah Films)이 주도하고, 미 의회도서관과 하버드 필름 아카이브, 그리고 유수의 후반 작업 스튜디오인 듀아트(DuArt), 골드크레스트 포스트(Goldcrest Post)가 참여하여 2024년 완결된 복원 프로젝트는 단순히 한 감독의 작품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인류의 유산을 온존시키기 위한 뜻깊은 프로젝트였다. 시대의 조류에 밀려 기록보관소에 파묻힐 뻔했던 거장의 주옥편들이 원본 16mm 필름의 질감을 간직한 상태로, 4K 디지털 버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필름의 결을 매만지고, 그 표면에 조화로운 질감을 부여하며, 과거를 다시 쓰는 생명의 재탄생 과정에 비견할만한 이들 복원 작품이야말로 한국영상자료원 같은 필름 아카이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영역 중 하나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와이즈먼의 영화는 특정 순간의 기록을 넘어 역사적 ‘문서’가 될 것이다. 수십 년이 흐른 뒤 우리가 알던 기관의 본질도 바뀌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찰의 공권력 집행 방식, 고등학교 교육의 모습, 복지 기관의 일 처리 방식, 의사들이 질병을 다스리는 접근, 인간의 식생활은 필연적으로 변한다. 옷차림, 언어 습관, 헤어스타일, 회의 방식, 심지어 신체 특성도 마찬가지이다. 미래의 사람들이 와이즈먼의 영화를 보며, 자신들의 현재와 과거 사이의 명확한 차이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될 것은 자명하다. (상) < 고등학교 >, <임사> 중 / 사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Film at Lincoln Center , © Zipporah Films (하) <발레>, <몬로비아, 인디애나> 중 / 사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좌 , 우 ), © Zipporah Films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유산이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것은 그의 다큐멘터리가 가지는 특이점 때문이다. 소박한 제목의 작품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와이즈먼은 기관과 공동체의 모습을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인상적인 스타일로 기록하였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관습에 따라 원시적인 베리테(vérité) 스타일을 고수한 작가처럼 보이지만, 그는 간단히 정의될 수 없는 인간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독창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와이즈먼은 결코 단순한 베리테 추종자가 아니다. 문학 작품에서 활용되는 서술자 시점을 영화의 서술에 이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던 와이즈먼은 철저히 주관적 관점에서 조망된 기관의 속살을 묘사하였다. 도시 건축의 기하학적 지표성, 수많은 복도와 거리 장면, 자동차의 이동을 주기적으로 삽입하는 것은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우 샷처럼, 오직 와이즈먼에게서만 발견되는 일관된 스타일 장치이다. 그의 영화는 서로 맞물린 도시 교향곡 서사시의 개별적인 부분들처럼 기능한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리처드 리콕(Richard Leacock)은 관찰 다큐멘터리에서 영화감독은 ‘연출자’로 기능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와이즈먼에 관한 한 리콕의 말은 틀렸다. 와이즈먼은 관찰 양식을 채택했으나 그의 모든 영화는 온전히 그의 것이고,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대로 만들어졌다. 스타일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제목이다. 작명(作名)은 와이즈먼의 영화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영감을 제공한다. 와이즈먼 영화의 제목은 문자 그대로의 기관을 나타내는 언어이자 제도이고, 제도와 연관된 인간 행위의 속성을 암시하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기관의 이름이나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직업에서 추출한 제목은 일상의 힘과 제도적 차원의 사소한 결정들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포착한다. 대표작 중 하나인 < 복지 >(1975)를 예로 들어보자. 이 영화의 서사는 뉴욕시의 복지 기관과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것이므로 장소를 제목으로 취한 와이즈먼의 다른 영화들처럼 <복지 사무소> 또는 <뉴욕 복지 사무소>라는 직설의 제목을 붙일 수 있다. <복지>와 <복지 사무소>라는 표제의 초점은 판이하다. 이 영화는 복지를 담당하는 기관의 장소성을 탐구하는 좁은 의미를 초월하여 미국의 복지 제도와 시스템, 또는 더욱 추상적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신체와 생활, 환경을 조성하고자 하는 인간 활동을 주제화한다. 그곳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의 관계, 욕망, 희망, 좌절을 묘사하는 대목도 여럿이다. 따라서 복지 사무소에서 진행되는 영화는 역사의 특정 시점에 존재했던 장소와 사람들을 기록한 것이지만 제도와 인간의 영속하는 본질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지> 중 / 사진: Harvard Film Archive , © Zipporah Films 이것만으로도 위대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와이즈먼의 영화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작품 전체를 흐름을 살펴보면,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문법을 완전히 다시 쓰는 독창성과 정밀함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이는 와이즈먼이 고안한 규칙과 조건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특한 스타일 체계에 의해 가능했다. 그의 성취는, 진정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은 이러해야 한다는 세간의 통념을 철저히 외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굳게 닫힌 기관의 문들을 열고,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카메라에 담기는 사람들은 자신이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자연스럽고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스토리를 효율적으로, 빠르게 진행시키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수십 분에 달하는 회의, 토론 장면도 생략 없이 편집했다. 촬영 현장은 비(非) 개입주의에 따라 진행하지만 편집 단계에선 전적으로 주관에 의지하고, 편집의 자유로운 힘을 활용하여 틀에 박힌 의미가 아니라 해석적인 개인의 비전을 불어넣는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혁명적인 것을 조용하고, 겸손하게 한 예술가였다. 영화 역사를 지탱해 온, 기록과 구성의 이분법, 몽타주와 롱테이크의 대치,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을 초월하는 영화를 와이즈먼은 만들었다. 영화에서 ‘드라마’는 대개 격정적인 갈등이나 극적인 사건을 의미한다. 하지만 와이즈먼에게 드라마란 표면 아래에 숨겨진 추상적인 가치와 계급의 초상이다. 콜로라도주 아스펜을 소재로 한 <애스펀>(1991)에는 부유층 여피들의 가치관이 드러나는 예리한 시퀀스가 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버림받은 가난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소설 「단순한 마음」(A Simple Heart)에 관한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소설 속 비극과 그들의 호화로운 삶 사이의 기묘한 반향을 만들어낸다. 이 장면은 플로베르의 스토리를 보여주기 위해 삽입된 것이 아니라 토론회에 참석한 부유한 여인들의 헛헛한 내면과 가치관에 대한 폭로로 기능한다. <애스펀> 중 /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 Zipporah Films 또 다른 예로 <법과 질서>(1969)에는 길 잃은 소녀를 다정하게 보살피는 경찰과, 매춘 혐의를 받는 흑인 여성을 무도하게 제압하는 경찰의 폭력이 동시에 담겨 있다. 와이즈먼의 렌즈 안에서 인간은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은 양극적 행동 양태 사이 어딘가에 분포해 있다. <복지>에는 반복적인 민원인의 요청에 앵무새 같은 말로 응대하는 복지 사무소 직원과 손수 민원인을 데리고 층을 옮겨가며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직원이 나란히 놓인다. 이런 대비는 영화와 영화 사이를 건너뛰어 발생하기도 한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다룬 <복지>나 <공공 주택>(1997)의 반대편에 상류층의 삶의 방식을 묘사하는 <백화점>(1983)과 <애스펀>이 놓인다. 달라스의 고급 백화점 니만 마커스(Neiman-Marcus)를 통해 부유층의 삶을 관찰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을 비추는 것만큼이나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본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더 냉소적이라거나 따뜻하다고 단정 짓기에,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인정이 넘친다고 단정하기에, 우리가 마주하는 삶은 입체적이다. <공공 주택>, <백화점> 중 / 사진: MUBI , SIFF , © Zipporah Films 인간 행동에 대해 사회학적인 일반화에 저항하는 와이즈먼의 세계관은 언제나 ‘너머의 진실’을 보려 했다. 진정한 영화란 스크린 위의 영상과 관객의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탄생하며, 누군가는 희망을 읽고 누군가는 비관을 느낀다. 우리들이 와이즈먼의 영화를 보는 이유, 한 사람의 시선이 머문 기록물을 후대인들이 반복적으로 꺼내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l 영화주간지 《필름 2.0》 편집장,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영화글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