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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화인의 사진첩] 소설 연재를 위해 배우를 캐스팅해 사진까지 찍었다고?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영화평을 쓰는 것이며, 세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라는, 프랑스 누벨바그 시네마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이 유명한 말은 한국의 수많은 시네필에게 영화 사랑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주1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반드시 영화 창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 창작 욕구가 없다고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영화 사랑 정도가 트뤼포가 말한 저 세 단계 중 어느 경지에 있는지 재본 적이 있지 않을까? 게 중에는 실제로 영화 창작의 꿈을 펼치는 이가 있을 것이고, 영화에 관한 글 혹은 영상을 쓰거나 만드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저 영화 보는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사랑의 정도를 단계로 매겨 고수와 하수로 평가할 일은 사실, 아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각자의 방식이 있을 뿐, 정해진 단계란 있을 수 없다. 트뤼포가 말한 세 단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이도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할 ‘사진첩’의 소장자, 고(故) 홍영철(1946~2016) 선생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여느 영화팬과 마찬가지로 영화 보는 걸 즐기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영화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이윽고 자신이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며 영화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영화를 즐겨 보면서 입장권을 버리지 않고 모았다. 포스터와 신문광고 같은 것을 함께 모으다 보니 재미가 있더라. 그러다가 체계적으로 자료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1년이다. 영화에 빠지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접하려 했지만 어려웠다. 변변한 자료집 하나 없었으니.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이것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시작했다. - “ 한국 영화사 연구가 홍영철에게 ‘영화도시 부산’의 길을 묻다 ”, 《부산시보 부산이라 좋다》, 2014. 8. 25. 194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으로 부산에 정착했다. 젊은 시절, 영화를 즐겨 보며 입장권을 모으던 데서 시작해, 영화 포스터와 스틸, 전단 등 영화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직접 카메라를 들고 부산의 여러 영화관을 돌아다니며 극장 간판 사진을 찍었고, 영화관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수집을 했다고 하니, 201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꼭 45년 동안 수집한 자료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당연히 그는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해 『한국영화도서자료편람 1925~1990』(한국영상자료원, 1991)과 『부산영화 100년』(한국영화자료연구원, 2001), 『부산근대영화사: 영화상영자료 1915~1944』(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산지니, 2009), 『부산극장사』(부산영상위원회·한국영화자료연구원 엮음, 부산포, 2014) 등의 책을 편찬했다. 그리고 2017년, 홍영철 선생의 유족은 그가 반평생을 넘게 수집한 자료들을 부산시에 기증했다. 자료의 원본은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에서 보존·관리하기 시작했는데, 2019년에 한국영상자료원은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과 업무협약을 맺고 일부 자료를 디지털 복사본의 형태로 기증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이번에 공개한 “ 영화 수집가 홍영철 소장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 컬렉션(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은 바로 이들 자료 중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을 정리해 해제를 덧붙인 것이다. 이 컬렉션에는 1923년 하야카와 고슈(早川孤舟)가 연출한 < 춘향전 >부터 1944년 방한준 감독의 < 거경전 >까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제작된 극영화 70여 편의 스틸 132점이 디지털 파일의 형태로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에는 언뜻 영화 스틸 같아 보이지만 영화 스틸이 아닌 것도 섞여 있다. 사진 속에는 그 유명한 영화 < 아리랑 >(1926)의 감독이자 배우로도 인기 많았던 나운규 가 등장하고, 그와 함께 <아리랑>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 남궁운 과 주인규 가 출연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사진들은 심훈 이 1926년 11월 9일부터 12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영화소설 「탈춤」의 스틸이다. 극의 한 장면을 실사(實寫)로 촬영한 스틸인데 영화가 아닌 소설의 스틸이니, 그렇다면 ‘소설 스틸’이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할까? 그런데 잠깐만! ‘소설 스틸’이 무슨 말이냐고? 문자를 존재의 수단으로 삼는 ‘소설’이라는 장르에 시각 요소가 핵심인 ‘스틸’이라는 용어가 붙은 합성어가 말이 되냐고? 하신다면…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1920년대 중반에 등장한 ‘ 영화소설 ’이라는 문화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0년대까지 ‘영화 관람의 시대’를 보낸 식민지 조선의 영화계는 1919년 < 의리적 구토 >를 시작으로 본격 영화를 만드는 시대를 맞았다. 이와 함께 영화의 대중적 인기도 날로 높아졌다. 이를 반영이나 하듯, 1920년대 중반부터 여러 신문은 연재 소설에 삽화 혹은 연출된 사진을 수록하고, 여기에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영화소설’이 일련의 공통된 양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왕의 신문 연재 소설과 다른 특별한 양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보다 당시 신문들이 앞다투어 사용한 ‘영화소설’이라는 표제에는 나름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영화소설을 문학 장르가 아닌 ‘문화현상’이라 언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신문에 연재된 것은 김일영의 「삼림의 섭언」이라는 작품으로, 이는 《매일신보》를 통해 1926년 4월 4일부터 5월 16일까지 총 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1920년대는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민간 신문 발행을 허용했던 때로, 1910년대까지 총독부 기관지로 독주했던 《매일신보》는 이제,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민간 신문과 경쟁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1926년에 《매일신보》가 처음 도입한 ‘영화소설’은 당시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신문 판매 부수로 견인하려는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등도 잇달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단 작품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주2 영화소설을 신문 마케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은 《매일신보》에 「삼림의 섭언」이 연재되고 약 6개월 후, 《동아일보》에 연재된 「탈춤」(1926. 11. 9.~12. 16., 총 34회 연재)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탈춤」 연재를 시작하기 하루 전, 다음과 같은 홍보 기사를 게재했다. 사진: " 창작 영화소설 탈춤(예고) 심훈 작 ", 《동아일보》, 1926. 11. 8., 3면 심훈의 「탈춤」을 “조선서 처음되는 영화소설”이라고 홍보하고 있지만, 이미 수개월 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연재된 작품이 있기에,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이 홍보 기사에서 방점을 찍어 주목할 부분은 따로 있다. 기왕의 신문 연재 소설과 다를 바 없이 삽화를 수록했던 최초의 영화소설 「삼림의 섭언」과 달리, 「탈춤」은 “매일 삽화 대신으로 미려한 실연 사진”을 수록한다는 점이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차용했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에 대해 최초라는 타이틀은 다른 신문 다른 작품에 뺏겼지만, 《동아일보》는 처음으로 소설에 “실연 사진”을 도입하는 차별화 전략으로 신문 독자들에게 영화 관람 못지않은 기대감을 심으려 했을 것이다. 비로소 그 실상이 공개된 「탈춤」의 스틸은 화려한 캐스팅마저 자랑했다. 연재 첫 화의 스틸에는 같은 해 공개돼 화제를 모았던 영화 <아리랑>의 감독이자 스타 배우 나운규가, 또 같은 해 < 장한몽 >(이경손, 1926)의 심순애 역으로 스타 반열에 오른 김정숙 을 안고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어지는 회마다 차례로 공개된 스틸에는 <아리랑>에서 현구 역으로 큰 인기를 끈 배우 남궁운과 악역 연기의 일인자로 정평이 난 주인규가 등장했다. 스틸 캐스팅만으로도 당대 소설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영화소설 「탈춤」을 읽는 재미는 이뿐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재되는 사진 위에는 상황을 요약한 지문 내지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말풍선으로 제시되었다. “영화 수집가 홍영철 소장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 컬렉션(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속 영화소설 「탈춤」 스틸 역시 연재 당시에 다음과 같은 말풍선과 함께 실렸다. 소설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 말풍선으로 제시되는 대사로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재미까지 의도한 듯한 구성은 어느새 독자들에게 ‘진짜로’ 만들어진 혹은 만들고 있는 영화라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았을까? 특히 보통의 소설처럼 서술되던 내용이 연재 후반부에 이르러 갑자기 영화 시나리오 형식으로 제시되었을 때, 이러한 의심(?)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 심훈은 연재 중 불쑥 등장해,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기도 했다. 결혼식까지 하게 되기 전에 여러 가지 층절이 잇서 좀 더 세밀한 묘사를 해야 할 것이나 “스티-ㄹ”(삽화 사진)이 부족 해서 부득이 겅정겅정 뛸수밧게 업시되얏고 결혼식 장면은 전문용어만 쓰지안코 원 영화 각본을 꿈이는 체로 시험삼아 써봄니다. - " 탈춤(26) ", 《동아일보》 1926. 12. 6., 3면 그런데 작가의 이 말은 또 다른 혼란을 가중한다. 심훈은 극 중 혜경이 준상의 강압으로 그와 결혼식을 치르는 과정을 세밀하게 전개하지 못한 이유를 스틸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스틸의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이다. 소설의 스토리를 뒷받침해 주는 보조 수단이 스틸이어야 하는 것이 마땅할 텐데, 이 순간부터는 역으로 소설이 스틸의 스토리를 보완하는 장치가 되어버린다.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 연재가 기획된 것인지 아니면 연재하던 중에 영화화가 결정된 것인지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영화소설 「탈춤」은 연재가 끝난 그 이튿날, 영화 제작 소식을 전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할 영화 < 탈춤 >은 원작자 심훈이 각색을, 나운규가 감독을 맡을 예정이었다. 나운규를 비롯해 소설 스틸에 출연한 남궁운과 주인규가 영화에서도 그대로 출연할 계획이지만, 여배우만큼은 전격 신인으로 교체하리라고 발표되었다. *주3 그러나 영화 촬영은 예고했던 것처럼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7월, 《조선일보》는 그간의 각색 작업을 마치고 계림영화사 제작 아래 심훈이 감독을 맡을 것이라고 알렸다. 배우 역시 선정 중이라고 밝혀, 영화소설 「탈춤」 스틸에 출연한 배우들마저 전격 교체될 것임을 시사했다. *주4 그러나 영화 <탈춤>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주5 대신 심훈은 1927년 9월, 자신이 쓴 시나리오 < 먼동이 틀 때 >를 촬영하며 첫 메가폰을 잡았다. 심훈의 연출 데뷔작 <먼동이 틀 때>(1927) * 공교롭게도 영화소설 「탈춤」이 신문에 연재 중이던 때에 「탈춤」 스틸에 출연한 나운규, 김정숙, 남궁운, 주인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제작, 나운규 연출의 < 풍운아 >에도 출연했다(1926년 11월 19일 크랭크인, 1926년 12월 18일 조선극장에서 개봉). 그 때문인지 나운규가 자동차 뒤에 매달린 스틸은 훗날, 영화 <풍운아>의 스틸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스틸이 영화소설 「탈춤」에 수록된 날짜(1926. 11. 15.)가 <풍운아>의 공식 크랭크인 날짜보다 나흘 앞선다는 점에서, 그 정보는 수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주1. 정성일에 따르면, 이 말은 일본을 경유하며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사실 트뤼포는 ‘시네필로서 어떤 순간에 감독 혹은 비평가가 되려 했는가’라는 질문을 반추하며, 자신의 비평집 『내 인생의 영화(Les Films de ma vie)』에서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첫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영화관을 나서면서 감독을 적어 두는 것이며, 세 번째는 연출의 자리에 가서 내가 선택한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성일, 「트뤼포, 영화를 사랑한다면 이 사람처럼」,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을유문화사, 2006, 980~981쪽. 주2. 《매일신보》의 영화소설 게재 배경 및 특징에 대해서는 배현자·이혜진, 「근대 영화소설의 처음과 끝- 『매일신보』 영화소설」, 『한국 근대 영화소설 자료집: 매일신보편 上』, 소명출판, 2019, 3~34쪽 참고. 주3. 《동아일보》 , 1926. 12. 17., 5면. 주4. 《조선일보》, 1927. 7. 23., 2면. 주5. 심훈은 “촬영을 개시하기 6일 전에 초지(初志)를 뒤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탈춤」은 부르주아의 생활 이면을 유치하게나마 그린 것이 되기 때문에 스케일이 여간 크지가 않고 출연 인원도 엄청나게 많은 동시에 한 이천 원 한도하고 촬영비를 내게 되는 터라 그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도저히 실현시킬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라고 회고했다. 심훈, 「『먼동이 틀 때』의 회고-조선영화감독고심담」, 『심훈문학전집 1』, 탐구당, 1966, 577쪽; 주인, 「영화소설 정립을 위한 일고- 심훈의 탈춤과 영화평론을 중심으로」,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어문연구』, 34권 2호, 2006, 267쪽에서 재인용.
1972년 이후 영화정책 변화와 <수절> 검열자료 해제 1
1971년 말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영화정책의 급변 196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영화검열 체제는 매우 복잡한 변화를 겪었다. 이 변화는 주로 시나리오 단계에서의 검열(외화의 경우 수입 허가 단계)에 집중되었다. 이중검열 혹은 삼중검열의 혼란을 낳은 60년대 후반 시나리오 검열은 1970년에 이르러 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적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변화와 혼란의 시발은 1971년 12월 갑작스럽게 선포된 국가비상사태였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12월 6일, ‘중공’의 유엔 가입으로 안보가 더 불안해졌고, ‘북괴’의 도발이 날로 격화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 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조속히 만전의 안보 태세를 확립한다, 2. 안보상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으며 또 불안요인을 배제한다, 3.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 논의를 삼가야 한다” 등 6개항 조치를 발표했다. 그리고 12월 11일 문화공보부는 국가비상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영화 분야에 다음과 같은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1. 협동단결을 강조하고 성실, 근면, 검소한 생활자세를 바탕으로 하는 국민상을 그린 내용의 영화제작을 권장한다. 2. 건전한 국민정서로 순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의 영화, 민족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내용의 영화를 정선, 수입하도록 한다. 3. 국내영화제작의 질적 향상을 위해 72년도 제작편수를 1백50편으로 한정하고 안보관계 영화를 연 30편 이상 제작하여 매월 최소한 2편 이상 상영토록 의무화한다. 72년도 외화수입을 50편으로 한정하되 안보관계 영화를 15편 정도 수입하도록 한다. 4. 음란, 선정적인 묘사 등 퇴폐성향이 있는 내용,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내용, 사치와 낭비 등 소비성향을 조장할 우려가 있는 내용은 배격한다. 1) 국가비상사태 선포 내용을 담은 일간지 기사(『동아일보』, 1971년 12월 6일) 이러한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영화시책”은 안보 위기 상황을 맞아 그간 “섹스 퇴폐풍조 눈물 한숨 패배의식 등을 철저히 규제” 2) 함으로써 한국영화를 수정하겠다는 정책당국의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 체제 이후 1972년 신년부터 검열이 강화되었는데, 이를 단순히 강화되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간 진행되었던 시나리오의 검열은 신청된 시나리오를 심사하여 무수정, 개작, 부분 개작, 반려 등의 단계에 따라 절차가 진행된 반면, 새로운 체제에서는 신청된 시나리오를 심사하여 제작될 수 있는(외화의 경우 수입할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검열의 수준을 벗어나는 조치다. 왜냐하면 기존 우리가 생각하는 검열은 주어진 작품에 대한 수정과 (예외적으로) 반려를 포함하는 것이지, 제작할 작품을 선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는 어느 면에서는 최고 수준의 검열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에 따라 시나리오 단계의 검열 과정은 60년대 후반에 이어 다시 이중화된다. 이에 당시 문공부 장관 윤주영은 “저질영화 제작과 무분별한 외국영화 수입을 막고, 국가 안보 우선의 영화제작 장려책으로” 제도를 바꾸었다고 밝혔다. 3) 문제는 시나리오 심사에서 통과한다 하더라도 제작쿼터를 부여받는 것은 별개라는 것이었다. 즉 문공부는 예륜에서 사전심의한 작품에 대해 20인의 “쿼터” 심의위원을 두어 재심사 과정을 거친 후 국산영화 제작권을 부여했다. 그 결과 1972년의 한 글에 따르면 320여 편의 시나리오 가운데 1백 50편이 제작쿼터를 부여받았고, 최종적으로는 29편만이 영화화되었다고 언급된다. 4) 물론 이는 감독들의 대담 가운데 나온 발언이라 수치가 정확한지 확인할 수 없고, 1972년의 한국영화제작편수가 29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후술하겠지만 영화진흥공사 자료집의 통계는 이 해 제작된 편수가 122편이라 밝힌다). 1971년으로부터 넘어온 제작쿼터가 상당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5) 아마도 1972년에 부여된 제작쿼터의 상당량은 다시 1973년으로 이월되기도 했을 것이다. 제작쿼터가 부여되었음에도 제작이 부진했던 이유에 대해 앞의 잡지기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해당 연도인 72년도 배정 코타분의 제작 진척이 극히 부진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영화계의 전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당해연도의 「코타」가 과년도 「코타」에 비해 제작완성율이 뒤떨어진다는 상례에 비유하기에 앞서 최근의 영화산업이 사양의 문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세계적인 조류의 축소판으로 풀이할 수밖에 없겠다. 또한 예로는 「선각본 심사제」라는 큰 변화가 처음으로 실시됨에 따라 제작에서 다소 주춤했던 제작자들의 태도도 영향의 일부로 볼 수 있겠다. 6) 1970년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산업의 부진이 급격히 진행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관객수의 경우 1969년까지는 1.71억명에서 1.73억명으로 소폭이나마 증가하였으나, 1971년 처음으로 1.46억명으로 2천만명이 줄었고, 1972년에는 1.18억명으로 거의 3천만명이 줄어들게 된다. 제작편수는 1969년 229편을 정점으로 1971년 202편으로 줄었다가 1972년 122편으로 급감하였다. 말하자면 1970년 시작된 불황은 1972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된다. 그리고 그 원인 중 하나가 어쩌면 1971년 국가비상사태 선언 이후 강경해진 영화정책 변화일 수 있을 것이다. 유신과 4차 개정 영화법 이러한 상황에서 1972년 10월 말 다시 유신이 선포되었다. 유신과 함께 1972년 검열체제는 더욱 강화된다. 특히 유신 체제 하 예륜은 새로운 18개의 심의기준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기존의 검열사항 외 “1.10월유신 조치를 왜곡, 비방하거나 유인비어 날조를 유발할 우려가 있는 내용, 2.총력안보에 역행하거나 국토 통일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 3.남북적십자 회담을 비방하거나 이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 등 사항이 눈에 띈다. 7) 1973년 2월에는 영화법이 개정, 4차 영화법이 공포되었다. 4차 개정 영화법은 70년 3차 개정영화법이 시행했던 제작과 수입의 분리 정책을 이전으로 되돌려 제작사만이 외화수입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한국영화 제작사의 독점적 권리를 보장했다. 또한 제작사 등록제를 허가제로 강화하여 마찬가지로 제작사를 독점화했다. 표면적으로 이는 60년대 내내 추진되었던 영화정책의 중점 방향인 메이저 기업화 정책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메이저 기업화 정책이 이미 파탄의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고 정부의 권위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소수의 제작-수입사를 통해 영화콘텐츠 전반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로 짐작된다. 이와 함께 기존의 영화진흥조합은 영화진흥공사로 개편되었다. 광의의 검열 행정체제와 관련하여 사단법인 한국영화배급협회의 창립을 별도로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배급협회는 1973년 5월 11일 창립총회를 통해 발족했다. 지방배급사(흥행사)의 부당한 간섭과 영화 수입의 누출을 막고 전국적으로 일원화된 배급체제를 구축하고자 설립된 배급협회의 초대 이사장은 김태수, 상임이사는 안재홍이었고, 이사진으로는 제작(수입)사 쪽 2명, 공연자 쪽 2명, 영화진흥공사 1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영화배급협회는 중간배급업자(지방흥행사)를 배제함으로써 중간 유출되는 수입을 줄이고, 제작자와 상영자라는 직접 이해당사자간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8) 이에 따라 문화공보부는 “①모든 영화는 영화배급협회 이외의 경로를 통하여 배급하지 못한다. ②영화의 배급에 관하여 임의로 계약하여 이를 위장해서는 안된다. ③모든 공연장은 배급협회를 통하지 아니한 여하한 극영화도 상영해서는 안된다. ④ 영화배급신청서는 제작신고 및 수입추천 시에 영화배급협회에 제출해야 한다” 9) 등 배급협회에 관한 행정방침을 시달하여, 모든 영화의 배급은 배급협회를 거치도록 강제했다. 1973년 6월 21일 진행된 영화배급협회 현판식 사진(김태수 배급협회 이사장(좌), 문공부 이치순 예술국장(우) 출처: 『영화』, 1973년 8월호) 이와 함께 매년 영화정책의 구체안을 포함한 영화시책이 1973년 이후 1989년까지 매년 발표되었는데, 4차 개정 영화법이 공포된 1973년 영화시책은 영화검열의 내용과 체제에 있어서 강화된 안을 담고 있다. 10) 우선 우수영화 제작방침에서 “10월유신을 구현하는 내용,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애족의 국민성을 고무 진작시킬 수 있는 내용, 의욕과 신념에 찬 진취적인 국민정신을 배양할 수 있는 내용, 새마을 운동에 적극 참여케 하는 내용, 협동·단결을 강조하고 슬기롭고 의지에 찬 인간상록수를 소재로 한 내용” 등 유신 이후의 변화된 상황을 담았고, 우수외화의 기준으로 “유신이념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영화, 민족주체성과 애국, 애족정신을 북돋아줄 수 있는 영화, 새마을운동의 가치관을 설득시킬 수 있는 영화” 등 유사한 기조의 15개 항이 제시되었다. 이와 함께 검열에 있어서의 주안점 역시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거나 국민총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의 지양, 음란 선동적인 묘사 등 퇴폐성향이 짙은 내용의 지양” 등 6개 항이 별도로 제시되었다. 한편 전년 크게 문제가 되었던 시나리오의 심의는 “예륜 심의를 거쳐 다시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된 심의회에서 심의 결정하던 것을 예륜 심의를 강화하여 당부가 직접 결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1972년의 번거로웠던 시나리오 검열의 단계, 그리고 이로 인한 제작 부진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개선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도의 변경이 반드시 소위 이중검열의 폐단을 개선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문공부 담당자의 직접 결정은 양면의 날과 같아서, 강화의 기조에서는 매우 엄격하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제작권은 1972년 제작편수의 급감을 의식한 탓인지 전년 150편에서 130편으로 줄었다. 요컨대 1971년 말 선포된 “국가비상사태선언” 이후 진행된 영화정책은 4차개정영화법까지 권위주의 강화를 향해 치달았다. 단순히 영화검열만의 문제는 아니다. 60년대 영화산업정책의 폐단이 4차개정영화법을 거치며 반복강화되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바로 이 시기에 영화산업의 불황이 시작되었다. 산업적 불황과 정권의 권력유지 욕망의 산물로서의 영화정책이 악순환의 고리를 이루며 1990년대 초까지 한국영화산업의 장기불황이 진행된다. 각주 1) "안보 우선 주체의식 고취, 대중연예에 새 기풍, 문공부서 쇄신책 마련, 영화검열 기준강화, 제작편수를 연 1백50편으로 한정", <매일경제신문> 1971년 12월 11일 2) "줄지을 「안보영화」, 국민총화 담긴 외화 우선 수입, 사회불안·섹스 등 다룬 작품 철저 규제, 방화도 새 가치관 따라서 개작", <동아일보>, 1972년 1월 12일 3) "「선심사」 「후 수입쿼터배정」, 윤문공 안보 우선의 영화정책 마련", <조선일보>, 1972년 4월 14일 4) “신춘좌담: 바람직한 새해 영화풍토는”, 『코리아시네마』, 1973년 1월호, 46-47쪽 5) 당시 한 잡지의 다른 기사에 따르면 1972년 11월 14일 현재 시점에서 1971년 이월쿼터 73편 중 63편이 검열을 끝냈고, 72년도의 경우 93편이 제작신고 된 가운데 29편이 검열을 필했다. “72년도 국산영화 개황, 「건전」 「우수」로 경향 바꿔져”, 영화진흥조합, 『코리아시네마』, 1972년 12월호, 39쪽 6) 앞의 기사, 39쪽 7) “뉴스토픽, 「문화유신」을 다짐, 연예계 인사 간담회에서, 예륜 18항의 새 심의기준 발표”, 영화진흥조합, 『코리아시네마』, 1972년 12월호, 57쪽 8) “배급협회 발족: 영화계 숙원인 배급 일원화 위해”,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7월호, 73쪽 9) “[알아둡시다] 영화배급에 관한 행정지침을 시달”,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8월호, 67쪽 10) 이하 영화시책 내용은 “영화시책”, 영화진흥공사 편, 『한국영화자료편람』, 1977, 225-227쪽 참고
여성코미디언 약사(略史) 1 – 박옥초와 백금녀
1950년대 후반 <청춘쌍곡선>(한형모, 1957)과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7)로 포문을 연 한국의 코미디영화는 본격적인 장르로 형성되면서 196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가 제작되었고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청춘쌍곡선>을 시작으로, 악극단 코미디 배우들을 주연으로 기용한 <오부자>(권영순, 1958), <사람팔자 알 수 없다>(김화랑, 1958),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 등의 코미디언코미디 1) 가 1950년대 후반 코미디 영화의 주류를 형성했다면,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7)과 <흥부와 놀부>(김화랑, 1959), <탈선 춘향전>(이경춘, 1960) 등 시대극을 표방한 코미디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등의 산뜻한 로맨틱 코미디도 관객들을 찾아갔다. 1960년대 초에는 가족드라마가 주요 장르로 등장하여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 <삼등과장>(이봉래, 1961) 등의 가족희극드라마가 다수 제작되었는가 하면, 1960년대 중반 유행했던 청춘드라마의 영향으로 <총각김치>(장일호, 1964),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 <말띠 신부>(김기덕, 1966) 등의 청춘코미디가 한동안 코미디 시장을 휩쓸기도 했다. 한편,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는 서영춘, 구봉서를 투 톱으로 하는 코미디언 코미디가 다시 주류를 형성하면서, 구봉서 주연의 <남자식모>(심우섭, 1968),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 <남자기생>(심우섭, 1969) 등의 남자 시리즈와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 <팔푼며느리>(심우섭, 1968), <팔푼이 부부>(심우섭, 1969) 등의 팔푼이 시리즈, 서영춘의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운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 <살살이 몰랐지?>(김화랑, 1966),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 등이 끊임없이 제작되었다. 요컨대, 195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코미디영화는 1970년대 초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코미디영화의 제작 비율은 연평균 12%에 이르렀다. 2) 코미디영화는 한국영화 시장에서 멜로드라마에 이어 지속적으로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주요 장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코미디영화, 그 중에서도 특히 코미디언코미디에서 주연을 맡았던 이들을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스타덤에 올랐던 ‘홀쭉이와 뚱뚱이’ 양석천(1921~1990)과 양훈(1923~1998)에서 김희갑(1923~1993), 구봉서(1926~2016), 서영춘(1928~1986), 배삼룡(1926~2010)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 남성 코미디언들만으로 명단이 완성된다. 같은 시기, 이들에 못지않게 활발하게 활동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의 존재는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거나 이야기되지 못했다. 그러나 신불출의 유일한 여성 제자이자 인정받는 만담가로서 신불출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던 김윤심(1914~1997)을 시작으로, 수많은 여성 코미디언들의 활약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윤심은 한국 최초의 여성 코미디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쇼 무대의 인기 출연자였다. 김윤심의 활약이 만담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박옥초부터는 본격적으로 영화에서 활동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박옥초(1920-1984)는 전방위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여성 코미디언의 입지를 다진 인물로 볼 수 있다. 소녀가극단 낭낭좌에서 데뷔한 이래 남성 역을 도맡아 여성관객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박옥초는 코미디로 연기 영역을 넓힌 뒤 1950-60년대에는 악극단과 쇼 무대, 영화와 라디오, TV까지 각종 매체를 넘나들며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그는 이 시기 영화에서도 중요하게 활약했던 유일한 여성 코미디언으로 약 70여 편의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박옥초의 첫 영화출연은 안종화 감독의 영화 <수우>(1948)였다. <수우>는 알려진 바대로 ‘경찰정책영화’였는데, 김소영, 전택이, 신카나리아, 서월영 등이 주요 출연자로 박옥초는 이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두 번째 영화는 6.25전쟁 이후, 한국영화가 새롭게 발돋움하던 시기에 제작된 1956년 영화 <애정파도>(문화성)였다. (그림1) <애정파도>(문화성, 1956) 포스터. 오른쪽 위 전옥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고, 왼쪽 아래는 이예성과 안나영, 오른쪽 맨 아래 수영복 차림의 박옥초와 구봉서가 코믹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예성과 안나영, 전옥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애정파도>는 구봉서의 데뷔작이기도 했는데, 이 영화에서 박옥초는 구봉서와 콤비로 재미있는 장면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스터의 오른쪽 아래에 등장한 수영복 차림의 두 사람이 코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이 급증하던 이 시기에, 박옥초의 영화 출연도 한층 활발해졌다. 박옥초는 이 시기에만 총 11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이 시기에 유행했던 코미디영화였다. <봉이 김선달>(한홍열, 1957), <공처가>(김수용, 1958),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 등에서 박옥초는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조연 및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림2)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의 한장면. 박옥초는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정혜선)의 집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아낙으로 등장했다. 박옥초는 빠른 템포로 수다를 늘어놓으며, 특유의 표정 연기와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말솜씨로 웃음을 자아냈다. (그림3)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박옥초는 죽음 이후 다른 사람으로 빙의된 주인(구봉서)이 유령인 것 같다고 하며 호들갑을 떠는 식모로 등장하여 짧은 순간에 웃음을 자아내는 신 스틸러였다. 이처럼 조연이나 단역으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코믹한 순간의 웃음을 담당했던 박옥초의 경력은 196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미 악극단과 쇼 무대의 유명한 배우였던 박옥초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출연자였으며, 웃음을 유발하는 자신만의 장기를 가진 코미디언이었다. 1960년대에는 코미디영화뿐 아니라 사극, 멜로드라마, 문예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 안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했다. (그림4)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장면 기생점고에 나타난 나이든 기생 박옥초를 변사또 이예춘이 타박하는 장면이다. 박옥초의 표정연기가 돋보인다. 이 장면은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중 변학도(이예춘)가 남원에 부임하여 기생들을 불러 모아 점고를 하는 씬이다. 맨 끝에 서 있던 기생 박옥초를 발견한 변학도가 몇 살이냐고 묻자 천연덕스럽게 “열여섯이옵니다”이라고 대답하며 교태를 부리다가, 타박을 받고 돌아서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가 하면, <민며느리>(최은희, 1965)에서는 무당으로 등장하여 강한 존재감을 발휘했고,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에서는 곽규석과 함께 미국 유학을 다녀와 허세를 부리는 박사 부부로 출연하여 이 진지한 영화에서 단 한 번 웃음을 유발하는 씬을 구성하기도 했다. (그림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의 한 장면. 미국 유학을 다녀온 박사 부부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 오른쪽부터 신성일, 백일섭. 박옥초와 곽규석이 출연했다. 드물게 허위의식에 가득 찬 상류층으로 등장했던 <장군의 수염>과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박옥초가 영화 속에서 맡은 역할들은 주로 식모, 동네 아낙, 무당 등 하층계급의 여성들이었다. 주인공이 아닌 여성, 그 중에서도 젊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중년의 여성이 당시 한국영화 속에서 맡을 수 있었던 캐릭터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박옥초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을 이런 역할들로 채워갔다. 그럼에도 박옥초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모으고 웃음을 유발하는 개성 있는 배우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성 코미디언이었다. (그림6)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의 한장면. 박옥초는 코미디영화 제작이 드물었던 1970년대에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던 톱스타 코미디언 이주일의 출세기를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박옥초가 출연했던 마지막 코미디영화이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김수형 감독의 1981년작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로, 박옥초는 이 영화에 이르기까지 70여 편의 영화를 남겼다. 박옥초는 심우섭, 이형표, 김화랑 등 주요 코미디 감독들의 코미디 영화 및 신상옥, 최은희, 이성구 감독 등의 다양한 장르 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하는 씬 스틸러로 출연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로 기억될 만하다. 박옥초가 주로 조연배우로, 다작을 한 경우였다면 백금녀는 여성 코미디언으로 드물게 주연작을 가진 배우였다. 백금녀(1931-1995)는 김정분이라는 본명으로 부산 지역 악극단에서 데뷔한 뒤, 서울중앙방송 성우 제1기로 본격적인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청춘극장과 황금좌 등의 악극단에서도 활동했는데 1950년대 후반 서영춘과 콤비를 이루면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갈비씨와 뚱순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서영춘과 백금녀는 쇼 무대와 라디오에서 큰 활약을 했다. 백금녀는 여기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계에도 진출, <공처가>(김수용, 1958)로 데뷔했다. 또, 1964년에는 박노식과 함께 악극 재건을 목표로 ‘11인 백합회’를 결성하여 부회장직을 맡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백금녀는 1960년대 중반에 여성 코미디언으로는 유일하게 고소득 연예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데뷔작 <공처가>에서 백금녀는 장소팔과 부부로 등장하여 곰탕집을 운영하는 여걸 역할을 맡았다. 장소팔은 당시 악극단과 라디오 만담을 통해 전국적인 스타 만담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장소팔의 ‘대화만담’ 파트너였던 고춘자나 고백화가 아니라, 백금녀가 상대역으로 등장한 것은 이채로운 일이라 할 만하다. 아마도 백금녀가 ‘공처가’의 부인이라는 컨셉에 더 적합한 유형의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연기력을 인정받은 신인 배우 백금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캐스팅이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림7)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장소팔의 등에 업힌 백금녀가 포스터 전면에 위치하여, 이 영화의 코믹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백금녀라는 예명은 이 영화의 감독이었던 김수용이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김정분에게 ‘하얗고 돈 많은 여자’가 되라고 지어준 것이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백금녀가 다시 주연 배우로 등장한 영화는 <남자는 싫어>(안면희, 1967)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코미디언들을 주연으로 하는 영화들의 제작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초까지도 지속되었는데 여성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남자는 싫어> 단 한 편이었다. (그림8) <남자는 싫어>(안면희, 1967) 포스터. 이 영화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백금녀가 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면서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되찾게 되는 이야기를 다뤘다. 960년대 여성 코미디언을 단독 주연으로 삼아 제작된 유일한 영화이기도 했다. 이 영화는 백금녀 코미디의 가능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여성 코미디 배우들이 영화에서 소비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의미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영화의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포스터, 시나리오, 개작 전의 원작 시놉시스, 백금녀-서영춘 만담 레코드 등이 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어 대략적인 내용은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림9) <서영춘과 백금녀, 폭소가요 코메듸- 갈비씨와 뚱순이의 애정행진곡> 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서영춘-백금녀 만담 레코드의 표지. 이들 콤비 코미디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삽화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백금녀는 1960년대 초반에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스타 코미디언이자 중견 악극 배우였다. 이 같은 백금녀의 스타성을 십분 활용하고자 했던 <남자는 싫어>는 기획부터 개작까지, 백금녀를 통한 웃음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였다. 애초에는 서영춘과 백금녀 콤비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거꾸로 부부’를 차용한 ‘역할전도 부부 코미디’를 보여주고자 하였으나 검열에 의해 전면 개작을 하게 되면서 이 영화가 택한 두 번째 길은 백금녀를 내세워 그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를 만드는 것이었다. 1960년대 후반 코미디언코미디가 다시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시점에서 여성 코미디언 중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백금녀를 단독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기획은 일견 참신하고 새로운 것이었다. 개작된 <남자는 싫어>에서 백금녀가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백금녀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 웃음거리로 만드는 방식이다. 즉, 백금녀를 희생양으로 삼아 (남성) 공동체에서 배제하면서 배타적인 웃음을 만드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백금녀가 자신의 스타 페르소나와 레퍼토리를 활용하여 적극적인 웃음의 유발자로 존재하는 경우이다. 이미 잘 알려진 자신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스타 코미디언으로서의 장기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코미디언코미디의 특징이기도 하다. 첫 번째 방식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것은 백금녀의 몸을 희화화하고 객체화하는 여타 인물들에 의한 것으로, 이들에 의해 가학적이고 공격적인 웃음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웃음은 사회적 전형화typification의 하나로, 남성들만의 세계all-male-world에서 여성들을 배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기도 하다. 4) 따라서 그의 신체가 웃음거리가 되는 동안 백금녀 자신은 코믹 행위의 주체이거나 능동적인 주어가 아니다. 즉, 영화 속에서 백금녀는 유머의 주체로 기능하거나 유머를 적극적으로 주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함’으로 인하여, 남성중심적 시선에 의해 ‘비정상적인 신체’로 규정됨으로 인하여, 웃음을 유발하는 객체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금녀의 코미디성이 보다 잘 드러나는 것은 두 번째 범주에서이다. 즉, 기존의 퍼포먼스와 스타 페르소나를 활용한 코미디를 선보일 때, 백금녀는 능동적 주어로 활약한다. 성량이 풍부한 가수인 백금녀의 화려한 노래와 코믹한 춤 솜씨를 볼거리로 제시하는 장면, 서영춘과 함께 ‘거꾸로 부부’와 같은 남녀 역할 전도의 코미디를 선보이는 장면, 여성 레슬러로 활약하는 장면 등은 백금녀 코미디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특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림10)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 1965) 포스터 이 영화는 서영춘의 출세기를 다룬 것으로, 주연 서영춘(왼쪽)과 함께 스타 배우였던 김희갑(오른쪽)이 포스터에 비중있게 등장한다. 이들 사이에 있는 것은 서영춘과 사랑하는 사이로 등장하는 강문, 그 아래 서영춘을 제압한 백금녀의 모습이 보인다. 특히 <출세해서 남주나>와 같이 서영춘과 함께 출연하는 코미디영화에서는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가 만들어졌다. 첫 번째 범주에서 금순의 신체가 ‘비정상적’이므로 배제되어야 하는 것, 그로테스크하고 혐오스러운 ‘비체abject’로 여겨져 왔다면, 레슬링 장면 등을 통해서 금순의 신체는 ‘단련된 스포츠’의 신체이면서 동시에 ‘요절복통할 폭소’를 유발하는 슬랩스틱의 신체로 새롭게 의미화된다. 특히 레슬링 복장을 하고 신체를 당당히 드러내는 장면은 남성들이 부과한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을 깨뜨리는 것이며, 이는 훨씬 더 풍성하고 더 문제적인 신체의 가능성’들’의 범주를 보여주는 것 5) 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백금녀의 ‘신체’는 배제와 폭력을 통해 규정되는 ‘대상’ 혹은 ‘비체’의 경계를 넘어, 주체됨을 통해 웃음을 만드는 ‘여성 코미디’의 신체로 독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백금녀가 주연으로 등장한 마지막 영화는 <정따라 웃음따라>(이민욱, 1972)이다. 이 영화는 화재로 전소한 고아원의 원장으로 등장한 백금녀는 김희갑과 함께 감동적인 고아원 재건 스토리를 그렸다.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와 <팔도강산>(배석인, 1967)의 또 다른 버전으로 보이는 이 영화에서, 백금녀와 김희갑은 고아원 출신 청년들을 찾아 전국을 다니며, 고아원 재건 비용을 마련한다. 백금녀는 한편으로는 김희갑의 코미디를 보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힘으로 사기꾼을 제압하는 등의 모습을 통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림11) <정따라 웃음따라>(이민욱, 1972)의 한장면 고아원 원장 역의 백금녀와 고아원 운영을 돕는 김주사 역의 김희갑. 이들은 고아원을 재건하기 위해 고아원 출신 청년들을 찾아다니며 재건 자금을 마련하고자 한다. 전국을 여행하며 자녀들을 만나는 김희갑 부부가 출연하는 영화 <팔도강산>와 같은 계열의 영화로 볼 수 있다. 그밖에 영화에서 백금녀의 활발한 활약상은 다음과 같은 영화들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그림12)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백금녀는 코미디영화가 아닌 여타 드라마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하는 배우였다. (그림13) <신세 좀 지자구요>(임권택, 1969)에서 백금녀는 ‘파이 던지기’라는 고전적 코미디의 한 장면을 차용한 레스토랑 신에 등장했다. (그림 14) <팔도노랭이>(심우섭, 1970) 포스터 <팔도노랭이>는 팔도의 구두쇠들을 사위로 삼은 김희갑의 이야기. 가운데 김희갑이 보이고,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는 딸로 등장한 백금녀는 오른쪽 맨 아래. (그림15)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의 한 장면. 왼쪽 붉은 원피스 차림으로 춤추는 백금녀. 왼쪽 끝이 김희자, 백금녀의 오른쪽 옆이 양석천, 갓 쓴 할아버지 역의 김정훈, 그 오른쪽으로 검은 양복 차림의 허장강과 흰 재킷에 권색 바지 차림의 배삼룡이 보인다. 1) 코미디언코미디는 이미 잘 알려진 스타 코미디언의 개성과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워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들을 일컫는 장르 명칭으로, 미국의 코미디 영화 연구자 스티브 사이드만이 발전시킨 개념이다. Steve Seidman, Comedian Comedy-A Tradition in Hollywood Film, UMI Research Press, 1981 참고. 한국의 코미디언코미디는 기존 악극단 코미디 배우들의 스타성과 레퍼토리, 퍼포먼스 등을 전시하면서, 1950년대 한국영화의 중흥기에 영향력 있는 장르로 형성되었다. 한국의 코미디언코미디 형성과 전개에 대해서는 박선영, 「한국 코미디영화 형성과정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1 참고. 2) 영화진흥공사 편, 『한국영화자료편람 초창기~1976』, 영화진흥공사, 1977, 46~48쪽의 “국산극영화 내용별 제작실황”을 기준으로 계산한 수치이다. 이 수치는 멜로드라마가 거의 60-70%를 차지했던 상황에서 결코 작지 않은 비율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연예인고액납세”, 『중앙일보』 1966.8.5.3쪽; “늘어가는 스타의 자가용차”, 『서울신문』, 1966.9.17.5쪽; “납세액으로 본 인기 바로미터”, 『조선일보』 1967.3.26.5쪽. 백금녀는 1965년 연예인 고액납세자 중 가수 분야 3위로, 이미자, 박재란의 뒤를 잇고 있으며, 자가용 승용차를 가진 코메디언 4인(구봉서, 김희갑, 후라이보이, 백금녀) 중 한 사람이었다. 또, 1966년에도 가수 중 8위로 링크되어 고액납세자의 명단에 올랐다. 4) Helga Kotthoff, “Gender and Humor: The State of the Art”, Journal of Pragmatics 38(1), 2006, p.12. 5) Andrew Stott, Comedy, Routledge, 2005,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