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전선
- 감독
- 김홍
- 제작년도
- 1955
- 출연
- 배석인, 주증녀, 조항, 임운학, 노재신, W.H.싸이몬드, A.피네, D.F.윌리암쓰, 독우영, 이재이, 구종석, 이해연, 이두영, 김윤섭, 김서원, 김정열, 박영식, 서정선, 윤충열, 이일, 김선경, 이세원, 김해수, 장찬길, 이경식, 안진기, 김진숙, 김명원, 김용성, 박%규, 권연수, 김병윤, 박용포
[사진] 영화 <물망초>에서 주증녀 남편 유지 이은 <조국의 어머니> 주증녀는 1950년대를 눈앞에 둔 1949년 3월 윤대룡 감독의 <조국의 어머니>로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이 일본 헌병에 체포돼 모진 고문으로 죽자 아내가 그 유지를 이어 싸우다가 광복을 맞게 되는, 이른바 이 시기의 특징인 항일 영화이다. 잇따라 황정순, 주선태, 황해, 최남현, 이민 등 신인이 몇 달 사이에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이름을 알린 주증녀는 16밀리로 찍은 최초의 천연색 극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 이어 <여인애사>(신경균, 1950), <흥부와 놀부><이경선, 1950) 두 편에 출연한다. [사진] <여성일기> 현장 사진(앞열 왼쪽이 주증녀, 오른쪽이 황정순) 하지만 6.25 전란 후 주증녀가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전쟁으로 헤어졌던 연인이 재회하는 김성민 감독의 <애원(哀怨)의 향토>(1954)부터였다. 잇따라 <자유전선>(김홍, 1955), <인생역마차>(김성민, 1956), <애인>(홍성기, 1956), <처와 애인>(김성민, 1957),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 <청실홍실>(정일택, 1957), <인생화보>(이창근, 1957), <별아 내가슴에>(홍성기, 1958), <실낙원의 별 후편)(홍성기, 1958), <모녀>(최훈, 1958),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1958), <마도의 향불>(신경균, 1958) 등 11편에 기용된다. 대부분이 당시 작고한 김내성의 「애인」, 「실낙원의 별」 류의 인기 통속소설과 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었다. [사진] <실낙원의 별> 스틸 사진(중앙이 노경희, 우측이 김동원) ‘국산 갱스터 ’(「영화주평」. 『한국일보』, 1956.09.16) 를 지향한 <인생역마차>는 신문기자와 암흑가의 두목(이향, 1인2역) 사이에서 사랑을 선택해야 하는 비운의 여성을 보여 주는가 하면, <처와 애인>에서는 월남한 남편의 외면 속에 참고 견뎌야 하는 실향민의 비애를, <실낙원의 별>과 <실낙원의 별 후편>에서는 애독자(노경희)와 사랑에 빠진 인기 작가 아내(옥영)의 좌절과 반전의 삶을, <청실홍실>과 <별만이 아는 비밀>에서는 전쟁미망인과 딸의 행복을 위해 참고 견디는 애틋한 모성애를 각기 표출해 낸다. 주증녀는 특히 <실낙원의 별>의 호연으로 보다 더 좋은 의미의 대중성을 갖게 되었다. (유동준, 「영화로 보는 실낙원의 별」, 『경향신문』, 1957.09.28.). [사진] <청실홍실>의 한 장면, 좌측은 영화배우 엄앵란(사진제공 김종원) 그 이후 <낭만열차>(박상호, 1959),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송국, 1959), <아내>(김묵, 1959) 등 주로 여성 멜로물에 출연했으나 자신이 제작한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기획 허영)의 흥행 실패와 잇따른 언론계 종사자와의 스캔들로 인해 이미지에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고려장>(1963)에 이어 김수용 감독의 <만선>(1967)과 <산불>(1967) 등 1960년대의 출연작에 이르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상투적인 내용과 도식적인 인물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작품 선택에 변화가 온 것이다. 재봉틀 일로 가계를 도우며 두 자녀와 가정부의 유혹에 빠진 남편(김진규)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하녀>의 아내, 잘못된 효행의 악습에 따라 산채로 버려져야할 운명에 처한 <고려장>의 할머니, 바다에 나간 두 아들을 잃고, 실성해버린 <만선>의 어머니(곰치 아내), 마을에 숨어들어온 인민군 탈영자를 사이에 두고 다른 과부와 성적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 <산불>의 과부 점례 등 다양한 캐릭터가 그런 예이다. 이 같은 질적 성취는 결국 제5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과 제11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 그리고 제6회 대종상 여우조연상(만선) 등 세 개의 큰 상을 받게 되는 경사로 나타난다. [사진] <하녀>의 한 장면 [사진] <고려장>의 한 장면 여덟 살 연극소녀에서 은막의 유망주로 강렬한 눈매와 우수의 그늘을 드리운 독특한 마스크로 팬들에게 사랑받은 주증녀는 1925년 2월10일 함경남도 영흥군 엄기면 덕하리에서 태어났다. 부농의 무남독녀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함남여고를 졸업하자 동경하던 극단 고협(高協)에 들어갔다. 1943년 열여덟 살 때였다. 그녀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무영탑>(연출 유치진)의 단역인 시녀 구슬아기 역이었다. 이후 <청춘의 윤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다졌다. 이 무렵 그녀는 극단 예원좌(藝苑座)에서 고협(高協)으로 옮겨온 배우 허영(許影)과 눈이 맞아 혼인하고, 대건사(大建社)의 직속극단 청탑(1946년 11월23일~)의 첫 연극 <보검>(3막4장)에 김승호, 허영 등과 함께 출연했다. (『자유신문』, 1946.11,09) 조용하고 섬세하면서도 선이 뚜렷한 그녀의 연기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런 그의 재능은 얼마 못가 새 얼굴을 찾는 윤대룡 감독에 의해 발견된다. 허영 외에 손전과 권일천이 공연한 <조국의 어머니>였다. [사진] <만선>의 한 장면(사진제공 김종원) 이렇게 은막에 진출한 주증녀는 1950년대까지 ‘잘 나가는 배우’로, 60년대 이후에는 ‘연기파 배우’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그 사이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허영과 헤어지고 가십에 오르내리던 언론계 종사자 윤호중과 재혼한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초반부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상적인 연기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1974년 검객영화 <철면객>(이형표, 장청천)에 출연할 무렵이었다. 종합 진단 결과 뇌종양이었다. 수술을 포기한 채 스스로 육체를 갉아먹는 고통 속에서 약물 치료만 계속했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열일곱 살 큰 딸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추석이 며칠 안 남았구나. 추석빔을 마련해야 할 텐데…” 유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주증녀는 1980년 9월18일 동트는 새벽 6시30분 남편과 1남 1녀, 정들여 가꾼 정원의 나무와 마지막 작품 <청색시대>(1976, 정인엽) 등 3백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25년에 이르는 연기생활을 마쳤다. 당시 56세였다. “예술인마을에 정착한지 벌써 5년이 돼간다. 시골도 아닌 서울의 주택가에 무슨 마을이냐고 하겠지만 기실 이 마을이란 어휘에 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정감과 향수를 느끼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어쩌면 유일한 안식처가 될지도 모르는 이곳 예술인마을- 이름처럼 황토색 짙은 옛날의 마을은 아닐지라도 서울에서 유일한 ‘마을’이라는 희소가치가 있다.” 이는 주증녀가 뇌종양을 앓을 무렵 영화진흥공사 발행 월간 《영화》(1974년 5월호)에 발표한 수필 「예술인마을 우거기(寓居記)」의 한 대목이다. *
1980년대 한국영화 제작 자유화 이전 다큐멘터리와 교육영화, 뉴스영화 등 논픽션 영화를 통칭하는 용어였던 ‘문화영화’는 그 자체로 약간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였다. 그 이유의 첫 번째는 ‘문화인이 되도록 교육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영화감상보다는 교양교육의 일환으로 여겨졌던 까닭이고, 두 번째는 정부 주도로 제작된 영화들이 대부분인 탓에 감독과 제작자의 순수한 의도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정치적 목적’이 더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극영화 상영 전 ‘무조건’ 상영되는 형태 때문에 ‘강제적’으로 영화를 봐야했고, 이러한 관람형태는 영화관람 전 이미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문화영화에 대한 평가 역시 미학적 완성도보다는 정치적 목적성에 맞춰진 경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수천 편 만들어진 문화영화에서 교육적, 정치적 의도만이 담겨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문화영화들 중에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따뜻한 한국인의 심성을 그려내며 상처를 어루만지고 함께 발맞추어 살아가길 기대하는 영화들이 있다. 그리고 그 영화들을 만든 감독 중에 배석인 감독이 있다. 소년, 영어를 통해 세상에 눈을 뜨다 배석인 감독은 일제강점기가 한창인 1929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귀한 3대 독자인 아들의 교육을 위해 조금 더 큰 도시였던 김해로 이사를 갔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탓에 배석인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에 참석하였다. 이를 눈여겨 본 젊은 목사님은 그에게 영어로 된 성경 한 권을 선물하고, 자신과 함께 영어로 성경공부를 할 것을 제안한다. 현재 8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를 영어로 줄줄 외우고 있을 정도로 그 시절 영어공부는 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조금씩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영어 단어와 문장은 단순히 번역을 넘어 언어를 해석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또한 성경을 통해 접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지속적인 성찰을 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일본인 선생님의 어이없는 발음과 영어 실력에 실망한 그는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구입해 혼자 영어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과 함께 해방을 맞이하고, 1946년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한다. 이때는 미군정 시기로 많은 미군들이 부산에 상주해 있었고, 영어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한 그는 대학 재학 중 야간학교와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주한미군 정보기관 요원에서 영화 <자유전선>의 주인공이 되다 배석인 감독이 대학을 졸업한 1951년 한국은 동족상잔의 전쟁 중이었다. 전투의 현장을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피난민과 가난 등 전쟁의 상처는 그가 살고 있는 부산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주한미군정보기관에 지원하여 정보사령관의 한국담당 정보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한국말을 모르는 정보사령관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한국의 여러 상황을 알려주고 조언을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국제교류의 중요성을 깨닫고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미국 시라큐스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고, 출국을 기다리던 중 부산 광복동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김홍 감독이었다. 훤칠한 외모에 미군복을 입고 있던 그에게 김홍 감독은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에 고마움을 표하는 영화 <자유전선>을 제작할 예정인데,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영화배우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배석인 감독은 거절하였지만, 김홍 감독은 한 달여 동안 그를 설득하고 결국 출연을 수락하게 된다. [사진 1] 영화 <자유전선>의 북에서 내려온 창환(조항)과 논쟁하는 성호(배석인). 오른쪽부터 배석인, 조항, 주증녀 영화의 배경이 된 한국전쟁의 참혹함 못지않게 당시 한국의 영화촬영 현장은 맨주먹밥에 소금물로 끼니를 때우고 거적을 깔고 잠을 청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다. 하지만 주증녀, 황해, 조항 등 선배들과 함께 1년여 간 이어진 촬영 속에서 영화에 대한 매력과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점을 느끼게 된다. [사진 2] 영화 <자유전선>에서 브라운 대위를 구하는 육군 중대장 성호(배석인) 이 영화는 전쟁이 끝난 1955년 서울 시공관에서 개봉하였는데, 러시아와 미국의 격전장이 된 한반도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UN군과 국군의 우정을 그린 영화로 전쟁의 참혹함보다는 우방과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 것에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배석인 감독은 이후 여러 영화에서 섭외요청을 받았다. [사진 3] 영화 <자유전선>의 홍보전단지 USIS를 거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다 유학과 영화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던 배석인 감독에게 영어교사로 일할 때부터 친분이 있던 미국공보원(USIS,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원장은 ‘교사는 자신의 생각을 칠판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고, 감독은 영상에 담아 전달하는 것’이라면서 USIS 영화과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의한다. 평소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것에 관심이 많던 그는 부모님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것보다는 부모님 옆에서 꿈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에 USIS에서의 근무를 택한다. 그곳의 라이브러리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보았고, 동시녹음 카메라, 편집기 등을 통해 영화적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마산일보》를 배경으로 지방 독립지가 제작되는 과정을 담은 <지방신문편집자>(1958)라는 문화영화를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USIS에서 일한 지 3년째가 되던 1958년, 국립영화제작소로 자리를 옮긴다. 국립영화제작소는 1957년 중앙청 내에 건물을 새로 지어 세트장, 현상소, 녹음실 등을 갖추고, 본격적인 문화영화제작을 하고자 여러 인재들을 영입하던 중이었다. 배석인 감독은 미국의 시각보다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고, 상대적으로 국가의 지시나 통제에서 자유로운 ‘촉탁’으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촉탁은 과장, 계장 등의 직급이 없는 대신 경력을 인정받아 자신이 제작하고자 하는 작품의 기획안을 올려 통과가 되면 예산과 장비, 인력 등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면 되는 자리였다. 의무적으로 뉴스영화나 홍보영화를 찍을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옮겨간 국립영화제작소의 상황은 듣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영화 관련 장비를 갖추었다고 하였지만, USIS에 비하면 장비의 수준이 낮았고, 장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기술진이 없었다. 영화 관련 용어들도 일본어와 영어, 한국어가 혼재되어 있어 서로 소통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배석인 감독은 먼저 영화 인력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영어로 된 영화사전을 번역하여 직원들에게 나누어주어 익히도록 하였고, 미국 시라큐스에서 파견된 영화교육단의 통역을 맡아 영화에 대한 지식과 기술들을 전달하였다. 시라큐스의 교육으로만은 부족하다고 느낄 때면 따로 직원들을 모아놓고 영화기술에 대해 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사진 4] 국립영화제작소 로고 [사진 5] 중앙청 내에 위한 국립영화제작소 건물. 오른쪽에서 6번째에 서 있는 사람이 배석인 감독 (출처: 국가기록원)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나고, 혼란스러웠던 당시 중앙청에서 몸을 피해 어느 화장실로 숨었다가 신문 한 장을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 쓰여 있던 것이 노산 이은상 선생의 기행문 『피어린 600리』 였다. 끝없이 철썩거리는 동해의 물결! 백사장(白沙場)가에 박아 놓은 철조망의 마지막 쇠말뚝을 붙드는 순간, 나는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래, 이것이 피어린 휴전선의 마지막 철조망, 마지막 쇠말뚝이냐! 그래, 내가 이 마지막 쇠말뚝 하나 잡아 보려고 600리를 허위허위 달려왔더냐. 길이 끝났네, 더 못 간다네. 병정은 총 들고 앞길을 막네. 저리 비키오. 말뚝을 뽑고 이대로 북으로 더 가야겠소. 바닷가 모래 위에 주저 앉아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 - 노산 이은상의 기행문 『피어린 600리』 중에서 이은상 선생이 휴전선의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600리 길을 걸으며 보았던 분단의 비극, 만나지 못하는 아픔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기행문을 참고하여 직접 나레이션을 쓰고 DMZ 지역까지 들어가 촬영한 끝에 17분짜리 문화영화 <피어린 600리>(1962) 1 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1963년 제2회 대종상 문화영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비극부문과 제13회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배석인 감독에게는 출품과 수상이라는 공적인 지표보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더 큰 기쁨이었다. [사진 6] 영화 <피어린 600리> 한반도에 그어진 38선의 이미지 [사진 7] 영화 <피어린 600리> 철로가 끊어진 채 더 이상 올라 갈 수 없는 금화지구 [사진 8] 영화 <피어린 600리> 금화지구 내 폐허 속에 방치된 부서진 열차 [사진 9] 영화 <피어린 600리> 600리의 마지막 동쪽 끝 해안에 위치한 철조망 이후에도 배석인 감독은 대중들의 감성에 말을 거는 영화를 많이 만드는데, 그 중에서 <새길>(1962) 2 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전쟁 고아들의 비행과 일탈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던 시대에 그들이 일탈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적 문제와 어른들의 책임을 묻고, 비록 죄를 지었지만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를 다룬 세미다큐멘터리였다. 실제 구두닦이 소년을 캐스팅하여 실감나게 연출한 덕분인지, 이 영화가 전국적으로 상영되었을 때, 영화를 본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 소년을 실제 범죄자라 착각하여 범죄자가 된 소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소년을 마을에서 쫓아낸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새길>은 궁극적으로 당시 문제아 혹은 범죄자로 터부시되던 전쟁고아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포용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과 극영화의 연출 기법을 차용하여 3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지루하지 않게 한 소년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다. [사진 10] 영화 <새길> 판사 역할로 출연한 배석인 감독 [사진 11] 영화 <새길> 실형을 선고 받는 광민 [사진 12] 영화 <새길> 감옥에 들어온 광민을 쇠창살 너머에서 보여주는 장면 [사진 13] 영화 <새길> 즐거운 위문공연 장면을 통해 소년원 수감자들도 행복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 한국을 알리고 싶은 노력의 결과물 <팔도강산>(1967) 배석인 감독은 1964년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배우 김희갑과 함께 미국의 영화촬영 현장을 견학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 미국 남가주 대학에서 특강을 하게 되는데, ‘6.25전쟁’은 알지만 ‘대한민국’은 모르는 미국 학생들과, 텍사스 도서관 내 한국관에 자료가 없어 텅텅 비어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 충격은 배석인 감독을 다큐멘터리스트로 새롭게 자각하게 만들었다. 아직은 열악한 한국영화산업 환경에서 극영화로 세계무대에 진출하자고만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한국을 알릴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기반을 튼튼히 닦아 놓는 것이 먼저이고 자신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독일과 스페인을 거쳐 한국에 돌아온 그는 사비를 털어 책을 구입하여 텍사스 도서관에 한국관련 서적들을 비치하였고, 스페인에서 영화 시작 전 국가를 트는 것을 본 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촬영한 영상과 함께 국도극장에서 처음 영화상영 전 애국가를 틀었다. 난데없는 애국가에 관객들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한두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애국가를 제창하던 그날의 기억을 그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이어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작업에 착수한다. 그것은 극영화 <팔도강산>(1967)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는 경제 개발과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은 커녕 자신의 거주지 주변을 벗어나보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직접 가서 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구석구석 아름다운 모습을 영화로라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고, 한 달여 간의 밤샘 작업을 통해 <팔도강산>의 초고 시나리오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극작가 신봉승에게 각색을 부탁하여 몇 개의 씬을 추가하고, 김희갑, 황정순을 비롯하여 최은희, 김진규, 김승호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캐스팅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서울에서만 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고, 다른 감독들에 의해 속편도 제작되었다. <팔도 기생>(김효천, 1968), <팔도 사나이>(김효천, 1969) 등의 아류작도 쏟아져 나왔다. [사진 14] <팔도강산>(1967)의 개봉극장인 국도극장 앞에 모인 사람들(출처: 국가기록원) [사진 15] <팔도강산>(1967)의 포스터 [사진 16] <팔도강산>(1967) 사돈(김승호)의 안내에 따라 속리산 법주사를 구경하는 김희갑과 황정순의 모습.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장면 중에 하나이다. [사진 17] <팔도강산>(1967) 사위(김진규)의 안내에 따라 삼천리 시멘트 공장을 구경하는 김희갑과 황정순. 우리나라의 큰 공장과 발전된 산업을 보고 놀라는 황정순의 표정이 재미있다. [사진 18] <팔도강산>(1967) 비행기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김희갑에게 “이륙 시에는 답배를 피울 수 없다”고 안내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TV 다큐멘터리 제작과 63빌딩의 아이맥스 영화관 설립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꼭 10년을 보낸 1968년, 배석인 감독은 국립영화제작소를 나와 홀로서기에 나선다. 1971년 영화제작자이자 평론가인 호현찬과 함께 한국문화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한국의 美> 등 TV용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KBS에 납품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수익성은 매우 낮았고, 회사는 1년만에 문을 닫게 된다. 이후 배석인 감독은 독자적으로 배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프랑스에서 『직지심경』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우리의 출판문화를 알리는 영화 <한국의 출판문화>(1972)를 제작하여 세계도서 엑스포에서 상영하였다. 또한 <게릴라전>, <화생방교육> 등 신병들을 대상으로 한 군교육 영화도 제작하였는데, 당시 시도되기 시작했던 셀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하여 실사영화보다 더 많은 제작비를 들여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렇게 수익성이 없음에도 사재를 털어서까지 문화영화에 매진했던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우리 문화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은 마음, 국경을 넘어 해외에 한국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늘 경제적인 이득보다 앞에 있었다. 또한, 언제 실전에 투입될지도 모르는 군인들에게 시뮬레이션을 통해서라도 전술을 완벽하게 체험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그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끌었다. 1984년 국내 굴지의 기업이었던 대한생명은 우리나라 최고층 건물인 63빌딩을 건설하면서 이 건물 내부에 우리나라의 첫 아이맥스 영화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총책임자로 배석인 감독에게 스카웃 제의를 한다. 늘 새로운 분야의 도전에 주저함이 없었던 그는 곧 문화영화사를 정리하고 아이맥스의 본고장인 캐나다로 떠나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돌아와 만든 영화가 <아름다운 대한민국 Dance of the East>(1986)이었다. 20여 년전 <팔도강산>을 촬영할 때 그러하였듯이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장소를 물색하고, 영화를 기획하였다. [사진 19]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촬영 중인 배석인 감독 [사진 20]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촬영 중인 배석인 감독과 촬영기사 박한춘 이 영화는 남북적십자 회담장에서도 상영되었고, 세계 곳곳의 아이맥스극장에서도 상영되었다. [사진 21]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부채춤 장면 [사진 22]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농악놀이 장면 [사진 23, 24]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해외 상영을 위한 시놉시스 문서 하지만 기술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아이맥스 영화를 만들기는 어려웠고, 이후에는 주로 해외 아이맥스 영화를 수입하여 상영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13년 동안 63빌딩 아이맥스영화관을 이끌었던 배석인 감독은 1997년 은퇴하였다. 다큐멘터리스트 배석인 구술의 의의 본 연구자가 배석인 감독의 구술 인터뷰를 진행한 것은 2009년의 일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물론 현재도 그렇지만) 문화영화는 대부분 소재가 불분명하여 볼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았고, 감독이나 스태프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또한 당대의 검열서류가 공개되지 않은 탓에 정확한 작품명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된 극영화 <자유전선>(김홍, 1955), <팔도강산>(1968)과 <지상최고의 여정>(1968), 그리고 국립영화제작소에서 함께 일했다는 양종해 감독의 증언, 63빌딩 아이맥스영화관의 개관 책임자였다는 몇 가지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첫 만남을 진행하였다. 극영화 영화인들과의 만남은 많은 자료를 가지고 토론하듯 인터뷰가 진행될 수 있는 반면, 자료가 없는 다큐멘터리 감독들과의 만남은 1차적으로 구술자의 증언에 기댄 채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가는 듯 한걸음 한걸음 진행되지만 잊혀졌던 작품 하나, 정보 하나를 찾을 때마다 마치 고고학자가 된 양 희열을 느끼게 하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발견된 영화들을 볼 때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문화영화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조금은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감독들이 추구하려고 했던 영화의 핵심에 다가서게 한다. 이 구술을 통해 찾을 수 있었던 두 편의 문화영화 <피어린 600리>와 <새길>이 그러하였다. 분단이나 교화 등의 키워드로만 알려졌던 영화들을 실제로 관람하면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용어로만은 담을 수 없는 당대 대중들의 감성과 소통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구술자와의 만남 이후에 다시 보게 된 영화 <팔도강산>은 ‘한국의 경제 발전상을 알리는 국책영화의 효시’로서만이 아니라 최고의 스타들을 한 영화 안에서 볼 수 있고, 실제 가보기 힘든 전국 방방곡곡을 구경하는 대리만족을 얻으며, 거기에 적절한 위트와 감동까지 선사하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당대 최고의 오락물이라는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이후 수많은 속편과 아류작이 제작된 것뿐만 아니라 KBS 일일연속극 <팔도강산>(윤현민 작, 김수동 연출)이 무려 3년 동안 방송되면서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로케이션을 다니며 인기를 구가한 것은 대중들의 호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구술을 통해 국립영화제작소와 독립프로덕션의 초기 제작형태에 대한 기본적인 지형도가 그려졌다.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와 문화영화, 그리고 관에서 혹은 독립프로덕션에서 문화영화제작에 대한 연구를 위해 영상자료원에서 2012년 문화영화에 대한 주제사 구술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기본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국 문화영화의 역사와 위치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1) 이 영화는 KTV국민방송 e영상역사관(http://www.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다. 2) 이 영화는 KTV국민방송 e영상역사관(http://www.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다.
전후 마땅한 일거리가 부족했던 시기 우연히 시작하게 된 조명 일은 그저 공연이 있을 때나 돈을 받는 불안정한 일자리였지만 영화가 번성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졌고 영화와 광고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동하는 천직이 되었다. 그는 1930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지주계급이던 부모님 슬하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해방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설 무렵, 집안이 몰락하고 가족들마저 뿔뿔이 흩어졌다. 어렵게 어머니와 생활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진하는 연합군이 평북을 점령할 당시 그는 치안대에 가담하여 전쟁 속의 전쟁을 겪었다. 전세가 바뀌고 연합군이 남하하던 때에, 그는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었다. "내일 아침에 들어오면 되니 먼저 가라"는 말이 어머니와의 안타까운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월남하여 가족을 잃은 그가 처가 식구들을 각별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피난길에 우연히 형을 만나 함께 남하하던 중 연고가 없는 두 형제에게 미군 부대의 노무자로 차출되는 행운이 찾아온다. 미군부대에서의 안전한 생활과 넘쳐나는 물자는 그들에게 커다란 매혹이었고 계속 머무르고 싶은 곳이었다. 그러나 휴전이 이루어진 후 미군부대에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자 사회로 나와 일을 찾아야 했고, 그러던 중 주변의 추천으로 시공관의 조명을 담당하고 있던 서영훈을 만나게 되면서 조명 일을 시작하게 된다. <뇌우>와 같은 무대연극이나 무용공연 등의 조명을 담당했는데 1950년대 중반의 조명 사정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탄소봉으로 플러스 마이너스 전극효과를 내 방전시키며 빛을 방사하는 카본아크라이트를 사용했는데 손으로 탄소봉의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시키는 게 관건이었다. 심지어 시력에 좋지 않아 젤라틴을 씌우고 작업해야돼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감으로만 작업해야 했다. 박진수: 무대조명이라는 것이, 아크라이트라는 것이 뭐이냐면 스포트 쏘는 거 있잖아. 카봉을 태우는 거야. 카봉을 이제 손으로 태워요, 양쪽으로 불을 합선시켜서 태우는 거야. 손으로 조절해가지고. 옛날에는 영사기에도 전부 다 아크로 태웠다고. 이제 그것이 발전이 되면서 전구로 다 바뀌었지. 1 승압효과를 내는 디머는 소금을 탄 물독 속으로 철판을 담궈 사용했다. 삼각형으로 된 철판에 전극을 연결해 서서히 담궜다 뺐다 하며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조명효과를 냈던 것이다. 박진수: 데이꼬가 뭐냐면 승압기, 10볼트에서 100까지 올리는 거야. 이것이 그때 당시 기계가 없었다고. 이걸 뭘로 하느냐. 소금물을 이만한 큰 독에다가 소금물을 탄다고. 소금물을 막 타고 좀 조그맣게 철판을, 구리 철판을 요렇게 잘라요. 요렇게해서 삼각형으로 해개지고 이걸 전기에다가 마이나스 프라스를 두 개를 만들어 가지고 싹 넣게 되면 10볼트에서 100볼트로 올라가는 거야. 하나는 담궈놓고, 마이나스 플라스니까. 플라스도 담궈야되니까. 담그면서 천천히 넣게 되면 천천히 밝아지는 거지. 빨리 담그게 되면 확 올라가니까. 영화에서도 이걸 썼어요. 영화에서도 아침, 새벽에서 아침 넘어오는 과정이라든가 또 해가 진다는 과정을 이걸 많이 썼다고. 그런 식으로 지금은 하래도 못 할 거야. 2 1950년대 중반 영화가 흥하게 되자 어두운 실내에서 벗어나 야외로 나가자는 생각에 서영훈과 함께 영화조명, 기술계의 원로인 김성춘의 문하로 들어가게 된다. 김홍 감독의 1955년 작 <자유전선>(김홍, 1955)의 조명보로 처음 영화작업에 참여한 후 <포화속의 십자가>(이용민, 1956) 등 연이어 김성춘에게 들어오는 작품에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계에 눌러앉게 되었다. 물론 엄격한 김성춘의 조수로 버텨내는 게 힘들어 때로 짐을 싸기도 했지만 꾸준한 노력을 통해 김성춘의 제1조수로,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조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박진수: 그게(영화 <자유전선>) 얼마 걸렸냐면 한 6개월 걸렸어. 군사영환데 화천인가 가서 했는데. 거기서 그 작품이 한 작품 끝났어. 그 다음에 한 게 <포화속의 십자가>라는 군사영화를 지리산, 지리산에서 <포화속의 십자가>란 영화를 가지고 남원으로 내려갔다고. 이용민 감독, 촬영기사가 임병호 씨 조명은 김성춘 씨가 해서 우리가 다 내려갔는데 그때만 해도 멤버가 굉장했지. 내려가서 한 달, 두 달, 두 달 반 동안 해도 작품이 못 끝났어요. 하다보니까 돈들이 떨어져 개지고 작품이 중단이 됐어. 그래서 중간에 서울로 다 올라왔다고, 카메라 다 잽혀놓고서. 올라왔다가 한 7, 8개월 있었나? 그러다 또 내려간다 이거야. 남원서 내려가가지고 그 작품을 완성시켜 개지고 올라왔지. 남원에서 <피아골>(이강천, 1955)하고 우리가 <포화속의 십자가>를 했어. 지리산에서. 그 지리산에는 그때만 해도 빨치산들이 많았다고. 그러니까 우리 촬영을 나가게 되면은 경찰들이 호위를 했어요. 그 정도로 그때 당시 위험했어요, 빨치산이. 3 [사진 1] 영화 <포화속의 십자가>(이용민, 1956)의 한 장면 당시 견고한 도제체제로 인해 1950년대 후반 김성춘 조명감독의 작품을 도맡아 했지만 좀처럼 조명기사로 데뷔하기는 힘들었다. 한국연예주식회사에서 주로 작업한 임병호 촬영기사의 아이디어로 김성춘이 배상해야 할 전구값 100만 원 대신 그가 작품을 맡는 것으로 협상하여 1959년 김화랑 감독의 <태양의 거리>로 조명기사 데뷔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한국연예주식회사와 극동흥업에서 함께 작업하게 된 김기덕, 변인집과 연출, 촬영, 조명 팀을 이뤄 충무로에서 소문난 팀으로 활동하게 된다. [사진 2] 영화 <태양의 거리>(민경식, 1952)의 한 장면 기사로 데뷔한 뒤 한국연예주식회사가 제작하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조명을 맡으며 실력을 인정받아가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60년 4.19가 나기 직전 임화수가 삼성촬영소를 인수하고 외국의 스튜디오를 참고하여 영화사를 확장한 뒤 전속제도를 두려던 시기에 그 또한 당시 최고의 조건으로 임화수와 전속계약을 하게 된다. 박진수: 나한테 제일 좋은 찬스가 한번 찾아왔드랬다고. 그때 임화수가 화양동에 삼성촬영소라는 것을 샀어, 인수맡았어. 그래서 임화수 씨가 한번 오라그래서 갔더니 ‘앞으로 거기에 대한 조명을 너 다 책임지고 너 나하고 전속계약을 맺자.’ 이래개지고 전속계약을 거의 맺었어. 한 달에 월급 얼마, 조수 얼마, 삼성촬영소에 들어오는 작품은 니가 다 맡아서 하고 라이트 관리를 니가 다 해달라. 이런 식으로 해서 나하고 전속계약을 맺었다고. 마쳤는데 마치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4.19가 터진 거야. 계약금 내가 그때 돈 100만 원을 받아 가지고 두 작품에 작품 당 30만 원씩 하고 그 기자재 40만 원을 해서 100만 원을 딱 받았다고. 4월 18일 날에. 그때 내가 얼만큼 좋았냐면 내 한달 월급이 40만 원씩 책정을 했다고. 40만 원이면 지금 돈 한 4천만 원 가까이 될 거야. 엄청 컸다고. 딱 받자마자 동대문 창신동의 한일은행인가 그랬을거야. 거길 가서 그걸 찾았어. 그때 당시에 임화수 당좌수표는 현찰 보증수표하고 똑같아요. 가서 100만 원 딱 찾아가지고 이제 집에 왔어. 그 다음날. 그러니까 4.19가 터지니까 당좌수표 정지가 돼놨어. 4 임화수가 몰락하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한국연예주식회사의 멤버들이 참여한 극동흥업으로 옮겨가 극동흥업의 전속 조명기사로 일하게 된다. 극동흥업의 첫 작품 <이복형제>(김화랑, 1961)에 참여했을 때는 제작비가 없어 흥행한 뒤 갚는 식으로 진행했는데 다행히 흥행에 성공했고 연이은 작품들의 성과도 좋았다. 박진수: 극동에서 세 작품 짼가 네 작품 짼가 김기덕 감독이 하는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고. 김포에 마석이라는데 해병사령부가 있었는데 거기 가서 <5인의 해병>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찍었어요. 모심을 때 드갔다가 한 6개월 이상 걸렸나봐. 모 벼갈이 할 때 나왔어. <5인의 해병>을 종결 했는데 그것이 히트를 쳤잖아. <5인의 해병>이 히트를 처가지고 돈을 좀 번 거야. 그러니까 극동은 하기만 하면 돈 버는 거야. [사진 3] 영화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의 한 장면 그러다 한번은 <노란 샤쓰입은 사나이>(엄심호, 1962) 그거를 계획을 했는데 주연을 한명숙 씨를 가수를 주연을 쓰자. 며칠 찍고 나서 라슈를 딱 보니까 얼굴이 아니야. 이거 갈아야 된다. 그 논란이 많았어요. 차태진 씨는 "안된다 이건 갈아야 된다." 그러고 우리 스탭들은 "그냥 찍자." 그래서 찍었잖아요. 연기력은 아주 없어요. 타이틀이 노래로서는 히트 쳤기 때문에 그걸 만드는 건데. 그것도 하니까 흥행이 잘됐다고. 5 [사진 4] 영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엄심호, 1962)의 포스터 극동에서 김기덕 감독과 변인집 촬영감독과 함께 충무로에서 부러워하는 단짝이었던 그는 극동과 체인을 맺은 조선일보의 아카데미극장 사람들과 교류하며 친선을 맺기도 했다. 박진수: 조선일보사에서 아카데미극장을 지은게 있다고 광화문에다가. 극동에서 하는 작품은 전부 다 아카데미에다 붙이기로 체인을 맺었다고. 그 당시에 조선일보 사, 아카데미 사장이 방우영 씨라고 거기다 붙이면 잘되는 거예요. 나중에 극동하고 아카데미하고 자매결연 맺어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임 갖고 술 먹으러도 많이 대니고 낚시도 같이 다니고. 극동이 돈을 많이 벌었어. 6 연이어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하자 극동영화사의 차태진 대표는 무리한 도전을 감행해 영화사를 위험에 빠뜨렸다. 박진수: 극동영화사 차태진 씨가 대만을 갔다오더니 “야 지금 심상복 서커스단이 중국에서 보니까 뭐 곰이 트럼펫으로 노란 샤쓰를 부른다.” 뭐 하여튼 그런 희한한 걸 보고 와 가지고 그걸 수입한다 그거야, 한국에다. 우리는 말렸다고 전부 다. …(중략)… 들여왔는데 그게 이제 동물들이 코끼리, 곰 뭐 이런 동물들이 많으니까 이제 배로 싣고 와서 부산에서 하역을 하는 과정에서 코끼리 한 마리가 빠져죽었어. …(중략)… 창경원에다가 서커스단을 했다고. 했는데 그때 당시에 망하게 되려니깐 장충체육관에서 아이스쇼가 들어왔어. 그거하고 딱 맞붙은거야. 손님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거야. …(중략)… 동물 사육해야지 그 사람들 먹여야지. 돈이 부지기수로 들어가는데 못 당하는 거야. 그때 당시에, 그 낭중에 차태진 씨 사모님이 얘기하기를 “처음에 영화할 땐 돈을 주체를 못 하도록 벌었는데 심상복 서커스단 들어와서 다 망하기 시작했다.” 돈을 댈 수가 없는 거야 낭중에. 중간에 손들어버렸어. 심상복 서커스단이 제작자가 망하니까 중국에 갈 돈이 없는 거야. 그래서 동물을 다 팔고 겨우 차비 해서 자기네 나라로 갔어. 7 극동흥업을 떠나려던 김기덕 감독, 변인집 촬영감독과 그는 차태진 대표의 간곡한 부탁으로 영화사에 남아 극동흥업을 재기시킨다. 박진수: 청춘물 하기 시작했다고 청춘물. 뭐했냐면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이니 <떠날 때는 말없이>(김기덕, 1964)니. 작품들이 많이 있잖아요, 청춘물이. 청춘물 했다하면 히트치는거야. 아카데미 극장에 붙이고 그랬는데. 망했다가 다시 나와 가지고 또 이제 일을 또 많이 하니까 돈을 많이 벌었어. 8 [사진 5]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의 한 장면 [사진 6]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김기덕, 1964)의 한 장면 재기에 성공한 극동흥업은 김기덕 감독 외에 유현목, 이형표, 정진우, 임권택, 강민호 등 많은 감독들에게 작품을 의뢰했고 이 작품들의 조명은 거의 다 그가 맡아 책임졌다. 박진수: 60년도 초에 극동 시작서부터 계속 일을 1년에 뭐 거의 한 10여 작품씩 했으니까. 9 극동흥업에서 많은 감독들의 다양한 장르영화들의 조명을 맡았지만 그 중 1967년 김기덕 감독의 특수촬영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는 특히 인상에 남는 작품이자 조명 장비가 열악했던 당시 환경에서 그에게 도전이 된 영화였다.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의 조명 기자재 상황은 김성춘이 1942년 일본 아라시간주로 프로덕션에서 수입해 온 조명기, 북한영화촬영소에서 노획해 국방부 영화과에서 보유하고 있던 커다란 소련제 조명기와 1956년 아세아재단에서 원조해준 50키로 조명기, 손수 만들어 사용하던 수제 조명기가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1963년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1962)로 대종상 조명상을 수상하고 일본에서 열린 아세아영화제에 참석한 뒤 일본 대영촬영소에서 조명연수를 받게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기자재였던 시네킹 조명기를 들여오게 된다. 광량을 10배나 증폭시킬 수 있는 시네킹 조명기의 도입은 획기적이었다. 영화계에 조명기자재의 부피를 줄이는 동시에 광량을 높이는 것은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인력과 발전기에 대한 부담도 줄고 특히 로케이션 밤 촬영에서의 어려움을 확실히 줄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조명감독들은 필요한 조명기를 직접 제작하는 방식으로라도 조명기를 충당했어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화영공작소라는 수공업적 방식의 공작소가 조명인들에게 항상 회자되는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화영공작소의 대표였던 김종철도 김성춘의 문하에서 조명조수로 일하던 시절의 이력을 바탕으로 조명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조명제작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또한 많은 양의 조명을 이곳에서 주문하여 제작하였다. <대괴수 용가리>에는 많은 양의 조명을 주문 제작했어야만 했다. <대괴수 용가리>는 특수촬영물로 미니어처세트를 이용하였고 고속촬영을 통해 느린 화면을 만들어야 했다. 고속촬영을 위해 카메라의 회전수가 증가하는 만큼 더 많은 광량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당시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전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양의 조명을 만들어야 했다. 결국 실내촬영에서도 발전차를 동원하여 근근이 여러 달에 걸쳐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특수촬영과 미술에 관계된 일본의 스탭들이 초청되어 제작을 도왔고 처음 시도하는 고속회전촬영 조명에 대해 그는 일본 스탭들의 자문을 빌어 작품에 참여하였다. <대괴수 용가리>는 그를 포함해 국내 영화인들이 특수촬영과 미술에 대한 기술을 전수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 7]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의 한 장면 [사진 8] 영화 <대괴수 용가리>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그는 1972년 영화계를 잠시 떠나게 된다. 영화가 사양길에 접어든 시기였기에 그는 당시 새롭게 부상하는 매체였던 컬러텔레비전에 대한 학습과 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장인인 조택원 선생의 도움으로 1974년 일본의 후지 텔레비전에서 컬러 조명에 관한 연수를 받는다. 박진수는 연수를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와 방송국에 들어가려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신상옥 감독의 권유로 다시 영화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1979년은 이미 영화산업이 점점 쇠퇴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후배의 권유로 MBC 광고제작사업부에서 광고 조명 담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이후 광고조명 독립사업체를 운영하다 은퇴할 때까지 광고계에 적을 두게 된다. 그는 같은 조명이지만 영화는 그림자를 아름답게 표현해야 하는 예술이고 광고는 그림자를 지워 보이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 상반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무대와 영화, 텔레비전, 광고 등 다양한 매체를 모두 경험한 그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조명을 담당할 수 있다며 자신의 실력을 자부한다. 1995년에 그는 한국영화조명감독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1년 동안 회장으로 지내며 왕성한 활동과 성과를 만들어냈다. 어렵게 협회의 사무실을 얻고 후배들의 일본 기술연수를 진행했으며 1996년 조명아카데미를 설립해 후학들을 양성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놓았다. 평생을 조명과 함께해 온 그는 영화와 조명의 관계를 그림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감독이 화폭을 만들어놓고 촬영기사가 그 화폭을 담는 역할을 한다면 조명기사는 빛으로 화폭에 붓질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런 조명의 중요성을 설파하고자 그는 후진 양성을 위해 기술연수를 추진하고 전문교육기관을 만드는 역할에 열정적으로 매진하였고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조명기사로서 다양한 매체를 섭렵하고 화려한 이력을 지닌 그는, 지금은 일선에서 은퇴하였 지만 '기술자는 정년이 없다'는 말로 영화조명에 대한 의지와 미련을 남겼다. 1) 배수경⋅박진수, 「박진수-조명」, 『한국영화사 구술총서04 한국영화의 르네상스3: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상자료원, 2007, 181쪽. 2) 위의 책, 181쪽. 3) 위의 책, 184~5쪽. 4) 위의 책, 189~190쪽. 5) 위의 책, 199쪽. 6) 위의 책, 200쪽. 7) 위의 책, 200~201쪽. 8) 위의 책, 202쪽. 9) 위의 책, 2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