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초난감하게 만든 새 버스정류장
- 제작년도
- 2010
사진: “ Safety Last!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때로는 영화보다 그 영화의 어떤 장면, 그 장면의 스틸 사진이 더 유명한 순간이 있다. 안경을 쓴 순진무구한 젊은 청년이 도시 한복판 높은 빌딩 시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아마 (스필버그가 제작한) 로버트 저메키스의 < 빽 투 더 퓨쳐 >(1985)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신이 방금 떠 올린 그 영화, 마이클 J. 폭스가 매달려 있는 그 장면은 오마주이다. 마틴 스코세이지도 조르주 멜리에스에 관한 3D 영화 < 휴고 >(2011)를 연출하면서 이 장면을 오마주했다. 성룡도 < 프로젝트 A >(1984)에서 시계에 매달렸다. 더 많은 예를 열거할 수 있다. 심지어 이 장면은 영화에서 ‘시간’의 문제를 다루는 아카데미의 영화 이론서 표지에도 등장한다. 나도 스틸 사진을 먼저 보았다. 영화사에서 빌딩 시계에 처음 매달린 사람은 해롤드 로이드이다. 위대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제는 거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름. ‘방랑자’ 채플린, ‘스톤 페이스(Stone face)’ 버스터 키튼과 함께 할리우드 무성영화 시대 슬랩스틱 코미디를 이끈 세 명 중의 한 명. 둥근 프레임의 뿔테 안경을 쓰고 (이 스타일의 안경은 이제 로이드 안경테라고도 불린다) 둥글고 납작한 보터 모자를 쓴 해롤드 로이드는 가난한 ‘모던 보이’. 그 소년이 시계에 매달린 영화는 Safety Last (1923)이다. 영어 제목으로는 금방 이해되지만 번역하기 까다로운 “Safety Last”는 공사장에 붙어있는 “Safety First(안전 우선)”에서 가져온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안전 마무리>라고 하겠다. 하지만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고, 더 좋은 제목이 떠오르면 수정하겠다. 역시 세 명의 위대한 대가들을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채플린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위험한 상황에 휘말려 들지만 역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신의 도움을 받기라도 하듯이 거기서 빠져나온다. 버스터 키튼은 자기가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으로 전력 질주하면서 벗어난다. 해롤드 로이드는 반대이다. 버스터 키튼이 스피드의 대가라면 해롤드 로이드는 위험한 상황에 온갖 장애물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늘리고 그 과정에서 계속 실수를 연발하면서 가까스로 거기서 벗어난다. 그 실수의 시간을 최대로 연장한 영화가 <안전 마무리>이다. <안전 마무리> 중 / 사진: “ Safety Last! ”, IMDb 이번에는 LA가 무대이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결혼하기 위해 지참금을 구해야 하는 (영화 속의 이름도 마찬가지인) 해롤드는 백화점에 취직한다. 그런데 함께 지내는 빌에게는 빌딩을 타고 올라가는 ‘스파이더맨’ 같은 재능이 있다. 백화점 지배인은 손님을 건물에 끌어모으기 위해 1,000달러를 내걸고 빌은 12층 빌딩에 1층부터 등반하겠다고 알린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여차저차 우여곡절 끝에 해롤드가 1층을 올라가게 된다. 일이 생긴 빌은 다음 층에 옷을 갈아입고 자기가 오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 층에서 이런저런 일이 생겨 바꿔치기는 그다음 층으로 미뤄지고 그러면서 가여운 해롤드는 계속 올라가야 한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게다가 그 자리에 여자친구도 도착한다. 층마다 새로운 장애물이 나타나고 너무 높이 올라가 이제 내려갈 수도 없는 해롤드는 위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클라이맥스는 빌딩에 달린 시계에 매달릴 때 벌어진다. <안전 마무리>는 해롤드가 12층 빌딩을 19분 50초 동안 등반하는 장면을 감상하기 위해서 보는 영화이다. 거의 슬로우 모션처럼 진행되는 이 등반은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다. 좀 이상한 비교이기는 하지만 이 씬은 < 전함 포템킨 >(1925)의 오뎃사 계단 장면의 거의 두 배이다. 물론 마지막은 여자친구와 키스로 마무리하는 해피엔딩이다. 사진: “Safety Last!( 1 , 2 )”, IMDb 해롤드 로이드가 이 장면의 영감을 받은 것은 1922년 7월 어느 날이었다. 다음 영화 회의를 위해서 영화사로 향하던 길에 LA 7번가 브록맨 빌딩 아래 사람들이 몰려들어 모두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상한 모습을 보았다. 자기도 올려다보니 한 남자가 건물을 타고 매달려 한 층씩 등산하듯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는 옥상까지 올라갔고, 마치 등반에 성공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옥상에서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돌면서 환호에 응답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회의 시간을 놓칠 만큼 시간이 흘렀다. 잠깐 본다고 생각했는데 등반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해롤드 로이드는 보는 내내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이 등반에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만일 이 건물 등반을 영화로 찍으면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스펙터클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수촬영이 초보 단계였던 1923년에 이 장면은 쉽게 찍을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안전 마무리>가 첫 상영을 마쳤을 때 극장 안은 비명의 도가니였다고 한다. 관객들은 이 시퀀스를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였다. 물론 해롤드 로이드가 ‘진짜로’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걸 찍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할리우드의 특수촬영은 이미 전문화되어가고 있었다. 이 시퀀스는 세 단계로 나누어서 촬영되었다. 처음 1층에서 올라가는 장면은 해롤드 로이드가 건물을 타고 오른다. 그런 다음 3층 높이의 세트를 지었다. 이 장면이 세트 촬영이고 거리의 풍경을 이중노출로 합성했다는 것은 매달린 해롤드 로이드를 보지 말고 카메라의 위치를 보면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이 장면을 그 위치에 찍었다면 정말 위험한 사람은 해롤드 로이드보다 촬영감독이었을 것이다. 시계에 매달린 장면을 위해서는 또 다른 세트를 건물 옥상에 지었다. 그래서 옥상에 세워진 세트에 달아놓은 시계에 해롤드 로이드가 매달렸다. 건물을 타고 오른 후, 시계에 매달리는 해롤드 로이드 / 사진: “Safety Last!( 1 , 2 , 3 , 4 )”, IMDb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이 장면에서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것은 카메라의 위치와 각도에 관한 콘티이다. 게다가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해롤드 로이드에게는 신체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하여튼 매달리고 올라가는 장면을 찍어야 한다. 그런데 1919년 촬영 도중 소품 사고로 해롤드 로이드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잃었다. 그러니까 오른손은 세 손가락으로 건물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는 뜻이다. 나는 <안전 마무리>를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촬영과정을 알고 난 다음에도 다시 볼 때마다 이 시퀀스가 위치와 각도, 편집 타이밍, 구도, 동작, 진행 사이로 끼어드는 장애물들의 리듬, 이 모든 것이 마치 정교한 마법 기계장치처럼 작동하고 있음에 감탄하면서 보았다. 하지만 해롤드 로이드의 손가락 이야기를 알고 난 다음에는 매달려 있는 장면을 마음이 아파서 다시 보기 힘들어졌다. 아직 이야기가 남았다. 해비 페리를 잊으면 안 된다. 해비 페리는 1919년부터 해롤드 로이드의 위험한 장면 대역을 연기했다. 더 정확하게는 위험한 장면에서 해비 페리는 해롤드 로이드의 상대 쇼트(reverse shot)를 연기했으며. 높은 곳에 매달리거나 혹은 위험한 순간에 멀리서 해롤드 로이드 대신 건물을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오랫동안 해롤드 로이드의 모험을 믿었다. 해비 페리는 자신이 대역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해롤드 로이드가 세상을 떠나는 1971년까지 입을 다물었다. 스턴트맨으로 경력이 60년에 달하는 해비 페리는 험프리 보가트, 피터 로레의 할리우드 영화들, 심지어 키가 1미터 52센티였기 때문에 매리 픽포드의 대역도 했다. 어떻게 그렇게 매리 픽포드가 달리는 말에 능숙하게 올라탈 수 있는지 비밀이 풀렸을 것이다. 물론 비밀이 풀릴 때도 있지만 할리우드는 스턴트맨들의 피의 역사이기도 했다. 해비 페리 (사진: “ Harvey Parry ”, IMDb / © 1980 Steve Banks_ mptvimages )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소년시절의 너> 중 / 사진: Far East Film Festival 대만, 중국, 홍콩을 아우르는 동시대 중화권 청춘영화는 어딘가 안전한 자리로 호출되곤 한다. 이는 가볍고 말랑한 감정의 외피를 두른 ‘틴 로맨스’나 ‘학원물’이 지배적인 인상으로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과 방 한 칸을 배경으로 한 ‘도시 로맨스’, 혹은 성적 지향이나 계급적 주류 범주에서 벗어나는 ‘아웃사이더’의 지난한 성장 서사 또한 그 반경을 꾸준히 확장해왔다. 거짓 없는 미소와 서툰 고백에서 길어 올린 풋풋한 청춘의 초상과, 체제와 현실의 제약 속에서 너무 이르게 마모되어 버린 성장의 잔혹한 기록. 두 계열은 서로 다른 미학과 정서를 지닌 채 엇갈린 방향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성장의 희미한 슬픔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교차하고 중첩된다. 우리가 중화권 청춘영화로 부르는 범주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이 영화들은 어떻게 하여 이토록 ‘범아시아적’ 생명력을 유지하는가? 질문은 자연스레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누군가는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구파도, 2011)나 <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조미, 2013)을 기점으로 삼을 테고, 또 다른 이는 < 남색대문 >(이치엔, 2002)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 더 긴 역사적 궤적 속으로 옮기면, 중화권 청춘영화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동시대 현상만은 아니라는 점이 보다 분명해진다. 우선, 대만 뉴웨이브와 중국 6세대 영화, 그리고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논의되어 온 홍콩 뉴웨이브의 성취 속에서 그 정서적, 미학적 뿌리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나 아닌 여럿: 중화권 청춘영화의 기원들 누구나 겪지만 결국 지나간 과거로 남게 될 통과의례의 순간. 대만 뉴웨이브는 이러한 청춘을 형상화하는 데 탁월했던 시기로 기억될 만하다. 교복 입은 인물들의 초상이 전면에 놓인 작품도 가히 많았다. 그 출발점에 자리한 < 광음적고사 >(에드워드 양 외 3인, 1982)의 옴니버스 구성 가운데 타오더천과 에드워드 양이 각각 연출한 첫 두 에피소드(“작은 용 머리”와 “기대”), 그리고 진곤후 감독의 < 샤오피 이야기 >(천 쿤하우, 1983)는 소년·소녀들의 작고 애틋한 바람결 같은 초상을 내세운다. 그 물밑으로는 미국 이민, 대학 진학, 도시 중산층 진입이라는 당대 사회적 분위기의 기대와 규범이 조용히 도사리고 있다. 학교와 가정을 중심으로 일상의 반복을 미묘하고 리드미컬하게 포착한 이 감각은 <남색대문>과 같은 영화들의 정서적 결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일깨우는 동시에, 오늘날 중화권에서 ‘작은 청신함’이라 불리는 샤오칭신(小清新, Xiao qingxin)의 감정 구조와 그것이 하나의 서브 장르로 체화되어 온 흐름의 잠재태를 내포하고 있다. [1] 그러나 이 계보는 허우샤오셴의 < 연연풍진 >(1986)을 비롯한 성장영화에서 에드워드 양의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까지 대만 뉴웨이브 1세대가 소외된 젊은 세대를 응시해온 흐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영화들은 포스트-경제 기적 시기에 접어든 관점에서 계엄령 시기의 역사적 조건을 되비추는 장치로서 청춘을 호출하며, 어쩔 수 없이 감내하며 통과해야 했던 국면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그 풍경은 담담한 일상으로, 때로 서늘하고 비정한 상태로 각인되는 한편으론 감독들의 노스탤지어와 자전적 경향을 투사한다. 도시로 향한 젊은 연인들이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을 흘려보낸 기억으로 남기거나(<연연풍진>), 백색 테러의 광풍과 외성인이라 불린 본토 이주민들의 불안정한 삶의 궤적을 통과하던 청년이 끝내 파국적인 폭력으로 치닫는 시간(<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속에서, 청춘은 이미 상실을 예감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광음적고사>,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중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Asian Film Archive ) 이러한 정조는 중국 6세대 영화에 이르러 또 다른 시선으로 변주된다. 1989년 이후 중국에서 독립영화 [2] 로 분류될 수 있는 체제 외부의 작품들이 활성화되어, 급격한 시장화 한복판에서 방향성을 잃은 청춘의 초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아장커의 < 소무 >(1997)를 기점으로 가시화된 이 흐름은 로우예, 왕샤오슈아이, 장위안 등의 작업으로 이어지며 6세대라는 미학적 진영으로 일컬어졌다. 소매치기인 주인공과 ‘사업가’로 변신한 옛 동료를 대조하며 중국 소도시 시장경제의 비루한 풍경을 날것으로 포착한 <소무>의 감각은 < 쑤저우강 >(로우예, 2000), < 여름궁전 >(로우예, 2006), < 북경 자전거 >(왕샤오슈아이, 2001), < 북경 녀석들 >(장위안, 1992) 등에서 목표를 갖지 못한 채 그저 머물고 떠밀리며 시간을 견디는 젊음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6세대는 이처럼 국가 주도 계획경제와 개혁개방 사이의 격변기에 놓인 청춘이 조기에 소진되어버리는 감정 상태를 대변하는 성취를 보였고, 이는 세계 영화제 회로에서 환대를 받았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중국 본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독립영화’ 정신이 만개했던 때로 기록된다. 작가영화마저 상업영화 및 주선율 영화의 논리에 함몰되어가는 현 풍경을 떠올릴 때, 동아시아 청춘영화의 한 모델―즉, 비관적이지만 정직한 모델―을 제시한 당시 6세대의 성취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2010년대에 들어서며 독립영화의 ‘죽음’이 목격되기 전 [3] , 이러한 계보를 근과거까지 계승하며 그 정서적 맥을 잇고 있는 작품으로 리위 감독의 < 관음산 >(2010)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소무>, <관음산> 중 / 사진: IMDb( 1 , 2 ) 홍콩영화의 경우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할 만하다. 서극의 < 제일유형위험 >(1980)이 보여주듯, 초기 홍콩 뉴웨이브에서는 청춘의 권태와 분노를 폭발할 듯한 폭력과 뒤섞어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담가명이 호화롭고 자신감 넘치던 당시의 홍콩을 배경으로 도시 노마드들을 그려낸 < 열화청춘 >(1982)과, 왕가위의 < 중경삼림 >(1994)을 비롯한 1990년대 작품들은 청춘의 감정 구조를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이어진 프룻 챈의 < 메이드 인 홍콩 >(1997)은 포스트-반환 시기 처음으로 등장한 뛰어난 청춘영화가 아닐까. 영화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두 소년과 이에 합세한 소녀로 구성된 아웃사이더들이 비가역적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는 점에서는 <제일유형위험>을 환기시키면서도, 한결 차분한 시선으로 홍콩의 내면적 심상에 집중한다. 한편 왕가위와 같은 홍콩 뉴웨이브 2세대의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임영동의 <학교 풍운>(1988)은 전형적인 청춘영화의 문법과 거리가 있을지라도, 학교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성장기 소년·소녀들의 위태로움을 그려낸 가장 ‘홍콩적인’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하다. <제일유형위험>, <메이드 인 홍콩> 중 / 사진: IFFR , IMDb 중국 문혁 세대와 Z세대의 초상: <방화>, <소년 시절의 너> 그렇다면 지난 10년으로 범위를 좁혀 중화권 영화로 시선을 옮겨보자. 동시대 작품들은 어떤 청춘의 풍경을 담아내왔을까? 이 작품들을 한눈에 조망하기란 쉽지 않고 필자의 한계도 있기에, 이어지는 글은 그 흐름을 가늠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몇몇 인상적인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공하고자 한다. 먼저, 중국에서 제작된 청춘영화들은 대만발 ‘샤오칭신’ 장르가 중화권 전반에 끼친 영향력을 입증하듯 캠퍼스 로맨스가 주류를 이룬다. 매력적인 주연 배우들의 청신함, 푸르른 여름 하늘, 첫사랑과 서투른 고백 등 이 장르의 관습으로 간주될 만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공부’ 자체가 단순한 성장담의 소재를 넘어 과열된 입시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짓눌린 청춘 서사의 엔진이 된다는 점은, 중국 청춘영화만의 독특한 지점이다. 모범생 소녀가 불량스럽지만 순수한 문제아 소년의 공부를 도와주며 사랑이 싹튼다는 대만 영화의 공식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가 보여주듯 다소 귀여운 수준에 머물지만, 중국의 대히트작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2013)에 이르면 사뭇 다르게 변주된다. 이는 공부만이 ‘흙수저’인 자신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라 믿으며 로맨스를 아예 거부하는 주인공의 철벽같은 마음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중 / 사진: IMDb( 1 , 2 ) 증궈샹 감독의 < 소년시절의 너 >(2019)는 중국발 학원 영화들의 흐름 속에서 가장 성공한 판본인 동시에 사회성 짙은 텍스트로 각인된다. 대입 시험인 ‘가오카오’를 코앞에 둔 시기, 주인공 첸니엔(주동우)이 한 소녀가 학교에서 자살한 현장을 목격한다. 죽은 소녀는 교내 가해자들의 악명 높은 괴롭힘에 희생되었음이 드러난다. 가해자들의 다음 표적이 된 첸니엔은 자신을 보호해 주려는 십대 거리의 소년(이양천새)과 운명적으로 엮인다. 영화는 입시 위주 고등학교를 지배하는 잔혹함의 심리를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탐구하며 시작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온 세상에 맞서 싸우는 두 십대의 서로를 향한 헌신과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로맨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처럼 교육의 살풍경과 두 연인의 낭만적 비극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미덕이라기엔 다소 한계를 노출한다.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에 책임이 있는 체제 내부의 어른들(교사와 경찰들)이 지나치게 선량하고 도덕적인 인물로만 묘사되고, 가해자들 역시 충분한 전사나 깊이 없이 평면적 캐리커처에 가깝게 제시되면서, 두 상처 입은 영혼들의 고립은 사회적 압박 못지않게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려는 관계의 내향성에 의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오카오’ 점수가 부르주아로의 격상과 잔인한 빈곤의 삶 사이 간극을 결정짓는 상황에서, 첸니엔이 통과해야 하는 절박함의 정동은 한 편의 ‘십대 오페라’ 같은 이 영화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일 테다. <소년시절의 너> / 사진: IMDb <방화>(2017)는 문화대혁명 말기, 문공단(문화예술선전대)에 입대한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공간이 당대의 예술학교나 사실상 다름없었던 현실이 재현될 뿐 아니라, 영화 역시 학원영화의 문법을 상당 부분 따르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블록버스터와 풍자극을 넘나들며 < 집결호 >(2007), < 아부시반금련 >(2016) 등을 연출해온 중국의 대표적 감독 펑샤오강의 야심작이다. 무용수가 되기를 꿈꾸는 샤오핑은 문공단에 입성한 첫날, 자신을 마중 나온 선배 류펑에게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이타적이고 충직한 성정의 류펑은 정작 자신의 호의를 이용하기만 하는 피아노 반주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영화는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 숙청, 그리고 1979년 중-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약 5년간의 격동을 통과한다. 그 사이 샤오핑은 재교육 시설에 수감돼 있던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류펑과 샤오핑 모두 전쟁에 참전한 뒤 정신적·신체적으로 소진된 상태로 귀환한다. 하지만 <방화>는 문화대혁명이 야기한 전면적인 비극을 정면으로 성찰하기보다는, 학교 청춘물의 형식을 빌려 이들에게 고통을 안긴 공산당 간부나 상하이 상류층 자녀들과의 격차를 부각한다. <소년시절의 너>의 첸니엔처럼, 샤오핑 역시 수줍음과 서투름, 그리고 계급 지위로 인해 조롱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즉, 시대의 광기보다는 오늘날 중국사회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비판 가능한 엘리트 부유층의 부패와 계급적 소외에 비극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제목인 방화(芳华)는 ‘꽃다운 청춘’ 혹은 ‘향기로운 시절’을 뜻한다. 세월이 흘러 1990년대 중반, 두 주인공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문공단 시절은 노스탤지어 깃든 기억으로 남고, 그 공식적 종언을 알리는 해산식 장면에서 샤오핑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춘다. 대만 청춘 영화의 속삭임: <조니를 찾아서>,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한편 오늘날 대만 청춘영화의 흐름이야말로 젊은 시절을 ‘아팠지만 예뻤던’ 감정으로 재배치하는 ‘샤오칭신’ 감성 구조와 떼어내 설명하기 어렵다. 동시에 그 한편에서는 이전 세대 영화들이 간직했던 불안과 공허의 정조를 일정 부분 봉합하면서도, 이를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변주하려는 흐름 또한 포착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만 청춘 영화들은 불확실한 현재를 견디기 위한 하나의 정서적 피난처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 곧 ‘작은 행복과 미세한 슬픔’을 섬세하게 건드리는 이 방식은 개인주의적 정서를 중시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로부터 물러나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려는 태도를 전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평론가이자 제작자인 페기 차오는 자신의 제작 영화 <남색대문>이 ‘샤오칭신’ 장르로 호명되는 데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내놓는다. 그 미덕이 “대만 사회에 뿌리를 둔 일상적 디테일의 축적을 통해 그려낸 삶의 초상이자, 자비로 가득하며 악의가 없는 세계”의 포착에 있다는 것이다. [4] 후앙시 감독의 < 조니를 찾아서 >(2017)는 이러한 설명에 잘 부합하는 텍스트다.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한 세 젊은 인물의 이야기는 인상 깊은 오프닝으로 시작된다. 지하철에서 작은 상자를 들고 탄 여자에게 한 청년이 다가와 새장이 아니냐고 묻는다. 여자는 나중에 답을 주겠다고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전에 그런 상자에 새를 담아온 적이 있다고 덧붙인다. 같은 빌라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걸어가는 긴 시퀀스를 통과할 때까지도 이들이 우연히 스친 타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후앙시는 허우샤오셴의 < 남국재견 >(1996)과 < 자객 섭은낭 >(2015) 제작부를 거치며 선배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롱테이크를 체득한 인물이며, 이 영화에는 실제 허우샤오셴이 제작자로 참여했다. 영화는 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주변을 어떠한 판단 없이 평등한 시선으로 관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일상의 미스터리를 낯설고도 신선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이를테면 화면에 익숙해진 뒤에야 청년의 티셔츠 무늬가 작은 새들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순간처럼, ‘조니’라는 사람을 찾는 이상한 전화들을 계속 받아오던 여자는 문득 옛 애인을 조니라고 부른다. 앵무새를 키우는 여자와 자폐 성향을 지닌 청년, 그리고 탈출한 앵무새를 계기로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된 수줍음 많은 집수리공이 왜인지 모를 기분 좋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이야기. 이는 느슨하며, 너그럽고, 명확한 해답은 없지만 삶에 대한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조니를 찾아서>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2020)을 논하기 위해서는 대만발 청춘영화의 또다른 국면을 호출해야 한다. 전형적으로 이상화된 여성성보다는 강인하고 때로 보이시한 여성 캐릭터가 선호되고, 완성된 사랑보다는 첫사랑의 어슴푸레하고 틀이 잡히지 않은 감정에 집중해 온 흐름 말이다. <남색대문>, < 영원한 여름 >(2006), <여친 남친>(2012) 등이 보여주듯, 대만 청춘영화에는 퀴어 서사와 삼각관계의 묘사를 통해 장르의 영토를 확장해 온 하나의 계보가 존재한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미묘한 긴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종 촉발되는 모호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섬세한 터치는 대만 청춘영화만의 고유한 미학을 구축해왔다. 패트릭 류 감독의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막 계엄령이 해제된 1980년대 후반 대만을 배경으로 한다. 아한은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버디를 만나 단짝 친구가 되고, 두 소년 사이에 형성된 감정은 학교가 여학생을 받기 시작하면서 시험대에 오른다. 신입 여학생 반반의 등장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직면하도록 압박하는 계기가 된다. 표면적으로는 삼각관계를 통한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테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네 마음>은 정통 퀴어 영화라기에는 터치가 다소 가벼웠던 기존의 청춘영화 흐름에서 한 발 더 묵직하게 나아간다. 기숙학교 내에 공공연히 만연한 호모포비아와, 스스로 게이였음에도 아한에게 ‘교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캐나다인 신부의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는 계엄령 해제라는 조용한 변화의 출발점에서 시작해,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시간으로 닿는다. 과거의 고통과 열정을 다시 마주하며 잃어버린 줄 알았던 시대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듯, 주제곡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이 흐르는 가운데 두 주인공은 죽은 신부의 교구가 있던 퀘벡의 밤거리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결말로 향한다. 홍콩 독립 청춘영화의 새로움: <쪽빛 하늘>, <좁은 길> 마지막으로 최근 홍콩 독립 청춘영화는 대만의 청춘물이 제공하는 감정의 완충 지대나, 중국 본토 학원영화의 서사와는 사뭇 다른 궤적을 그려낸다. 이 글을 준비하며 마주한 가장 큰 수확은 홍콩 반환 이후 감독들의 본토행에 따른 영화 산업의 공동화나 정체성의 약화라는 오랜 우려를 불식시키는, 독립영화 진영의 새로운 세대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저예산으로 제작되면서도 도시 청춘들의 표정과 삶의 결을 세밀하게 기록해 온 이 영화들은, 때로는 홍콩을 향한 러브 레터처럼 읽히기도 한다. 아모스 와이의 <닷 투 닷>(2014), <냅핑 키드>(2018), <먼 곳에서>(2022)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주목할 점은 홍콩영화발전위원회(Hong Kong Film Development Council)가 주관하는 신인 감독 지원 사업(First Feature Film Initiative)을 통해 입봉하는 신예가 점차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업은 신인 감독의 데뷔작을 지원할 때 홍콩 영화계의 거장 감독이나 베테랑 제작자를 멘토로 매칭해 주는 방식을 취한다. 2013년부터 시작된 이 세대 간 유기적 결합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 덕분에, 최근 홍콩 독립영화를 보면 타이틀 크레딧에서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익숙한 홍콩 감독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쪽빛 하늘>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그중에서도 <쪽빛 하늘>(2017)은 동시대 홍콩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중 하나인 청킹와이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천하태평>(2008), <음악 인생>(2009), <하나의 국가, 두 개의 도시>(2011), <테이스트 오브 유스>(2016) 등 홍콩의 현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들과 허안화의 <밤과 안개>(2009)의 각본을 쓰며 다져온 청킹와이의 서늘한 시선은, 부모 살해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통해 홍콩 사회가 청춘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냉정하게 응시한다. <쪽빛 하늘>에서 부모의 시신이 지역 저수지 인근에서 발견된 뒤, 어린 코니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이 강렬한 스릴러는 누가 저질렀는가를 이미 알려주고 시작하기에, 질문의 중심은 ‘왜’라는 동기로 집중된다. 빈곤과 학대로 점철된 코니의 가정환경, 그녀가 학교 친구를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과정, 그리고 사건에 깊이 관여하면서 점차 자신의 사적인 삶까지 흔들리기 시작하는 여성 수사관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선정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세심하게 펼쳐지는 이 탐구의 형식은 평소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코니와 같은 인물들이 스스로 말하게끔 유도한다. 대만이나 중국의 청춘 학원 영화에서 ‘파란 하늘’이 젊음의 자유를 상징한다면, 이 영화의 어스름한 ‘쪽빛’은 홍콩의 비좁고 폐쇄적인 공간을 짓누르는 색채로 활용된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채 위협받는 십대들을 압박감 가득한 스릴러에 담아낸다는 점에서 <학교풍운> 같은 홍콩영화의 고전적 전통이 환기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부모 살해를 자행한 소녀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거부하는 젊은 여경의 윤리적 딜레마는 평행선을 달리는데, 이는 세대 갈등의 단면이자 출구 없는 미로 같은 도시에 갇힌 홍콩 현세대의 실존적 질식 상태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좁은 길>(2022)은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당시 자살을 예고한 어린 시위대를 구하려는 청년 구조대의 이야기를 담은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기를>(2021)을 렉스 렌과 공동 연출했던 람섬 감독의 단독 연출작이다. 이 영화 역시 대만의 낭만이나 중국의 열망과는 또 다른, 도시 속에서 존엄을 지키려는 홍콩 청춘들만의 정직하고도 아픈 초상을 그려낸다. 코로나19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영세 청소 대행업체의 일원인 노동자 자크가 늦은 밤 식당을 방역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주로 가라앉은 팬데믹 시기의 밤 장면으로 구성된 <좁은 길>은 조용한 노동계급의 고독을 포착하지만, 음울하거나 비관적이기보다는 사회 주변부의 고단한 상황을 응시하면서도 어딘가 미묘한 위로와 해방감을 안겨준다. 일손이 절실하지만 도시를 덮친 팬데믹 탓에 자크의 형편은 넉넉지 않다. 그는 충동적으로 지원한 캔디의 비공식적인 구직 요청을 받아들이고, 매일 밤 일당을 현금으로 지급한다. 비교적 어린 여성인 줄로만 알았던 캔디는 사실 어린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두 사람은 감정적 방어 기제를 세우면서도 서서히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친구 사이로 발전하지만, 영화는 연애담을 전형화하지 않는 선에서 결말을 열어둔다. 람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간 힘든 시간을 보낸 홍콩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우리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5] 취약함을 인정하는 용기는 <좁은 길>의 가장 큰 미덕이자, 고립 속의 유대를 형성하는 두 주인공의 서사에 깊이 공감하게 만드는 동력일 것이다. 청춘영화라는 틀 안에서 보자면 입체적으로 그려진 젊은 청소 노동자와 싱글맘의 묘사 자체가 인상적인 ‘캐릭터 스터디’라 할 만하다. <좁은 길> / 사진: IMDb *** [1] Papan Yang, “The Taste of Ice kacang: Xiaoqingxin Film as the Possible Prospect of Taiwan Popular Cinema”, The IAFOR JOurnal of Asian Studies, 2:1, 2016, p. 75. [2] Chris Berry, “Cinema: Reconsolidation of Party-State Hegemony in a Market Economy,” in M Dahl, M. Szatkowski & H. Kups (eds.), China under Xi Jinping: An Interdisciplinary Assessment , Leiden & Boston: Brill, 2016, p. 351. 중국 독립영화는 일반적으로 정부 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영화를 말한다. 이는 체제 내 상영이 허가된 예술영화(艺术片, yishupian)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공식적으로 상영되지 못하는 독립영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내 독립 영화제(난징, 베이징 등)나 대안적 상영 공간을 통해 소개되거나, 주로 해외 영화제를 거점으로 유통되는 경향을 보였다. [3] Chris Berry, ibid., p. 350. [4] Song Hwee Lim, Taiwan Cinema as Soft Power: Authorship, Transnationality, Historiography , London & NY: Oxford University Press, 2022. p. 129에서 재인용함. [5] Elizabeth Kerr, “ Portrait of a City: The Narrow Road ” , ZOLIMA citymag (접속일: 2025. 12. 26.). 박은지(영화 연구자) l 프랑스 탈식민주의 영화와 동시대 동아시아 영화를 연구하고 글을 쓴다.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머. 지은 책으로 『지중해의 영화』, 주요 논문으로는 「장-뤽 낭시를 경유한 클레르 드니의 여정: ‘신체-지리학’ 영화, 생태적으로 그려내기」, 「부산 프랑스문화원과 트랜스로컬 시네필리아」, 「홍콩 누아르에서 포스트-홍콩 누아르까지 성찰적으로 바라보기」, 「두기봉의 밀키웨이 제작사와 포스트-1997 홍콩영화 정체성의 문제」 등이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질한 인물을 그리는 데에는 정도가 있다. 추악하거나 성질이 더럽거나 못난 부분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타인에게 드러내야 할 때는 일정 부분 미화하거나 정당성을 가지고자 하는 본능적인 자기방어가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지질한 인물은 사랑스러움이 함께 공존한다. 대중에게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외적 특징을 가진다거나, 혹은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기 위한 장치로서 캐릭터가 존재하고 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주인공은 정도가 없이 등장한다. 커다란 등짝을 비추며 시작하는 카메라는 단지 등짝을 비추려는 게 아니다. 삐져나온 뱃살과 함께 무료한 듯 등을 긁는 주인공의 모습은 관리되지 않은 인물이 등장함을 알린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과 구부정한 어깨, 뭐가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한 무기력한 눈빛으로 세상을 보는 인물에게는 나를 투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영화 속 인물은 더는 미래가 없는 이 세상을 대변하듯 존재한다. 별것 아닌 다툼에 쉽게 폭발하고 밥상을 엎어버린다. 동생과 몸싸움을 벌일 때도 큰 소리 한번 내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내재되어 있는 깊은 분노와 좌절감이 느껴진다. 자전거는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어슬렁거리며, 그 위에 올라탄 인물 역시 속도와 방향을 모두 잃은 듯이 삐걱댄다. 주인공은 영화가 절반 이상이 흐르는 내내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정도가 없으나 일면 뻔한 캐릭터다. 다만 이 영화가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주인공이 < 백엔의 사랑 >(2014) 속 이치코(안도 사쿠라)라는 점에 있다. 나는 이 정도로 ‘정도를 모르는’ 여자 캐릭터를 별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서사와 캐릭터는 보통 남성에게 부여되어왔다. 세상과 단절된 채 무기력한 모습으로 등장한 인물이 어떤 사건을 거치며 세상과 감응하게 되는 이야기. 여성 캐릭터는 비록 지질하고 못났더라도 그 못난 모습에서조차 매력적으로 보일 것을 요구받기 때문에 여자 배우가 이런 역할을 맡을 때에는 훨씬 많은 용기가 필요하기도 하다. 이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들었을 배우를 생각한다. 살집을 분장하는 대신에 실제로 살을 찌우고 부스스한 머리를 유지하는 일.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우스꽝스럽게 길거리에서 넘어지는 일. 몸에 맞지 않는 이상한 속옷을 입고서 거울 앞에 서는 일. 세상의 기준에서 ‘아름다운’ 몸매와는 동떨어진 몸을 드러내는 일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지 생각해본다. 판타지 속의 인물이 아닌 지극히 현실에 발붙인 이야기를 대변하여 존재할 때는 더더욱이 그렇다. <백엔의 사랑> 중 이치코 (사진: ART INSIGHT ) 여전히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이른바 ‘외모’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여성으로서의 ‘상품성’을 내려놓아야 하는 선택은 오로지 시나리오의 완성도만을 염두에 두고 이뤄지기는 어렵다. 물론 화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로 남성이 맡아왔던 캐릭터를 여성이 연기할 때면 더 화제가 되기도 하니까. 이미 익숙했던 장르와 플롯이 여성 캐릭터의 등장으로 특별해진다는 건 이성애 로맨스 플롯이 퀴어 서사에서 특별해지는 원리와 같다. 쓰러져 있던 여성 캐릭터가 두 발로 세상을 딛는 걸 보게 될 때 훨씬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건, 아직도 이런 서사와 캐릭터에는 편견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세상에서 실패한 지질한 모습이 남성 캐릭터라면 어느 정도 익숙한 상태로 시작하는 것이기에 관객으로서의 저항감이 덜하다는 점에서, 여성이 맡은 캐릭터에는 훨씬 많은 설명이 필요해진다. 결국, 이런 캐릭터를 선택한다는 건 감독과 함께 하는 모험에 뛰어드느냐의 선택이 될 것이다. 섬세한 설계가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관객은 주로 자신과 닮은 주인공에게 스스로를 대입하며 이야기에 빠져든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대입하고자 하는 성별, 비슷한 연령대나 직업 등에서 공통점을 찾아내어 그 인물의 서사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인물이 너무 수동적이면 그런 인물과는 거리를 두고 싶어질 수밖에 없어서, 캐릭터가 미진한 반응으로 비호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을 땐 이 캐릭터의 선택들을 납득할 수 있는 서사나 후에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비호감을 상쇄시켜줄 장치가 필요하다. 극중 이치코는 반강제적으로 가족을 떠나 독립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보이는 이치코의 괴팍하고 모난 성격이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장면이 이어지면서 알 수 있다. 나는 그때 이치코에게 희망을 본다. 자신이 애용하던 백엔샵의 아르바이트 면접을 볼 때, 알고 보니 우울증을 앓고 있던 점장의 멍한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서 함께 따라가던 시선, 말이 많은 직원이 옆에서 계속 말을 걸며 방해해도 집중하려 노력하며 서툰 몸짓으로 일을 배우는 장면과, 의외로 근면하게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해내는 모습, 우연히 지나던 길에서 보게 된 권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눈빛에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게 아니라는 희망이 있다. 이치코는 권투장에서 권투를 하던 카노(아라이 히로후미)를 처음 본다. 얼마 뒤 이치코는 카노의 경기를 보러 가게 된다. 그 경기를 바라보던 이치코의 눈에 들어온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카노인지, 경기인지. 카노가 마지막 경기를 마친 후 이치코가 그에게 묻는다. “아는 사이에요?” “누구?” “상대 선수요.” “그건 왜?” “서로 어깨를 두드려주길래요.” “시합이 끝나면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러자 이치코가 말한다. “멋지네요.” 그러니까 처음 권투장을 지나는 모습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이 권투인지, 카노인 것인지 알 수 없다. 둘 다여도 상관없다. 그는 연결되고 싶은 것뿐이니까. 나는 그 눈빛에서 비로소 이치코와 함께 이 이야기를 끝까지 함께 할 준비를 한다. 카노와 이치코 / 샌드백을 치는 이치코 (사진: ART INSIGHT , FILM MOVEMENT ) 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이치코가 점점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주저앉는 대신에 상흔을 딛고서 권투를 시작한다. 권투를 하기 위해서는 한껏 구겨져야 하는 법이기에 이치코의 자세는 여전히 구부정하지만, 자신을 숨기기 위해 움츠러드는 것과 가장 효과적인 주먹질을 위해 잠시 몸을 구부리는 건 분명 다르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눈빛이 흔들리며 세상과 감응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카노가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증오하지 않으면 때릴 수도 없어.” 무언의 비명을 지르며 갈 곳 없는 절망을 아무렇게나 표출하던 모습과 권투 글러브를 낀 채 샌드백을 치는 모습이 병치된다. 백엔샵에서 처음 일을 배우던 순간처럼 그의 주먹질은 여전히 서툴지만, 포기하지 않는 몸짓에서 배우가 캐릭터를 대하는 태도가 함께 드러난다. 연민하지 않는 것. 최선을 다해 경기를 준비하는 모습 그 자체. 내내 얻어터지기만 하는 인물을 배우 스스로가 비난하지 않고 존중할 때, 관객 역시 캐릭터를 함부로 동정할 수 없게 된다. 이치코가 포기하지 않았던 순간들이, 링 위에서 쓰러져 있을 때 잔상처럼 스쳐 지나가는 상흔의 순간들을 비로소 과정으로 만든다. 최선을 다해 뻗은 마지막이자 첫 번째 주먹질이 설령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며, 단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었다는 이치코의 눈물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에 응원과 사랑이 담기게 되는 이유다. 이 영화는 일면 뻔하다. 정처 없이 흔들거리던 캐릭터가 비록 실패할지언정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찾아가는 과정. 하지만 내게 이 영화 혹은 캐릭터가 특별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영화 속 내내 구부정한 이치코를 보며 역시 구부정한 나를 긍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매끈하게 완벽할 수만은 없는 삶의 과정에서, 눈에 보이는 결과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안도 사쿠라의 이치코를 기어코 사랑하게 되었으니, 나의 실패도 언젠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이런 감각은 작품 안에서 우연히 만난 배우가 종종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 (사진: ART INSIGHT ) 손수현(영화배우) l 연기를 하며 종종 글을 쓴다. < 럭키, 아파트 >(2024), < 양치기 >(2024), < 마더 인 로 >(2019) 등에 출연했고, 『새드 투게더』(공저, 2024), 『쓸데없는 짓이 어디 있나요』(2022)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