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
- 감독
- 최효선, 황혜림
- 제작년도
- 2008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1957년, 가설극장으로 시작하다 미림극장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민들과 함께 한, 인천을 대표하는 지역 상영관이다. 1957년 인천 동구 송현동에 고은진 씨가 천막을 세워 무성영화를 상영한 것을 시작으로 문을 연 미림극장은 이후 47년간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며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처음에 평화회관으로 시작한 천막극장은 이내 평화극장이란 이름으로 운영되었다가 최종적으로 미림(美林)극장으로 개명한다. 극장 운영은 고은진 대표의 아들 고용성 씨와 사위 오윤섭 씨가 맡아왔다. 이후 오윤섭 씨는 미림을 그만두고 오성극장을 설립하면서 미림극장은 고은진 씨의 아들 고희성 씨가 대표를 이어받았다. 19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외화 중심의 상영 영화들이 크게 흥행하면서 지역 문화 공동체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미림극장은 1970년대 중반 단층이었던 건물을 이층으로 신축하였고 그때 지금과 같은 2층 발코니 구조로 완성되었다. 1966년부터 미림극장에서 근무한 조점용 영사기사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에는 고희성 대표의 탁월한 외화 프로그램 구성이 소문이 나서 서울의 극장배급사에서도 찾아와 견학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천 지역에 들어선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공세에 밀려 2004년 7월 29일 영화 <투 가이즈> 상영을 마지막으로 폐관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9년 뒤인 2013년 10월 미림극장은 ‘추억극장 미림’으로 단장하여 다시 돌아왔다. 미림극장 로비 추억극장으로 재출발하다 재개관한 추억극장 미림은 인천 최초이자 유일한 실버전용관을 콘셉트로 지역사회에 새롭게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는 140개 회원사를 가진 인천광역시 사회적기업협의회의 의지가 있었다. 원도심을 살리기 위한 복합문화공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가능성 있는 사업 중 옛 영화관을 살려내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인천시에서 재정을 지원하고 비영리단체인 인천시 사회적기업협의회가 운영을 맡는 방식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천시의 정책이 여러 차례 변경되면서 약속되었던 인프라 구축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2016년 인천시는 사실상 지원 종료를 통보한다. 지원이 끊어진 후 여러 차례 진정서와 청원서가 제출되었지만 방침은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낸 옛 영화관의 문을 다시 닫을 수 없다고 판단한 사회적기업협의회는 크고 작은 후원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운영해 오고 있는 상황이다. 2016년 2월 29일 공익형 사회적 기업 1호로 거듭난 추억극장 미림은 단지 영화 상영뿐 아니라 지역 기반의 커뮤니티 확장에 공을 들이는 중이다. 고령, 경력 단절 여성 등 취약 계층의 고용률을 60% 이상 유지 중이며 실버 세대의 자원활동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상영관 내부, "추억극장 미림에서 추억의 명화를 만나보세요"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무엇보다 추억극장이라는 콘셉트에 충실하되 그것에만 스스로를 가둔 채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재 ‘미림’(美林)은 ‘아름다운 숲’이란 의미처럼 세대를 아우르며 공존하는 문화공간을 지향한다. 문화 혜택의 사각지대인 실버 관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 가족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2016년 문화관광부 예술영화전용상영관으로 지정된 이후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지역사회와 밀착 중이며 2016년 9월 SK사회성과인센티브 프로젝트와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2017년 인천광역치매센터 치매극복 선도기업으로 지정된 후 노인문화복지 증진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동시에 젊은 관객층 개발에도 소홀하지 않고 관객들이 직접 영화를 선정하여 상영하는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개발 중이다. 과거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고전영화 상영을 기본으로 하되 후배 세대와의 소통 창구를 꾸준히 개발하여 공존의 의미를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 복원을 위한 노력 10년의 폐관 기간 동안 미림극장의 많은 자료들은 안타깝게 유실되었다. 하지만 재개관 후 보관된 자료들을 복원하고 인천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기증받는 등 자료복원과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극장의 3층에는 영화연구가 정종화 선생이 50년간 수집한 영화 포스터, 전단, 스틸 사진 등의 자료가 전시 중이다.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진행되는 정종화 영화연구가의 시네마데카메론 수업을 통해 과거의 낭만을 되짚어보고 청년세대에게 전하는 만남의 장이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공존의 현장이라 할만하다. 미림극장은 상영관 오른쪽에 바로 외부와 연결되는 문이 뚫려있는 독특한 구조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실과 영화의 세계를 오가는 건축물은 지역주민과 밀착하여 가깝게 소통하는 미림극장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3층 미림역사관에 전시된 미림극장의 역사 자료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주소): 인천시 동구 화도진로 31 (송현동 92-7) 2. 설립일 - 1957.11월 최초 개관(평화극장) - 1958.10.5. 정식 개관(미림극장), 2004.7.29. 폐관 - 2013.10.2(재개관)~ 3. 대표자: 고은진(창업주), 고희석(폐관 당시), 최현준(현재) 4. 규모: 대지면적 477m², 연면적 745.79m², 바닥면적 437.79m²(지상2층, 지하1층) (1~3층 구조인데 건축물대장에는 이와 같이 표기되어 있음) 5. 극장 구성 - 단관극장, 재개관하면서 1층 206석, 2층 77석이였으나 2002년 3월 CGV 좌석기부를 통해 2층 좌석을 교체하면서 47석으로 줄어듦. 현재 253석. - 1층: 매표소(매점 겸업), 여자화장실, 커피자판기, 정수기 - 2층: 미림살롱(소공연장), 남자화장실, 커피자판기, 정수기 - 3층: 미림역사관(상설전시관), 영사실 6. 운영시간: 쉬는 날 없이 매일 9:30~20:30 7. 입장료 - 고전영화(기본 5,000원, 학생 4,000원, 65세이상 2,500원) - 개봉영화(기본 7,000원, 학생/65세이상 5,000원) 인터뷰: 최현준 대표(인천 미림극장) 미림극장 최현준 대표 송경원 _미림극장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현준 _미림극장은 1957년도 지금 이 위치에서 평화극장이라는 이름의 천막극장으로 시작됐습니다. 오랫동안 인천시민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2004년도에 폐관을 했고, 다시 문을 연 건 2013년입니다. 인천 구도심의 오래된 영화관의 모습을 다시금 살려내어 향수를 추억하는 동시에 청년세대에게도 고전영화의 감동과 즐거움을 전하기 위해 운영 중입니다. 송경원 _9년 동안 폐관되었다가 어떻게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나요. 최현준 _1999년도에 인천 지역 멀티플렉스가 생겼습니다. 신도시로 인구 이동이 많았죠. 자연스럽게 동인천역 주변 지역은 구도심이 되었는데 그렇게 극장을 비롯한 상권의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2004년에 결국 미림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고 10년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재개발 이슈가 있었지만 당장 이뤄지는 건 아니라서 오히려 보존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원도심을 살려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중 하나가 옛 영화관을 부활시키는 거였습니다. 인천시와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미림이 다시 문을 열었죠. 송경원 _하지만 그 뒤로도 상황이 순탄하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최현준 _맞습니다. 원래 인천시가 인프라 구축과 재정지원을 약속했는데 이행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결국 포기해버렸습니다. 운영을 맡았던 사회적기업협의회는 한번 폐관됐던 극장을 다시 또 문닫게 할 수는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렇게 비영리 단체이 기업협의회의 주관 아래 다양한 후원과 관객들의 사랑으로 지금까지 운영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송경원 _미림은 '아름다운 숲'이란 뜻인데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최현준 _이름의 근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습니다. 원래 평화극장이었다가 어느 날 미림으로 변경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르기 쉽고 아름답고, 인근 수도국산이 있기도 하고 문화적인 쉼터라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처음에는 시장통에 천막을 치고 시작했다가 점점 사람들이 모여 동인천 인근의 문화공간으로 유명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시장 번화가이기도 하고, 맞은 편에 달동네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문화적 갈증을 채워주는 장소였던 셈이죠. 계단 벽, "미림, 아름다운 영화의 숲"이라는 슬로건이 보인다 송경원 _건물 형태가 독특합니다. 극장 바로 옆에 출입구를 열면 바깥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최현준 _미림극장에 오래 근무하신 직원분들에게 여기에 얽힌 에피소드를 자주 들었습니다. 간판 그림을 그리신 김기봉 선생님, 극장 입구를 지키셨던 양재영 선생님, 그리고 영사를 맡았던 조점용 선생님이 있습니다. 전성기였던 1970, 80년대에는 200석 남짓한 극장에 하루 2, 3천 명씩 몰려들어 영화를 봤다고 합니다. 70년대 중반 관객을 좀 더 수용하기 위해서 극장을 확장했는데, 천장이 높은 장점을 살려 2층에 발코니를 만들고 80석 규모를 늘렸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몰려도 사고 한 번 나지 않았던 걸 오래 근무하신 분들은 다들 자부심으로 여깁니다. 문을 열면 바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 덕분이기도 한 것 같아요.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의 동선이 겹치지 않으니 사람이 깔릴 일이 없는 거죠. 한편으론 낭만적인 면도 있습니다. 2시간 남짓 영화의 세계에 푹 빠졌다가 오른쪽 출구 문을 여는 순간 현실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걸 보면 이곳이 영화관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셨다고 합니다. 미림극장을 추억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도 이런 건물구조라는 분도 꽤 계십니다. 상영관 출구가 거리로 이어지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송경원 _실버영화관 콘셉트의 추억극장 미림으로 재개관을 했습니다. 최현준 _문화 소외층인 노령층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영화관입니다만 거기에 국한되지 않고 가족 관객이 함께 찾는 지역 문화공간을 지향합니다. 2층에 시네토크를 할 수 있는 소공연장 미림살롱을 마련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3층에는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인 미림역사관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재개관 2년 뒤인 2016년에 입사를 했는데 미림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도 과거 자료들을 찾는 거였습니다. 1957년에 개관한 영화관이니 얼마나 많은 자료가 있을까 기대했지만 사실 남아있는 자료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정종화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뜻있는 분에게 자료를 기증받았고, 공사를 하면서 발견한 작은 박스에서 예전 극장을 운영했던 장부 등의 기록 문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3층을 역사관으로 꾸몄습니다. 지금도 조금씩 수소문하며 과거의 자료들을 모으는 중입니다. 아직 많은 자료를 복원하진 못했지만 미림을 방문해주신 인천 시민분들께 이곳이 어떤 곳인지, 우리가 어떤 역사와 얽혀서 지금까지 왔는지 알리고 싶습니다. 시네토크를 할 수 있는 2층 미림살롱의 무대 공간 송경원 _미림극장에는 어떻게 근무하게 된 건가요. 최현준 _인천 지역에 개인적인 연고는 없습니다. 문화재단 관련 일을 오래 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 분야의 사회적 기업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과정에서 미림극장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천국제영화제가 첫 직장이었는데 그렇게 알게 된 영화에 대한 애정과 친숙함이 미림극장에서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송경원 _사회적 공익기업이 주체인 만큼 다양하고 특색 있는 프로그램이 눈에 띕니다. 최현준 _실버영화관이 시작이었던 만큼 인천광역치매센터와 함께 노령층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다만 지금은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생존하기 힘든 상황이라 저변을 넓히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업의 정신에 맞게 취약 계층 고용률을 60%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은 쉽지 않고, 피치 못한 사정으로 직원들이 떠나야 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신기한 건 인천시와 같은 외부 지원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어려운 순간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도움의 손길이 있다는 점입니다. 2016년에 인천시의 지원이 중단됐을 때 2500여 명의 시민들이 서명을 하여 청원을 넣기도 했습니다. 그런 힘으로 오늘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상영관 입구, 다양한 시민들의 메시지가 붙어있는 벽면이 보인다 송경원 _실버영화관에서 출발하여 지역 기반의 문화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최현준 _아직 갈 길이 멀고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70대 이상 관객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버영화관이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차라리 추억을 어떻게 함께 하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을 회상하는 공간으로, 젊은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고전 걸작과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되고자 합니다. 클래식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필요한 건 그걸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1957년에 문을 연 미림극장은 세월의 힘이 쌓여 있습니다. 거기에 지금은 오래된 영화관 이상의 특별함을 드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 중입니다. 어르신들은 물론 원도심 인근의 아이들에게는 이 극장이 유일한 문화공간입니다. 우리 동네 마을 극장이라고 할까요.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꾸준히 고민하면서 이 공간이 가능한 오래 지속되길 희망합니다. 인터뷰: 조점용 영사기사(인천 미림극장) 미림극장 조점용 영사기사 송경원 _미림극장에서 가장 오래 근무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조점용 _1964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6년부터 미림극장에서 영사기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미림극장의 흥망성쇠를 함께 지켜보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영사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자식 셋을 키워냈습니다. 오래 했지만 뒤돌아보면 뚜렷하게 남긴 건 없네요. 그저 쉬지 않고 했습니다. 미림극장이 문을 닫았을 때도 말이죠. 매주 월요일에는 간석동에 있는 노인 종합문화회관, 화요일에는 중구청 지역의 문화원, 수요일에는 부천지역까지 가서 영화를 틀었습니다. 지금도 미림극장에서 불러주면 영사기를 만집니다. 송경원 _미림극장에 처음 오셨을 때 극장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조점용 _내가 처음 왔을 때는 천막은 아니고 단층극장이었어요. 단층에 200석인데 손님은 미어터져서 건물을 새로 지었지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더 몰리고. 재밌는 외화가 한다고 소문나는 시기에는 매일 작게는 1천 명, 많게는 3천 명까지 와서 장사진을 쳤죠. 인근 지역에서 사람이 몰려드는 그야말로 화제의 중심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내가 여기서 영화를 튼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송경원 _개관 당시부터 꾸준히 인천 문화의 중심지였군요. 조점용 _맞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는 TV가 집집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관이 최고의 호사였으니까요. 당시 수도국산 산동네는 정말 못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로애락을 주는 영화가 더욱 소중했죠. 인천 동구는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이쪽으로 영화를 많이 보러 왔습니다. 왜냐면 서울에서는 개봉영화를 보려면 예매를 해야 하는데, 여기는 아무 때나 와서 자리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당시 인천 지역의 극장 시스템은 그랬습니다. 지금은 문을 닫은 문화극장이나 오성극장, 그 위쪽의 인천시민회관 등 인천 지역 영화의 산실이 바로 동인천 동구 이 동네였거든요. 송경원 _동구 지역 영화관 중에서도 미림극장이 특별했던 점은 무엇인가요. 조점용 _사장님이 흥행할 영화를 잘 골라왔어요. 당시 영화수입업자들은 다 충무로에 있었는데 인기 있는 영화를 얼마나 가져오느냐에 따라 수입 차이가 꽤 컸습니다. 한국영화는 별로 인기가 없어서 억지로 틀고 그 대신 외국영화 틀 날짜를 받아오곤 했지요. 당시 사장인 고용성 씨가 미 8군사령부 수석 통역관이었던 사람이라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했어요. 영어가 되니까 영화도 잘 고르는 거죠. 그래서 서울의 수입업자들이 고용성 사장을 찾아와서 어떤 영화를 수입할지 물어보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고용성 그 양반이 영화에 대한 식견도 높아서 당시에 해외영화 잡지 같은 것도 챙겨보고 그랬습니다. 영화가 미국에서 흥행했다고 한국에서 다 흥행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한국 정서에 맞는 작품을 잘 찾아야 되는데, 고용성 사장이 귀신같이 그런 걸 잘 골라냈습니다. 그런 자산을 가지고 영화를 빠르게 잘 배급해오기도 하고 그랬지요. 역사관에 전시되고 있는 80-90년대 상영되었던 영화 예고편 필름들 송경원 _40년 세월 영화를 틀어오셨지만 그 중에서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영화가 있을까요. 조점용 _글쎄, 워낙 많아서. <킬링 필드>(롤랑 조페 감독, 1984)라는 영화가 공무원들이 인사고과에 반영된다고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라 단체관람객이 많이 왔던 게 생각납니다. 학생 단체관람도 많았고. 당시에 한국영화는 관객이 잘 안 드는데 스크린쿼터 때문에 억지로 틀기도 했어요. 그럴 땐 한국영화 간판만 걸어놓고 외화를 틀기도 했죠. 단속이 나와서 걸리다 보니까 나중에는 못하게 됐지만. 송경원 _2층 발코니 공간의 좌석이 특색이 있는 구조입니다. 조점용 _사람이 워낙 몰리니까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려고 공사를 했죠. 당시엔 건축학과 교수들도 와서 이야기하곤 했어요. 여기가 인천에서 영화 보기 제일 좋은 곳이라고. 다들 좌석 한 자리라도 더 늘리려고 하지 이렇게 영화를 보기 좋게 설계한 곳이 없다고. 상단, 하단, 구석 어디에 앉든 스크린이 가려지는 곳이 없거든. 280석이 정원이지만 계단에 앉아서 보기도 하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받았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어렵게 발걸음 했는데 많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손님이 하도 많으니까 여름에는 에어컨이 돌아가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들 열기랑 습기가 섞여가지고 유리창이나 렌즈만 닦는 아르바이트를 따로 고용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몇십 년을 운영하면서 이제껏 큰 사고 한번 안 났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도 그게 자랑거리입니다. 그만큼 직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다는 거죠. 상영관 2층 발코니 형 좌석 송경원 _그러던 게 1990년대 말, 2000년 초가 되어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침체에 빠졌습니다. 조점용 _서서히 사람이 없어진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관객이 한 번에 사라졌어요. 시대가 바뀐 거죠. 한 번에 14개 관에서 여러 영화를 상영하니 단관극장으로 사람들이 올 리가 있나. 매일 미어터지던 입구가 정말 거짓말처럼 한산해졌습니다. 송경원 _2004년 문을 닫는 마지막 날까지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조점용 _지킬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본 겁니다. 손님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허전한 마음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이 길이 내가 갈 길이 아닌가 보다 싶기도 하고. 그래도 어쩌겠어. 평생 해온 게 이 일이고 내 자리가 여긴데. 에어컨도 없이 여름이면 지옥 같은 영사실에서 그렇게 오래 해왔는데 이제 와서 뭘 다른 일을 하겠어요. 우리 집이 바로 여기서 몇십 미터 앞이거든. 여기서 일하려고 집을 아예 구해버렸지. 일하기 좋았던 시절도 있고 어려운 시절도 있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니 오늘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극장이라는 공간이 많이 퇴색이 됐어요. 추억을 쌓고 잊히지 않는 공간으로 자꾸 발전되어야 하는데 그런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요. 미림극장이 다시 문을 연 건 반가운 일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쉽진 않지만. 필자: 송경원(씨네21) 사진촬영: 손홍주 인터뷰 일자: 2022년 5월 20일
등록되지 못한 죽음, <아무도 모른다> 내가 본 첫 번째 고레에다 히로카즈(1962~)의 영화는 < 아무도 모른다 >(2004) 이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그를 ‘연구’하기로 했다. 그는 보기 드문 ‘자기 현장’의 지식인이다. 나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 운동을 계기로 처음 일본을 방문했다가 충격을 받았고,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한 근대를 실현한 국가가 일본이라고 생각했다. 늘 보던 일본 영화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석학, 도미야마 이치로는 일본을 일본이라고 쓰지 않는다. ‘일본’이라고 쓴다. 일본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 글의 제목에 들어간 ‘포스트 자본주의와 일본’은 H. D. 하루투니언과 마사오 미요시가 엮은 유명한 일본 입문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일본』을 바꾼 것이다. ‘일본’만큼 역설적인 공간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인문학 텍스트로는 최고라는 뜻이다. <아무도 모른다>. 열두 살 소년부터 막내까지, 네 남매는 돌아오지 않을 엄마를 기다린다. 엄마는 큰아들에게 말한다. “엄마는 행복하면 안 되니?” 이 장면을 본 사람들은 “어쩌면 저럴 수가……”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금방 고레에다의 카메라 속으로 빠져든다. 사회 구조나 부모를 비난하기 전에, 아이들만의 삶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모두 아이들의 생존 방식과 관련이 있다. 길거리에서 돈을 줍는 것, 몰래 음식을 얻어먹는 것. 모두 딱히 탈법도 불법도 아니지만, 영원히 그렇게 살 수도 없고 자주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아이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자판기의 거스름돈 창구에 손을 넣어본다. 누군가 잊고 간 동전을 기대하면서. 영화를 본 후 나도 그들처럼 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몇 달 만에 딱 한 번, 500원을 횡재한 적이 있다. 아무도 모른다 일본에서 자판기 다음으로 많은 시설이 편의점인 듯하다. 편의점에서 직원이 유통 기간이 임박한 혹은 살짝 지난 먹을거리를 소년에게 주는 장면도 좋다. 일본어에서는 유통 기간을 ‘상미기한(賞味期限)’이라고 한다. 팔기 적당한 상품은 아니지만, 맛을 ‘즐기는데’는 큰 무리는 없다는……. 편의점 직원은 좋은 일을 하면서도, 아이를 쫓아내듯 빨리 가라고 손짓한다. 2017년 여름밤, 나는 교토 대학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 맛있는 빵과 케이크를 잔뜩 들고서. 일본은 온 나라(?)가 맛있는 빵집으로 넘쳐나지만, 관광과 전통의 도시 교토는 특히 더 그렇다. 신호등이 바뀌는 동안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나랑 어느 소년 단 둘만이 거리의 행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소년이 <아무로 모른다>의 주인공 배우 야기라 유야와 똑같이 생겼던 것이다. (그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 역사상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탔지만, 중간고사 때문에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횡단보도의 그 소년은 도시락을 네 개쯤 들고 서 있었다. 흰 러닝셔츠, 마른 몸, 땀에 젖은 머리카락. 그런데 일본에서는 드물게 그가 들고 있던 물건은 비닐봉지 없이 낱개 그대로였다. 소년은 두 손에 도시락을 탑처럼 쌓아 턱으로 받치고 있었다. 나는 편하게 넣어 들고 가라고 종이봉투를 주었다. 그 소년도 <아무도 모른다>의 가장처럼 편의점에서 팔다 남은 음식을 자정 즈음에 얻어가는 길이었을까. 그는 내게 고맙다는 듯, 고개를 여러 번 꾸벅이며 뛰어갔다.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동경에서 발생한 ‘버림받은 네 남매’ 사건을 소재로 삼아 만들어졌다.(영화와 실화의 내용은 다르다고 한다.) 엄마는 각기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네 명의 아이들을 두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난다. 큰아이를 제외한 세 아이는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발견되기 이전까지 6개월 동안 아무도 모르는 그들만의 삶을 살아낸다. 서류 한 장이 인생을 좌우하는 극도로 관료적인 일본 사회에서 등록되지 않은 어린이의 죽음은 당시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비행기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소년이 죽은 여동생을 공항 부근에 묻고 돌아오는 장면에 대해 소설가 김연수는 이렇게 썼다. “누구에게나 이뤄지지 못한 약속의 땅에 사랑하는 사람을 묻는 일이 한 번쯤은 찾아오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묻을 땅을 파느라 더러워진 옷, 아니 얼룩진 옷……. 옷이야 갈아입으면 되지만, 얼룩진 마음은 기억에서 잊혀질지언정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씨네21』, 934호) 태풍이 지나가고 가족 영화가 아니라… 고레에다의 영화들 - < 어느 가족(좀도둑 가족) >, < 세 번째 살인 >, < 태풍이 지나가고 >, < 바닷마을 다이어리 >,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 하나(花よりもなほ) >, < 공기인형 >, < 걸어도 걸어도 >, <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 < 원더풀 라이프 >... 다 좋았다. ‘가족 영화’가 따로 있을 리 없지만, <어느 가족>이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걸어도 걸어도>는 가족이란 ‘이다’가 아니라 ‘된다’임을 잘 보여준다. 그의 모든 작품이 내게 위로가 된다. 고레에다의 영화는 치열하지만 고요하다. 나만의 감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영화에서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다. 그 그림자가 내 삶의 번잡스러움과 욕심, 고통을 잊게 한다. 삶이란 죽음이라는 영원하고도 편안한 잠(永眠)이 기다리는 행복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기대하지 않으면, 삶도 행복하지 않다. 죽음만이 희망이다. <좀도둑 가족(万引き家族)>의 우리 말 제목 <어느 가족>은 마음에 안 들 뿐만 아니라 아주 ‘틀린’ 번역이다. 이 영화는 가족 영화 중 하나라기보다는 <아무도 모른다>처럼 일본 사회를 그린다. 좀도둑질과 막노동, 연금으로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모습이니, ‘좀도둑 가족’이 맞다. 2018년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에 해당하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1997년 이마무라 쇼헤이의 < 우나기(うなぎ) > 이후 21년 만의 일이다. <좀도둑 가족>은 칸 외에도 유라시아 국제영화제, 뮌헨 국제영화제, 시드니 영화제, 멜버른 국제 영화제 등에서도 수상 혹은 후보에 올랐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이다. 아마도 한국 사회라면, 감독은 한국 사회의 그 어떤 추악함을 그렸더라도 청와대에 초대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수상 소식에 침묵으로 일관하다가(못마땅해하다가) 뒤늦게 축하 전화를 하려 했으나, 감독은 아베의 축하를 거절했다(아베는 국제대회에서 자국을 빛낸 스포츠 스타나 예술가에게 축하 전화를 자주 해대는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아베에게 <좀도둑 가족>은 일본 사회의 그늘에 카메라를 들이댔을 뿐 아니라 천황제를 근간으로 한 전통적인 가족주의를 숭상하는 일본의 주류 정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여겨졌으리라. 고레에다 또한 평소에 아베의 노선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다. 어느 가족(좀도둑 가족) 나는 <좀도둑 가족>을 나의 선생님과 같이 보았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나누었다. 나 - 고레에다 영화는 거의 다 보았는데, 저는 그 가족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가족이 없어서 외로운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다 지긋지긋. 사람도, 가족도 모두요. 선생님 - 어제 나는 일본에서 주변부 삶이 영화 화면에 담겨지는 거. 그것을 행하는 감독이 좋았다. 영화로는 아버지가 되는 법이 훨씬 좋지……. 영화는 가족 영화라기보다는……. 나 – 예... 그렇죠, 일본 주변부... 그 집 미술감독, 끝내주지 않아요? 쇼타(‘큰 아들’)가 두 번 버림받았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인생임을 받아들이라고 기도했어요. 물론, 제 자신에게 대한 다짐이죠. 선생님 - 오키이. 어제 영화 릴리 프랭키가 사는 마지막 집은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만 사는 집이었던 같은데. 쇼타가 그러잖아. 자기가 잡힌 거 일부러 그런 거라고. 쥬리 때문에 잡힌 거잖아. 가족들이 떠나려고 했던 것도, 이해한다는 거지.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면 다 잡힌다는 거…… 그런 삶을 사는 것은 다른 방식의 삶의 지혜와 방식을 배우는 것이지. 그런 면에서 감독이 이 시대를 보는 눈이 깊은 거지. 아시아라는 공간, 시간을 앞선 자본주의 일본은 어떤 사회인가. 나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기보다 한국이 가장 모르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한국에 관심이 없고, 한국은 일본을 제대로 아는 게 없다. 내가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가장 놀랐던 일은 거리에 맘껏 나붙은 ‘共産黨’ 포스터였고, 두 번째가 자판기였다. 물론 일본 공산당은 망한 지 오래고, 재일교포와 오키나와 인들과 연대하기를 거부하고 자본가들에게 노동 고용을 부탁하러 다니는 ‘단체’다. '共産黨' 포스터와 자판기 자판기는 몇 미터 간격으로 있는 정도가 아니라 다닥다닥, 거리의 가로수보다 아니 인구보다 많은 것 같았다. 음료, 담배, 라면, 인스턴트 식품은 기본. 여고생이 입던 팬티 냄새가 사라지지 않도록 캔으로 봉인한 섹스 관련 상품을 파는 자판기도 있다. 일본은 ‘한때’ 전자 제품의 나라이기도 했지만 빵, 치즈, 잉어, 옷감, 디자인, 와인, 종이, 두부, 면(麵), 건축, 음악, 다신(多神), 화장품 그리고 세습, 서브 컬처의 나라이기도 하다. 나 역시 평범한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이 있다. 일단, 그들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무시한다. 백인에 대한 호감은 자발적 식민지급이다. 나는 영어도 일본어도 못 하지만 일본에서는 반드시 ‘느끼한 발음’으로 영어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호토 워토(hot water)” 대신에 “할 워러, 프리즈”이런 식으로 말이다. 일본과 미국은 히로시마 원폭과 9․11 전까지, 전 세계에서 단 한 번도 자국이 전쟁터가 된 적이 없는 나라다. 덕분에 일본은 천 년 동안 아무런 파괴 없이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일본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들은 ‘셀프 오리엔탈리즘’으로 서양의 일본관을 상품화했다. 서양인들이 일본 문화에 느끼는 신비로움은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한때 스시는 미국의 지식인 문화를 상징했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 교과서에는 ‘일본 편’이 따로 있(었)다. 외교 의전에서 일본은 공부가 필요한 사회다. 특별한 이해와 주의를 요한다. 예를 들어 대개의 언어, 특히 우리말에서 ‘고려해보겠습니다’는 대개 긍정적인 의미지만, 일본어에서 ‘절대 불가, 앱솔루트리 노’를 의미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본만의 문화가 있다는 얘기다. 파악되지 않는 타자? 롤랑 바르트는 <기호의 제국>을 썼다. 일본 사회는 기호(sign)만 있을 뿐 실제 말의 의미(이른바, ‘혼내’)를 알기 어려운 사회라는 뜻이다. 통념과 달리 일본은 류큐 왕조를 비롯한 수많은 다민족(nation), 다민족(ethnic) 국가, 다인종, ‘혼혈인’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근대 이후 강제 통합의 과정은 곧 내전을 의미했다. 홋카이도의 면적만 남한의 3분의 2를 넘는다. 고베나 오사카만 가도, 근대 초기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를 꿈꾸었고, 실현했다. 유럽 문화에 정통한 인문학자가 수두룩하다. 탈아입구를 실현한 정도가 아니라 일찍이 메이지 유신을 시작으로 해서 국민국가 체제를 완성, 세계 제패를 기획하고 미국, 중국과 전쟁을 치렀다. 작은 나라(‘倭’)가 아니다. 노벨상,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1950년대에 ‘성취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일본 문제’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하루투니언 같은 일군의 자본주의와 근대성 연구자들이 일본에 주목하는 것은, 일본이 공간적으로는 서구가 아니지만, 자본주의의 발전 속도(시간)는 서구를 앞지른 지역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이면서 아시아에 있다. 서구를 쫓으면서, 동시에 서구를 초과했다. 이 ‘모순’은 현재 일본 사회의 고통이기도 하고, 인류가 다음 세계를 사유하는 ‘자원’이 될지 모른다. 일본 자국의 문학, 인문학, 역사학은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데, 이들은 남을 침략하기 위해 자신을 연구했고 이미 ‘정상(頂上)국가’나 ‘정상(正常)국가’를 경험했다. 그래서 한국의 지식인처럼 식민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나라 만들기에 열중하기보다는 당장, 자국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문제에 관심이 없다. 모든 담론이 “ ~ 게 되어야 한다(should be)”다. 현재는 지나가고 있는데, 오지 않을 미래를 설계한다. 자본주의와 발전주의, 민주주의가 같은 말로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주민등록증을 대신한 스마트폰 사용이 그것이다). 일본은 ‘더는 성장할 수 없는 자본주의’, 금융 유통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의 징조들이 197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출산, 자살, 우울증, 초고령화, 빈집 증가, 고실업, 프리터의 등장…… 힘든 일 기피 현상이 의대 진학 저조로 나타나서 일주일에 평균 1명의 임산부가 산부인과를 찾지 못해 사망한다. 최근에는 인생 자체를 리셋(reset)하는 자발적 실종인 ‘인간 증발’까지, 다른 사회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사회 현상이 있다. 일본의 계급 세습과 상상을 초월하는 경쟁주의, 학벌 사회는 의외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다. 북한은 정권 세습이지만, 일본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자민당 일당 독재는 전후 계속되고 있고 ‘가업’이란 이름의 계급 제도가 철저하다. TV 예능 프로그램에는 개그맨들이 어느 학교 출신인가가 병기된다. 오타쿠, 이지메, 히키코모리, 희망 난민(희망이 있지만 이룰 수 없어 고민하는 젊은이들), 하류지향(‘루저’를 적극적으로 선택한 학생들), 소비 주체로서의 자부심, 공부하는 이들에 대한 경멸, 수학(數學)과 수학(修學)을 구분하지 못하는 도쿄 대학 학생들, 부자 나라 일본의 극빈층 노인들, 고독사 연 2만 명, 젊은이들의 탈력(脫力, 온 힘을 빼고 아무것도 안 함), 혐한(嫌韓), 혐중(嫌中)……. 일본의 현재를 살펴보는 것은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고레에다가 소중한 혹은 윤리적인 예술가인 이유가 여기 있다. 자기 사회를 직면하고 고민을 담되, 그 상황이나 인물을 대상화하지 않고 껴안는다. 이것이 그의 영화가 지닌 소구력이며, 관객은 그가 재현하는 특정한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가 <좀도둑 가족>에서 가난한 일본인을 그렸다고 해서, 일본을 가난한 나라라고 생각하거나 일본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영화가 아무리 다양해도 전 세계 관객들은 미국 영화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비교가 된다. 사족 - <좀도둑 가족>에서 두 명의 배우가 생각난다. 역시, 배우는 작품으로만 만난다. 안도 사쿠라를 ‘취조’하는 이케와키 치즈루는 더 이상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의 그 소녀가 아니었다. 그리고 내 눈썰미가 맞다면, 성 구매를 하는 남자 손님으로 잠깐 나왔던 배우는 < 종이 달 >의 ‘못된 녀석’ 이케마츠 소스케다. (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우) 어느 가족(좀도둑 가족)의 이케와키 치즈루 (좌) 종이달, (우) 어느 가족(좀도둑 가족)의 이케마츠 소스케
“코넬의 영화는 홈 무비의 본질이다. 그의 영화는 우리 삶 매일의 어디에나 있는 가까운 것들을 다룬다. 큰 것이 아닌 작은 것들 말이다. 전쟁도 아니고, 격정적인 감정도 아니고, 극적인 상황이나 충돌도 아니다. 그의 이미지는 훨씬 단순하다...조셉 코넬의 박스들, 콜라주, 그리고 홈 무비는 우리 시대의 보이지 않는 성당이다. 즉, 오늘날 여전히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최고의 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그것을 쳐다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조나스 메카스, 「조셉 코넬의 보이지 않는 성당The Invisible Cathedrals of Joseph Cornell」 (『빌리지 보이스The Village Voice』) 고물상이나 중고물품 판매점에서 발견한, 한때는 아름답고 귀중했던 이미지와 사물을 수집하고 박스 안에 넣어 만든 아상블라주 작업이 조셉 코넬을 대표한다면, 그가 만든 (28편에 이르는) 일련의 영화 작업은 그다지 가치 있게 평가되지 못했다. 물론 코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고 말이다. 그나마 최초의 영화 < 로즈 호바트 >(1936) 등 193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영화 제작 활동 전기의 작업들이 파운드 푸티지와 원본의 변형이라는 기법의 예시로서 잘 알려진 반면, 1950년대 후반의 시적인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대부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는 코넬이 래리 조던, 루디 부르크하트나 스탠 브래키지와 같은 이들과 함께 협업하여 뉴욕의 이곳저곳을 직접 촬영하고 편집한 것으로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것들인데, < 요정의 빛 >(1957)은 그 중 하나이며 스위스 태생의 영화감독 루디 부르크하트와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후기의 영화는 대부분 명확한 서사나 중심된 사건이 없으며, 단지 도시의 아주 미시적인 단면들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일상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장소는 그의 영화를 통해 의문과 상상력으로 가득 찬 곳으로 비틀린다. 1903년에 태어나 1972년에 죽기까지, 코넬은 생애 거의 전부를 뉴욕 플러싱(Flushing)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어머니, 그리고 뇌성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한 남동생 로버트와 함께 살았다. 플러싱은 맨해튼의 삶과는 그다지 관련 없었으며, 그보다는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이 사는 퀸즈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산책자처럼 도시를 걸어 다녔고 버려진 필름을 주웠다. 그리고 자판기 식당, 도서관, 서점, 공원, 중고품 판매점에 규칙적으로 드나들었다. 그에게 도시라는 공간은 일상적인 곳이자 매우 중요한 곳이었고, 언제나 도시의 세세한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50년대 영화는 대부분 이와 같은 생활 반경에 있는 뉴욕의 곳곳, 이를테면 3번가의 고가철도(< Gnir Rednow >, 1955-1960), 플러싱 공동묘지(< Angel >, 1955), 유니온스퀘어 공원(< The Aviary >, 1954-55), 리틀 이털리의 골목(< A Legend for Fountains >, 1957-65) 등을 담고 있다. <요정의 빛> 스틸컷 < 요정의 빛 >은 맨해튼 한복판에 위치한 브라이언트 공원과 그 안에 있는 뉴욕 공립도서관이 배경이다. 약 7분 정도 길이의 이 영화는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한 소녀가 부서진 양산을 들고 공원으로 달려가면서 시작한다. 그는 화가인 친구 이본 토마스의 딸 그웬 토마스로, 당시 12세의 발레를 배우는 학생이었다. 화면 속의 그웬은 분수 주변에 모인 새들을 춤추듯 좇거나 날아다니는 것을 바라본다. 이후 카메라는 계속해서 공원의 여기저기에 앉아있거나 날아다니는 새들을 천천히 이동하며 보여준다. 녹색이 우거진 공원의 나무 사이로 새들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한낮의 밝은 빛이 그 광경을 담은 화면을 무척이나 아름답게 만든다. 이윽고 카메라는 공원 밖의 길거리를 비추며 지나가는 차들과 사람, 공원에 한가로이 앉아 있는 인물들을 차례로 담는다. 개를 산책시키는 할머니,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 분수대에 앉아 있는 젊은 남성들. 쓰레기를 수거하는 청소부 등 무척이나 소박한 일상적 풍경들이 시선을 옮기며 이어진다. 별다른 서사도, 눈에 띌만한 시각적인 실험도 이 영화에서는 감지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무척 아름답고 정적인 < 요정의 빛 >을 몇 번이고 돌려보다 보면, 어느 순간 매우 기묘한 기분이 든다. 화면에 담긴 사물과 장소의 풍경은 매우 구체적인 것임에도 아주 멀리 아득하게 잡히지 않는 간격을 두고 놓여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위해 앞서 말한 등장인물, 그웬 토마스에서 시작해보자. 그의 존재가 특징적인 이유는 영상 전체를 통틀어 새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와 함께 화면에 잡힌 숏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여타의 사물과 등장인물이 일상적인 실제 세계에 속한 반면 그웬은 저 홀로 영화를 위해 연출된 요소, 즉 제목에서 추측컨대 ‘요정’이라는 허구적 인물로 등장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는 두 종류의 세계를 하나의 공간 안에 공존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달리 말하면 브라이언트 공원은 그웬 토마스가 연기하는 요정이 사는 가상의 공간임과 동시에 무척이나 일상적인 삶이 지속되는 현실의 세계로, 이 두 세계가 한데 포개지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차이가 없는 두 세계는 그웬이 등장하는 숏과 그렇지 않은 숏의 교차를 통해 구분된다. 그리고 그웬은 요정을 표상하는 것을 넘어 기묘한 거리감을 생성하는 기능적인 것으로 역할 한다. <요정의 빛> 스틸컷 화면에서 그웬이 사라졌을 때, 그 화면은 그웬을 외화면에 방기하기보다는 시선의 주체 그 자체로 전환시킨다. 이를 암시하는 부분은 영상의 후반에 등장한다. 카메라는 화면의 왼쪽 밖을 응시하고 있는 그웬의 얼굴을 몇 초 정도 클로즈업하여 보여주고, 그다음 장면으로 공원을 서성이는 하늘색 치마를 입은 또 다른 소녀를 보여준다. 그 소녀는 화면의 왼쪽에서 등장해 두리번거리다가 오른쪽으로 나가고, 곧이어 오른쪽을 응시하는 그웬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화면은 그저 새들이 걸어 다니는 공원에서 무언가를 이리저리 쳐다보는 소녀의 모습을 찍는 것이다. 즉 요정으로 분한 그웬을 매개변수로 두고, 카메라의 시선과 숏의 배치를 활용함으로써 일상적인 도시 공간은 친밀하고 익숙하면서도 매우 낯선 기묘한 감각을 생성하는 상태에 놓인다. 아담 시트니는 「조셉 코넬의 영화적 시선 The Cinematic Gaze of Joseph Cornell」이라는 1980년의 글에서, < 요정의 빛 >의 아름다운 어린 소녀를 통해 코넬이 보여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의 상호작용”은 매우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영화들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실과 같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실제로 화면에 육화되어 등장하는 요정의 형상에 관객의 이목이 집중되지만, 카메라로 공원의 풍경을 비추면서 그의 존재는 그 장소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것으로 나아가게 되며, 우리의 시선을 인도한 이후 사라진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러한 그의 ‘사라짐’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청소부가 지나쳐가는 쓰레기통에 꽂혀 있는 부서진 양산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로 갔는지, 실제인지 허구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가 매개한 세계가 우리에게 어떻게 남겨졌느냐일 것이다. 이 장면 이후 카메라는 물방울이 떨어져 일렁이는 분수의 물웅덩이를 클로즈업하여 보여주고 끝이 난다. 시트니는 이러한 코넬의 영화가 “그가 경험한 장소의 영혼에 대해 기도하는 행위”라고 표현한다. 모든 영화에서 양산을 든 요정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코넬의 영화는 영적인 존재가 사라진 그곳에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세계의 이미지를 태연히 위치시킨다. <천사>(1957) 스틸컷 같은 해 11월, 마찬가지로 부르크하트와 함께 만든 3분여 길이의 <천사Angel>는 < 요정의 빛 >과 공유하는 요소가 많다. 17개의 짧은 숏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분수를 내려다보며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천사 조각상이다. 다소 낮은 위치에서 올려다보며 하늘을 배경으로 정면에서 조각상을 찍은 숏에서 시작하여, 바로 그다음 숏은 비스듬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후 분수대와 그 주변 풍경을 클로즈업하여 찍은 숏들과 조각상을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는 숏들이 교차되다가, 마지막에는 조각상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며 하늘을 비중 있게 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천사는 바라봄의 대상이 되었다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로 바뀌고, 클로즈업 되어 파편화된 분수대의 풍경은 그 시선과 숏의 교차 속에서 매개되는 실제라는 점에서 <요정의 빛>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요정의 빛>에 비하자면 시선과 숏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장소에 대한 감각적 경험의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 요정의 빛 >은 코넬의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소리가 없다. “이상적인 세계의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무성영화의 중요한 잠재적 가능성”이 유성영화에는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였던 그는 언제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세계를 초월해야 하는 필요에 대해 역설했다. 코넬의 영화를 당대의 오디오비주얼 미디어 문화와 병치시키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 마이클 피고트(Michael Pigott)의 최근 연구서 『Joseph Cornell Versus Cinema』(Bloomsbury, 2013)의 핵심적인 주장은, 코넬의 영화는 보고/보여주는 대상(특히 몸)을 통해 우리를 일상적인 세계와 꿈의 세계에 동시에 위치시키며, 이로써 우리가 우리의 실제 세계를 바라보고 지각하고 사용하는 방식을 변형시키게 되는 잠재적 효과를 지닌다는 것이다. 특히 1950년대 중반 이후의 후기 작업은 도시 공간, 그리고 이와 관계된 몸에 대한 대안적 인식의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당대를 지배하는 일반적(경제적) 세계의 시간을 교란시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즉 피고트는 도시 공간 안에서 실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상적인 시간을 제안하는 것으로서 코넬의 영화를 이해한다. 오래되고 낡은, 일상적인 세계의 사물을 수집해 박스 조각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카메라에 일상적인 세계의 지속들을 담았다. 이는 실제 세계의 푸티지를 콜라주하여 또 다른 실재성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전반적인 그의 예술적 실천과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스 조각을 비롯한 여타의 입체 작업들과는 달리 그의 영화는 콜라주로 창조된 실재적 세계의 감각적 주체로서 관객을 더욱 명확하고 강렬하게 요청한다. 결국 이러한 논의에 따라 코넬의 영화를 이해했을 때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과연 영화가 실제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게끔 만드느냐, 혹은 변형시키느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