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
- 감독
- 아더 팬
- 제작년도
- 1970
- 출연
- 더스틴 호프만, 페이 더너웨이, 치프 댄 조지, 마틴 발삼, 리차드 멀리간
<성벽을 뚫고>의 육군 하사로 시작 1미터 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황해(黃海)가 극장 화면에 처음 얼굴을 비친 것은 1949년 한형모 감독의 데뷔작 <성벽을 뚫고>(김보철프로덕션 제작)부터였다. 이 영화는 해방 후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을 배경으로, 육군 소위(이집길)인 처남과 공산주의자(권영팔)인 매부 사이에 벌어지는 이념의 갈등과 반목을 그린 것이다. 매부는 처남을 매수하려 하고, 처남은 매부를 설득하려 하지만 실패하자 서로 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황해는 이 작품에 조연급인 육군 하사 역으로 출연했다. 남북 분단이 가져온 동족상잔의 비애를 담은 최초의 영화였다. [사진]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서의 황해 이렇게 영화계에 나왔으나 황해는 한동안 후속 출연작을 내지 못했다. 6.25전쟁과 연극 때문이었다. 그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한 것은 ‘뚱뚱이 양훈’과 겨룬 코미디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이었다. 이후 <나는 고발한다>(김묵, 1959)를 비롯한 <안개 낀 서귀포>(임한림, 1959), <햇빛 쏟아지는 벌판>, (정창화, 1960),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현상 붙은 사나이>(김묵, 1961), <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권택, 1962), <폭력지대>(김묵, 1965),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 등 액션물과 <한많은 청춘>(권영순, 1958), <자장가>(하한수, 1958), <목포의 눈물>(하한수, 1958), <울지 마라 두 남매>(서석주, 1960), <울려고 내가 왔던가>(김화랑, 1960) 등 신파 멜로, <박서방>(강대진, 1960), <마부>(강대진, 1961) 등의 서민영화,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 <심봤다>(정진우, 1979) 등 문예영화에 출연했다. [사진] <자장가>(하한수, 1958)의 황해. 왼쪽은 배우 한미나(사진제공: 김종원) 황해가 <자장가> 유의 신파와 액션 연기에 강한 것은 일찍이 악극단 등에서 쌓은 15년 경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버라이어티 쇼적 재능과 과장된 표정연기는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차츰 탈색돼 69년 <독짓는 늙은이>를 계기로 내적 연소의 연기양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단지>(이원세, 1975), <부초(浮草)>(이한욱, 1978)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신장의 한계 극복한 무대 경험 황해는 1920년 3월 6일 동해의 푸른 물을 끼고 뒤쪽으로는 외금강 줄기가 뻗어나간 강원도 고성군 장전읍 경동(京洞)에서 태어났다. 정어리 기름공장을 경영하는 전병근(全炳根)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큰 아들과 네 살 터울인 그에게 홍구(弘玖)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아들을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는 큰 아버지 댁에 보내 주교(舟橋)국민학교를 다니게 했다. 졸업 후 경신중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3년제인 경성상공업 기계과에 들어갔다. 졸업(1936년) 후에는 미쓰비시(三菱)백화점 식료품 점원을 거쳐 중앙우체국 집배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집배원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변두리 로 나설 때면 무료를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어느새 동료들 사이에서 ‘노래하는 집배원’으로 통했다. 하지만 이 일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형과 함께 아버지가 하는 정어리 가공 일을 도왔다. [사진]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에서 황해와 윤정희 그런데 이 무렵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회가 찾아왔다. 열여덟 살 되는 해 봄이었다. 서울의 성보(城寶)악극단이 전국순회 공연 중에 이 고장을 찾아온 것이다. 악극단은 관객동원의 수단으로 공연 첫날 노래자랑대회를 열었는데, 홍구 청년도 참가했다. 그의 노래를 들은 한 여단원이 소질이 있으니 서울에 가서 가수의 길을 걸어보라고 권했다. 그녀가 바로 ‘성보의 간판스타’인 가수 신 카나리아였다. 이에 용기를 얻어 성보악극단의 연구생 모집광고를 보고 응모, 1천 2백여 명의 경쟁자 가운데 12명을 뽑는 성보악극단의 제1기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들어간 극단에서 처음 출연하게 된 것이 신 카나리아 주연의 <춘풍일가>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는 공연 때마다 객석에 나와 다른 배우들이 하는 동작이나 대사, 표정을 관찰하고, 화장술을 익혔다. 그런 열성 탓인지 그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지방공연의 주연 배우로 발탁되었다. 지방공연은 밤차에서 새우잠을 자는 등 고달픈 일이었지만 무대에 서기만 하면 신명이 났다. 이렇게 시작한 연극이 1938년부터 4년 동안 10여 편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신 카나리아의 부군인 김화랑이 제일악극단을 조직하자 성보악극단을 떠났다. 2차세계대전으로 해초 가루로 만든 빵이나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그는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제일악극단에 머물렀다. 그런데 계속 조여 오는 징용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결국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천진에 내리자 미리 와있던 신 카나리아, 박단마 등과 함께 손목인이 이끄는 신태양악극단에 입단했다. 백파진(白波進)이란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사진] <인간단지>(이원세, 1975)에서의 황해(사진제공: 김종원) 군예대원으로 아내와 평양까지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잠시 수용소에 갇히기도 했으나 해방 이듬해인 1946년 6월 그는 간절히 기다리던 귀국선에 오르게 된다. 인천항에 내린 그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토록 그리던 황해 바다, 밟고 싶던 조국의 땅이 아닌가. 그는 “한국남자는 황해 바다처럼 넓고 거센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했던 한 광복군 노인의 충고를 떠올리며 예명을 다시 황해(黃海)로 바꾸었다. (황해, 「藝에 살다(13) 최초의 액션 스타(13)」, ≪일간스포츠≫, 1979년 11월 7일자) 이렇게 3년 만에 서울 돈암동 집으로 돌아오자 다시 신 카나리아 부부가 만든 새별악극단에 가담했다. 이 무렵 <자유만세>(1946)를 찍은 한형모(韓瀅模) 촬영기사가 만나자는 기별을 보내 왔다. 이번에 <성벽을 뚫고>라는 영화로 ‘입봉’하게 되었는데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해는 이렇게 하고 싶었던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연극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새별악극단을 인수하고 전성기로 올려놓을 무렵 가수 백설희(白雪姬)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자 동거생활을 결행하였다. 그들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살림을 꾸린지 15년 만인 1960년 서대문 밖 백련사(白蓮寺)에서였다. 그는 6.25전쟁을 겪으며 아내와 함께 군예대(軍藝隊)에 들어가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사진] <부초>(이한욱, 1978)에서의 황해와 윤세라(오른쪽)(사진제공: 김종원) 배우로서는 불리한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승부욕으로 관객 앞에 다가선 ‘작은 거인’ 황해는 1965년 장동휘, 허장강과 함께 동인프로덕션을 설립, 파월장병의 용맹상을 그린 <맹호작전>(1965)을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2월 9일 슬하에 노래하는 배우 전영록을 남기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흔히 말하는 노인들의 치매증이라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의 생애를 오늘에서 옛날로 다시 한 번 거꾸로 살아가는 일이었다. 노모가 이미 사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으실 때는 두 분이 한참 새살림을 일구고 있을 무렵으로, 시어머니 저녁상 걱정을 할 때는 당신이 갓 시집오신 젊은 새색시의 시절로, 그리고 옷 보퉁이를 싸들고 집을 나서실 때는 시집도 오기 전의 그 아득한 처녀 적으로... 그렇듯 자꾸 옛날로 돌아가고 계신 때문이다.” 영화 오프닝에 흘러나오는 작가 이준섭의 내레이션은 영화 내 관통하는 그의 동화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 속 이야기와 맞물리며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를 되새기는 중요한 화두로 다가온다. 한국인의 가족과 고향에 대해 그리며 장례라는 의식을 통해 변해가는 현대인의 초상과 남겨진 자들의 심리를 두런두런 펼쳐내는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정갈한 풍취가 있다. 이미 거장으로 우뚝 솟은 임권택 감독의 이 작은 소품은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묵직하고 올곧은 만듦새를 보여주진 않지만, 기록영화 같은 리얼함과 액자식 구조 속에 자리한 동화극을 병치시키며 색다른 반향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 축제 >는 죽은 자를 보내기 위한 한마당이자 산자를 단합하기 위한 살풀이로 임권택 감독의 한국적인 시선이 무엇보다 잘 나타나는 영화다. 축제,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레란다 임권택 감독의 < 축제 >는 소설과 영화가 같이 기획되었다. < 서편제 >의 원작을 담당하기도 한 소설가 이청준 과 의기투합해 임권택 감독은 서로 같으며, 서로 다른 영화와 소설을 완성해냈다. 기둥 골자는 비슷하다. 치매를 앓던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고향을 찾은 유명작가 이준섭이 전통 장례 준비를 하며 겪는 일들을 가감 없이 담고 있다. 홀로 노모를 모시던 형수의 시원섭섭함과 작가 자신이 직접 모시지 못한 데서 오는 죄책감, 냉대를 견디다 못해 가출한 이복 조카의 등장과 작가를 취재하러 온 기자, 쉴 새 없이 쏟아져 오는 문상객들까지 다양한 인물들과 각종 사연이 충돌하는 이 공간(과 기간)을 통해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단적으로 조망하고자 한 셈이다. 두 장인들의 시각과 매체에 따른 차이가 부분부분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온갖 갈등이 부딪치고 소동이 일어나며 화합하고 용서하는 자리로서 장례식을 축제로 바라보는 본령만큼은 일치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청춘 소설에는 없는 다른 게 있다면 바로 음악이다.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김수철의 음악은 동화와 기록물, 군상극을 한데 아우르는 끈끈한 아교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김정길 과 김영동 그리고 신병하 로 이어지는 대가들과의 음악 작업으로 80년대부터 90년대 초를 헤쳐 온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와 < 태백산맥 >에 이어 <축제>에서도 김수철을 음악적 동반자로 택했고, 그 신임에 응하듯 그는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었다. 김수철 더벅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대학생이 거지도사와 예쁜 벙어리와 함께 고래를 찾으러 나선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면 맞다. ‘일곱 빛깔 무지개’와 ‘나도야 간다’, ‘젊은 그대’를 부르며 헤비한 기타 사운드로 깡충깡충 뛰던 모습도, ‘못다 핀 꽃 한 송이’와 ‘별리’를 찡그리며 애잔하게 부르던 모습도 맞다. 70년대 말 작은 거인으로 등장해 80년대 초 대중가요와 연기를 섭렵한 김수철은 (짧았지만 강렬한) 그 시대의 아이돌이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가슴 속에 담아둔 소리에 대한 고민들과 새로운 시도를 위해 노력하고 또 변신했다. 80년대 중반 그 모든 인기를 뒤로 하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소리’에 정진한 김수철은 어느새 브라운관 무대 위에서 모습을 비치기보단 그 뒤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많아졌다. 국악인을 찾아다니며 사사한 그는 본격적으로 국악 앨범을 내놓았고, TV 드라마부터 영화, 연극, 무용, 행사음악까지 다양한 범주로 활동을 넓혀가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장했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이나 88년 서울 올림픽 전야제 음악을 담당했고, 87년 제9회 대한민국 무용제 대상 작품 ‘영의 세계’를 작곡하는 한편, < 고래사냥 1 , 2 >와 < 두 여자의 집 >, < 성 리수일뎐 > 등 영화음악을 맡았다. 국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기타에 우리 소리를 대입한 획기적인 ‘기타산조’를 낳았고, ‘불림소리’와 ‘황천길’, ‘팔만대장경’ 등 새로우면서도 대중적인 국악 앨범들을 시도했다. 80년대 후반에서부터 90년대 초 일련의 감독들과 코리안 뉴웨이브라 불리는 < 칠수와 만수 >, < 그들도 우리처럼 >, < 개그맨 >, < 경마장 가는 길 > 등을 작업하며 영화음악가로 새삼 주목받은 김수철은 93년 임권택 감독과 <서편제>를 함께 하며 그 정점에 이르렀다. <서편제>를 통해 그간 자신이 갈고 닦은 국악 사운드를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에 펼쳐 보인 김수철은 <태백산맥>에서 서사적인 깊이와 상충하는 이념들, 반목과 희생의 과정들을 한국적인 소리로 승화시켰다. ‘못다 핀 꽃 한 송이’나 ‘별리’, ‘왜 모르시나’ 등 대중가요 때부터 가지고 있던 애한과 상념이 묻어나는 김수철만의 고유의 정서가 신디와 대금, 태평소, 피리, 타악 등 전통악기와 맞물리며 민족의 비극적인 잔혹사를 명징하게 드러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철 영화음악의 백미는 <태백산맥>이라고 생각하지만, 보다 대중적이고 원숙한 기량을 뽐냈던 건 오히려 그다음 작품인 <축제>에 이르러서였다. 상대적으로 스케일이나 야심은 작았지만 소리 자체가 가진 뚜렷한 존재감이나 인상적이고 야무진 역할은 훨씬 두드러졌다. 대중가요와 국악, 동요(혹은 만화주제가)나 행사에 이르기까지 음악이라는 범주 안에서 폭넓게 활동하며 삼천갑자의 내공을 다진 덕분에 여기서 그는 뛰어난 범용성과 퓨전의 진수를 펼쳐 보였다. 그래서 흔히들 갖는 국악에 대한 편견과 난이도를 일시에 상쇄시키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테마가 눈에 띈다. 영화 자체가 뚜렷한 서사와 극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영화음악으로서 기능적인 역할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효와 전통, 생과 사, 기록과 동화 사이를 적절하게 메꿔주는 김수철의 한국적인 소리들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임권택 감독 영화의 미덕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현재 한국영화에서 ( 원일 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사운드트랙은 35분이 채 안 되고 그것도 3개의 테마가 한 번씩 다시 변주돼 실려 있기 때문에 체감상 더 짧게 느껴진다. <서편제>에서 춘향가 중 ‘사랑가’와 ‘옥중가’, 심청가 중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과 ‘심봉사 눈뜨는 대목’, 진도 아리랑 등 기존 국악들이 김수철의 스코어와 잘 배분돼 실려 있다면, <태백산맥>과 <축제>는 오로지 김수철의 역량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 <태백산맥>에서 음악이 거시적으로 전체적인 맥락을 짚는 데 주력한다면, <축제>에선 보다 미시적으로 특정 장면에 특정 테마를 반복해 그 감성을 각인시키고 있다. 어머니가 등장하는 회상 씬들에선 메인테마 ‘축제’를 변주한 ‘어머니’가, 동화 속 장면에선 국악 동요풍의 ‘꽃의 동화’가, 장례 의식에선 ‘먼 길’이 사용되는 식이다. 따라 자주 반복되고 제한된 쓰임새 때문에 음악으로서, 테마가 갖는 힘은 역설적으로 커졌다. <서편제>의 메인테마격인 ‘소리길’이나 <태백산맥>의 ‘산맥’보다 <축제>의 ‘축제’가 더 명료하고 강렬하게 다가오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대금과 피리로 연주되는 이 선율은 앨범에서 네 번 반복(변주)되는데, 밝고 발랄한 톤을 유지하는 ‘축제’가 산자들의 부박한 활동성을 상징한다면, 어둡고 느려지는 ‘어머니’에선 처연하고 애잔한 장례식 본연의 모습과 망자에 대한 넋을 기리고 있다. 이 이중적인 부분이야말로 감독이 <축제>에서 노렸던 우리 장례 풍습의 면모이고, 김수철이 탁월하게 표현해낸 바였다. 그 외 마당놀이로 익숙한 배우 안병경 씨가 직접 부른 ‘꽃상여(만가)’도 수록돼 있다. 김수철은 여전히 소리를 찾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 달빛 길어 올리기 >로 오랜만에 호흡을 맞췄고, 이준익 감독의 사극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으로 상업영화에서도 건재함을 알렸다. < 날아라 슈퍼보드 > 이후 오랜만의 애니메이션 <삼국쥐 전>의 음악을 담당하는 한편, 서울 빛 축제 음악이나 KBO 한국프로야구 30주년 기념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락 스피릿을 불사르며 무대에서 밴드와 함께 펄펄 뛰고 있다. 그는 아직도 젊은 그대다. 그가 들려줄 새로운 음악이 기대된다. 축제 Track List 1. 축제 (하나) 2. 꽃의 동화 (하나) 3. 어머니 (하나) 4. 꽃상여 (만가) 소리-안병경 5. 꽃의 동화 (둘) 6. 먼 길 7. 축제 (둘) 8. 어머니 (둘)
존 포드가 1939년에 만든 또 한 편의 영화 < 역마차 >에 오를 차례다. 이 영화를 말하려니 눈앞이 아득해진다. 서부극의 새로운 시작이자 영원한 고향, 모뉴먼트 밸리와 존 웨인을 서부극의 시원적 아이콘으로 등재시킨 기념비, 꿈결과도 같은 아름다움과 바로크적인 잔혹미와 냉정한 리얼리즘의 기묘한 동거 혹은 감상적 낭만주의와 신화적 숭고미의 우아한 공존, 서사의 논리로 정제되지 않는 모호하고 풍요로운 쇼트들. 반복컨대, 한 해에 한 감독이 < 젊은 날의 링컨 >과 <역마차>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 이번 회에는 < 역마차 >를 직접 말하기에 앞서 서부극에 대한 통념의 문제를 짚고 가려 한다. 그 통념은 존 포드의 영화는 물론 서부극 일반을 감상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 십상이지만, 의외로 광범하게 퍼져 있다. 좀 딱딱하고 다소 상식적인 내용이라도 그 통념이 지닌 문제점을 한 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정리 과정에서 이 연재의 3회, 그리고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의 서문에서 밝힌 견해를 중복을 무릅쓰고 재론할 생각이다. 나는 이전의 글에서 존 포드의 비서부극도 서부극처럼 보인다고 썼다. 이 말은 거꾸로 써도 성립한다. 존 포드는 서부극도 비서부극처럼 찍었다. 서부극과 <역마차>에 관한 논의를 통해, 나는 이 수사적 표현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역마차>의 마지막 먼저 개인적 경험담 하나를 말하고 싶다. 내가 역자로 참여했으며 최근에 재출간된 토마스 샤츠의 저명한 장르 연구서 「할리우드 장르」(컬처룩)를 번역할 때, 나는 한 가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샤츠는 여기서 존 포드를 서부극의 완성과 진화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감독으로 간주하고, < 역마차 >를 고전적 서부극의 한 전범으로 제시한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고전적 서부극은 선형적인 플롯, 안정된 심리의 주인공, 투명한 형식, 낙관적이고 친 사회적 주제의 영화다. 샤츠는 무법자 링고 키드(존 웨인)와 매춘부 댈러스가 국경 너머로 떠나는 <역마차>의 마지막 장면을 설명하면서, “냉소 뒤에 낙관적 전망이 숨어 있다... 약속의 땅인 미국의 서부 즉 신세계로 함께 떠났다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 역마차 >에서 친 사회적이고 낙관적인 전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기어코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는 탈옥수인 무법자와 위선적인 공동체에서 추방된 매춘부가 국경 너머로 도피하는 결말을 어떻게 친 사회적이고 낙관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을 떠나보내며 주정뱅이 의사 닥 분은 “저들은 이제 문명의 축복에서 벗어나게 됐군”이라고 중얼거린다. 이 대사의 신기한 점은 ‘문명의 축복’을 ‘문명의 저주’로 바꿔도 아무런 의미의 손상 없이 성립한다는 것이다(나는 이 대사를 오랫동안 후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역마차가 마침내 도착한 마을 로즈버그는 불안과 살의와 혼돈의 어둠으로 가득하다. 포드는 이 마을이 무대인 마지막 20분 동안을 밤 장면으로만 채웠다. <역마차>는 근본적으로 모호하고 불투명하며 굳이 따진다면 차라리 반사회적이고 비관적인 쪽에 가깝다. 샤츠도 이 결말의 모호성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대목에서 그는 “포드 영화의 대체적으로 모호한 종결은 웨스턴의 전성기 시절의 다른 영화보다 그의 영화가 더 큰 영향력을 미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썼다. ‘낙관적 전망’을 ‘모호한 종결’로 슬쩍 바꾼 것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건 그 자체로 이상한 말이다. 모호함은 그의 논의를 따른다면 장르 진화의 후기에 드러나는 특징이다. 그런데 고전적 서부극의 전범인 영화가 이미 모호함으로 가득하고, 그것으로 인해 결정적 영향을 발휘했다면 서부극의 진화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했던 것일까. 내가 받은 인상은 샤츠가 존 포드의 영화 앞에서 난처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종종 서부극 자체와 동일시되는 존 포드의 장르영화가 한 연구가의 장르론을 예시하지 못한다면 그 장르론이라는 건 도대체 무용할 것이다. 그런데 존 포드의 서부극을 통해 자신의 장르론을 펼치려는 순간, 무언가 자꾸 어긋나기 시작한다. 샤츠는 이 어긋남을 파고들지는 않지만 숨기지도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숨기지 못하고 그 어긋남은 은연중에 드러낸다. 뒤집어 생각하면, 최고의 정전 서부극들을 예외적 서부극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존 포드의 위대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전형적으로 생각되었던 것이 실은 예외적이라는 사실 앞에서, 전형성과 예외성을 구분하려던 이론은 난처해지고, 샤츠는 그것을 숨기지 못한다. 나는 오히려 이 점이 그의 저서의 좋은 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어긋남이 그의 장르론의 결함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여기서 서부극 장르연구 전반을 개괄할 생각은 없다. 서부극은 할리우드 장르 중에서도 가장 많은 연구 성과가 집중된 분야이며, 그 모두를 개괄할 능력이 내겐 없다. 존 포드의 서부극을 여행하려는 우리에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서부극에 관한 치밀한 실증적 일반론을 개진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이건 전문적인 장르연구가들조차 지금까지 하지 못한 일인데, 토키 시절에만 3,500여 편, 무성영화 시절까지 합치면 수만 편의 서부극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서부극을 토대로 서부극에 관한 통념이 지닌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는 것 정도다. 토마스 샤츠의 논의에도 반영되어 있는 그 통념은 대략 두 가지 이론에 기대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장르 진화론이며, 다른 하나는 신화론 혹은 건국 신화론이다. 이것이 영화학자들만의 관심사라면 굳이 여기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이론은 어느 정도 상식에 호소함으로써 영화를 보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의 통념에 스며들어 오인을 재생산한다. 서부극 진화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례의 영화들 토마스 샤츠의 장르 진화론은 크리스티앙 메츠와 헨리 포실론의 가설에 기대고 있다. 그 가설은 이렇게 요약된다. “하나의 형식은 관습들이 떨어져나와 확립되는 실험적 단계, 관습들이 균형에 도달해 예술가와 관객에 의해 상호 이해되는 고전적 단계, 형식과 스타일의 특정 요소가 형식을 장식해가는 세련화 단계, 마지막으로 형식과 형식의 장식 그 자체가 실체이며 내용이 될 정도로 중요해지는 바로크(매너리스트, 혹은 자기반영적) 단계를 거쳐 간다.” 요컨대 장르 진화는 주제의 복합성과 모호성, 아이러니, 형식에 대한 자의식의 확장 과정으로 설명된다. 샤츠는 이 진화론에 근거해 존 포드의 < 역마차 >(1939), < 황야의 결투 >(1946), < 수색자 >(1956),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를 서부극 진화의 가장 중요한 사례로 제시한다. 서부극 진화론의 가장 단순하고 통념화된 버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고전적 서부극은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착한 백인과 나쁜 인디언이 싸워 착한 백인이 승리하는 영화이고,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불리는 후기 서부극은 인디언의 고난과 백인의 잔인성을 고발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 통념은 의외로 광범하게 퍼져있다. 예컨대 < 아바타 >를 관한 일부 글들은 이 영화를 수정주의 서부극의 변주라고 소개하고, 수정주의 서부극의 대표작으로 < 작은 거인 >(1970), < 늑대와 춤을 >(1990)을 들면서, 이전의 서부극들을 백인의 인종주의적 편견의 산물로 뭉뚱그리는 것이다. 이런 어법은 2000년 전후, 젊은 감독들의 분단 소재 영화를 소개하면서 종종 등장한 ‘선악 이분법에 사로잡힌 전 시대의 냉전적 영화를 뛰어넘어’라는 저널리즘의 표현을 상기시킨다. 이런 표현은 임권택 과 > 이만희 의 분단 소재 영화를 한 편이라도 유심히 보았다면 결코 쓸 수 없는 말이다. 임권택의 < 짝코 >(1980), 이만희의 < 1950년 4시 >(1972)을 뛰어넘는 이후 세대의 분단 소재영화는 아직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철마> <닷지 시티> <평원의 사나이> 위에서 말한 서부극의 통념 역시 존 포드의 영화뿐만 아니라, 1940, 50년대의 하워드 혹스, 윌리엄 웰만, 안소니 만의 서부극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진 포드의 무성영화 < 철마 >(1924) 혹은 < 역마차 >와 같은 해에 만들어진 마이클 커티스의 <닷지 시티 Dodge City>, 혹은 그보다 3년 전에 만들어진 세실 드밀의 < 평원의 사나이 The Plainsman >(1936)만 봐도 그런 통념은 간단히 무너진다. 물론 이 영화들에서 인디언이 미국 개척민들의 위협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진정한 악인은 인디언에게 무기를 파는 백악관의 고위 관료(<평원의 사나이>), 혹은 토지 투기꾼 및 그와 결탁해 인디언을 배후 조종하는 백인 기업가(<철마>) 혹은 악랄하고 탐욕적인 카우보이들(<닷지 시티>)이다. 존 포드의 또 다른 1939년 작 < 모호크족의 북소리 >에서는 희귀하게도 영국군이 인디언과 결탁한다. 적어도 거장들의 서부극은 초기부터 인디언의 잔인성이 아니라 타락한 문명과 자본주의적 탐욕을 주제로 삼았다. ‘진화’라는 표현은 영화를 말할 때, 극히 조심스럽게 사용하거나 아예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연재의 3회에서 말한, 시대 구분론로서의 고전영화-모던영화 이분법에도 진화론적 발상이 개입되어 있다. 진화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사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은밀한 가치판단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영화에서 진화를 말하는 순간, 생물학적 진화론의 관념에 은연중에 영향받아, 진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반드시 발생하고, 더 진화된 것이 덜 진화된 것보다 복합적이고 우월하다는 전제가 이면에서 작동한다. 이 전제들은 3회에서 말했듯이 영화사의 진실과 거리가 멀다. 역사학에서 빌려온 ‘수정주의’라는 표현도, 소위 정치적 올바름을 주된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개별 영화가 지닌 생명력에 둔감하게 만든다. 나중에 다시 말하게 되겠지만, 수정주의 서부극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종종 언급되는 < 늑대와 춤을 >은 서부극의 위대한 전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다. 토마스 샤츠의 논의로 다시 돌아와 보자. 그의 저술에서 내가 느꼈던 의문에 답해준 것은 태그 갤러거가 1995년에 쓴 별도의 논문 ‘Shoot-Out at Genre Corral : Problems in the “Evolution” of Western’(「Film Genre Reader」, ed. Barry Keith Grant)이었다. 이 글에서 나는 큰 배움을 얻었고 서부극과 존 포드에 관한 생각을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관심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갤러거는 이 글에서 토마스 샤츠를 비롯한 8명의 장르 연구가들(Robert Warshow, John G. Cawelty, Philip French, Jack Nachbar, Will Wright, Frank D. McConnell, Leo Braudy)이 공유한 진화론의 관점을 단호하게 비판한다. 기존 학자들이 거의 무시해온 1910년대의 무성 서부극들을 검토한 뒤 갤러거는 이렇게 주장한다. 진화론자들이 후기 서부극의 특징적 기법이라고 주장해온 특징들, 즉 회화적 풍경, 변증법적 스토리 구축, 롱숏, 클로즈업, 평행 편집, 크로스커팅 등은 이미 초기 웨스턴에 구현되고 있다. 또한 클리셰의 자기반영적 패러디, 액자구조화 등은 이미 1910년대의 서부극에서 넘쳐났다. 영웅의 양면성, 해결되지 않는 갈등, 비극적 엔딩 역시 이미 토마스 인스와 프랜시스 포드(존 포드의 형)가 주도한 초기 웨스턴에 유행했다. 요컨대 표준적 진화론이 순전히 전후 서부극의 심리적, 이데올로기적 복합성 및 아이러니와의 노골적 비교를 위해, 거대하나 보이지 않는 일단의 전전 영화들을 순진하게 원시적인 것으로서 수사적으로 구축한다는 것이다. 진화라는 가설을 세운 다음, 그것에 부합하는 소수의 정전들만 끌어들여 입증한 뒤, 압도적 다수의 ‘예외’들에 눈감는 것이다. 서부극은 일직선의 진화를 단계적으로 밟아온 게 아니라, 당대의 산업적 요구, 시대적 상황, 창작자의 성향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주기적 변화를 거쳐왔다. 갤러거의 결론은 이렇다. 서부극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은 진화가 아니라 ‘순환’(cycling)이다. 여기서 서부극의 진화론에 대해 더 상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990년대 이후부터 태그 갤러거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스티브 닐, 피터 스탠필드 등)의 주도로 무성 서부극과 1930년대의 시리즈 서부극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이들을 도외시했던 기존의 표준적 진화론이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로서는 미지의 서부극들이 아닌 존 포드의 정전만으로도 표준적 진화론이 설득력을 잃는다는 점을 함께 염두에 두면 좋을 것 같다. 이 연재의 3장에서 나는 “존 포드는 ‘고전적’ 감독이 아니다”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 가설은 이렇게도 바꿔 쓸 수 있다. 존 포드는 고전적 서부극을 만든 적이 없다. 약간 까다로운 의제는 서부극의 신화론적 해석이다. 서부극 연구에서 진화론은 최근의 실증적 연구에 의해 도전받아왔지만 신화론은 여전히 의미 있는 가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서부극에 관한 가장 일반적이고 오래된 통념 가운데 하나는 건국신화론의 관점이다. 서부극은 미국의 역사에서 직접 도출된 프론티어 경험의 신화적 변용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의 연구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자주 인용되는 것은 짐 키츠의 논의(「Horizons West」)다. 키츠 자신은 신화라는 용어를 채택하지 않지만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신화론을 일부 차용해 서부극을 일련의 대립항들의 다발로 해석한다. 황야/문명, 자연/문화, 개인/공동체, 자유/구속, 명예/제도, 고결함/타협, 전통/변화, 과거/미래 등이 여러 층위에서 대립하며, 이들은 적대와 상호의존의 이율배반적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샤츠 역시 이 분석 틀을 차용한다. 주창자들이 노골적으로 주장하진 않지만, 이 분석틀은 전자의 계열과 후자의 계열이 각각 한편이 되어 두 진영이 대립하는 장르가 서부극이라는 통념을 낳는다. 나는 이런 분석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너무 포괄적이고 느슨한 이 분석틀은, 누구나 쉽게 지적할 수 있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이 분석의 대상은 서사다. 하지만 우리의 탐구 대상은 영화다. 아무리 하찮은 영화라도 그것을 정리한 서사를 넘어선다. 보통의 극영화조차 정태(靜態)의 구조가 아니며 이미지들이 시간적으로 배열되는 동태(動態)의 역학이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라면 이 결함은 심각해진다. 위대한 영화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그것고 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써만 온전히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서부극을 ‘읽는’ 표준적 신화론이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은 랜드스케이프다. 모든 서부극에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랜드스케이프는 서사 외부에 있다. 신화론은 랜드스케이프를 황야 혹은 자연이라는 기호로 환원해 문명 혹은 문화의 대립항이라는 서사적 요소로 둔갑시킨다. 이 해석적 조작의 결과는 기이하다. 이 환원으로 서부극의 서사조차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화론자들이 예시하는 서부극을 포함해 내가 본 어떤 서부극도 가혹한 자연환경과의 투쟁을 부차적 모티브가 아닌 중심 주제로 삼은 영화는 거의 없었다. 서부사나이가 맞섰던 건 주로 탐욕스런 기업가, 사악한 카우보이, 잔인한 인디언이다.(표준적 신화론자들이 황야/문명의 도식에 그나마 들어맞는 쇠스트룀의 < 바람 >(1928)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신화론자들이 황야, 자연으로 환원하려 했던 것은 아마도 ‘야만적’ 인디언이었을 것이다. 위대한 서부극들은 혼돈한 적이 없는 타민족의 영토 정벌과 자연 개척을 오히려 그것의 해석자들이 혼돈하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서부극의 통념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아이러니다. 비평이 수정주의 서부극의 가치를 과장하는 경향도 고전기 서부극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라, 이 오인된 해석 위에 세워진 또 다른 오인에 가깝다. 나는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신화론도 서부극 세상을 여행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숙고해야 할 서부극의 진정한 의제가 있다면 그것은 랜드스케이프다. 혹은 존 포드의 모뉴먼트 벨리이다. < 역마차 >의 이야기는 그것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같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