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장미
- 감독
- 황동주
- 제작년도
- 1986
- 출연
- 김형용, 선우일란, 유화춘, 정재순, 문혜경, 진봉진, 김정식, 이재호, 차혜숙, 신현옥, 이진아, 김은숙, 백송, 최정희
<소년시절의 너> 중 / 사진: Far East Film Festival 대만, 중국, 홍콩을 아우르는 동시대 중화권 청춘영화는 어딘가 안전한 자리로 호출되곤 한다. 이는 가볍고 말랑한 감정의 외피를 두른 ‘틴 로맨스’나 ‘학원물’이 지배적인 인상으로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과 방 한 칸을 배경으로 한 ‘도시 로맨스’, 혹은 성적 지향이나 계급적 주류 범주에서 벗어나는 ‘아웃사이더’의 지난한 성장 서사 또한 그 반경을 꾸준히 확장해왔다. 거짓 없는 미소와 서툰 고백에서 길어 올린 풋풋한 청춘의 초상과, 체제와 현실의 제약 속에서 너무 이르게 마모되어 버린 성장의 잔혹한 기록. 두 계열은 서로 다른 미학과 정서를 지닌 채 엇갈린 방향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성장의 희미한 슬픔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교차하고 중첩된다. 우리가 중화권 청춘영화로 부르는 범주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이 영화들은 어떻게 하여 이토록 ‘범아시아적’ 생명력을 유지하는가? 질문은 자연스레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누군가는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구파도, 2011)나 <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조미, 2013)을 기점으로 삼을 테고, 또 다른 이는 < 남색대문 >(이치엔, 2002)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 더 긴 역사적 궤적 속으로 옮기면, 중화권 청춘영화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동시대 현상만은 아니라는 점이 보다 분명해진다. 우선, 대만 뉴웨이브와 중국 6세대 영화, 그리고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논의되어 온 홍콩 뉴웨이브의 성취 속에서 그 정서적, 미학적 뿌리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나 아닌 여럿: 중화권 청춘영화의 기원들 누구나 겪지만 결국 지나간 과거로 남게 될 통과의례의 순간. 대만 뉴웨이브는 이러한 청춘을 형상화하는 데 탁월했던 시기로 기억될 만하다. 교복 입은 인물들의 초상이 전면에 놓인 작품도 가히 많았다. 그 출발점에 자리한 < 광음적고사 >(에드워드 양 외 3인, 1982)의 옴니버스 구성 가운데 타오더천과 에드워드 양이 각각 연출한 첫 두 에피소드(“작은 용 머리”와 “기대”), 그리고 진곤후 감독의 < 샤오피 이야기 >(천 쿤하우, 1983)는 소년·소녀들의 작고 애틋한 바람결 같은 초상을 내세운다. 그 물밑으로는 미국 이민, 대학 진학, 도시 중산층 진입이라는 당대 사회적 분위기의 기대와 규범이 조용히 도사리고 있다. 학교와 가정을 중심으로 일상의 반복을 미묘하고 리드미컬하게 포착한 이 감각은 <남색대문>과 같은 영화들의 정서적 결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일깨우는 동시에, 오늘날 중화권에서 ‘작은 청신함’이라 불리는 샤오칭신(小清新, Xiao qingxin)의 감정 구조와 그것이 하나의 서브 장르로 체화되어 온 흐름의 잠재태를 내포하고 있다. [1] 그러나 이 계보는 허우샤오셴의 < 연연풍진 >(1986)을 비롯한 성장영화에서 에드워드 양의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까지 대만 뉴웨이브 1세대가 소외된 젊은 세대를 응시해온 흐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영화들은 포스트-경제 기적 시기에 접어든 관점에서 계엄령 시기의 역사적 조건을 되비추는 장치로서 청춘을 호출하며, 어쩔 수 없이 감내하며 통과해야 했던 국면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그 풍경은 담담한 일상으로, 때로 서늘하고 비정한 상태로 각인되는 한편으론 감독들의 노스탤지어와 자전적 경향을 투사한다. 도시로 향한 젊은 연인들이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을 흘려보낸 기억으로 남기거나(<연연풍진>), 백색 테러의 광풍과 외성인이라 불린 본토 이주민들의 불안정한 삶의 궤적을 통과하던 청년이 끝내 파국적인 폭력으로 치닫는 시간(<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속에서, 청춘은 이미 상실을 예감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광음적고사>,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중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Asian Film Archive ) 이러한 정조는 중국 6세대 영화에 이르러 또 다른 시선으로 변주된다. 1989년 이후 중국에서 독립영화 [2] 로 분류될 수 있는 체제 외부의 작품들이 활성화되어, 급격한 시장화 한복판에서 방향성을 잃은 청춘의 초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아장커의 < 소무 >(1997)를 기점으로 가시화된 이 흐름은 로우예, 왕샤오슈아이, 장위안 등의 작업으로 이어지며 6세대라는 미학적 진영으로 일컬어졌다. 소매치기인 주인공과 ‘사업가’로 변신한 옛 동료를 대조하며 중국 소도시 시장경제의 비루한 풍경을 날것으로 포착한 <소무>의 감각은 < 쑤저우강 >(로우예, 2000), < 여름궁전 >(로우예, 2006), < 북경 자전거 >(왕샤오슈아이, 2001), < 북경 녀석들 >(장위안, 1992) 등에서 목표를 갖지 못한 채 그저 머물고 떠밀리며 시간을 견디는 젊음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6세대는 이처럼 국가 주도 계획경제와 개혁개방 사이의 격변기에 놓인 청춘이 조기에 소진되어버리는 감정 상태를 대변하는 성취를 보였고, 이는 세계 영화제 회로에서 환대를 받았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중국 본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독립영화’ 정신이 만개했던 때로 기록된다. 작가영화마저 상업영화 및 주선율 영화의 논리에 함몰되어가는 현 풍경을 떠올릴 때, 동아시아 청춘영화의 한 모델―즉, 비관적이지만 정직한 모델―을 제시한 당시 6세대의 성취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2010년대에 들어서며 독립영화의 ‘죽음’이 목격되기 전 [3] , 이러한 계보를 근과거까지 계승하며 그 정서적 맥을 잇고 있는 작품으로 리위 감독의 < 관음산 >(2010)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소무>, <관음산> 중 / 사진: IMDb( 1 , 2 ) 홍콩영화의 경우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할 만하다. 서극의 < 제일유형위험 >(1980)이 보여주듯, 초기 홍콩 뉴웨이브에서는 청춘의 권태와 분노를 폭발할 듯한 폭력과 뒤섞어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담가명이 호화롭고 자신감 넘치던 당시의 홍콩을 배경으로 도시 노마드들을 그려낸 < 열화청춘 >(1982)과, 왕가위의 < 중경삼림 >(1994)을 비롯한 1990년대 작품들은 청춘의 감정 구조를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이어진 프룻 챈의 < 메이드 인 홍콩 >(1997)은 포스트-반환 시기 처음으로 등장한 뛰어난 청춘영화가 아닐까. 영화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두 소년과 이에 합세한 소녀로 구성된 아웃사이더들이 비가역적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는 점에서는 <제일유형위험>을 환기시키면서도, 한결 차분한 시선으로 홍콩의 내면적 심상에 집중한다. 한편 왕가위와 같은 홍콩 뉴웨이브 2세대의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임영동의 <학교 풍운>(1988)은 전형적인 청춘영화의 문법과 거리가 있을지라도, 학교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성장기 소년·소녀들의 위태로움을 그려낸 가장 ‘홍콩적인’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하다. <제일유형위험>, <메이드 인 홍콩> 중 / 사진: IFFR , IMDb 중국 문혁 세대와 Z세대의 초상: <방화>, <소년 시절의 너> 그렇다면 지난 10년으로 범위를 좁혀 중화권 영화로 시선을 옮겨보자. 동시대 작품들은 어떤 청춘의 풍경을 담아내왔을까? 이 작품들을 한눈에 조망하기란 쉽지 않고 필자의 한계도 있기에, 이어지는 글은 그 흐름을 가늠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몇몇 인상적인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공하고자 한다. 먼저, 중국에서 제작된 청춘영화들은 대만발 ‘샤오칭신’ 장르가 중화권 전반에 끼친 영향력을 입증하듯 캠퍼스 로맨스가 주류를 이룬다. 매력적인 주연 배우들의 청신함, 푸르른 여름 하늘, 첫사랑과 서투른 고백 등 이 장르의 관습으로 간주될 만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공부’ 자체가 단순한 성장담의 소재를 넘어 과열된 입시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짓눌린 청춘 서사의 엔진이 된다는 점은, 중국 청춘영화만의 독특한 지점이다. 모범생 소녀가 불량스럽지만 순수한 문제아 소년의 공부를 도와주며 사랑이 싹튼다는 대만 영화의 공식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가 보여주듯 다소 귀여운 수준에 머물지만, 중국의 대히트작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2013)에 이르면 사뭇 다르게 변주된다. 이는 공부만이 ‘흙수저’인 자신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라 믿으며 로맨스를 아예 거부하는 주인공의 철벽같은 마음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중 / 사진: IMDb( 1 , 2 ) 증궈샹 감독의 < 소년시절의 너 >(2019)는 중국발 학원 영화들의 흐름 속에서 가장 성공한 판본인 동시에 사회성 짙은 텍스트로 각인된다. 대입 시험인 ‘가오카오’를 코앞에 둔 시기, 주인공 첸니엔(주동우)이 한 소녀가 학교에서 자살한 현장을 목격한다. 죽은 소녀는 교내 가해자들의 악명 높은 괴롭힘에 희생되었음이 드러난다. 가해자들의 다음 표적이 된 첸니엔은 자신을 보호해 주려는 십대 거리의 소년(이양천새)과 운명적으로 엮인다. 영화는 입시 위주 고등학교를 지배하는 잔혹함의 심리를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탐구하며 시작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온 세상에 맞서 싸우는 두 십대의 서로를 향한 헌신과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로맨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처럼 교육의 살풍경과 두 연인의 낭만적 비극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미덕이라기엔 다소 한계를 노출한다.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에 책임이 있는 체제 내부의 어른들(교사와 경찰들)이 지나치게 선량하고 도덕적인 인물로만 묘사되고, 가해자들 역시 충분한 전사나 깊이 없이 평면적 캐리커처에 가깝게 제시되면서, 두 상처 입은 영혼들의 고립은 사회적 압박 못지않게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려는 관계의 내향성에 의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오카오’ 점수가 부르주아로의 격상과 잔인한 빈곤의 삶 사이 간극을 결정짓는 상황에서, 첸니엔이 통과해야 하는 절박함의 정동은 한 편의 ‘십대 오페라’ 같은 이 영화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일 테다. <소년시절의 너> / 사진: IMDb <방화>(2017)는 문화대혁명 말기, 문공단(문화예술선전대)에 입대한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공간이 당대의 예술학교나 사실상 다름없었던 현실이 재현될 뿐 아니라, 영화 역시 학원영화의 문법을 상당 부분 따르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블록버스터와 풍자극을 넘나들며 < 집결호 >(2007), < 아부시반금련 >(2016) 등을 연출해온 중국의 대표적 감독 펑샤오강의 야심작이다. 무용수가 되기를 꿈꾸는 샤오핑은 문공단에 입성한 첫날, 자신을 마중 나온 선배 류펑에게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이타적이고 충직한 성정의 류펑은 정작 자신의 호의를 이용하기만 하는 피아노 반주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영화는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 숙청, 그리고 1979년 중-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약 5년간의 격동을 통과한다. 그 사이 샤오핑은 재교육 시설에 수감돼 있던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류펑과 샤오핑 모두 전쟁에 참전한 뒤 정신적·신체적으로 소진된 상태로 귀환한다. 하지만 <방화>는 문화대혁명이 야기한 전면적인 비극을 정면으로 성찰하기보다는, 학교 청춘물의 형식을 빌려 이들에게 고통을 안긴 공산당 간부나 상하이 상류층 자녀들과의 격차를 부각한다. <소년시절의 너>의 첸니엔처럼, 샤오핑 역시 수줍음과 서투름, 그리고 계급 지위로 인해 조롱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즉, 시대의 광기보다는 오늘날 중국사회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비판 가능한 엘리트 부유층의 부패와 계급적 소외에 비극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제목인 방화(芳华)는 ‘꽃다운 청춘’ 혹은 ‘향기로운 시절’을 뜻한다. 세월이 흘러 1990년대 중반, 두 주인공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문공단 시절은 노스탤지어 깃든 기억으로 남고, 그 공식적 종언을 알리는 해산식 장면에서 샤오핑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춘다. 대만 청춘 영화의 속삭임: <조니를 찾아서>,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한편 오늘날 대만 청춘영화의 흐름이야말로 젊은 시절을 ‘아팠지만 예뻤던’ 감정으로 재배치하는 ‘샤오칭신’ 감성 구조와 떼어내 설명하기 어렵다. 동시에 그 한편에서는 이전 세대 영화들이 간직했던 불안과 공허의 정조를 일정 부분 봉합하면서도, 이를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변주하려는 흐름 또한 포착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만 청춘 영화들은 불확실한 현재를 견디기 위한 하나의 정서적 피난처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 곧 ‘작은 행복과 미세한 슬픔’을 섬세하게 건드리는 이 방식은 개인주의적 정서를 중시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로부터 물러나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려는 태도를 전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평론가이자 제작자인 페기 차오는 자신의 제작 영화 <남색대문>이 ‘샤오칭신’ 장르로 호명되는 데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내놓는다. 그 미덕이 “대만 사회에 뿌리를 둔 일상적 디테일의 축적을 통해 그려낸 삶의 초상이자, 자비로 가득하며 악의가 없는 세계”의 포착에 있다는 것이다. [4] 후앙시 감독의 < 조니를 찾아서 >(2017)는 이러한 설명에 잘 부합하는 텍스트다.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한 세 젊은 인물의 이야기는 인상 깊은 오프닝으로 시작된다. 지하철에서 작은 상자를 들고 탄 여자에게 한 청년이 다가와 새장이 아니냐고 묻는다. 여자는 나중에 답을 주겠다고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전에 그런 상자에 새를 담아온 적이 있다고 덧붙인다. 같은 빌라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걸어가는 긴 시퀀스를 통과할 때까지도 이들이 우연히 스친 타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후앙시는 허우샤오셴의 < 남국재견 >(1996)과 < 자객 섭은낭 >(2015) 제작부를 거치며 선배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롱테이크를 체득한 인물이며, 이 영화에는 실제 허우샤오셴이 제작자로 참여했다. 영화는 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주변을 어떠한 판단 없이 평등한 시선으로 관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일상의 미스터리를 낯설고도 신선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이를테면 화면에 익숙해진 뒤에야 청년의 티셔츠 무늬가 작은 새들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순간처럼, ‘조니’라는 사람을 찾는 이상한 전화들을 계속 받아오던 여자는 문득 옛 애인을 조니라고 부른다. 앵무새를 키우는 여자와 자폐 성향을 지닌 청년, 그리고 탈출한 앵무새를 계기로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된 수줍음 많은 집수리공이 왜인지 모를 기분 좋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이야기. 이는 느슨하며, 너그럽고, 명확한 해답은 없지만 삶에 대한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조니를 찾아서>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2020)을 논하기 위해서는 대만발 청춘영화의 또다른 국면을 호출해야 한다. 전형적으로 이상화된 여성성보다는 강인하고 때로 보이시한 여성 캐릭터가 선호되고, 완성된 사랑보다는 첫사랑의 어슴푸레하고 틀이 잡히지 않은 감정에 집중해 온 흐름 말이다. <남색대문>, < 영원한 여름 >(2006), <여친 남친>(2012) 등이 보여주듯, 대만 청춘영화에는 퀴어 서사와 삼각관계의 묘사를 통해 장르의 영토를 확장해 온 하나의 계보가 존재한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미묘한 긴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종 촉발되는 모호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섬세한 터치는 대만 청춘영화만의 고유한 미학을 구축해왔다. 패트릭 류 감독의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막 계엄령이 해제된 1980년대 후반 대만을 배경으로 한다. 아한은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버디를 만나 단짝 친구가 되고, 두 소년 사이에 형성된 감정은 학교가 여학생을 받기 시작하면서 시험대에 오른다. 신입 여학생 반반의 등장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직면하도록 압박하는 계기가 된다. 표면적으로는 삼각관계를 통한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테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네 마음>은 정통 퀴어 영화라기에는 터치가 다소 가벼웠던 기존의 청춘영화 흐름에서 한 발 더 묵직하게 나아간다. 기숙학교 내에 공공연히 만연한 호모포비아와, 스스로 게이였음에도 아한에게 ‘교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캐나다인 신부의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는 계엄령 해제라는 조용한 변화의 출발점에서 시작해,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시간으로 닿는다. 과거의 고통과 열정을 다시 마주하며 잃어버린 줄 알았던 시대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듯, 주제곡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이 흐르는 가운데 두 주인공은 죽은 신부의 교구가 있던 퀘벡의 밤거리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결말로 향한다. 홍콩 독립 청춘영화의 새로움: <쪽빛 하늘>, <좁은 길> 마지막으로 최근 홍콩 독립 청춘영화는 대만의 청춘물이 제공하는 감정의 완충 지대나, 중국 본토 학원영화의 서사와는 사뭇 다른 궤적을 그려낸다. 이 글을 준비하며 마주한 가장 큰 수확은 홍콩 반환 이후 감독들의 본토행에 따른 영화 산업의 공동화나 정체성의 약화라는 오랜 우려를 불식시키는, 독립영화 진영의 새로운 세대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저예산으로 제작되면서도 도시 청춘들의 표정과 삶의 결을 세밀하게 기록해 온 이 영화들은, 때로는 홍콩을 향한 러브 레터처럼 읽히기도 한다. 아모스 와이의 <닷 투 닷>(2014), <냅핑 키드>(2018), <먼 곳에서>(2022)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주목할 점은 홍콩영화발전위원회(Hong Kong Film Development Council)가 주관하는 신인 감독 지원 사업(First Feature Film Initiative)을 통해 입봉하는 신예가 점차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업은 신인 감독의 데뷔작을 지원할 때 홍콩 영화계의 거장 감독이나 베테랑 제작자를 멘토로 매칭해 주는 방식을 취한다. 2013년부터 시작된 이 세대 간 유기적 결합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 덕분에, 최근 홍콩 독립영화를 보면 타이틀 크레딧에서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익숙한 홍콩 감독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쪽빛 하늘>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그중에서도 <쪽빛 하늘>(2017)은 동시대 홍콩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중 하나인 청킹와이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천하태평>(2008), <음악 인생>(2009), <하나의 국가, 두 개의 도시>(2011), <테이스트 오브 유스>(2016) 등 홍콩의 현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들과 허안화의 <밤과 안개>(2009)의 각본을 쓰며 다져온 청킹와이의 서늘한 시선은, 부모 살해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통해 홍콩 사회가 청춘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냉정하게 응시한다. <쪽빛 하늘>에서 부모의 시신이 지역 저수지 인근에서 발견된 뒤, 어린 코니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이 강렬한 스릴러는 누가 저질렀는가를 이미 알려주고 시작하기에, 질문의 중심은 ‘왜’라는 동기로 집중된다. 빈곤과 학대로 점철된 코니의 가정환경, 그녀가 학교 친구를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과정, 그리고 사건에 깊이 관여하면서 점차 자신의 사적인 삶까지 흔들리기 시작하는 여성 수사관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선정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세심하게 펼쳐지는 이 탐구의 형식은 평소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코니와 같은 인물들이 스스로 말하게끔 유도한다. 대만이나 중국의 청춘 학원 영화에서 ‘파란 하늘’이 젊음의 자유를 상징한다면, 이 영화의 어스름한 ‘쪽빛’은 홍콩의 비좁고 폐쇄적인 공간을 짓누르는 색채로 활용된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채 위협받는 십대들을 압박감 가득한 스릴러에 담아낸다는 점에서 <학교풍운> 같은 홍콩영화의 고전적 전통이 환기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부모 살해를 자행한 소녀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거부하는 젊은 여경의 윤리적 딜레마는 평행선을 달리는데, 이는 세대 갈등의 단면이자 출구 없는 미로 같은 도시에 갇힌 홍콩 현세대의 실존적 질식 상태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좁은 길>(2022)은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당시 자살을 예고한 어린 시위대를 구하려는 청년 구조대의 이야기를 담은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기를>(2021)을 렉스 렌과 공동 연출했던 람섬 감독의 단독 연출작이다. 이 영화 역시 대만의 낭만이나 중국의 열망과는 또 다른, 도시 속에서 존엄을 지키려는 홍콩 청춘들만의 정직하고도 아픈 초상을 그려낸다. 코로나19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영세 청소 대행업체의 일원인 노동자 자크가 늦은 밤 식당을 방역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주로 가라앉은 팬데믹 시기의 밤 장면으로 구성된 <좁은 길>은 조용한 노동계급의 고독을 포착하지만, 음울하거나 비관적이기보다는 사회 주변부의 고단한 상황을 응시하면서도 어딘가 미묘한 위로와 해방감을 안겨준다. 일손이 절실하지만 도시를 덮친 팬데믹 탓에 자크의 형편은 넉넉지 않다. 그는 충동적으로 지원한 캔디의 비공식적인 구직 요청을 받아들이고, 매일 밤 일당을 현금으로 지급한다. 비교적 어린 여성인 줄로만 알았던 캔디는 사실 어린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두 사람은 감정적 방어 기제를 세우면서도 서서히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친구 사이로 발전하지만, 영화는 연애담을 전형화하지 않는 선에서 결말을 열어둔다. 람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간 힘든 시간을 보낸 홍콩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우리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5] 취약함을 인정하는 용기는 <좁은 길>의 가장 큰 미덕이자, 고립 속의 유대를 형성하는 두 주인공의 서사에 깊이 공감하게 만드는 동력일 것이다. 청춘영화라는 틀 안에서 보자면 입체적으로 그려진 젊은 청소 노동자와 싱글맘의 묘사 자체가 인상적인 ‘캐릭터 스터디’라 할 만하다. <좁은 길> / 사진: IMDb *** [1] Papan Yang, “The Taste of Ice kacang: Xiaoqingxin Film as the Possible Prospect of Taiwan Popular Cinema”, The IAFOR JOurnal of Asian Studies, 2:1, 2016, p. 75. [2] Chris Berry, “Cinema: Reconsolidation of Party-State Hegemony in a Market Economy,” in M Dahl, M. Szatkowski & H. Kups (eds.), China under Xi Jinping: An Interdisciplinary Assessment , Leiden & Boston: Brill, 2016, p. 351. 중국 독립영화는 일반적으로 정부 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영화를 말한다. 이는 체제 내 상영이 허가된 예술영화(艺术片, yishupian)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공식적으로 상영되지 못하는 독립영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내 독립 영화제(난징, 베이징 등)나 대안적 상영 공간을 통해 소개되거나, 주로 해외 영화제를 거점으로 유통되는 경향을 보였다. [3] Chris Berry, ibid., p. 350. [4] Song Hwee Lim, Taiwan Cinema as Soft Power: Authorship, Transnationality, Historiography , London & NY: Oxford University Press, 2022. p. 129에서 재인용함. [5] Elizabeth Kerr, “ Portrait of a City: The Narrow Road ” , ZOLIMA citymag (접속일: 2025. 12. 26.). 박은지(영화 연구자) l 프랑스 탈식민주의 영화와 동시대 동아시아 영화를 연구하고 글을 쓴다.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머. 지은 책으로 『지중해의 영화』, 주요 논문으로는 「장-뤽 낭시를 경유한 클레르 드니의 여정: ‘신체-지리학’ 영화, 생태적으로 그려내기」, 「부산 프랑스문화원과 트랜스로컬 시네필리아」, 「홍콩 누아르에서 포스트-홍콩 누아르까지 성찰적으로 바라보기」, 「두기봉의 밀키웨이 제작사와 포스트-1997 홍콩영화 정체성의 문제」 등이 있다.
<동두천> 중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김진아(UCLA 영화과 교수, 영화감독) < 두번째 사랑 >(2007), < 파이널 레시피 >(2013) 등 다섯 편의 장편영화와, 미군 위안부 3부작 < 동두천 >(2017), < 소요산 >(2021), < 아메리칸 타운 >(2023) 등을 연출. 미국 UCLA 대학 종신교수로 시각예술의 재현 윤리, 초국가적 영화론을 가르치고 연구한다. 모든 예술매체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유배가 필요하다. 편안하고 안락한 나의 공간에서 벗어나, 타인의 고통이 존재하는 불편한 세상으로 스스로를 떠밀어야 한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2021)에서, 새를 찾아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의 여정은 너무 고통스러워 한 번에 읽어낼 수 없었다. 눈밭에 굴러 떨어져 혼절하고, 다시 일어나 겨우 도착한 친구의 집에서 죽어 있는 새를 마주하는 그 여정은, 문장마다 숨이 막혀 몇 번이고 책을 덮었다가 다시 펼쳐야만 했다. 그레이스 조의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2023)에서, 한때 기지촌 여성으로 살아냈고 끝내 조현병으로 생을 마감한 작가 자신의 어머니의 고통 또한 그러하다. 마치 홀린 사람처럼 야생버섯과 블랙베리를 찾아 숲을 헤매는 그녀의 모습은, 책을 덮고 돌아본 방 안의 벽과 창문조차 낯설게 만들었다. 문학은, 이토록 깊은 몰입 끝에, 언어로 짜인 세계를 읽는 이의 의식 속에 스스로 구축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예술이다. 영화는 어떤가? 공간예술인 동시에 시간예술이라는 특수성을 지닌 영화는 몰입과 감정이입을 위해 편집과 음악 등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주인공이 겪는 아픔은 눈물방울의 클로즈업으로,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처연한 바이올린 소리로 우리에게 주입된다. 얼핏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게 하는 강력한 매체로 보이지만, 그러나 이 공감은 순간적/피상적이고, 고통을 겪는 타자를 철저히 대상화하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카메라의 앞에 선 피사체와 뒤에 선 촬영의 주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아무리 몰입되어도 이 보이지 않는 선을 절대로 넘을 수 없다. 이 선은 화면 속 세계를 심리적/물리적으로 관객이 위치한 공간과는 다른 차원으로 완벽하게 분리해낸다. 섹스와 폭력은 물론, 빈곤 포르노(Poverty porn)라는 장르가 생길 정도로, 2D 영상매체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떤 매체보다 강력하고 공공연하게 타인의 고통을 오락거리로 삼게 되었다. 그 선 덕분이다. 더 큰 문제는 힘의 역학이다. 큰 비용이 들어가는 실사(實寫, live action) 이미지 제작의 특성상, 전통적으로 카메라의 뒤에는 권력을 가진 자가 있어 왔고 카메라 앞에 서는 피사체는 그 권력에 의해 대상화되어 왔다. 식민 지배국, 제1세계의 시민, 남성, 자본을 가진 자는 카메라의 뒤에서 이미지를 통제하는 힘과 발언권을 갖고, 식민 피지배국, 제3세계의 빈민, 여성, 자본을 갖지 못한 자는 카메라의 앞에서 피사체로 전락하여 목소리를 잃는다. 결과적으로 이 보이지 않는 선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게 한 세계를 창조하는 신에 비교되는 전무후무한 권력을 주었다. 우리가 듣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피사체의 목소리는, 실상 카메라 뒤에 선 권력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공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이, 우리는 실은 타인의 고통을 착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상현실에서는 이 공식들이 교란된다. 카메라의 앞과 뒤를 구분 짓는 그 선이 와해 되기 때문이다. 프레임으로 제한된 세계를 그 세계 밖에서 관망할 수 있는 평면 영화와 달리, 360도 터진 가상현실의 공간은 관객이 그 세계 안에 들어가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자발적인 유배 가 장소적 으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주1 그 세계 안에 내 자신이 던져진다는 것만으로도 2D 평면 영화의 근본적인 심리적 기제인 ‘관음’이 작동하기 어렵다. 더 중요한 유배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일어난다. 시선의 주체(관객)는 가상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몸을 잃는다. *주2 시선은 성성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대처할 물리적 몸이 사라진다는 것은, 당황스럽다 못해 악몽에 가위를 눌리는 것 같은 공포스러운 경험이다. <소요산>(좌)과 <아메리칸 타운>(우) 중 이렇게 주권(agency)과 권력을 잃고 상처 입기 쉬워진(vulnerable) 관객 앞에, 고통받는 타자의 모습은 전혀 다른 차원의 울림을 갖는다. 이는 대상화된 타자의 고통에 대한 반응과는 사뭇 다른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밥상머리 텔레비전 속 평면화면에 등장한 서식지를 잃은 북극곰은 이미 식상해진 이미지일지 모른다. 그러나 VR 기어를 쓰고 북극해의 빙산 위에 선 내 앞에, 해빙으로 작아진 빙산에 필사적으로 올라타려 애쓰는 북극곰이 있다면, 과연 그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어차피 내 눈앞의 세계가 실재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유난스러울까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뇌의 입장에서 보자면 눈앞의 세계가 실재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시신경을 통해 접수된 정보는 실재/가상을 떠나 두뇌를 자극하는 똑같은 전기신호일 뿐이다. 눈앞에 나타나는 사람들과 사물들이 실재가 아님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어도, 그 세계 안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감성(affect)은 우리의 심리를 뒤흔든다. 가상현실 세계에서 이렇게 관객은 몸(physical agency)을 잃고 영상 속에 등장하는 피사체와 같은 차원에 서게 된다. 이는 피사체의 대상화, 타자화를 극복한 새로운 공감기제(empathy-schema)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렇듯 촬영 주체와 피사체, 즉 관객과 영화 속 대상이 동일한 차원에 존재하게 되는 가상현실 매체의 속성은 미군 위안부 3부작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1992년, 주한미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당한 기지촌 여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영화 이상의 매체가 필요했다. 그녀의 죽음을 전하기 위해, 대상화된 피해자를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착취할 수 있는 매체는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두천의 쪽방에서 피를 흘리며 수 시간에 걸쳐 죽어간 그녀가 느꼈을 외로움, 감히 입 밖으로 말해질 수 없는 그 처참한 죽음과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1992년의 그날을 잊힌 역사 속 한 문장이 아니라,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간 관객에 의해 매번 새롭게 살아나는 현재의 사건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이 질문들은 궁극의 답을 찾지 못해 머릿속을 맴돌며 < 동두천 >(2017) *주3 을 완성하게 했고, 이후 8년간 3부작을 VR로 만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동두천>, <소요산>, <아메리칸 타운> 포스터 많은 평론가가 미군 위안부 3부작을 두고 역사의 은유와 상징, 혹은 화자로 등장하는 유령에 대해 분석해왔다. 일면 타당한 분석이다. 하지만 이 3부작의 진짜 핵심은, 비극이 자행된 공간에서 화자로서의 유령을 ‘보는’ 데 있지 않다. 핵심은 관객, 곧 우리 자신이 몸을 잃은 시점(視點, point of view), 다시 말해 유령이 ‘되는’ 데 있다. 이는 오직 VR 매체를 통해 가능한 존재론적 유배를 통해 실현된다. 관객이 자신의 존재의 본질이 바뀌었음을 깨닫는 순간은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동두천>에서, 처음 관객은 무고한 방관자로서 기지촌의 풍경을 흥미롭게 관찰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야의 언저리를 스치는 한 여성의 존재를 느낀다. 지나가는 성 노동자, 미군, 행인들과는 달리 어쩐지 시선을 끄는 그녀를, 관객은 점차 눈으로 좇게 된다. 그러나 발소리만 남긴 채 그녀는 좀처럼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좁디좁은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마침내 그녀가 관객을 향해 걸어온다. 드디어 그녀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가 들 찰나,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갈 수 없는 그 좁은 골목에서, 그녀는 관객을 향해 직진해온다. 관객은 자신의 몸이 있어야 할 자리를 그녀가 그대로 통과해서 지나가는 것을 경험한다. 그녀가 유령이라면, 관객 또한 이미 유령이 된 것이다. <동두천> 중 미군 ‘위안부’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 < 소요산 >(2021) *주4 에서는 피사체가 관객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관객은 더 나아가, 피사체인 그녀의 목소리를 내보내는 몸, 곧 성대가 된다. 낙검자 수용소 곳곳을 거닐며 감금되었던 여성들의 일상을 따라가던 관객은, 어느새 그녀가 짧은 생을 마감하기 위해 뛰어내린 옥상 끝에 선다. 그녀의 몸도, 나의 몸도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가쁜 숨소리는 내 옆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두 귀 사이에서 울린다. 그녀의 숨소리가 멈추고 옥상에서 보이는 산과 하늘에 서서히 밤이 내린다. 수용소의 복도에는 그녀의 흐느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흐느낌은 점차 통곡과 오열로 바뀌고, 관객은 또 한 번 깨닫는다. 그 울음소리가 내 몸 밖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두 귀 사이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소요산> 중 관객과 피사체가 동일한 차원에 위치하는 가상현실 세계에서, 피사체는 더 이상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관람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사체가 관객을 바라보는 역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 < 아메리칸 타운 >(2023) *주5 에서는 관객(보는 자)과 피사체(보이는 자)의 역학관계가 뒤바뀌는 경험을 거울이라는 기호(記號, signifier)를 통해 제시한다. 군산 미 공군기지 주변, 주식회사 형식으로 설립된 기지촌 ‘아메리칸 타운’ 곳곳에는 이 공간의 특수성을 설명하듯, 실내 어디든 시선이 닿는 곳마다 거울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거울 속, 마땅히 내가 비쳐야 할 자리에 정작 ‘나’는 없다. 밤이 내리고, 그녀의 기척이 과거 타운의 번성했던 소리와 함께 되살아난다. 이윽고 거울 속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녀가 대신 등장한다. 거울 속 그녀는 미군 위안부 여성으로서 하룻밤의 일과를 담담히 수행하고 있다. 고단한 밤이 끝나고, 햇살이 비치는 마당으로 나오는 여인. 관객은 이제 빨래를 걷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빨래를 걷던 여인이 관객을 알아본다. 관객에게 다가온 여인이 마침내 말을 건넨다. 피사체가 관객을 알아보고 말을 거는 이 순간, 관객은 존재의 도치(倒置, inversion), 궁극의 유배를 경험한다. <아메리칸 타운> 중 2D 영화가 갖는 넘을 수 없는 한계, 즉 대상화의 문제는 이렇게 가상현실이라는 매체 안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미학적/상징적으로나마 답을 얻는다. 이렇게 보면, 가상현실 영화에서 관람(viewing) 행위를 ‘체험’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몸을 잃음으로써, 비로소 타자의 고통을 ‘몸소’ 체험(體驗)하게 된다는 역설. 신체성(physicality)을 포기하고 유령(幽靈)—즉, 실체 없는 영혼—이 된 관객은, 더 이상 편안하고 익숙했던 자신의 세계에 머무를 수 없다. 관객은 유배된다. 그러나 일단 자아의 물리적 경계인 몸을 잃고 나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사물과 세계의 ‘---되기(becoming)’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몸을 잃고, 오로지 시선과 의식만 남은 가상의 세계 안에서, 나는 당신이, 풀이, 나무가, 고양이가, 바위가, 파도가, 지구가 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해빙으로 작아진 빙산 위에 위태롭게 선 북극곰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장소적 유배), 심지어 내가 그 북극곰이 된다면(존재론적 유배)? 주인을 잃고 눈폭풍에 홀로 갇힌 작은 새를 구하러 가는 『작별하지 않는다』의 화자가 나라면? 새를 포기할 수 없어 눈보라를 헤치고 걷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해야 한다면? 아니, 춥고 어두운 새장에 갇혀 그녀가 구하러 오는 줄도 모르고 차갑게 식어가는 작은 새가 바로 ‘나’라면? 이렇게 내장 깊숙이 파고드는(visceral) 강렬한 감각으로, VR 매체는 타자의 고통을 존재의 유배로 ‘체험’하게 한다. *주6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연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상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VR 기어를 벗고 돌아온 실재의 세계다. 가상의 공간에서 당신은 그들이 되어, 그들의 고통을 듣고, 보고, 느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어를 벗은 당신에게는 목소리가, 몸이 있다. 이제 당신이 나설 차례다. *** 주1. VR 실사(實寫, live action) 영화가 평면 영상물과 달리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360도 전체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의도가 배제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드넓은 세계 속에 VR 카메라로 특정 장소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연출자의 명확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사실, VR뿐만 아니라 카메라를 활용하는 모든 매체에서 ‘중립적 시선’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Heisenberg Uncertainty Principle)처럼, 관찰자와 대상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완벽히 중립적이고 간섭 없는 관찰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관찰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세계는 이미 관찰자의 개입에 의해 변화하기 때문이다. 주2. 본고에서 논하는 VR 매체의 특성은 실사 촬영 기반의 3D 360 영화적 VR 환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실사(實寫, live action) 가상현실 영화에서는 카메라의 위치가 곧 관객의 시점(point of view)이 되며, 360도로 펼쳐진 세계의 중심이 된다.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3D 360 영화적 가상현실 공간 안에서 관객에게 남는 것은 시선뿐이다. 일부 작품에서 관객에게 아바타 형태로 몸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 아바타의 행동 범위는 극히 제한적이다. 주3. 동두천 , 360 3D 시네마틱 VR, 12분, 2017 주4. 소요산 , 360 3D 시네마틱 VR, 12분, 2021 주5. 아메리칸 타운 , 360 3D 시네마틱 VR, 16분, 2023 주6. 모든 미디어는 가치 중립적이며, 가상현실 매체 또한 마찬가지다. 가상현실이라는 매체 자체가 본질적으로 공감을 이끌어 내거나 인류애를 증폭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매체의 특성을 활용해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 ‘VR 원년’이라 불리던 2016년, 가상현실 매체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들 대부분은 공포와 폭력을 피학적 방식으로 변주하는 데 집중했다.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를 체험하거나, 납치·감금되어 의자에 묶인 채 가해자와 마주하는 설정의 콘텐츠들이 대표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작품 역시 타자를 향한 폭력과 성을 관음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 피학적 서사라는 사실이다. 시선만 남은 관객은 타인에게 상해를 입히는 능동적 가해자가 되기보다는, 움직일 수 없는 수동적 피해자 혹은 관찰자로 설정되는 것이 이 매체에 더 적합하다. 이런 관객의 위치성은 실사 다큐멘터리 영역에서는 윤리적 미덕으로 환영받았지만, 오락성과 능동적 서사 전개를 중시하는 기존 영화산업에서는 상업적 활용의 한계로 작용했다. 이는 건전한 자본의 유입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가상현실 매체의 대중화에 제약을 걸었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사진 - " 동두천 ", " 소요산 ", " 아메리칸 타운 ", Gina Kim - 필자 제공
< 독수리 >는 올해(2022년) 네마프(Nemaf: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에서 관람했다. 아무 기대 없이 홈페이지 이미지만 보고 선택했는데, 영화가 너무 좋아 그날 본 다른 영화들은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 그런데 함께 영화를 관람한 멤버의 한 마디가 우리의 마냥 좋음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16mm필름으로 21세기 캐나다 깡시골의 풍경을 담은 영화잖아.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새롭지? 필름 가지고 한 이런 작업들 많잖아. 우리가 너무 매끈한 디지털 작품만 보다 오랜만에 필름작업을 봐서일까.” 영화가 너무 좋은 건 당연한데 어느새 우리는 그 좋음마저 혹시 동시대 기술매체에 대한 염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지 스스로 의심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를 향한 우리의 반응이 지난 세기에 발명된 매체를 향한 향수에 그칠 수 있어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독수리는 색다른 영상미와 주제의식으로 무장해 우리의 영화적 지식을 충족시켜주는 그저 그런 영화로만 남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잔상이 꽤 오랫동안 우리 곁을 맴돌았고, 어느새 우리는 멤버가 던진 질문을 시작으로 이 영화를 해부해 보았다. <독수리>의 전체 구조는 약 2분 가량의 영상 조각들이 몇 초 간의 공백을 두고 여러 장의 사진처럼 느슨하게 연결돼 있다. 풍경사진 몇 장을 넘겨 보는 듯한 단조로운 구성이지만, 그래서 각 장면의 자연 배경과 동물들의 몸짓에 깊게 몰두하도록 만든다. 내용도 별 다를 게 없다. 목장의 울타리 안에서 소, 말, 돼지, 염소, 닭과 같은 가축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다. 울타리 밖 인간들도 함께 농사를 짓고 풀을 뽑고 가축들을 보살핀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들의 삶은 계속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농촌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영화 자체에 몰두하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목초지 위에서 동물들은 끼리끼리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하며 자유롭게 뛰고 먹고 마시고 쉬길 반복한다. 그러다 커다란 말이 인간에 의해 강제로 울타리 밖으로 끌려 나가는데, 몇 번의 실갱이 끝에 말은 인간의 손을 벗어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다시 울타리로 돌아온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변의 검은 소들이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 탈출한 말이 뛰자 자기들도 그 뒤를 따라 뛰기 시작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선 긴장감이, 종이 다른 동물들 간엔 유대감이 생성되는 순간이다. 이미 동물들은 독수리가 그렇듯 서로 싸우지 않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가운데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동물들을 가두고 통제하려 하는 인간만이 철저한 외부인처럼 울타리 밖에 갇힌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울타리 밖에 있던 인간이 카메라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면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해진다. 동물들은 별 거부감 없이 카메라 앞에서 가만히 눈을 껌뻑이는가 하면 편안하게 누워 햇볕을 쬐고 뛰어다닌다. 아마도 촬영은 목장의 울타리 안과 밖, 창문, 경작지 등 정해진 장소에서 꽤 오랫동안 지켜보고 기다리는 가운데 이뤄졌을 거다. 영화의 처음 몇 장면은 필름 촬영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의 노이즈만 존재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미지 위에 굵고 강한 훼손의 흔적이 드러난다. 작가는 영상의 중반쯤에서 풀을 뽑고 그걸 끓이는 짧은 장면을 제시해 필름의 훼손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졌는지 대략이나마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영상 끝부분에 필름에 쓰인 재료가 공개되는데, 여러 종류의 꽃과 열매 같은 식물들이 주재료다. (참고로 우리는 식물들을 우려낸 액체에 며칠이건 담근 감독의 필름을 발효 필름이라 부르고 있다.) 실험영화와 사진 매체에서 곰팡이와 먼지 등을 이용해 필름의 물질적인 변형을 가한 작품들이 있다. 필름의 물성을 변화시켜 매체의 시간성과 이미지의 우연성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름이 만들어진 과정의 일부를 보는 동안 어쩐지 인간이 채집하고 끓여서 만든 재료를 필름으로 하여금 소화시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약하자면 이 영화에서 필름은 단순히 훼손되고 실험되지 않는다. 필름이 먹은 풀은 목장의 동물들과 하늘의 새들이 먹는 자연의 풀과 꽃, 열매 등이다. 돼지가 소의 젖을 빨고 있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있다. 돼지가 젖을 빠는 동안 소는 풀을 뜯어 먹고, 그 뒤에서 작은 새들이 들판 위에 떨어진 뭔가를 쪼아먹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맞은 편에 카메라 한 대가 놓여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풀과 꽃과 소금 등에 의해 발효된 16mm 필름이 뱃속에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꽤 오래된 카메라일 것이다. 자연의 재료를 한 차례 소화시킨 카메라 앞에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다. 자연의 풍경과 생명체의 행위, 햇볕과 바람까지 완벽하게 차려진 만찬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멀리서 들리는 트랙터 소리는 인간이 만든 다소 거칠고 소박한 취향의 플레이트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오직 카메라를 든 인간만이 목장의 울타리 안에서 동물들과 공존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장에 인간이 나타나면 묘한 긴장감이 맴돈다. 목장의 주인인 인간은 먹이와 따뜻한 물을 주지만, 주변에 울타리를 쳐서 동물들을 통제하고, 때때로 고삐를 틀어쥔 채 강제로 끌고 나가기도 한다. 그랬던 인간이 카메라를 들면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다. 아마도 감독이 오랫동안 울타리 안에서 촬영하는 동안 동물들은 카메라를 든 인간만큼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함께 풀 뜯어 먹고 조용히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카메라를 든 인간은 경작하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들과 다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카메라를 든 인간 또한 그들과 함께 머무르며 아름다운 풍경을 섭취하고 자연으로부터 채집한 물질을 먹임으로써 그들과 밥상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때문에 이 영화를 단순히 매체의 특성을 이용한 실험영화나 목가적인 영화로만 볼 수 없었다. 식물을 섭취한 필름이 드러내는 건 시간이나 우연과 같은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회화작품인 Homer Watson의 The Floodgate는 경작하는 인간과 가축화된 동물의 오랜 관계망을 보여준다. 유일하게 독수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이는 동물과 동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사자는 독수리의 위치를 통해 먹이감을 찾고, 독수리들은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한다. 이건 단순히 아이가 들려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속 목장의 동물들 또한 독수리와 사자, 혹은 독수리 무리처럼 먹고 마시며 공생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여타의 환경/자연 영화와 다른 지점은 막연하게 생명체의 공존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실제의 공존과 균형은 갈등과 긴장감의 조절을 통해 유지되기도 한다. 영화에서 동물들은 끊임없이 먹는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 경작한다.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있는 동안 영화는 멀리서 들리는 트랙터 소리 같은 사운드 효과로 자꾸 이곳이 누군가가 농사 짓고 가축 키우며 먹고 사는 곳이란 걸 잊지 않게 만든다. 눈앞에 보이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동물이 어우러진 생태계의 균형이 실은 식량과 먹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비로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영화의 흐름은 매우 정적인데 그 안의 동물들은 생기있고, 인간들은 쉴 틈 없이 일한다. 정원이 딸린 집과 잘 정돈된 경작지, 나무 울타리와 농기계, 그리고 아이들까지 모두 인간이 만든 것들이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제외한 모든 장면이 운전 중인 트랙터 소리로 뒤덮여 있다. 발효된 필름의 노이즈와 백색소음처럼 깔린 이 농기계 소리로 인해 캐나다의 어느 시골마을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대한 환상이 지워진다. 사람이 먹기 위해 내는 소리는 이상하게도 동물들이 먹고 있는 모습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인간은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도 하루종일 땅을 일궈야 하고, 동물은 인간이 관리하고 통제한 너른 목초지에서 비로소 배를 채울 수 있다. 독수리의 먹이 또한 여기 이 땅 위에 있다. 트랙터 소리는 오늘날 이 땅의 생태계가 어떤 순환을 통해 완성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이 영화의 모든 실험/시도가 가리키는 곳에 막연한 관념이나 개념은 없다. 오히려 감독은 자신의 신체와 카메라가 놓인 구체적인 삶의 현장, 즉 그가 먹어 삼키고 소화시킬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 우리는 각자 어떤 물질적 조건 속에서 얼마나 깊이 숙고하고 관찰하며 실험/시도하며 작업하고 있는가. 영화에서 어린 아이가 독수리는 서로 싸우지 않고 살아간다는 말에 그의 아버지로 보이는 어른이 답한다. “I didn’t know that” 농부이자, 목장주이며, 혹은 카메라를 든 감독일 수도 있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등장한 어른의 목소리다. 기회가 돼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아이와 아버지의 대화를 몇 번이나 다시 들었다. 우리가 듣고 싶었던 말이 거기에 있었다. AI가 시를 쓰고 그림도 그리고 심지어 영상도 찍는 시대다. 인간과 기계, 예술에 대한 단정적인 말들이 너무 많이 들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인간이 일방적으로 무너지고, 좌절하고, 끝났다며 판정패 당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미 누군가가 이전에 모든 걸 다 시도해봤고, 만들었다며 지금에 와서 인간이 자기 손으로 작품을 창조하는 게 무슨 의미냐는 회의적인 말들을 너무 많이 듣고 있다. 이런 말들의 효과는 한없는 무력감과 지나친 강박 외에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그 단정적인 말들 속에서 남자의 대답은 확실히 다르다. 그의 대답은 동물들 사이에 삼각대를 세우고, 필름에게 먹일 식물을 구하기 위해 목초지를 이리저리 뒤질 수 있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이 이뤄진 상태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I didn’t know that”에서부터 시작되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