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다르크의 수난
- 감독
- 칼 데오도르 드레이어
- 제작년도
- 1928
- 출연
- 마리아 팔코네띠, 유진 실바인, 앙드레 벌리, 모리스 슐츠, 안토닌 아토드, 미켈 시몽, 쟝 디드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라고 이를 기리려는 사회 각계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영화계에서도 식민지시기의 항일을 다룬 영화들이 여러 편 기획되었다. 1월에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 말모이 >가, 2월에는 유관순 열사에 관한 영화 < 항거: 유관순 이야기 >와 ‘자전차왕’으로 불렸던 엄복동 이야기를 다룬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가 개봉하였고, 3월에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 < 1919 유관순 >가 개봉한다. 이 중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영화만 2편으로, 3.1운동의 상징으로서 유관순 열사가 지니는 위상을 새삼 말해준다. ‘3.1운동’이라는 키워드로 한국영상자료원의 KMDb 를 검색하면 십여 편의 영화가 뜨는데, 이 중 반절은 유관순 열사에 대한 전기물이다. 이와 같이 유관순 열사는 독립투사 중에서 독보적으로 여러 번 영화화되며 3.1운동 하면 떠오르는 표상을 형성했다. 3.1운동 백주년에 개봉하는 유관순 열사에 대한 두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극영화, <1919 유관순>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가 식민지시기부터 널리 알려졌던 것은 아니다. 그가 3.1운동을 대표하는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은 해방 이후 남한 단독정부가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며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과정과 맥을 함께 한다. 충남 천안의 양반가 출신이며, 1919년에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부모는 돌아가시고 오빠와 숙부는 투옥되는 등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났음에도 일제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투쟁하다 열여덟의 나이에 옥중에서 죽어간 이화학당 학생이 기독교계와 국가 차원의 지원 속에 남한의 영웅으로 발굴된 것이다. 1) 북한에서는 유관순 열사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의 역사 서술에서조차 결락되어 있다는 사실 2) 은 분단 시대 남북한 영웅 발굴의 상이한 맥락을 방증한다. 이러한 유관순 열사가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데에는 무엇보다 ‘국민학교’ 교과서의 영향이 컸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한국전쟁 이후 꾸준히 음악 교과서에 실렸던 동요 「유관순」이다. 이 동요는 「삼월의 하늘」이라는 제목의 동시로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으며, 박두진의 「3월 1일의 하늘」과 함께 유관순 열사를 ‘누나’로 호명하며 3.1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이 가사는 「스승의 은혜」, 「코끼리 아저씨」 등 우리 귀에 익숙한 수많은 동요를 작사했던 아동문학가 강소천이 지은 것이고, 곡을 붙인 이는 한국전쟁 직후 문교부 편수관이었던 나운영이었다. 이 노래는 1953년 휴전 직후 새로운 동요들이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실렸고, 3) 수십 년 뒤까지 아이들의 고무줄놀이에서 불릴 정도로 애창되었다. 그 결과 남한 사회에서 형성되어 오랜 세월 지속된 유관순 열사에 대한 대중적 표상은 노래의 첫 문장이 말하고 있듯이 봄이 오면 환기되는 ‘국민 누나’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미지는 두 번째 문장이 말하고 있는 내용, 즉 감옥에서도 만세를 부르다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포하는 강직한 성격과 비참한 죽음에 이르는 수난은 유관순에 대한 서사의 핵심이 되었고, 이는 영화로 재현되며 한층 선명한 이미지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 시작은 1948년 계몽문화협회에서 제작하고 윤봉춘 이 감독한 < 유관순 >이다. 이 영화는 1947년에 본격화된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되었고, 당시 기념사업에는 기념비와 동상, 기념관 설립, 도서 출간 및 보급, 국민 교육, 매봉 녹화(綠化)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4) 그 성과로 1948년에 최초의 평전인 『순국처녀 유관순전』(전영택 저, 승문사 간)이 출간되고 5) 영화 <유관순>이 개봉하였다. 1948년 3월부터 이 전기와 영화는 정치적 이벤트와 더불어 묶여 홍보되기도 했는데, 6) 내러티브 면에서도 이후 유관순 이야기에서 널리 회자되는 화소를 공유한다. 그것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유관순은 기독교 정신에 충실했던 구국 소녀로 대한민국의 잔다르크다. ② 유관순의 집안은 충효 사상을 지키는 유서 깊은 선비 가문이다. ③ 유관순의 가족은 3.1운동에 참여하여 부모는 죽고 오빠는 체포되었으며 어린 두 동생은 고아가 되었다. ④ 유관순은 체포되어서도 항거를 계속하다 모진 고문 끝에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 중에서 영화를 통해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던 것은 ③과 ④이다. ③에서 부모가 일본 헌병에게 학살당하고 관순이 어린 동생만 남겨둔 채 체포되는 형국은 ‘누나’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이 부분에서는 일본 헌병이 동생들이 있는 집에 기름을 붓고 불까지 지르는 것으로 설정하여 일제에 대한 분노를 극대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참담한 상황임에도 ④에서 유관순이 항거를 멈추지 않고 고문에도 굴하지 않음으로써 ‘민족의 누나’가 된다. 무엇보다 유관순이 받은 고문에 대한 묘사는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이었다. 이영일 또한 작품해설에서 이 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격렬한 충격과 통분(痛憤)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일헌(日憲)에 잡힌 관순이 재판정에서도 항일절규(抗日絶叫)하는 열화(烈火)와 같은 모습과 옥중투쟁(獄中鬪爭), 그리고 끝내 간독(奸毒)한 일제(日帝)에 의해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蛮行)으로 고문치사(拷問致死) 당하는 부분이다.” 7) 영화가 현전하지 않으므로 시나리오로 보자면, 유관순은 체포되어 주모자와 배후를 심문받는 과정에서 “열 손가락을 못으로 찌르고 어린 젖가슴을 불로 지지는” 8) 고문을 당했으며, 수감된 이후에도 밤 9시만 되면 만세를 불러 간수들에 의해 온갖 폭행을 당했다. 그 잔혹함이 절정에 달하는 부분은 간수들이 유관순을 지하실로 끌어가 하복부에 호수를 대어 자궁을 파열시키고 칼로 내려쳐 일곱 토막을 내는 것이다. 증언에 의하면 유관순 열사가 옥중에서 구타를 당하여 방광 파열상을 입었고 그로 인한 합병증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되며 더운 날씨에 방치되어 시신이 부패하기는 했어도 절단된 바는 없다고 한다. 9) 유관순 열사가 일제에 굽히지 않고 항거하다 옥사한 것은 사실이나 이를 유난히 잔혹하게 묘사한 것은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러한 잔혹함이 십대 소녀의 여성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된 것은 히스테릭하다. 유관순 열사를 잔다르크와 같이 신의 말씀에 따라 민족을 섬기는 순결한 처녀로 주조해 놓고 그 신체를 무참하게 유린함으로써 극적 대비를 통한 일종의 국민 선동 효과를 노리고 있는 점은 현재의 시각으로는 도착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당시 이 영화는 “서울 총인구의 1할 이상 동원”하는 흥행 10) 을 했고, 이후 유관순 열사에 대한 영화들에 기본 틀을 제공했다. 윤봉춘은 <유관순>을 1959년과 1966년에 두 번 더 제작한다. 2019년에 <항거: 유관순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유관순 열사에 대한 극영화는 4편 제작되었는데 그중 3편을 윤봉춘이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1970년에 또 하나의 유관순 전기인 『타오르는 별: 유관순의 일생』(박화성 저, 문림사 간)이 출간되면서, 이를 저본을 한 영화 < 유관순 >( 김기덕 , 1974)이 제작된다. 필름이 현전하는 것은 1959년, 1974년 영화뿐이고 1966년 영화는 1948년 버전과 마찬가지로 시나리오만 남아있다. 11) < 유관순 >(윤봉춘, 1959)의 포스터. < 폭군 연산 >(신상옥, 1962)에서 장녹수를 연기하면서 요부(妖婦)로서의 이미지가 굳어지기 전의 도금봉이 유관순 역할을 맡았다. 1959년 영화에서는 도금봉 이 타이틀 롤을 맡아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난 유관순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유관순의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과 주인공 내면의 거리를 좁히려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개봉 당시 그다지 좋은 평을 듣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1958년을 기점으로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비약하는 분위기 속에서 윤봉춘의 ‘안이한 연출’이 비판을 받았다. 또한 < 황진이 >( 조긍하 , 1957)로 데뷔하여 ‘팜므파탈’의 이미지가 있는 데다 주로 발랄한 도회 여성을 연기했던 도금봉의 페르소나는 대중이 기대하는 유관순의 표상과는 어긋남이 있었던 듯하다. 재기 넘치는 유관순의 캐릭터는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신선한 면이 있으나 당시에는 “내면적 공감을 못 주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12) < 유관순 >(윤봉춘, 1966)과 <유관순>(김기덕, 1974)의 포스터. 1966년 영화에서는 엄앵란 이, 1974년 영화에서는 문지현 이 유관순 역할을 맡았다. 1966년 영화는 시나리오로 볼 때 민족 단결이 전반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1959년 영화에서는 일본 앞잡이로 끝났던 ‘임’이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유관순의 활동을 눈감아 주고 마지막에는 만세 시위에 동참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1959년 영화에서 관순의 오빠 관옥은 친구의 자백으로 체포되는데,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친구가 관옥을 도망시키고 희생된다. 또 하나 1966년 시나리오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만세 시위를 밀고하겠다고 애덕(관순의 사촌이자 동지)을 협박하여 혼인 약속을 받아내는 칠성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아우내 장터에서 애덕과 함께 죽음으로써 파렴치한 거래는 무화되고 그의 죄 또한 무마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만세운동은 유관순이라는 영웅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먹구 살기 위해” 숨죽이고 있었던 조선인들의 “양심, 눈물, 조국과 겨레를 향한 사랑”이 터져 나온 것으로 의미화된다. 이와 같은 주제의식이 잘 드러나는 지점은 매봉에서의 기도 장면이다. 이전 영화에서는 관순 홀로 매봉에 올라 기도했던 것과 달리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애덕과 을순이 관순을 따라가 셋이 함께 기도한다. 또한 1948년 시나리오와 1959년 영화에서는 형량을 낮추려는 변호사의 노력에 아랑곳없이 유관순이 끝까지 항거하며 일제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비판했는데,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유관순의 대사가 변호사의 몫이 되고 청중이 이에 호응하는 것으로 변개된다. 요컨대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당시 모든 조선인은 한마음 한뜻으로 독립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음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1974년 영화에 가면 전체적인 서사구조 면에서는 앞의 영화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면서도 가부장적인 위계와 남녀유별(男女有別)이 강조된다. 이는 유신체제하의 위계적인 분위기와 함께 원작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박화성의 『타오르는 별』은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2장이 ‘효도의 길’이다. 이 부분에서 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기집애”가 아비 말을 거역하고 말대꾸를 한다는 이유로 관순의 뺨을 때리고는, 여자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가문의 위대함과 충효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13) 1974년 영화에는 이 부분이 그대로 삽입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유교적인 도덕관념이 강조된다. 그러면서 이전 영화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유와 평등이 있음을 세계만방에 고”하기 위해 “대한의 잔다르크”가 되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봉화를 올렸던 관순이 1974년 영화에서는 거사를 다 조직해 놓고도 “여자의 신분으로 너무 앞에 나선다는 인상을 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니 어르신들께서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달라” 하는 이중적인 성격이 된다. 이에 1948년 윤봉춘의 시나리오에서부터 강조되었던 기독교 이념은 가부장적 민족주의와 결속하며 협소해지고 단선화된다. 그럼에도 관순이 아버지의 비합리적인 행동에 대해 따지는 부분에서는 1970년대 젊은 세대의 변화와 함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감지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그 다음에 이어지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더욱 시대착오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다가오며,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분열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제작된 영화들은 역사에 묻힐 뻔했던 유관순이라는 무명 여성투사를 세상에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이 영화들에서 유관순이라는 인물은 놀라운 신념과 결기의 소유자로서 경이롭고 거리감을 주는 ‘민족의 영웅’이었지 그녀의 고뇌와 아픔에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적 개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녀에게 내적 갈등은 없었는지 등에 대한 성찰은 이 영화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유관순은 본래 기개 있는 양반가에서 태어난 데다 근대 교육을 받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용감하고 헌신적으로 일제와 싸울 수 있었고 장렬하게 죽어갈 수 있었던 ‘본투비 열사’일 뿐이다. 이와 같이 인물을 화석화시키는 편의적이면서도 경직된 이야기 틀은 입이 찢어지면서도 공산당이 싫다고 외치다 죽어갔다는 소년의 전설을 방불케 하는 면이 있다. 게다가 계몽과 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반복된 영웅화의 관습 속에서 유관순 열사가 나이 어린 여성으로서 겪은 형극이 전시되며 대중의 흥미를 끄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유관순이라는 이름에 따라다니는 수많은 괴담들이 주로 화장실이나 목욕탕과 같은 음습한 공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가장 성스러운 존재로 추앙하면서 결과적으로 한 인간을 ‘처녀와 형극’의 틀에 가둔 영웅 도식의 그늘을 드러낸다. 관객들에게 유관순 열사는 그만큼 우리와는 다른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을 수 있다. 또한 애국애족에 가려진 한 여성의 고통과 원한을 대중이 감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유관순 열사는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간 한 인간의 이야기로, 젊은이, 학생, 여성, 시민의 관점에서 다시 접근되고 서술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40여 년간 유관순 열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여러 매체로 다루어졌음에도 그 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더구나 국책영화 시대가 끝나면서 극영화로는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단일한 역사에 대한 반성과 해체가 시도되며 역사 주체의 다원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기존의 영웅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탐구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들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극영화 < 항거: 유관순 이야기 >( 조민호 , 2019)가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그 동안 축적되어 온 유관순 열사에 대한 사료와 고증을 바탕으로, 비로소 인간 유관순을 조명한다. 이전 영화들이 민족 영웅으로서의 형상화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근대 기독교 교육을 받아 이상주의적 신념을 지녔지만 나이가 어려 경험이 없었던 학생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이 영화 또한 유관순의 형상화에서 빠지지 않았던 순결한 처녀의 형극이라는 요소를 취하고 있으나 그 배치를 달리한다. 여기에서 시공간을 유관순이 죽어갔던 서대문형무소의 1년으로 한정하고 여감방 8호실에 집중한 것, 그리고 흑백을 사용한 것은 주효했다. 우선 여성성은 8호실에 함께 수감되었던 동료들과의 연대를 통해 포착되고, 그녀가 겪은 수난은 내면의 재현으로 이어지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유관순이 서대문형무소에 도착한 첫날 낯선 감방에서 이화학당 선배를 만났을 때 흘리는 눈물, 간수가 관순을 끌고 나갈 때 그 앞을 막아서는 동료들, 고문 받고 돌아온 관순을 보살피는 손길들, 그리고 자신을 고변한 여인의 아기를 위해 젖은 기저귀를 체온으로 말리는 관순의 배려는 남성 옥사의 상황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연대를 보여준다. 그래서 유관순의 내면이 가장 사무치게 다가오는 부분은 특별 감형으로 모두 석방된 8호실 감방에 고문 받고 돌아온 관순이 홀로 누웠을 때다. 모두가 앉을 자리조차 없이 좁아 터졌던 감방이 훌쩍 넓어져 있는데, 만신창이가 된 몸에 표정 없는 얼굴로 누운 관순을 둘러싸고 있는 사면의 벽은 그녀의 내면을 통절하게 대변한다. 이는 지금까지의 유관순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간 유관순의 외로움이다. 유관순을 고문한 정춘영의 표현대로라면 “조금만 비겁했으면 될 것을”, ‘바보 같이’ 그러지 못했던 한 십대 소녀가 대면한 엄혹한 고독, 그것에 굴하지 않은 것이 결국 ‘항거’였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이로써 이전 영화들이 노정해온 포르노그래피와 같은 전시성 대신 배운 대로 실천하며 밝고 굳세게 살고자 했던 한 학생, 부모를 한날한시에 잃고 절망과 원한에 사무쳤던 한 소녀, 대단한 대의를 위해서라기보다 차마 비겁할 수 없었던 인간 유관순이 살아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로 개정된 현행 헌법의 ‘전문’은 긴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서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적 정통성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3.1운동을 비롯한 이 역사적 사건들을 한국영화가 어떻게 재현해 왔는지 살펴보면 그 앙상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정부는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여 최고등급으로 격상시켰다고 한다. 이는 물론 합당한 일이지만 더불어 실천되어야 할 것은 유관순 열사처럼 역사에 묻혀있던 무명의 독립투사들을 역사화하는 일일 것이다. 이와 함께 이제 ‘민족 영웅’에도 '민주주의적'으로 접근하는 다양한 영화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1) 유관순 열사가 3.1운동의 상징적 표상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논문이 제출된 바 있다. 정상우, 「3.1운동 표상 ‘유관순의 발굴」, 『역사와 현실』 제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12, 235~263면; 임종명, 「탈식민시기(1945.8~1948.7) 남한에서의 3.1의 소환과 표상」, 『대동문화연구』 제66호,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9.6, 297~333면; 정종현, 「3.1운동 표상의 문화정치학: 해방기~대한민국 건국기 3.1운동 표상을 중심으로」, 『한민족문화연구』 제23집, 한민족문화학회, 2007.11, 239~276면; 「유관순 표상의 창출과 전승: 해방 이후 제작된 유관순 영화의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연구』 제36집,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9.6, 155~209면 참조. 2) 허동찬, 「3.1운동을 보는 북한의 시각」, 『북한』, 1989.3; 정종현, 위의 글(2009.6), 157면에서 재인용. 임경석, 「3.1운동을 보는 남과 북의 시각」, 『통일시론』 2, 1999; 정상우, 「3.1운동 표상 ‘유관순의 발굴」, 『역사와 현실』 제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12, 236면에서 재인용. 3) 최은경, 「한국 동요·동시 정전화 연구」, 박사학위논문, 인하대학교 한국학과, 2015.2, 62면. 4) 정상우, 앞의 글, 250면. 5)「유관순」 노래를 작곡한 나운영이 문교부 편수관이었듯이, 유관순에 대한 최초의 평전 『순국처녀 유관순전』(1948)을 쓴 전영택도 문교부 편수관이었다. 이 책은 2015년에 새로 출간되었다.-늘봄 전영택, 『순국처녀 유관순전』, 늘봄, 2015. 6) 「새로 나온 책」, 《경향신문》, 1938.3.27.,2면;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3.27.,2면; 「조선영화사상의 금자탑/ 누구나 한 번은 보셔야 할 영화 순국의 처녀」, 《동아일보》, 1948.4.7.,2면. 7) 이영일, 「<유관순> 작품해설」, 『한국 시나리오 선집 제1권(초창기~1955)』, 영화진흥공사, 1982, 312면. 8) 윤봉춘, 「유관순」, 『한국 시나리오 선집 제1권(초창기~1955)』, 영화진흥공사, 1982, 337면. 9) 이정은, 『유관순: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 2004, 416~430면. 10)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윤봉춘 편』, 도서출판 소도, 2004, 184면. 11 <유관순>의 역대 시나리오에 나타난 서사의 변이에 대해서는 정종현, 앞의 글(2009.6) 참조. 12) 「내면적 공감 못 주어 <유관순>」, 《동아일보》, 1959.5.31.,4면. 13) 박화성, 『타오르는 별』, 문림사, 1970, 33-61면. <유관순>(윤봉춘, 1959) VOD 바로 보기 KMDb VOD 기획전 < 1919: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보러 가기 시네마테크KOFA < 평화와 화합을 노래하다: 3.1 운동 100주년 기념전>(2019.3.1~13) 보러 가기
금지된 질문. 영화감독에게 영화비평이란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은 황당무계할 뿐만 아니라 사실 매우 무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간절하게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나는 오랜간 종종 궁금하게 생각해왔다. 영화에 관한 개념의 활용. 비평이라는 거리. 하지만 우리들은 제대로 윤곽을 파악한 것일까. 항상 우리들을 사로잡은 불안. 혹시나 그저 뇌라는 스크린의 가장자리만을 맴돈 것을 아닐까. 물론 우리들은 쇼트와 씬을 이용해서만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때로 난공불락이라고 여겨지는 요새. 어떤 힘 앞에서 느끼는 경이적인 감탄. 어떤 미로 앞에서 난처하게 길을 잃은 다음 이리저리 헤맬 때마다 느끼는 불안. 나는 내 동료들에게 걱정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가까스로 숨을 쉬듯이 질문하곤 했다. 혹시 당신은 표류하는 듯한 기분을 지금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화를 볼 때 우리는 그렇게 물결에 흘러가듯이, 조수에 밀려가듯이, 항로를 잃은 것처럼, 두리번거리면서, 흘러가는 이미지를 본다. 어쩌면 최악의 순간을 맛볼 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경우. 자꾸만 밀려나서 어느 순간 해안가로 밀려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보지 않은 비평가가 있을까. 하지만 영화는 멈추지 않고 일단 시작하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제발 잠시만이라도 멈추어주세요. 아니요, 그건 영화가 아니랍니다. 그러니 그저 영화를 따라오세요. 어느 순간에 마주칠 지도 모르는 번개 같은 깨달음. 그걸 믿어야합니다. 이때 우리들은 정말 멈추어 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영화가 무엇보다도 물리적이며 기계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신경조직 안에서 활동한다는 점에서 생물학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는가. 영혼과의 마주침. 달리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걸 기다리고 있다. 영화라는 기계적인 운동은 우리를 둘로 나누어 놓았다. 영화라는 스크린과 그것을 보는 우리들. 그 사이에 수많은 이론들이 걸쳐서 있다. 라캉을 경유한 봉합(suture). 장-피엘 우다르가 발견한 로베르 브레송의 < 잔다르크의 재판 >의 시선에서 잘려나간 쇼트들. 벨라스케스를 인용한 푸코로부터 영감을 얻은 표상과 재현의 변증법들. 파스칼 보니체는 더 밀고 나가길 원했다. 프레임의 변형들 속에서 관객들은 어디에 있을까. 장 루이 코몰리와 장 나르보니의 기계적인 해석. 이때 이 논쟁이 1968년 5월 파리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거리로 내려온 구조. 행동개시. 고다르는 과격하게 영화를 부수고 있었다. 안토니오니는 유럽의 모던한 시간을 잠시 등지고 중국의 혁명적 시간을 방문하였다. 상영시간 4시간 27분의 < 중국 >. 베르히만은 베트남의 사이공에서 분신자살하는 승려의 이미지를 자기의 영화 안에서 다시 한 번 더 불태웠다. < 페르소나 >. 글라우베 로샤의 축제와 제사. 오시마 나기사의 정치적 실험. 그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논쟁. 장-루이 보드리와 장-루이 쉬페르는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더했다. 물론 이론들을 시네필의 행동에 따라 재번역한 세르주 다네를 잊으면 안 된다. 미국식으로 번역된 교육의 코드(tutor code). 그건 모두 남자들의 이론일 뿐이에요. 여자 관객들의 자리를 생각해야만 해요. 롤라 멀베이는 조셉 폰 스턴버그와 알프레드 힛치콕의 이야기의 눈길 속으로 들어가 ‘남자가 되어버린’ 시선의 쾌락을 공격하였다. 정말 그런가요? 스티븐 히스는 회의에 차서 반문하였다. 그럼요, 우리는 시선뿐만 아니라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해요. 카자 실버만이 가세하였다. 모두 좋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라캉을 오해한 것은 아닌가요. 지젝은 익살맞게 논쟁을 무효화 시키고 싶어 했다. 나는 여기에 조안 콥젝을 더하고 싶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관객들은 거기 그렇게 ‘상상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데이빗 보드웰은 근엄하게 반문했다. 그런데 참, 거기 영화라는 이미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극장을 쏘다녔던 철학자 질 들뢰즈는 다소 장황하게 다시 한 번 시네필의 질문을 던진다. 수많은 분류들. 감각들. 액션들. 정감들. 그리고 시간. 무심한 결론. 영화의 이론이라는 건 없어요, 영화의 개념들이 있을 뿐이지요.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영화를 철학에 복종시키려는 위험한 함정이다. 나는 영화가 영화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영화는 모험을 계속 하였다. 21세기의 영화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이미지의 질료. 먼 여행. 질문의 포물선. 우리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원래의 자리? 그렇다. 앙드레 바쟁이 했던 질문. 우리들은 영화라는 상형문자를 독해하기 위한 주석을 달고 있는 것이랍니다. 만드는 쪽과 보는 쪽. 그 절대적인 차이. 단지 공간적으로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차이지어지고 지연된 이미 거기와 지금 여기. 나는 영화에서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말의 공허함을 느낀다. 다시 둘로 나뉘어진 우리. 때로는 멀어지고 가끔은 가까워지지만 서로 겹칠지언정 하나로 통일될 수 없는 우리.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절대적인 거리. 이론적으로 아무리 시도해도 결국 내 앞에서 무효가 되어버린 통일. 그건 둘로 나뉘어진 셈이다. 먼저 이걸 받아들여야만 한다. 물론 수없이 그 둘 사이의 통로를 찾았다. 감추어진 질서인 ‘누군가’. 그래서 나는 이 지식(들)을 껴안고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만났다. 하지만 감독님과 나는 인터뷰를 하면서 한 번도 그 개념들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종종 흐려진 언어들. 이따금씩 멈추어선 말. 그 사이의 행간들. 나는 그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종종 그건 매우 위험했고, 나는 모든 힘을 다해서 점핑을 해야만 했다. 나는 내가 질문하려는 영화의 모든 쇼트를 셈할 수 있었으며, 그 순서를 따라 복기할 수 있었으며, 가끔 남들이 느껴보지 못한 미세한 움직임을 발견했으며, 반대로 때로는 남들이 모두 본 결정적인 순간을 놓쳤으며, 그러면서도 동선과 상상선을 필사적으로 따라갔다. 하지만 나는 매번 놓쳤다. 처음에는 세상이 있었다. 그런 다음 창조가 거기 개입하였다. 그리고 생산이 이루어진다. 생산된 접속들. 하지만 물리적인 이접효과. 나는 다른 인터뷰를 읽어보았으며, 배우들에게 질문을 했으며, 마찬가지로 기술 스텝들에게 질문을 했으며, 결국 현장에 가서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소로 좁힌 거리. 하지만 영화에서의 뇌의 고유한 위치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단상들. 초안에 관한 이야기. 연대기적 대응. 그 영화는 어디서부터 나타난 것일까. 얼핏 산만해보이면서도 결국에는 작품이라는 형식으로 하나로 통일되는 과정. 나는 이럴 때 어디서부터 작품이라고 간주해야 하는 것일까.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던 나는 어디서 멈추어야하는 것일까. 조형적인 힘이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본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할 때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은 저기에 있다. 그건 영화의 운명이다. 여기에 있음과 저기에 있음. 그 사이의 벽. 나는 여기서 영화를 본 다음 내가 본 것에 대해서 쓴다. 그때 나는 영화에 대해서 쓴다기보다는 영화를 본 나에 대해서 쓰는 것이다. 영화를 본 나와 영화를 쓰는 나. 그 사이에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다. 이 이상한 숨바꼭질. 블랑쇼라면 그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 속에서 중얼거림이 전해져올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작가의 죽음이라는 (바르뜨의) 선언, 그런 다음 작가는 누구십니까, 라는 (푸코의) 질문. 두 개의 포스트. 우리들은 포스트구조주의를 통과한 다음 포스트모더니즘의 작가주의에 대한 살해를 지켜보았다. 위대한 말라르메. 아마도 거기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비인칭으로 만들기 위한 싸움. 그는 말했다. 전대미문의 순수함에 이를 때까지 거울을 희박하게 만들어라. 희미해진 거울. 나도 잘 알고 있다. 주체의 문학적 죽음. 혹은 주체에 관한 임상실험. 그러나 나는 그럴수록 선명하게 말라르메의 그림자를 본다. 라캉이라면 좀 더 단호하게 말했을 것이다. 거울 앞에 선 당신. 당신이 말하는 그 곳에 당신이 있지 않습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멀리 간 다음 나는 이 자리로 돌아왔다.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여기에는 환원 불가능한 역할을 하고 있는 그 스스로의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과 만나야 한다. 누가? 내가. 영원한 되풀이. 거의 순환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매번의 반복. 물론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이 반복의 기회가 동일한 순간의 약속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차라리 이 약속의 상실이라고 불러야 할 기회. 중단 없는 중얼거림. 그때 내가 본 영화에 대해서 쓴다는 문제를 생각한다. 그건 한 번의 주사위를 던지는 내기이다. 다음번에 던지면 다른 패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패가 동시에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내기를 필사적으로 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임권택 감독님의 많은 영화에 대해서 글을 썼다. 매번의 주사위 던지기.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주사위를 던진다. 아마도 언젠가 세 번째 주사위를 던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 번째 내기를 하는 중이다. 이번에 나올 새로운 패. 내가 던질 때마다, 우리들이 던질 때마다, 영화에 대한 글은 영화 앞에 도래한 그 순간의 모든 것, 도래하는 모든 것, 언젠가 도래할 모든 것에 대한 하나의 기호이다. 영원히 되풀이 되어야 할 한 순간을 잠시 멈출 때 오는 불안함. 달리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앞에서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가. 말이 아닌 것, 영화 안에 있는 그 무언가, 그저 중얼거림, 세계 안에서의 영화의 자리, 그저 떨림, 영화 안에서의 세계의 존재, 부분집합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운동들, 내가 보려는 것은 무엇인가, 침묵보다 덜한 것, 그렇다, 텅 빈 심연보다 덜한 것, 그럼으로써 영화를 본 나를 일깨우는 순간들과의 접촉, 그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내내 우리 앞에 펼쳐진 그 무언가의 가득함, 그것이 무엇일까, 우리들로 하여금 침묵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 다양한 표현, 매번 느껴야 하는 새로운 감각, 그 안에서 이루어진 인상들, 그 앞에서 마주친 형상들, 생각을 멈출 수도 없고, 중단할 수도 없는 떨림, 그리고 이미 중얼거림, 영화 안에서 중얼거리는 이미지들, 청각적 신호들, 수많은 영화의 기호들의 다발들의 웅성거림, 거기서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분명한 중얼거림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토록 가득 찬 비어있음을 쓰고 또 쓴다. 가득 찬 비어있음. 결코 그 역으로 사용할 수 없는 말. 영화 비평의 글쓰기는 매번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내가 쓴 글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어진다. 혹시 이 글은 텅 빈 말이 아닌가요. 물론 나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레비나스의 비유. 침묵의 소리, 존재의 중얼거림, 그건 우리가 귀에 조개껍질을 대고 있을 때 들리는 소리와 비슷할 것입니다. 그것은 가득 찬 비어있음과 같고 소리가 된 침묵일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글을 쓰다 말고 잠시 중단한 다음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서 당신에게 영화비평이란 무엇인가요, 라고 질문을 하는 것은 대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일시적으로 그리고 강제적으로 두 개의 나뉘어진 자리 사이를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듯이 가깝게 만들어보고 싶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침묵의 행간에 귀를 기울이기. 잠시 동안 머뭇거림에 있을 지도 모르는 배움. 당신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영화에 대한 생각을 멈추면 안 된다. 그 순간, 영화는 죽는 것이다. 영화의 죽음에 관한 (맹렬한 저항의) 사유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 모든 영화는 그 어떤 분류의 정답에 귀속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더 나아가 끝낼 수 없게 영원히 다시, 또 다시, 또 다시, 그렇게 되풀이해서 생각할 때, 그 자리에서 영화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영화라는 삶. 영화의 생명. 당신께서는 이 만남 속에서 사용된 말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혹은 영화에 대한 도구처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쓴 글에 대해서 사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에 대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관해서, 라고 쓰지 않고 대해서, 라고 썼다. 물론 용법은 각자의 몫이다. 말하자면 도구상자로서의 말. 나는 지금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에서 < 달빛 길어 올리기 >까지의 최종 책임자로서의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청해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인의 자리를 둘러싼 이론적 수수께끼들, 차라리 주인을 둘러싼 그 어떤 이야기. 우리가 항상 되찾으려 했던 영화적 사건. 무엇을 무엇과 짝짓는다는 문제. 우리들은 수 없이 많은 모델들을 만들어왔다. 기호학적 모델. 정신분석학적 모델. 신화적 모델, 형식적 모델, 철학적 모델, 현상적 모델. 그 사이의 관계와 격리. 서로 각자의 취사선택. 수업시간에 한 한생이 내게 물었다. 이 모든 모델(들)을 통일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없는 것일까요. 그럴 때 마다 나는 자문자답하였다. 어떤 모델도 사용하지 않을 방법이란 결국 없는 것일까. 나는 모델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단지 영화라는, 내가 지금 막 보고 난 그 고유의 대상으로서의 그 영화가 궁금한 것이다. 질문들. 항상 그것만이 영화 앞에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임권택 감독님을 만났다. 차라리 나는 영화를 만든 감독과 이야기를 시작할 때마다 번번이 무언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플라톤의 동굴. 종종 거기서 나는 길을 잃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의 웅성거리는 듯한 메아리를 듣는다. 두 개의 이미지. 내 질문(속의 영화들)과 임권택 감독님의 대답(속의 영화). 두 개의 울림. 좀 더 단순하게 질문과 대답. 아주 가끔씩 이루어지는 사고와 세계 사이의 우연한 접촉. 어디로 나갈 지 알 수 없는 길. 동굴에서 표지판을 찾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수천 갈래로 갈라진 길. 여기에 지름길 따위란 없다. 그러니 여기서 그런 행운을 기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갑작스러운 낭떠러지. 이 길을 따라가면서 여기서는 오로지 자기의 감각을 믿어야 한다. 그런 다음 언젠가 여기 온 것일 지도 모른다는 기억을 더듬어야만 한다. 이미 본 영화, 이미 만든 영화. 양쪽의 (서로 다른) 경험. 어쩌면 영화 앞에서 느껴보는 덧없음으로 인한 자신의 어둠에 잠긴 사고를 향해 던져질지 모르는 섬광 같은 배움의 순간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이 자리를 청한 것일 지도 모른다. 나는 그 거리를 좁혀보고 싶을 뿐이다. 물론 마지막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만남은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그렇게 내 질문은 시작한다. 정성일 _ 이렇게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1987년 감독님과 첫 번째 인터뷰를 진행할 때 감독님의 영화에서 무엇을 배우면 됩니까, 라고 질문하자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얼굴에서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총체를 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두 번째 인터뷰, 그러니까 2003년에 인터뷰를 마치면서 같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감독님은 내 영화의 빛을 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그 질문을 드린 지 10년이 막 지나가고 있습니다. 같은 질문을 세 번째 드리고 싶습니다. 임권택 _ 나이를 봐라. 나이를 들여다보면서 임권택 영화에 대해서 보라는 대답을 하고 싶어요. (잠시 생각) 내 영화를 본다면 임권택의 나이를 들여다보면서 영화를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가령 < 축제 >라는 영화를 가지고 예를 든다면, 이 영화를 1998년도에 찍었고 그걸 가지고 출연자들과 그때 이미 다 함께 본 영화에요. 거기서부터 15년 정도가 지났는데, 지난 명절 무렵에 텔레비전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여준 모양이에요. 거기 출연한 연기자가 전화를 해 와서, 나한테 그때는 전혀 안 보였던 것이 지금 나이에 와서야 보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분은 연기자는 아니고 변호사고, 그때만 해도 이미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에요. 그래도 십여 년 후에 그때 안 보이던 것이 많이 보였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얼마 전 (칸 영화제 코디네이터인) 피에르 리시앙이 지금 < 만다라 >를 세계에 배급하면 어떻겠냐고 물어오는 거예요. 자기도 30년 전에 그 영화를 봤는데, 그때는 안 보였던 것이 지금은 참 많이 보이는 영화라는 거예요. 아마도 일정한 세월을 살아내면서, 그렇게 삶의 누적이 주는 그런 체험의 세계가 영화에 많이 박힐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그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읽히는 그런 영화를 내가 만들 필요가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요. 왜냐면 같이 작업하면서도 안보였다니까, 그렇게 긴 세월 영화를 보아온 사람들조차 이제는 보인다니까 하는 소리잖아요. 그러니까 나이만큼, 나는 나이 이상도 이하도 찍은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해요. 나는 나이만큼, 살아온 삶만큼 영화를 찍은 거예요. 그 안에서 영화를 같이 찍은 사람조차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영화에서 그 감독의 나이를 읽어줬으면 좋겠고 그걸 보려고 노력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하고 싶어요. 정성일 _ 오늘 들어야할 얘기를 다 들은 것 같습니다.(웃음) 오늘은 제 동료들이 감히 감독님께 물어보지 못한 질문을 제가 대표해서 드리겠습니다. 저는 영화비평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나름대로 영화를 본다는 문제에 관해서 자기 방식으로 훈련을 받은 직업적인 관객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영화를 옹호하기도 하고 방어하고 또 공격하기도 합니다. 때로 감독님께 도움이 되기도 하고 또 불편한 사람이기도 할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감독님에게 영화비평이란 무엇입니까? 임권택 _ 이를테면 영화비평은 늘 나를 불편하게 해요. 좋은 쪽도 나쁜 쪽도 다. 그 어디서 오는 불편이냐, 그것은 연출자가 작품을 해내는 과정에서 그 안에 담고 싶은 것들을 충분히 읽어내지 못하고 하는 비평, 또 아니면 해낸 것보다도 도가 지나친 칭찬이 있다든가, 그런 것에 대한 어리둥절, 그래서 늘 불편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정성일 _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이 도움이 되었던 순간은 있습니까? 임권택 _ 늘 도움을 받죠, 늘. 어떤 거냐면 어떤 비평도 내가 비평하는 사람들한테 실제 영화에 담아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잘 전달되지 않았구나하는 자성 같은 것이 생기게 되요. 그런 비평을 만나면 비평가들에게 내 생각이 좀 더 명료하게 잘 짚이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성일 _ 좀 더 부정적으로 비평가들이 감독님의 영화와 불화를 겪는다, 혹은 더 나아가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구나,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임권택 _ 뭔가 자기들 틀을 미리 가지고 내 영화가 자기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비평한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나 그 틀 안에 들어갔든, 안 들어갔든 간에 사소한 의견이라도 굉장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정성일 _ 데뷔작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쓰면서 당시 감독님 영화에 관한 비평을 열심히 찾아 읽어봤습니다. ‘젊은 감독 임권택 군은...’ 이런 표현도 있었어요(웃음) 처음 감독님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뉴스로 실린 신작 소식 이외에 어떤 비평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권택 _ 그 만큼 내 영화가 주목받지 않았고, 심층적으로 평을 할 만큼 잘 만든 영화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도 되지요. (좌측상단부터) < 족보 >(1978), < 깃발없는 기수 >(1979), < 짝코 >(1980), < 만다라 >(1981) 정성일 _ 하지만 저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영화비평이 대중영화에 무관심한 것은 영화비평의 게으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1987년은 이미 감독님이 < 만다라 > 혹은 < 길소뜸 >, < 티켓 >을 만든 다음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도 좋습니다. 이미 1964년 < 망부석 >은 그해 한국영화 중에 가장 좋은 영화중의 한 편이었습니다. 한국영화 비평사를 돌아보면 이미 1960년대에 영화비평의 활동이 활발했고, 많은 영화비평가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이 시기에 감독님의 영화가 좀 더 본격적으로 다루어졌다면 저는 1970년대에 < 족보 >가 훨씬 더 빨리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권택 _ 그랬겠죠. 만약 내 영화에 대해 비평가들이 많은 평을 해주었다면 나 자신도 비평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봤을 테고, 그 사람들은 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예민하게 관심을 갖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 전혀 없었어요. 그 사람들이 내 영화에 대해 무관심하게 봤던 것처럼 십여 년 동안 50여 편을 찍으면서 나도 비평가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정성일 _ 본격적인 비평이 나온 것은 < 만다라 >가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거의 유일하게 진지하게 영화를 다룬 (영화진흥공사에서 나오던)「월간 영화」를 비롯해서 영화 비평가들의 <만다라>에 대한 상찬과 호의가 있었습니다. 사실상 그 이전에는 감독님 영화에 관한 그렇게 진지하거나 집중적인 비평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만다라> 이전에 < 짝코 >나 < 족보 >같은 걸작이 이미 있었고, 비평의 관심도 있었을 법한데, 신기할 정도로 무관심했습니다. 왜 비평가들이 <만다라>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영화의 무엇이 비평적 시선을 끌었을까요? 임권택 _ (잠시 생각)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나도 열심히 만들었고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영화들이 < 짝코 >, < 깃발 없는 기수 > 정도 부터였던 거 같은데, 아마도 정성일 평론가와 그 무렵을 같이했던 사람들이 시작이었어요. 서강대학교에서 내 영화를 놓고 비디오로 회고전을 하고 글을 발표하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서부터 내 영화에 대한 어떤 진지한 주목이 생긴 거 같아요. 그 전에는 전혀, 전혀 없었지요. < 족보 >같은 영화에 대해서는 영화평이 아니고 ‘지평선’과 같이 신문에서 논설했던 쪽 사람들의 영화 감상이나 단상을 써낸 거 외에는 거의 본격적인 영화비평은 없었어요. 정성일 _ 감독님 영화의 진가를 공식적으로 처음 발견한 것은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서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토 다다오(佐藤忠男)선생님의 < 만다라 >에 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때 사토 다다오 선생님은 마닐라 영화제에서 감독님의 작품을 처음 보신 것 같습니다. 마닐라 영화제에서 <만다라>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서 “걸작을 만났다”고 썼는데, 저에게 무척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국에서 온 걸작이란 표현 없이, 그냥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임권택 이라는 감독을 발견했다는 흥분이 거기 있었습니다. 이 비평가는 영화를 국적에 대한 호기심으로 보는 대신 작가의 발견에 주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사토 다다오 선생님은 2000년 『한국영화의 정신』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영화사가 아니라 사실은 감독님의 영화를 통해서 한국영화를 생각하는 ‘임권택 연구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감독님이 영화비평가와 첫 번째 우정을 만든 사토 다다오 선생님과의 인연을 듣고 싶습니다. 임권택 _ 사토 다다오 선생을 만난 것은 아마도 일본에서 < 길소뜸 >과 함께 한때 왕성하게 한국영화들을 초대할 때에요. 처음은 못가고 두 번째 초청받아 일본에 갔을 때, 만나서 얘기하는 자리에서 사토 다다오 선생이 끼어 있었어요. 정성일 _ 몇 년도로 기억하십니까? 임권택 _ 80년대 초반이나 될까. 이런 저런 질문이 몇 가지 있었는데 첫 느낌은 저 평론가는 나를 보호하려는 쪽에 서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어요. 그때 사토 다다오 선생은 한국영화가 대부분 지나치게 감상에 치우쳐서 절제의 측면을 잃고 있다고 말하면서 내 영화의 절제에 대해서 칭찬을 했어요. 이런 비평을 들으면서 절제라는 것, 이것이 영화가 가져야하는 미덕중에서 굉장히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전까지는 내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도, 하여튼 뭔가 절제를 많이 잃고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노파심 같은 게 있는 거요. 절제 때문에 자칫 설명 부족이랄지, 관객들에게 충분히 이해를 시켜야하는 부분을 그렇게 건너뛰면서, 자칫 잘못된 비약, 이런 게 오히려 설명 부족이 되고, 오히려 폐단의 우려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명도 장황하고 그랬는데, 그런 비평의 소리를 일본 쪽에서 들으면서 내가 지나치게 장황한 노파심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극을 주신 분이 사토 다다오 선생이지요. 정성일 _ 사토 다다오 선생님은 영국에서 발행되는 영화잡지「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에서 10년마다 한 번씩 전 세계 영화비평가들의 앙케이트를 받아 집계를 내서 영화사상 10편을 선정하는 자리에서 2002년에는 < 춘향뎐 >을, 그리고 2012년에는 < 만다라 >를 열편 중의 하나로 선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비평의 관습 중의 하나이기도 한데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면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세계 영화사의 계보 안에 하여튼 위치 짓고 싶어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토 다다오 선생님은 감독님의 영화를 미조구치 겐지의 계보 안에 위치 지은 첫 번째 비평가이기도 합니다. 임권택 _ 일본에 갔을 때 내 작품이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일본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내 영화가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와 닮은 점이 많다는데 사실 그때까지 나는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나는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었고, 일본영화는 한국에 수입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일본에 방문했을 때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데 떠나기 전날, 일본 국제교류 기금에서 <우게쓰 이야기>와 < 서학일대녀 > 두 작품을 16밀리 프린트로 보여줬어요. 그때 시간이 없어 두 작품밖에 못 봤어요. 12월인 건 기억이 나는데, 아마 1980년대 거의 끝 무렵이었을 거예요. 그 쪽에서는 좀 더 시간을 내면 갖고 있는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를 모두 보여주겠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두 작품을 본 이후에 그 분의 영화를 다 보기위해 더 머무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말았어요. 그 이후 왜 내 영화들이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와 닮았는가 보니까 정말 영화를 끌고 가는 정서적인 어떤 것들이 비슷한 데가 있었어요.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미조구치 감독의 영화는 무인사회가 갖는 정서에 바탕을 두는 것이고 나는 문인사회가 갖는 바탕에서 영화의 운행이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사토 다다오 선생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선생도 동양인에게 정서적으로 비슷한 성향의 어떤 것이 있어서이지 거기에 무슨 표절을 했겠냐고 그런 얘기를 했어요. 정성일 _ 한편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 다른 사람의 영화를 보시면서, 정서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일본영화 중에서, 이 사람은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구나, 하는 친근함이 드신 감독이나 영화가 있으신가요? 그게 동시대이건, 아니면 고전적인 영화이건 관계없이. <아! 노무기 고개>(1979), < 행복의 노란 손수건 >(1977) 임권택 _ 나는 어렸을 때 짧은 무성영화 몇 편을 본 거 외에는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없어요. 지금 그냥 문득 떠오르는 영화들은 1979년에 영화진흥공사에서 여행을 시켜주었는데 미국에서 귀국하는 마당에 도쿄를 들려서 일본 영화 몇 편을 본거요. 그때 내가 이것은 참 괜찮다싶은 영화는 <아! 노무기 고개>라는 견사공(絹紗公)들에 대한 얘기요. 일정시대 시골여자들이 끌려가서는 물레 돌리는 직조공장에서 근무하는 영화였어요. 그 영화를 만든 야마모토 사츠오라는 감독이 상당히 괜찮은 감독인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재미있는 영화로는 야마다 요지의 < 행복의 노란 손수건 >이란 영화를 재밌게 본 기억이 나고, 그 감독의 시리즈로 주욱 나왔던 < 남자는 괴로워 >도 세편 정도 봤어요. 그거 말고는 일본 영화는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요. 왜냐면 이승만 정권은 일본과 전혀 교류가 없었고. 시나리오 같은 거는 책으로 보고 많이 베끼고 했다는데, 하지만 나는 국민학교에서 어설프게 일본어를 배웠고 또 그런 걸 그때 구하기도 힘들었어요. 지금처럼 DVD나 그런 것도 없었어요. 필름이 들어와서 영사기에 걸려야 일본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시절이죠. 그래서 일본 영화의 영향을 받을 수 없었어요. 완전히 단절되었으니까. 정성일 _ < 만다라 > 직후에 런던에서 다섯 편의 한국영화를 초대해서 상영을 한 기획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때 초대받은 영화 중 한편이 < 안개마을 >이었습니다. 이때 유럽 영화저널에서 <안개마을>에 대한 평가가 있었고, 여기서 다섯 편을 소개한 행사는 이후 유렵에 한국영화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지금까지 말해지고 있습니다. 임권택 _ 그때 나도 영화와 함께 런던을 방문했었어요. 하지만 직접 거기서 마주친 느낌은, 글쎄, 어떤 평가가 나왔는지는 몰랐고, 영국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이 영화제가 진행되고 있구나, 하는 별로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돌아왔어요. 정성일 _ 아마도 비평적 성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 안개마을 >에 대한 이해는 미지의 감독이 만든 이 영화를 처음 마주친 비평의 난처함이 고스란히 담겨있었습니다. 종종 안토니오니를 인용하면서 이 영화를 테시가하라 히로시의 < 모래의 여자 >의 계보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처음 감독님의 영화가 유럽과 만났을 때, 호의는 충분히 느껴지지만 오해되고 있을 때의 난처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임권택 _ 질문이 들어오는 걸 보면 이 사람이 내 영화를 제대로 봤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난처함 정도가 아니고. 피에르 리시앙의 말에 따르면 임 감독 초기의 영화는 때려 죽여도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고까지 했어요. (웃음) 문화의 벽이었던 거죠. 하지만 계속 당신의 영화를 보고 있으니까 한국 사람이나 한국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 이해에 도움을 주는 정보가 당신 영화 도처에 있다. 아마도 당신 다음 세대의 한국영화들은 당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라고 말하더군요. 정성일 _ 한국 영화가 런던에서 상영된 이후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독일을 경유해서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독일 영화비평가인 클라우스 에더는 감독님의 영화를 방어했고, 더 나아가 뮌헨 영화제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을 기획할 정도로 지지하였습니다. 유럽의 영화비평가들, 영화 저널들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 _ 클라우스 에더는 비교적 정서적으로 동양 사람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였어요. 서양인들이 갖는, 어떤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것이 많이 없는 평론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뮌헨 영화제 이후로는 별로 만난 적이 없어요. 사실 만나도 언어가 안 통하니까 많은 이야기를 하기 힘들기도 하고요. 그 다음에 토니 레인즈랄지 프랑스 평론가들은 자주 만났어요. 정성일 _ 감독님 영화가 서방에서 결정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 씨받이 >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을 때부터입니다. 이제는 시간이 충분히 흘러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 라쇼몽 >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을 때 “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점에서 내게 그 상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였다. 그 상은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에 신념을 갖게 해주었다”라고 말했습니다. 1987년 <씨받이>로 상을 받았을 때 감독님에게 그 상의 의미는 개인적으로, 아주 개인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 _ 그쪽을 얘기하려면 난 참 난처한 게 많은데 진흥공사에 장영목이라는 사람과 둘이 베니스 영화제에 갔어요. 닷새인가 호텔 숙소를 내주고 그 기간이 지나면 우리가 경비를 대야한다고 하더라구요. 거 참. 닷새가 지나니까 경비가 없다고 둘이 머무는데 하루에 80불 받는 상 마르코성당 뒤에 아주 낡은 호텔로 옮겼어요. 폐막식이 가까워지면서 < 씨받이 >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고 프랑스에서도 호의적으로 쓰고, 그냥 막연하게 그런 소리만 듣고 있었어요. 마침 ZDF 독일 제2 방송이 인터뷰 요청을 해서 가는데 내 앞서 인터뷰를 한 여자가 심사위원장이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인터뷰 끝나고 스쳐 지나가다가 내가 <씨받이> 감독이라는 소리를 듣자 “나는 심사위원장이긴 하지만 내가 상을 줄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는 <씨받이>를 굉장히 좋은 영화로 봤다”고 얘기하고 갔어요. 그러고 며칠 뒤 시상식 날인데 그때 분위기는 아주 작은 거라도 탈 수 있지 않겠나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어요. 일 년 전에 일본에 그 날짜에 들어가겠다고 약속을 해놔서 나는 수상식까지 있을 수 없었던 거요. 그래서 영진공 사람만 남았어요. 일본으로 들어가려고 잠시 들린 서울에 가서야 수상 소식을 알았어요. 나중에 일본 사람들이 이 약속을 좀 어기면 어떠냐, 그 중대한 시상식을 놔두고, 참 답답한 인간이다. 저건 한 번 약속을 하면 틀림없이 지키는 놈 그랬을 거예요. (웃음) 한국 신문들이 수상결과를 아주 작은 지면으로 보도하니까 일본 사람들이 이렇게 큰 상을 작게 보도하다니 이상하다고 했어요. 그때 이게 큰 상이었구나 생각했고, 사실 내 영화에 기대한 게 없으니까 본선에 오른 것만으로도 보람 아니냐, 그런 식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상을 탔을 때는 아주 우물우물 지나간 거예요. 그 다음 < 아다다 >, 또 그 다음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로 이렇게 매해 계속 상을 받으니까 이거 별것도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가 또 < 춘향뎐 >에서 칸 영화제 경쟁본선에 들면서 세계 배급이 되고, 그러면서 수상이란 게 정말 필요한 것이구나. 그때서부터 큰 영화제 수상이라는 게 내 개인뿐 아니라 한국 영화의 위상과도 관계 되어있고 그 때문에 전 세계로 배급도 되고 하니까. 그때부터 수상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게 그냥 그런 정도인 거지요. 정성일 _ < 씨받이 >가 상을 받은 이후로, 말하자면 한국 관객들로부터 우리와 다른 문화의 관객들을 향해서, 영화가 받아들여진다는 면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습니까? 임권택 _ 모스크바에 갔을 때는 인터뷰할 때 내가 1분 얘기하면 10초도 번역이 안 되는 이상한 인터뷰를 하면서도, 어쨌거나 그 영화가 통하는 거요. 내가 제일 관심이 컸던 게 뭐였냐면 내 영화가 어디까지 통하고 있는가. 영어를 모르니까 내가 점검해 볼 통로가 없었어요. 평론가나 기자들 시사 끝나고 보면, < 씨받이 > 경우 굉장히 엉뚱한 질문만 나오고. 너희 영화 검열은 어떠냐, 그런 질문만 했어요. 때로는 질문이 아주 기초적이어서 쟤들이 우리를 놀리고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하지만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를 통해서 이런 페이스로 가면 누가 의심하고 말고도 없이 내 생각으로 찍으면 유럽이고 어디고 통하는 영화가 되겠다는 자신을 가졌어요. 정성일 _ 감독님의 전면적인 회고전으로 1989년 낭뜨 영화제에서 10편을 상영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칸 영화제 경쟁 초대까지 1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프랑스 비평을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 _ 프랑스에서는 처음부터 굉장히 호의적이었어요. 샤를 테송도 그랬고 장 미셸 프로동도 그렇고. 정성일 _ 프랑스 비평가들이 특히 좋아했던 영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마도 나라마다 감독님의 영화중에서 선호하는 영화가 조금씩 다를 것 같습니다. 임권택 _ < 춘향뎐 >도 좋아했고, 그때 경쟁에 갔을 때 심사위원 중에 한 명이었던 < 인도차이나 >를 찍은 감독 레지스 바르니에는 올해 자기가 칸에서 본 영화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 취화선 >으로 칸에 갔을 때는 심사위원장이었던 데이빗 린치는 파티를 하는데 내게 다가와서 전체로서나 지엽적으로나 모두 완벽하다면서 당신은 완벽주의자로 영화를 만든다, 라고 하더라구요, 고마운 이야기지요. (웃음) 정성일 _ 프랑스 영화 비평가를 만났을 때 특별히 관심을 갖고 질문을 던졌던 부분들이 있습니까? 임권택 _ 많이 공감이 가는 소리를 하는 게, 르몽드에 있던 장 미셀 프로동은 < 천년학 >을 본 다음 < 서편제 >와 < 춘향뎐 >을 통해서 판소리를 익히지 않았다면 자신이 어떻게 <천년학>의 그런 영화적 수준을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 면서 메일을 보내주었어요. 정성일 _ 감독님 영화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기까지는 다소 시차가 걸렸습니다. 1996년 USC에서 데이비드 제임스 교수웰옥令돈?대대적인 회고전과 학술발표가 있었고, 그런 다음 영어로 된 첫 번째 감독님 연구 서적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었다) 임권택 _ 그리고 뉴욕영화제에서 거푸 두 번을 임권택 특별전을 했을 정도로 성원이 있었고 데이비드 제임스 교수가 아주 전적으로 내 영화에 대해서 지지를 보냈고, 그런데 그 배경을 보니까 스탠 브래카쥬 같은 사람이 열심히 옹호를 해줬어요. 정성일 _ 비평의 전통이 미국과 유럽이 크게 다른 편인데, 유럽 비평가를 만났을 때와 미국 비평가를 만났을 때의 차이를 어떻게 느끼셨는지요? < 안거 >(1997) 임권택 _ 글쎄, 뭔가 문화적 벽을 갖고 서로 만나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 때문에... (잠시 생각) 상해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간 적이 있어요. 거기에 경쟁으로 온 영화중의 하나로 (후빙 리우가 연출한) 중국 영화 < 안거 (安倨)>를 심사하게 된 거요. 그때 심사위원으로 함께 한 사람 중에 헝가리의 이스트반 자보, < 황금연못 >을 찍은 미국 감독 마크 라이델, (러시아 감독) 엘렘 클리모프, 일본 여배우인 마츠자카 케이코, 이런 사람들과 같이 있었어요. < 안거 >라는 영화는 내가 보기에 아주 잘 찍은 거요. 무슨 얘기냐면, 광동 쪽 어딘 거 같은 데, 중국이 막 개방하고 열렸을 때 주인공이 자기 처와 둘이 열심히 살면서 인테리어 하는 가게를 차려서 돈을 잘 벌고 하는데, 어머니는 굉장히 나이가 들어가지고 따로 집을 얻어서 살게 해요. TV, 냉장고, 전화기. 없는 거 없이 살게 해요. 그런데 남편이 효자여서 매일 어머니를 찾아가 뵈니 여편네가 짜증을 내는 거요. 덮어 씌워서 아들한테서 온 전화를 받고 해요. 아주 잘 찍은 영화라고 나는 봤어요. 경쟁영화 중에 다른 중국 영화로 굉장히 스케일이 큰 놈이 있었어요. 영국군이 침공해왔던 아편전쟁 무렵이었던 거 같아요. 그걸 티베트 국민들과 같이 막아낸 대작 영화가 있어요. 뒤에 가서보면 전투 씬이고 뭐고 엉망인데, 중국 친구들, 러시아에서 온 감독은 이 전쟁영화를 막 칭찬을 하는 거요. 그래서 내가 뭐 이게 칭찬할 만한 영화냐, 전투 씬이고 다 엉성한 영화이고 군대 갔다 온 사람은 웃을 수밖에 없는 그런 영화인데 막 좋다고 우기는 거요. 왜냐하면 이게 티베트 국민들과 힘을 합쳐 싸운 영화이고 중국 정부에서 돈을 댄 영환데 나는 눈치도 모르고 어쩐지 얘기를 하다 보니 싸늘한 거요. (웃음) 집행부 사람도 다 있고 그러는데. 하지만 내친김에 그만 둘 수도 없더라고. 근데 다른 감독도 가만히 있더라고. 좀 나서서 아니면 아니라는 얘기를 해줘야 되는데, 거 참. 그래도 내가 주장을 해서 <안거>라는 영화가 상을 받았어요, 결정을 하기 전에 자보가 나한테 자기는 그 작품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그러는 거요. 왜 어머니가 이 전화에다 천을 씌어놓은 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 좋은 가구도 많은데. 그러면 중국 쪽 누가 해명을 해야 하는데 시나리오협회 회장이란 친구도 그렇고 홍콩에서 온 감독도 그렇고, 그쪽은 아주 가만히 있는 거예요. 전쟁 영화도 떨어지고, 아마 그래서 그랬나 봐, 그래서 내가 설명했어요. 이 할머니의 나머지 생은 오직 아들과의 소통에서 보람을 찾는 얘기다, 근데 아들과 소통의 기구인 소중한 전화에 보자기를 씌운 것은 둘의 소통이 얼마나 소중한 지 보여주는 건데 납득 못할 게 뭐있냐, 효심에 대한 얘기인데. 그렇게 말하고 나서, 투표에 들어갔는데 자보도 그 작품에 표를 줬어요. 그러고 나서 당신이 하도 우겨서 찬성을 했지만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하는 거요. 그래서 어떤 점이 이해가 안 되냐 물어보니까 왜 이 할머니는 아들과 소통을 위해서 멍청하게 남은 인생을 사냐, 왜 자기 인생은 안 살고, 라고 그러더라고. 그때 동과 서 사이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구나, 라는 걸 알았어요. 그런 벽들이 도처에 있는 거예요. 정성일 _ < 씨받이 >이후 이 시기까지 오면서 한국에서도 비평이 감독님의 작품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 절정은 대중적 성공과 함께 < 서편제 >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세대의 비평적 관심 속에서 한국어로 쓰여진 비평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임권택 _ 그러니까 옛날에 내 영화에 대한 외면이 지지로 돌아섰던 거 아니요. 그거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였는데, 그런 지지가 사실상 영화를 바로 보고 하는 지에 대한 의구심 같은 게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내가 한국적인 정서나 한국 사람들의 삶이나. 가장 큰 영향을 줬던 미국 영화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것에서 같이 만나고 있는 건데, 지금까지. 지금의 평가 중에는 내가 해냈으면서도 여전히 미처 알아주지 않는 대목들이 남아있고, 또 내가 연출을 하면서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도 저렇게 영화에서 읽어내기도 하고, 내 자신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을 얘기들을 해내기도 하고. 그러면서 자꾸 생각하는 기회를 주는 거요. 하여튼 많은 사람들의 관심, 각기 자기들이 종사하고 있는 직업이나 이런 걸 따라서 영화를 달리 보는 사사로운 평가, 그런 것들을 많이 만나는 거죠. 정성일 _ 많은 비평이 쓰여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의 영화중에서 가장 오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영화가 있습니까, 혹은 다시 이해받고 싶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랄까, 왜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못 받아들이는 걸까, 의아스러운 순간들, 그런 영화들이 있습니까? 임권택 _ 최근에 비로소 한 얘기지만 < 족보 >는, (잠시 생각)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에요. 아무도 얘기 안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족보>를 만들면서 내가 미국 영화의 영향으로부터 비로소 많이 빠져나온 결과물이고, 한국 사람이 가질법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정서. 이런 것들을 내 영화에서 윤곽을 찾아냈구나하는 굉장한 성취감을 가졌었는데. 그때는 전혀 이해를 안 해주고 완전히 외면을 당했어요. 내가 제일 기분이 좋았던 것은 정성일 평론가가 내 영화를 < 만다라 >에서 볼 게 아니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봐야한다는 얘기를 해줄 때였어요.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정말 <족보>나 이런 영화를 깊이 들여다 봐 줬으면 <만다라>로부터만 내 영화를 얘기해준다는 게 얼마나 잘못된 건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정성일 _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저로서는 정말 기쁩니다. 그런데 꼭 과거에로 거슬러 올라가서만이 아니라 현재진행중인데도 감독님 영화중에는 이상하게 얘기가 잘 되지 않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근작에서 < 축제 >와 < 하류인생 >이 그렇습니다. 두 편에 관해서는 한국에서도 그렇고 외국에서도 그렇습니다. 비평가들은 소통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 이 영화들과 뭔가 친화성을 느끼지 못함으로써 이들이 영화에 다가가는 걸 몹시 힘들어 한다는 거죠. 그 중에는 < 개벽 >도 있습니다. 그런 불편함을 만났을 때 감독님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임권택 _ 정말 불편하죠. (부산영화제 유럽 코디네이터인) 임안자 씨가 전해준 말이 (베를린 영화제 포럼 집행위원장 이었던) 울리히 그레고어 부부가 러시아에서 지금 영화 관계 일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하는 행사 중의 하나로 자기가 그 동안 본 영화 중 세계에서 가장 볼 만한 영화 10편을 꼽았는데 그 중에 < 축제 >가 들어갔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그 영화를 통해 어떻게 그런 감흥을 받았으며 우리는 거기서 멀리 떨어져있으니 그 선정의 이유를 알 수가 없잖아요. 한국의 장례를 다뤘는데 여기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기서는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 하류인생 > 찍을 무렵 뉴욕 MoMA에서도 내 작품 몇 편을 가지고 회고전을 했을 때 <축제>를 틀었어요. 그러면서 거기서 가장 좋은 영화로 <축제>를 꼽았어요. 그런데 국내에선 안 닿고 있더라구요. <축제>를 만들고 이청준 씨랑 시사를 본 후에 어떻게 봤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 서편제 >보다 훨씬 좋은 영화인 거 같다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는데 개봉을 하고 보니 둘이 헛소리 하고 있었던 거요. 대중이건 비평이건 한국에서는 관심밖에 내 놨던 거요. 어떤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닿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판 그렇지 않고 나 자신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이럴 때마다 나 자신이 너무 어리둥절한 거요. 하지만 그런 불편한 심사를 얘기할 수가 없잖아요, 자기 작품이 잘 안 받아들여진다고. 정성일 _ 영화를 만들면서 이 영화는 결국 잘 안 받아들여지겠구나, 라고 만드는 중에 느낀 적이 있습니까? 임권택 _ < 개벽 >이 그랬어요. (잠시 생각) < 축제 >도 그랬고. 왜냐하면 <축제>의 구조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그 영화는 얘기 가닥이 가족사를 따라서 워낙 여러 가닥이기 때문에, 그 복잡한 가닥을 어떻게 정리해서 복잡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내느냐 힘을 쏟았는데, 하면서도 내 소신을 갖고 있는 거지, 영화에 대한 결과가 내 뜻대로 되리라고 생각할 순 없었죠. 그래도 그 작업을 해내면서 어느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 짝코 >도 그 복잡한 구조를 어찌 보면 굉장히 정밀한 조직을 통해서 해내고 있는데 그런 거를 잘 모르는 거요 사람들이. 그런 영화는 그 영화를 볼 사람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는 거죠, 그런 거 같아요, 영화는. 정성일 _ 영화평론가뿐 아니라 문학평론가. 혹은 철학자들, 인문사화학자들, 같은 많은 영화의 친구들의 영화에 관한 글이 있습니다. 철학자 김용옥 선생의 글도 그런 비평 중의 하나입니다. 감독님에 관한 많은 글들이 영화 비평 바깥에서 오고 있는데 그들은 영화문법에 미숙하지만 각자의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부분을 집어내고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글이 도움이 되는 적이 있습니까? 임권택 _ (한참 생각한 다음) 도움이 된 부분도 있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아요. 도움이 안 되었을 리가 없죠. 정성일 _ 반대로 영화적으로 미숙한 것을 한편으로는 거의 소설에 가까운 비평으로 그것을 메우면서 영화를 오해하거나 불편하게 만든 적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이런 글을 읽을 때 몹시 불편해집니다. 임권택 _ 나는 그런 것도 여러 번 만났기 때문에 완전히 이력이 붙은 거요. 그런 소리, 그런 견해 얼마든지 좋다. 뭐, 얘기할 수 있는 거지. 정성일 _ 평론가들이 비평하면서 영화에 접근할 때 자기들이 사용하는 개념적인 용어가 있습니다. 현장에서 여러 가지의 수없는 경우의 수 안에서 수많은 잠재적 가능성 중의 선택으로 만든 영화 앞에서 평론가들이 오로지 개념적 용어들로만 영화에 접근해올 때 그 영화적 개념들이 어떻게 읽히십니까? 임권택 _ 비평가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남의 영화를 자기 틀 안에 가두어서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요. 하지만 이제는 하도 많이 들어서 개의치 않아요. 어떻게 봐도 무슨 상관이냐 해요. 왜 그러냐면 한 두 작품에서 그런 게 아니고 끊임없이 만나는 평가니까요. 내가 한 가닥만을 쫓아서 그들 기호에 맞는 영화를 만들 수는 없지 않나, 나도 내 기호가 있는데 생각해요. (웃음) 정성일 _ 제 나쁜 습관 중의 하나는 남의 집을 방문하면 꼭 서가에 있는 책의 목록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웃음) 감독님 서가에 많은 책이 꽂혀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소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서가에 영화에 관한 책은 단 한 권도 없다는 점입니다. 임권택 _ 영화를 하면서 나는 영화를 잘 보지 않아요. 조수시절 정신없이 영화를 봤어요. 쫓아다니면서 영화를 열심히 보고난 이후 두려워진 것은 내가 부지불식간에 그 영화의 잘 된 부분을 모방할 우려가 있다는 거예요. 아예 모르고 살면 죽으나 사나 자기 능력으로 창의적인 발상을 해내서 그 미숙한 것이든 어떤 것이든 해내고 그래야 되는 건데. 그 뒤로부터는 그런 걸 두려워하고 잘 안 보게 되었어요. 아마 그것과 비슷한 이유일 거예요. 영화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세계가 너무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는 지향하는 폭이 넓었나 몰라도 나이 들면서부터는 그게 점점 좁아졌어요. 내가 대중소설을 손에 닿는 대로 읽은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때 얼마나 속독이었냐면 『청춘극장』몇 권을 아침에 빌려서 읽고 책방에 갖다 주면 주인이 다 읽고 갖다 주냐고 물어볼 정도였어요. 내가 18살 그때 집에서 가출해서 부산에서 떠돌던 시절 잘 데가 없어서 노숙을 했어요. 밤에 빈 좌판에 누워서 내가 거기 누운 다른 노동자들한테『수호지』같은 걸 얘기해줘요. 그런데 다 해버리고 밑천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적당히 끊고, 그러면서 밤마다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았어요. 그래서 그들이 나를 굉장히 호의적으로 대해줬어요. 그때만 해도 나는 굉장히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별별 얘기들을 바로 읽어내듯이 촘촘하게 풀어내먹고 그랬어요. 노동판에 들어가면 지게 지는 일꾼들이 무리지어 가야하는 일들이 있어요. 그 열 명 무리 속에 나만 꼬투리로 떨어지곤 했는데도, 내가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나를 붙여줄 정도였어요. 그때는 대중소설 읽을 것을 복기할 정도로 얘기를 잘 했어요. 그 당시는 시나리오 질이 형편없을 때여서 손으로 봐가면서 찍었을 텐데 뭘로 찍었냐고 어떤 교수가 물어봤어요. 하지만 그걸 그대로 옮겨서 찍은 일은 없었어요. 내가 그때 읽었던 숱한 대중 소설들을 복기할 수 있는 능력은 있었지만, 대신 아주 멀리 돌아서 응용을 했겠죠. 정성일 _ 영화를 찍어오면서 어떤 시점에서 생각을 정리해보기 위해서 영화 개론서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까? 임권택 _ 읽을 시간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어요. 대신 시나리오 작법은 봤죠. 정성일 _ 오랜 시간 전력을 다해서 영화를 찍어온 감독으로써 여러 세대의 비평가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글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영화비평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임권택 _ 비평가들은 내가 찍어놓은 영화, 이 안에는 내가 하고 싶은 영화, 내가 영상으로 담아낸 게 있을 텐데 통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편으로 비평가 입장에서는 뭐 그렇게 깊이 보고 천착할 만한 영화도 아닌데 무얼 그렇게 읽어내라고 하나 싶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내가 비평가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도 소용없는 거요. 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갈 테니까 그러니 누가 묻는다면, 이를테면 사토 다다오 선생이 한국에 영화 비평이 있냐, 묻는다면 더러 있죠, 나로서는 이렇게 애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말은 이런 뜻인 거예요. 정성일 _ 21세기 영화 대중의 새로운 현상은 1인 미디어 시대가 되어서 모든 관객들은 비평의 자리에서 자기의 가치에 따라 자기 블로그에 영화평을 올리고 평점도 줍니다. 비평가들을 특별한 관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대중관객도 특별한 비평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대마다 영화관객들은 계속해서 변했고, 또 그렇게 변할 것입니다. 2012년의 대중들은 어떤 영화 관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임권택 _ 나는 영화를 만들면서 흥행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생각을 늘 해요. 그래서 관객의 기호를 어떻게든 알아내고 따라가야지 하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지만 한 번도 그것을 따라가 본 적이 없어요. 늘 내 멋대로 찍었어요. 정성일 _ 감독님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임권택 x 101」댓글을 통해서 네티즌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박준휘님(kinop)의 질문입니다. 감독님께서는 < 춘향뎐 >처럼 전편이 판소리인 영화를 다시 한 번 만들어보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임권택 _ 깊이 생각 안 해봤는데 예전에 (전 영상자료원 원장이었던 소설가) 조선희씨가 < 춘향뎐 >을 본 뒤 우리 판소리 다섯 마당을 영화의 두 시간에 끝내는 게 아니라 다섯 마당 다 찍어보면 어떻겠냐는 소리를 했어요. 생략 전혀 없이. 그런 제의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나이가 너무 들었어요. 나이가 너무 들어 힘들어요. 그건 내가 생각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지 않나요. 원본이 갖는 맛과 흥이 있어요. 그 자신이 갖는 위대한 것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가 있고, 그 안에 나도 살아서 들어가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정성일 _ 이인영님(jyunjyong)의 질문입니다. < 장군의 아들 >같은 액션 활극을 한 번 더 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임권택 _ 글쎄, 그것도 생각해 봐야겠어요. 태흥영화사에서 < 장군의 아들 >을 찍자는 제안이 처음 왔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몇 번을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걸 승낙하면서 내 뼛속에 흐르는 저속한 액션 드라마를 찍는 것에 대한 매력이 끊을 수 없이 흐르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못하겠어요. 그것도 아마 내가 늙어서 그렇습니다. 정성일 _ 이선화님(2011corso)의 질문입니다. 영화를 만들면서 주제에 대한 선정과 그 시대의 연관성이 서로 어떤 영향 아래 놓이는지요? 이 두 가지 문제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어떤 감독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어떤 감독은 몹시 민감하게 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임권택 _ 내 영화 이력을 보면 60년대에는 저질 액션 영화를 했고 70년대는 반공영화를 했어요. 그러면서 체질적으로 미국 영화 흉내 내기를 내 영화에서 빼내고자 했고 < 족보 >서부터는 미국영화로부터 덜미 잡힌 것에서 빠져나왔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 80년대는 이렇게 < 만다라 >랄까, 그런 영화 무렵부터 총체적으로 보면 인본(人本)을 다룬 거지요, 사람답게 살아야한다는 주제와 한국전쟁을 겪은 자가 직업으로 영화감독을 가진 다음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의 총체적인 느낌을 담았어요. 90년대에는 < 장군의 아들 >, < 서편제 >, < 태백산맥 >도 있고, 그 전에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소재로 했어요. 그리고 < 춘향뎐 >으로 넘어가요. 하지만 지금도 시류와 관계가 없는 영화들만 한 게 아니고 지금 현대에 이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맞지 않는 작품일지라도 잘해낸 소재가 판소리에요. 이춘희씨의 ‘이별가’라는 노래가 있어요. < 취화선 >에서 장승업이 걸어가는 장면, 그 영화를 준비하느라 어수선할 때 차를 몰고 가면서 라디오에서 그 노래를 들었어요. 그래서 방송국에서 그 노래를 가져와라 해서 연출부를 모아놓고 들었어요. 내가 이 노래를 <취화선>에 쓰겠다고 하니 아무도 대답을 안 해요. 한참을 지나더니 연출부 한 명이 나서서 감독님 우리 모두 의견을 모았는데 이 노래를 쓰면 젊은 애들이 다 웃습니다, 라고 강경하게 나왔어요. 하지만 녹음하면서 다시 노래를 넣었죠. 그 장면에서 영상과 붙여놓으니 다들 깜짝 놀라는 거예요. 이춘희씨가 부른 그 민요를 오래되었다고 듣고 있으면 안돼요. 그 일은 현대에 그걸 생생하게 갖고 올 수 있다는 신념이 갖고 온 개가에요. 어떤 시점에 맞춘다기보다는 내가 영화를 만드는 시점이 늘 현대에요. 아주 옛날 거라 해도 그걸 현대에 갖고 와 통용될 수 있도록 만든 놈이 임자죠. 정성일 _ 박상미님(iamfiction)의 질문입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감독님 작품에서 ‘그 무엇’을 받아들이기 원하십니까? 임권택 _ 작품마다 달라요. 이를테면 < 서편제 >는 판소리가 우리 마음 안에 생동감 있게 감흥을 지니고 살아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였어요. < 개벽 >은 한 종교를 통해서 이 민중적 사고를 깨우침을 관객들이 같이 가져주기를 바라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영화냐에 따라서, 소재나 주제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어요. 정성일 _ ‘그 무엇’을 영화 찍으러 가기 전에 결정하시나요, 아니면 계속 그걸 찾아가면서 촬영이 모두 끝난 다음 편집을 시작할 즈음 그걸 깨닫게 되는 건가요? 임권택 _ 후자는 너무 늦어요. 작품을 선택할 때 그게 정해져야 하는 거예요. 물론 정해졌다고 해서 구체적으로 생각이 서는 건 아니에요. 끝날 때까지 그 자신의 소신을 영상으로 드러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쥐어짜야 해요. 그렇게 그걸 찾아가는 거지요. 정성일 _ 감사합니다. 감독님의 답변이 저에게 앞으로 남은 글을 써나가면서 매번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더 많이 배울 것입니다. 더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102번째 영화 촬영현장에서 다음 인터뷰를 계속 하겠습니다. 인터뷰_2012년 12월 8일 날씨 맑음 정리_ 이지영 (한국영상자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