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성][성관계 트러블] 잠자리에서 적극적으로 리드하는 아내
- 제작년도
- 2010
거창한 의미 부여할 것 없다. <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요시하라 타츠야, 2025, 이하 ‘체인소맨: 레제편’)은 소년만화 저변에 깔린 결핍을 건드리는 고자극 드라마다. 원작 만화의 저변에 깔린 온몸 비틀기 삐딱선과 달리 이번 극장판은 떡밥을 뿌리고 정직하게 회수하는 모범생의 면모를 선보인다고 해도 좋겠다. 다만 강렬하고 직관적인 이미지 자극을 곁들여서. 스핀오프처럼 다소 결이 다른 스페셜 이벤트 같은 에피소드였기에 가능했던 잠깐의 일탈, 쉼표, 한여름밤의 꿈 같은 에피소드였다. 마찬가지로 고자극의 작화와 눈알이 시려울 정도로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곁들여서. 요란하고 화려한, 사상 최대의 연애 싸움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재밌지만, 시간의 풍화를 뛰어넘는 명작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표와 분기로 작용할 만한 깊이를 보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취향 저격의 안전하고, 검증되고, 무난한 작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므로 이 범상한 애니메이션은 매우 사사로워질 자격을 획득했다. 너도 재밌고, 나도 재밌었다는 취향의 확인. 그리하여 의미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즐거움의 안도감을 안기는 고백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향한 애니메이션, 순애의 재발견 2025년은 애니메이션의 강세가 확연한 한 해였다. 넓게 보면 영화산업의 (쇠퇴와는 결이 다른) 구조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단 한국 시장만의 흐름이 아니지만 한국 시장에서 더 도드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 주토피아 2 >(자레드 부시, 바이런 하워드, 2025)가 2025년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건 기존의 관성을 비춰볼 때 당연하다. 가족 관객을 타겟으로 한 검증된 IP의 속편이, 완성도와 무관하게 더 큰 흥행을 거두는 건 늘 반복되는 공식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체인소맨: 레제편>을 향한 호감과 열기는 단순히 수치적인 흥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흥행 면에선 <귀멸의 칼날> 등 재패니메이션과 같은 흐름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작화를 통해 쾌감을 준다는 면을 제외하곤, <체인소맨>은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체인소맨>이 이번 극장판 레제편에서 맑게 길어 올린 부분은 한동안 일본 만화에 번졌던 유행 같은 감각, 이른바 순애의 연장선에 있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단순한 소년만화의 극장판 확장이 아니다. 차라리 폭력의 세계에 던져진 두 괴물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나누는, 가장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의 변주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 세계는 언제나 젖어 있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 그리고 끊임없이 내리는 비의 눅눅함이 화면 너머로 전해진다. 덴지라는 인물은 태생적으로 결핍의 덩어리다. 그에게 욕망은 거창한 세계 구원이나 정의 구현이 아니라, 잼 바른 식빵이나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이성을 향한 원초적인 호기심 같은 것들에 머물러 있다. TV 시리즈가 덴지의 그 동물적인 감각과 혼돈을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면, 이번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혼돈 속에 싹튼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의 심도를 깊게 가져간다. <체인소맨: 레제편> 중 / 사진: IMDb , ⓒ 2025 M/CSMP ⓒTF/S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가진 특권 중 하나는 현실의 물리학을 무시하는 과장된 움직임, 흔히 데포르메라고 불리는 의도된 작화 붕괴다. 하지만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과장됨 속에 기묘한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MAPPA의 제작진은 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 특히 레제의 얼굴에 스치는 홍조나 덴지의 당황한 눈동자 등 감정의 떨림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액션 시퀀스에서의 속도감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격의 무게감이 관객의 뼈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태풍의 악마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이나, 덴지와 레제가 공중에서 얽히며 싸우는 클라이맥스는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역동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미묘한 리얼리티의 근간에는 원작자의 시점이 투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TV 오프닝에서부터 고백하고 있듯 후지모토 타즈키 작가의 실천에는 영화, 달리 표현하면 카메라의 위치과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체인소맨: 레제편> 역시, 아니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거의 모든 컷의 근간에 실사 영화에 대한 향수가 묻어 있다. 겪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첫사랑의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는 영원히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피어난다. 덴지와 레제가 맺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애틋함의 감흥을 자아내는 것처럼, <체인소맨: 레제편>의 동력도 실사 영화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깔려 있다. 이것은 상하 혹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와 다르고 실사 영화가 될 수 없다. 그 구분을 전제로 하여 한없이 영화에 가깝게,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다르고자 할 때 여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오리지널리티가 피어난다. <체인소맨: 레제편>의 오리지널리티는 노골적인 애정고백을 바탕으로 한 빽빽한 오마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덴지와 레제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타포인 이솝 우화의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는 덴지와 레제, 두 하이브리드(인간과 악마의 융합체)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시골 쥐의 평온하지만 배고픈 삶과 도시 쥐의 풍요롭지만 위협받는 삶. 덴지는 언제나 도시 쥐의 삶 속에 던져져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골 쥐의 안온함을 갈구해왔다. 레제는 그런 덴지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고 싶으냐고. 이것은 ‘자유’와 ‘통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공안 대마특이과라는 시스템(도시) 안에서 사육되는 덴지와, 그 시스템을 파괴하러 온 외부의 존재 레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는 듯하지만 실상 누군가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에서는 거울상처럼 닮아있다. 레제는 마키마의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캐릭터답게 첫사랑의 이상향을 응축시켜 놓았다. 진정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면 악마로 변하는 이들의 능력이 아니라 소녀가 소년을 만나는 상황 그 자체라고 해도 좋겠다. 레제가 덴지에게 가르쳐주는 수영법,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그들이 ‘무기’가 아닌 평범한 ‘소년소녀’로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다. 사진: IMDb( 1 , 2 ) 감독은 이 딜레마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한다. 레제의 폭발은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묘사되는데, 그녀의 머리가 폭탄으로 변하고 사지가 터져 나가는 그로테스크한 변신 장면은, 혐오스럽기보다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준다. 화약(gunpowder)과 꽃(flower).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레제는 치명적이지만 끝내 질 수밖에 없는 꽃이다. 덴지가 그녀에게 건네려 했던 꽃다발, 그리고 마지막 카페 씬에서 들리지 않는 종소리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체인소 역시 피를 뒤집어쓸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존재다.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올 때의 카타르시스는 체인소의 소음과 겹쳐진다. 그들에게 사랑은 서로를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부수고 태워버림으로써 완성되는 파괴적인 제의(祭儀)와 같다. 그리하여 이들이 빗어내는 시끄러운 소음, 불협화음은 불쾌감 이면에 애잔함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폭탄의 악마가 터뜨리는 굉음은 청각을 마비시킬 듯 몰아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폭발의 순간이 아니라, 폭발 직전의 고요함, 혹은 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재(ash)의 정적에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 당신의 뇌리와 망막에 남는 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던 덴지가 레제와 함께 학교 수영장에 잠입해 밤의 유영을 즐기는 시퀀스이리라 믿는다. 물의 질감, 달빛이 부서지는 수면, 서로의 몸짓을 훔쳐보는 시선은 액션 장르의 문법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서정적인 이 장면에는 이뤄지지 못할 순수이기에 성립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 불꽃의 반짝임이 예뻐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위태로운 아름다움. 고백하자면 한동안 좋은 걸 그냥 좋다고 말하지 못했다. 의미를 찾아다니고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강박의 저주에 빠진 것 같았다. 때론 있지도 않은 의미를 찾느라 아는 척, 감동 받은 척, 거짓된 취향을 무장한 적도 있다. 어떤 척을 하는 걸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건 갈망이자 방향이며 강렬한 에너지다. 스스로 정한 이상에 도달하려고 발버둥치는 사이 단련되는 부분도 있고, 때때론 그 과정과 행위 자체가 자신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너무 멀리 와버려 지금 어디에 떠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순간이 다가온다.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때 발견한 작은 등대 같은 작품이다. 직관적으로 재미있고, 익숙하고 빤해서 더 마음이 가는 쉼터. 재밌는 걸 그냥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되돌아보니 우리는 모두 한때 덴지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그저 눈앞의 다정함에 목을 맸던 시절.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때 레제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야만 내가 살 수 있었던, 거짓말로 진심을 감춰야 했던 시절. 굉음이 남긴 이명(耳鳴)은 꽤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 것이다. 사진: IMDb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BECK: Mongolian Chop Squad> 중 (사진: " BECK: MONGOLIAN CHOP SQUAD ", MUBI)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 『H2』, 『러프』 등을 그린 청춘 스포츠 만화의 거장, 아다치 미츠루의 『미유키』엔 위와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한 소녀에 대한 소년의 애정을 편집자적 논평으로 일체화해 드러낸 귀여운 사례다. 이 발화는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고 미학적 실행으로 옮겨진다. 아다치 미츠루가 소녀를 그린 만화의 컷은 단행본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정도로 정말 커다랗다. 다만, 이 진담 섞인 농담처럼 만화의 컷은 진정 마음의 크기로 고스란히 치환될 수 있을까. 만화는 지면의 물리적인 크기 조정을 통해 독자적 의미 작용을 생성하는 매체일까.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만화(일본식 만화인 ‘漫画’에 한정)의 컷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원리를 따르는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만화와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란 매체 사이의 차이, 그리고 ‘실사’를 기반으로 한 영화의 감각이 무엇을 낳았고 낳을 수 없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장난스러운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치자면 우선 말의 역이 성립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만화 속 감정의 크기가 컷의 크기에 따라서만 조율되진 않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 숏을 떠올리게 하는 아다치 미츠루의 공백 컷이 대표적인 만화적 감정의 형성 방식이다. 서사의 고조가 일어나야 할 플롯의 이음매에 잠자리나 하늘, 물과 같은 자연물을 집어넣어 감정과 정취 사이의 낙차를 일으키는 그것. 투수가 던진 야구공이 포수의 글러브 혹은 타자의 배트에 닿기 전, 그 찰나의 순간을 유예하려 들어선 무관한 이미지의 연속과 충돌들. 이처럼 아다치 미츠루는 칸의 크기뿐 아니라 청춘 스포츠 만화의 장르적 내러티브에서 탈락한 오브제의 개입과 몽타주로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여는 작가다. 아다치의 몽타주는 곧바로 영화의 용어로도 (거슬러 올라가) 통역된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에 따라 모더니즘 시대의 일본 만화가들은 에이젠슈타인과 쿨레쇼프의 몽타주 등 소련 아방가르드 영화 이론과 렌즈 기반의 카메라 문법을 흡수하여 만화의 컷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영화의 컷과 구분하기 위해 만화의 컷을 ‘칸’이라 씀) 망가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는 이로부터 영화 기호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더불어 말년의 데즈카 오사무 등은 ‘필름 만화’를 통해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더 긴밀하게 고찰했다. 필름 만화란 필름의 한 프레임에 담긴 움직임 하나하나를 만화의 칸 하나하나에 그대로 대입하여 그린 방식이다. 영화의 1초 24프레임 상영 이전 단계에서부터 컷과 칸의 의미를 사유하고, 이로써 필름 운동의 근원적 사진 이미지를 고찰하며,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연결한다. 근래의 만화가들도 이 유산을 지키는 중이다. 대표적으로 『체인소 맨』의 후지모토 타츠키는 인물의 움직임을 앵글이나 칸 사이즈의 변화 없이 다수의 컷으로 나누어 그리는 필름 만화의 작법을 즐겨 쓰는 이다. 그러니 칸의 연속과 충돌이든, 몽타주이든, 기호적 이미지의 작용이든 만화와 영화의 칸-컷은 대개 분리 불가한 의미론 속에서 순환하는 편이다. 만화와 영화의 경계는 이래저래 더욱 희박해진다. 『H2』 중 (사진: “ Mitsuru Adachi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Original artist Mitsuru Adachi ‘천상의 목소리’란 <BECK>의 제약 만화와 영화의 친족관계를 하나씩 밝히다 보니 만화가 영화처럼 보이고, 영화가 만화처럼 읽힐 지경이라 어지럽다. 그럼에도 두 매체를 감상할 때 느껴지는 감정의 차이는 명확하고, 이 차이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선 또 다른 만화가의 말을 빌릴 필요가 있겠다. 재즈 만화 『블루 자이언트』의 작가 이시즈카 신이치가 처음 편집자에게 『블루 자이언트』의 기획을 전했을 때다. 편집자는 “자네, 종이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단 거 알지···?”라며 물음표를 던진다. 이에 작가는 “그렇긴 하죠. 그래도 뭐 책을 두드리면 소리가 나기도 하니까···.”라고 능청스럽게 답한다. 요컨대 만화와 영화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면 역시 소리이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사운드가 기재될 수 없는 만화, 그 대척에 있는 영상 매체의 틈이 사운드의 유무에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발상이겠다.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에서 소거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속성이 있다면 그것 역시 투수의 150km/h 짜리 직구가 날아가는 소리, 필로 숏 속 잠자리의 울음소리에 있을 것이란 뜻이다. 만화 『BECK』 시리즈(한국어판) 표지 (사진: “ BECK 10 ”, “ BECK 30 ”, 교보문고) 이러한 논지에서 만화와 영화의 관계 일변을 가장 적절히 포착할 수 있는 예시는 해롤드 사쿠이시 작가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연재한 소년 밴드 만화 『BECK』이다. 『BECK』이 걸작의 자리에 오른 큰 이유는 만화가 밴드 공연을 그린다는 본원적 모순에서부터 나온다. 밴드의 라이브 무대를 라이브의 순간으로 작동시킬 수 없다는 만화 매체의 커다란 제약이 있는 것이다. 이 한계에서 『BECK』이 택한 전략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주인공이자 밴드 BECK의 멤버인 유키오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천상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는 설정이다. 기타를 잡은 지 2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유키오가 단숨에 밴드 신의 스타가 되는 근거로 (아마 오아시스의 보컬 리암 갤러거를 모티프로 한) 그의 목소리가 제시된다. 즉 만화 『BECK』은 음악 없는 음악 만화라는 제약에 ‘목소리 없는 천상의 목소리’라는 이중의 제약을 가한다. 마치 『헌터x헌터』에 등장하는 제약과 서약의 원리(무언가를 제한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힘을 얻는단 설정)와도 같다. 유키오의 목소리를 만화로 그리지 못할 바엔 그것을 더욱 추상적인 경지로 이끌어, 독자에게 최대한 커다란 상상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BECK』에겐 커다란 어려움이 찾아왔다. 바로 인기 만화의 상업적 운명으로 인해 작품의 영화화가 이뤄진 것이다. 보통이라면 기뻐할 일이지만,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어떻게 실사화할지란 큰 문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영화 < BECK >(츠츠미 유키히코, 2010)은 아주 파격적인 작법을 택한다.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실사화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인지, 아예 유키오가 노래하는 목소리를 작중에서 소거해 버린 것이다. 유키오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순간마다 영화는 보컬의 마이크를 끈 듯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처리한다. 2010년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관객과 평자들은 이 선택을 비난했다. 음악 없는 음악 만화야 매체의 본질적 제약이라 친다 해도, 음악 있는 음악 영화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그렇다면 영화 <BECK>은 영화적이지 않은 것일까. 라이브 무대에 실사의 ‘소리’를 덧대지 않았기 때문에? 글쎄, 외려 영화 <BECK>이 택한 소리의 공백은 원작 만화의 설정을 이어가며, 소리의 효과를 이미지의 기호로 펼치는 영화적 역량을 보여준 사례다. 영화 <BECK>의 방식은 근원적으로 데즈카 오사무의 영화 기호론과 같은 일본 만화 고유의 작법을 세심히 이식한 쪽에 가깝다. 영화에서 유키오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화면은 일련의 몽타주를 늘어놓는다. 둥둥 떠다니는 구름, 슬로 모션으로 만화적 놀람의 표정을 기호로 발산하는 관객의 표정 등이 교차한다. ‘천상의 목소리에 놀란다’라는 사실을 가시적 문법이 아닌 기호의 원리에 빌려 구현하고, 소리의 공백을 메운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가 강속구의 시간을 잠자리 등의 자연물과 인물들의 표정에 가뒀다면,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구름 등의 자연물과 청중들의 표정에 구속했다. 시간의 리듬을 능동적으로 조작하는 만화의 영화적 작법이 한 바퀴 돌아 영화에 쓰인 것과도 같다. 돌고 돌아 만화와 영화는 또 비슷해지는 것일까. <BECK> 중 여기-있을 것의 애니메이션 여기에서 홀로 다른 선택을 하여 사고를 확장한 『BECK』의 산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코바야시 오사무 감독이 2004년에 만든 『BECK』의 애니메이션 <BECK: Mongolian Chop Squad>다. <BECK: Mongolian Chop Squad>는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란 문제를 정공법으로 받아 쳤다. “HUSKING BEE”라는 실존 밴드의 보컬리스트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를 유키오의 가창 성우로 기용한 것이다. 유키오의 보컬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진 TVA 12화의 <Moon on the water> 라이브부터 BECK이 일본 최고의 화제 밴드로 일약 올라서는 그레이트풀 사운드 페스티벌 무대에서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아닌 실제의 소리(가창)로 드러낸다.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가 ‘정말 천상의 목소리냐?’를 따지는 일은 무용하다. 여기서 재론하려는 바는 결국 매체 간의 차이다. 만화와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소거하고도 작동할 수 있었지만, 왜 애니메이션은 실사의 목소리를 택해야 했던 것일까. 단서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영상’이라는 하나의 영역에 두지 않는 일에서부터 발견될 것이다. 앞서 반복했듯이 만화와 영화의 유사성을 짚고, 그 바깥에서 애니메이션만이 독자적으로 지니는 돌출성을 찾음이 마땅하다. 롤랑 바르트는 영화의 허구성을 ‘여기-있음’으로, 사진 매체의 경험을 ‘여기-있었음’으로 설명했다. 영화는 어느 이야기든 현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는 공백의 범주에 있고, 사진은 놀라울 만큼 이전의 시간을 비논리적이고 마술적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다. 영화와 만화 <BECK>이 유키오의 목소리를 현실화하지 않고 소리의 불능이란 제약에 묶어뒀던 것을 이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처럼 만화의 원류가 영화적 뿌리에 깃들어 있다면 만화는 시간의 일상적 흐름을 거부하는 사진의 역량, 이와 동시에 칸과 컷의 공백(혹은 몽타주)을 활용해 감정의 찰나를 유예하는 영화의 힘을 함께 작동시킨다. 영화 <BECK>은 그러한 만화의 메커니즘을 영화에 거꾸로 옮겨와 실현한 경우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은 어떠한 지대에 존재하는 매체일까. 이에 대해 필자는 < 신세기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1995)과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츠루마키 카즈야, 1997)의 현대성에 대한 글에서 애니메이션을 ‘여기-있을 것’을 바라는 매체라고 설명한 적 있다. [1] 영화적 이미지는 현실-스크린-관객 사이에서 도래하는 결과물이고, 만화는 그러한 영화적 망상에서 기반한 칸의 펼침이다. 반대로 애니메이션의 망상은 공급자가 일방적으로 구현해야 할 ‘의도’의 집합체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없는 시공간을 인공적으로 창조해야 한다. 곤 사토시의 말처럼 애니메이션의 “모든 장면엔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연은 없다.” 애니메이션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창작자(들)의 순수한 망상이다. 현실에 ‘없던 것’이자 ‘없는 것’의 표현이다. 말하자면 유키오의 ‘천상의 목소리’란 현실에 기반한 영화와 만화에서 발생할 수 없는 이데아적 사건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이 무한의 상상을 ‘의도적으로’ 실현해야만 자신의 미학을 지킬 수 있는 매체다. 요컨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로 분화한 <BECK>의 선택, 구체적으로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표현한 방식들은 각각의 매체성을 즐거이 논할 수 있는 사례다. 밴드물의 정전이라 불리는 세간의 평가에 합일될 정도로 각 매체의 존재론을 증명하는 문제작이자 걸작이다. 아, 그러면 이쯤에서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라는 아다치 미츠루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되새길 수 있겠다. 아마 의도의 측면에선 참이나 결과적으론 거짓일 듯하다. 영화적 논리에 기댄 칸의 크기는 결국 이미지와 시간의 공백으로서 독자(관객)의 능동성에 복무할 수밖에 없으며, 현대의 만화는 결국 태초의 영화적 속성과 떼놓을 수 없이 다수의 실사 영화적 기법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애니메이션만의 ‘의도적 세계’는 만화-영화의 유착관계에서 벗어나 ‘순수한 마음’이란 추상을 자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 그리하여 <BECK: Mongolian Chop Squad> 유키오의 목소리를 능동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었고, 이 속의 유키오는 <Moon on the water>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만화, 애니메이션, 실사 <BECK> (사진: “ BECK 22 ”, 교보문고 / “ Beck: Mongolian Chop Squad ”, IMDb) *** [1] “ [기획] 안녕? 에반게리온, 21세기 오타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시대를 탐하다 ”, 《씨네21》 1440호, 2024. 1. 18. 이우빈(영화기자) l 《 씨네21 》 기자. 친구가 없어 영화나 보러 다니고 집에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본 1997년생.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1. 초등학생 때 면접을 보고 들어간 방송반에서 나는 영상 송출 담당이었다. 아나운서 선발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당시 여자애들은 전부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방송반에 들어갔다). 영상 송출 담당이란 조회 시간에 타이밍에 맞춰 애국가 제창 화면을 틀고, 교가 비디오를 틀고, 다시 화면을 전환해 강단을 비추는 일이었다. 특별활동 시간에는 방송실 안에서 함께 영화를 보거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보냈던 기억. 고등학생 때는 영상제작 동아리 활동을 했다. 집에서 안 쓰는 카메라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영상을 찍었고 이런저런 공모전에서 나름 성과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대학교에 가서도 영상제작 동아리에 들어갔다. 학내방송국도 아니고 영화동아리도 아닌 영상제작이라는 모호한 분과만을 노렸던 행보에 대해서는 늘 약간의 해명이 필요했다. 영화는 멀고 어렴풋하게 느껴졌던 반면, 영상은 지금 당장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대상처럼 친밀하고 가까웠다. 영화를 의식적으로 챙겨보거나 영화 비평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그러니까 영상제작 활동을 했던 시기와 영화를 좋아하게 된 시기가 다르다는 점은 내내 의문이었다. 그 두 가지는 다른 걸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일단 찍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나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까? 2. 글 쓰는 사람의 손 위에서 시간은, 마감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하는 카운트다운으로 대체된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밀려나는 리듬이 있을 뿐. 이건 마감의 불안으로 또 다른 층위의 불안을 지우는 일. 불안으로 불안을 다시 쓰는 일. ‘다시 시작해보자’라는 주춤거림 없이 글쓰기가 어렵다. 그건 글쓰기에 가로막힌 사람이 쓰던 원고를 거칠게 구긴 뒤 새 종이를 꺼내면서 뭔가를 새로 시작하고 있다는 착각을 통해서만 글을 시작할 수 있다고 느끼는 아주 상투적인 장면인 동시에, 대부분의 내 글쓰기가 출발하는 장소다. 눈치 챘겠지만, 글을 시작하기 위해 쓰나 마나한 말을 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다.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느낀 점’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일단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자꾸만 미루게 된다. 곤란한 일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만큼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나’여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이 든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단 지금까지 내가 썼던 모든 글은 불순하다고 말해야 한다. 종종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나의 경우, 특히 영화에 대한 글쓰기는 책상 위가 아니라 책상 아래에서(Under The Table-‘불법적인 일’을 뜻하는 관용 표현) 이루어지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종종 영화 전문 매체에 글을 쓰고, 힘을 북돋아주고 싶은 어떤 영화에 관해서는 목소리를 높여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말의 효력을 따질 새도 없이 글이 공적인 경로로 유통된다는 사실은 특권적인 동시에 두려운 일이다. 줄곧 이런 불안이 따라붙었다. 왜 정녕 영화여야만 할까?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을 읽으며 이보라 평론가가 쓴 구절에서 멈칫했던 기억도 난다. “글을 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만 할 수 있나?” *주1 비평은 단순히 작품에 대한 해석이 아니다. 『비평철학』에서 저자는 기술과 해석이 서로 다른 작업이며 기술은 명백한 요소들에 대한 증언인 반면, 해석은 명백한 요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해석은 결코 최종 진술이 될 수 없는 미완의 작업이다. *주2 어떤 것이 명백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지 선택하기 위해서는 관습적인 것이라 여겨지는 공통의 합의들에 대한 감각을 키워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 대한 가장 새로운 이야기조차 사실은 통속적인 것의 배후에 있다는 깨달음이 글쓰기의 날카로운 기쁨이라면, 나는 그 순간을 연장하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다. 결코 최종 진술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매혹적인 동시에 끝나지 않는 악몽 같다. 불만족스러운 마감을 했다는 불안이 들 때면 어디에도 없던 평론가 데이비드 매닝 *주3 (일명 ‘데이비드 매닝 사건’)의 유령이 나타난다. 이 자리는 언제 백지화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허구가 아닐까. 그 누구로도 대체 가능한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닌가. 어느 날 꿈에서는 내가 데이비드 매닝으로 판명 난다. 그리고 깨어나면, …이 세계는 꿈이라고 해서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간단한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4 '데이비드 매닝'의 평을 실은 영화 광고 (사진: " Dave Manning ", The Museum of Hoaxes) 3. 영화를 둘러싼 불안과 수치심, 글쓰기의 곤란함이 맞닿는 장소가 영화 비평이라는 밀실이다.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묘연하다. 미치더라도 이들과 함께 써나가야 하는데,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영화 비평을 수행적인 활동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때 수행성이란 현실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방식의 개입이 아니라 ‘일단 가까운 곳으로 돌입하는 것’에 가깝다. 영화는 멀지만 영상은 찍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처럼, 지금 당장 무언가를 바꿀 수는 없더라도 최대한 현실이라고 감지되는 최전선을 향해 두드려보는 무모함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일단 돌입하고 나면 문제는 다음으로 미루면 된다. 문제는 다음이 항상 너무 빨리, 그리고 시시각각 찾아온다는 것뿐이다. 비평은 무언가를 걸치고 말하는 작업이기에 제로에서 시작할 필요가 없다. 비평은 이미 나와 있는 것들의 재활용에 그치지 않으며 여전히 창조적인 활동에 가깝다. 두 진술은 양립 가능하다. 나는 비평과 픽션의 일치를 소망하고, 그런 소망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어렴풋한 예감 속에서 쓴다. 오히려 나를 쓰게끔 만드는 것은 그런 오래된 불가능성이다. 2년 전 언파운디드랩의 초대를 받아 비평과 픽션의 상호 침투에 대한 글을 쓴 적 있다. 비평과 픽션을 이어주는 가능한 다리들을 다소 산만하게나마 떠올려보고자 했는데, 당시에는 비평의 픽션을 비평의 형식(적 다양성)으로 구현하려고 시도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나는 비평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무용한 일을 벌이고 매번 실패하지만 형식적인 새로움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은 많이 내려놓게 되었다. 비평의 새로움이란(물론 매우 드문 확률로 형식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작품과 그것이 놓이거나 영향을 미치는 현실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는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비평가의 수행성은 ‘담론 만들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제2회 전주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래밍 어드바이저 서동진은 한국단편영화 섹션의 특정 경향을 분류하며 영화들이 특정한 문화적 부족을 형성하고 있음을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쓴다. 작품의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나 이미지로 환원할 수 없는 영화 찍기가 갖는 수행적 측면에 주목하여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이미 만들어진 ‘작품’으로 간주하고 그 속에 재현된 이야기와 이미지의 언어적 측면이나 미학적 측면을 헤아리려는 것과, 영화를 하나의 수행적 언어, 즉 일종의 ‘하기(doing)’로 간주하고 영화를 사유하는 것은 다른 접근이다. *주5 서동진은 이 글에서 영화를 특정한 주제나 담론으로 분류하기보다는 단편영화 찍기라는 문화적 수행성과 그 활동의 가치를 중심에 둘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를 사유하는 것은 “제작된 작품에 연연하지 않고, 감독이라는 텍스트와의 관계를 특권화하는 용어에 불신을 보내는 것”이기도 하다. *주6 감독이 자신이 만든 영화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고 창조한다는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보았을 때 작품에 대한 논의는 그것의 주제나 의미, 의도 같은 것들에 의해 휩쓸려가기 쉽다. 반면 영화를 활동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영화를 이미 제작된 것이라는 한정된 텍스트가 아닌, 감독과 작품 사이에 놓인 관계의 완고함을 슬며시 흔들며 제작자의 목소리가 어떻게 반영되고 구성되는지를 조망하게 하는 다층적인 텍스트로 바라볼 수 있게끔 한다. 단편영화,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의 수행성이 공동체의 발견과 자기 구성의 쾌락에 있다면 이것은 비평의 수행성에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말이다. 특히나 영화 비평은 하나의 작품에 대해 논할 수도 있지만 그 작품을 둘러싼 믿음이나 애정을 그러모으면서 특정 집단을 호명하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 물론 영화의 수행성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성립하는 것과 달리 비평은 단순히 ‘나’를 등장시키거나 일상을 전시하는 것만으로 비평적 효용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비평은 영화를 완결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작품과 나’를 연루시킬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 영화를 현실을 향해 연장시킬 수 있다. 비평은 담론의 부피를 가지지 않은 것, 지나치게 사소하거나 주변부적인 것, 일상과 비슷한 층위에서 간과되는 것들을 재발견하거나 다시 응시하자고 청할 수 있다. 비평의 수행성은 자신의 일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일상성의 속성을 재규정하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비평적 차원에서 작품을 현실과 매개하는 일은 분명 픽션의 기능을 지닌다. 이는 ‘나’라는 주어를 등장시킬 때만 어떤 활동이 수행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과 비일상적인 것,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선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운용하는 것이 비평의 수행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에 비평가의 일상이 식별 불가능한 상태로 용해되어 있다. 영화의 수행성을 중점에 둔다는 것은 감독의 지위를 특권화하는 관점으로부터 떨어져나왔을 때 더욱 잘 보이게 되는 작품들의 층위가 있다는 말이다. 덜 만들어진 것 같은 영화, 조악한 영화, 그럼에도 사로잡는 영화. 카메라를 다루는 치기 어린 몸짓에서 순간적으로 묻어나는 광채가 있다면 그를 이야기해 봄 직한 것으로 부풀리고, 영화의 담론적 영토를 재구성하는 것은 비평가의 수행이 아닐까? 비슷한 관점에서 다시 보기를 청하고 싶은 것은 청소년 제작 영화 들이다. 청소년들이 주체가 되어 만든 영화들과 영상 제작 문화를 단지 아마추어적인 것이나 미성숙한 단계로 한정시키는 것에 대한 묘한 반감이 있다. 그 시기의 기억이 수치스럽다면, 수치심이라는 바로 앞에 놓인 경험으로부터 출발해 청소년 영화의 한때라는 비가시적인 기억을 담론이라는 공통의 영토로 구제할 수 있을까? 어쩌면 청소년 영화의 스타일을 논해 볼 수도 있을까? <D-?> 중 유소라 의 < D-? >(2003)은 수험생이었던 유소라 감독이 직접 자신과 주변을 기록한 사적 다큐멘터리다. 수능을 앞둔 수험생인 유소라 감독은 카메라를 지니고 다니며 본인의 일상을 기록한다. 주변 친구들을 인터뷰하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화면 안에 등장해 가상의 청중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학교생활과 가정에서의 일상, 충분히 사사롭지만 문제적일 정도로 내밀하지는 않은, 개인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고3 수험생의 나날들. 입시제도에 대한 심정이나 수험생활의 고충, 장래에 대한 고민을 친구들에게 묻고 답하는 인터뷰는 짧은 호흡으로 리드미컬하게 쪼개어지고 재조합되면서 특정 무리의 집단적 고백으로 조성된다. 이때 아이들은 카메라를 의식하는 동시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신의 동급생을 바라보고 있다. 유소라는 철저하게 카메라에 매개된 존재로 등장한다. ‘셀프 카메라’라는 형식이 충분히 어떤 문법으로 자리잡지 않았던 때에 스스로와 스스로의 일상을 향해 카메라를 드는 것은 분명 어색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어떤 형식이 이미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사후적인 자리에서 그것이 최초로서 유효했을 풍경을 생생하게 가늠해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동시에 많은 것이 당연해지거나 진부해졌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스타일화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일상의 기록이 자연스러워졌지만 2002년에 카메라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동급생들의 반응에는 부자연스러운 측면이 있다. 아마도 유소라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어서 누구도 특별히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2014년 독립영화 기획전의 GV에서 유소라 감독은 학생이었던 당시 이미 영상 제작에 관해 여러 성과가 있었기에 제지를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학교의 지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실 유소라 감독은 청소년 영화 제작 문화의 붐을 이끌었던 <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 >(이선희 외 9인, 1998)를 제작한 영파여중 방송반의 일원이었다. 제1회 서울 YMCA 청소년영상페스티발(주제: ‘오늘, 우리의 모습: 우리의 자화상’)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던 이 영화는 실제 일진회 무리였던 학생들을 연기자로 섭외하고 그들이 직접 시나리오를 수정하기도 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당사자가 직접 폭력을 재연한다는 측면에서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그러한 작품의 분류와 계보를 의식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실제 비행 청소년들이 등장인물로 분한 장선우 감독의 < 나쁜 영화 >(1997)에 대한 청소년들의 응답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의 설립자이기도 했던 김종현 선생이 영파여중 방송반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지도하에 함께 제작된 것이기에 어른들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의 형식은 어떤 미학적인 방법론이라기보다 학교라는 제도 안에서 제도가 문제적인 것으로 낙인찍거나 방출시키려 하는 대상의 이야기를 주체화함으로써 제도와의 마찰을 일으키기 위한 사건에 가깝다. 실제로 이 영화가 발표된 뒤 방송반 담당이었던 김종현 선생이 학교에서 퇴출당했다는 일화가 설명해 주듯. 그리고 몇 년 뒤 선생은 다시 영파여고로 복직하게 된다. 이는 청소년의 영상 제작이라는 문화가 하나의 흐름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며, 동시에 이는 더 이상 ‘포스트 서태지 세대’가 가진 문화적인 정체성의 공유지대를 내보이는 수행성이 갖는 반격이 이전만큼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D-?>는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처럼 문제적인 아이들을 다루지 않는다. 다만 수험생이 학교에 캠코더를 들고 다니면서 다소 위험한 장면(수업하는 장면이나 체벌하는 영상 등)을 촬영하는 데도(비록 이것이 녹화 중이라는 카메라 신호를 가리고 몰래 찍은 것이라 하더라도)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영화는 같은 학급 친구들이 교실 컴퓨터에서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한 기록을 발견하는 장면을 보여주거나 계속 비슷한 설명을 동어 반복하는 선생님의 수업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기도 한다. 남자가 너무 궁한 나머지 담임 선생님을 보며 윤계상을 떠올린다는 지극히 소녀적인 차원에서 도발적인 고민들도 담겨있다. 영화는 수능을 두 달 넘게 앞둔 D-70부터 수능 당일을 거쳐 졸업식, 그리고 졸업 이후 대학에 입학한 정황까지 시간을 내림차순으로 충실하게 따라간다. 하지만 유소라 감독이 수험생활 당시 촬영한 푸티지를 편집한 것은 성인이 되고 난 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실제로 이 영화는 공개 당시 이토록 사소한 내용이 정녕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의아함과 더불어 영화가 청소년 섹션인지, 성인 섹션인지 판단하기 모호하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이 영화가 졸업 이후의 시점에서 회고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기록을 촬영한 자가 수험생 당사자이며, 자신을 둘러싼 현장을 증언하고 있고, 카메라가 학교라는 제도의 규칙과 규율을 얼마나 침범할 수 있는지 의문에 부치는 식으로 제도의 윤곽을 드러내는 실험을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려 이 영화는 성인이 된 시점에서 청소년기의 기억을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과 청소년기를 단순히 입시라는 제도의 전환점으로 구분할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소년기는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수능이 끝나고 처음 합법적으로 술을 마시는 날? 대학 입시 결과 발표를 듣거나 재수를 결정하는 순간에? 졸업식 날 어설프게 화장한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릴 때? 어쩌면 청소년기는 한번도 끝난 적이 없는 게 아닐까? 시스템 내부에서 그것과의 마찰을 통해 자기 자신과 공동체를 표현하는 <D-?>는 영화의 수행성이 청소년이라는 지위와 범주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청소년 영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제작 주체의 나이가 청소년에 해당한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그 영화가 바탕으로 하는 수행성의 범주에 따라 청소년 영화라는 스타일을 정의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나치게 조악하거나 서툰 화면이 일정 부분 청소년기 특유의 풋풋함과 열기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굳어진 것은 사실상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흥했던 청소년 영화 제작 문화가 끼친 영향이 아니었을까? 디지털이 보편화된 전환기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세대의 갈급함이 맞닿는 지대에서 탄생한 스타일. 특정한 영화적 실천의 계보나 아카데믹한 것을 의식하지 않(못하)고 그저 찍겠다는 충동이 자제할 길도 없이 먼저 앞서나가서 이상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영화들을 어떻게 옹호할 수 있을까? 교육과 창작, 반발심과 순응 사이에서 지글거리는. <D-?> 중 이우정 감독의 < 애드벌룬 >(2011)을 다시 살펴보는 게 하나의 답이 될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단출하다. 평범한 아파트에서 정신없이 등교 준비를 하는 여고생의 아침으로부터 출발하는 영화는 두 여자애의 혼란스러운 친밀함과 한밤의 일탈이라는 비일상적인 소동극으로 향한다. 아파트 옥상의 애드벌룬 안에서 술을 마시던 아이들이 질식사했고, 주인공은 운 좋게 사고를 면한다. 그러나 거기 휘말린 지봉이라 불리는 여자아이의 죽음은 누군가의 청소년기에서 영영 불가해한 추문으로 떠돌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야기보다도 이야기가 이미지화되는 방식이다. 2011년에 제작된 <애드벌룬>은 의도적으로 열화된 화질로 촬영되었다. 윤성호 감독은 <애드벌룬>이 ”요새 안 쓰는 베타캠(정식 명칭은 베타캠betacam 비디오 캠코더. sony에서 개발한 방송용 ENG 카메라, 설명은 필자)을 굳이 대여해 특정 시기의 스탠다드(1990년대 교육방송 청소년 드라마와 중고등학교 영상제작반의 의욕적인 과업 사이 어딘가)를 일부러 서툴게 재현한다” *주7 라고 말한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장면 또한 캠코더로 촬영된 푸티지를 활용한다. 몰래 교실을 촬영한 듯한 영상과 함께 또래 여학생들을 둘러싼 소문을 무심하게 읊조리는 나레이션이 들린다. 이 푸티지는 사실상 영화 전체의 이야기와는 무관하다. 언제 어디서 누가 촬영했는지도 알 수 없으며, 그 사실이 중요하지도 않다. 이유리와 김애숙, 한혜정이 누구인지도. 오히려 영화와 상관 없어 보이는 오프닝을 영화와 접속시키는 것은 출처 미상이라는 이미지의 익명성과 화면의 질감이다. 정제되지 않은 캠코더 화면과 서사를 위해 봉사하지 않는 이미지 자체의 활력, 저화질의 푸티지는 베타캠으로 촬영된 장면과 큰 낙차 없이 어우러진다. <애드벌룬>의 오프닝씬이 채택하고 있는 것은 여자 청소년기라는 특정한 시기의 혼란스러움, 잔인함, 기억과 감각에 대한 인용이다. 영화는 효정이라는 인물과 친구 지봉(지연)을 중심으로 벌어진 하루의 해프닝이라는 특정한 이야기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굳이 영화의 앞과 뒤에 기록 푸티지를 삽입해 드라마를 공적인 기억으로 확장시키려 한다. <애드벌룬> 중 화면과 편집, 대화를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 이 영화의 의도적인 서투름은, 윤성호의 말대로 청소년 드라마의 외피를 차용해 그것을 비트는 방식으로 ‘고유한 것’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전략일 수도 있다. 허나 이러한 고유함은 청소년 드라마의 스타일과 영상제작반 과업의 활기를 연상시킨다는 공통의 기억지대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영상제작반의 활동은 묘사되지 않으며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다만 어딘가 미숙한 듯한 연출과 편집, 방송 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질감은 분명 아마추어적인 활동을 상기시키고 있다. 어쩌면 뉴진스의 디토(ditto)식으로, 이 영화의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캠코더를 든 여자 청소년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고 상상해볼 수도 있겠다. 영화의 앞뒤로 삽입된 익명의 푸티지를 다시 떠올려보자. 지나치게 밀접하고 실시간적인 이미지는 이것이 촬영되었을 방식의 내밀함을 은연중에 연루시킨다. 영상이 암시하는 것은 손에 카메라를 들고 학교를 관음하는 내부자적 시선의 은밀함이며, 이는 <애드벌룬>을 보는 내내 이상한 불길함으로 달라붙어 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 영화의 서브 장르는 공포다. 나레이션이 덤덤하게 들려주는 괴담 같은 소문, 과고에 진학했던 한 여학생이 아버지의 압박에 못 이겨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는 청소년기 특유의 잔인함과 서늘함을 증폭한다. 학원물에 등장하는 캠코더 영상이 노스텔지어뿐 아니라 공포를 자아내기도 한다는 사실은 이미 <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김태용, 민규동, 1999)가 보여준 적 있다. 무분별한 일상의 순간을 충동적으로 기록하는 캠코더의 조작 방식과 그렇기 때문에 거기 무엇이 찍혀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유령을 불러들이기에 좋은 환경이다. 아는 만큼 알고 모르는 만큼 모르는 청소년들의 직설은 충분히 잔인하다. 정제되지 않음은 실은 매우 사실적인 동시에 장르적인 감각이다. <애드벌룬>은 성인 연출자(청소년들이 제작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가 만든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기의 학교라는 시스템 내부의 생태계와 그 혼란을 거의 피부로 맞닿아 있는 듯한 감각을 준다. 이 영화가 진짜에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리얼리즘 영화의 수사를 애써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영화라는 수행의 아마추어적인 특징을 전유해 서사로 편입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서사와 무관하지 않은 어떤 불안의 정체를 성공적으로 표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툴고 미숙한 것을 부족함에 그치지 않고, 담론적 부피로 만드는 것. 4. 청소년이 제작 주체가 된 영화들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오세섭 은 청소년들이 주로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가 반영된 논픽션을 제작하면서 자기 재현의 효과를 얻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청소년 제작 영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주8 이들이 묘사하는 내용은 학교폭력과 성적, 진로문제, 가족 관계와 사회에 대한 관심 등이라는 주제의 큰 경향 안에서 반복된다. 1998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청소년 제작 영화에서는 초창기의 관행이 반복되고 있으며 입시 위주의 교육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이러한 경향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주9 확실히 청소년들의 가장 내밀한 목소리는 입시 제도에 대한 경험과 문제의식을 자주 경유할 수밖에 없다. <D-?>과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입시 생활의 부조리함으로부터 출발하는 홍다예 의 < 잠자리 구하기 >(2024) 또한 수능을 얼마 앞두지 않은 수험생인 감독 자신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추후에 무엇이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 그 시절을 기록해 두어야 한다는 본능적인 예감, 그리고 반쯤은 입시 제도에 대한 반발심으로 촬영된 것들이다. 유소라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홍다예 감독도 대학생이 되고 나서 그 기록을 다시 들여다본다. <잠자리 구하기>가 보여주는 현실이 지나치게 가깝다는 감각은 대상과의 영점조절을 의도적으로 실패함으로써 내가 너를, 우리가 우리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한다. 주제와 내용을 중심으로 영화의 경향을 범주화하는 관점의 부작용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충돌이 그 안에서 어떻게 분화하는지,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기입하는지 추상화한 채 단순한 치기 어림으로 노이즈와 아우성을 뭉뚱그려서는 안 될 것이다. 비평이 언제나 상대보다 많이 안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일이라는 세간의 오해에 따르면 비평은 항상 성인의 시점을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비평의 청소년성이 가능한지 묻고 그 치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잠자리 구하기>에서 입시에 실패한 감독은 재수를 택한다. 사람들은 이 기간이 유예기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학에 가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답답함과 분노, 우울감은 입시라는 사건으로부터 멀어진 뒤에도 여전히 그 사건의 후유증과 싸워야 하는 과업으로 남는다. 감독의 나레이션처럼 우리는 “아직 유예기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도 바깥에 놓인 시간이 있을지언정 삶 바깥으로 잠시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삶의 일부란 없다. 청소년기와 아직 끝장을 보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기분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 잘못된” 사람이 가진 우울의 궤적을 표면화하는 기록들, 그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고 편집해야겠다는 충동으로 남아서 영화의 수행성과 접속한다. 그러니까 청소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건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다는 식의 낙관이 아니다. 청소년기를 제도적 나이가 아니라 스타일로 확장될 수 있는 특정한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정의할 때 종종 불가해한 활력을 띤 영화들을 수용할 수 있는 지반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이야기로 환원되지 않는 소음과 신음, 반발심, 특정 시기가 지나면 부끄러운 것으로 판명 날 어떤 충동들, 미래에 무감한 투신을 마주하는 기쁨이 있고 그 충격이 글을 쓰게 한다면 기어이 그렇게 할 것이다. 왜 이 순간에도 여전히 나는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앞으로도 나는 너무 모르고, 모를 거라는 예감 속에서 쓰겠지만, 모르면서 일단 앞서나가는 마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음을 부정하거나 배신하고 싶지 않다.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이 아는 것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발각될 미래의 수치심을 감수하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수치심을 기다리는 일. 부정확함을 견디는 것. 글쓰기는 언제나 불안이라는 뒤축을 밟고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일이니까. 거의 넘어지듯이. <잠자리 구하기> 중 *** 주1. 이보라, 「쓰러진 활자들을 일으키기. “그래도 우리는 말해야 하지 않는가.”」,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 2023, 106쪽. 주2. 노엘 캐럴, 이해완 옮김, 『비평철학-On Criticism』, 북코리아, 2015, 159~164쪽. 주3. 2001년, 소니 픽쳐스 엔터테인먼트는 데이비드 매닝이라는 평론가가 작성한 < 기사 윌리엄 >(브라이언 헬거랜드, 2001), < 애니멀 >(루크 그린필드, 2001) 등의 영화에 대한 호평을 인용한다. 코네티컷주의 소규모 신문 릿지필드프레스의 필자라고 알려진 이 데이비드 매닝이라는 평론가는 그러나 가상의 인물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평론가의 이름으로 영화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게재하고 이를 광고에 활용한 것이다. 어디에도 없던 평론가 데이비드 매닝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이미 유령적일뿐 아니라 영화 비평이 산업의 가장자리에서 니콜 브레네즈의 표현대로 ‘부역자들’로 과대 대표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온전한 의미의 비평 활동이 수용될 장소가 희박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주4. 스즈키 이즈미, 최혜수 옮김, 『여자와 여자의 세상』, 문학과 지성사, 2024, 407쪽. 주5. 서동진, 「전주국제영화제가 소집한 19편의 한국 단편 영화」, 《독립영화》 통권9호, 2001, 10쪽. 주6. 같은 책, 7쪽. 주7. 윤성호, “ [초이스]애드벌룬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2012. 3. 6. 주8. 오세섭, 「청소년 제작 영화에 나타난 자기표현으로서의 재현의 의미」, 《씨네포럼》 제35호, 2020, 89쪽. 주9. 같은 책, 94쪽. 김예솔비(영화평론가) l 영화를 중심으로 시각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이따금 영화 비슷한 것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