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장수
- 감독
- 이상언
- 제작년도
- 1966
- 출연
- 허장강, 김지미, 한은진, 김순철, 도금봉, 양훈, 최남현, 윤인자, 정애란, 전계현, 김칠성, 복혜숙, 김금지, 박승문, 최문웅, 박순봉, 석귀녀, 김세라, 김용학, 지계순, 송돈상, 박예숙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뻥튀기 제조기가 돌아가는 방에서 한 쌍의 남녀가 섹스한다. “과자 만드는” 자동기계는 계속해서 뻥튀기를 내뿜고, 인물들은 날아오는 뻥튀기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심지어 수북이 쌓인 뻥튀기 위에 누워 관계에 몰두한다.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울 이 기괴한 장면은 김기영 감독의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1978) 전반부에 나온다. ‘죽음에 관한 몇 가지 에피소드’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일명 ‘뻥튀기 섹스신’은 작품 내적으로 그리 중요한 장면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중요했다. 영화를 열심히 보러 다니며 영화사의 이런저런 사소한 에피소드들(이를테면 훗날 누벨바그로 통칭된 무리 중에서도 자크 리베트의 비평적 안목이 특히 탁월해서 다 함께 신작을 보고 나면 다들 리베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든가 하는 별거 아닌 일화들. 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아니면 클로드 샤브롤이었던가?)을 줍기 좋아했던 시절에, 어디선가 ‘뻥튀기 섹스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미친 영화는 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를 처음 본 건 KMDb VOD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래 이 작품은 4K로 복원되어 블루레이가 출시되었고, 지금은 국내 OTT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 글을 시작한 건, 이 지면의 제목인 ‘비평, 안녕하십니까’의 기획이 내 오랜 고민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미친 영화를 찾고 싶다는 게 그것이다. 영화글을 쓰다 보니 원고 작성, 관객과의 대화 진행, 심사 참여, 영화제 프로그래머 재직 등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필요에 따라 예전 영화도 종종 찾아보지만, 일의 특성상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수많은 장, 단편영화를 보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다. 출품 공모를 열고 예심을 진행하는 영화제나 기획 프로그램 등의 선정의 변을 살펴보면 출품작이 매년 최다를 갱신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심사를 진행하는데도 다양한 선정의 변에서 비슷한 뉘앙스가 읽힐 때가 있다. 영화가 점점 더 잘 만들어지고 있다는 거다. 이야기는 모난 구석이 없고 만듦새도 안정적이다. 혹은 적어도 그런 결과물을 지향한다. 비단 심사 과정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여러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거나 지난한 과정을 통과해 극장 개봉의 문턱을 넘은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균형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 돈과 시간을 투자해 극장에 가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해야 한다는 압력이 내외부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는 물론 쉽게 간과해도 좋을 영역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재능을 발굴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 틈에서 때로는 작게 읊조리게 된다. “미친 영화가 보고 싶다….” 근래 제작되는 영화들의 경향을 짚으며 비판하는 건 어쩌면 쉬운 일이다. 단편영화를 장편영화의 축소판처럼 생각한다든지, 개인의 내면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보편적인 서사에 안전하게 겹쳐두며 미궁에 빠지는 것을 회피한다든지, 상상된 소시민적 이미지에 기대며 다양한 갈등과 여러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린다든지. 단편영화에서 거대 자본이 들어간 상업영화에 이르기까지, 실망과 안타까움은 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굳이 길게 늘어놓지는 않으려고 한다. “너는 왜 미치지 않았니?”라고 묻는 대신, 미친 영화가 보고 싶다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음에 대해 좀 더 말하면 좋을 것 같다.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사실 미친 영화가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미쳤다!”라는 감탄사는 소위 웰메이드 영화를 보고서도 쓸 수 있다. 변태적일 정도로 탐미적이거나 철학적 질문을 깊이 탐구했거나 대사를 잘 썼을 때도 이 감탄사를 마구 남발할 수 있다. 어쩌면 본인의 취향을 건드리는 모든 요소에 우리는 미쳤다며 나름의 찬사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미치다”라는 말은 보통의 것과 다른, 상식에서 벗어난, 일상을 뒤집는 무언가를 묘사하는 단어로, 동사이면서 상태를 설명하는데 주로 쓰인다. 그렇다면 아주 넓은 의미에서, 이미 일반적인 수준에서 굳어진 영화의 관습을 탈피하는 (비)자발적인 선택에 ‘미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될까? 글쎄, 아직 충분하지도, 재밌지도 않다. ‘미친 영화’를 생각하는 마음은 꽤 모순적이다. 구체적인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이 개인적인 욕망은 나름대로 그 용례를 정교화하고 싶은 충동과 닿아있다. 페미니즘 문학 비평의 주요한 길을 제시한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저작 『다락방의 미친 여자』(2022)나, 최근 타계한 국내 1세대 여성 사진작가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처럼 사회, 문화적 함의 속에서 ‘광기’를 재정의하고자 하는 작업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동시에 광기 역시 우리 시대의 굳어진 수식어나 레토릭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다 세밀한 탐색 없이 광기라는 단어만 쥐고 모험하는 건 이제 무척이나 (안전하기 때문에 더) 위험한 일로 느껴진다. 다른 한편, ‘미친 영화’를 찾고 싶은 마음은 내게 지극히 개인사적인 맥락에서 작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장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에 대한 감상보다 훨씬 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름의 해답은 미친 영화를 찾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다시 찾는 데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너무 감상적이기 때문에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한때 내게 중요하게 와닿았던 비평적 시선 중 하나는 ‘정치적인 영화’를 정치영화가 아니라 영화 속의 정치적인 것과 함께 생각하자는 거였다. 나는 이 말을 정치라는 것을 (정치인, 정당, 선거 등으로 대표되는) 현실 정치에 가두지 않고 끊임없이 작동하는 역학이자 태도로 사고하면서, ‘영화’를 전방위적으로 둘러싼 각종 갈등과 조건을 응시하는, 작품의 선택을 봐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했다. “존 포드야말로 가장 브레히트적인 감독”이라고 말했다던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일화와 더불어, 내게 이러한 말과 시선들은 ‘분명히 있지만 딱딱한 것은 아닌’ 어떤 기준, 항상 개별 작품들과의 밀접한 교통을 통해서만 감지되는 그 무언가를 찾아내는 작업 방식을 제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중요했다. 정치적인 것이나 브레히트적인 것, 그리고 ‘미친 것’과 그 효과는 언제나 같은 형식을 통해 성취되지 않는다. 광인의 출현이나 해괴한 장면의 등장만으로 그것이 (내가 찾는) 미친 영화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일단은 이 질문을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던 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의 괴인처럼 불리는 김기영의 작품 중에서도 파격적인 편에 속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주인공 영걸( 김정철 )은 웬 여자가 건네는 오렌지 주스를 먹고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지만 목숨을 부지한다. 이후 계속해서 죽음과 삶의 충동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 그의 앞에, 의지만 있으면 죽지 않을 수 있다고 외치는 책장수가 나타나 해골이 되어서까지 입을 나불거리는 한편, 2000년 전 신라 공명왕 시대에 동굴에 들어가 백골이 된 여성이 환생해 간을 먹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이 여성이 ‘뻥튀기 섹스신’의 주인공이다.) 뼈를 통해 인류학을 연구하는 이 박사( 남궁원 )의 조수가 된 영걸은 이 박사의 딸 경미( 김자옥 )와 기묘한 관계를 맺는 동시에 이 박사에게 배달되는 의문의 해골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에도 연루된다. 사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은 이상하다기보다는 황당한 쪽이다. 신라 시대에 잠들었다가 깨어난 여성은 갑자기 동성동본 사이의 결혼에 대해 걱정하고, 목이 잘린 영걸이 책장수의 전언처럼 눈을 떠 “의지!”를 외치며, 사람은 복면을 뒤집어쓰고는 나비가 된다. 황당무계한 장면들이 계속되는 와중에 그 중심에 죽음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원고를 쓰기 위해 다시 본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분명 독특했지만 동시에 처연한 영화이기도 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남자가 현실인지 꿈인지 모르는 일련의 일들을 겪다가 결국에는 죽지 않았으니 “귀찮지만 더 살아줘야겠다”라고 읊조리는 영화라니. 사실 주인공의 죽음이란 한 편의 영화에 드리운 종결의 감각을 형상화하는 가장 직설적인 사건일 것이다. 주인공이 죽으면 대개 영화 역시 끝나야 한다. 혹은 한 편의 영화는 언젠가는 끝나야 한다. 어쩌면 영화란 시작과 동시에 종결을 미루고 지연하다가 결국 끝을 마주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음악이나 연극처럼 시간을 조건으로 삼는 예술이 대개 그러하겠지만.) 그 지연의 방식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꽉 짜인 서사를 통해서, 인물의 사소한 행동을 통해서, 끊임없는 사건들의 도입을 통해서 영화가 끝나는 시간은 저 뒤로 밀려난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내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별안간 그 모든 것이 영걸의 망상이었던 것처럼 묘사하며 영화를 닫는다. 이 석연치 않은 순환 구조야말로 내게는 모종의 ‘미친 것’이 작동하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미치고 싶지만 미칠 수 없고, 미치지 못해서 미쳐버리는 어떤 무기력의 영화 만들기. 혹시 영화의 ‘미친 것’을 찾는다는 건 일종의 상처를 찾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미친 영화’의 특정한 외양이나 형식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앓고 있습니까? 아마도 비평이란 그러한 질문과 함께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평, 안녕하십니까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손시내(영화평론가) l 영화웹진 《 REVERSE 》에 글을 쓰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한다. 팟캐스트 ‘영화카페, 카페 크리틱’에서 영화 이야기를 나눈다.
60년대의 기운 시대적인 ‘기운’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가령 1960년대가 그런 시대였다. 유럽은 프랑스의 68혁명으로 대표되는 반자본주의 혁명에 돌입했고, 미국은 반문화 정서에 몰두했다. 현대영화의 형식과 내용의 급진성이 과감하게 실험됐고, 미국 영화조차도 상상력의 자유가 허용됐다. 카메라 움직임과 앵글, 편집에는 금기가 없는 것 같았다. 소위 말해 “뭘 해도 의미는 만들어졌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60년대의 일본 영화계는 대형 스튜디오들에겐 위기였으나 새로 등장한 신진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계기였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정치학이 새로운 세대를 사로잡았다. 이마무라 쇼헤이도 이러한 시대에 동참했다.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지만 그는 오즈의 엄격한 조형미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왜 아니었겠는가? 그는 거의 인류학자의 태도로서 일본의 인간 군상들을 관찰했고, 원시주의적 열정으로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차마 발언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인간의 동물적 본성과 에너지, 혹은 폭력과 무지가 그의 영화들에서 가감 없이 펼쳐졌다. 6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실린 그의 발언은 그 자신을 가장 잘 대변한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두 가지 문제, 즉 인간 육체의 열등함과 일본의 일상적 현실의 끊임없는 바탕이 되고 있는 사회 구조의 열등함을 결합시키고 싶었다.” 정말로 그는 그렇게 했다. 시대적 기운도 그를 상승시켰다.(당대의 제도나 사회구조와는 다른 의미로서의 시대의식, 세대성) 쇼헤이의 60년대에서 70년대로 이어지는 걸작들은 금기가 없다. 검열도 없다. 카메라 움직임과 캐릭터, 주제와 소재, 영화적 형식과 스토리도 파격적이다. 그의 모든 영화들에는 스크린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괴이한 기운도 감돈다. 괴력의 감독이다. 다큐멘터리의 진실 혹은 허구 60년대 쇼헤이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채로운 작품은 1967년에 만들어진 < 인간 증발 >이다. 젊은 날의 쇼헤이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현장을 지배하는 그의 강단과 천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본 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쏟은 영화평론가 도널드 리치는 이 영화를 이마무라 쇼헤이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하였을 정도였다. 이 영화는 원래 TV 시리즈 물로 기획되었으나 영화로 전환됐다. 당시 일본에선 한해 십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실종되었고, 이마무라는 도대체 이 조그만 나라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경찰청 실종 파일들을 뒤지기 시작했고 그중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32세의 남자, 타다시 오시마를 추적하기로 결심한다. 여기에 그의 약혼녀 요시에를 동참시켜, 그녀가 오시마의 가족과 동료, 실종 당시의 정황 등을 파헤치고 다니는 모습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전문 인터뷰어로는 < 붉은 살의 >(1964) 등에 출연한 바 있는 남자배우 츠유구치 시게루를 캐스팅하여 요시에와 함께 움직이도록 하였다. 영화는 오시마 실종 1년 반이 지난 시점부터 촬영되기 시작해 거의 1년에 가까운 기간을 소요했다. 촬영팀은 오시마를 추적하는 수사팀과 흡사했고, 요시에와 시게루를 내세운 인터뷰들은 직계 가족부터 점점 주변으로 확장되었다. 영화 촬영팀의 첫 추적 대상은 당연히 오시마였다. 그의 내밀한 가족사와 부모 형제, 그가 왜 도시로 이주했으며 동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심지어 어떤 여성 편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폭로되기 시작한다. 극기야 실종 시점에 오시마는 약혼녀 요시에가 아닌 다른 여성과 결혼을 약속하고 임신까지 시켰다는 증언이 나온다. 이쯤 되면 영화는 슬슬 관객에게 퍼즐과도 같은 질문의 발동을 걸기 시작한다. 부재하는 남자,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남자, 실체가 없는 남자가 오직 타인의 증언에 의해서만 관객에게 제시된다. 누군가에게 그는 무능한 일군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예의 바르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그는 여자들을 농락하는 자였고 결국 실종 전에 회사 공금까지 횡령한 문제적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러나 영화가 정작 질문하는 것은 오시마라는 사람의 존재 혹은 오시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아니다. 오시마를 경유해 이마무라 쇼헤이의 진짜 질문은 이것이었다. “영화가 어떻게 단편적 사실들(그의 흔적들, 증언들, 기억들, 관계들)을 통해 진실에 가 닿을 수 있겠는가?” 영화의 본격적인 게임은 중반에 이르면서 고조된다. 오시마 실종 2년째 되던 날, 일본의 TV와 언론 매체는 이마무라의 영화 촬영팀과 약혼녀인 요시에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어떤 미디어에서 요시에는 보기 드문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추앙되었고, 어떤 기자는 “단지 찾겠다는 일념으로 이마무라의 촬영에 응한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요시에는 이때쯤 이미 변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 오랜 추적과정 속에 더 이상 오시마가 아니라 인터뷰어이자 배우인 시게루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이마무라 쇼헤이는 시게루를 불러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한다. 그리고 내린 결론. “이미 영화는 목적(요시에의 오시마 찾기)을 잃었으니, 여기서부터는 요시에와 시게루의 관계를 밀어붙이자.” 영화와 현실, 허구와 진실의 경계 < 인간 증발 >은 명백히 다큐멘터리 형식을 표방하고 시작된 작품이었다. 오시마 실종이라는 사건, 오시마의 주변 사람들, 무엇보다도 요시에의 추적은 모두 사실에 기반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영화로 기록하면서 이마무라는 새로운 실험을 덧붙인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마무라는 관객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직설화법으로 이야기한다. “이 영화는 사실들을 추적하다 보면 진실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했다. 물론 진실은 있겠지만 여기 세 명(극 중 진실 공방을 벌이는 요시에와 요시에 언니, 그리고 어떤 사건의 목격자인 생선장수)에게 진실은 다 다르게 존재한다. ... 사람 마음은 믿을게 못 된다. 이건 픽션이다. 오시마의 실종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일 뿐이다. 이 영화는 드라마다. 가공된 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중반 이후 관객들은 보이스 오버 방식으로 흘러나오는 영화 촬영팀의 목소리들을 듣게 된다. 화면은 여전히 오시마 주변을 배회하며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요시에 일행을 제시하고 있지만, 목소리들은 이 영화의 방향에 대해 극영화적 스토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촬영팀이 사건을 왜곡하거나 정황을 조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영화적 포커스를 오시마에서 요시에로 옮겨가며, 요시에 언니를 새로운 사건의 용의자로 제시한다. 막장에 가까운 의혹도 제기한다. 무당의 강신된 목소리가 결정적 계기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무당은 오시마가 이미 죽었으며, 그를 죽인 것은 오시마와 불륜을 저지른 요시에의 언니라는 것이다. 이제 영화의 포커스는 요시에와 그녀의 언니, 그리고 불륜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생선장수의 진실게임으로 전환된다. 영화는 끝까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알려주지 못한다. 화면 안으로 불쑥불쑥 들어와 선언하듯 이야기하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말처럼, 영화는 다 허구이며, 사실의 단편들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내는 명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제시된다. 언니와 진실공방을 하던 요시에는 목격자인 생선장수를 집으로 불러와 언니와 대면시킨다. 이 세 명은 격한 논쟁을 하지만 누구도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때 이마무라 감독이 방안으로 불쑥 들어와 앉게 되고, 답답해진 요시에는 이마무라에게 질문한다. “감독님 진실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이마무라는 큰 목소리로 “세트 준비!”라고 외친다. 이에 누군가의 집일 거라고 간주되었던 방의 벽들이 뜯겨 나간다. 카메라는 뒤로 빠지며 이들을 전경화하는데, 카메라가 움직임을 멈췄을 때 관객은 이들이 실제 공간인 집이 아니라, 영화 세트장에 마련된 방과 집기들, 그리고 조명 장치 및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마무라의 주장. “인간의 마음을 믿을게 못된다~(위에서 언급한 내용)”. 이 작품이 천재적인 것은 단순히 진실 게임을 능란하게 해서만은 아니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임에도 어느 심리 스릴러 못지않은 치밀함과 긴장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오시마는 살았는가? 언니는 정말 동생의 약혼자와 불륜을 저질렀나? 요시에는 약혼자를 찾겠다는 건가, 유명해지겠다는 건가? 그뿐 아니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60년대의 산물이다. 한국의 TV 다큐멘터리나 독립 다큐멘터리에선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파격적인 형식 구조와 실험이 전면에 배치된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 증언자와 카메라의 관계, 관객과 사건의 관계 등 모든 것들은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만의 리듬 속에서 놀라운 에너지로 결합된다. 이마무라는 자신만의 언어와 아이디어로 영화의 쇼트를 구성하고 편집하며 사운드를 배치한다. 그리고 그 인공적 가공물은 더 근원적으로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 허구와 진실의 관계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967년 작인 이마무라의 이러한 파격적 실험은 동시에 유럽의 시네마 베리테나 미국의 다이렉트 시네마의 정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특히 시네마 베리테의 인터뷰법은 이 영화에서 얼핏 유사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시네마 베리테는 진실을 추동하는 카메라, 무수한 질문들을 통해 진실에 가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 유럽의 그들은 영화의 진실 가능성에 대해 확신했다. 그러나 이마무라는 그들의 한 계를 이미 간파했다. 증언자들은 신뢰할만한 것인가? 카메라는 과연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가? 이것은 증언자들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구성능력’에 관한 문제였다. 2차원적인 카메라 렌즈가 세상을 프레이밍 하는 순간, 영화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세계(드라마, 허구)를 구성할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 이창 >, 그리고 고다르의 <경멸> 못지않게 뛰어난 자기 반영적 영화로서, < 인간 증발 >에서 진짜 진실은 오시마의 실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의 구성능력, 현실과 영화가 맺는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오시마나 요시에가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요시에 자매와 목격자가 거리 한복판에서 사건 정황을 두고 벌이는 논쟁을 기록한다. 촬영팀이 장비를 동원해 소란스런 촬영을 시작하고 세 명의 주인공들은 서로의 증언이 사실이라 우기며 싸우기 시작한다. 여기에 또 다른 관련자들이 모여들고 도시의 구경꾼들이 가세하면서 현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돼버린다. 그러자 이마무라는 더 이상 촬영이 불가능하다며 중단을 선언한다. 그러면서 하는 마지막 발언. “이 영화는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해 편집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오시마의 실종에 다시금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영화는 픽션이다. 다 사실이 아니다.” 이때 카메라는 공중으로 빠지고 불쑥 침입해 들어오는 요시에와 시게루의 대화 목소리. “끝인가요?” “응 그래. 영화는 끝이지만 현실은 시작이지. 내일 뭐해?” ps. 영화가 개봉하자 여러 논쟁들이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윤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조작했다는 비난부터, 오시마 및 요시에의 사생활 침해에 대한 논란까지 일었다. 그러자 역시 강단 있는 이마무라 감독의 응수. “내가 요시에의 시련을 영화 만드는 데 이용한 만큼 요시에도 나를 이용했다.”
성룡의 < 취권 >(1978)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 정무문 >(1972)으로 대표되는 이소룡 영화의 비장미는 이른바 ‘코믹 쿵푸’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변화의 물결은 유하 감독의 < 말죽거리 잔혹사 >(2004)의 마지막 장면에 잘 드러난다. ‘아뵤~’ 하며 쌍절곤을 휘두르던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비틀비틀 취객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 이후 성룡은 < 사형도수 >(1978)까지 연달아 성공시키며 이른바 ‘소자’(小子) 장르를 굳건히 안착시켰다. 말썽만 피우던 철부지 아들이 가문의 복수를 위해 마음을 고쳐먹고 결국 승리하고야 만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소룡의 <정무문>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룡의 <취권>도 무수히 많은 아류작들을 양산했다. 성룡 역시 <취권>을 스스로 패러디하여, 웃음보가 터져서 깔깔대며 상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는 결정타를 날리는 소권(笑拳)을 소재로 한 < 소권괴초 >(1979)를 만들 정도였다. < 복권 >, < 원권 >, < 소권 > 이소룡 사후 본고장인 홍콩만큼이나 수많은 ‘짝퉁 이소룡’이 등장했고, 심지어 홍콩으로 수출까지 했던 ‘세계 2위의 무술영화 생산 국가’ 한국도 그 아류의 대열에서 빠질 수 없었다. 애무와 체위를 권법에 응용하여(하지만 관객 정서와 검열문제 등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진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던) 사랑을 해야 잘 싸울 수 있는 이형표 감독의 < 애권 >(1980)을 시작으로 가공할 배치기를 선보인 김정용 감독의 < 복권 >(1980)과 원숭이의 동작을 응용한 < 원권 >(1980), 성룡의 ‘소권’보다 더욱 강력하게 상대를 웃겨 버리는 이혁수 감독의 < 소권 >(1980), ‘근육질의 짝퉁 이소룡’으로 명성을 날린 거룡과 함께 한 김시현 감독의 < 매권 >(1980)과 < 뇌권 >(1983), 영상자료원에 시나리오만 남아 있고 일체의 정보가 없는 남기남 감독의 <희권>도 있었다. 이미 제목들만 나열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당시에는 무슨 아무개 ‘권’만 붙이면 어지간히 흥행이 되던 시절이었기에 그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 당시 「경향신문」은 “국산영화 중 가장 문제가 많은 것은 홍콩무술영화 아류와 저질유행어에서 따온 것들로 예술적 감각이나 함축성이 전혀 없다”며 “해괴하고 엉뚱한 영화제목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얼토당토않은 조어들이 판을 치면서 언어순화의 사회적 차원은 물론 시민들의 의식구조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이런 무질서한 풍토와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준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 신애권 >, < 소애권 >, < 요사권 > 졸지에 시민들의 의식구조에 악영향을 끼치는 대표 감독이 돼버렸지만, 무려 서울대 영문학과 출신의 이형표 는 < 서울의 지붕 밑 >(1961) 등을 통해 소시민의 애잔한 삶과 일상을 정감 넘치게 그려온 감독이었다. 어쨌건 그는 당시 < 애권 >의 속편인 < 신애권 >(1982), < 여애권 >(1982), < 소애권 >(1983)을 차례로 만들며 그 흐름을 주도했다. 심지어 <여애권>의 서영란과 함께 일종의 스핀오프 격인 < 요사권 >(1980)을 만들기도 했다. 역시 다른 <애권>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무도인들로 들끓던 만주를 배경으로 한 <요사권>의 포스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분홍색 하트 ♥ 그래픽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무림에 나타난 홍일점! 희한한 내용, 요상한 재주, 유별난 스타일의 액션도원경!” 그러니까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남들이 보기에 희한하고 요상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우리는 즐긴다!’는 그들만의 B급 공감대가 있었던 것이다. '흙바람 몰아치는 만주 비슷한 곳' 신나는 도입부 음악과 함께 < 애권 >이 시작하면 “1940년, 흙바람 몰아치는 만주 비슷한 곳”이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국경지대의 성문이 등장한다.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가 등장해 사기를 치고, 주인공 황석불( 강용석 )은 그들을 꼬나본다. 이때부터 뻔한 컨벤션과 장난스런 키치의 미학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분명 남한산성 어디일 텐데 사람들이 버젓이 중국옷을 입고 국경을 넘나든다. 주변에서 꿀차와 번데기를 파는 아줌마를 즉석 캐스팅했는지, 뽀글뽀글 싸구려 파마머리를 한 아줌마가 주인공의 활약상을 지켜보며 “어머! 어머!” 하는 과도한 리액션까지 선보인다. 그때 ‘이 약을 먹으면 칼도 배를 뚫지 못 한다’는 얘기에 석불이 “내가 한 번 해 보겠소”라는 얘기와 함께 약장수의 배를 칼로 찌른다. 하지만 약장수가 배에 두툼한 책을 숨겨놓은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예전에 < 황야의 무법자 >라는 영화를 봤는데 배에 솥뚜껑이 있더라구!”라며 느닷없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영화의 실제 장면을 느닷없이 언급하는 황당함이란! 바로 ‘스파게티 웨스턴’의 장대한 시작을 알렸던 셀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1964)에서 솥뚜껑을 방패삼아 총을 맞아도 아무렇지 않았던 장면이, 시대와 국경을 넘어 한국의 ‘김치 무협’ 영화에서 패러디됐다고나 할까. 바로 석불은 죽은 아버지의 원수 옥달평을 찾아 만주로 온 것이다. 옥달평은 돈벌이가 목적인 살인 무술대회를 열어 무림을 어지럽히는 장본인이다. 강직한 일도관의 청담사부( 이강조 )는 옥사부에게 ‘무도는 마음부터 닦는 것’이라 충고하지만, 청담사부의 눈 밑에 짙게 드리워진 다크 서클은 그가 곧 살해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무림은 옥사부의 세상이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찾아간 스승 화삼유( 배수천 )는 술주정뱅이 폐인이 돼 있다. 그래도 석불은 화삼유의 딸 쇼냥( 윤상미 )이 마음에 들어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한편, 옥달평은 예정대로 무술대회를 개최하려 하고 전국 각지에서 (누가 봐도 용인 민속촌으로 보이는) 흑룡여관으로 고수들이 몰려든다. 그중에는 ‘흐르는 별’이라 불리는 유성(遊星)권의 달인도 있다. 헤어스타일부터 동작까지 ‘짝퉁 성룡’이라 할 수 있는 석불은 아버지의 원수를 찾는 와중에도 ‘작업’을 포기하지 않는다. 늘 책을 가까이 하는 쇼냥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 운운하며 “저도 시를 참 좋아합니다”라고 접근한다. 쇼냥이 들고 있는 책을 향해 ‘마음의 양식’이 아닌 “책은 양식의 마음이죠”라는 썰렁한 대사까지 서슴지 않는다. 나중에 적들과 싸울 때는, 적의 무기를 피해 조롱하면서 “삐빠빠룰라~ 멀리 기적이 우네~”라며 이은하의 ‘밤차’를 부르기도 한다. 만주를 배경으로 아무리 포스트모던하게 시공간을 뒤섞었다지만 잠시도 ‘자투리 개그’를 쉬지 않는다. 그저 보다 보면 자연스레 적응되는 경지까지 가게 되니, 그냥 마음 편히 당대 오락영화의 능청스런 풍경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석불이가 놈에게 잡혔소. 내일 구하러 가야겠소. 사랑해 주시오.' 좀 다른 얘기지만, 남기남 감독의 < 영구와 땡칠이 >(1989)의 도입부를 기억하는가. 닫힌 문을 배경으로 성우가 “어린이 여러분, 우리 함께 영구를 불러보기로 해요. 하나, 둘, 셋! 영구야~ 목소리가 너무 작아요. 자, 다시 한 번 불러볼까요? 하나, 둘, 셋!”이라 말하고 어린 관객들이 일제히 “영구야~”하고 부르면 심형래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러니까 관객과의 인터랙티브를 시도하는 그런 의도적인 조악함이 당시에는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굳이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들먹이고 싶진 않지만, 원래 그것은 원본이라 할 수 있는 < 취권 >에서도 빠지지 않는 설정이었다. <취권>에서 성룡의 스승인 소화자(원소전)도 마지막 대결에 느닷없이 “영화에서 이런 중요한 장면에 내가 빠질 수 없지!”라고 외치며 등장했으니까. 게다가 술병을 달고 사는 화삼유는 누가 봐도 소화자를 패러디한 것 아닌가. 1~6번 순서로 편집되어있는 애권 의 다양한 권법들 하지만 알고 보니 화삼유는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폐인 행세를 한 것이었다. 석불이 악당들에게 잡혀 가자 “석불이를 구하러 가야겠소. 어서 나를 사랑해 주시오”라며 대놓고 화류계의 여자를 만나 애권을 점검하기 시작한다. ‘애무난무권’이니 ‘일심충천권’이니 ‘양인상상권’이니 하는 이름을 갖다 붙이긴 했지만, 관객이 보기에 그저 똑같이 여자 몸을 탐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아무튼 구조된 석불도 본격적으로 쇼냥과 함께 애권을 익히고, 결국 흐르는 별과 최후 대결을 벌이게 된다. 갑자기 싸우다 말고 포옹과 키스를 하려 하니 흐르는 별은 당연히 징그러워 질색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석불은 마치 적과 함께 탱고를 추듯 “이것이 바로 만주의 마지막 밤의 탱고다!”라며 애권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정체불명의 애권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흐르는 별의 마지막 대사가 압권이다. “사랑이 날 죽이는 구나~” 그렇게 먹구름이 낀 무림은 홍콩 사람들도 듣도 보도 못한 애권으로 인해 평화를 찾게 된다. 애권이 독특한 것은 그 애권의 최대 적이 체력의 감퇴도 아니요, 의지의 부족도 아닌 바로 주인공의 권태기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 신애권 >에서는 급기야 장인인 화삼유가 복수를 위해 사위의 외도를 용인하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이제 더 이상 아내를 보면서는 애정이 생기지 않으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예나 지금이나 ‘막장 드라마’는 장르를 초월하여 존재했던 것 같다. 정말이지 기발하다고 하기에는 뭔가 어설프고 조악한, 대체 이런 현기증 나는 권법이 어디 또 있었던가. / 글: 주성철 (씨네21 기자) 강용석 배수천 이강조 윤상미 김정란 감독 이형표 각본 이일목 촬영 양영길 개봉극장 아세아극장 개봉일 1980-04-24 관람인원 61,286(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