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연꽃
- 감독
- 장윤미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박노연
한국 독립영화는 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 태동하였다. 서울영화집단과 서울영상집단, 민족영화연구소, 노동자뉴스제작단, 장산곶매와 같은 단체들은 소형영화, 작은영화, 민중영화와 같은 분류의 영화들을 내놓았다. ‘독립영화’라는 명칭이 PD(민중민주)와 NL(민족해방) 사이에서 나름대로 중립적인 용어였기 때문에 무난히 수용되었다는 견해 1) 가 있을 정도로, 초기 한국 독립영화는 반독재 투쟁 및 민주화운동과 결부되어 있었다. 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93년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민주화운동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연이어 들어서며 민주화운동은 완전한 결실을 맺은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면의 그늘 또한 존재한다. 반독재투쟁이 한참이던 시기 촬영된 < 상계동 올림픽 >(1988)의 풍경은 < 그들만의 월드컵 >(2002)에서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었다. 제도적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한국 사회는 경제, 노동, 인권, 소수자 등의 문제에서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IMF 외환위기 극복, 경제성장, 한류 등으로 되는, 소위 ‘국뽕 서사’의 이면에는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이 놓여 있다. 외환위기 극복 이후의 일상적인 출근길, 희망과 낙관을 품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여전히 산재하는 문제들을 주목한 이강현의 < 파산의 기술記述 >(2006)과 같은 작품은 그것을 선구적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사진작가 홍진훤의 첫 다큐멘터리 작업이라 할 수 있는 < 멜팅 아이스크림 >(2021)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최신의 작업 중 하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창고에서 ‘수해필림’이라고 적힌 의문의 필름 뭉치가 발견된다. 당시 현장을 기록하던 사진 집단들을 찾아가 이 필름의 흔적을 따라가며 복원을 시도한다.” 홍진훤의 기존 작업을 잘 모르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과거의 사진을 복원하고자 하는 열망에 관한, 작가보다는 아키비스트의 지위를 지닌 이의 작업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영화는 수해를 입어 필름 위의 유광제가 녹아내릴 위기에 처한 사진들을 복원하는 한편, 사진을 찍었던 이들이 기억하는 당시에 관한 인터뷰를 담아낸다. 더 나아가, 홍진훤은 ‘미디어 참세상’ 아카이브에 있던 2000년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의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및 이주 노동자 투쟁 현장이 담긴 이미지를 포개어 놓는다. 사진에 담긴 ‘민주화운동’, 2000년대의 투쟁현장, 그리고 인터뷰와 사진 복원이 벌어지는 현재, 이 영화에는 세 개의 시간축이 공존하고 있다. 세 개의 시간축을 몽타주하는 <멜팅 아이스크림>은 “수해필름의 복원”이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와는 달리 민주화운동의 시간을 기념비적인 것으로 추켜세우지 않는다. 민주화운동 당시 각각 민족사진연구회, 사진통신, 사회사진연구소에서 활동했던 박승화, 서영걸, 이정용의 인터뷰는 민주화운동 시기의 영웅담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A컷’을 얻는 것에 몰두하게 된 자신과 동료들에 대한 성찰과 비판이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반독재투쟁이라는 추상적인 말”에 매몰된 민주화운동 속에서 계급과 경제의 문제는 뒤편으로 사라졌고, “반독재는 알지라도 경제는 모르는” 이들에 의해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는 가속화되었다. 민주화운동의 영웅들이 대통령을 지내던 시기의 투쟁들은 맹렬하게 짓밟혔다. <멜팅 아이스크림>이 인용하는 2000년대 초중반의 투쟁 현장 푸티지들은 폭력과 욕설과 절규와 눈물로 가득하다. <멜팅 아이스크림>에서 복원되는 사진은 민주화운동 투사들의 영웅적인 모습이 담긴 A컷들이 아니다. 과거의 기록을 들춰보고 복원하려 할수록, 이미지는 필름에서 지워진다. 이미지가 지워진 필름은 그저 투명할 뿐이다. 영화의 인터뷰이들은 386세대의 민주화운동이 그러한 성질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기록을 들춰볼수록 그것은 투명한 공백이 된다. 수해로 훼손된 필름은 녹아내린 물감이나 아이스크림처럼 이미지를 뭉개버린다. 비디오 캠코더와 저화질 디지털카메라로 촬영된 2000년대의 투쟁현장 또한 디지털 이미지의 픽셀이 그대로 노출되는 ‘깍두기 현상’으로 가득하다. 열화된 이미지들, 열화된 기록들은 필름에서 이미지가 지워지듯 공백으로 돌아간다. 홍진훤 감독은 촬영감독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동상을 “최대한 이상하게”, “녹아내리듯 그리고 추락하듯”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말했다. 2) 과거의 영웅들이 담긴 이미지가 흘러내린 공백엔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차별, 우경화 등이 새겨진다. 2000년대의 투쟁현장이 담긴 푸티지들의 일그러진 영상은 영화 후반부로 향할수록 점점 선명한 이미지들로 채워진다. 이것은 민주화운동 영웅들의 이미지 밑에 잠들어 있던 공백이 무엇으로 채워졌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그 공백은 현재까지도 진행되는, 당시와 같으면서 다른 투쟁을 일으킨다. 공백이었던 계급, 경제, 노동, 소수자의 문제는 2022년에도 여전히 산재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공백 위로 행인들의 모습이 담긴 슬로우모션과 다양한 이유로 투쟁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삽입한다. 이 음성은 2021년 하반기 총파업에서의 음성이다. 팬데믹 시기에 물류를 책임진 화물연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보건의료노조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공백을 채우는 새로운 투쟁으로 새로운 세계가 기록된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공백 없는 운동이 가능할까?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촛불혁명을 거쳐온 지금 무언가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지난 5년간 투쟁현장을 기록하고 < 골목의 이야기 >(2016), < 피와 재 >(2016), < 례 >(2018) 등을 만들어온 다큐멘터리스트 권순현의 단편영화 < 농몽 >(2020)은 그러한 인상을 풀어놓는다. 이는 지난한 투쟁의 결과에 대한 반성과 소회라기보단 그 과정에서 느낀 복잡한 감정을 토로하는 것에 가깝다. 권순현은 "‘현장’은 나를 통째로 집어삼켰다"며, "현기증 속에서 나는 그 어떤 사건도 그 어떤 사물의 위치도 제대로 그려낼 수 없었"고, "(지난) 세 편의 다큐멘터리는 모두 망향의 기록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3) <농몽>은 이 모든 것을 겪은 이후, 그리고 촛불혁명 이후 감독 스스로가 느낀 공허함에 관한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자기연민과 자기비하로 가득하다. 감독은 A, B, C라 명명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꺼낸다. 함께 투쟁한 사람, 2008년 촛불시위를 제안한 사람, 트라우마를 겪는 노동자. 감독의 내레이션은 세 사람의 말과 그들과 나눴던 대화를 끌어온다. 촛불은 2008년 당시 20대였던 A의 ‘팔뚝질’을 대체하는 사회운동의 장신구일 수도, 더 큰 민주주의 같은 것을 꿈꾸었으나 자초한 논란으로 인해 실패해버린 B의 바람이 담긴 무언가일 수도 있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2016년의 촛불은 평화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시위 당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선 이들은 이 시위가 무엇보다 '평화'시위일 것을 주장하며 기존의 운동권으로 불리던 이들이 전개하던 투쟁 방식에 반대한다. 그때의 '평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제도 조선소의 투쟁을 기록하던 감독은 그곳에 위장취업할 것을 제안받지만,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위장취업에 실패한 것에 안도한다. 얼마 뒤 조선소에서 크레인 붕괴사고가 발생하고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는 다시 한번 안도한다. C는 크레인 붕괴사고를 겪었다. 그의 트라우마 앞에서 감독은 안도할 수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력을 동원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의 투쟁에 대한 폭력이 전도된 것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촛불을 들고 평화시위를 주장하며 거리에 나서는 행위는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연대임과 동시에 시위현장에서의 폭력을 시야에서 치워버리고자 하는 모순적인 행위다. 투쟁현장을 기록하던 감독이 느끼는 자기모순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농몽>은 투쟁현장과 방식에 대한 불쾌감과 반항, 혐오를 담은 영화가 아니다. 촛불혁명 이후의 회고담 같은 것은 더욱 아니다. 학생운동이 종말을 맞이하고 모든 것이 망해버리거나 끝나버린 것 같은 순간 현장으로 향한, 노동자도 운동가도 아닌 위치에 서있으면서 투쟁현장에 뛰어든 어떤 사람의, 다소 질척이는 자기고백이다. <농몽>이라는 자기고백은, 그 결은 조금 다르지만 <멜팅 아이스크림>이 보여준 공백 이후의 세계와 공명한다. 공백 이후의 세계, 한쪽에서는 승리의 서사를 써내려 가지만 다른 한쪽에선 항구적인 투쟁 속으로 사람들이 내던져지는 세계, 이 세계는 마치 모든 사람의 기력이 소진되길 기다리는 지옥인 것만 같다. 물론 두 영화가 그 지옥에 머물고자 하는 냉소에 파묻힌 작품이라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그러한 냉소를 딛고 일어나 희망찬 미래를 이야기하는 작품은 더더욱 아니다. <멜팅 아이스크림>과 <농몽>은 녹아내린 시대와 소진된 마음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들이며, 이 이야기들이야 말로 그 이후를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 1) Young-a Park, Unexpected aliances: Indiependent Filmmakers, the State, and the Film Industry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4, p.50(이도훈, "이름의 부재와 경험의 빈곤", 「독립영화」, 한국독립영화협회, 제49호, 2020에서 재인용). 2) 홍진훤, "서신교환: 장윤미X홍진훤, 「마테리알」, 7호, 마테리알, 2022, p.48. 3) 권순현, 「2021 독립영화 쇼케이스」, 한국독립영화협회, 2022, p.158~159.
장윤미 감독으로부터 구미에 있는 KEC 기업의 민주노조를 촬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을 선명히 기억한다. 그녀가 만들 노동 다큐멘터리가 어떨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KMDb를 통해 두 차례 소개한 장윤미 감독 영화의 뚜렷한 특징은 감각적이고 직관적이며 자유로운 카메라의 운용이다. 종종 찾아오지만 소박하거나 찰나적이기에 붙들기 어려운 아름다운 순간을 그녀의 카메라는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 >(2014)의 거미줄이, < 늙은 연꽃 >(2016)에서 불쑥 틈입한 할머니의 미소가, < 공사의 희로애락 >(2018)의 아카시아가 흩날리는 순간이 그랬다. 궁금했다. 그녀의 카메라가 투쟁의 현장을 만나면 무엇을 보여줄까. 금속노조 KEC지회는 2010년 파업 이후 정리해고, 친기업 복수노조 설립, 손배가압류 등 사측의 지속적인 탄압에 굴하지 않고 민주노조를 지켜왔다. KEC지회는 교섭 대표 노조의 지위를 잃었지만, 2018년 임단협에 참여하기로 한다. < 깃발, 창공, 파티 >(장윤미, 2019)는 이 과정을 1년여 동안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KEC지회의 전략은 교섭 단체인 친기업 노조가 사측과 협의한 내용을 전해 듣고 이를 분석하여 전체 조합원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친기업 노조의 조합원들까지도 설득해내는 것이었다. 전략은 성공했다. 사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나온 임단협 잠정합의안에 대한 전체 조합원 투표에서 60%의 반대를 끌어낸 것이다. 물론 이는 곧 새로운 싸움으로 이어진다. 같은 달, 교섭 대표 노조와 사측이 투표 결과를 따르지 않고 잠정 합의안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노동 운동과 노동 다큐멘터리의 차원에서 볼 때, <깃발, 창공, 파티>의 중요성은 현 KEC지회를 이끄는 노조 간부이자 작품 주인공의 다수가 여성들이라는 데 있다. KEC지회의 지회장, 부지회장, 수석 부지회장 모두 여성 조합원이며 임원급 회의 자리에 참석한 대다수 또한 여성이다. 투쟁의 방식을 고민하고 전략을 짜는 브레인 역할도 여성이자 민주노총 경북본부 교육국장인 배태선이 맡고 있다. KEC의 노조 간 차별, 임금 차별은 물론 이 차별들의 보다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이들의 목소리로 인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화적 차원에서 볼 때, 흥미로운 점은 역시 장윤미 감독이 택한 형식이다. 영화는 상당히 불친절한 방식의 재현을 시도한다. KEC지회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짧은 설명과 이 영화가 KEC지회의 입장에서 전개된다는 언급 외에 다른 설명적인 정보들은 없다. 정리와 요약 대신, 관객은 그저 그 상황에 던져진다. 이 회의가 무슨 회의이고 날짜가 언제인지, 발언하는 조합원의 직위는 무엇이고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개별 인물들의 인터뷰도, 상황을 설명해주는 내레이션도 없다. 카메라를 든 그녀 자신이 그랬을 것처럼, 회의를 하고 연대 투쟁을 하고 함께 산책하는 그들의 옆자리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시간이 걸린다. 복숭아, 감, 귤. 계절마다 다른 과일을 먹는 조합원들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정직하게 체험해야 한다. 관객들에게 뉴스를 보듯 상황을 단번에 파악하고 싶다는 조급함을 버리고, 인내심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영화.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163분(최초 상영이었던 부산영화제 버전은 168분이다)을 보내고 나면 가랑비에 옷이 흠뻑 젖어있듯, 전체가 한꺼번에 느껴진다. 그녀는 누구이고 그 마음이 어떠한지, 10년이 넘도록 싸움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큰 승리 혹은 패배에 초점을 둔 노동 다큐멘터리들에서는 삭제되었을 작은 승리와 세세한 고민이 전해진다. 이 모든 것들이 인터뷰를 통한 말로 발화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결을 간직한 덩어리 채 다가온다. 기존의 장윤미 감독의 영화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경이로운 순간은 한두 개의 솟아오른 이미지 혹은 쇼트에서 비롯한 마법 같은 것이었다. <깃발, 창공, 파티>에서 그녀는 자신의 장기를 절제한다. 대신에 KEC지회 사람들과 함께하길, 이들에게 익숙해지길 관객에게 요청한다. 쉽지 않다. 그러나 그 긴 여정을 끝내고 나면 몇 가지가 선물처럼 주어진다. 연대, 존엄, 믿음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이는 기존에 그녀가 선사해준 영화적 순간들과 다르지 않다. 희미하고 찰나적이지만, 보석처럼 빛난다는 점에서 말이다.
“실험적인 다큐멘터리 작업을 좋아한다.” 이삼 년 전, 어떤 지면에 내 소개로 쓴 문장이다. 다큐멘터리는 극영화와 비교하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뚜렷한 작품들이 다수인 장르다. 하지만 그 틀을 조금만 벗어나면 극영화보다 훨씬 자유롭고 풍부한 경험을 선사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실험적인”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붙인 표현이었다. 흥미롭고 신선했다. 짜인 틀을 벗어난 작품들, 실험영화라 불려도 될 작품들, 형식이 곧 주제가 되는 작품들. 그 형식 안에 답이 있는 것만 같았다. 다양한 무빙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현실 속에서 영화가 가야 할 길에 대한 길을 탐험하고 제시하는 것 같아 보였다. 장윤미 감독의 영화에 대한 최초의 관심도 이런 방향 위에 놓여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의 영화를 보면 볼수록 생각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 콘크리트의 불안 >(2017)이라는 작품을 제외하면 형식이 두드러지는 작품은 없었다. 장윤미 는 무심하고 대충 찍은 듯 보이지만 실은 직관적이고 순발력 있는 캐치로 대상을 포착하고, 그렇게 해서 얻어낸 생생함을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럽게 관객에게 건넬 줄 아는, 보기 드문 능력을 가진 감독이었다. 이는 실험적이라기보다는 감각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다룬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2014)나 할머니를 찍은 < 늙은 연꽃 >(2015)은 별사건이 없는 가족의 일상을 스케치한 작품임에도 보는 이가 흥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영화를 볼 수 있게 한다. < 공사의 희로애락 >(2018)은 아버지를 찍은 영화다. 건설 노동자로 평생을 살았고, 지금도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가장 좋았던 기억과 힘들었던 기억에 관해 묻는다.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 중 인상 깊은 것은 광주 삼성증권 사옥을 지었을 때의 일화다. 대구에서 자재를 만들고 이를 광주로 실어 날라 건물을 올리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는데, 건물이 완성되기까지 대구와 광주를 백번이 훌쩍 넘게 오간 길을 모두 아버지가 운전했다는 것이었다. 옆 좌석에서 잠을 자는 동료에게 느꼈던 야속함과 2차선이기 때문에 사고가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88고속도로에 대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무런 감정 없이 서 있는 한 건물을 완성하는 인간의 노동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큰 희생과 고단함을 담고 있는지를 새삼 느끼게 했다. 영화의 다른 하나의 줄기는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할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다. 할머니의 죽음은 늙은 자신의 얼굴, 육체적 쇠락과 맞물려 아버지의 마음에 황혼의 우울감을 드리운다. 평소 과묵하셨으리라 짐작되는 아버지는 자신을 촬영하는 딸에게 이러한 마음을 곧잘 표현했다. 영화를 본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아버지의 안부를 여쭙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의 특별할 것 없는 기억과 황량해진 마음을 가만가만 돌아보던 영화가 예술만이 할 수 있는 마법을 부리는 것은 영화의 후반부, 할머니 산소 장면에서다. 소주 한 병과 소보로 빵 하나를 가지고 산소에 인사를 올리는데 하얀 꽃잎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촬영한 때가 초여름이었나 보다. 산소를 둘러싼 아카시아나무에서 꽃잎들이 눈처럼 흩날린다. 화면은 차츰 전환되어 연꽃무늬의 커튼으로 바뀌고 상엿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방이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할머니의 온기를 품고 있는 그 방에서 장윤미 감독의 카메라는 아버지의 눈길이 머물듯 할머니의 물건들을 고이고이 담아낸다. 아버지의 마음을 자기 자신의 방법으로 이보다 더 잘 위로할 수가 있을까. 아카시아가 흩날리며 떠오른 관객들의 미소는 할머니의 방과 함께 한 방울의 눈물이 된다. 지난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공사의 희로애락>이 최우수한국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넉넉지 않은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사정을 알기에 상 자체보다 상금이 더 축하스럽게 느껴졌는데, 상금 일부는 부모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돌보던 길고양이를 구조하고 편집 장비를 마련하는 데 썼다고 들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전념하면서부터는 일 년에 한 편씩 새 작품을 내놓은 꾸준한 감독이긴 하지만 장비도 마련했으니 새 작품을 더 자주 볼 수 있길 바라는 관객으로서의 욕심을 지면을 빌려 조심스레 전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