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도풍운
- 감독
- Hsu Yu-Lung
- 제작년도
- 1988
- 출연
- Yau Pang-Sang, 알렉산더 루, Ng Gai-Yin
딩동. 문이 열리자마자 자넷(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분)은 다짜고짜 총을 겨눈다. 헝클어진 머리,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복잡한 얼굴로 총을 든 그녀의 손이 덜덜덜 떨린다. 그녀는 왜, 누구를 향해 총을 겨눈 것일까. 그 날은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자넷의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을 자축하기 위해 자넷 부부는 친구들을 초대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자넷의 절친인 에이프릴(패트리시아 클락슨 분)과 그녀의 남자친구 고프리드(브루노 강쯔 분). 뒤이어 차례로 들어오는 마사(체리 존스 분) 그리고 지니(에밀리 모티머 분). 마지막 손님은 톰(킬리언 머피 분)이다. 톰의 부인인 메리앤은 늦는다는 전언, 이로써 메리앤을 제외하고 올 손님은 다 왔다. 파티는 시작도 전에 불길했다. 손님 맞을 생각은 않고 시종일관 우울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 자넷의 남편 빌(티모시 스폴 분)을 필두로 에이프릴과 고프리드는 티격태격 작은 말다툼을 멈추지 않고, 톰은 들어오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해 콧속에 마약을 잔뜩 넣더니 권총을 품에 쑤셔 넣는다. 에이프릴이 축배사를 시작하려는 찰나 레즈비언 커플인 마사와 지니가 자신들의 세쌍둥이 임신소식을 먼저 발표하며 초를 치고, 에이프릴이 이 불길함에 화룡점정을 찍으니, 샴페인이 터지는 순간 날아간 뚜껑에 거실유리창이 와장창 박살난 것! 이 요란스런 시작은 그 날의 파티가 결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을 현현한 것이었다. 출발테이프를 끊은 건 빌이었다. “내 상태가 안 좋다는군. 진단을 받았는데 결과가 별로야. 시한부라네.” 다들 놀라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정적을 깨는 사람은 톰. “망할 놈!” 위로는커녕 그 와중에 빌에게 욕을 하는 시츄에이션이라니! 하지만 빌이 욕을 얻어먹을 만했다. 그의 자백에 의하면 지난 2년간 그는 톰의 부인인 메리앤과 불륜관계였단다. 갈수록 태산인 건, 그 둘의 밀회를 도운 건 다름 아닌 빌의 친구인 마사이고, 대학시절 빌과 마사는 또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일이 이 지경이라 톰이 연신 외쳐대는 ‘씨발’이 매우 적절한 리액션으로 느껴질 정도다. 감독인 샐리 포터는 이 영화를 ‘비극을 둘러싼 희극’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유머와 위트를 통해 인간이 받는 고통의 모순을 말하고 싶었다고 덧붙인 걸 보면 결국 방점은 희극에 있지 않고 비극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이나 가까이서 보면 모두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을 대입한다면, 이 영화를 우리는 가까이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일 게다. 거실과 부엌, 화장실과 앞마당이 전부인 좁고 한정된 공간은 그래서 매우 적절하다. 갇힌 공간은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때문. 공간의 협소함으로 촉발되는 지루함은 71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으로 한 방에 해결했고, 모든 컬러가 배제된 흑백화면은 인물에 대한 편견을 제거시킴으로써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를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이 완벽한 삼합으로 우리는 감독의 완벽한 인질이 된다. 인간의 삶은 세 가지로 나뉜다. 공적인 삶, 사적인 삶, 그리고 비밀의 삶. 이 영화는 비밀의 삶이 어떻게 공적이고 사적인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통쾌하게 까발리며 진실과 진리(眞)은 항상 선(善)이 되는지, 선(善)은 늘 아름다울(美) 수 있는지를 대놓고 묻는다. “난 진실과 화해를 믿어. 난 전 세계를 향해 연설했어! 우리나라를 부당착취의 도살장에서 건져 내느라 헌신했다고!” 라고 사자후를 토해낸다고 해서 진(眞)에 가까운 자넷의 공적인 삶이 마냥 사적인 삶과 일치했던 건 아니다. 개인의 삶의 모습과 사회적 정의감은 별개의 층위를 갖는다. “가끔 이기기 위해선 확신에 가득한 ‘척’도 해야 한다”는 자넷 본인의 말마따나 그녀의 진(眞)은 선(善)이 아니라 위선(僞善)에 가까웠다. 아니, 딱 위선이었다. 사적인 삶에서는 외조를 하느라 자신을 희생했던 남편 빌에게 무심한 아내였고, 심지어 계속 울려대는 문자메시지 알림음은 그녀에게 비밀의 삶까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니 말 다했다. 진이 위선으로 연결되는 순간 이미 미는 존재할 수 없다. 미(美)가 실종된 자리엔 추(醜)가 남는다. 다른 사람들의 사정은 나을까. 그럴 리가! 지식인의 대명사인 대학교수 빌과 마사는 입으로는 온갖 격률을 다 쏟아내며 번지르르한 레토릭을 자랑하지만, 실상은 본심을 호도하느라 바쁘다. 정당정치, 합리주의, 페미니즘, 의료정책 등 각종 정치·사회 이슈들을 꺼내며 자신들이 정의의 수호자인 것처럼 굴지만, 그것들이 메리앤을 둘러싼 불륜과 적절히 조합되는 순간 그들 역시 위선자의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함을 증명한다. 왜 너의 신념이 바뀌었냐고 추궁당하면 이 한 마디로 자신을 변명하는 그들. “모든 건 변해. 늘 변한다고!” 상황이 이쯤 되니 성공한 금융맨으로 비싼 양복이나 처입는 속물 중의 속물 톰이 가장 순수해 보일 지경이다. 등장부터 고프리드와 옥신각신하던 에이프릴이 이 하극상의 끝에서 “우리사이가 여기서 젤 낫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미(美)가 아름다움인 것은 미가 바로 각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은 곧 ‘앎’이므로. 비극이 미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하게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비극의 미’를 이렇게 정의했다. 내가 앞서 진선미를 끌어들인 이유이자, 포터 감독이 희극을 가장한 ‘비극’을 연출한 이유일 것이다. ‘앎’을 전하기 위해서. 대체 어떤 앎이기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비밀의 속성에 대해 짚어야 한다. 외부에 당당히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을 행위했을 때 그것은 곧 비밀이 된다. 또한 비밀은 대개 선의 반대를 품는다. 위선 혹은 악. 그래서 위선 혹은 악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 된다. 원래 이 모임의 목적은 ‘파티’였다. 우리가 쓰는 가장 화려한 가면의 향연인 파티. 욕망의 실체를 감춰주는 게 가면의 역할일 텐데, 그 거창하고도 눈부신 가면을 벗기면서 느끼는 쾌감이 감독이 지향한 길티 플레져였다. 그러나 남의 비밀을 아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진짜 비극은 내 가면이 벗겨져 보이기 싫었던 완연한 민낯이 드러나는 것. 나의 위선, 나의 악, 나의 욕망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저들을 비웃기 위해 가리켰던 손가락을 내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 “아리따운 메리앤! 그녀는 태풍의 눈이지. 늘 태풍의 눈이야.” 영화 초반 에이프릴은 메리앤을 두고 이렇게 말했었다. 태풍은 주변을 초토화시키지만 사실상 태풍의 중심 즉, 태풍의 눈에서는 하늘이 맑고 바람이 없는 고요한 상태가 유지된다. 이것이 태풍이 가진 모순이다. 파티의 모든 사람들은 메리앤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기고 부서졌다. 그러나 정작 메리앤 본인은 영화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마지막 ‘딩동’ 소리에 현관문이 열리면서 그녀가 등장하도록 되어 있지만 역시 그녀의 모습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대체 그녀는 실재하는가 아닌가. 그녀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왜 ‘메리앤 없는, 그러나 메리앤이 중심이 된’ 스토리가 탄생했는가. 영화 내내 썅년 소리를 들어야 했던 그녀는 과연 누구이기에. 자넷의 손에는 여전히 총이 있고, 그녀는 정면으로 총구를 겨눈다. 자, 이제 다시 대답해보자. 그 총구는 누구를 향해 겨눈 것일까? 여전히 메리앤을 향해서인가? 만약 아니라면? 그럼 그 사람은, 총을 맞을 그 사람은, 총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사람, 바로 너다!
0. 영화 스태프 영화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처음 꾸는 꿈은 대다수가 감독이다. 나 또한 감독이 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했으며 그래서 뭣도 모르고 독립영화 연출부 막내부터 시작해서 그사이 그나마 무탈하게 일하고 놀며 십여 년 좋은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지금은 운 좋게도 상업영화 조감독 일을 하고 있다. 라고 덤덤한 척 적다가 잠깐 글쓰기를 멈추고서 한숨을 쉰다. 사실 영화를 만드는 누구나 그렇지만 그들의 지난날들은 희망찼었고 혹은 원만했었던 또이 또이 (본전치기)의 날들보다 지난하고 고단한 추억, 말하고 싶지 않은 흑 역사의 시간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여건은 늘 만만치 않았으니까. 풍족하며 여유 있는 영화란 지구상에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럴 때마다 가장 많이 했던 이야기들은. “비록 그렇지만 나는 영화를 그만 둘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나는 영화를… 여전히 너무 사랑해” 라는,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들과 “이번엔 진짜 정녕 반드시, 기필코 그만둘 거야, 잡지 마, 이번은 진짜야!” 라며 내뱉으며 자리를 박차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서 집에 갔는지도 몰랐던 그들의 뒷모습들. 사실 답은 목구멍 밑에 이미 있었다. “버티는 자가 승리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고 싶은 영화를 계속.... 여기가 중요하다. 계속 할 수 있다 ” 라는 것. 이 명제를 넘어서는 자는 보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다음날 사무실의, 촬영장의 풍경은 대부분 재미없는 해피엔딩이었다. 하나둘씩 술 덜 깬 얼굴로, 어제의 눈물 자국 그대로 멋쩍게 나와서는 다시 컴퓨터 전원을 누르고 문서를 만들고 세트에 그림을 그리고 소품의 손을 보며 촬영에 쓰일 옷과 장비, 도구들을 체크하며 쓸데없이 바지런히들 움직였다. 어쨌든 그렇게, 그렇게들 지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 작업을 하면서 그 공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영화 만들기’ 에는 감독이라는 포지션 외에도 수많은 소중한 포지션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과 맞는 포지션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하나의 작품을 하고 운 좋게도 다음 작품을 할 수 있게 되면, 어이쿠야! 영화를 계속할 수 있다는 점에 기뻐했고 노력해서 팀장도 달고 실장도 달고 퍼스트도 하고 감독도 달면서, 지화자! 자신이 작업했던 작품이 BP(손익 분기점)를 넘거나 혹여 크게 흥행이라도 하게 되면 그 누구보다 기뻐하며 함께 고생했던 스태프들에게 낯 뜨거운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하고 또한 지지리도 원수처럼 지냈던 어제의 적과 서로 회개하고 용서하게 되는 기적의 순간들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편 관객 수 천만이라는 한국영화의 흥행시대에 빛이 닿지 않는 스크린의 반대쪽과 같은, 영화 현장의 노동 현실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안 하고 싶다. 당연히 사적으로는 영화인들끼리 이곳의 치부와 환부에 대해 지겨울 만큼 토해내고 담으며 비판하고 곱씹는다. 하지만 외부에서 보는 이곳의 문제점과 실제 이곳의 문제점에 대한 시각 차이가 크고 그 시각차를 줄이기 위해 이곳의 특수성에서 시작된 문제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하려다 보면 전체 글의 본래 목적성에서 벗어 날 우려가 있다. 그래도 굳이 두리뭉실 소견을 말해 보라면 물론 여전히 문제도 많고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지만 지금은 예전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 있고 많은 이들이 문제 해결에 동참하고 있다 정도의 긍정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쓰다 보니 개인적 아쉬움에 좀 더 적는다면 “그 날고 기던 능력의 선배, 동생들도 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수년간 많이들 이 바닥을 떠났습니다. 슬픈 일이죠. 누구는 도태라는 단어를 쓰며, 거품이 빠졌다는 용어를 쓰며 모두를 묶어서 폄하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계속하기(노동의 안정성) 에 있어서 불합리성이 더 커져 왔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새로운 스태프들은 이전처럼 들어오지 않고 있죠. 마치 작고 단단했던 얼음 호수가 갑자기 넓어지면서 전체 얼음의 양도 같이 증가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기존에 얼음 양 만을 가지고 억지로 늘어난 면적을 채우다 보니 이 호수 전체가 살얼음판이 되어버린 꼴입니다. 그 얼음판 위에 우리들이 서 있었고 그 과정 속에 많은 사람들이 살얼음판 아래로 충분히 추락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불안한 호수의 빙판 위에 새로운 사람들이 쉽게 올라서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도 고무적인 면이 있다면 예전보다 월급은 증가했고 D/N(하루 종일) 촬영은 줄었으며 몇 가지 기본적인 보험이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희망차게 생각하고 싶다. 앞으로도 계속 한국 영화는 만들어져야 되기 때문이다. 솔직한 마음이라면 예능 프로 1박 2일의 엔딩처럼 “ 한국 영화 산업으로 많이들.... 일하러... 오세요!!!!” 라고 소리쳐서 홍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실제 내부적으로 나의 마음처럼 한국영화와 관계된 많은 분들이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앞으로 더욱더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이라 생각한다. 끝으로 이왕 진지해졌으니까 좀 더 진지하게 영화 < 인터스텔라 >에 나오는 명대사를 적으며 마무리해본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1. 조감독의 일 = (감독 + 배우 + 스태프) 들의 시간 우선 현시점에 조감독의 일을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요 몇 년 사이 영화감독에게 요구되는 룰의 달라진 점과 동시에 스태프들에 대한 처우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조감독의 입장에선 영화 현장에 감독과 배우, 스태프 모두 정해진 시간 안에 자신들의 모든 내공과 능력치를 쏟아내야 하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공기와 우연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결국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의 재량이든, 톱 배우의 연기력이든, 시나리오 매력에 의한 스태프들의 헌신이든, 좋은 보수와 여건에 현장이든, 그 어떤 좋은 동기로 모두가 결승선까지 함께 열심히 달릴 수 있는 것. 감독과 배우만 100점 맞는 현장보다 모든 감독, 배우, 스태프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펼쳐서 그 평균의 점수가 70점일 때 더 좋은 결과물의 영화가 나온다고 나는 경험상 알고 있고 믿고 있다. 덧붙여 많은 일반 분들이, 이제 막 영화 작업을 시작하는 분들은 영화작업이 약간의 허세와 멋. 미지의 어떤 것을 알고 있는 특별한 누군가들의 낭만. 현장의 마법들로 이루어지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마법들은, 충분히, 싸우고 꼬집으며 치열한 회의와 고민, 시뮬레이션을 해서 촬영장에 갔을 때나 아주 가끔 하늘이 도와줘서 탄생했던 경험이 있다. 프리 프로덕션에서 120프로를 준비해 가도 촬영장에서 80프로 밖에 목표치를 이루지 못할 때가 다반사고 그 정도도 서로들 잘했다고 만족을 한다. 왜냐하면 이 일이 어떤 오락프로의 게임처럼 3분 안에 정해진 여러 미션을 수행해야 하고 그 미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계산밖에 알 수 없는 변수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곳이 촬영장이며 그것이 조감독들의 가장 큰 숙제이다. 수많은 좋은 우연들은 제발 일어나길 기대해야 하고 반면 수많은 나쁜 우연들은 제발 생기지 않도록 준비하는 직업인 것이다. 어쨌든 잠시 거두절미하고 조금 길지만 영화 현장에서 감독과 스태프들에 대한 인식 변화에 대해 살펴보겠다. (주의: 아래 이야기는 주로 한국영화의 연출파트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시작하는 계기는 자신의 메시지와 감정을 영화라는 매체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리고 여러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영화와 감독(취향)이 생기고 결국 자신의 절절한 이야기를 하려면 반드시 감독이 되어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조금만 경험을 해보면 반드시 ‘영화 만들기=연출 감독’ 이 아니라 촬영. 조명. 사운드. 미술. 의상. 분장. 특수효과. 무술. CG. 마케팅, 투자, 배급 등등도 명백하고 중요한 영화 만들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처음 영화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나는 이런 영화의 요소가 좋다’라는 표현을 그 작품을 만든 영화감독이라는 상징적 대명사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만큼 영화라는 매체에서 감독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절대적인지이다. 그리고 그 감독의 위상은 지금보다 과거로 갈수록 혁혁히 높았다. 십여 년 전 감독이라는 분들은 나에게도, 연출부 선배들에게도 이 작품에 한해서는 전지전능하며 모든 파트를 통달했고 종종 왜 저렇게 찍을까? 라는 의심과 질문보다는 “아니야,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그는 알고 있을 거야.” “그는 내가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을 보고 느끼고 있을 거야.” 라는 기대감을 한 몸에 받던 종류의 사람이었고 현장의 모든 스태프들은 그가 원하는 그림과 의미를 만들어 내기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영화 현장이었었다. 물론 기본적인 이 개념은 어느 정도 지금 영화 현장에서도 같지만 어느 시점 이전과 이후로 이러한 절대자 감독을 바라보는 시선, 혹은 요구되는 것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의 가장 큰 화두는 바로 시간이었다. 이전에 흔히들 영화 공정을 설명할 때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그 안에는 많은 뜻이 담겨져 있다. 그 이전 시대의 시간 쉽게 말해 감독과 배우들이 어느 정도 시간에 있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념의 밑바탕에는 영화는 예술이며 그 예술을 위해 시간을 투자해서 노력하고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이 깔려있었다. 방금 어디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백을 하자면 나도 그랬고 많은 배우들, 영화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상상하는 도자기 굽는 노인이 있지 않은가? “할아버지,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웬만하면 이제 그만하고 잠 좀 잡시...” 와 동시에 멀쩡한 도자기들을 와장창 깨뜨려 버리던 수많은 할아버지들. 조금 비꼬기는 했지만 영화를 하는 사람들의 프라이드는 굉장했었고 영화를 찍는 배우들 또한 절대로 TV 드라마를 찍지 않았고 스태프들도 방세가 밀렸지만 드라마는 찍지 않는 호기를 부렸다. 그리고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 작품에 들어가고 갑자기 소품으로 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냉큼 여기 있습니다!” 하며 자신의 간과 쓸개까지 내놓을 것처럼 자기 파트의 완성도를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어쨌든 이러한 강력한 프라이드의 공감대가 확보한 것은 결국 촬영할 수 있는 많은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공을 들인다고 표현을 하는데 감독과 배우는 덕분에 현장에서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많은 리허설과 다양한 버전의 take를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찍고 나면 방금 찍은 화면을 모니터로 replay 했고 현장편집이라는 사람이 현장에서 컴퓨터로 OK 된 컷을 바로바로 앞뒤 컷들과 붙여서 보여줬고 그것을 보고서 감독과 배우, 많은 스태프들이 다시 수정할 사항을 이야기하고 누군가 한 번 더 찍자고 이야기하면 그에 따라 모든 파트의 사람들, 배우들이 화면 안을 더욱 정교하고 풍성하게 만들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 영화 현장만의 특화된 작업방식은 당연히 많은 오차를 줄였고 좋은 그림을 남길 확률을 높였기 때문에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의 퀄리티가 세계에서 인정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작업방식의 단점은 너무나 분명했다. 엄청난 시간과 노동을 요구했고 따라서 제작비, 배우의 개런티는 조금씩 증가했고 이해가 안 가지만 스태프들의 페이나 작업 조건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더욱 이해가 안 가지만 스태프들은 그러한 비합리성에 꿈과 낭만이라는 MSG를 쳐가며 스스로 파수꾼이 되려고 했다. (참고로 현재도 촬영장에서 모니터링을 하며 현장편집이 있지만 과거처럼 모니터링을 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스태프들의 프라이드는 아직도 여전하다고 믿는다) 그 이전 시대의 끝 그런데 시대가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애매모호 하게 이야기했던 그 이전 시대의 끝 이 다가온 것이다. 그 시작은 영화의 촬영 환경이 필름에서 HD 디지털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세계 상업영화의 변화에 따라 관객들은 루즈한 영화 보다는 빠른 전개에 기술적으로 다이나믹한 영화를 원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 뜻을 조감독 입장에서 해석하자면 컷의 길이가 짧아졌고 (오히려 현장에서 찍어야 할 전체 컷의 개수는 늘었다는 이야기) 기술적, 시각적으로 다이나믹한 영화(기술적으로 다양한 카메라 및 기타 장비가 필요해졌고 영화의 공정 자체가 좀 더 정교해지고 복잡해졌다는 것을 의미 = 제작 비용의 필연적인 증가), 끝으로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디지털은 필름처럼 많이 찍는다고 필름 값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찍는 카메라의 대수는 증가했고 오히려 그 이전 필름으로 찍을 때보다 현장에서 찍는 촬영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정리를 하면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가 촬영 기간 안에 찍어야 할 컷의 개수는 늘었고 감독들은 그 전보다 더 많고 다양한 앵글에 그림들을 필요로 했고 또한 다양한 장비와 특수효과, 특수분장, CG와 같은 특수 기술들이 영화 공정의 뒷줄에서 메인으로 포지션을 옮기면서 영화 공정의 제작비와 시간은 더욱 증가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은 이 과도기 라고 할 수 있는 기간에 스태프들은 여전히 그 이전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페이와 근무 조건으로 그 이전 시대보다 더욱 빠르고 영리하게, 그리고 오래~~~ 더 오래~~~ 일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A캠 한 대만 쓰던 촬영장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늘어난 컷의 양을 소화하기 위해 B캠(총 카메라 두 대)을 상용화하면서 효율성을 확보하려 했지만 오히려 더욱 작업 시간을 증가시켰다. 이유는 카메라가 2대라는 뜻은 한 번 찍을 때 스태프들이 커버하고 만들어야 할 공간이 더 넓어졌다는 뜻이며 또한 감독들은 여전히 본인들의 시간을 최대로 확보해서 많은 컷들, 다양한 쏘스를 남기길 원했기 때문에 B캠을 이용해서 약속된 콘티 외에 컷들을 찍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비극은 스태프의 숫자가 여전히 늘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100회차가 넘어가는 영화들이 우후죽순 등장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어제 D/N/D(하루 종일 찍고 다시 다음날 낮까지) 를 찍었네, 아 그래? 우리는 N/D/N(저녁에 시작해서 하루 종일 찍고 다음 날 저녁까지)를 찍었네. 아 그래? 우리는 요새 4방향 마스터로 찍어나가고 있네. (설명을 하자면 한 씬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제일 넓은 샷으로 그 씬의 처음부터 끝까지 찍는 샷을 마스터 샷이라고 하는데 보통 이 마스터 샷을 찍고서 같은 방향으로 여러 사이즈에 인물 샷을 찍기 마련인데 이러한 공정을 전혀 다른 4방향에서 다시 반복해서 찍는 것을 말함). 아 그래? 우리는 요새 8방향 마스터로 바뀌었다네. 껄껄껄 (설명하자면 주구장창 찍고 찍고 또 찍는다는 이야기). 뭐가 자랑이라고.. 경쟁도 이런 경쟁이 없듯이 찍어대던 시기가 한동안 지속 되었고 우리들끼리는 농담 삼아 컷이 세포 분열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훌륭한 스태프란 당시 최고 인기였던 박지성처럼 지치지 않는 심장으로 넓고 다양한 멀티 포지션을 군말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을 뜻했다. 정예부대라는 말들을 하며. (나도 어떤 작품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50시간 넘게 찍은 경험이 있다). 배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줄어든 상황에서 여러 번, 다양한 버전으로 찍어야 했기에 계속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고 즉각적으로 다양한 버전의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들이 선택되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얼마 안 가서 그 질기고 탄탄했던, 예술이라는 갑옷과 망토로 두르고 둘러서 견뎌왔던 많은 정예 요원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며 조금씩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이야기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경훈아. 살려줘 ” 이즈음의 시대부터 위에서 말한 시간 이라는 개념의 문제점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조금씩 영화 공정의 시간 이 감독과 배우, 그에 따라 혜택을 본 자본가들 위주에서 스태프들을 배려한 시간 으로 분배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전부터는 더욱 촬영시간과 비용을 세분화시킨 표준계약이라는 것이 의무 시행되면서 앞서 말한 그 이전의 시대에서 그 이후의 시대 로 넘어오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안 된 이야기. 그 이후 시대의 시간과 감독, 그리고 스태프의 전문화 그 이전 시대에 금기의 영역이자 감독의 특권이었던 촬영 시간이 줄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인 것이다. 영화 현장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웠던 제작비 최후의 마지노선. 스태프의 페이가 상승했고 그 스태프의 페이 계산이 예전처럼 통계약이 아니라 시간당 페이, 혹은 적어도 월급으로 계산하게 되었으며 노동법에 기준으로 정해진 노동시간을 넘을 경우에 OVERCHARGE 페이를 지불하게 되었다. 즉 과거, 스태프들의 프라이드로 확보되었던 시간에 대해 좀 더 정직하고 명확한 계산을 하게 된 것이다. 시간=돈. 이제는 그 누구도 얄짤 없음. 꽝꽝. 그러자 시간에 구애 없이 몇 번이나 곱씹고 생각해서 찍던 감독의 자리가 지금은 안 그래도 찍어야 할 컷도 많고, 그 컷의 기술적 난이도도 높아졌으며 거대한 숙제처럼 그날 분량을 어떻게든 찍어 내야 함과 동시에 영화 내적인 퀄리티의 성취, 외적인 상업적 흥행에 책임을 지는 극한직업으로 바뀌게 되었다. 스태프들 또한 근무와 보수의 조건이 좋아졌지만 마찬가지로 작업의 시간은 줄어들었고 그들 또한 시간 안에 능력을 발휘해야 할 전문성을 더욱 요구받게 되었다. 또한 100%의 퀄리티 보다는 80%의 퀄리티를 만들면서 정해진 스케줄을 소화해내는 것도 스태프의 미덕이 되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 특수효과, 특수분장, CG, 다양한 액션과 특수 장비의 파트가 영화의 양념이 아니라 주재료가 되면서 지금의 영화 만들기는 이전처럼 연출 감독 본인이 직접 쉽게 통제하고 개입할 수 있는 덩어리의 크기를 넘어선 지 오래다. 전문 지식이 필요한 이런 파트들은 어느 정도는 그 파트의 전문가를 믿고 가야 하는 게 현실적이며 모든 것을 감독이 깊숙이 개입해서 디자인하기에는 기본적인 연출을 할 시간도 벅차다. 이 과정은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좀 더 분업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감독만 바라보던 조감독의 역할도 좀 더 다양해진 스태프들을 바라보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들과 감독의 생각을 잘 공유하고 그들이 좋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앞에서 말한 수많은 좋은 우연들을 기대하고 반면 수많은 나쁜 우연들을 막을 수 있는 지금 시대에 방안이다. 또한 감독님을 위한 길이 기도하다. “영화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무엇보다 우선 내 자신을 위해 만든다. 내가 가지고 놀 멋진 장난감 상자 같다. 물론 아주 비싼 장난감 상자라서, 때로는 그렇게 재미있게 노는 게 부끄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누구보다 나를 위해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면 정직하지 않은 일이다. “ - 책,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 에서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말 멋진 말이며 100프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 상업영화에서 개인의 취향과 시간을 구애받지 않고 찍을 수 있는 감독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시대가 변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 분배의 문제. 감독을 포함한 전문화, 분업화된 수많은 스태프들이 정해진 시간과 예산 안에 최대한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효율적인 작업환경과 시간을 제공하며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 촬영 준비(프리 프로덕션), 본 촬영(프로덕션)을 위해 더 정교하고 실전적인 스케줄을 짜고 운영해 나가는 것. 그것이 지금 조감독의 가장 중요한 일이자 미덕이며 과거에 비해 더욱 전문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