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생
- 감독
- 장주선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조예주, 박희은, 권민희, 김령아, 김인혜, 조한탁, 김선빈, 이다훈, 황정선, 이효미
영화배우 이대근 (李大根)이라면 흔히 < 변강쇠 >를 연상하기 일수이다. 그만큼 그의 우람한 몸과 익살스런 연기가 어필,35년째 연기를 하면서 대명사처럼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정통 연극배우로서 60년대 초 <노틀담의 곱추>로 인기를 모았던 인물이라는 것은 전문가들 아니면 잘 모르는 역사. 연극이나 영화 모두 연기자라면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예술이지만, 영화는 배우가 흥행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관에 자신이 출연한 작품이 막을 올리면 유난히 노심 초사한다. 사실 연기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자기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가 연극을 할 때는 흔히 말하는 학사 엘리트들이 풍미할 때 였다. 해가 지면 서울 사직동에 있던 대포집 '대머리집'에 들르는게 당시 문화 예술인들의 낭만이었다. 여기서 연극에 대한 품평 등이 나오곤 했는데 그가 주연한 <노틀담의 꼽추>의 미국영화 주역을 맡았던 앤터니 퀸 못지 않았다는 연기평과 함께 그의 걸죽한 캐릭터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앤터니 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나 할까. 연극을 걸쳐 TV탤런트를 경험하다가 영화에서 자리를 굳힌 이대근 은 서울 태생이다. 능안리 라고도 불리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철저한 반공투사로 당시 반공청년단 단장. 그가 175센티의 82킬로가 되는 거구를 자랑하는 것도 타고난 것 일게다. 연극에 미쳤던 젊은이답게 그는 서라벌예대 출신이다. 연기자가 된 것은 63년. 졸업하자마자 이듬해에 KBS7기와 동시에 MBC개국으로 옮겨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영화에 데뷔한 것은 68년 최무룡 감독의 < 제3지대 >. 이후 지금까지 약 2백70 여 편에 출연해왔다. 그러니까 데뷔 35년째인 셈이다. 그의 출연작을 보면 대략 3∼4캐릭터로 분류할 수 있다. 신상옥 감독이 어려웠던 시절에 제작에 만족해야 했던 '김두한'시리즈 5편의 액션물 주연및 74년부터 81년까지 무려 주연한 액션물 1백여 편이 첫째. 그런가하면 그에게 상복을 안겨준 토속물에서의 연기도 주류를 이룬다. 80년 대종상주연상을 안겨준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87년 역시 대종상 조연상을 받은 < 감자 > 한국일보 백상대상의 주연상을 수상한 < 심봤다 > 영화평론가상을 따낸 < 뽕 > 등이 이들 작품. 여기에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 장마 >(1979) < 거지왕 김춘삼 >(1975, 이혁수 ) < 화려한 외출 >(1977, 김수용 ) < 연산군 >(1987,이혁수) 등이 내노라할 영화들이다. 그러나 이대근 을 일약 스타로 만든 작품은 < 변강쇠 >라고 단언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등장했을 당시인 86년. 제작자였던 고려영화사 사장 박태환 씨는 우리의 고전 중 기막힌 소재를 찾았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바로 이 작품이 판소리로 유명한 「변강쇠뎐」.이를 당시 신인이나 다름없었으나 오랜 현장 경험으로 인정받고 있던 엄종선 감독에 맡겨져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당초 엄감독은 이 영화를 작품이 지닌 특유의 해학과 섹슈얼 무브먼트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가에 무척 고민했다. 이는 작품에 잘 나타난다. 주인공인 변강쇠 역의 이대근 의 몸매가 거구임을 표현하기 위해 의상인 한복 속에 솜을 잔뜩 집어넣어 과장한 것이라든가 상대역이었던 옹녀 역의 원미경 의 캐릭터를 요염의 극치로 표현한 것 등이 탈영화적이면서 풍자 짙게 만들어 관객의 호응을 얻어내는 계기가 됐다.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변강쇠의 섹스가 엄청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높은 절벽에서 그가 소변보는 장면을 풀커트로 표현하면서 소방차를 동원, 마치 폭포처럼 쏟아지는 오줌 줄기로 표현한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꼽을 잡게 한 것은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영화가 대히트 하면서 이대근에 대한 이미지도 크게 바뀌었다. 당연히 속편 제작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이대근이 아연 실색,주인공이 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생각은 자신에 대한 이미지 관리에 커다란 장애를 각져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러나 다행히도 이후 방영하기 시작한 MBC TV 드라마 <설중매>의 홍윤성 역을 맡아 이미지를 다소 바꾸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배역 역시 술을 독채 마시고 힘이 장사였던 것 이어서 거한의 인상을 지우기에는 쉽지 않았다. 정상급을 구가하는 엄청난 톱스타가 아니면서도 원미경 이미숙 강수연 등 숱한 미녀스타들과 공연한 그도 이제 60세.(43.7.1) 그는 젊었을 당시의 이미지와 달리 지금은 서울에서 혼자 사는 홀아비 아닌 홀아비. 82년 부인과 3딸이 미국에 이민, 고생 끝에 안정을 찾은 교포이기도 하다. 부인이 억척스럽게 워싱턴 시내의 공공기관의 구내매점을 운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그곳 정문에 커다랗고 멋진 스토어를 경영하고 있다. 3딸 역시 효녀 중 효녀. 두 딸은 이미 박사가 되어 정부의 중책을 맡고 있고 막내딸은 대학 졸업반. 3딸 모두 중·고교는 물론 대학도 장학생이었다. 이대근 역시 워싱턴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부지런쟁이. 교포들의 희노애락은 물론 각종 문화 활동에도 나서고 있다. 그의 집은 워싱턴에서 조금 떨어진 버지니아 주택가. 숲 속에 가려진 3층집으로 얼마 전 타계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미국을 왕래한 것도 몇 번만 합치면 5백 번이 된다고 한다. 뉴욕 케네디 공항을 경유해서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그에게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하도 자주 드나드니까 툭 하면 꼬치꼬치 캐묻는 게 당연한 일. 궁여지책 끝에 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비디오 테이프를 가져가 시비를 거는 공항 관리들에게 선사하며 자신이 한국의 톱스타라고 으시대곤 했는데 이게 먹혀들어 이제는 무사 통과라고 껄껄 웃어 제키기도 한다. 지난 1월말인가. 그를 만나러 간 세종문화회관 커피숍에서 있었던 일. 베이지색 반코트에 아무 치장 없이 나타난 그를 보자마자 여기저기 앉았던 여인들이 “안녕하세요”하며 인사하지를 않는가. 아직도 인기가 대단하다고 했더니 역시 껄껄 웃고 만다. 그 바쁜 와중에서도 85년부터 배우협회이사. 영화인 협회 부회장을 맡아 뒷바라지도 해온 이대근 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하다. 얼마 전 히트한 송강호 주연의 < 반칙왕 >이 충무로에서 입에 오르내릴 때 그를 잘 아는 영화인들은 10여년전이라면 송강호 역할은 이대근이 적역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근은 본격적으로 레슬링을 한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우리배우들 중 레슬링을 한 인물을 꼽는다면 국회의원이기도한 신영균 과 이대근일 것 같다. 우락부락한 이미지답지 않게 그는 성경을 주제로한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게 소망이라고 슬며시 말하곤 한다. 이대근 은 세상에서 연기만큼 좋은게 없단다. 일단 작품이 이뤄지면 돈도 가난도 미움도 아픔도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 최근 작품은 < 해적, 디스코왕 되다 >. 비록 주연작은 아니지만 아직도 영화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자체가 만족스럽다고. 이제까지 출연한 작품 가운데 가장 애정이 가는 영화는 <김두한> 5편 모두와 <연산군>. TV에서 시작했으나 신상옥감독에 의해서 영화에 매력을 느껴 이제까지 사명감을 갖고 임해왔다는 그는 군생활에서 국립묘지 초대나팔수로 지냈던 만큼 자신을 헌신하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지금까지는 훈련과정에 불과하다는 것. 앞으로는 < 벤허 > < 나사렛 예수 >와 같은 영화를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연기자가 ,그것도 35년씩이나 연극 TV ,영화를 넘나들며 수백편씩 출연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보통 인생들도 외길로 인생을 초지일관한다는 것은 산을 깍는것보다 어렵다는게 통례. 이대근의 면모를 보면 아직도 젊음이 펄펄 살아 넘치는 30-40 대의 느낌이다. 그러나 세월은 어쩔수 없는것인지 그의 자태에서도 언뜻언뜻 연륜을 읽을 수 있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감출 수 없다. 그의 이 같은 느낌은 세월 탓만은 아닐 것이다. 급변하는 세태속에서 자기자신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것인가 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아닐까. 요즈음 젊은이들이 너무도 쉽게 스타가 되거나 인기에 영합하는 것을 보면 오랜 연륜과 인고의 자기 연마 속에서 꽃을 피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 인가를 알 수 있겠다. 김량삼(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43년 7월 1일 서울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졸업 1968년 최무룡 감독 < 제3지대 >로 데뷔 <주요 경력> 연극 : <성웅 이순신>, <노틀담의 꼽추>, <고려인 떡쇠> 등 약20편 방송 : <갈대>, <거상 임상옥>, <조선총독부>, < 수사반장 > 등 500여 편 영화 : <김두한>, < 거지왕 김춘삼 >, < 장마 >, < 심봤다 >,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 뽕 >, < 변강쇠 >, < 만날 때까지 > 등 300여 편 <수상 경력> TV연기상, 인기상, 한국일보상, 영화평론가상, 대종상주연,조연상, 영화인협회표창장, 국제영화상 등
최불암 (崔佛岩)의 특징은 어질고 수더분한 데에 있다. 그의 울림이 있는 음성과 여유로운 절제력은 자연인으로서도 신뢰감을 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외형상의 느낌은 스크린 이미지와도 거의 일치된다. 그가 지금까지 형상시킨 많은 인물의 공통점은 소시민적 친화력이다. 관객의 눈높이에서는 그 어떤 비밀이나 속마음을 털어놔도 포용해 줄 것 같은 격의 없는 인간미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넥타이를 반듯하게 맨 정장형의 신사와는 거리가 멀다. 설령 정장을 했더라도 포마드 따위를 발라 멋을 냄이 없이 그저 두어 번 머리를 쓸어넘겨 빗질 시늉이나 했음직한 그런 모습이다. 그의 연기를 지켜 보노라면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후반까지 우리나라의 스크린을 누볐던 명배우 김승호 를 연상케 한다. 최불암 은 앞의 선배 연기자가 지녔던 서민적 요소와 투철한 직업의식, 인물을 꿰뚫어 보는 해석과 형상력, 그리고 승부 근성을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김승호가 상대를 제압하려는 독주의식과 신파 연극 출신이 갖기 마련인 ‘오버 액션’의 폐단을 버리지 못한데 비해, 그는 곰삭은 연기로 사실적인 표현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두상이 큰 김승호와는 달리 174센티의 키에 알맞은 신체적 균형감도 하나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선배 배우가 지닌, 추월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보수의식, 강인한 카리스마가 다소 밀린다는 것이 아쉬움이라 할 것이다. 최불암 은 1940년 6월 15일 인천 동구 금곡동 1번지에서 사업가인 최철 (崔鐵)과 대한제국 때 궁내 악사를 지낸 어른의 딸인 이명숙(李明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영한(英漢)이다. 아버지는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후 귀국, 2년 반의 준비 끝에 인천일보사와 건설영화사를 설립했다. 첫 사업으로 당장 이윤이 나온다고 보장할 수 없는 언론과 영화사를 차린 걸 보면 그의 아버지 최철은 문화에 대한 인식과 소양이 매우 높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열악한 해방기의 환경 속에서 두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안종화 감독의 < 수우(愁雨) >(1948 · 김소영 , 전택이 주연)와 안진상 감독의 < 여명(黎明) >(1948 · 이민자 , 이금봉 주연)이 바로 그것이다. <수우>는 어느 항구의 밀수패 두목에 대한 아내의 끈질긴 만류를 그린 경찰 홍보용 극영화이고, <여명>은 어촌을 배경으로 한 밀수 근절 계몽 영화이다. 뒷날 문교부 제정 제1회 우수국산영화상 작품상을 받은 < 곰 >(1959 · 조긍하 감독)과 < 내일 없는 그날 > (1959 · 민경식 감독)등을 만든 아카데미 영화사 대표 최도선 (崔道善)은 최불암 의 큰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버지는 < 여명 >의 개봉 3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서른 다섯, 아들이 여덟 살로 인천 신흥국민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날벼락 같은 아버지의 죽음에 미처 정신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소년은 영정을 안고 시사회장에 앉아 있어야 했다. 영화라는 존재를 어린 나이에 시사회장에서 먼저 알게됨으로써 앞으로의 인생을 예고한 셈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여명 >의 시사회를 가졌던 동방극장 지하실에 ‘등대’라는 뮤직홀을 차린 것은 얼마 뒤였다. 덕택에 그는 많은 영화를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 마음의 고향 >과 같은 한국 영화는 물론, < 인생 유전 > < 정부 마농 > 등 유명한 외국 영화도 그중 하나였다. 그가 서울로 온 것은 중앙중학교에 입학한 뒤였다. 연극에 대한 열망이 일기 시작한 것은 같은 계열인 중앙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연극반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그때 동기생 가운데는 극작가가 된 김기팔 과 TV연속극 <아씨>로 잘 알려진 이철향 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생이 된 김기팔은 최불암 이 연극 연출가가 되기 위해 서라벌예술대학 연극과에 들어간 이후에는 미아리의 서라벌예술대학까지 찾아와 도강을 하곤 했다. 이때 교수들이 유명한 이광래 (극작가), 김규대(연출가), 이원경 (연출가)등이었다. 그러니까 김기팔은 철학과에 들어갔으나 친구가 다니는 남의 대학에서 돈 안들이고 극작술을 익힌 셈이다. 최불암 은 서라벌예대에 다니는 동안 연출 경험을 쌓았다. <저 하늘에도> <오셀로>등이 이 무렵 펼쳐보인 꿈의 카드였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연출에의 희망을 접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예정된 <햄릿>의 연출이 마땅히 맡길만한 주인공 감이 없어 스스로 맡는 바람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그는 2년제인 이 대학에 다니는 동안 신협의 중요한 공연은 거의 놓치지 않고 보았다. <처용의 노래> <다이알 M을 돌려라> 등이 이때 관람한 연극이었다. 김동원 , 최은희 와 같은 연기자들을 특히 좋아했다. 영화배우로는 김승호 에게 매력을 느꼈다. 큰아버지가 제작한 < 곰 >, 이병일 감독의 < 시집가는 날 >(1956)을 볼 때 더욱 그러했다. 한양대학교 영화과로 진학한 것은 반년을 쉰 1960년이었다. 이철향 , 허동웅 등 친구들과 함께 연기 실력을 인정받고 ‘반장학생’으로 들어갔으나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졸업을 1년 반 정도 남기고 제작극회(1962), 국립극장(1965~67년), 자유극장(1969~71년) 단원으로 무대에 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에서 눈여겨 본 로렌스 올리비에, 알렉 기네스, 말론 브란도 등의 연기를 떠올리며 데뷔작인 4·19 소재의 연극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1960 · 차범석 작·연출)의 주인공을 비롯, <산화>(차범석 작), <따라지의 향연> (1966 · 김정옥 연출)등에 주요 역을 맡아 열연하였다. 특히 <따라지의 향연>의 연기는 그를 주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여세 속에서 1976년 KBS TV에 특채로 들어가 <수양대군>의 김종서 역을 맡음으로써 보다 가깝게 대중과 친숙하게 되는 안방 극장의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후 <새엄마> <아버지> <한백년> < 수사반장 > 등 연속 TV드라마에서 확고한 위상을 다지고, 최장기 드라마 < 전원일기 >에서 남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한국적인 인고의 아버지 상, 어질지만 이 시대가 요구하는 줏대있는 노인의 전형을 창출해 내었다. 그는 연극과 텔레비전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최불암 이 스크린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67년 신상옥 감독의 < 마적(馬賊) >에 의해서였다. 일본 헌병대에 감금된 독립단원을 석방해 준다는 조건으로 비적이 납치해 간 영국 영사의 딸을 구해내는 한국 독립 투사들의 활약상을 담은 이 영화에서 그는 영사 딸(비바 프린통)의 상대역을 맡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 만종 >(1970 · 신상옥 감독), < 내일 없는 우정 >(1970· 김시현 감독), < 사나이의 멋진 이별 >(1971· 김효천 감독), < 잊을 수는 없겠지 >(1974· 김진태 감독), < 파계 >(1974· 김기영 감독), < 왕십리 >(1976· 임권택 감독), < 빨간 구두 >(1975· 이성구 감독), < 정말 꿈이 있다구 >(1976· 문여송 감독), < 가족 >(1976· 이혁수 감독), < 졸업생 >(1976· 김기 감독), < 문 >(1977· 유현목 감독>, < 세종대왕 >(1978· 최인현 감독), < 로맨스 그레이 >(1979· 문여송 감독), < 달려라, 만석아 > (1979· 김수용 감독), < 최후의 증인 >(1980· 이두용 감독), < 사람의 아들 >(1980·유현목),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장호 감독), < 길소뜸 >(1985·임권택 감독), <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 배창호 감독) 등 35편 내외에 출연하였다. 그가 주로 연기한 것은 노인 역이었다. 아버지 역이나 늙은 남편 역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현상은 대학 시절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다보니 키스신이 나오는 장면은 한두 편 손꼽힐 정도였다. 그동안 그가 소화해낸 인물 유형을 보면, 결혼을 앞두고 교환 살인을 제의받지만 거절하는 사나이( 사나이의 멋진 이별 )나 아내의 입원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워하는 중학교 교사( 졸업생 )등을 제외하고는 중년 이상 세상의 풍상을 겪은 캐릭터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아내를 잃고 세 남매와 함께 외롭게 사는 중학교 교장(父), 전화 속에 헤매던 고아를 중으로 만드는 노스님( 파계 ), 고층 공사판에서 죽으려는 벙어리 소년을 구출하여 돌보는 중년의 형사, 자식을 찾아 상경했다가 역경을 겪고 귀향하는 시골 영감( 가족 ), 한라산에 은거중인 가야금의 명인( 문 ), 청백리의 귀감이 된 조선조의 황희 정승( 세종대왕 ), 가정에 충실했으나 늦바람 난 중진 교수( 로맨스 그레이 ), 시골로 내려와 손주와 함꼐 고향 찾기 운동을 돕는 할아버지(달 려라 만석아 ), 지리산 공비의 딸을 돌봐 아내로 맞아들이는 모진 시련의 노인 황바우( 최후의 증인 ), 서울 변두리의 개발지역에 기생하는 중년의 건달( 바람 불어 좋은 날 ), 그리고 수줍음 타는 대학생 아들의 조언자인 < 기쁜 우리 젊은 날 >의 속깊은 아버지와 같은 경우가 이에 속한다. 하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 가운데 가장 돋보였던 것은 < 문 >(1977)과 < 세종대왕 >(1978), < 달려라, 만석아 >(1979), < 최후의 증인 >(1980)등의 연기였다. 이중 < 문 >을 제외하고는 세 편이 각기 대종상 남우조연상(세종대왕), 대종상 남우주연상(달려라, 만석아), 과 제1회 영화평론가협회상 남자연기상(최후의 증인)을 수상함으로써 객관적인 평가를 받았다. 최불암 은 이처럼 큰 내색없이 기대해온 연기의 성과를 거둔 다음에야 뒤늦게 미루어온 한양대학교의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1980년 봄이었다. 그동안 그는 2년반의 열애 끝에 1970년 영화 < 생일 없는 소년 >에도 출연한 바 있는 인기 탤런트 김민자 (金敏子)와 결혼, 1남(東歷:33세), 1녀(東妃:27세)를 두었다. 이로써 그는 2대째 영화와 관련된 명실상부한 예술 가족을 이루게된 것이다. 그러나 은성 주점을 경영하며 유명 문화인들을 끌어 모으고 풍요로운 명동 문화시대를 구가케 했던 어머니 이명숙 여사는 유명을 달리했다. 아쉬운 것은 1987년 < 기쁜 우리 젊은 날 > 이후 16년째 그의 질퍽한 연기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김종원 (청주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40년 6월 15일 인천 출생 1963년 한양대학교 영화학과 졸업 <주요 경력> 중앙국립극단, 탤런트, 극단 현대예술극장 대표 14대 국회의원, 호서대 연극영화과 교수 현재 웰컴 투 코리아 시민협의회 회장, 한국복지재단 후원회장 <수상 경력> 대통령훈장, 문화공보부 장관상, 대한민국 방송상 주연상, 대종상조연상 한국복지재단(대통령 국민목련장) 외외 50여 수상 <주요 작품> 세종대왕 , 달려라 만석아 , 최후의 증인 , 파계 , 여마적 , 문 , 의사 안중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