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홍련
- 감독
- 박윤교
제일극장은 1930년 종로 4가에 미나토좌(ミナト座)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32년 제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까지 존속했던 영화관이다. 제일극장의 기원은 1922년 설립된 권상장 여흥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미나토 키쿠치(港谷久吉)가 세운 권상장은 종로 4가 대로변 780평 부지에 서양식 2층 벽돌건물로 만들어 진 것으로 1층은 130여 개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고, 2층에는 전시장과 함께 무료여흥장이 있었다. 조선인 고객들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설치된 2층 무료 여흥장에서는 조선의 구극 및 중국연극 등이 공연되었다. [자료] 권상장 개관 광고(《동아일보》, 1922.06.09) 권상장으로 큰 성공을 거둔 미나토는 권상장이 들어선 일대를 경성의 유흥가로 만들기 위해 종로 권상장의 개축과 함께 권상장 뒤편에 부지 330평을 마련해 미나토좌라는 영화관을 신축했다. 미나토진지(賑地)라 불린 이 일대에는 영화관 이외에 57개의 점포를 가진 미나토데파트, 카페 아홉 곳이 늘어선 미나토미인가(美人街), 800여평 규모의 댄스홀인 미나토홀 그 외 놀이시설이 설비된 미나토유원지 등이 설치되었다. 미나토좌는 1930년 6월 9일 활동사진관 설립 허가를 맡은 후 공사비 약 1만5천원으로 권상장 뒤편에 건설되었다. 8월 24일 개장한 미나토좌의 개관 프로그램으로는 스즈란좌(スズラン座) 여배우들의 댄스, 나운규 일좌의 소극 <아버지>가 공연되었다. 미나토좌에서는 개관 직후 조선인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영화를 상영하는 것 이외에 극장 내에 신극부를 두어 연극을 공연했다. 개관 초기 미나도좌 신극부는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운규 일좌가 포진하고 있었다. 이 극단에서는 최승일과 이백수가 연출을 맡았고 나운규는 직접 무대에 나와 연기를 펼쳤다. 그 외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연기를 함께 했다. 대표적인 공연작품으로는 1930년 9월 초 상연된 오토 뮬러의 〈하차〉가 있다. 이 작품은 최승일 연출, 심영, 석금성, 나운규, 김순희, 이호영, 이명우, 임운학 등이 출연했다. 9일부터는 이백수 연출, 나운규, 석금성, 심영 주연으로 <산중의 일야>가 상연되었고 18일부터는 루 메루덴(Lu Märten) 작 〈탄광부〉(Bergarbeiter)를 각색한 최승일 연출의 〈산〉이 심영, 나운규, 석금성, 이영철, 박갑득, 김종하, 박종, 이호영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9월 23일에는 가네코 요분(金子洋文)의 <언덕을 오르는 사람>이 엄시중, 심영, 나운규, 석금성, 김평숙, 김덕희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고 10월 1일에는 업튼 싱클레어(Upton Beall Sinclair) 원작의 <2층의 사나이>가 리백수 번역, 나운규, 심영, 석금성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공연하면서 미나토좌는 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보다는 연극 공연장으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미나토좌의 나운규 일좌 공연은 사상성을 이유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침체했던 미나토좌는 강천희가 이끄는 중외영화사가 직영하며 중외극장이라는 단체의 좌익극을 표방한 공연을 하게 된다. 1931년 12월 18일부터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공연한 작품은 <선로공부의 죽음>, <사람 좋은 형리>, <사랑이 깊어 갈 때>와 같은 작품이었는데 김유영은 중외극장이 공연한 작품들에 대해 프로극단을 표방한 신파극단과 다름 아니라는 날선 비판을 했다. 강천희의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철수한 이후 미나토좌에는 토월회의 후신으로 새롭게 조직된 박승희의 태양극장이 공연을 펼쳤다. 1932년 2월 1차 공연에서는 <명나라 원나라> 등이 공연되었는데 과거 토월회 출신들로 나운규 일좌에서 활약하던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포진해 있었다. 1932년 4월 12일 미나도좌는 2층을 개축한 기념으로 이름을 제일극장으로 바꾸었다. 제일극장에서는 증축낙성을 기념하여 조선연극사의 신춘대공연이 펼쳐졌으며 이어 6월 말부터는 태양극장의 2차 공연으로 〈춘향전〉을 비롯해 <대도전>, <애사> 등이 상연되었다. 이중 <춘향전>은 1925년 토월회에서 상연하여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박승희의 태양극장이나 조선연극사와 같은 조선인 극단의 공연을 비롯해 다양한 무대극을 공연하면서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던 제일극장은 1935년 3월 23일 오후 7시 15분 시사용 영사실에서 발생한 영사기사 이홍우의 실화로 전소되었다. 이홍우는 전기 휴즈가 끊어져 잠시 암전 된 사이에 성냥불을 켰는데 불이 필름에 옮겨 붙어 삽시간에 극장 전체를 태워 버렸다. 극장주 미나토는 화재로 전소된 제일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한다. 1935년 8월 23일 화재 발생 5개월 만에 제일극장의 공사를 마무리 짓고 낙성식을 거행했다. 흥행은 그 다음 날인 24일부터 재개했다. 화재 이후 제일극장은 영화상영에 주력했는데, 주로 상영된 지 오래된 필름들을 상영하는 등 영화관으로서는 2번관에 머물렀다. 1935년 동양극장이 들어서 연극 붐이 일기 시작하자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9년 동양극장의 주인이 바뀌게 되면서 발생한 내분으로 지배인 최상덕을 비롯해 연출자 박진, 극작가 송영, 임선규, 장치가 원우전, 배우 황철, 서일성, 양백명, 문정복, 박영신, 차홍녀 등 단원들이 대거 탈퇴하여 극단 아랑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를 제일극장으로 삼으면서 서울 동쪽의 제일극장, 서쪽의 동양극장이 대표적인 연극 공연장으로 각축을 벌이게 된다. 아랑의 첫 공연은 1939년 10월 부민관에서 공연된 임선규 작 <청춘극장>이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아랑에서는 부민관과 제일극장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1940년 1월의 첫 공연의 경우 부민관에서 임선규 작 <북두칠성>, <빈부>를 공연한 후 11일부터는 제일극장에서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으며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온 뒤 4월 28일부터는 송영과 임선규가 함께 쓴 <김옥균>의 공연이 제일극장에서 시작되었다. [자료] 1930년대 후반 제일극장(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제일극장은 아랑의 근거지였지만 다른 연극단체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0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옥루몽>을 비롯한 창극을 공연했으며 같은 해 6월 최남주가 세운 조선영화사 계열의 조선무대가 조직되어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조선무대에서는 1회작으로 송영 작 <방랑시인 김삿갓>을 안종화 연출로 공연했으며 2회작인 안종화 연출, 최독견 각색의 <춘향전> 역시 제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제일극장은 연극전용관으로 바뀌어 저렴한 입장료로 많은 관객들을 동원했다. 1943년 당시 1급 영화관들이 80전 내외의 저렴한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던 가운데, 제일극장은 입장료가 25전으로 가장 저렴했다. 일제 말기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악극, 창극 등을 공연했는데 대표적인 공연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월 평양대화숙 부설 청명극단에서 윤태순 작, 마완영 연출, 강호 장치의 <산울림>을, 라미라가극단은 1944년 10월 신추공연으로 이부풍 작, 김용환 곡의 <오동나무>를 공연했다. 특히 제일극장은 다른 극장들보다 창극단의 공연이 활발했는데 김연수, 오태석, 정남희 등으로 구성된 조선창극단은 1943년 11월 1일부터 박진 연출로 <장화홍련전>을 공연한바 있다. 조선창극단은 주로 이동연예단으로 활동했는데 공인극단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1945년 5월 2일부터 <어촌애화>, <장화홍련전> 등을 제일극장에서 공연했다. 그 외에 창극단 화랑(1940.12)과 동일창극단(1945.4) 등도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제일극장은 해방 후 영화업자 이창용이 적산관리인이 되어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창용이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주인이 없다가 전쟁 중 파괴된 광장시장 재건에 뛰어들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정재가 관리하던 것을 임화수가 인계받으며 이름을 평화극장으로 바꾸었다. 이어 임화수가 4월혁명 이후 체포되고 5.16 직후 사형 당하게 되자 이름을 한일극장으로 변경한 후 1977년까지 영업하다가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백두산, 「식민지 조선의 상업.오락 공간, 종로 권상장(勸商場)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42호, 2013.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미나토좌 외관 《조선신문》, 1930.8.23. [자료] 《 매일신보 》 , 1922.3.10. 도시의 미관 , 조선의 경성에 내선융화적의 공영과 호락기관 ( 互樂機關 ) 의 설비 , 장래 조선박람회에 최 ( 最 ) 히 적응 준비 , 조직적 백화상점 ( 百貨商店 ), 종로 권상장 매점신입 ( 賣店申込 ) ( 전략 ) 본관의 계상 ( 階上 ) 에ᄂᆞᆫ 내외의 미술품 병 ( 並 ) 상공업의 진로를 개척할 참고자료를 진열종람 ( 縱覽 ) 케 하며 우 ( 又 ) 무료여흥장 ( 無料餘興場 ) 을 설 ( 設 ) 하야 활동사진 기타의 오락기관을 사시 ( 四時 ) 일반에게 관람케 하ᄂᆞᆫ 등 원 ( 願 ) 히 경제적 오락적으로 조직ᄒᆞᆯ 뿐 아니라 특히 사회적으로 생활의 안전과 위안을 여 ( 與 ) 할 최진 ( 最珍 ) 최신의 차종 ( 此種 ) 의 상기관 ( 商機關 ) 은 아즉 일즉이 동양에서 기 ( 其 ) 유래를 견 ( 見 ) 치 못한 전대미문의 파천황의 사업이며 연 ( 然 ) 하고도 상 ( 常 ) 권상장의 위치는 문 듯 조선박람회에 적응키 위하야 각 방면에서 오락기관을 망라하야 잇는 조선유일 낙천지에 인접하는 즉 경성종로 사정목 조선인 상공업의 중추지에 실지하고 동대문시장과 상사 ( 相俟 ) 하야 은진 ( 殷賑 ) 을 극 ( 極 ) 하고 동아 ( 東亞 ) 의 일각에 신진의 대도시를 과 ( 誇 ) 할 조선수도에 일대미관을 정 ( 呈 ) 할 뿐 아니라 ( 후략 ) [자료] 《 매일신보 》 , 1930.6.12. 이현 ( 梨峴 ) 에 신설될 활동사진관 , 건축허가가 낫다 , 칠월말 개관 부내 종로 사정목 일번지 ( 鐘路四丁目一番地 ) 에 있는 권상장 주인 항구길 ( 勸商場 主人 港久吉 ) 씨는 전기 권상장의 단층 ( 單層 ) 일부를 헐고 부지 ( 敷地 ) 삼백오십평에 활동사진상설관 ( 活動寫眞常設館 ) 을 건축코자 소관 동대문서 ( 東大門署 ) 를 거처 경기도로 건축허가를 제출하였든 중 지난 구일부로 이의 허가가 나와 즉시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는바 이번 새로 건축될 활동사진 상설관은 공비 일만오천원으로 오백명 수용의 연와제 단층 ( 煉瓦製 單層 ) 으로서 늦어도 칠월 말경에는 개관하게 도리 터이라 하며 간간히 보는 바 권상장 이층에서 흥행되는 구극 ( 舊劇 ) 기타 중국연극 ( 中國演劇 ) 등도 새 극장에서 개연을 보게 되어 일반관객의 환영을 밧게 될 터이라 한다 . [자료] 《 동아일보 》 , 1935.3.24. 작석 ( 昨夕 ), 제일극장서 영사 중 돌연 발화 , 필름의 폭발로 내부가 전소 , 이백 관객은 전부 구출 , 시사실서 발화 휠림에 인화 폭발 이십삼일 오후 칠시 십분부터 종로사정목 일번지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돌연 발화하야 삽시간에 전관 이층 건물이 거의 전소되고 이어서 그 부근 큰 상점에 연소될 염려가 있어 방금 현장은 큰 수라장을 이루엇고 소관 동대문경찰서는 물론이오 시내 각서는 경찰부의 총 지휘아래 각 소방서 총출동으로 대경계중이다 . 아직도 ( 오후 칠시 반 ) 맹렬한 불길에 쌓이어 화광 속에 들어있는 일대의 혼잡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수라장이다 . 전차 자동차는 종로 3 정목 일대부터 동대문까지 완전히 차단되어 잇다 . 원인은 이날도 평시와 같이 오후 칠시부터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이날 밤은 약 이백명의 관객이 모였는데 첫째 사진을 상영중에 시사실에서 발화하여 필름에 곧 불이 당기자마자 폭발되어 발화한 듯 하다하며 동 팔시에 진화되었는데 원인 손해를 알 수 없고 이백 관중은 전부 구출되었다 한다 . ( 이상 호외 ( 號外 ) 재록 ( 再錄 )) [자료] 《 동아일보 》 , 1935.8.25. 제일극장 재축 ( 再築 ) 금년 봄에 화재로 인하여 건축중이든 부내 종로 ( 鐘路 ) 5 정목 제일극장 ( 第一劇場 ) 은 그동안 개축중이든 바 최근에 준공이 되어 금 24 일에 개관식을 거행하고 일반 관람은 명 25 일부터 개관키로 되었다는데 관람료는 역시 10 전 균일의 대중경영으로 한다고 한다 .
제일극장은 1930년 종로 4가에 미나토좌(ミナト座)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32년 제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까지 존속했던 영화관이다. 제일극장의 기원은 1922년 설립된 권상장 여흥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미나토 키쿠치(港谷久吉)가 세운 권상장은 종로 4가 대로변 780평 부지에 서양식 2층 벽돌건물로 만들어 진 것으로 1층은 130여 개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고, 2층에는 전시장과 함께 무료여흥장이 있었다. 조선인 고객들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설치된 2층 무료 여흥장에서는 조선의 구극 및 중국연극 등이 공연되었다. [자료] 권상장 개관 광고(《동아일보》, 1922.06.09) 권상장으로 큰 성공을 거둔 미나토는 권상장이 들어선 일대를 경성의 유흥가로 만들기 위해 종로 권상장의 개축과 함께 권상장 뒤편에 부지 330평을 마련해 미나토좌라는 영화관을 신축했다. 미나토진지(賑地)라 불린 이 일대에는 영화관 이외에 57개의 점포를 가진 미나토데파트, 카페 아홉 곳이 늘어선 미나토미인가(美人街), 800여평 규모의 댄스홀인 미나토홀 그 외 놀이시설이 설비된 미나토유원지 등이 설치되었다. 미나토좌는 1930년 6월 9일 활동사진관 설립 허가를 맡은 후 공사비 약 1만5천원으로 권상장 뒤편에 건설되었다. 8월 24일 개장한 미나토좌의 개관 프로그램으로는 스즈란좌(スズラン座) 여배우들의 댄스, 나운규 일좌의 소극 <아버지>가 공연되었다. 미나토좌에서는 개관 직후 조선인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영화를 상영하는 것 이외에 극장 내에 신극부를 두어 연극을 공연했다. 개관 초기 미나도좌 신극부는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운규 일좌가 포진하고 있었다. 이 극단에서는 최승일과 이백수가 연출을 맡았고 나운규는 직접 무대에 나와 연기를 펼쳤다. 그 외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연기를 함께 했다. 대표적인 공연작품으로는 1930년 9월 초 상연된 오토 뮬러의 〈하차〉가 있다. 이 작품은 최승일 연출, 심영, 석금성, 나운규, 김순희, 이호영, 이명우, 임운학 등이 출연했다. 9일부터는 이백수 연출, 나운규, 석금성, 심영 주연으로 <산중의 일야>가 상연되었고 18일부터는 루 메루덴(Lu Märten) 작 〈탄광부〉(Bergarbeiter)를 각색한 최승일 연출의 〈산〉이 심영, 나운규, 석금성, 이영철, 박갑득, 김종하, 박종, 이호영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9월 23일에는 가네코 요분(金子洋文)의 <언덕을 오르는 사람>이 엄시중, 심영, 나운규, 석금성, 김평숙, 김덕희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고 10월 1일에는 업튼 싱클레어(Upton Beall Sinclair) 원작의 <2층의 사나이>가 리백수 번역, 나운규, 심영, 석금성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공연하면서 미나토좌는 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보다는 연극 공연장으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미나토좌의 나운규 일좌 공연은 사상성을 이유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침체했던 미나토좌는 강천희가 이끄는 중외영화사가 직영하며 중외극장이라는 단체의 좌익극을 표방한 공연을 하게 된다. 1931년 12월 18일부터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공연한 작품은 <선로공부의 죽음>, <사람 좋은 형리>, <사랑이 깊어 갈 때>와 같은 작품이었는데 김유영은 중외극장이 공연한 작품들에 대해 프로극단을 표방한 신파극단과 다름 아니라는 날선 비판을 했다. 강천희의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철수한 이후 미나토좌에는 토월회의 후신으로 새롭게 조직된 박승희의 태양극장이 공연을 펼쳤다. 1932년 2월 1차 공연에서는 <명나라 원나라> 등이 공연되었는데 과거 토월회 출신들로 나운규 일좌에서 활약하던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포진해 있었다. 1932년 4월 12일 미나도좌는 2층을 개축한 기념으로 이름을 제일극장으로 바꾸었다. 제일극장에서는 증축낙성을 기념하여 조선연극사의 신춘대공연이 펼쳐졌으며 이어 6월 말부터는 태양극장의 2차 공연으로 〈춘향전〉을 비롯해 <대도전>, <애사> 등이 상연되었다. 이중 <춘향전>은 1925년 토월회에서 상연하여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박승희의 태양극장이나 조선연극사와 같은 조선인 극단의 공연을 비롯해 다양한 무대극을 공연하면서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던 제일극장은 1935년 3월 23일 오후 7시 15분 시사용 영사실에서 발생한 영사기사 이홍우의 실화로 전소되었다. 이홍우는 전기 휴즈가 끊어져 잠시 암전 된 사이에 성냥불을 켰는데 불이 필름에 옮겨 붙어 삽시간에 극장 전체를 태워 버렸다. 극장주 미나토는 화재로 전소된 제일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한다. 1935년 8월 23일 화재 발생 5개월 만에 제일극장의 공사를 마무리 짓고 낙성식을 거행했다. 흥행은 그 다음 날인 24일부터 재개했다. 화재 이후 제일극장은 영화상영에 주력했는데, 주로 상영된 지 오래된 필름들을 상영하는 등 영화관으로서는 2번관에 머물렀다. 1935년 동양극장이 들어서 연극 붐이 일기 시작하자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9년 동양극장의 주인이 바뀌게 되면서 발생한 내분으로 지배인 최상덕을 비롯해 연출자 박진, 극작가 송영, 임선규, 장치가 원우전, 배우 황철, 서일성, 양백명, 문정복, 박영신, 차홍녀 등 단원들이 대거 탈퇴하여 극단 아랑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를 제일극장으로 삼으면서 서울 동쪽의 제일극장, 서쪽의 동양극장이 대표적인 연극 공연장으로 각축을 벌이게 된다. 아랑의 첫 공연은 1939년 10월 부민관에서 공연된 임선규 작 <청춘극장>이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아랑에서는 부민관과 제일극장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1940년 1월의 첫 공연의 경우 부민관에서 임선규 작 <북두칠성>, <빈부>를 공연한 후 11일부터는 제일극장에서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으며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온 뒤 4월 28일부터는 송영과 임선규가 함께 쓴 <김옥균>의 공연이 제일극장에서 시작되었다. [자료] 1930년대 후반 제일극장(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제일극장은 아랑의 근거지였지만 다른 연극단체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0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옥루몽>을 비롯한 창극을 공연했으며 같은 해 6월 최남주가 세운 조선영화사 계열의 조선무대가 조직되어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조선무대에서는 1회작으로 송영 작 <방랑시인 김삿갓>을 안종화 연출로 공연했으며 2회작인 안종화 연출, 최독견 각색의 <춘향전> 역시 제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제일극장은 연극전용관으로 바뀌어 저렴한 입장료로 많은 관객들을 동원했다. 1943년 당시 1급 영화관들이 80전 내외의 저렴한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던 가운데, 제일극장은 입장료가 25전으로 가장 저렴했다. 일제 말기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악극, 창극 등을 공연했는데 대표적인 공연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월 평양대화숙 부설 청명극단에서 윤태순 작, 마완영 연출, 강호 장치의 <산울림>을, 라미라가극단은 1944년 10월 신추공연으로 이부풍 작, 김용환 곡의 <오동나무>를 공연했다. 특히 제일극장은 다른 극장들보다 창극단의 공연이 활발했는데 김연수, 오태석, 정남희 등으로 구성된 조선창극단은 1943년 11월 1일부터 박진 연출로 <장화홍련전>을 공연한바 있다. 조선창극단은 주로 이동연예단으로 활동했는데 공인극단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1945년 5월 2일부터 <어촌애화>, <장화홍련전> 등을 제일극장에서 공연했다. 그 외에 창극단 화랑(1940.12)과 동일창극단(1945.4) 등도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제일극장은 해방 후 영화업자 이창용이 적산관리인이 되어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창용이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주인이 없다가 전쟁 중 파괴된 광장시장 재건에 뛰어들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정재가 관리하던 것을 임화수가 인계받으며 이름을 평화극장으로 바꾸었다. 이어 임화수가 4월혁명 이후 체포되고 5.16 직후 사형 당하게 되자 이름을 한일극장으로 변경한 후 1977년까지 영업하다가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백두산, 「식민지 조선의 상업.오락 공간, 종로 권상장(勸商場)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42호, 2013.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미나토좌 외관 《조선신문》, 1930.8.23. [자료] 《 매일신보 》 , 1922.3.10. 도시의 미관 , 조선의 경성에 내선융화적의 공영과 호락기관 ( 互樂機關 ) 의 설비 , 장래 조선박람회에 최 ( 最 ) 히 적응 준비 , 조직적 백화상점 ( 百貨商店 ), 종로 권상장 매점신입 ( 賣店申込 ) ( 전략 ) 본관의 계상 ( 階上 ) 에ᄂᆞᆫ 내외의 미술품 병 ( 並 ) 상공업의 진로를 개척할 참고자료를 진열종람 ( 縱覽 ) 케 하며 우 ( 又 ) 무료여흥장 ( 無料餘興場 ) 을 설 ( 設 ) 하야 활동사진 기타의 오락기관을 사시 ( 四時 ) 일반에게 관람케 하ᄂᆞᆫ 등 원 ( 願 ) 히 경제적 오락적으로 조직ᄒᆞᆯ 뿐 아니라 특히 사회적으로 생활의 안전과 위안을 여 ( 與 ) 할 최진 ( 最珍 ) 최신의 차종 ( 此種 ) 의 상기관 ( 商機關 ) 은 아즉 일즉이 동양에서 기 ( 其 ) 유래를 견 ( 見 ) 치 못한 전대미문의 파천황의 사업이며 연 ( 然 ) 하고도 상 ( 常 ) 권상장의 위치는 문 듯 조선박람회에 적응키 위하야 각 방면에서 오락기관을 망라하야 잇는 조선유일 낙천지에 인접하는 즉 경성종로 사정목 조선인 상공업의 중추지에 실지하고 동대문시장과 상사 ( 相俟 ) 하야 은진 ( 殷賑 ) 을 극 ( 極 ) 하고 동아 ( 東亞 ) 의 일각에 신진의 대도시를 과 ( 誇 ) 할 조선수도에 일대미관을 정 ( 呈 ) 할 뿐 아니라 ( 후략 ) [자료] 《 매일신보 》 , 1930.6.12. 이현 ( 梨峴 ) 에 신설될 활동사진관 , 건축허가가 낫다 , 칠월말 개관 부내 종로 사정목 일번지 ( 鐘路四丁目一番地 ) 에 있는 권상장 주인 항구길 ( 勸商場 主人 港久吉 ) 씨는 전기 권상장의 단층 ( 單層 ) 일부를 헐고 부지 ( 敷地 ) 삼백오십평에 활동사진상설관 ( 活動寫眞常設館 ) 을 건축코자 소관 동대문서 ( 東大門署 ) 를 거처 경기도로 건축허가를 제출하였든 중 지난 구일부로 이의 허가가 나와 즉시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는바 이번 새로 건축될 활동사진 상설관은 공비 일만오천원으로 오백명 수용의 연와제 단층 ( 煉瓦製 單層 ) 으로서 늦어도 칠월 말경에는 개관하게 도리 터이라 하며 간간히 보는 바 권상장 이층에서 흥행되는 구극 ( 舊劇 ) 기타 중국연극 ( 中國演劇 ) 등도 새 극장에서 개연을 보게 되어 일반관객의 환영을 밧게 될 터이라 한다 . [자료] 《 동아일보 》 , 1935.3.24. 작석 ( 昨夕 ), 제일극장서 영사 중 돌연 발화 , 필름의 폭발로 내부가 전소 , 이백 관객은 전부 구출 , 시사실서 발화 휠림에 인화 폭발 이십삼일 오후 칠시 십분부터 종로사정목 일번지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돌연 발화하야 삽시간에 전관 이층 건물이 거의 전소되고 이어서 그 부근 큰 상점에 연소될 염려가 있어 방금 현장은 큰 수라장을 이루엇고 소관 동대문경찰서는 물론이오 시내 각서는 경찰부의 총 지휘아래 각 소방서 총출동으로 대경계중이다 . 아직도 ( 오후 칠시 반 ) 맹렬한 불길에 쌓이어 화광 속에 들어있는 일대의 혼잡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수라장이다 . 전차 자동차는 종로 3 정목 일대부터 동대문까지 완전히 차단되어 잇다 . 원인은 이날도 평시와 같이 오후 칠시부터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이날 밤은 약 이백명의 관객이 모였는데 첫째 사진을 상영중에 시사실에서 발화하여 필름에 곧 불이 당기자마자 폭발되어 발화한 듯 하다하며 동 팔시에 진화되었는데 원인 손해를 알 수 없고 이백 관중은 전부 구출되었다 한다 . ( 이상 호외 ( 號外 ) 재록 ( 再錄 )) [자료] 《 동아일보 》 , 1935.8.25. 제일극장 재축 ( 再築 ) 금년 봄에 화재로 인하여 건축중이든 부내 종로 ( 鐘路 ) 5 정목 제일극장 ( 第一劇場 ) 은 그동안 개축중이든 바 최근에 준공이 되어 금 24 일에 개관식을 거행하고 일반 관람은 명 25 일부터 개관키로 되었다는데 관람료는 역시 10 전 균일의 대중경영으로 한다고 한다 .
단성사는, 연예계를 발전시키고 그 수익으로 교육을 장려하는 동시에 자선 사업을 할 목적으로 지명근(池明根), 박태일(朴太一), 주수영(朱壽榮) 등의 한성 상인들이 발기하여 1907년 파조교(罷朝橋) 인근에 세운 극장이다. 개관 초기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신파극을 연행하는 데 적절치 못할 정도로 무대가 좁아서 임시로 내부를 수리하기 위해 영업을 정지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다른 극장들처럼, 경영 미숙과 전황(錢荒)으로 인한 곤란으로 단성사의 경영자와 소유자는 자주 교체되었다. 단성사는 경영 상태 정상화를 위해 파노라마식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는데 승전무(勝戰舞), 승무(僧舞), 전기호접무(電氣胡蝶舞), 환등, 활동사진 등이 공연되었다. 1913년 안재묵(安在黙)이 단성사의 운영권을 획득하며 대대적인 신축을 단행한다. 1914년 1월에 신축 낙성된 단성사는 총 건축비 1만 1천 원의 2층 건물로, 외관은 서양식으로 장식했고 내부는 일본식 극장 구조를 따랐다. 정원 1,000명 규모의 객석은 1, 2등석(2층 객석 및 박스석)에 다다미를 깔아 신을 벗고 입장하도록 했고, 1층의 하등석에는 장의자를 깔아 앉아서 볼 수 있도록 했다. 호화롭게 신축한 단성사는 1915년 2월 18일 화재를 당해 벽만 남은 채 소실되었다. 상등석 옆방에서 차를 팔던 안성범(安聖範)이 연극이 파한 후 화롯불을 끄지 않고 퇴근했는데, 이것이 다다미에 옮겨 붙어 극장 전체를 태운 것이었다. 화재의 원인을 제공한 안성범은 안재묵의 아버지로, 결국 실화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사진 2. 화재 직후 단성사(《매일신보》 1915년 2월 19일자, 3면) 김연영(金然永)에게 돈을 빌려 극장을 신축했던 안재묵은 이 화재로 파산, 단성사의 소유권은 채권자 김연영에게 넘어갔다. 김연영은 내부를 수리하여 1915년 5월 단성사를 재개장했으나, 그 시설은 화재 전보다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1917년 2월 김연영은 황금유원의 소유주인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郞)에게 단성사를 매각한다. 다무라는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광무대를 운영하던 박승필(朴承弼)에게 그 운영을 맡겼다. 단성사의 관객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므로 이들을 대상으로 활동사진관을 운영하는 데는 조선인 경영자가 적합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단성사의 활동사진관 전용 허가를 신청한 지 수개월 만인 1918년 6월, 드디어 경기도 경무부로부터 허가 지령이 떨어진다. 이에 종로경찰서는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부적절하다며 신축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아 허가를 내주었다. 박승필은 1918년 8월,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 창립 9주년 기념 공연을 마지막으로 기존의 건물을 헐고 1만 원의 예산을 들여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단성사를 개축한다. 사진 3. 1918년 활동사진관으로 다시 지어진 단성사(《매일신보》 1918년 12월 21일자, 3면) 활동사진관으로 재탄생한 단성사는 수만 원의 보증금을 내고 일본의 영화회사 텐카츠(天活, 天然色活動写真株式会社)와 특약을 맺어 필름을 확보했으며, 조선인 변사 중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서상호(徐相昊)를 변사주임으로 한 5~6인의 변사진을 구성했다. 또한 활동사진관 운영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경성고등연예관과 우미관에서 실무를 맡아 왔던 영사기사 박정현(朴晶鉉)과 손을 잡았다. 박정현은 1918년 단성사로 건너와 지배인(감독)으로서 실무를 책임졌으며, 박승필 사후에는 직접 단성사를 이끌었다. 박승필은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이용하는 동시에 공연장을 구하지 못해 경영이 곤란하던 양대 신파 극단, 즉 임성구의 혁신단과 김도산(金陶山)의 신극좌를 후원하는 데도 활용했다. 이 두 극단은 단성사 전속 극단 역할을 수행하며, 서울 공연과 지방 순회를 번갈아 공연했다. 이와 관련한 박승필의 회고를 인용해 보자. “ 신극운동을 발뎐식키려 틈틈이 배우 량성에 주력하엿스니 한 비극 ( 悲劇 ) 과 검극 ( 劍劇 ) 으로 장안에 일흠을 치든 림성구 ( 林聖九 ) 며 말 잘하고 모험극 ( 冒險劇 ) 잘하기로 유명하든 김도산 ( 金陶山 ) 가튼 명배우도 모다 박씨의 문하에서 나온 것이다 . 세상에는 림성구라면 모르는 안악네가 업고 김도산이라면 모르는 청년이 업지만은 그들의 배후에 박승필 씨가 잇슴을 아는 사람은 적엇슬 것이다 . 이와 가티 박씨는 구극과는 새이가 멀어지고 신극에만 주력하게 되엿다 . 라서 신극흥행 ( 新劇興行 ) 을 서울에서만 치지 안코 전 조선적으로 진출하려 림성구 군을 중심으로 혁신단 ( 革新團 ) 을 조직케 하고 김도산 군을 중심으로 신극좌 ( 新劇座 ) 를 조직케 하야 혁신단과 신극좌가 서로 교체하여 지방을 순회하게 하엿다 .” 1 활동사진관으로 개관한 직후 단성사는 텐카츠로부터 키네오라마 [필자 주: 특수 기구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환영을 보여주는 무대 장치] 기술을 도입하여 장치하고, 1919년 5월부터 변사들을 출연시켜 제주도에서 일어난 살옥(殺獄) 사건을 소재로 <탐라의 사몽(詐夢)>이라는 변사극을 공연했다. 그러나 곧 변사극보다는 전문 신파 극단에 의한 전기응용신파극 [필자 주: 전기(電氣) 장치를 동원하여 효과를 내는 무대극 ] 이 나으리라 판단, 신극좌와 혁신단로 하여금 전기응용극을 만들기로 하여 우선 신극좌의 좌장 김도산을 일본에 보내 키네오라마 기술을 배워 오도록 했다. 그리고 흩어진 혁신단도 재조직하여 키네오라마를 이용한 전기응용극을 시작하도록 한다. 단성사 전속 극단으로 서울과 지방을 번갈아 가며 공연하던 신극좌와 혁신단은 전기응용극에서 더 나아가 차례로 연쇄극을 제작한다. 첫 작품은 신극좌의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 이어 <형사의 고심(刑事苦心)>과 <시우정(是友情)>이 만들어진다. 사진 4. 연쇄극 <의리적 구토> 광고(《매일신보》 1919년 10월 26일자, 3면) 1919년 10월 27일부터 상연된 <의리적 구토>는 원래 5일만 상연하기로 했으나 큰 인기에 힘입어 11월 18일까지 무려 25일이나 계속 상연되었다. 수지를 맞추기 위해 파격적으로 비싼 가격에 상연됐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이 연쇄극은 최초의 한국영화로 인정받고 있다. 연쇄극의 황금기를 지나 무성영화 시대가 시작되자 단성사에서는 촬영기사 이필우를 초빙하여 <장화홍련전>(1924)을 직접 제작한다. 나아가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 제작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를 통해 금강키네마, 원방각사 등이 조직되었으며 나운규와 같은 걸출한 영화인이 영화 제작을 할 수 있었다. 1930년대 토키영화의 상영이 본격화되자 단성사는 이에 발 빠르게 대처한다. 1930년 설날을 맞아 조선 최초로 토키영화를 상영했고, 나아가 토키영화관으로의 전환을 꾀했다. 더불어 신무대라는 전속 극단을 두어 연극 공연에 대한 여전한 관심을 이어갔다. 1931년 1월 단성사를 이끌던 박승필이 사망한다. 전술한 대로, 이후에는 박정현이 운영자가 되어 단성사를 이끌게 된다. 박정현은 토키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할 수 있도록 단성사 신축을 결정한다. 1934년 신축된 단성사는 650석 규모로 이전보다 객석이 대폭 줄었으나, 토키 상영용 영사기를 비롯하여 냉난방 시설과 각종 설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신축 후 단성사는 지속적으로 경영난에 봉착한다. 단성사 보다 조금 늦게 신축된 약초극장, 명치좌, 황금좌 등은 단성사보다 객석도 많았고 시설도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영화 의무상영제도가 실시되자,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단성사와 남촌의 일본인 극장들 사이의 프로그램 차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여기에 서양영화의 대여 비용까지 증가하면서 단성사의 경영난은 피할 수 없었다. 이에 연극 극장으로 전환 등 자구책이 강구되었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외화 가격이 폭등하면서 경영난도 가속되었다. 부채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박정현 등의 단성사 운영진은 결국 파산했으며, 1939년 그 운영권이 명치좌를 운영하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넘어간다. 이시바시는 단성사를 명치좌의 2번관으로 두었으며 이름도 대륙극장이라 바꾸었다. 해방 후 이름을 되찾은 단성사는 줄곧 한국영화사를 상징하는 장소로 존재하다가 2001년 철거, 2005년 멀티플렉스로 재건축된다. 그러나 이 역시 경영난으로 부도 처리되었고, 2015년 영안모자가 인수하여 현재 단성골드쥬얼리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1) 「각 방면의 성공 고심담 (8) / (2) 흥행계의 노장 박승필 씨」《중외일보》1929년 11월 2일자, 조간 3면 참고문헌 이순진, 『조선인극장 단성사 1907~1939』, 한국영상자료원, 2011.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 사진 1(글 상단). 토키영화관으로 신축된 단성사 [자료] "신축 낙성한 단성사", 《매일신보》, 1914.01.17. 경셩 즁부 동구안에 잇 , 연극쟝 단셩샤를 헐고 , 로 짓 다 은 , 이젼에 여러 번 , 긔 한바 , 작년 七 월에 , 역 를 시작 야 , 임의 집 건츅은 다 맛치고 , 구력 안에 부 슈졍 지 , 젼혀 맛칠 터이라 간 수가 , 일 륙십팔 간에 , 무 가 삼십이 간이오 , 관람쟈의 뎡원이 , 일쳔 명이오 , 뎐긔 등이 , 합 일 오십 오 , 안은 일본 졔도 , 밧갓 졍면은 , 셔양 졔도인 일이등셕은 젼부 다다미를 랏고 , 하등셕도 쟝교의에 , 안져 보게 되얏스며 기타 여러 가지 구죠와 쟝식이 , 조션의 연극쟝으로 젼도에 뎨일이 되겟스며 , 구력 졍월 초하로날브터 , 기 의 연쥬회로 , 첫 번 무 를 연다더라 , 총 건츅비 일만 일천 원 [자료] "단성사가 팔려", 《매일신보》, 1917.02.18. 경셩에 다만 한아 잇 조션인 측의 연극쟝이라 동구안 단셩샤 그 소유주인 김연영 ( 金然永 ) 으로브터 황금뎡 거 황금관 쥬인 뎐촌 모의게 팔쳔오 원의 가 으로 도되야 십륙일에 금젼 여슈 지 맛추엇 댱 에 연극댱은 활동사진 젼문으로 곳쳐서 조선인 관람자를 흡슈 기로 위주 야 죵 이것을 경영 우미관과 경 을 리라더라 . [자료] "단성사의 개축, 활동사진을 한다", 《매일신보》, 1918.06.21. 됴션의 연극장 즁 한아 되 동구 안 단셩샤 작년 봄에 황금관 쥬인 뎐촌이란 사 이 팔쳔오 원에 가지고 활동사진을 영 기 위 야 광무 박승필 씨에게 경영쟈의 권리를 위임 야 그 일홈으로 당국에 쳥원 고 허가되기를 긔다리던바 다소 년 월을 지 여 지나간 십삼일부로 경긔도 경무부로부터 소관 경찰셔에 허가 지령이 왓슴으로 죵로경찰셔에서 십 일 활동 진의 흥 주 되 박승필 씨를 불너다가 신긔 셔댱으로부터 장 쥬의 건에 야 세히 일너준 후 그 지령을 주엇다 지금의 단셩사 집으로 영사 적소가 못됨으로 확댱 기 위 야 일만 원의 예산으로 그 안을 모다 헐고 다시 지은 후 오 구월부터 시작되리라 목하 설계가 맛치 로 곳 역 에 착수 다 이 뒤부터 신구파 연 극장은 아죠 업셔진 모양이라더라 . [자료] "본관 신축 낙성 후 대갈망 중의 모범적 활동사진은 금일부터 대대적 영사", 《매일신보》, 1918.12.21. 동구안 단셩사를 여러 천원의 거 으로 사드린 후 본 목뎍 바와 갓치 세샹에 모범뎍 활동사진을 영 야써 일반 관람에 졔공 기로 작뎡 얏던 결과 그 뒤 모든 범 ○ 과 계획이 쥰비되야 슈만의 거 과 슈삭의 공졍으로 오날 단샹사 신츅 얏도다 이 젼혀 영리를 위 야 금거히 쥰비 것이 안이오 다만 활동사진의 영 다 쇼문이 퍼지 이를 라 경향의 활가 졔씨의 갈망이 졀졍에 다을 외라 겸 야 녯것을 양 고 것을 요구 것이 현 됴 ( 現代思潮 ) 임으로 본 관주가 미리 이를 닷고 급셩 공 로 이에 쥰공을 맛치엿슴니다 본관은 본 쥬지가 타관에 비 야 현져히 다른 뎜이 잇 바 즉 만흔 돈으로써 참신긔발 됴흔 사진을 가져다가 아모죠록 일반의 호평 즁에셔 영업도 발뎐코져 주지임으로 디 유명 활동사진쥬식회사 몃 곳과 임의 특약을 고 수만원의 보증금을 붓치엿스니 이를 보더라도 가히 본관의 로심초 을 아실 일이라 그 안이라 활동사진에 야 본 관주 항샹 유감히 각 바 갑 만코 용 죠흔 진을 영 때에 변 의 셜명이 불충분 야 일반 관람 시는 니의 불만족과 불평의 셩이 남을 라 역시 진의 가치도 업셔지 일이 잇셔셔 본 관주의 삼슉고 『 熟考 』 로 활동게의 호평잇고 갈 밧 ... 안이 구변으로 뎨일류되 셔상호 『 徐相昊 』 군을 특이 초빙 야 변 쥬임으로 뎡 고 텬연 표졍과 그럴듯 익살 잘부리 변 와 희로 락을 긔묘 게 아 변 합 오륙인이 잇셔 일 밤 무 우에셔 일거일동에 셜명은 참으로 본 관주의 랑 안이오 장 보아가시 로 평판이 잇 오리다 겨울밤은 졈졈 길고 눈이 나와셔 에 가득이 싸인 실상 젹막 기 이 없슬 별별 겨울에 감상이 만단으로 일어날 본관에 오시고 보면 란로 몸을 듯하게 야 주고 셜 갓흔 하얀 포장에 참 쳐음보 긔긔괴괴 진이 다 빗치일 적마다 여긔가 졍말 락쳔디인가보다 감샹이 유연히 발 실 터이요 야반에 소견거리 이 우에 더 업슬 줄로 각 니다 敬具 本館 映寫 中 은 年中 晴雨 를 不計 고 開演 기로 酌定 이온바 特 히 日曜日 及 祭日 에 晝夜 映寫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