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캉캉
- 감독
- 장 르누아르
- 제작년도
- 1955
- 출연
- 장 가뱅, 프랑소와 아르누, 마리아 펠릭스, 안나 아멘돌라, 쟝 로저 카우시몬, 도라 돌
극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영화 평론가였던 오영진(1916-1974)은 대단한 영화광으로 알려져 있다.태평양전쟁 전에는 일주일에 4, 5회나 극장에 갈 정도였고, 경성제국대학 재학 중에는 제국대학생들의 문예지였던 『성대문학(城大文學)』 동인들과 함께 영화동호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1936년 출범한 이 영화동호회는 경성제대 학생식당에서 창립 모임을 가졌는데, 오영진은 이 자리에 법문학부의 경제학 교수 스즈키 다케오(鈴木武雄)를 초대해 ‘영화담’을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경성 부민관에서 ‘총후 학생 문화 운동’을 명분으로 영화 관련 행사를 여는 등 영화동호회 활동에 꽤 열성적이었다. 솔직히 말하여, 20년 전에 나로 하여금 대학 안에 ‘영화동호회’를 조직케 한 큰 원동력은 불란서영화이었다. 그때, 우리들 젊은 대학생들은 불란서영화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러시아문학보다도 더 광범히 사랑하였다. 일본을 거쳐 우리에게 소개된 불란서영화의 수효는 지극히 소수의 것이었다. 그러나 1년에 5, 6 작품밖에 안 되는, 이 정선된 작품, 하나하나가 마치 주옥같은 걸작들이었다. 쥬리앙‧뒤비비에, 자크‧페에데, 르네‧클레에르 등등의 예술품이 20년이 지난 오늘도 생생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1 영화동호회를 결성하고 20여 년이 지난 후, 오영진은 자신과 친구들을 영화광으로 만든 것이 ‘불란서영화’였다고 회고했다. 원래 문학청년이던 그는 쥘리앙 뒤비비에(Julien Duvivier) 감독이 연출한 일련의 ‘문예영화’들, 즉 <상선 테나시티(Le paquebot Tenacity, 1934)>나 <우리들의 동료(La belle équipe, 1936)> 같은 영화를 좋아했다. 프랑스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당시 오영진만의 유별난 취향은 아니었다. 일본과 조선의 문화 엘리트 사이에서 이른바 ‘프랑스 4대 명장’―르네 클레르(Rene Clair), 쥘리앙 뒤비비에, 자크 페데(Jacques Feyder), 장 르느와르(Jean Renoir)―의 영화는 각별한 애호와 지지를 받았고, 그중 장 가뱅(Jean Gabin)이 주연한 뒤비비에 감독의 영화 <망향(Pépé Le Moko, 1937)>은 영화 좀 본다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언급할 정도로 화제작이었다. 프랑스영화 외에도 이태리,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에서 제작된 영화들이 일본을 거쳐 조선에 도착했고, 젊은 학생과 지식인 관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식민지 시기 조선에 수입되는 외국영화 중 유럽영화는 수적으로 줄곧 열세였고 스크린 점유율도 낮았다. 수입 외화의 90% 이상을 할리우드 영화가 차지했다. 그러나 문화 엘리트들에게는 유럽영화가 근대인의 교양이자 이상적인 예술이라 인식되었고, ‘우수한 좋은 영화’라는 의미로 ‘명화(名畫)’와 동일시되곤 했다. 오영진이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1930년대 중반, 경성의 극장가에서 유럽에서 온 ‘명화’는 실패가 없는 흥행 상품이기도 했다. 유럽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이 높아서 각종 단체나 언론사는 부민관과 같은 비영리 공간을 빌려 ‘명화감상회’를 주최하고 경성의 영화광들이 ‘명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시기 경성의 유럽영화 관객층은 이전 어느 때보다 폭넓어졌으며, 유럽영화에 대한 담론 공간 역시 크게 확대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7월, 오영진은 《조선일보》에 「영화예술론 - 그 예술성과 오락성」(1937년 7월 6일~9일)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전문적인 영화 글을 쓰게 된다. 경성제대 영화동호회의 짧은 역사는 전쟁 발발 직후 막을 내렸지만, 영화동호회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 영화인 오영진의 시대는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 일본 유학길에 오른 그는 동경발성영화제작소에 입사해 조연출로 일하며 일본의 제작 현장을 경험했고, 1942년 조선에 돌아와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촉탁을 지내며 『배뱅이굿』, 『맹진사댁 경사』 등의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해방 후에는 예술원 회원으로서 남한 문화 권력의 중심에서 영화계 원로로 활동했다. 특히 대종상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우수영화’ 선정에 관여하기도 했는데, 당시 영화평론가 이영일이 진행한 좌담회 「꿈을 키워준 시절의 영상 / 나의 영화적 낭만의 시대」(『영화예술』, 1965년 4월 호)를 보면 그에게 ‘좋은 영화’란 청년 시절에 사랑했던 영화들을 모범으로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오래전 그 영화들을 ‘명화’로 기억하는 것은, 영화광이었던 청년 시절의 자신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1941년에 개봉된 영화 <반도의 봄>(이병일)은, 묘하게도 이처럼 유럽의 ‘명화’에 열광하며 좋은 영화는 몇 번이나 다시 보았던 1930년대 경성의 영화광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춘향전>의 제작 과정을 담고 있는데, 눈 밝은 관객이라면 <춘향전>의 대척점에 있는 또 다른 ‘영화 속의 영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장센의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는 유럽영화 포스터들 말이다. 전쟁 중,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이 표출되던 때이던 만큼 외국영화에 대한 열기가 유럽영화로 집중되었을 수도 있지만, 작품 속 영화인들의 사무실과 분장실, 극장 계단에 걸린 유럽영화 포스터들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반도의 봄>이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리라. 단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데에도 온갖 곤경을 겪어야 하는 조선의 영화인들에게 <마주르카(Mazurka, 1935)>, <청춘의 바다(Abel mit der Mundharmonika, 1933)>, <부르크 극장(Burgtheater, 1936)>, <제니의 집(Jenny, 1936)>, <어여쁜 청춘(Hélène, 1936)>, <열풍(Amok, 1934)>, <소곤거리는 나무 그늘(So endete eine Liebe, 1934)>, <고향(Heimat, 1938)> 등 저 유럽영화들이 가리키는 세계는 아득히 먼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영화인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분투했던 힘은, 동경하던 예술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어하던 영화광들의 열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1) 오영진, 「불란서영화의 금석(今昔) - 젊은 팬을 위하여(1956)」, 『오영진전집 5. 영화평론‧수필』, 범한서적, 1989, 16쪽 사진 2, 3, 4. <반도의 봄>에서 * 상단사진1. <반도의 봄>의 한 장면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음악명화(音樂名畫)의 던진 거탄(巨彈) “동․키호테”는 살었다」, 《조선일보》, 1938년 7월 8일자, 4면. 지난 5, 6 양일간 본사 주최로 부민관에서 개최된 음악명화 감상회는 절대의 인기로써 대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때마침 공습관제 하에 긴장되었던 민중이 5일 이 비상경계가 해제되자 그들은 비로소 새로운 광명의 세계에 해방된 듯 다시 보기 어려운 이 명화를 찾아 정각 전부터 모여들었다. 이제 여기 이모저모의 풍경과 각 방면 인사의 소감편편을 엮기로 하자. 이를 통하여 느낀 첫 인상을 한 말로 한다면 예술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이며 위대한 예술일수록 인류에게 더 강한 친화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이 영화감상회는 어찌 보면 영화라는 한정된 세계보다도 영화가 표현한 순수한 영화의 경지 이외의 더 큰 문학적, 음악적, 예술적인 거룩한 생명을 우리에게 느껴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 이유가 이 영화 감상미를 더 의의 깊게 한 것 같다. 그렇길래 좀체로 외출 안하시던 조선 문단의 선구이신 벽초 홍명희 선생도 시간을 놓치지 아니하고 정각 전에 시원한 푸른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오셨고, 이화전문에서는 요새 근로봉사로 모두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전 학교 선생, 학생 백여 명이 단체로 구경 왔던 것이다. 눈에 제일 많이 띄는 학생 중에는 연전(延專), 세전(世專), 불전(佛專), 법전(法專)의 전문학생과 흰 테를 두른 대예 [필자주: 大豫, 즉 경성제대 예과를 가리킨다.] 학생이 그중 많았다. 중학교는 마침 학기 시험인 관계가 있기는 하면서도 참다운 문학과 영화를 사랑하는 4, 5학년 학생들의 씩씩한 얼굴들이 보이는 것은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정답게 예술과 사상으로 맺어진 안호상, 모윤숙 부부와 이태준, 이순옥 내외의 양자가 보이는 것도 이 감상회의 이채일 것이요, 동덕고녀(同德高女)에서는 비가 쏟아지는 둘째 날 시험 때의 바쁨도 무릅쓰고 음악선생 정순철, 이형우, 정갑 외 여러 선생이 오신 것도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평론가 백철 씨가 이 감상회 때문에 평양으로 급히 가야할 일을 하루 연기하는 정성도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이 명화감상회를 보신 이 중에서 감격된 인사 몇 분의 자발적 감상의 편편을 모아보자. 김상용 씨 : 시인이요, 겸하여 이전(梨專) 문과 과장으로 계신 씨는 이 영화회가 세상에 알려지기가 급하게 여러 해를 두고 기다렸던 듯 감격하여 “참 내가 솔선하다시피 해서 이번 학생애들을 단체로 구경 가도록 했습니다. 영화도 위대한 예술이라면 위대한 산 교훈과 감격을 줄 수 있는 데 있을 줄 압니다. <동․키호테[Don Quixote, 1933]>는 내 일생에 가장 감격된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좋은 회합을 가지는 게 퍽 좋겠지요.” 김재훈 씨 : 경성음악전문학원을 경영하시는 음악가인 씨는 매우 만족한 웃음을 띠며 “처음으로 <동․키호테>를 영화에서 봤습니다. 물론 샬라핀[Feodor Chaliapin Sr.]의 예술은 음악학도로서 높이 평가합니다. 아무쪼록 자주 이런 훌륭한 예술적 회합을 가지도록 노력해주십시오. 아주 감격했습니다.” 안석주 씨: 열정적인 씨는 상기된 얼굴에 그 음성까지도 다소 떨리는 듯 “참 좋아요. <동․키호테>를 5년 전 처음 볼 때보다도 이번이 더 감격되는데요, 다시 보니까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흥분과 가슴에 넘치는 감명이 있습니다. 참 최고의 예술적 표현과 생명을 가진 것이 <동․키호테>라고 하겠어요.” 안호상, 모윤숙 여사 : 두 분은 나란히 앉아서 이 영화에서 얻은 감명을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하신다. 안(安) : <동․키호테>는 물론 문예작품으로 위대하니까 감명이 큽니다마는 영화로 보기에는 현대 감정을 담은 <윈나의 황혼[Maskerade, 1934]>이 더 나아 뵙니다. 모(毛) : 나는 의상으로나 분위기로나 오히려 <동․키호테>의 그 비장한 장경이 더 좋아요. 두 분의 이야기는 다시 아돌프 월브류크 [필자주: 원문에는 '아돌프 월브류크'로 되어 있으나 안톤 월브류크(Anton Walbrook)의 오기로 추정된다.] 의 연기에 대해서 논하신다. 김성진 씨 : 조선에서도 최고로 가는 영화팬인 씨는 좀 창백하신 얼굴에 다소 긴장된 흥분을 감추어가지고 겸손하게 “자주 이런 회합을 가지도록 해주십시오. 적어도 한 달에 한번쯤 해주셨으면 구경하는 사람으로는 여간 좋은 기회가 아니겠어요. 아주 감격했습니다.” 이날 밤 관중의 그 어느 얼굴에나 긴장되고 흥분되고 감명된 빛이 없는 이가 없었다. 서로 쳐다보는 얼굴에는 비상한 산 교훈을 받은 감이 있었다. 산쵸가 마지막 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우는 장면에서 울음이 난다는 이, 동․키호테가 운명한 후에 들리는 비통한 노래에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감격을 했다는 이……. 악수로 퍼붓는 비에도 밀려나오는 군중에도 옆에 와 이야기하는 데도 전연 무감각한 채 지극한 감명 속에 외로운 듯 초연히 서있는 무서워 보이는 한 얼굴, 돌과 같이 굳어진 그 표정이 분이 솰라핀의 음악과 베토벤의 인간에 지극히 감격되고 숭모하는 정순철 씨인 것은 아마 알아본 이가 그리 많지는 못했으리라. 2. 「꿈을 키워준 시절의 영상 / 나의 영화적 낭만의 시대」, 『영화예술』 창간호(1965년 4월), 30~37쪽, 부분 발췌. [...] 이영일: 그래서 이제부터서 선생님들이 보신 영화 중에서 가장 감동을 많이 받은 영화 한두 편씩 말씀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오영진: 해방 전 것까지 해서—. 이영일: 네… 네, 어린 시절부터 학생 시절에 걸쳐서……. 선우휘: 네, 사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배우 위주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가 하면, 스토리가 좋아서 오래오래 남는 수도 있는데, 제가 지금도 기억 남는 것은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7]>인데 그때가 바로 유럽에서 전쟁이 한창일 땐데 스탭‧캐스트가 나오기 전 자막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영진: 원작자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이었죠. 선우휘: 네… 네. 전문(前文)에 “이렇게 피로써 피를 씻는 동란이 계속되는 시대에 우린 이런 환상적인 꿈을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느냐?” 이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말하자면 유토피아적 세계를 그린 건데, 항공기가 추락되어서 비행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눈보라를 헤치고 가다보니까 석문(石門)이 있어서 열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때부터는 봄과 같은 날씨에 내(川)가 흐르고 새소리가 들리는 돌연변이의 세계가 화면에 나옵니다. 그런 영향에서 그런지 전 꿈이란 것을 생각하면 곧 영화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여석기: 저도 동감인데, 좀 다른 의미로 해석해서, 내가 대학 때니까 1929년입니다. 1차 대전 [필자주: 원문에는 '1929년입니다. 1차 대전’이라고 되어 있으나 오기로 추정된다. 연극평론가이자 영문학자인 여석기는(1922-2014)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있었던 1939년에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 벌어져 독일이 폴란드를 침입해서 주위는 회색으로 변하고 연령적으로 우린 청춘으로서의 꿈도 있어야겠고 윤택한 정서도 필요하고… (추억에 의존할 나이는 아니니까) 그걸 어디서 찾느냐? 결국 문학이나 예술에서 인생을 관조하고 지식을 얻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여기에서 영화가 당당한 역할을 하는데, 그 점에서 꿈의 대용품이라 하겠지요. 영화적 기교는 알 턱도 없고 다만 막연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인생을 다시 찾아보고 싶다는 거겠지요. 선우휘: 그 다음에 생각나는 것으로 ‘페페 르 모코’ <망향>이 있고, <황혼의 비엔나[Maskerade, 1934]>도 좋습니다. 오영진: 윌리 폴스트[Willi Forst]가 나오지요. 선우휘: 그리고 음악영화론 조예가 없지만 <미완성 교향곡[Unfinished Symphony, 1934]> 같은 거……. 오영진: 그것도 윌리 폴스트일 거에요. 이영일: 이제까지 선우 선생께서 명작을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내셨는데…… 최 선생님은……. 최정희: 두 분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참으로 영화는 인생의 꿈을 많이 길러주는 것 같아요. 여석기: 뜻은 좀 다르지만 ‘꿈의 공장’이란 말이 있지요. 일동 : 그렇지요. [...] 이영일: 이런 점에서 영화가 개인 개인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전체적으론 사회적 영향력이 방대하다는 의미도 되겠지요. 매스컴 시대라고 불리는 현대에 있어서 영화의 미디어적 영향이 실로 지대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것은 반대로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관객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영화사회학의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영화예술지는 건전한 관객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은 관객을 많이 가질 수 있느냐? 한국영화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훌륭한 관객사회가 형성되어야 하겠다는 의도에서 ‘시네 클럽’ 운동을 구상했습니다. 그런데 오 선생님, 어떻습니까. 요 먼저 말씀하시던 중에 옛날의 ‘시네 클럽’ 운동이 있었다고 기억되는데요……. 오영진: 우리 대학 땐 영화동호회란 것을 만든 일이 있어요. 학생끼리였지만 교수 한 분을 모시고 연구적인 모임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무의식적으로 영화를 보는 분에도 소설을 쓸 분도 있을게고 영화계에 종사할 분이 있겠지만…… 영화를 어떻게 감상하느냐란 문제를 서로 연구‧토론할 클럽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젊은이들의 교양 향상을 위해서 우리도 대학 때 그걸 만들었다가 일본 학생이 이상하게도 점점 많아져서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이영일: 여 선생님은 어떻습니까? 여석기: 나도 오 선생님 말씀에 절대 동감입니다. 우리들의 대학 때보다는 영화 서클이 적은 것 같아요. 요새야 사회‧정치 서클이 많은데 우리 문학, 연극, 영화 동호회가 보다 활발하여야 되겠습니다. 극장 측과 교섭해서 반액 정도로 감상한 다음에 자유스러운 디스커션을 통해서 인생의 폭을 넓히고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은 유치하건 말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영화계에 들어가려면 직행합니다. 박모(朴某) 감독한테 가서 현실적으로 교섭하거든요. [...]
존 포드에 관해 말하게 될 이 연재의 제목을 ‘존 포드 이야기’로 정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내가 아직 존 포드 감독론을 쓸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해외에 이미 많은 존 포드론이 출간되어 있고, 이 위대한 예술가의 세계에 접근하는 또 다른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존 포드론을 쓰기보다는 차라리 훌륭한 책을 번역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 길을 찾고 있는 중일 따름이다.(사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나는 1997년 토론토에서 비디오로 포드의 < 도망자 The Fugitive >(1947)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전부터 < 수색자 >와 < 역마차 >를 좋아해오고 있었지만, 이 영화는 내가 아는 포드의 서부극과는 전혀 다른, 괴기스럽지만 신비롭고 매혹적인 표현주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올해는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 태양은 밝게 빛난다 The Sun Shines Bright >(1953)를 드디어 35mm 프린트를 보고 그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포드가 어디까지 간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그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도망자 The Fugitive>(1947) 다른 하나는 한국의 시네필들과 영화애호가들의 존 포드에 대한, 나아가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과 연관되어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꽃피기 시작한 한국의 시네필 문화는 유럽 시네아스트들에 대한 편애를 벗어나지 못했고, 미국 고전기 작가들은 오슨 웰즈와 알프레드 히치콕을 제외하면 여전히 무지와 무관심의 사이 어디쯤인가에 방치되어 있는 것 같다(최근 들어서는 유럽의 혹은 유럽 출신의 옛 거장들조차 점점 잊혀져가는 듯한 불길한 징후가 보이긴 하지만). 단적으로 한국에는 존 포드에 관한 단 한권의 역서도 저서도 출간되어 있지 않다. 내가 역자로 참여한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한나래)의 한 챕터의 절반가량이, 장르적 시야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그나마 존 포드를 주의 깊게 다룬 유일한 한글본이다. 이런 상황은 시네마테크 프로그램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부산에서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밍을 8년째 해오고 있는 내 경험으로는,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 기획전은 객석이 텅텅 비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감행하기 힘들다. 상대적으로 더 많고 다양한 취향의 시네마테크 관객들이 모여 있는 서울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대다수의 프로그램이 유럽과 일본의 시네아스트들에 집중되어 있다. 장 르느와르, 에릭 로메르, 오즈 야스지로 등의 이름은 빈번히 오르내리지만, 존 포드, 하워드 혹스, 라울 월시 등의 이름은 찾기 힘들다. 어떤 시네마테크도 수익 혹은 점유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지만, 아직 우리에게 존 포드는 새롭게 해석되기보다 먼저 소개되어야 할 시네아스트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존 포드 이야기’라는 간판을 단 이 곳에서 나는 한 사람의 해석자가 아니라 소개자로서 존 포드를 말하려 한다. 그래서 이 글을 본 몇몇 사람이라도 존 포드의 영화를 보고 좋아하게 되기를 바란다. 존 포드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한 거장의 세계와 만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모든 음악의 흐름은 바하로 되돌아간다”는 쇤베르크의 말을 모방해 나는 ‘모든 영화의 흐름은 포드로 되돌아간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만일 이 말을 포드가 직접 듣는다면 그는 화를 내며(그는 다혈질이었고 예술 운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그리피스나 무르나우에게나 어울려”라고 말했을지 모르겠다. 또한 다른 만신전의 명부를 가진 많은 영화전문가들의 비웃음을 살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표현은 과장이다. 존 포드만큼 우뚝 솟은 많은 감독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영화들을 어떤 영화들보다 원형적이라고 느낀다. 고요한 대지, 말없는 사나이, 떠나는 자의 뒷모습, 발설되지 않은 신음과 폭발하는 광기, 축제와 난장의 활력과 도취, 경건한 제의, 안식으로서의 유머, 추하고 사랑스런 얼굴들, 숭고한 배려와 보살핌, 악인의 예의 혹은 성인(聖人)의 비행(非行), 빛과 어둠이 빚어내는 매혹과 불안과 피로의 풍경, 소멸해가는 공동체의 향기, 그들의 배열이 빚어내는 리듬과 화음과 아름다움 등등 내가 영화를 보고 경탄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영화에 담길 수 있을까. 나는 존 포드의 영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거기엔 우리가 영화에 빠지게 만든 대부분의 것들이 있다. 한 사람의 포드가 아니라 여러명의 포드가 있을 것이다.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오슨 웰즈에게 좋아하는 감독들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웰즈는 “존 포드, 존 포드, 그리고 존 포드”라고 답했다. 웰즈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나는 그의 대답을 존 포드의 다면적 원형성에 대한 찬사라고 느낀다. 존 포드의 영화를 보는 것은 장르와 사조를 넘어 시네마틱한 것들의 난장으로 입회하는 것이다. 존 포드 John Ford 존 포드는 1894년에 태어나 1973년에 죽었다. 1917년부터 1966년까지 무성영화, 단편, 다큐멘터리를 포함해 140여편의 영화를 감독했고(무성영화의 상당수는 소실되었다), 전무후무하게 4번의 오스카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으며 < 철마 The Iron Horse >(1924)를 비롯한 많은 영화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할리우드 주류에서 환대받았고 세속적 명예와 부를 얻은 가장 출세한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존 포드는, 고전기 할리우드의 다른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장인으로 존중받았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당대의 비평가들은 존 포드 영화의 미학적 가치에 대해선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이었다. 포드 스스로도 자신의 영화를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자신을 예술가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영화를 ‘시’라고 부른 한 평자의 말을 ‘헛소리’(horseshit)라고 일축했다. 존 포드가 당시의 미국 특히 뉴욕 지식인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꽤 알려진 두 가지 사례가 있다. 하나는 마틴 스콜세지의 경험담이다. 존 포드의 열렬한 팬인 스콜세지는 뉴욕대학교(NYU) 강사 시절이던 1969년 존 포드의 영화를 수업시간에 상영했다. 당시 강의를 들었던 한 학생은 이렇게 회고했다. “마티(마틴 스콜세지의 애칭)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가짜 권총을 든 채 교실에 들어왔다. 원래 상영할 예정이던 < 이창 > 대신 존 웨인이 가증스런 인종주의자를 연기하는 서부극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창>을 보려고 모여든 학생들은 모두 낙담해 ‘우’하고 소리를 질렀다. < 그린 베레 >가 공개중인 때로 존 웨인은 닉슨 다음으로 인기가 없는 인물이었다. ‘교실을 나가는 학생은 성적을 주지 않겠어’라며 가짜 권총을 든 채 스콜세지는 교실 문앞에 버티고 섰다. ‘영화의 제목은 < 수색자 >다. 이건 서부극 최고의 걸작이야’라고 말했다. 영사가 시작됐다...... 쓸쓸한 존 웨인의 모습이 황야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문을 통해 보여지는 마지막 장면이 끝났다.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마틴 스콜세지: 영화로서의 삶>) 1960년대 진보적인 뉴욕 대학생들의 야유를 불러일으켰던 < 수색자 >는 2012년 영국의 영화지 「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 Sound」가 전세계 846명의 영화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집계한 세계영화사 10베스트 명단의 7번째 자리를 차지했고 존 포드는 가장 위대한 감독 리스트에서 칼 드레이어와 함께 6번째 자리에 올라있다.(<수색자>가 10년마다 집계되는 이 명단에 처음 오른 것은 포드 사후 9년이 지난 1982년이었다.) <수색자 The Searchers>(1956) 또다른 사례는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에와 연관되어 있다. 두 사람은 1975년초 자신들의 작품 <모세와 아론>이 상영되는 뉴욕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다. 마르크주의자인 브레히트의 정신적인 제자를 자임한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당대의 가장 전위적인 작가로 평가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뜻밖에 2년 전에 죽은 존 포드를 보고 싶다고 말해 영화제 프로그래머인 리처드 라우드를 당황케 했다. 당시 젊은 영화학도였던 태그 캘러거는 이렇게 회고한다. “스트라우브에 관한 최초의 책을 출간한 바 있는 리처드 라우드는 존 포드를 스트라우브의 안티테제로 통렬히 비난한 바 있다. 라우드의 태도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당시 많은 뉴욕 사람들은 포드의 영화가 인종 차별과 군국주의, 가부장제, 쇼비니즘, 감상적인 통속성, 진부한 상투성을 옹호한다고들 했으며, 따라서 그를 혐오하는 것을 일종의 도덕적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태그 갤러거는 두 사람을 집으로 초청해 거실 바닥에서 존 포드의 < 순례 여행 Pilgrimage >(1933)과 < 도노반의 산호초 Donovan’s Reef >(1963)을 16mm 프린트로 같이 보았다. 영화를 본 다음 장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영화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 존 포드와 미조구치 겐지를 결합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경험담을 전한 태그 갤러거는 10여년 뒤 「JOHN FORD-The Man and His Films」(1986)를 썼고 이 책은 아직까지도 존 포드에 관한 최고의 연구서로 꼽힌다.) 많은 고전기 할리우드 거장들은 당대에는 비평적으로 경시되다가 영화 이력의 말기 혹은 사후에 주로 프랑스 누벨바그 세대에 의해 ‘작가’로 추앙되고 미국 평단이 이를 뒤따르는 경로를 밟았다. 잘 알려진 대로 1967년에 첫 출간된 프랑수아 트뤼포의 명저 「히치콕과의 대화」는 유능한 흥행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을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재평가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존 포드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누벨바그 세대가 작성한 ‘작가’ 명단에서 빠지진 않았지만 그에 대한 그들의 비평은 히치콕이나 하워드 혹스, 니콜라스 레이 등에 대한 숭배에 비하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편이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것이 누벨바그 세대의 대부인 앙드레 바쟁이 존 포드의 매력에 둔감한 데서 오는 ‘바쟁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바쟁은 서부극에 관한 비평을 여러 번 썼고 < 수색자 >를 수작으로 언급하긴 했지만, 같은 해에 나온 버드 보에티처의 < 7인의 무뢰한 Seven Men From Now >(1956)을 더 높이 평가했다. 누벨바그 평론가들의 기지였던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ema」 1958년 12월호에 실린 올 타임 베스트 명단의 24위 안에는 존 포드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1위는 무르나우의 < 선라이즈 >였다). 히치콕에 열광한 프랑수아 트뤼포도 존 포드에 대해선 냉소적이었다. 1975년에 쓴 에세이에서 트뤼포는 이렇게 고백했다. “비평가 시절에 나는 존 포드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악평을 두세번 썼다. 하지만 TV에서 < 말없는 사나이 The Quiet Man >(1952)를 보고 내가 얼마나 장님이었는지 깨달았다. 그의 영화를 계속 다시 보게 되었고 지금은 장 지오노만큼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The Films in My Life」). 하지만 포드의 사후에도 이 정도 논평이라면 어쩐지 인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74년에 쓴 추도문에서도 트뤼포는 “포드의 영화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가 항상 캐릭터에 우선권을 준다는 점이다.... 그는 모파상과 투르게네프에 비견될 수 있다.”고 썼다. 확실히 트뤼포에게 포드는 문학적인 감독으로 비쳤던 것 같다. 히치콕에게 트뤼포가 있었다면 존 포드에게는 린지 앤더슨 Lindsay Anderson(1924~ 1993)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영국 프리시네마의 기수이자 기념비적 작품 < 만약에... If... >(1968)를 만든 이 비평가/감독은 젊은 시절부터 자칭 ‘포드 중독자’였고, 「사이트 앤 사운드」 등을 통해 1951년부터 존 포드 영화에 관한 열렬한 찬사를 바쳤으며 다섯 차례 포드를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하지만 그의 비평은 종종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누벨바그 세대의 비평만한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고, 그나마 그의 비평과 인터뷰를 모은 단행본 「About John Ford」는 1981년에야 첫 출간되었다.(하지만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를 포드의 최고작 가운데 하나로, < 수색자 >를 퇴조의 징후가 명백한 영화로 꼽는 그의 독특한 견해는 존중할만한 예민함을 갖추고 있다.) 요컨대 존 포드는 고전기의 거장 가운데서도 가장 늦게 발견된 시네아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존 포드에 대한 비평의 지체에 대해 하스미 시게히코는 세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국적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자국 영화에 냉담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둘째는 진보적인 ‘전위 작가’, 보수반동의 ‘고전적인 작가’ 같은 이데올로기가 개입된 관념들이 영화를 볼 힘을 뺏기 쉽다는 것이다. 셋째는 1970년대까지도 영화사라는 개념의 성립에 필수적인 영화를 볼 기회가 매우 한정적이었다는 것이다. 2005년 5월25일 서울의 필름포럼에서 가진 강연회에서 하스미는 “그래서 존 포드에 대해선 우리(동양인)가 서양인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기세 좋게 주장했다. 하스미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존 포드의 영화를 더 잘 보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리와 시기에 있는 셈이다. 이 연재는 포드의 전기적 사실들과 그의 작품을 함께 다루게 될 것이다. 다음 회에는 존 포드라는 사람에 대해 주로 소개하려 한다. 존 포드라는 사람과 그의 작품 모두 모순투성이인 복합체라고 말한 사람은 태그 갤러거다. 예술가의 인격과 작품은 완전히 독립적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존 포드는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존 포드는 사람으로서도 매우 흥미로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