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고자
- 감독
- 장 피에르 멜빌
- 제작년도
- 1961
- 출연
- 장 폴 벨몽도, 세르주 레기아니, 장 데사일리, 르네 르페브르 , 다니엘 크로엥
한 시절이 끝나고 하나의 챕터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대나무 줄기처럼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면 그 마디의 끝은 5년, 10년 같은 숫자가 아닐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갈 때 비로소 한 시대가 나뉘는 마디를 느낀다. 2022년에도 많은 영화인들이 떠났다. 국내만 돌아봐도 김보경 배우, 이춘연 대표, 강한섭 영화평론가, 신정원 감독, 강수연 배우 등 각 분야의 영화인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니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세상을 떠났고 장 폴 벨몽도가 영면에 들었다. 장 마크 발레는 별이 되었고 시드니 포이티어는 역사에 새겨졌다. 그리고 마침내 장 뤽 고다르가 영원이 되었다. 장 뤽 고다르의 죽음과 함께 20세기 영화도 막을 내렸다는 탄식은 그저 수사가 아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한 세기가, 영화의 한 챕터가 과거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현재는 과거다. 많은 이들이 현재를 산다 착각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대체로 과거, 현재, 미래에 동시적으로 겹쳐 있다. 오늘을 살면서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고 내일의 일을 걱정하는 식이다. 물리적으로 접근하자면 과거의 흔적들이 축적되어 오늘의 토대가 되고 그렇게 조성된 환경 위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이건 과거에 얽매이는 집착과는 다르다. 해결될 수 없는 과거의 문제를 끌어안고 끙끙대는 게 집착이라면, 과거를 제대로 돌아보는 건 ‘나’를 나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성찰의 시간에 가깝다. 몇 해 동안 사사로운 베스트 영화를 꼽았지만 올해만큼 유달리 ‘되돌아보는’ 시간이 길어졌던 적도 없었다. 어떤 해는 내가 다시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위주로 골랐고, 언젠가는 온전히 취향을 고백하며 영화를 고른 적도 있다. 완전히 떠나보내기 위해 이별 편지를 쓰듯 영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올해는 지난 1년 뿐 아니라 영화 보고 글 쓰는 일을 업을 삼은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며 영화를 골랐다. 그리하여 지금 나와 마주보고 있는 영화는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 아마겟돈 타임 >이다. 과거라는 이름의 오래된 미래 그러고보니 매년 습관처럼 하는 서두의 말이 있다. <아마겟돈 타임>이 제임스 그레이의 최고작은 아니다. 감독의 최고작은 감독이 세상을 떠난 뒤에나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세상을 떠난 감독들의 지난 작품들을 살펴보니 애시당초 그런 건 불가능하다. 다르게 표현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 작품이야말로 나와 가장 깊숙이 접속하여 내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세간의 평가, 작품의 완성도, 지난 작품과의 비교를 염두에 두지 않고 말한다면 <아마겟돈 타임>은 2022년 본 영화 중 가장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방문을 두드린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의문이었다. 왜 굳이 이걸 지금 만들어야 했을까. 모든 영화에는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일정 부분 반영되는 게 자연스런 일이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그 농도가 꽤 높은 편이다. 자신이 나고 자란 뉴욕을 배경으로 한 다섯 편의 내밀한 드라마를 만들었던 제임스 그레이는 어느 날 갑자기 아마존 정글로 떠나더니(< 잃어버린 도시 Z >) 내친 걸음 아예 우주까지 다녀왔다가(< 애드 아스트라 >) 다시 집으로 귀환했다. 아니 단지 고향인 뉴욕 퀸즈로 돌아온 것을 넘어 가장 내밀하고 자전적인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아마겟돈 타임>의 전반부는 픽션이라기보다는 거의 일기에 가깝다. 제임스 그레이는 유대인 이민자의 자녀였고 아버지는 배관공이었다. 기술직인 아버지는 혹독한 환경에서 치열한 노력 끝에 중산층에 겨우 편입한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그랬듯 교사였고 사친회의 회장이었다. 주말이면 조부모와 대고모,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대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했고 부모님의 성화로 사립학교인 큐 포레스트로 전학을 간다. 제임스 그레이는 전학을 가기 전까지 학교에서 친하게 지낸 흑인 친구를 기억한다.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던 친구는 양아버지가 보내준 아폴로 미션 패치를 보물처럼 아꼈다. 어느 날 학교에서 흑인 친구와 마리화나를 나눠 피던 걸 걸린 제임스 그레이는 학습부진아로 낙인 찍힌다. 제임스 그레이의 어머니는 이 제안에 분노하며 제임스 그레이를 사립학교로 전학 시킨다. 불행히도 함께 잡혔던 흑인친구에겐 대신 보호해줄 보호자가 없었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흑인 친구는 사회복지사들에 의해 보호시설에 들어갈 처지에 놓이고 도망치듯 가출한다. 제임스 그레이는 그 친구가 자신의 집 뒷마당에서 얼마간 몰래 숨어 있던 나날을 기억한다. 오해하지 마시길. 이건 제임스 그레이의 어린 날이다. 동시에 영화 <아마겟돈 타임>의 전반부 내용이기도 하다. “상상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기억에 의존”했다는 감독의 고백처럼 거의 다큐멘터리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영화와 실화의 길이 갈라지는 건 6학년 폴(뱅크스 레페타)가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출을 결심하는 지점부터다. 폴은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흑인 친구 죠니(제일린 웹)을 설득해 사립학교의 컴퓨터를 훔쳐내기로 한다. 하지만 결국 이들의 범죄는 발각되고 두 사람은 함께 경찰서로 끌려간다. 여기서 또 한번, 한층 더 가혹하게 둘의 운명이 갈라진다. 다시 돌아와, 왜 하필 지금인가. 제임스 그레이가 자전적인 체험담을 굳이 지금 이런 방식으로 제작한 이유가 무엇일까.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70년대로 돌아가 < 리코리쉬 피자 >를 찍었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6년 만의 복귀작 <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를 통해 지난 생을 통째로 반추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중심으로 한 첫 번째 자전적 영화 < 더 파벨만스 >를 선보였다. 스필버그의 첫 번째 자전적 영화라니, 이미 여러 번 꾼 꿈을 다시 목격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건가. 중견 감독들이 왜 새삼 지금 자전적 이야기에 몰두하는가. 일련의 유행 아닌 유행이 코로나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활동이 축소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며 ‘되돌아보는 이야기’가 일종의 시대정신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분명한 건 지금이 잠시 멈춰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대나무 마디 같은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행위는 목적에 따라 도착지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제임스 그레이가 일기에 가까운 자전적 영화를 만든 이유를 한번 상상해보았다.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지만 단언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자전적 상황의 재현 자체가 <아마겟돈 타임>의 목적은 아니라는 점이다. 되돌아보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영화들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아름답고 행복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거나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애상에 잠긴다.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낭만화 하는 필터링, 이른바 노스텔지어의 정서에 흠뻑 젖은 영화들. 그런 의미에서 <아마겟돈 타임>은 되돌아보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아마겟돈 타임>은 건조하고 담담하다. 최소한 그런 위치를 유지하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쓴다. 제임스 그레이가, 아니 소년 폴이 그리워하는 시절은 소년 폴의 시절이 아니라 차라리 아버지 어빙(제레미 스트롱)의 시절, 더 거슬러 올라가 할아버지(안소니 홉킨스)의 시절이다. 소년이 직면한 상황은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그야말로 멸망 직전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면 <아마겟돈 타임>의 ‘지금’은, 1980년은 희망도 낙관도 없는 망해버린 세상의 초입이기 때문이다. 핵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는 불안과 위협의 시대.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된 해. 아메리칸 드림이 종말을 고한 해. 소년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어른으로서 생존의 시간. 그래서 ‘아마겟돈 타임’이다. 유령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1980년을 이야기의 무대로 택한 건 그 때 자신이 사립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 망가진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1980년에 도달한 쪽에 가깝다.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 두터운 유리천장과 사라진 사다리, 무엇보다 연대에의 희망이 사그라들고 분리, 차별, 혐오에 잠식당한 미국의 오늘을 어떻게 마주 봐야 할 것인가.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다 발견한 변화의 첫 번째 분기점이 레이건이 당선된 1980년이었게 아닐까. 다시 말해 <아마겟돈 타임>의 자전적 이야기와 회상은 목적이 아닌 도구다. 오늘의 폐허를 환기시키는 거울의 무대라고 해도 좋겠다. 아버지 어빙 역의 제레미 스트롱 배우는 말한다. “1980년 레이건 당선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여둔것과 같아요.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아주 사적인 렌즈를 통해 큰 이야기를 만든 거죠.” 사실 제임스 그레이가 그리워하는 시절은 소년 폴의 시절이 아니라 차라리 아버지의 시절, 더 거슬러 올라가 할아버지의 시절이다. 할아버지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미국에 정착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시절이 있었고 아버지가 간신히 중산층의 끄트머리에서 간신히 버틸 수 있는 시절도 지나가는 중이다. 이제 폴이 바야흐로 맞이해야 하는 시대는 계급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3루에서 태어난 이들이 3루타를 치고 노력했다고 당당히 말하는 시대다. 2022년의 제임스 그레이는 이미 폐허가 된 세상에 서서 과거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그리움보다는 어떤 결연함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이미 폴의 미래를 알고 있다. 폴이 할아버지처럼 약자를 존중하고 차별을 멀리하고 불의에 분노하며,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조언대로 “남자답게 맞서며” 살 수 있을까. 양심을 가진 사람들도 “인생은 불공평해. 행운이 찾아오면 감사해야 해.”라고 자조하면서 자신을 지키기도 급급한 세상에서 말이다. 조금씩 비겁해진 세상은 이윽고 고개 숙이고 침묵하며 각자도생 하는 지옥이 되었다. 계급의 사다리에서 추락할까 전전긍긍하는 개인의 비겁함과 소심함을 탓하는 게 아니다. 모두가 투사가 될 수 없음을 안다. 다만 침묵에 저항하는 걸 실패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저항할 수 있다. <아마겟돈 타임>은 세상을 바꾸자고 설득하는 영화가 아니다. 망각에 맞서, 최소한의 저항을 시도하는 영화다. 할아버지가 살았고, 믿고, 꿈꿨던 낙원은 이제 없다. 다시 온다해도 그것은 할아버지가 겪었던 낙원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낙원을 부활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지옥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그럼에도 지옥에서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희망을 꿈꿀 수 있다. <아마겟돈 타임>은 내게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읊조린 것처럼 들린다. 영화는 말한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네게 주어진 삶을 단지 받아들이는 거야. 뒤돌지 말고.” 이것은 유령의 목소리다. 유령은 사라진 존재가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옆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유령은 지나간 과거가 아닌 축적된 현재의 흔적이다. 마찬가지로 “뒤돌지 말라”는 영화의 속삭임은 타협도 낙담도 포기도 아니다. 내가 나로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다. 언젠가 다음 세대를 이어받을 너의 손을 놓지 않고, 기꺼이 유령이 되어 이 폐허 속을 함께 걷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유령과 함께 오늘까지 생존했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
침체의 시작 | 1970~1974년 197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계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며 국가 주도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지만, 그해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어두운 일면을 극명하게 부각했다. 1972년 10월 유신 정권이 탄생했고, 한국 사회는 더욱 경직되어갔다. 물론 사회를 반영하는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는 1970년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기업형 제작사를 육성하겠다는 정부 주도의 정책은 인위적이었던 만큼 효과가 오래가지 않았고, 폐해는 더 커져갔다. 이제 더 이상 영화를 대중오락의 왕자라고 부르기도 힘들었다. 1970년대 내내, 흑백이었지만 텔레비전 보급률이 꾸준히 상승한 반면 전국의 영화관 및 영화 관객 수는 줄어들었다. 불황기, 침체기 그리고 쇠퇴기로 불리는 이 시기, 영화인들은 더 나빠지지 않을 방향을 모색해야만 했다. 1973년 2월, 유신 체제를 반영한 영화법 4차 개정이 있었다. 그 골자는 1)제작사를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전환 2)제작업과 수입업의 통합 3)영화진흥공사의 설립이었다. 1972년 20개이던 영화제작사는 1973년 12개로 줄었고, 그 12개사에 제작권을 부여해 연간 제작편수를 130편으로 묶었다. 47편으로 한정한 수입권도 12개 제작사에만 나눠주었다. 국산영화 3편을 제작하면 외화 쿼터 1편을 부여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영화는 외국영화 수입 쿼터를 받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작사들은 졸속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제작비 대비 흥행 성적이 안정적인 저예산 액션영화 장르가 유행한 이유였다. 특히 이런 유의 영화는 네거티브 필름을 반만 써서 촬영하는 테크니스코프 사이즈로 만들어져, 제작비를 아끼는 대신 완성도는 포기했다. 외화 쿼터를 더 따내기 위한 방법은 정부가 제시하는 ‘국책영화’ ‘우수영화’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었다. 제작사들은 관객보다는 정권의 기호에 부응한 반공영화, 새마을영화를 만들었다. 한편 ‘한국영화의 육성과 발전’을 슬로건으로 내건 영화진흥공사가 발족되어 유신 정권의 지배구조를 영화 산업 내부로 뿌리내리는 역할을 맡았다. 영화계의 불황을 타개하겠다는 당국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불황은 가속화되었다. 1971년까지 200편을 넘겼던 한국영화 편수는, 검열 편수 기준으로 1972년 122편, 1973년 125편, 1974년 141편을 기록했다. 이러한 침체 일로의 영화계에 일순간 활력을 불어넣은 작품이 바로 이장호 의 < 별들의 고향 >이었다. 행운아에서 풍운아로 1945년 5월 서울에서 출생한 이장호 는, 흥미롭게도 영화 검열관이던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영화와 가깝게 지냈다. 홍익대 건축미술학과에 입학했지만 제도권 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부친의 권유로 신필림에 입사하게 된다. 그는 신상옥 감독 등의 연출부 생활을 했으나 적극적으로 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출부를 중도에 그만두기도 하고 극단 생활을 위해 신필림을 들락날락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일을 모색했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한순간에 바뀌었다. 1973년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별들의 고향」의 판권을 우여곡절 끝에 확보한 것이다. 사실 소설가 최인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였는데, 그렇다고 감독 데뷔도 하지 않은 친구에게 덜컥 판권을 넘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장호는 동생의 대학등록금을 최인호의 집에 던져놓고 오는 막무가내로, 결국 승낙을 받아낸다. 영화화 권리는 확보했지만 이후의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스승 신상옥 감독이 데뷔는 시켜주지만 신필름의 노장 이형표 감독에게 촬영을 맡긴다고 하자, 연출권을 확보하기 힘들 것을 직감한 그는 신필림을 도망치듯 떠나 하길종 감독이 소개한 화천공사로 옮긴다. 도제 시스템이 확고하던 시절, 연출부 제2조수 출신의 영화청년이 일순간 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여하튼 기적 같은 일이었다. 눈으로 뒤덮인 광나루의 백사장에 도착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즉흥적으로 장면들을 만들어나간 것이 첫 연출 풍경이었다는 일화처럼 행운과 돌파력, 천재적 기질 사이의 어딘가에서 < 별들의 고향 >이 탄생했고, 이장호는 46만이라는, 당시로는 전무후무한 흥행 성적으로 충무로의 스타 감독이 되었다. 1975년 연배가 위인 하길종, 김호선 등과 결성한 ‘영상시대’를 통해 ‘뉴시네마 운동’의 흐름을 이끌던 그는, 1976년 연예인 대마초 파동으로 감독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촉망받는 젊은 감독에서 순식간에 낭인으로 전락한 4년간의 시간은, 그가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12월 유신 정권 종식으로 감독 자격을 회복한 그는 그간의 고민을 담아 연출한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로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작가주의적 인장이 새겨진 < 바보선언 >(1983), < 과부춤 >(1983)의 흥행 실패로 위기감을 느꼈지만, 보란 듯이 < 무릎과 무릎 사이 > (1984), < 어우동 >(1985)을 히트시키며 상업적 감각을 입증하기도 했다. 1987년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이후의 영화는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30대 후반의 이장호 감독. <과부춤> 촬영 현장에서 아마추어리즘이 만든 참신함 1972년 9월 「조선일보」에서 연재를 시작한 「별들의 고향」은 연재 중은 물론이고, 단행본으로 출간된 1973년 한 해에만 15만 부가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장호 가 연출의 기회를 잡고 개봉 초기 관객의 주목을 끌어낸 것은 당대 최고의 소설을 판권으로 확보한 덕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단관 개봉 시절, 국도극장 한 곳에서만 석 달을 상영하며 46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기록은, 영화 자체의 힘이 분명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기성 감독 누군가가 이 영화를 맡았다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 별들의 고향 >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거칠고 투박하지만 신선하고 감각적인 이 영화를 만날 수 있었을까. 당시 충무로의 선배 감독 다수가 판권을 탐내는 상황에서, 특유의 직관과 돌파력으로 이런저런 난관을 이겨낸 이장호는 어떻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사실 그는, 카메라를 직접 잡는 신상옥 감독 특유의 촬영 현장에서 게다가 제2조감독에 머물렀기 때문에 연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구영화를 섭렵했던 영화청년으로서의 세월이 그의 연출 방향을 직관적으로 알려주었다. 그냥 자기 느낌대로 한 것이다. 물론 당대 최고의 촬영기사 장석준 이 함께한 것은 천우신조였다. 이장호는 자신이 즐겨본 일본의 전문 사진잡지 「아사히 카메라」에서 스크랩한 이미지들을 장석준 기사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척하고 구도를 잡아냈다. 영상뿐만 아니라 음악도 큰 몫을 했다. 이전의 한국영화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영화음악의 대가들이 녹음실에 오케스트라를 불러 잠깐 맞춰본 뒤 일사천리로 음악을 녹음하는 식이었다. 이장호는 고교 후배인 가수 이장희 에게 음악을 맡겼고, 아예 레코드 스튜디오에 자리 잡고 무려 40여 일을 투자했다. 이장희가 작곡하고 노래를 부르고 기타리스트 강근식 이 연주한 <별들의 고향>의 영화음악은, 국내 첫 OST 음반으로도 발매되어 영화만큼 성공을 거뒀다(그 이전의 한국영화 음반은 주제가가 수록된 것이지만, 이 앨범은 문자 그대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었다). 물론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 혹은 잘 몰라서, 신선하게 음악을 배치한 것도 이장호의 감각을 기반으로 했다. 이장희가 부르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소녀가 울고 있네’가 흐르는 장면들의 참신함이 특히 그렇다. 물론 시퀀스 전체를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음악을 전면에 내세워 연결한 장면들은, < 졸업 The Graduate>(마이크 니콜스, 1967) 같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장호가 “아마추어리즘의 승리”라고 규정한 것처럼, <별들의 고향>이라는 희대의 흥행작은 새로운 세대가 그들의 느낌대로 밀고 나간 덕분이었다. 사실 이 영화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와 같은 혁신을 일으켰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운규가 그리피스의 대작 멜로드라마를 염두에 두고 < 아리랑 >(1926)을 만들고, 이만희 가 할리우드의 빼어난 장르영화와 유럽의 예술영화를 소화해 < 만추 >(1966)를 만든 것처럼, 한국 상업영화의 새로움은 늘 서구 영화의 언어와 문법에서 힌트를 찾았다. 이장호 영화의 새로움 역시 서구 영화의 고전과 현대작을 섭렵한 영화광 출신의 감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이는 <별들의 고향>에서 표면적으로 보이는 < 네 멋대로 해라 A Bout de Souffle>(장 뤽 고다르, 1959)의 장 폴 벨몽도의 중절모나 < 상하이에서 온 여인 The Lady from Shanghai>(오손 웰스, 1947)의 거울의 방 같은 설정을 넘어서는 문제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기존의 한국영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었다는 사실이다.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 같은 대사가 흐르던 바로 그 장면 멜로드라마와 새로움 사이 < 별들의 고향 >은 20대 중반의 순진하고 발랄한 여성 경아( 안인숙 )와 그녀가 만난 4명의 남자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사실 영화는 내러티브의 밀도가 희박한 편으로, 시간순으로 줄거리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소설을 빌려 그 행간을 채워야 한다. 작은 회사 경리인 경아는 직장 선배인 영석( 하용수 )의 구애로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그는 아이까지 지운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두 번째 남자는 중년의 만준( 윤일봉 )이다. 경아는 만준의 두 번째 부인이 되지만, 경아를 닮은 전부인이 의처증으로 자살한 것과 경아의 낙태 경험이 밝혀지면서 파경을 맞는다. 이후 경아는 호스티스가 되고 화가 문오( 신성일 )를 만난다. 삶의 의욕을 잃었던 둘은 동거를 시작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지만, 폭력적으로 그녀에 집착하는 옛 애인 동혁( 백일섭 )이 찾아오면서, 문오도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고향으로 떠났다 서울로 돌아온 문오는 1년 반 만에 술집에 있는 경아를 만나고, 그녀가 잠든 사이 돈을 두고 나온다. 그리고 1년 후 경아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눈밭에서 죽음을 맞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문오가 유골함을 들고 경아를 회상하는 장면과 한강에 그녀의 재를 뿌리는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촘촘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에 기반을 둔 것이 그 이유겠지만,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연출하며 장면을 만든 결과이기도 했다. 촬영해놓은 필름을 돌려보며 편집실에서 구성을 시작했다는 이장호의 증언처럼, 그는 편집을 통해 아마추어리즘을 참신함으로 바꿔놓았다. 이 영화는 플래시백의 리듬도 균일하지 않고 오히려 복잡하지만 이는 되레 관객에게 긴장감을 주고 영화 속으로 몰입시킨다는 점에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영화의 발전도 계단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별들의 고향>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관객을 한 단계 성숙시킨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별들의 고향> 역시 이전 한국영화의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지금의 감각으로는 영화의 중반부 두 번째 남자 만준과의 에피소드가 특히 그렇다. 하지만 경아로 분한 안인숙의 연기가 이마저도 상쇄시킨다. 아역 배우 출신인 그녀는 여리고 순진하고 발랄하지만 도시의 비정한 남자들에게 버림받는 경아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 영화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이 영화는 여성의 수난담과 성적 과잉을 관음증적 볼거리로 제공하는 호스티스 영화의 출발점으로도 평가된다. 하지만 카메라가 경아를 잡아내는 구도나 쇼트들의 배치를 자세히 보면 여성의 입장에 공감하고 가부장적 폭력을 고발하는 것으로도 읽어낼 수 있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 경아역의 안인숙 호스티스 영화와 청년 영화의 산파가 되다 < 별들의 고향 >이 출현한 덕분에 1970년대 중반의 한국영화와 관객들도 새로운 활력을 얻은 것은 분명하다. <별들의 고향>이 선취한 도시 속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김호선 감독에 의해 세련돼졌다. 조선작의 연작소설을 원작으로 한 < 영자의 전성시대 > (1975)가 36만 관객을, 조해일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 겨울여자 >(1977)가 58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과 비평 양쪽을 두루 만족시켰다. 하지만 이 작품들의 성공은 1970년대 후반, 순수한 여주인공이 호스티스로 전락해 여러 남성을 거치는 과정을 관음증적으로 전시하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가 양산되는 계기가 된다. ‘청년 영화’로서의 선명한 줄기는 미국 영화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하길종 이 만들어냈다. 통기타. 청바지.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의 생기에, 당대 청년들의 저항과 체념의 정서까지 담아낸 < 바보들의 행진 >(1975)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