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키 브라운
- 감독
- 쿠엔틴 타란티노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팸 그리어, 사무엘 L. 잭슨, 브리짓트 폰다, 마이클 키튼, 로버트 드 니로, 마이클 보웬, 크리스 터커, 리사 게이 해밀턴, 톰 티니 리스터 주니어, 해티 윈스톤, 시드 헤이그, 엘리스 윌리암스, 에이미 그레이험, 다이아나 우리베, 택야 크리스탈 케이마
쿠엔틴 타란티노가 찰스 맨슨 일당의 샤론 테이트 살해 사건을 다룬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묘했다, 타란티노의 관심은 언제나 현실이 아니라 영화였다. 그가 열광하며 보았던 온갖 영화들에서 증폭되고 변형되어 황홀한 영화적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완벽한 피안이었다. 현실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찰나를 만끽하는 영화적 리얼리티의 낙원을 타란티노는 창조했다. 역시 타란티노였다.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2019)는 샤론 테이트의 살해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라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영화들을 타란티노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세계였다. 샤론 테이트가 죽지 않은 세계를 보여주는 평행우주랄까. 마블이 < 어벤져스:엔드게임 >(2019)에서 핑거스텝으로 사라진 사람들을 되살리는 평행우주를 만들었던 것과도 비슷하다, 타란티노는 영화 속에 샤론 테이트가 영원히 살아 있는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그곳에서 샤론 테이트는 어떤 미래를 살았을까. 영화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스타가 되었을까. 아니면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로서 살아가다가 이혼하고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갔을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중심은 그러나 샤론 테이트가 아니다. 한때 TV 드라마 <바운티 로>의 주연으로 인기를 끌었다가 서서히 내려가고 있는 릭 달튼과 그의 스턴트 배우인 클리프 부스다. 미국이 아닌 이탈리아에서 서부극을 찍으러 가는 릭 달튼의 행보를 보면 당연히 지금까지 거장으로 현존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젊은 시절이 겹치게 된다. 1959-65년까지 방영된 드라마 <로하이드>로 인기를 얻었고, 1964년부터 세르지오 레오네의 < 황야의 무법자 <(Fistful of Dollars), < 석양의 무법자 >(For a Few Dollars More), < 석양에 돌아오다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를 찍으며 또 다른 명성을 얻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릭 달튼은 평행우주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타란티노는 영화 속에 실제 배우와 영화들을 마구 던져놓는다. 여자들은 샌님들만 좋아한다고 투덜대는 스티브 맥퀸이 나오고, <대탈주>에 대신 릭 달튼이 출연한 상상을 보여준다. 최고라고 으스대는 이소룡이 클리프 부스하고 싸우다 망신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조롱하기도 한다. 인종차별이라는 비판을 당연히 받았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곳은 다른 세계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이소룡은 우리가 알고 보았던 이소룡과 다르다. 슈퍼맨이 평행우주에서 슈피히어로가 아니라 빌런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이곳의 이소룡은 오만한 허풍꾼이다. < 재키 브라운 >(1997)을 만들었을 때의 비판이 생각난다. 당시 스파이크 리는 < 펄프 픽션 >(1994)과 <재키 브라운>에서 흑인들이 내뱉는 ‘깜둥이’(nigger)라는 단어 등을 거론하며 인종차별이라고 비판했다. 타란티노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흑인 친구들은 늘 서로 ‘깜둥이’라고 부른다며 웃어 넘겼다. 타란티노의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모든 것이 재배치되고, 새롭게 해석되는 평행우주다. 그것 역시 현실의 반영이라고? 찰스 맨슨을 숭배하는 히피족들은 이미지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TV에 나오는 폭력적인 드라마들을 보면서 성장한 탓에 폭력적이 되었고, 그들을 타락시킨 감독과 배우들을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이미지는 곧 현실이다. 마약에 취해 눈앞에 보이는 환영도 그들에게는 현실이다. 그들은 허튼 망상을 믿고, 망상을 현실에 구현하려 한다. 그것이 현실에서 벌어진 찰스 맨슨 일당의 범죄였다. 영화나 TV 등의 이미지가 그들을 타락시킨 것이 이유일까? 아니다. 찰스 맨슨 일당이 호화 주택가로 침입하여 범죄를 저지르려 한 동기는 개인적 원한이다. 돼지새끼라던가, 그들의 어린 시절을 망쳐놓았다던가 하는 말들은 다 헛소리다. 그들에게 현실은 모두 왜곡된 이미지이고, 그들을 타락시키는 가짜가 된다. 그렇게 가짜와 진짜를 뒤섞으면서, 엉망진창인 히피들의 낙원을 허름한 목장에 구현한다.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가짜 현실을 만들어냈고 점점 망상에 사로잡힌다. 영화에서 한 번도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정면으로 보인 적이 없는 스턴트 배우 클리프 부스는 스판 목장에 가자마자 알아차린다. 이곳은 가짜라는 것을. 히피들은 가짜를 진짜라고 세뇌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클리프는 언제나 자신이 가짜임을 알고 있으니까, 그들의 모순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영화 속의 그는 가짜이고, 현실의 그는 가짜로서 재현되는 자신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곧 타란티노의 영화 속 우주다. 영화의 세계야말로 지극히 구체적인 현실이고, 영화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그건 영화일 뿐이야, 라고 말해도 좋다.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클리프 부스는 아내를 살해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타란티노는 무엇이 진실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클리프는 정말 살인자일까? 필요하다면 클리프는 태연하게 살인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클리프가 아내를 살해했는지 여부는 과연 중요한 것일까? 보통의 영화라면 그렇다.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타란티노는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 지금 보이는 이미지만으로 그를 판단하고 빠져들게 만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보여주는 이미지는 결국 가짜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짜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진실을 발견한다. 우리가 원했던 진실을, 타란티노는 유려하게 만들어내서 보여준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은, 극장을 찾아가는 샤론 테이트였다. 샤론 테이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 <렉킹 크루>(The Wrecking Crew>를 보러 간다. 자신이 출연한 배우라고 극장 직원에게 소개하고, 포스터 앞에서 사진을 찍고, 어두운 극장에서 스크린을 보며 미소 짓는다. 딘 마틴이 출연한 스파이영화. 영화에 출연한 자신을 보며 너무나 행복해 하는 샤론 테이트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쓰렸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그녀가 곧 죽어야만 한다니. 시간을 멈추고만 싶었다. 이미 타란티노는 < 바스터즈:거친 녀석들 >(2009)에서 히틀러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모두가 히틀러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다. 그는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래도 타란티노는 굳이 특공대가 히틀러를 암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고 싶으니까. 나의 세계, 내가 만든 영화에서 히틀러는 끔찍하게 죽어야만 하니까. 실제 역사가 어떻건 나의 우주에서 히틀러는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어야 마땅하니까. 아마도 그런 마음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상상이 아니라, 또 다른 우주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서 아마도 샤론 테이트는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가끔 이웃의 릭 달튼과 술을 마시기도 하면서. 샤론 테이트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안도했다. 아, 그녀는 죽지 않았구나. 살아 있구나. 타란티노의 영화 속이라면, 나는 그녀의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겠구나. 그래서 너무나 좋았다. 타란티노 특유의 ‘헤모글로빈’은 마지막에 한 번 강렬하게 나올 뿐이지만, 그의 어떤 영화보다도 더 끌렸다. 단지 그녀가 살아 있는 우주를 선사해줬다는 점에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영화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덕력자다. 그는 비디오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섭렵한 온갖 영화들을 자산으로 자신의 영화 세계를 쌓았는데, 다시 말해 정규교육의 도움 없이 오롯이 영화 그 자체만을 교재 삼아 스스로를 훈련시킨 씨네 키드인 것이다. 일본이나 홍콩 등에서 도착한 액션 및 무협 영화나 미국 B급 영화들을 사랑했던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세계는 수다스럽기 그지없고, 유혈 낭자한 폭력이 가득하며, 지나치게 얽히고설킨 실타래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인물들을 다수 포함한다. 또 그는 팝 음악으로 구성되는 OST를 비롯해 왕왕 대중문화에 대한 사랑과 논평을 표출하고, 씨네 키드답게 다른 영화의 장면을 인용해오고는 한다. 이와 함께 타란티노 월드를 지탱하는 한편에는, 초기 < 저수지의 개들 >이나 , < 펄프 픽션 >부터 시작된 비선형적 서사구조가 있다. 여기서 하나의 사건은 캐릭터들의 다양한 시점별로 자꾸 반복되며 시간 진행을 멈춘다. 다른 한편 < 킬빌 > 시리즈부터 복수를 테마로 다양한 변주들을 선보이고 있는 그는 여성, 흑인, 유대인 등 역사적으로 핍박받은 존재들을 불러들여 극도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복수극을 완성한다. 그중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한 < 재키 브라운 >(1997)과 < 장고: 분노의 추적자 >(2012) 이다. 두 영화는 좀 더 직접적으로 이전에 제작된 작품의 설정에 기반을 두거나 그에 대한 오마주를 포함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두 영화의 제목 모두 그가 열광했던 영화 및 그 주인공의 이름을 호명한다. <폭시 브라운>(1974), < 재키 브라운 >(1997) 포스터의 동일한 제목 타이포 < 재키 브라운 >은 70년대 흑인 B무비에서 활약한 팸 그리어를 스크린으로 소환한다. 원작소설의 재키 버크가 영화로 오면서 재키 브라운으로 이름이 바뀐 이유는 팸 그리어가 70년대 분한 <폭시 브라운>(1974) 이란 영화 때문이며, <재키 브라운> 포스터의 글씨체도 그 영화에서 따온 것이다. 이러한 오마주와 관련해서 영화의 첫 장면은 단연 인상적인데, 수평 에스컬레이터를 탄 팸 그리어(재키 브라운 역)를 따라 트래킹으로 진행되는 롱테이크 장면은 그녀를 누구보다 당당하고 우아한 존재로 각인시킨다. 이 밖에도 명품 중년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와 70년대 분위기의 조화는 영화 전체가 마치 70년대 영화에 대한 오마주처럼 느껴지게 한다. 또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가 유명세로 인해 부과된 짐을 뒤로하고 여기서 유유자적 자신의 영화 취향을 즐기고 있는 것도 같다. 영화를 정말 사랑하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던 그의 말처럼 감독의 사랑은 관객에게도 느긋하고 즐거운 시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 장고: 분노의 추적자 > < 장고: 분노의 추적자 >의 경우 쿠엔틴 타란티노의 미국 최고 흥행작이기도 하다. 여기서 감독의 재기는 현상 수배범을 잡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에서 발휘된다. 상대방의 수를 읽고 이를 제압하는 능수능란한 전략전술은 시원스럽고 호탕하다. 한편 감독은 1966년 작 <장고>에서 장고가 홀로 적진에 둘러싸여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가 갑자기 엄청난 기관총을 꺼내 한 번에 적들을 무찌를 때의 통쾌함을, 노예 시대와 관련한 카타르시스로 연결 짓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서부극의 영웅 장고를 미국 남부 노예 시대의 풍경에 분연히 일어서는 영웅의 모습으로 재해석한다. 로버트 포스터( 재키 브라운 ), 크리스토프 왈츠( 장고: 분노의 추적자 ) 그런데 두 영화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각각의 영화에 등장하는 조력자 캐릭터다. 주인공보다 더 영화를 중심에서 이끈다 생각될 정도로 멋진 그 조력자들의 태도에는 어떤 기품이 흐른다. < 재키 브라 운>에서 로버트 포스터(맥스 체리 역)는 재키를 향한 열정과 연륜에서 비롯된 체념을 현명한 중년의 눈빛과 자태 속에 함께 녹여낸다. 영화에서 느껴지는 품위는 어쩌면 로버트 포스터가 보여주는 그 자태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장고: 분노의 추적자 >를 이끄는 조력자는 크리스토프 왈츠(닥터 킹 슐츠 역)이다. 장고가 개인적인 복수를 목표로 앞만 보고 달리는 인물이라면, 슐츠는 노예제도나 각종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환멸 및 조롱 등을 복합적으로 드러내는 전략가이다. 타란티노 감독은 노예제 사회 백인들을 역겹고 우스운 존재들로 만들어 비판을 대신하는데, 이런 정서를 표출하는 인물인 슐츠는 극의 절정에 달해 침착한 면모를 버리고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의 서문을 연다. 슐츠의 기품이 극 전체를 이끌며 노예제 사회에 대한 평가와 태도를 써 내려 가게 되는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이 얼마나 산만하고 시끄러우며 폭력적이든지 그것들은 통쾌한 감정적 해소 한방을 위해 발휘된다. 그 한방은 모순과 우연으로 점철된 치열한 인간사 및 그 폭력성에 대한 감정분출이다. 그는 B무비들이 펼쳐놓은 판타지를 이런 감정분출의 출구로서 재해석하고 업데이트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타지는 피로하고 짜증 나는 현실에 극도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그의 영화들과 함께 답답한 기분에 상상의 기관총을 난사해 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