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같은 이야기 - 저작권 제자리 찾아주기 프로젝트 1.0
- 감독
- 태준식
- 제작년도
- 2006
한 작품의 두 제목: <남녀공학>과 <학창시절> 1976년 개봉한 영화 <학창시절>의 신문광고 포스터에는 작게 ‘原名(원명): 男女共學(남녀공학)’이라는 또 다른 제목이 표기되어 있다. 본 작품이 특정 영화의 리메이크작이거나 원작 소설 등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원명’이 따로 명기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까 <학창시절>이라는 작품명보다 원래 의도한 이름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명기하는 것은 다소 의아한 일이다. 당시 영화제목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문공부에 서류를 제출하고 그 합당함을 인정받아야 했기에, <남녀공학>과 마찬가지로 <학창시절> 역시 학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에 대한 영화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데도 굳이 제명을 변경한 것은 그 수고스러움에 비해 크게 얻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변경했다면, 그리고 이전의 제목까지 명기했다면 제명을 변경한 것은 적어도 제작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겨 말하자면 영화 <학창시절>은 시나리오 표절시비사건에 휘말리면서 세간의 이목을 끈 작품이었다. 1960-70년대 한국영화에서 표절시비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이를 규제할만한 저작권법이 명확하게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표절은 그리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지 않았고,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문제시 되었던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표절에 대한 무관심이 이어졌다 1 . 이러한 상황에서 <학창시절>의 시나리오 표절시비사건이 대두된 것은 꽤나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작품의 표절시비 사건으로 인해 당시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 위원장이 사퇴의사를 밝히는 등 이 작품의 표절시비 사건은 표절을 여부를 가리는 문제를 넘어서는 데에 까지 확대되면서 당시 ‘민간심의기구’라는 예륜의 지위와 책임, 그리고 문공부가 이 심의기구를 대하는 태도 등을 매우 흥미롭게 보여준다. 영화검열에 있어 1970년대라는 시대적 레토릭이 발휘하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검열에 대한 상(像)이 고정되어 있는 것, 영화검열은 곧 삭제라는 행위로 간소화되고 이는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상식과 같은 생각들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에 따라 검열자는 국가라는 단일한 주체로 결정되고, 심의와 관련한 모든 기구의 의견은 국가의 것으로 간주된다. 특히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예륜, 1976년 5월 이후 이름을 바꾼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의 시나리오 심의는 폭력적인 검열을 행한 국가의 의견과 등치에 놓인 채 구분되지 않는 경향이 짙다. 물론 당시 민간심의기구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던 예륜이나 공윤은 예산이나 위원장의 임명 등을 문공부의 관리 아래에서 진행했지만, 이것으로 예륜이나 공윤이 국가 검열권력과 동등한 선상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학창시절>의 표절시비 사건을 파악할 수 있는 심의서류는 당시의 예륜이 수많은 돌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대처했는지, 쉽게 책임질 상황을 만들지 않는 국가 검열로 인해 어떠한 취급을 받았는지 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예상 밖의 검열의 이면을 바라보게 한다. 검열 질서를 깨뜨리는 돌발적 상황들 <학창시절>은 1975년 11월 15일 <고교남녀공학>이라는 제목으로 2 예륜에 심의 신청했던 시나리오가 수정 통과된 후, 같은 해 11월 21일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 12월 7일 문공부로부터 제작신고 수리를 통보 받은 후 영화제작에 착수한다. 이 과정은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영화검열의 기본적인 절차로 제작사는 예륜을 통해 먼저 시나리오 심의를 받은 후, 그 결과에 따라 문공부 측에 제작하겠다는 허가를 요청하며 3 , 문공부가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와 자체적으로 심의한 유의사항을 덧붙여 영화제작을 허락하는 절차에 따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문공부의 제작허가는 절차상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만약 시나리오에서 문제가 발생할 시 그 책임을 전적으로 예륜의 몫으로 미룰 수 있다는 점이다. <남녀공학>의 표절시비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문공부의 태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에서 미성년자의 음주나 일탈 등에 대한 몇 군데의 지적에 그쳐 제작에 착수했던 <남녀공학>은 12월 5일 접수된 ‘대한민국 영화 애호가’의 투서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남녀공학> 표절 시비를 촉발시킨 청원서 문공부장관 앞으로 보낸 청원서에는 <남녀공학>이 소화34년(1959)년에 발행된 『月刊 シナリオ』(월간 시나리오)에 실렸던 <ハイティーン>(하이틴)을 ‘표절 각색한’ 작품이라고 지적하며, 이미 일본에서 제작·상영된 바 있는 이 영화의 허가·상영은 내년 ‘아세아 영화제가 개최되는 시기에’ ‘이 작품 내용을 아는 일본인들이나 그 외 사람들이’ 안다면 ‘엄청난 챙피’와 ‘국위를 손상 시킬 것’이며, ‘민족 고유 미풍양속을 저해시키는’ 일이 될 것이라 덧붙인다. 이에 문공부는 곧바로 예륜 측에 청원서에 대한 의견 조회를 요청하고 해를 넘긴 1976년 1월 8일, 예륜은 「영화 1733-16853(청원서에 대한 의견조회)에 대한 결과보고」를 통해 ‘상황 및 디테일(부분, 항목) 설정이 전체적으로 흡사한 점이 많고’, ‘교사의 봉임과정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 등 인물들의 설정에 유사성을 들어 ‘표절이라는 판정을 면하기 어렵다고 사료(인정)됨’이라는 의견을 문공부 측으로 전달한다. 이러한 예륜의 판정은 처음 시나리오를 심의 후 통과시킨 자신들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고 그 결과를 번복한 셈이다. 그러나 <남녀공학>의 문제는 표절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이 표절시비에 휘말리면서 예륜의 의견서를 제외하고도 제출된 표절관련 의견서가 세 편에 이르는데 이 중 한국영화인협회(이하 영협) 시나리오 위원회라는 정확한 주체를 밝히고 제출한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출처가 불명확하다 4 . 이렇게 영화인들이 직접적으로 의견서를 제출한 데에는 이 작품의 각본을 담당했던 황영빈의 당시 지위가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남녀공학> 원작자 황영빈의 영화제작승낙서 <남녀공학>의 제작신고서에는 각본이 원작자 황영빈, 각색자 서인경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원작자의 영화제작 승낙서」가 첨부되어 있다. 이 중 황영빈은 당시 영협의 시나리오 위원회 위원장이자 영협의 부이사장, 예륜의 윤리위원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시나리오 표절문제는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황영빈이 시나리오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당선된 직후 발생한 이 작품의 표절시비는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의 권력 다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었다. 표절이라 판단한 예륜의 의견서와 비슷한 시기에 제출된 시나리오 위원회의 자체 의견서는 표절이 아니라고 결정 두 기구 간의 의견도 엇갈렸지만,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에서도 80여명의 회원이 양쪽으로 갈려 치열한 논쟁이 오고갔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표절시비사건이었지만 그 내막에는 직전에 있던 시나리오 위원회 위원장 선거에서 패배한 측에서 보복으로 라이벌이었던 황영빈을 몰아세워 위원장직에서 사퇴시키려 의도가 도시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5 . 앞서 살펴본 청원서의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점, 그러니까 영화와 관련한 업무를 맡아보는 문공부와 예술국장을 명시하고 있으며, 현재 <남녀공학>을 찍고 있는 지역과 제작사 일시 등을 알고 있고, 각본가와 감독의 이름, 표절이 의심되는 작품의 출처와 상영의 여부 등을 명시한 것으로 보아 영화계 내부인사의 청원서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기에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의 표절에 대한 상반된 결정이 시나리오 위원회의 권력다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6 . 결국 이러한 다툼 속에서 제출된 보고서들은 완전히 상반된 견해를 내놓고 있었고, 작가들은 <하이틴>이라는 작품은 본 적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예륜은 이 작품이 표절이라 판단 내렸던 것이다. 예륜은 왜 표절 판정을 번복하는가? 예륜이 1월 8일 문공부 측에 보낸 「영화 1733-16853(청원서에 대한 의견조회)에 대한 결과보고」는 하루 전인 1월 7일에 작성된 것인데, 같은 날 작성된 「예륜 위원장 개인의견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서류는 1월 8일 문공부 측에 보내는 위의 공문과 작가들의 해명서와 함께 발송된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표절을 인정한 예륜 위원장 개인의견서 결국 예륜 위원장은 이 작품이 표절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표절문제가 불거진 것이 ‘원작자의 직소(直訴)’, 즉 <하이틴> 원작자의 직접적인 호소에 의한 것이 아니니 선처를 베풀어 달라는 첨언을 한 것이다. 이는 예륜 위원장이 표절 자체를 중대한 문제로 삼는다기보다 사후적인 처리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시나리오 심의 결과를 번복하고 있는 예륜의 입장에선 문공부의 처분에 따라 자신들의 위상이 흔들릴 수도 있었기에, 「예륜 위원장의 개인의견서」라는 가장 정중한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에 대한 신뢰와 심의기구에 대한 존중을 요청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공부는 이러한 예륜의 공문을 받은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월 14일, 「국산영화 시나리오 표절 여부에 대한 재조회」라는 제목의 공문을 예륜에 발송한다. 이 공문에는 예륜에서 보낸 재심의 결과 보고서로는 작품 전체의 표절 여부를 확정할 수 없으며, 이 영화는 예륜의 판단에 따라 제작 신고를 수리하여 이미 촬영이 완료된 작품으로 예륜의 판단이 이 작품은 물론 향후의 작품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니 확대 심의회의를 개최하여 결과를 보고하라는 명령이 담겨 있다. 덧붙여 원작 대본과의 씬 별 대조표를 작성, 작품 전체 중 ‘유사 장면 수, 모방 장면 수, 표절 장면 수, 전혀 다른 장면 수’를 적고 ‘원작의 어느 정도를 모방함으로써 표절이라 판정할 수 있는 지의 기준’을 제시하라고 통고하고 있다. 조용히 넘어가 달라는 예륜 위원장의 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문공부는 누구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내용에 대해 수치로 환산할 수 있을 만큼의 객관적인 결과를 요구했다. ‘유사’, ‘모방’, ‘표절’을 장면별로 구분하라는 것도 황당한 일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표절을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문공부는 이 작품이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 결과에 ‘따라’ 자신들이 제작신고를 수리하여 영화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언급하며 영화가 겪을 불이익을 고스란히 예륜의 탓으로 돌리면서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에도, 표절이라는 판단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이 사이 영화를 완성한 제작사는 영화 본편검열신청서와 미성년자 관람신청서 등을 제출하지만, 문공부는 표절여부를 조회 중인 작품이니 이후 진행하겠다며 검열 자체를 진행하지 않았고, 예륜은 약 2주가 지난 1월 28일 이 작품은 표절이 아니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문공부 측에 보내온다. <국산영화 시나리오 표절여부에 대한 재조회>에 대한 예륜의 결과보고 위의 서류를 살펴보면 예륜이 얼마나 이 문제를 고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륜은 1월 20일 내부적으로 가졌던 재심의에서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고, 1월 22일 긴급윤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외부 인사 3인을 위촉하여 재심의를 진행한다. 여기에서 예륜이 최대한 내부적인 의견 개진과 그로 인한 결정을 거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인의 외부인사의 입을 통해서야 9개의 씬 일부와 인물의 설정과 배치, 배경 등의 유사성은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표절이 아니라고 판단 내린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이러한 번복에는 작품 자체의 비교를 넘어 다소 위압적인 문공부의 통고와 이 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진 시나리오 위원회의 분란 등이 더욱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결정 후 문공부는 1월 30일 <남녀공학>의 제작사인 대영흥행 측으로 「<남녀공학> 검열에 따른 조치」라는 공문을 보낸다. 문공부는 예륜이 표절로 판단했을 때에는 제작사 측으로 즉시 통고를 하지 않고 오히려 재심의 요청을 한 것과는 다르게, 표절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때에는 즉시 그 결과를 통보하면서 표절이라는 판단을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문공부는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를 통해 자신들이 본 작품을 허가한 것이라 책임을 회피하지만, 제작신고 수리 공문에는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 시 지적되지 않았던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어 문공부 역시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살펴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문공부는 이 모든 책임을 예륜으로 넘기며 영화검열 업무를 관장하는 문공부의 결정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남녀공학> 검열에 따른 조치」에 명시된 보완사항에서 문공부가 주력한 것은 표절시비 사건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는 점에서 표절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공부의 의지가 더욱 명확하게 읽힌다. <남녀공학> 검열에 따른 조치 위의 공문에서 문공부는 세 가지의 보완을 지시한다. 하나는 ‘사회적 물의를 야기시’킨 제명을 변경하라는 것, <하이틴>과 유사한 부분을 삭제하거나 개작하라는 것, 수정한 부분을 명시하라는 것 등이다. 이러한 지시사항은 문제가 되었던 부분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두 없었던 것처럼 만들라는 뜻으로 문공부가 문제가 생긴 영화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제작자는 이러한 지시를 받은 후 「<남녀공학> 제명사용에 관한 건의」라는 문서를 통해 이미 제작수리에 본 제목으로 들어갔으며, 본편과 예고편 등에 타이틀 화면을 다시 찍어야 하고, 이 제목으로 배급 계약을 마쳤기에 제목의 수정지시를 거두어 달라는 내용을 전달한다. 그러나 직후 「<남녀공학> 지시사항에 대한 복명」이라는 문서를 통해 제목을 <남녀공학>에서 <학창시절>로 바꾸겠다는 내용을 전달, 제작사의 요청은 거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남녀공학>은 <학창시절>로 그 제목을 바꾸어 개봉했고, 포스터에는 원제가 <남녀공학>이었다는 것을 작은 글씨로나마 명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공부가 영화검열 업무를 책임지는 법 결국 <학창시절>은 문공부의 예륜으로의 책임전가, 예륜의 판단 번복, 이로 인해 발생한 물의를 잠재우기 위해 최대한 원제와 유사하게 붙인 제목이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예륜 위원장은 사표를 제출한다. 일신상의 사정이라는 이유였지만, 시나리오 파벌싸움의 부작용이자 문공부의 예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 7 . 상반된 표절 판정에 최종적으로는 문공부가 가려내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8 문공부는 어떠한 판정도 내리지 않은 채 이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후 문공부가 내린 결정은 ‘여고생’ 소재의 영화 제작을 규제하겠다는 것이었다. 남녀 고교생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그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정적으로 그린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9 「표절시비 극영화 <남녀공학> 예륜, 윤리위에 심의위임」 10 이라는 기사와 바투 붙어 있는 이 기사는 문공부 결정의 이면을 상상하게 한다. <남녀공학>과 <하이틴>의 표절 여부를 판단할 때에 고교생활을 다루는 데에 있어 소재나 등장인물, 배경, 사건 등이 유사할 수밖에 없다는 난점이 의견서마다 반복적으로 기술되어 있던 것을 생각한다면, 문공부의 결정은 아예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문공부의 태도는 영화법이 시행된 이후부터 꾸준히 보인 것으로, 강압적으로 영화의 삭제를 지시했을 것이라는 국가 검열에 대한 상(像)과는 거리가 있다. <학창시절>의 검열과정은 검열에 끼어든 상황과 주체 그리고 그(들)에 대한 대처가 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1. 이는 1970년대에 들어 표절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1970년대에는 수많은 합작영화로 표절에 관한 지적이 많을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그러나 1970년대의 언론에서 영화검열에 관한 언급 자체 줄어들었고, 검열과 관계 된 표절에 대한 언급 역시 찾아보기 힘든 것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영화검열의 언론 노출에 비한다면 1970년대 영화검열은 그 빈도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든다. 2. 이 작품은 <고교남녀공학>이라는 제목으로 제작신고 직후 <남녀공학>이라는 제목으로 제명변경을 신청하고, 제작신고수리가 된 이후부터는 <남녀공학>으로 명기된다. 이 글에서 역시 이 작품을 가리킬 때에는 <남녀공학>이라는 제목을 사용하고자 한다. 3. 시나리오 심의에서 통과 판정을 받지 못한다면 예륜의 요청에 따른 시나리오에 대한 수정과 심의가 반복된다. 이를 통해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에 통과해야만 제작신고를 할 수 있다. 4. 출처가 분명치 않은 두 개의 보고서 중 하나에는 ‘익명의 영화인 제출’이라 수기로 표기되어 있다. 나머지 하나는 시나리오 위원회의 분열로 인해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하의 내용과 각주 6번 참조. 5. 「극영화 <남녀공학> 표절시비」, 《일간스포츠》, 1976.1.17. 본 신문기사를 비롯 관련 내용을 다루고 있는 6-7개의 신문기사가 심의서류에 스크랩되어 있다. 6. 당시 시나리오 위원회는 시나리오 문학회와 시나리오 위원회로 나뉘어 전자는 이 작품을 표절로, 후자는 표절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며 첨예하고 대립했다(「극영화 <남녀공학> 표절논쟁 확대: 표절이다 아니다 상반된 보고서」, 《일간스포츠》, 1976.1.22.). 이 기사를 바탕으로 표절에 관해 의견을 제시했던 총 세 개의 보고서 중 출처가 분명치 않았던 두 개 중 하나는 시나리오 문학회의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7. 「표절논쟁 2라운드 접어들어-판정 뒤집히면 책임소재 시비 또 일 듯」, 《일간스포츠》, 1976.1.24. 8. 「극영화 <남녀공학> 표절논쟁 확대: 표절이다 아니다 상반된 보고서」, 《일간스포츠》, 1976.1.22. 9. 「여고생소재 무절제 극영화-문공부 제작 규제」, 《일간스포츠》, 1976.1.23. 이 기사의 표제는 ‘여고생’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남녀’ 고등학생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탈선이나 반항 등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아 이를 규제하겠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 문공부는 ‘특히 여고생의 경우 담임 선생님을 사모하’는 설정이나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식, 탈선’등이 최근 남녀 고등학생을 소재로 한 작품들의 문제로 꼽아 규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는데, 이러한 설정은 모두 영화 <남녀공학>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10. 「표절시비 극영화 <남녀공학> 예륜, 윤리위에 심의위임」, 《일간스포츠》, 1976.1.23.
1960년대 청춘영화의 성공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전성기’, ‘황금기’, ‘르네상스’ 등과 같은 수식어와 함께 하면서 한국영화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꼽힌다. 멜로·괴기·희극·액션·역사·청춘·문예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시도는 한국영화사에서 도드라지는 그 시대만의 기획이었고, 제3공화국이 들어서자마자 이루어진 영화계의 법적·제도적 장치의 정비는 (국가적 제도 안에 영화를 위치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었을지라도) 영화매체의 대중적·산업적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1963-1967년 약 5년간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청춘영화’는 바로 이 두 가지, 영화의 다양성과 영화의 산업적 성장에 큰 기여를 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국산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이질적인 공간의 활용과 화려한 의상, 이를 메운 서구적 생활양식은 새로운 영화 문법의 한 요소로 인식되었고 관객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으며 1960년대의 한 가운데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960년대의 청춘영화는 몇 가지의 도드라지는 특징으로 설명된다. 먼저 그 내용에 있어, 청춘영화는 공통적으로 가난한 청년과 부잣집 여대생의 사랑을 그린다. 이때 부잣집 여대생의 지위는 매우 매력적인 미장센으로 스크린에 가시화되어 영상미를 높이면서도, 두 남녀의 만남이 좌절되는 중심적인 이유로 작용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신성일·엄앵란이라는 두 배우는 청춘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아이콘이다. 배우의 팬덤이 형성되고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가 사회적 관심을 받았던 것은 유래 없는 일이었다. 영화 속 신성일 · 엄앵란의 데이트 코스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고, 그들의 패션 역시 많은 이들의 따라해야 할 스타일이 되었다. 스타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두 배우의 탄생은 청춘영화의 성장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에 청춘영화의 대부분은 아카데미 극장에서 상영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특정 극장에 가면 특정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인식은 영화에 따른 관객의 세대를 나누었고, ‘고무신 관객’으로 폄하되던 관객들과는 전혀 다른 젊은 관객들이 아카데미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이와 같이 한국영화의 외적 팽창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면면들을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청춘영화의 특징은 이 영화들이 표절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이다. 청춘영화의 표절문제는 영화평론가들은 물론이고, 당시 대학가에서 심포지움이 열릴 만큼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안이었다. 1) 영화의 인기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던 청춘영화의 표절문제는 특히 일본영화를 모방한 경우가 많았고, ‘해적판’이라는 이름으로까지 불릴 지경에 이르렀다. 청춘영화들은 당시 갓 제정된 영화법의 적용을 받고 있는 영화들이었는데, 1962년 제정된 영화법(1962.1.20.)과 1963년 1차 개정된 영화법(1963.3.12.)은 제작사의 의무조건을 강화하고 영화가 관객을 만나기 위한 모든 과정을 공보부 장관의 사무로 정착시키는 데에 주력하면서 영화제작의 관리에 힘썼을 뿐 표절문제에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사이 발생한 청춘영화의 표절문제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 혹은 그것을 그대로 즐기는 관객과 함께 이를 묵인하는 공보부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청춘영화의 흥행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집단이나 단체까지도 비슷비슷한 내러티브 안에 포함시키는 등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제목과 상관없는 영화의 내용은 특정단체의 공분을 사기도 했으며, 비슷비슷한 내용과 설정들은 약 4-5년 만에 청춘영화가 사라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청춘영화의 문제점들은 청춘영화의 대표격으로 언급되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과 <학사주점>(박종호, 1964)의 당시 영화 심의서류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또한 <학사주점>의 심의서류는 1960년대 초반, 영화법이 만들어진 후의 검열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그 과정을 좇는 데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표절화’된 각색-<맨발의 청춘> 현재까지도 <맨발의 청춘>을 언급하는 많은 글들이 이 작품의 흥행과 성과, 특별한 시도 등에 대해 쉽게 상찬하지 못하는 것은 이 작품이 ‘표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후지와라 신지(藤原審爾)의 단편소설 『진흙투성이의 순정 泥だらけの純情』을 바바 마사루(馬場當)가 각색하여 나카히라 코우(中平康) 감독이 1963년 발표한 <진흙투성이의 순정 泥だらけの純情>과 거의 유사하며 구체적으로는 카메라의 앵글이나 소품의 설정까지도 거의 같다고 알려져 있다. <맨발의 청춘>에서만 볼 수 있는 조두수가 요안나와 그의 지인을 만난 식사자리에서 서양식 식사법을 알지 못해 폭소를 유발하는 장면이나, 요안나와 조두수의 정사(情死) 후 상반되는 규모로 치러지는 장례식 장면과 같이 계층적 차이를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장면 등이 일본 영화와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지적되지만, 2)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공적인 작품이 표절작이었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표절은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이어지는 <맨발의 청춘>에 대한 평가는 의아함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사실 개봉 즈음부터 <맨발의 청춘>은 이 작품이 일본의 영화를 각색한 작품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맨발의 청춘>을 소개하는 한 기사에서는 “원전은 바다건너 작가 馬場當의 '멜로드라마' <진흙투성이의 純情> 번안의 사전승인을 받았다” 3) 는 점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 다른 날의 기사에서는 “일본 馬場當의 이름을 뚜껑에 박은 깡패와 명문 딸의 눈물바다 속의 애련을 그린 <맨발의 청춘>” 4) 이라는 소개를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5년 <맨발의 청춘>은 당시 문제가 되던 표절 작품의 한 예로 거론되는 등, 5) 1960년대 일본영화를 표절한 대표작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영화 <맨발의 청춘> 내에서 이 작품이 일본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1) 각색자동의서 영화 <맨발의 청춘>이 상영허가를 받기 위해 제출한 서류 중 하나인 이 각색자동의서에는 1964년(소화39년), <진흙투성이의 순정>의 영화화에 관한 전권을 극동흥업주식회사 대표 차태진에게 위임하고 제작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각색자 바바 마사루의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다. 이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던 <진흙투성이의 순정>의 영화 각색자에게 받은 동의서로 <맨발의 청춘>이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화 <맨발의 청춘>의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명시하고 있는 각본의 담당은 서윤성(徐允成)이며, 각색에 동의를 해주었던 바바 마사루의 이름이나 원작이 된 <진흙투성이의 순정>의 제목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림 2) 영화제작신고서, 공연권취득증명서 위의 서류를 살펴보면, 먼저 영화제작신고서에서 <맨발의 청춘>의 원래 제목은 <죽어도 보고싶어>였다는 점과 원작자가 서윤성으로 적혀 있다가 후에 바바 마사루로 수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그런데 그 다음 서류인 공연권취득증명서에는 서윤성이 이 각색 작품을 ‘본인 저작물’로 명시한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으며, 앞서 말했듯이 영화의 크레디트에서도 서윤성은 이 영화의 각본가로 명시된다. 이는 당시 ‘저작’에 대한 개념이 명확치 않았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맨발의 청춘>보다 한 해 앞서 개봉했던 <청춘교실>(김수용, 1963)과 <가정교사>(김기덕, 1963)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청춘교실>은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로 대학생들의 일상과 상류층의 생활양식을 보여주면서 청춘영화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영화의 영화제작신고과정은 정확히 <맨발의 청춘>의 그것과 반대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영화의 신고서류에서 이 작품의 각색자인 이시철을 원작자로, 공연권취득증명서에서도 <청춘교실>의 시나리오를 동일인의 저작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청춘교실>의 오프닝 크레디트에서는 “石坂洋次郞의 ‘あいつと私’에서”라고 명시함으로써 이 작품이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 『그녀석과 나』라는 작품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표시한다. 영화의 제작신고서류에서는 원작자의 동의서나 승인서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에 부기했던 것이다. 같은 해 개봉한 청춘영화 <가정교사>는 <맨발의 청춘>과 유사한 경우인데, 서류상 이 작품의 원작인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郞)의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 陽のあたる坂道』의 영화화에 대한 원작자의 승인서가 포함되어 있지만, 영화제작신고서에서는 아예 원작자를 표기하는 난이 비어 있다. 7) 이러한 사례들은 영화 신고의 과정 중에도 혹은 그것을 영화화 하는 과정에서도 원작과 그것의 각색이라는 점을 명시하는 명확한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서류에서 명시하고 있는 원작자의 규정 역시 불분명하다. <맨발의 청춘>은 『진흙투성이의 순정』이라는 소설의 원작자가 아닌 영화의 각색자 8) 에게, <가정교사>는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의 영화의 각색자가 아닌 소설의 원작자 9) 에게 각각의 영화화에 대한 승인을 받고 있으며, 서류의 명칭 역시 ‘각색자동의서’, ‘승인서’ 등으로 체계적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정확한 양식을 지니지 않았던 이 동의서들은 의무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맨발의 청춘>이나 <청춘교실>, <가정교사> 등은 서류상으로든, 관객에게 보이는 오프닝 크레디트든 한 번은 이 작품의 원작자를 밝히는 것으로 각색영화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긴 셈이며, 이는 당연히 후에 표절로 번지거나 그럴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작품들에 적용되었던 1차 개정영화법과 그 시행령, 시행규칙들은 제작사의 등록절차를 강화하여 영화의 외적인 성장을 꾀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을 뿐, 저작물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영화제작신고 시 공식적으로 원작자의 동의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은 합작영화를 제작할 때에만 필요한 과정이었기에, 이 작품들처럼 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 관객들에게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것은 제작자의 소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10) 물론 이는 제작사의 몫으로 남길만한 사안이 아니며 법적 정비가 절실한 부분이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저작권법이 처음 제정된 것은 1957년이었는데, 그 구체적인 시행령은 2년이 지난 후에야 제정되었을 만큼 11) 저작권에 대한 관심은 미비했다. 본 법령에서 저작물은 ‘문서, 연술, 회화, 조각, 공예, 건축, 지도, 도형, 모형, 사진, 악곡, 악보, 연주, 가창, 무보, 각본, 연출, 음반, 녹음필림, 영화와 기타학문 또는 예술의 범위에 속하는 일체의 물건’으로 규정하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번안이나 번역물, 각색물의 경우 어떤 식으로 원작에 대한 권리를 얻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항목은 찾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표절이 문화계 전반에 걸쳐 문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작권법은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고, 약 30년이 지난 1986년 12월 31일에야 처음으로 개정이 되었으니 그 사이의 저작권을 둘러싼 혼란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여기에 저작권법을 관장하고 있던 부서가 문교부였다는 점도 12) 영화계에서 쉽게 표절문제가 불거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후반까지 영화의 검열사무를 맡아보던 부서는 문교부였지만, 영화와 연극의 검열사무는 1961년 10월 공보부로 이관된다. 13) 즉 영화의 상영허가를 내주는 부서와 저작권을 관리하는 부서는 명백히 구분되어 있었고, 각각의 업무는 그리 긴밀한 협조를 맺지 못한 채 진행되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젊은 층에게 인기가 있던 영화들이 한국에서 영화화 되는 데에 큰 장애가 없었고, 제작사들 역시 이에 대해 어떠한 법적 제재도 받지 않았다. 다만 당시 영화에 관심 있는 이들의 질타를 받았을 뿐, 공식적으로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림 3) 극영화 <죽어도 보고싶어> 제작신고 접수 통고 이처럼 1960년대 중반 유행하던 청춘영화가 표절과 각색 사이의 교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영화 자체에서는 특별히 문제가 될 내용이 없었다. 본 제작신고접수 서류에서 지적하고 있는 두 장면은 ‘공서양속’을 해친다는 이유였고, 이는 이 영화가 당시 민감했던 반공이나 국기 문란 등의 거대담론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작 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흥행이 보장되었던 청춘영화는 <맨발의 청춘>의 성공 이후 비슷비슷한 작품들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당대 통용되던 용어의 의미와 전혀 다른 맥락에 서 있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한다. 반복되는 영화들과 1960년대 영화 심의의 절차-<학사주점> <맨발의 청춘>과 같은 해에 제작, 개봉한 영화 <학사주점>은 가난한 대학생 경일이 부잣집 여대생 수미를 만나 신분상승을 꿈꾸지만, 자신이 하숙하던 수예점의 혜림과의 관계가 발각되면서 좌절되고 결국 경일이 투신하는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된다. 김길헌(본명 김최연)의 창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맨발의 청춘>에 비한다면 매우 극단적인 빈부의 격차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영화의 심의 과정에서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목이었던 ‘학사주점’은 1960년대 초부터 대학생들이 운영하던 주점을 가리켜 고유명사처럼 사용하던 단어였는데, 엘리트들의 소통공간이었던 학사주점이 영화 <학사주점>에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비춰졌다. 당시 직접적으로 이 영화를 둘러싼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학사주점’을 운영했던 이들의 불만은 후일담으로 남아 있다. 이 부분에서는 먼저 영화법 초기, 즉 1차 개정영화법의 적용을 받고 있던 <학사주점>의 심의서류를 통해 당시의 영화제작과정을 꼼꼼히 살펴볼 것이다. 덧붙여 실제의 ‘학사주점’과 영화 <학사주점>이 어떠한 관련도 없다면 이 제목은 당시 젊은 관객층, 그 중에서도 대학생을 겨냥한 것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한 부작용과 그에 대해 당시 ‘학사주점’ 운영진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림 4) 영화제작신고서 이 서류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본 영화제작신고서가 ‘사단법인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학사주점>의 신고 약 한 달 전에 작성되었던 [그림 2]의 <맨발의 청춘> 영화제작신고서에서는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의 경유 도장이 찍혀 있는데 이는 그 사이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가 ‘한국영화업자협회(이하 업자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본 서류에서 경유한 일자(1964.2.29.)가 공보부에 본 서류가 접수된 일자(1964.5.18.)보다 약 3개월이나 앞선 것으로 볼 때, 업자협회를 경유하는 것은 영화제작의 신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경유의 과정은 법령이나 시행령 등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당시 경유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허가 받고자 했는지는 명확히 알기 힘들지만, 14) 1963년의 영협(한국영화인협회)과 제협의 마찰은 이 경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 1963년, 영협은 제협처럼 영화제작을 위해 영협도 역시 경유하도록 해달라고 관계당국에 건의하고자 한다. 15) 당시 제협은 영화제작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영화배우들의 쇼 출연을 제한했는데, 제협이 영협에 속해있던 당대 톱스타들 김승호, 신영균, 최무룡, 김지미 등을 쇼 출현을 이유로 영화 출연을 정지시키면서 영협이 이에 반발한 것이다. 영협은 제협이 영화계의 상황을 고려치 않고 횡포를 부리고 있다며 맞섰지만, 제협은 앞으로 6개월간 위 4명의 스타를 출연시킨 영화는 공보부의 상영허가 검열을 받기 위해 제협이 경유시켜주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16) 이 과정을 보았을 때, 제협은 영화제작을 위한 공보부의 신고 전 단계에서 영화제작내역이나 배우의 섭외 등을 미리 살펴보고 적합지 않다고 판단했을 때에는 아예 공보부로의 접수 자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내용 자체에 손을 댄 것은 아니지만 영화와 관련한 인적 구성을 걸러내고 제작에 필요한 신고절차 자체를 차단할 수 있었던 경유는 사실상 사전 검열단계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협이 제협의 경유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영협에게도 그 권한을 달라고 요청한 부분인데, 이는 영협이 제협의 경유를 사전 검열 단계로 인식했다기보다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정도에 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5) 극영화 <학사주점> 제작신고 수리 통보 앞서 잠시 이야기했지만, 청춘영화에서 수정을 요구받았던 부분들은 차후 제작사와 큰 마찰을 일으킬 내용들은 아니었다. 본 서류에서는 영화법 시행세칙 제1조 2의 규정에 의거하여 17) 몇 부분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요구는 당시 가장 큰 주의사항으로 명시되었던 국헌의 문란,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릴 수 있는 내용, 민주주의 정신에의 위배, 적국에 대한 긍정이나 법적 존엄성을 훼손하는 등의 요소 등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청춘 남녀들의 사랑이 주가 되었고, 서구식 생활상의 과시와 같은 장면들의 나열이 주가 되었던 <학사주점>은 큰 무리 없이 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학사주점>은 두 군데의 삭제 또는 수정지시를 받았는데, 시나리오를 살펴보면 먼저 첫 번째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술집에서 남녀가 함께 술을 먹고 있는 특별한 대사조차 없는 장면이다. 두 번째 장면은 이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으로 경일이가 죽은 후, 젊다는 것이 그 자체로 고독하고 괴로운 일이며, 경일이 죽었다 해도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우울한 내레이션 부분이다. 이러한 장면은 공서양속을 해치고 청년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지적되었고, 심의대본에서는 깨끗이 삭제되어 있다. 18) <학사주점>에서 오히려 중점에 두고 있던 판잣집에 사는 경일의 극심한 가난이나, 그 상황을 묘사하는 대사, 계층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면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19) (그림 6) 문화영화수속필증 위의 서류를 보면 심의를 거친 영화가 상영이 되기 위해서는 본편 영화 외에 반드시 ‘문화영화’ 혹은 ‘뉴우스영화’를 함께 상영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항은 1962년 제정된 영화법에서부터 포함된 것으로 20) 영화검열사무가 문교부에서 보도와 선전업무를 담당하던 공보부로 이동하게 된 이유를 명확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극영화와 함께 상영되는 몇 편의 짧은 문화영화와 뉴우스영화들은 <자립경제>, <새로운 아이디어> 등과 같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국가관을 홍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극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문화영화 및 뉴우스 영화의 필름을 반드시 복사·신청하여 해당 영화가 극영화 상영 과정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자연히 관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이 영화들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던 영화 <학사주점>은 당시 실제 학사주점을 운영했던 이들에게 꽤나 불편한 영화로 비춰지고 있었다. 학사주점은 4.19혁명에 직접 참가했던 대학생들이 젊은이들과 함께 이야기할 장소를 만들고자 개업한 곳이었으며 몇 번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꽤 긴 시간 이어지면서 당시 명사들과 교류하고 설전을 벌이며 토론을 하던 공간이었다. 일본의 대학생 관광객이나 신문기자 등이 들러 설전을 벌이고 《요미우리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던 학사주점은 대학생들의 아젠다를 생산하던 다분히 엘리트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21) 이러한 고유명사로서의 학사주점은 영화 <학사주점>으로 넘어오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띠는 공간으로 변해 버린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살폈을 때 이 영화의 제목이 <학사주점>일 필요는 없다. 학사주점은 영화의 주된 공간이 아니며, 단지 주인공 경일에게 부잣집 딸 수미를 유혹해 한몫 잡으라고 부추기는 대학생 친구들이 있는 공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이 대학생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요행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당시 통용되던 학사주점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학사주점의 운영진이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준비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학사주점의 운영진들의 회의를 살펴보면 <학사주점>,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 등에서 등장하는 학사주점의 분위기나 인물들이 자신들의 학사주점에 대한 인식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불쾌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오도 단속반을 운영하고 싶다는 의지까지를 피력한다. 그리고 당시 남의 간판을 빌려다 만든 이 영화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손해배상 청구도 하려고 소장(訴狀)까지 썼다가, 6.3계엄령으로 그만두었다는 말에서 22) 당시의 대학생들이 이 영화들을 얼마나 불편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청춘영화는 1967년을 기준으로 급격하게 쇠퇴하고 사라진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표절작이라는 비판과 함께 끊임없이 양산되는 비슷비슷한 영화들에 대해 관객들이 더 이상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제작사들은 편의에 따라 원작을 관객에게 알리거나 감추었고, 이것에 대해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지 않았다. 흥행된 작품과 내용도 배우도 유사하게, 배경도 분위기도 비슷하게 제작되었던 청춘영화에 싫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으며 관객의 외면은 한 장르의 소멸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춘영화가 발랄한 분위기를 영화내부로 끌어들여오고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는 점, 영화의 산업을 확대하는 데에 기여를 했다는 점 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1) 영화예술의 연구를 목적으로 한 서울대문리대의 ‘대학시네마 클럽’에서는 <한국영화를 고발한다>는 심포지움을 열고, 최근 인기있는 영화들의 표절에 대해 논의하였다. 《동아일보》, 1964.11.14. 2) 이우석, 「1960년대 청춘영화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 중앙대 석사학위 논문, 2003, 7쪽. 3) 《조선일보》, 1964.3.10. 4) 《조선일보》, 1964.6.7. 5) 《경향신문》, 1965.7.10. 6) 이후 제명변경신청을 거쳐 영화의 제목은 <죽어도 보고 싶어>에서 <맨발의 청춘>으로 변경된다. 7) 이 작품은 현재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원작자를 명시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1960년대의 일본영화 표절작품을 나열할 때, <가정교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 역시 영화 내에 원작자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을 확률이 크다. 8) <맨발의 청춘>이 참고한 작품은 1958년 발표된 후지와라 신지(藤原審爾)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바바 마사루(馬場當) 각색·나카히라 코우(中平康) 감독으로 1963년에 영화화 된 <泥だらけの純情>이다. 이 작품은 1977년에 다시 한 번 영화로 만들어진다. (일본영화데이터베이스 http://www.jmdb.ne.jp 참조) 9) <가정교사>가 참고한 작품은 1957년 신문에 연재된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郞)의 동명 연재소설을 원작으로 다사카 도모타카(田坂具隆), 이케다 이치로(池田一朗) 각색·다사카 도모타카(田坂具隆) 감독으로 1958년에 영화화된 <陽のあたる坂道>이다. 이 작품은 1967년, 1975년에 각각 다시 한 번 영화로 만들어진다. (일본영화데이터베이스 http://www.jmdb.ne.jp 참조) 10) 공교롭게도 원작자의 명시가 제대로 되지 않은 <맨발의 청춘>, <가정교사>는 모두 극동흥업주식회사의 작품이다. 이를 보면 제작사에 따라 원작 표시 여부가 결정되었을 확률이 있다. 참고로 영화 자체에만 원작을 표시했던 <청춘교실>의 제작사는 한양영화공사이다. 11) 저작권법은 1957년 1월 28일, 1935년 7월 8일 조선총독부칙령으로 반포되었던 ‘저작권법의시행에관한건’을 폐기시키며 제정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시행령은 법령이 제정된 지 2년이 넘은 1959년 4월 22일이 되어서야 제정되었는데, 이 시행령에서도 저작권을 위반했을 때의 제재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12) 저작권 시행령에 의하면 저작권법을 조사 심의하는 기관으로 저작권 심의위원회를 두는데 이 위원회의 모든 사항은 문교부장관의 자문에 따른다. 13) 《경향신문》, 1961.10.2. 14) 1967년 4월 1일 부터는 업자협회에 각본심의위원회를 두어 자체적으로 각본을 심의하고 공보부에 영화제작신고를 하게 한다. 그러나 1964년경에는 경유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심의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15) 《경향신문》, 1963.2.15. 16) 《경향신문》, 1963.2.14. 17) 영화법시행규칙 1조 2의 내용은 “공보부장관은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수리한 신고내용에 제5조에 해당하는 사실이 있거나 기타 부당하다고 인정되는 사유가 있는 때에는 이에 대한 시정을 그 신고자에게 요청할 수 있다”이다. 이때 제5조의 내용은 국기문란을 포함한 사회적 혼란을 줄 수 있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18) 물론 거대담론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이 장면들의 삭제가 타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회적으로 크게 비화되지 않았을 뿐,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릴 가능성은 농후하기 때문이다. 19) 이는 1970년대의 영화검열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에는 가난이나 개발이 미비한 장소 등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20) 1962년 제정된 영화법 2조 5항에서는 문화영화의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문화영화라 함은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제11조에서는 문화영화의 동시상영을 의무화하고 있다(공연자가 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 이후 1963년의 1차 개정영화법에서는 문화영화에 2조 6항에 뉴우스영화를 포함시키고(이 법에서 "뉴우스영화"라 함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부면의 시사를 신속·정확하게 보도하기 위하여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역시 극영화 상영 시에는 뉴스영화와 문화영화의 상영을 의무화 했다(제11조 공연자가 극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뉴스영화 및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 21) 유근호, 『60년대 학사주점 이야기-4.19세대의 시대증언』, 나남, 2011 참조. 22) 위의 책, 148면.
최근 국제회의 하나가 서울에서 개최되는 것을 가지고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이 회의는 2008년부터 1년에 두 번씩 정례적으로 개최되는 회의일 뿐임에도, 행사를 주최하는 쪽과 성공을 기원하는 쪽은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는 양 포장을 합니다. 이 회의 개최를 통해 나라의 ‘국격과 브랜드 가치’가 업그레이드된다고도 하고, 이를 통해 국제무대 리더십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국제회의라면 개최 자체가 의미 있다기보다 세계 사람 모두에게 이익이 될 만한 구체적인 결과를 도출해 내었을 때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도출되기도 전에 뭔가 대단한 회의가 된 것 마냥 떠들어대는 모양새는 그다지 달가와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른바 ‘강대국’이라는 나라들만 모여서 ‘그들만의 이슈’를 논의하는 것이 ‘그들만의 이익’을 벗어나 모두의 삶에 얼마나 보탬이 될 지는 미지수이겠지요. 하지만 두고 볼 일입니다. 큰 기대는 없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세상을 좀 더 나쁘게 만드는 일만은 생기지 않기를 일단 바라봅니다. 세계 주요 국가의 정치인들이 서울을 방문한다고 떠들썩한 요즘, 꽤나 조용히 한국을 방문한 해외 정치인도 하나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스웨덴 여성 정치인이자 유럽의회 의원인 아멜리아(Amelia Andersdotter)입니다. 그녀의 방문은 떠들썩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와서 실제로 한국인을 포함한 전 세계 민중들의 삶에 보탬이 될 만한 이슈를 나누었습니다. 아멜리아는 이름도 생소한 스웨덴 ‘해적당’( http://www.piratpartiet.se )의 정치인입니다. 스웨덴 해적당은 2006년 1월 1일 창립한 4년차 정당입니다. 해적당은 리카르도(Rickard Falkvinge)라는 사람이 2006년 치러지는 스웨덴 총선에 맞춰 ‘지적재산권을 제한하고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자‘는 제안을 담은 해적당 웹사이트를 개설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해적당이 창당된 해 5월, 미국영화협회(MPAA)가 스웨덴 정부에 저작권 침해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있었는데요, 이에 따라 스웨덴 경찰은 비트토렌트(Bit-Torrent) 검색 사이트인 해적만(The Pirate Bay)의 서버를 압수하여 해당 사이트가 3일간 접속이 차단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저작권 문제는 스웨덴 국민들의 관심사가 되었고, 이 일을 겪은 후 해적당의 정책에 공감하는 스웨덴 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해 2009년에는 스웨덴 정당 중 당원 규모가 세 번째로 큰 정당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해적당은 200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7.13%를 득표하며 의석을 두 자리나 차지하는 정당이 되었습니다. 스웨덴 인들이 공감했다는 해적당의 정책은 무엇일까요? 해적당의 정책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 문화’, 둘째는 ‘자유지식’, 셋째는 ‘개인의 존엄성과 프라이버시 보호’입니다. 첫 번째 정책인 ‘자유문화’는 ‘저작권 제도를 본래의 취지에 맞도록 개혁하자’는 것입니다. 애초에 저작권이 생긴 목적은 창작과 창작물의 확산을 균형적으로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현행 제도는 창작물의 확산은 물론 창작마저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문제설정입니다. 재산권의 확대를 위해 혁신된 기술을 통제하고, 이용자는 물론 창작자에게까지 형사 처분을 남발하는 현행 저작권 제도는 절대로 문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해적당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저작권의 남용은 저작재산권의 배타적 보호기간이 자꾸 늘어나는 형태로 구체화되는데요, 독점적 저작재산권 보호 기간을 5년으로 하자는 것이 이들의 정책입니다. 두 번째 정책인 ‘자유 지식’은 ‘특허제도를 폐지하자’는 것입니다. 특허제도는 인류에 도움이 되는 발명과 아이디어 생산을 위한 것이었지만, 현재 특허제도는 거꾸로 인류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설정입니다. 현행 특허제도는 과학 기술의 혁신에 장애가 됨은 물론이고, 특히 의약품 특허의 경우에는 제3세계 사람들을 질병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류에 도움이 될 연구 성과가 수익 창출을 위해 제한되거나 숨겨지는, 폐해만 가득한 특허 제도의 폐지하자는 것이 또 하나의 정책입니다. 이는 잃을 것이 없고 얻을 것만 있는 정책이라고 설명합니다. 세 번째 ‘개인의 존엄성과 프라이버시 보호’는 국민을 상대로 한 감시와 통제 강화에 반대하는 정책입니다. 9.11이후 유럽에서도 강화되고 있는 인터넷 등에서의 시민 감시에 반대하고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해적당은 위의 세 가지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 정책 영역에 관여하는 것은 스스로 제한하고 있는데요. 해적당의 이 세 가지 정책과 정책 배경은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것이 아니며, 바로 지금 여기 우리에게 당면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저작권 보호’라는 이름으로 영화와 음악 등 문화 콘텐츠의 저작재산권 보호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개별 재산권자가 콘텐츠를 ‘유료’로 다운로드 받지 아니한 개인을 상대로 소송과 합의를 종용하는 것으로 시작된 재산권의 강화는 저작권법의 개정이라는 국가적 차원의 대응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특허권의 경우는 한미자유무역협정 등의 자유 무역 강화를 위해 국민의 건강권에 직결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국적 제약회사의 재산권을 위해 개혁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고 있습니다. 의약품 특허 제도의 개혁과 의약품 접근권 향상을 위한 강제실시 등의 제안은 전혀 수용되지 못하였고, 약가가 인상되며 백혈병, HIV(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 감염인 등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으로 시행되는 인터넷 패킷 감청, 도청, 이메일 감청 등은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나 프라이버시가 극단적으로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해적당의 주장은 한국 독립영화 진영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특허제도의 폐지나 개인의 존엄성 및 프라이버시의 강화는 물론이거니와 ‘균형 잡힌 저작권을 위한 제도 개혁’은 ‘창작한 영화의 배급과 활용’이 과제인 독립영화 창작자들에게는 매우 필요한 토론 거리이기도 합니다. 한국 독립영화는 분명, 주류영화와는 다른 저작권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입장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토론되고 정리된 적은 없습니다. 저작권 제도에 대한 입장은 ‘우리는 주류 저작권 제도와 다르다’ 정도로 정리하는 것 이상을 이제는 넘어서야 합니다. 다르다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그 가치에 따른 정책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해적당이 제안하는 저작권 제도의 개혁이나 보다 구체적으로 제안된 배타적 저작재산권 기간 등의 정책은 ‘배급과 활용’을 고민하는 창작자라면 반드시 고민해볼만한 이슈입니다. 독립영화의 ‘다른’ 저작권 제도에 대한 논의는 배급사나 정책 담당자들이 주도하기는 어려운 이슈입니다. 한국 독립영화의 경우 영화 산업과 달리 저작인격권과 재산권을 모두 제작자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괄적인 저작권을 가진 저작권자가 자신의 저작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가능하다면 합의된 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독립영화와 저작권 관련 주제가 보다 구체적이며, 저작물의 활용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토론되어지길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 해적당과 관련된 내용 및 관련 자료들은 “우리도 해적이다!; 해적당에 관심있는 사람들의 모임” 블로그( http://pirateparty.kr/blog )를 발췌, 참고하였습니다. * 미국영화협회의 저작권 침해 고발로 인해 해적만 사이트가 서버 압수되고 접속 차단되는 일련의 사건과 그 배경은 다큐멘터리 영화 <이 영화를 훔쳐라 Steal This Film> 1편과 2편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영화를 훔쳐라 Steal This Film> part 1 웹사이트, 다운로드 보기 : http://stealthisfilm.com/Part1 스트리밍 보기 : http://pirateparty.kr/blog/?p=230 <이 영화를 훔쳐라 Steal This Film> part 2 웹사이트, 다운로드 보기 : http://stealthisfilm.com/Part2 스트리밍 보기 : http://pirateparty.kr/blog/?p=240 * 해당 주제에 대해서는 아래에 소개된 <찢어라! 리믹스 선언 RiP: A Remix Manifesto> 등을 통해서 보다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찢어라! 리믹스 선언 RiP: A Remix Manifesto> 웹사이트 : http://ripremix.com 다운로드 보기 : http://ripremix.com/getdownloads 스트리밍 보기 : http://films.nfb.ca/rip-a-remix-manifesto <복제는 도둑질이 아니에요 Copying Is Not Theft> 프로젝트 웹사이트 : http://questioncopyright.org/minute_memes 스트리밍 보기 : http://pirateparty.kr/blog/?p=243 <혁명을 불러낼 애니메이션 The Revolution Will Be Animated> 프로젝트 웹사이트 : http://questioncopyright.org/the_revolution_will_be_animated.ninapaley.com 스트리밍 보기 : http://pirateparty.kr/blog/?p=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