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 타운
- 감독
- 전규환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주유랑, 라미란, 오성태, 이준혁, 노슬기, 이용주, 성정선, 장영주, 정대용, 이새로미, 윤태성, 안영남, 이설구, 정희라, 박건탁, 최유림, 박승배, 정미남, 송대중, 육미라, 송진영, 안민영, 백현주, 유하복, 문호진, 이시훈, 이윤상, 박충신, 남아현, 홍윤지, 김소라, 정진성, 허영우, 장대웅, 정계순, 스트립팬더, 이정현, 도유승, 임채선, 함은영, 이준원, 달시 파켓
최근 한 편의 독립영화가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로부터 또 다시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곡사의 영화 <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이하 자가당착)가 바로 그 주인공. 왜 이 영화는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을까? 영등위의 사유는 이렇다. ‘과도한 신체훼손과 폭력성, 잔혹함이며 국민정서상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이미 작년에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바 있는데 그 때의 사유는 이렇다. ‘대사 및 주제에 있어 특별계층에 대한 경멸적 또는 모욕적 표현을 사용하고 개인의 존엄을 해치는 표현 수위가 극심하다’는 것. 그렇다면 <자가당착>이라는 영화는 과연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영화일까? 어느 정도의 폭력성과 잔혹함이어야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것일까. 그리고 왜 같은 영화에 다른 해석의 결정이 내려지는 것일까. 사실 영등위의 등급심의 문제는 매해 거론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매모호한 판단기준으로 심의 결정을 강요받고 있다. 또한 제한상영관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제한상영가'''''''' 자체가 비민주적인 처사임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특히, 정치적, 사회적 이슈, 그리고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계속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독립영화의 경우 이미 계속해서 ''''''''검열''''''''당하고 있는 것과 같다. 비단, < 자가당착 > 뿐 아니라 올해 초 개봉된 < 줄탁동시 >의 경우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고 몇 장면의 편집을 거친 후에야 개봉이 되지 않았던가. < 자가당착 >은 이미 전주국제영화제와 인디포럼, 서울독립영화제 그리고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초청 상영되어 관객에게 선보였었다. 경찰의 마스코트인 포돌이를 주인공으로 정치인 박근혜, 현직 대통령 이명박을 자유롭게 풍자, 비판한 작품으로 영등위의 제한상영가 판정은 정치적 심의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영등위의 첫 번째 제한상영가 판정에는 ''''''''특별계층에 대한 경멸적 표현''''''''을 문제 삼은 반면, 두 번째 제한상영가 판정의 이유가 ''''''''폭력성과 잔혹함''''''''인 걸 보면 영등위 심의의 판단 기준이 얼마나 주관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999년 < 둘 하나 섹스 >가 등급보류에 반발,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판정을 이끌어 낸 이래 2002년 < 죽어도 좋아 >는 제한상영가 등급의 모순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최근에도 여려 편의 영화가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고, 편집, 수정을 거친 후에야 상영될 수 있었다. 곡사의 < 고갈 >(이유: 과도한 선정성), < 악마를 보았다 >(감독 김지운 / 이유: 인간의 존엄과 가치 훼손), < 트로피컬 >(감독 이상우 / 이유: 사회통념상 비윤리적 폭력성), < 아버지는 개다 >(감독 이상우 / 이유: 폭력성, 선정성), < 불륜의 시대(바라나시) >(감독 전규환 / 이유: 사회통념 및 국민정서상 받아들이기 무리) 등이 영등위의 판단에 의해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문제는 제한상영가 뿐만은 아니다. 김조광수 감독의 < 친구사이? >는 선정성과 모방위험의 이유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심각한 차별적 관점을 드러낸 바 있고, 별다른 노출신이나 폭력신이 없는 < 반두비 >(감독 신동일 )의 경우,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여고생이 불법 스포츠마사지업소에서 일한다는 내용이 선정적으로 묘사됐다고 판단, 청소년들의 영화 볼 권리를 박탈한 바 있다. 최근 민병훈 감독의 < 터치 >는 선정성, 폭력성, 약물, 모방위험 등을 이유로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제시한 제한상영가의 기준은 이렇다. ''''''''선정선, 폭력성, 사회적 행위 등의 표현이 과도하여 인간의 보편적 존엄, 사회적 가치, 선량한 풍속 또는 국민 정서를 현저하게 해할 우려가 있어 상영 및 광고, 선전에 일정한 제한이 필요한 영화''''''''. 그러나 언제까지 영등위가 영화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관객의 볼 권리를 제한할 것인가. 영등위, 제발 강요하지 말아주세요.
일상에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자면, 대화 당사자들 이외의 청자를 반드시 요하는 대화(예컨대 공개토론회), 그러한 청자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대화(삼삼오오 어울려 길을 걸으며 재잘거리는 이들부터 서로 고성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다투는 이들까지), 마지막으로 그러한 청자를 철저히 배제하는 사적인 대화가 있을 것이다. 영화는 이 모든 대화들을 담아낼 수 있지만, 일종의 ‘부재하는 청자’로서의 카메라/마이크가 대화당사자들의 묵인 하에 채록한 것 같은 인상 -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이러한 묵인의 인상이 없다면 그것은 순전히 도청이나 몰래카메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을 주는, 세 번째 범주의 대화 상황의 구성에 특별히 관심을 쏟는 매체다. 물론 이 사적인 대화는 그 내용에 따라 고백이나 약속 같은 친밀한 것으로부터 모의나 협박 등 적대적인 것까지 수준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화 상황의 특수성에 걸맞은 영화적 표현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유성영화가 탄생한 이래 감독들에게 부과된 중요한 과제다. 굳이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올해 몇몇 한국독립영화를 보면서 거기 묘사된 대화 상황이 지극히 단조롭고 편향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인데, 특히 많은 평자들로부터 상찬을 받은 윤성현 의 < 파수꾼 >은 내겐 오히려 리얼함이 과장된 적대적 대화나 그도 아니면 대화가 실패하는 상황이 교차되는 상황을 제법 기교를 부린 내러티브, 카메라워크 및 편집으로 눈가림한 좀 미숙한 영화처럼 보였다. (이와 유사한 인상을 주었던 독립영화로 윤종빈 의 < 용서받지 못한 자 >가 떠오른다.) 특히 또래 남녀학생들이 지하철 안에서, 길 위에서, 그리고 중국집에서 주고받는 대화 상황을 연출한 방식 - 아이들의 모습을 잘게 나눈 쇼트들로 분할해 보여주면서 음악만 얹어 뮤직비디오 풍의 장면을 만들거나, 대화의 전체 맥락을 그려내지도 않은 채 한 두 마디 말만 불분명하게 들려주고는 그에 반응해 웃는 광경만을 보여주는 TV드라마 같은 방식 - 을 보면, 과연 이 감독이 일부 평자들이 상찬한 대로 동시대 아이들의 초상을 제대로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진다. 윤성현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한 이 장면들은, 예컨대 앤드류 부잘스키나 알렉스 로스 페리 같은 미국독립영화계의 ‘멈블코어’(mumblecore) 작가들에게서라면 그 자체로 훌륭한 영화적 소재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감독은 ‘파수꾼’이라는 제목이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가져온 것이라 했다지만 그는 J.D.샐린저가 <프래니와 주이>의 작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 같다. 적대의 언어가 아니라면 대화 상황을 의미 있게 영화적으로 구성해내지 못하는 난점은 (개별 영화들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많은 다른 독립영화들에서도 발견된다. 내밀함을 요하는 대화 상황은 어쩐지 진부하고 낯간지러운 방식으로만 묘사되고, (홍상수의 영화나 부당하게 냉대 받은 배창호 의 < 여행 >같은 중견감독들의 ‘독립영화’, 그리고 노영석 의 < 낮술 >이나 윤성호 의 영화 정도를 제외하면) 평범한 대화의 이면에서 혹은 그것을 굴절시켜 다양한 감정적 효과를 끌어내려는 연출의 사례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다수의 한국독립영화들이 장르적이기보다는 리얼리즘적이기를 - 혹은 적어도 장르의 리얼리즘을 - 추구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경묵 의 < 줄탁동시 >는 적대적이거나 진부한 대화 상황, 그도 아니면 침묵의 순간들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지극히 동시대적인 한국독립영화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독립영화에선 대화의 기술을 잃은 자들의 도착적 자기표현으로 폭력( 양익준 의 < 똥파리 >와 전규환 의 < 애니멀 타운 >)과 침묵( 박정범 의 < 무산일기 >)만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 독립영화의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짐승의 (대화의) 끝.’ 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쪽이 있다면 그건 여성들이다. 때로 그녀들은 거의 당혹스러울 만큼 직설적인 표현으로 - 이서 의 < 사람을 찾습니다 >나 양익준의 중편 <미성년>에서처럼 - 단조로운 (남성적) 대화의 세계에 신선한 공기를 더한다. 혹은 오직 그녀들만이 세속적인 소통의 기술과 그 필요성을 안다( 민용근 의 < 혜화, 동 >과 박정범의 <무산일기>). 비언어적 표현(제스처와 폭력) 혹은 반언어적 표현(적대의 언어)은 남성의 편에 언어적 표현은 여성의 편에 할당하는 식으로 전통적 역할에 있어서의 전도(顚倒)가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 대체 이러한 전도가 겨냥하고 있는 영화적 지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