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게 물어보렴
- 감독
- 전수일
- 제작년도
- 1995
1. 먼저 고백부터 해야겠다. 부산독립영화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부닥치는 문제는 얼마나 어려운 형편에서 제작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자면 부산독립영화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되기도 하지만, 간혹 반사 신경과 맞먹는 자기암시로 이어지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곁에서 지켜보기도 하고, 함께 읽어보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을 거치고 실제 촬영을 해야 하는 기간,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한두 번씩 영화를 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친한 감독의 경우뿐 아니라 얼굴만 알고 지내는 감독의 영화를 만날 때도 비슷한 감정이 생겨난다. 한 편의 영화가 우리에게 도착하기까지의 노고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매해 부산독립영화협회에서 부산독립영화에 대한 비평집을 만들면서 가장 큰 고민거리는 각 영화에 대한 지지만이 해답일까, 라는 점이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가 최초의 비평문을 만나게 되는 셈이라서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조금 더 따끔한 질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더욱 자세한 분석을 통해 이 영화가 놓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한 편의 영화가 생산되기 이전부터의 시간을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영화가 성취한 지점에만 우리의 눈이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반성을 하곤 하지만 결과는 해마다 비슷한 수준에 머무른다. 작년은 『인디크리틱』 이 10년을 맞은 해였기 때문에 전 편집장과 감독, 필자들이 모여서 대담을 가졌다. 영화가 바뀌고 달라지는 것에 비해 우리의 글은 나아지고 있는가. 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일종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고, 나의 고민과 유사한 이야기도 나누었지만 ‘부산’과 ‘독립영화’, ‘비평’을 나란히 놓고 생각할 때의 잠정적인 결론은 최선을 다해 영화를 보고 서로 용기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비평에 대한 최초의 독자이자 영화를 제작한 감독과 그 영화에 대한 고마움을 되돌려줄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두 번째 고백이다. 2. 부산의 독립영화가 지나온 시간과 현재 진행 중인 길을 짚어볼 때 확실히 염정석, 전수일, 조성봉으로 대표되던 흐름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알려진 이들을 제외하고 현재 후반 작업을 하고 있는 몇몇 감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들은 2000년대 중반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디지털 포맷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극영화를 만들고 있는 최용석 , 박준범 , 장희철 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김지곤 , 오민욱 의 영화는 현재 부산에서 가장 단단한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다. 영화제에 상영되거나 극장에서 개봉했다는 결실의 문제를 넘어서서 이 젊은 감독들은 자신만의 관심사와 테마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표현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그들의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될까에 대해 고민한다. 최용석 의 <그와 동행>(2004), < 제외될 수 없는 >(2007), < 이방인들 >(2012)은 부재로 인한 고통과 상실, 슬픔이 애도로 이어지거나 실패하는 과정 그 자체를 다룬다. < 도다리 >(2007)에서 20대 중반의 청년들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었던 박준범 은 작년에 < 디렉터스 컷 >을 완성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영화와 사람들 간의 관계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다. < 미스 진은 예쁘다 >(2013)를 통해 소박한 공동체의 복구를 염원했던 장희철 도 새로운 작품인 < 눈이라도 내렸으면 >을 올해 1월에 촬영을 끝내고 현재 후반 작업 중이다. 장희철이 꿈꾸고 함께 하기를 제안하는 만남을 통한 사람됨의 회복이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기대된다. 김지곤 은 < 할매 > 연작을 통해 산복도로라는 장소와 할머니 개인의 삶, 사적인 기억과 공적으로 진행되는 개발에 대해 세심하게 관찰하고 조심스럽게 사회적 배우의 삶을 들여다본다. 현재는 전직 악사라는 신선하고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 악사들 >의 믹싱 작업중이다. 부산에서 가장 과감하게 형식적인 실험을 하고 있는 오민욱 은 < 상 >(2012), < 재 >(2013)를 통해 ‘부산학’적인 실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하야리야 부대 자리에 시민 공원이 들어서면서 철거된 주변부의 장소를 통해 시간에 대해 사유한다. 그는 현재 <초원>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부산독립영화의 지도가 이젠 꽤나 풍성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편집실과 사무실 책상에서 작업하고 있을 새로운 시선, 새로운 태도로서의 영화를 기다리기 때문에 해마다 11월이면 설렘만큼의 고민으로 만들어진 책이 고맙다는 사실이 세 번째 고백이다.
최근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기는 1997년부터 1998년까지가 아니었을까. 민주주의가 확고히 자리 잡으면서 표현의 제약이 사라졌고, 새로운 영화사들이 새로운 자본을 만났던 이때 패기와 재능을 갖춘 신인감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1997년에는 < 초록물고기 >의 이창동 , < 넘버 3 >의 송능한 , < 접속 >의 장윤현 , < 비트 >의 김성수 , < 내 안에 부는 바람 >의 전수일 등이 데뷔했고, 이듬해에는 < 조용한 가족 >의 김지운 , < 처녀들의 저녁식사 >의 임상수 , < 기막힌 사내들 >의 장진 , < 정사 >의 이재용 , < 미술관 옆 동물원 >의 이정향 , < 바이준 >의 최호 등이 첫 영화를 내놓아 충무로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예고했다. < 8월의 크리스마스 >의 허진호 감독 또한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 ‘신 르네상스’ 혹은 ‘신신 르네상스’의 신인 감독들은 영화문법에 혁명을 가져온 정도는 아니었지만, 기존 장르영화를 자신의 색깔에 따라 변주하거나 아예 변종 장르영화로 만들어 한국영화의 장을 한창 넓혔다. <8월의 크리스마스>도 당시까지 한국 멜로영화의 주된 감성이었던 신파조를 거세한 채 시종 절제된 감정의 드라마를 펼쳐놓아 새로운 감수성의 멜로영화라는 평가를 얻었다(바로 그 이유 때문에 흥행에서는 좋은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의 사랑 이야기는 기존 신파 멜로극에서 자주, 그리고 쉽게 이용돼왔던 소재였지만 이 영화는 이를 관객의 눈물을 쥐어 짜기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죽음 자체에 무게를 부여함으로써 다른 차원의 멜로적 감수성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정원( 한석규 )은 소도시의 변두리에서 사진관을 운영한다. 친절하고 성실하고 조용한 그는 항상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주차단속원 다림( 심은하 )은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 이곳을 찾다가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둘의 사랑은 운명적인 그것이라기 보다는 일상 속에서 켜켜이 쌓인 정(情)과 비슷하다. 그 심심하지만 은은한 감정은 오가는 아이스 바나 스쿠터를 함께 타는 ‘스킨십’ 속에서 조금씩 무르익는다. 이 영화가 기존 멜로영화와 구별되는 지점은 이야기의 또 다른 축, 그러니까 죽음이다. 정원은 불치병을 앓고 갈수록 병세가 악화되지만 겉으로 내색하기는커녕 도리어 항상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맞상대하는 그만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친구와 술에 취하거나 이불을 두르고 홀로 흐느끼지만, 자신의 죽음 자체보다는 그 이후 주위 사람들의 삶을 더 걱정한다. 그 마음은 아버지를 위해 비디오플레이어와 현상기기의 작동법을 정리하는 인상적인 장면에서도 드러나지만 다림과의 이별에서도 엿보인다. 그들의 헤어짐은 그의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시작되지만 정원이 훗날 그녀와 재회하지 않는 것은 다림에게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덧씌우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영화가 여전히 ‘슬프지만 밝은 멜로영화’로 기억되는 데는 정원이 죽은 뒤 사진관을 찾은 다림이 창가에 놓인 자신의 사진을 보고 웃으며 화면을 빠져나가는 에필로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죽음과 사랑을 겹쳐놓는 대표적인 신은 정원의 첫사랑이었던 지원( 전미선 )이 찾아온 뒤의 몇 장면이다. 정원은 사진관 유리창을 물로 청소하고 있는데, 이때 영화는 유리창에 흐르는 물 너머로 지원을 보여준다. 다음 컷에서 정원은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고 있다. 버스 안에서는 김창완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가 흘러나오고 우리는 지원이 자신의 사진을 사진관 유리창에서 치워달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정원의 독백이 이어진다. 그 다음으로 병원에서 돌아온 정원이 마루에서 발톱을 깎는 아름다운 장면이 이어진다. 구차한 설명 없이 스러지는 육신과 기우는 사랑의 감정을 엮어내는 절묘한 신이라 하겠다. 학교 운동장에서 정원과 다림이 달리기 시합을 하는 장면에서도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 20대의 생기로 넘치는 다림이 힘차게 달려오고 쇠약해가는 정원이 그 뒤에서 힘겹게 달리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 사랑이 언젠가 끝나리라고 예감하게 된다. < 8월의 크리스마스 >의 정서는 화면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특히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려한 화면은 그 정서를 확장시킨다. 카메라의 움직임도 거의 없고 커트 분할도 많지 않지만, 미세하게 변화하는 앵글과 효과적인 조명은 그들의 내면에 일렁이는 감정의 변화를 조화롭게 보여준다. 오즈 야스지로의 ‘다다미 숏’과 비교됐던 툇마루 장면들이나 일상 안에서 움트는 사랑의 감정을 포착한 사진관 내부 장면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군산에 차려진 오픈세트를 비롯해 실제 생활이 이뤄지는 공간에서 촬영이 이뤄졌다는 점 또한 과장되지 않은 소박한 정서를 자아낸다. 허진호 감독의 새로운 감수성, 유영길 촬영감독의 미학, 한석규 의 절제된 연기 모두 인상적이었지만 < 8월의 크리스마스 >가 줬던 충격 중 가장 컸던 것은 심은하 의 연기였다. 드라마 <마지막 승부>로 화려하게 데뷔해 < 아찌 아빠 > < 본 투 킬 > 같은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솔직히 그전까지는 그녀가 좋은 배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심은하는 정말로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구청에 취직한 주차단속요원이요, 첫사랑을 하는 수줍은 스무살 여성이요, 참을 수 없는 감정에 못 이겨 돌을 들어 유리창을 깨는 소녀였다. 피곤에 절어 사진관에 들어오자마자 “저 지금부터 잘테니까 말 시키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소파에 주저앉아 눈을 감은 모습이나 사진관 앞에 놓인 스쿠터의 사이드 미러에 얼굴을 슥 비춰보며 미소 짓는 모습, 텅 빈 사진관에 편지를 꽂아넣었다가 며칠 뒤 다시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모두 스타였던 그녀를 배우로 바꿔놓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그건 그녀라는 마술에 우리가 덜컥 걸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마술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나는 궁금하다. 사진관 선풍기에 날리던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목욕탕에서 갓 나와 말아쥐던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도대체 어떤 향기가 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