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
- 감독
- 이승민
- 제작년도
- 1996
- 출연
- 채길병, 김구택, 고세원, 박성연, 차정훈, 김현민, 박진수, 이종욱, 이청민, 정승민, 이원국
사진: “ Sinners ”, IMDb 뱀파이어물과 좀비물을 좋아한다. 전염과 변형이라는 설정은 때로 경계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날카롭게 벼리는 은유가 된다. 그 속에서 공동체의 무의식이나 내가 지닌 두려움의 근원을 마주하는 일은 늘 일말의 고통을 동반한 쾌감을 준다. 2025년 봄 개봉한 라이언 쿠글러 연출의 < 씨너스: 죄인들 >은 이러한 장르적 가능성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갱신한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는 뱀파이어물이면서 동시에 음악영화이고, 인종차별을 다루는 정치적 블랙 호러이자 한편으로는 종교와 구원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1932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델타를 배경으로 한다. 노예 해방 이후에도 수많은 흑인이 소작농으로 농장에 묶인 채 가난과 차별 속에 살아갔다. 일부는 사소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강제노역에 내몰렸다. 박해받는 삶 속에서 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길 위에 나선 흑인 음악가들이 델타 블루스를 탄생시킨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쌍둥이 형제 스모크와 스택은 시카고에서 갱스터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델타로 돌아온다. 낡은 제재소를 개조해 클럽을 열고, 블루스 뮤지션을 꿈꾸는 사촌 새미와 함께 개업 첫날 밤을 준비하며 새 삶을 그린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흑인들만의 진정한 문화 공동체다. 그러나 새미의 블루스 선율이 울려 퍼지자 어둠의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클럽 문 앞에 선 세 명의 백인 뱀파이어는 입장을 허락해 달라고 청한다. 자신들도 뮤지션이라며 “불쌍한 울새의 살을 깨끗이 발라먹었지(Pick Poor Robin Clean)”라는 가사의 다소 섬뜩한 노래를 아일랜드 포크 풍으로 연주한다. 능숙하고 경쾌한 연주는 순식간에 좌중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본래 이 곡은 1927년 블루스 뮤지션 루크 조던이 발표한 노래다. 흑인 문화가 백인 사회에서 전유되고 소비되어 온 기나긴 역사가 압축적으로 포착되는 장면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세 백인은 뱀파이어가 되어 뭉쳤지만 다른 백인성의 층위를 드러낸다. 아일랜드인으로 설정된 레믹은 대기근과 식민 지배, 종교적 억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민의 후손이다. 그는 수백 년 전 침략자에게 동화된 피해자이자 문화적 흡혈을 욕망하는 새로운 침탈자다. KKK단원 조안과 버트 부부는 도덕적 타락을 멸시하며 타자를 배제해 온 미국 사회 내부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그들은 금화를 탐내다 레믹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었다. 흑백 대립 바깥에 위치한 인물들에게도 각자의 역사가 있다. 스택과 사랑하는 사이였던 메리는 백인의 얼굴을 가졌지만 흑인 가족 사이에서 자라 흑인처럼 말한다. 피부색과 문화적 정체성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마을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중국계 미국인 부부 보와 그레이스는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백인과 흑인에게 따로 물건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경계 위에 머무는 아시아인의 위치를 드러낸다. 땅의 ‘원주민’으로서 침탈과 학살을 가장 오래 겪어온 촉토인들은 이 모든 갈등 이전에 이미 추방된 공동체가 있었음을 환기하는 존재다. <씨너스: 죄인들>이 그리는 인종 갈등에는 이렇듯 서로 다른 상처의 시간이 혼재돼 있다. 영화 바깥에도 이 구조를 암시하는 시각적 장치가 있다. 개봉과 함께 공개된 십여 종의 인물 포스터다.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등장인물 모두의 얼굴을 개별 이미지로 제작한 방식은, 단 하나의 영웅 서사가 아니라 경계인들의 초상을 나란히 놓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사진: “Sinners”, IMDb 선악의 구도 역시 단순하지만은 않다. 쌍둥이 형제는 시카고에서 이탈리아 마피아의 와인과 아일랜드 갱단의 맥주를 훔쳐 왔다. 클럽을 여는 데 사용한 자본 또한 폭력과 약탈의 결과다. 젊은 시절 그들이 인종차별만큼이나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으리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친부 살해 소문으로 형제는 이미 고향에서 악명을 얻은 인물들이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은 일차적으로 이들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라이언 쿠글러는 흑인이 겪어온 고통의 역사를 조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모든 존재가 서로 얽힌 폭력의 계보 위에 서 있음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영화는 묻는다. 죄인은 누구인가. 하지만 포스터에 찍힌 문구(We Are All Sinners)가 일러주듯, 죄를 귀속시킬 대상은 쉽게 단정되지 않는다. 이 질문을 가장 노골적으로 입에 올리는 인물이 뱀파이어의 수장인 레믹이다. 레믹은 평등과 하나 됨을 외치며 흡혈을 통한 영생의 길을 약속한다. 처음에는 “강요된 종교”였던 기독교를 향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곱씹을수록 입맛이 쓰다. 인간이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살아생전에는 불가능하며, 죽어서야 비로소 모두가 동등해질 수 있다는 역설이기 때문이다. 인간 무리와 뱀파이어 무리의 대결은 러닝타임 한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이 격투는 분명 < 황혼에서 새벽까지 >(로버트 로드리게즈, 1996)를 연상시키는 폭발적인 액션이지만,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덜 중요한 대목일지도 모른다. 장르적 환상은 언제나 현실에 실재했던 고통을 조금 더 견딜 만한 이야기로 바꿔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튿날 아침 무장한 채 트럭을 몰고 클럽 앞에 나타난 KKK단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편의 극영화가 연출한 클라이맥스의 뒷면을 슬쩍 엿볼 수 있다. 뱀파이어와 치고받고 싸우다 죽는 이야기는 두건을 뒤집어쓴 인간들에게 무차별 총살을 당하는 이야기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쉽다. 모든 초현실적 서사가 그렇듯, 흡혈귀와 인간의 하룻밤 소동 역시 잔혹한 현실을 뒤집어 각색한 이야기일 따름인 것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이 영화에서 블루스는 소재나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의 시공간을 흔드는 힘으로 작동한다. 뮤지션의 업보를 짊어진 사람은 생과 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과거와 미래의 영혼을 불러내는 중재자로 묘사된다. 그 정점은 개업 무대에서 새미의 블루스 선율에 맞춰 클럽 안의 모든 사람이 몸을 들썩이기 시작하는 롱테이크 시퀀스다. 블루스와 힙합, 중국 경극과 발레, 로큰롤과 디제잉이 하나의 공간에 포개지고, 서로 다른 시대의 몸들이 같은 박동 위에 놓인다. <씨너스: 죄인들>은 두 가지 화면비로 촬영되었다. 가로로 긴 2.76:1 비율로 상영되다가 특정 구간에서 1.43:1 아이맥스 GT 화면으로 확장된다. 클럽 롱테이크 시퀀스에서 이 전환은 특별히 압도적인 몰입감을 준다. 그것은 시각적 스펙터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눈앞의 스크린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 구축해 온 문화와 역사의 총합처럼 느껴진다. 프레임은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을 포함하는 장소가 된다. 영화가 타인들과 함께 꾸는 집단적 꿈이며, 역사라는 무의식의 망막에 잠시 맺혔다가 사라지는 잔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극장에서의 공동체적 경험을 여전히 믿는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씨너스: 죄인들>은 나의 신체가 극장이라는 어둠 속에 타자들과 함께 놓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감각을 오랜만에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 짜릿한 영화적 경험이 소수의 극장에서만 가능하다는 아이러니를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이 이야기가 흑인의 삶에 대한 헌사로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는 피바람 부는 밤이 시작되기 전의 ‘좋았던 시간’에 타임라인을 할애하지 않는다. 개업을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이 클럽 내부를 고치고 음식을 만들며 웃고 떠들던 낮의 시간은 의도적으로 생략된다. 결말에 이르러 스모크의 회상 속에서 몽타주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중요하게 남겨지는 것은 선택의 순간들이다. 기타를 내려놓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요구 앞에서 새미는 음악의 길을 택한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새미 앞에 뱀파이어가 나타나 영생을 제안할 때도 그는 거절한다. 영원히 노래하는 저주 대신 삶이라는 박해를 끝낼 자유를 택한다. 영화는 다시 묻는다. 블루스는, 나아가 예술은, 죄인가. 아니면 구원인가. 음악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평등도 해방도, 영원한 평화도. 다만 이 폭력적이고 상처투성이인 세계에서 잠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며 불온하고도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을 뿐이다. 스크린이 이따금 그러는 것처럼. 김영글(미술작가) l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한다. 『아무튼, 야구』(2025), 『남의 노래』(2024), 『사로잡힌 돌』(2024),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2021) 등의 책을 썼고, 주요 영상 작업으로 < 파란 나라 >(2019), <해마 찾기>(2016)가 있다.
사진: <키노 프라우다> 제1호 중 (사진: “ KINO-PRAVDA ”, MUBI)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단순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 지가 베르토프, 1896년 제정 러시아 시기에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비아위스토크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집안. 태어났을 때 이름은 다비드 아벨레비치 카우프만(David Abelevich Kaufman), 1918년에 데니스 아르카디에비치(Denis Arkadievich)로 개명했다. 문헌에 따른 소개. 1917년 11월 7일 볼셰비키 공산당을 이끄는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 아래 무장봉기를 일으켜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켰고 데니스 아르카디에비치, 그러니까 지가 베르토프는 키노 프라우다(Kino-Pravda, 영화-진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통해서 혁명의 진행 과정을 기록하였다. 기계적인 설명. 영화사의 문장을 옮겨쓰는 것은 ‘세계영화사의 순간(들)’ 연재의 목표가 아니다. 나는 순간(들)이 하늘의 별자리처럼 펼쳐져서 성좌(Kostellationen)를 이룰 뿐만 아니라 그 순간들이 서로 충돌하여 새로운 섬광을 만들어내면서 고정되었다고 생각한 자리들이 동요하기를 바란다. 상투적인 순간이란 없다. 상투적인 지식이 있을 뿐이다. 지가 베르토프는 언제 영화사의 지식 안으로 돌아왔는가. 서로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설명. 레프 쿨레쇼프와 함께 러시아 혁명 시기에 아방가르드 미래주의자로 불렸으며, 영화의 기록이라는 성질에 관한 ‘이념적인’ 테제를 제시하였고, 그것을 실천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라는 설명에서 끝낸 다음 에이젠슈테인과 그의 세대에 관한 몽타주 이론과 작품들에 관한 설명으로 넘어갔다. 언제 다른 설명이 시작되었는가.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사 안에서의 좌표는 언제 이동하였는가. 1969년에서 1970년 언저리. 파리. 그 가운데에는 물론(!) 고다르가 있었다. 공식적인 발언은 고다르가 장-피에르 고랭, 제라르 마르탱, 나탈리 비야르, 아르망 마르코와 함께 마르셀 마르탱의 질문에 인터뷰하면서 선언하였다. 이 인터뷰는 1970년 12월 《시네마 70》 제151호에 실렸다. 고다르는 장-피에르 고랭과 함께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고다르만 지가 베르토프에게 눈을 돌린 것은 아니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1970년 5월-6월호, 220/221호 특집호에서 ‘20년대 러시아’ 영화를 다루었고, 이미 지가 베르토프를 에이젠슈테인보다 앞에 놓은 다음 영화사학자 조르주 사둘에게 재평가의 지면을 맡겼다. 한 해 뒤에 1971년 5월-6월호, 229호에서 지가 베르토프를 표지로 다룬 다음 베르토프의 글을 번역해서 실었다. 물론 1968년 5월이 끝나지 않았다는 정치적 입장이 포함된 것이었다. 그때 카이에를 이끌었던 편집장은 장-루이 꼬몰리와 장 나르보니였다. 마오주의에 경도된 극좌파. 그들은 파리에서 문화혁명이 가능할 것인가, 라고 질문했다. 누구에게 이 관점을 배운 것일까. 그때 그들은 루이 알튀세르를 열심히 읽었다.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은 마르크시즘이 1924년 1월 21일 ‘이후’ 소비에트에서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좌) 고다르와 고랭이 지가 베르토프 그룹 결성 후 제작한 < 동풍(Le Vent d’est) >(1969) (사진: “ Le Vent d’est ”, IMDb) (우) 카이에 뒤 시네마 1971년 5월-6월호(229호) (사진: “ 1971 CAHIERS DU CINEMA French Movie Magazine #229 FN+ 6.5 Dziga Vertov ”, ebay) 자, 알겠다. 고다르와 카이에는 먼저 역사의 좌표를 수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에이젠슈테인이 늘 맨 앞에 있었다. 그 이름을 끌어내리고 베르토프로 수정한 다음 몽타주의 개념을 다시 질문하자고 제안했다. 정확하게 같은 방법을 되풀이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고다르(와 고랭)는 베르토프의 몽타주를 다시 검토하였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이 자리로 되돌아왔을 때 따져 물어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가 베르토프는 에이젠슈테인의 곁에 있는 이름이 되었다. 다시 소비에트의 1920년대로 돌아가자. 지가 베르토프는 이미 레닌의 지시로 러시아 전역에서 진행되는 혁명을 인민들에게 전하는 프로파간다 순례 열차를 타고 ‘키노 네델리아(주간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1] 지가 베르토프는 이 방법을 좀 더 밀고 나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신의 동생인 촬영기사 마하일 카우프만과 그의 아내이자 편집자인 엘리자베스 스빌로바와 함께 볼셰비키 공산당의 일간지인 《프라우다》의 영화 신문인 <키노 프라우다>를 제안하였다. ‘프라우다(Pravda, Правда)’는 러시아어로 ‘진리’라는 뜻이다. 《프라우다》는 1912년 5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 기관지로 창간되었고, 1918년에 모스크바로 편집국을 옮긴 이후 소비에트 공산당 공식 기관지가 되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1922년 5월 21일 《키노 프라우다》 1호가 제작되었다. 첫 호는 혁명에 성공한 인민들을 위한 여흥과도 같은 것으로 내용을 구성했다. <키노 프라우다> 제1호 중 (사진: “ KINO-PRAVDA NO. 1 ”, MUBI) 하지만 지가 베르토프는 혁명이 진행되는 지금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배워나갔다. 무엇보다도 그는 학습효과를 통해서 제작하는 순간마다 성장했다. 에이젠슈테인이 이론에 몰두하고 있었다면 지가 베르토프는 끊임없이 새로운 개념을 발명해 나갔다. <키노 프라우다>가 진정한 ‘키노 프라우다’가 된 것은 5월 26일의 <키노 프라우다>가 제작되었을 때였다. 혁명 지도자 레닌은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에서 공장 연설을 마치고 나오다가 볼셰비키 숙청에 반발한 좌파 사회혁명당원 파니 카플란의 암살 저격 총에 맞았다. 파니 카플란은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좌파 사회혁명당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34명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모두 총살형 판결을 받았다. 지가 베르토프는 이 재판을 촬영하였다. 이 촬영 과정에서 베르토프는 기록에서 멈추지 않고 영화와 당파성이라는 문제, 그리고 기록과 편집의 관계에 관해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놓치면 안 된다. 이 질문과 대답은 그 자체로 지가 베르토프의 투쟁이었다. 공산당 내에서 토론이란 사상투쟁이며, 이 투쟁은 패배하면 자기비판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사상을 검증받아야 했다. 레닌은 영화가 인민을 위한 ‘교육(pedagogy)’이 되어야 한다고 교시했다. 지가 베르토프는 그 말을 단순히 세상에서 벌어지는 뉴스를 통한 혁명의 교육에서 멈추지 않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혁명적으로 교정하는 교육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키노 프라우다>는 수명이 짧았다. 모두 23편이 제작되었고, 매호 상영시간은 20분 정도였다. 매번 구성이 바뀌긴 했지만 대부분 3개 정도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베르토프는 점점 더 <키노 프라우다>에 기술적인 실험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인민의 일상생활을 전달하는 뉴스라기보다는 실험영화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키노 프라우다>는 1925년에 끝났다. 하지만 지가 베르토프가 <키노 프라우다>를 만들면서 발표한 1922년 선언문은 어떤 영화가 상영되는 어떤 자리에 가서 낭독하고 싶어진다. “부르주아 연애소설로 만든 영화들은 문둥병에 걸린 것이다. 이런 영화들을 멀리하라, 이런 영화들을 보지 마라, 이런 영화들은 생명에 위험하다. 전염에 주의하라. 그런 영화를 만나면 도망쳐라!” 지가 베르토프 (사진: “ DZIGA VERTOV ”, Collection at the Austrian Film Museum, MoMA) *** [1] ‘세계영화사의 순간들’ 연재에서 이 순간을 이미 다루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1918년 8월 13일 로 되돌아가기를 권한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2020년대의 ‘한국 독립영화’는 가능한 문제일까? 사사로운 기분으로 한 해를 돌아보는 지면에 어울리지 않는 난데없고 거창한 질문이다. 하지만 2020년대의 절반을 지나치는 이 시점에 짚어볼 만한, 그리고 한국 독립영화의 관객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불투명한 질문이라고 느낀다. 대체 2020년대는 무엇일까? 2010년대를 여는 첫해에 낯설고도 특별한 다큐멘터리 < 보라 >(2010)를 공개한 이강현 감독은 2010년대의 마지막 해에 낯설고 특별한 극영화 < 얼굴들 >(2017)을 개봉한다. 개봉 당시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이 영화는 2023년 3월에 사망한 이강현의 마지막 작업이 되었다. 그는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지만 미완의 기획으로 남았다. 공교롭게도 <얼굴들>이 개봉한 이듬해 세계는 대규모 전염병이 일으킨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통과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도래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전면 봉쇄, 흰 마스크가 표상하는 대면의 불가능성과 접촉 금지는 우리를 불투명한 얼굴(들)과 비대면의 세계로 이끌었다. 텅 빈 영화관과 차단된 연결. 전염병의 유행은 수많은 얼굴을 차단하는 형태로 세계를 재구성했다. 한 영화감독의 때 이른 죽음과 전 세계를 뒤흔든 전염병 사태는 물론 서로 무관한 사건이다. 하지만 우연히 맞물린 두 사건을 겹쳐두는 데서 2020년대 한국 독립영화가 잃어버린 것과 되찾은 것의 틈새가 있다. 그것은 얼굴이다. 이강현이 포착한 ‘얼굴들’과 전염병이 봉쇄하고 차단한 ‘얼굴(들)’을 몽타주하는 것은, 영화 속의 얼굴이라는 공통의 기반이 무너진 시대의 표상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마련할 수 있다는 가설을 소환한다. 세계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하고 미스터리한 대상이 되었다. 영화가 여전히 얼굴과 또 다른 얼굴을 결합하는 것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장치라면, 두 얼굴을 결합할 수 없는 시대의 영화는 무엇을 표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한낮의 공원에서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풍경의 변화를 묘사하는 손구용 의 < 공원에서 >는 인간의 얼굴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의 카메라는 마치 곤충학자 같은 시선으로 비인간적이고 비인칭적인 장소의 단면을 소묘한다.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서 시집을 읽고, 한 남자는 나무 근처에서 서성인다. 하지만 그들의 독서와 배회는 명확한 목적을 갖는 행위로 결정되지 않고 끝없이 지연된다. 그들은 계속해서 시집을 읽고 나무 근처를 움직인다. 공원에는 빛이 드리운 잔디밭과 나무, 물을 내뿜는 분수, 돌아다니는 고양이, 구름이 지나가는 하늘이 있다. 영화는 장면들 사이에 오규원의 시 「뜰의 호흡」의 텍스트를 삽입한다. 얼핏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면들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공원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단면을 무작위적으로 이어 붙이는 듯 보인다. 영화의 카메라는 엇비슷한 몇몇 장면의 연쇄로 세계를 정밀하게 포착하는데, 미묘하게도 연속된 장면들이 영화에 도입하는 효과는 역설적이다. 그것은 눈에 비치는 세계의 불확실성을 덧씌운다. 카메라는 정밀하게 단면을 포착하지만 그럴수록 영화가 지각하는 세계의 총합은 모호해진다. 관객은 장면의 구체적인 세부를 하나씩 지켜볼수록 카메라 앞에 놓인 공원이 어떤 공간적 구조로 이루어진 것인지, 장면과 장면이 어떤 시간 관계로 접속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까다로워진다.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숏은 그 자체로 투명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다른 모든 숏과 관계 맺을 수 있는 모호한 비결정의 상태에 위치한다. 세계는 한없이 열린 미확정적인 상태로 팽창하는데, 팽창하는 시공간은 물리적으로 닫혀 있다.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들려주는데 정작 어느 것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손구용은 다큐멘터리적인 상상의 세계라는 형용 모순의 가능성을 발명한 것 같다. <공원에서>는 오후의 공원이라는 일상적 시공간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단순한 작업이면서 동시에 그 이미지들을 반복적이고 무작위적으로 배치해 방향감각을 상실한 영화적 시공간으로 재구성하는 추상적 실천이기도 하다. 정독도서관 전경이라는 구체적 현실은 영화가 새롭게 창출한 허구적 질서 속에서 픽션화된다. 영화는 현실의 정돈된 질서를 훼손하고 현실의 단면을 프레임 안에 집어삼킨다. <공원에서>의 허구적 프레임 속에는 아름다운 풍경과 흉한 구도가, 현실의 기록과 추상적 형상이, 빛의 움직임과 물의 흐름이, 문학의 문장과 영화의 화면이, 물리적으로 선행하는 시간과 감각적으로 멈춰 있는 시간이 공존한다. 장면이 하나씩 덧붙여질수록 <공원에서>의 고정된 지각은 거듭해서 위태로워진다. 화면에 담기는 풍경은 카메라에 포착된 장소의 이미지이지만, 물이 튀기는 수면을 가까이에서 찍은 장면처럼 구체성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이미지의 한 단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가 창안하는 공간은 깊이감이 부여된 실제 공간이지만, 구름이 지나가는 흑백의 하늘을 찍은 장면처럼 깊이가 제거된 모노크롬의 평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반적인 분류를 따르자면 이 영화는 세계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에 속하지만, 결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담아낸 작업은 아니다. 손구용은 반복된 숏의 조합 아래서 거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행위를 지속하는 세계를 창조한다. <공원에서>는 일상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장면을 조각내어 배열함으로써 한없이 느리게 지속되는, 마치 정지한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직면하게 한다. 영상 매체인 영화의 시간은 불가피하게 장면 위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인물의 행위와 공원 전경의 총합은 달라지지 않는다. 흐르는 물과 움직이는 빛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지만 장면은 계속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 그리하여 질문은 영화의 근원적인 속성으로 향한다. 화면의 움직임에 기반한 영화는 정말 변화하는 시간을 포착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얼굴 없는 영화는 한 뼘 더 나아가 우리가 알고 있던 영화를 지우고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던 또 다른 규칙의 영화를 창조하는 작업에 가까워진다. 무엇보다 <공원에서>의 매혹은 단지 구조적이고 개념적인 영화적 세계를 창조했다는 측면에만 달려 있지 않다. 이 영화는 영화적 프레임 안에서 재구성된 세계의 풍경을 눈으로 보게 만들고, 세계의 소음을 귀로 듣게 하는 지극히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여기서 이미지를 보고 사운드를 들으며 영화의 가장 기초적인 실천을 생경하게 다시 마주한다. 이 영화는 얼굴이라는 공동의 기반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영화가 지탱할 수 있는 장소가 감각적 공동체의 장소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환기한다. 한국 독립영화의 2020년대가 얼굴의 투명한 결합을 상실한 비대면의 시간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얼굴이 아닌 다른 매개로 영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몸짓을 발명할 수밖에 없다. <공원에서>는 인간 중심적 서사의 습관이 달라붙은 장면을 활용하는 동시에 공원 곳곳에서 생겨나는 비인간적인 얼굴들의 생경한 표정을 나란히 배열한다. 이로 인해 영화가 다루는 얼굴과 장소의 초점은 다수의 형상으로 분리되고 인간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는 세계의 질서는 무너진다. 숏이 창출하는 순열과 조합의 수학적이고 감각적인 질서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손구용은 단 하나의 현실을 한없이 길게 늘어뜨리지도 않고, 극단적 감각으로 채워진 현실이 카메라 앞에 존재한다고 강변하지도 않으며 세계에 대한 지각적 반응을 매 순간 조정하고 갱신한다. <공원에서>는 비인격적이고 비인칭적인 시각을 매개로 인간의 얼굴을 다시 만나게 한다. 카메라와 풍경을 매개로 지켜본 시각에서 공원 속 인간의 표상은 마치 영화에 불시착한 외계인의 모습처럼 낯설어진다. <공원에서>는 한 편의 영화가 단독적인 얼굴과 얼굴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과 풍경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을 허구적 공간 위에 배합하는 것으로 성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혹은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손구용은 인간중심적 감각에서 이탈한 낯선 얼굴들의 결합을 통해 불투명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영화의 몸짓을 갱신한다. <공원에서>는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영화의 수단을 동원해 인간적인 얼굴의 특권을 무너뜨린다. 나는 작년에 공개된 한국영화 가운데 정재훈 의 < 에스퍼의 빛 >(2024)과 더불어 <공원에서>가 보고 듣는 감각의 경험을 낯설게 재배치하는 얼굴 없는 영화의 연대기를 작성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어쩌면 이 영화들로부터 2020년대의 한국 독립영화를 다시 가늠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김병규(영화평론가) l 2018년 《Filo》 신인평론가에 선정되고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만든 영화로 단편 < 늦은 산책 >(2023), < 오후 >(20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