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똥꼬는 안녕하세요?
- 감독
- 전지현
- 제작년도
- 2005
- 출연
- 강은애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는 ‘현장’에서 탄생했다. 얄라셩, 노동자뉴스제작단, 푸른영상, 바리터 등이 제작한 초기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는 민중, 노동, 농촌, 학생, 여성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현장을 촬영하고, 기록하고, 전파했다. 이 흐름은 4대강 사업, 강정해군기지, 세월호 참사, 밀양 송전탑 등의 현장에서도 이어졌다. 한편으로, 90년대 중순 비디오 캠코더의 보급으로 강화된 기동성에 힘입어 보다 다양한 주제의 다큐멘터리가 등장했다. 빌 니콜스의 분류에 따라 ‘수행적 다큐멘터리’ 라 부를 수 있는 최진성, 이마리오, 경순 등의 작품들, 혹은 다큐-픽션이라 명명할 수 있을 윤성호 등의 작품들이 등장했다. 이전의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의 연출자들이 기록자이자 관찰자의 위치를 고수했다면, 이들 작품은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주관적으로 풀어낸다. 김응수의 < 초현실 >(2016)과 < 오, 사랑 >(2016), 이원우의 단편 작업들처럼 에세이영화,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 사이에서 활동한 감독들의 작품 또한 이것의 연장선상에 놓을 수 있다. 디지털이, 더 정확히는 인터넷이 우리의 삶 속으로 깊이 침투한 이후의 현장은 새로이 변화하고 있다. 여전히 물리적인 공간을 요구한 운동이 지속되고 있지만, 모종의 결속력과 행동력을 생산하는 것은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다. 팬데믹 이후 전개된 메타버스에 관한 논의 대부분은 이미 사회운동은 물론 소통, 유희, 거래, 창작 등 수많은 활동이 온라인에서 전개되고 있었음을 망각한 채 진행되었다.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현장은 알록달록한 스킨의 아바타를 매개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라,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다음 카페, DC인사인드, MMORPG 게임, 유튜브, 틱톡, 스카이프 등의 모습으로 이미 존재해왔다. 이 새로운 현장을 어떻게 소화하고 있을까? 물론 박윤진의 < 내언니전지현과 나 >(2020)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인터넷을 접해왔고 그곳에서 공동체를 만들어낸 이들의 이야기. 이 영화는 그것을 흥미롭게 그려낸 사례 중 하나다. 다만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현장을 현실과 등치시키며 엮어내고 있지만, 새로운 현장 자체를 탐구하고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이 글에서는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현장을 탐구하는 두 명의 작가를 다루고자 한다. 먼저 소개하고자 하는 이는 <리얼 서바이벌 가이드 공중도시>(2019)와 < 들랑날랑 혼삿길 >(2021)의 홍민키다. 퍼포먼스와 영상설치 작업을 중심으로 미술계에서 활동하던 홍민키 작가의 작품 중 두 작품은 인디포럼을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두 작품 모두 전시를 통해서도 만나볼 수 있었지만, 미술계에서 생산된 여러 작품이 다큐멘터리 혹은 실험영화라는 이름으로 여러 영화제에 유통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영상작업을 여럿 선보여온 홍민키의 작품이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리얼 서바이벌 가이드 공중도시>는 서울 도심 위를 날아다니는 가상의 공중 스튜디오에서 벌어지는 토론회다. ‘망리단길’이라는 이름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된 망원동이 개발되기 이전부터 살아온 주민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홍민키의 얼굴 위에 주민들의 얼굴을 딥페이크 기술로 합성한 뒤 그들의 음성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더불어 SNS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은 망리단길의 지금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인스타그램 타임라인의 이미지를 스튜디오에 둥둥 떠다니게 한다. 수해를 입었던 기억부터 조만간 사라질 거품으로 느껴진다는 이야기, 동네에 새로 생겨난 ‘힙한’ 카페에서 중년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는 증언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온라인과 SNS라는, 물질적인 현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세계는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가? 장소성을 지니지 못하는 온라인 공간은 존재하는 장소를 어떻게 뒤바꾸어 놓는가? <리얼 서바이벌 가이드 공중도시>는 ‘망원동’이라는 장소가 ‘망리단길’(을 비롯해 ‘~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전국 곳곳의 공간들)이라는 비(非)장소, 즉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 이 되어가는 현상의 기록이다. 동시에, 이러한 현상에 그 무엇보다 깊게 관여하고 있는 것이 SNS 타임라인이라는 독특한 비장소를 통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것과 유사한 성질을 지닌 가상의 스튜디오, 토론회, 딥페이크로 합성된 얼굴, 아바타로 만들어진 특파원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커밍아웃한 게이인 홍민키 감독이 친형의 결혼이라는 상황을 맞이해, 게이인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관해 가족들에게 직접 질문한다는 내용의 <들랑날랑 혼삿길>은 얼핏 이 주제와 관련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형, 형수, 아버지, 어머니, 시장어른 등 가족과의 인터뷰, 대중교통을 타고 가며 지인과 영상통화 하는 홍민키, 그리고 집에서 애인과 촬영한 영상 등 세 가지 층위로 구성된다. 이 중 가족들의 인터뷰는 각자의 방에서 줌(ZOON)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한 것만 같다. 하지만 인터뷰의 내용에 따라 통신이 불안정해 화면이 끊긴다거나, 액자가 넘어진다거나 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난다. 자세히 보면 이 화면은 실제 공간이 아니라 가상화면이다. 홍민키와 지인의 영상통화는 세일러문과 보라돌이 캐릭터를 각자의 얼굴에 덧씌운 채 진행된다. 전자의 공간은 온전히 ‘집’인 것처럼 보이는 가상의 공간이며, 후자의 공간은 완전히 개방된 공공의 공간인 것 같지만 퀴어인 두 사람은 얼굴을 감추어야 한다. 홍민키가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어떠한 후가공도 없는, 집에서 애인과 촬영한 영상뿐이다. 세 가지 층위는 한국의 가족제도 내에서 퀴어의 존재가 가지는 지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령 가족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화상회의 프로그램은 그것이 지닌 물리적 거리감을, 가상공간의 디자인은 그럼에도 존재하는 모종의 친밀감을 형상화한다. 스마트폰을 통해 원하는 캐릭터의 얼굴을 쓰고 영상통화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 스마트폰으로 연결된 온라인 공간은 얼핏 모두에게 자신이 될 수 있는 공간인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는 동일한 화면 위로 살포되는 동성애 혐오적인 온라인 삐라를 보여준다. 온라인이라는 가상은 정체성의 표현을 열어주었으며,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퀴어와 호모포비아 모두 동일하다. <들랑날랑 혼삿길>은 이성애를 전제하는 가족제도 내에서 퀴어의 위치에 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각자의 정체성이 표출되며 복잡한 지형도를 그리고 있는 온라인 공간에 관한 스케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점에서 홍민키의 두 작품은 온라인과 현실이 상호적으로 주고받는 영향의 복잡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홍민키가 온라인 공간의 특징들을 그래픽과 딥페이크 등으로 재현했다면, 정여름의 두 작품은 직접 그 속으로 들어간다. <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2020)은 증강현실 모바일게임 [포켓몬 고](2016)에서 출발한다. 해방촌에 사는 감독은 게임을 플레이하던 중 용산 미군기지 내의 포켓스탑을 발견한다. 포켓스탑은 아이템을 보급받을 수 있는 게임 내 장소로, 이는 실제 세계의 공공시설, 역사적 장소, 기념비 등을 기반으로 위치 지어지며 다수의 플레이어가 선택한 장소가 지정된다. 게임 내에서 포켓스탑을 터치하면 실제 장소의 사진이 등장한다. 감독은 이를 통해 한국인 대부분이 출입할 수 없는 용산 미군기지 내부를 탐색한다. <그라이아이>는 그렇게 발견한 용산 미군기지 내의 제국주의, 전쟁, 자본주의, 미국과 관련된 기념비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온라인에서 발견한 연관된 푸티지들과 엮어낸다. 이는 [포켓몬 고]라는 게임이 현실의 지리학 위에 게임의 지리학을 세워 놓는 특징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 나아가 이 영화에는 감독이 직접 촬영한 영상이 부재한다. 오로지 게임을 녹화한 화면과 온라인에서 발견한 푸티지들만이 이 영화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정여름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설계된, 반대로 내부에서는 그곳이 ‘용산’이 아니라 ‘미국’처럼 보이게끔 설계된 용산 미군기지라는 곳을 탐험한다. 보이지 않게끔 은폐된 가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용산 미군기지를, 더욱 가상의 공간인 온라인을 통해 그곳을 가리고 있던 유무형의 장막을 걷어내는 작업인 셈이다. 정여름의 두 번째 영화인 <긴 복도>(2021)은 직접 미군기지 안으로 들어간다. 국내에 반환된 미군기지 중 하나인 원주의 캠프 롱(Camp Long)에서 직접 촬영된 이미지가 이 영화의 절반을 차지한다. 다른 절반은 과거 캠프 롱의 PX에서 일했던 한 인물의 일기와 사진, 그리고 구글맵 이미지 등이다. 흥미롭게도 미군이 철수한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구글맵에 남아 있는 여러 흔적, 이를테면 ATM이나 PX의 위치가 찍혀 있는 지도는 <긴 복도>의 주인공인 탐정을 혼란스럽게 한다. 현실의 공간에는 미군이 철수하고 남은 폐허 상태의 건물만이 남아있지만, 온라인 상의 지도에는 여전히 기지가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오로지 탐정이 온라인 지도를 들여다볼 때에만 존재하는 기지는 그 자체로 탐정 앞에 현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 지도라는 매체를 통해 유사-현전(pseudo-presence)할 뿐이다. 우리는 온라인 상의 정보들이 우리의 앞에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은 그것은 매체를 통해 현전할 뿐인 정보, 텍스트, 이미지들이다. 즉 멀리 있는 대상이 실제로 가까이에 현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체를 통해 그렇게 느낄 뿐이다. <긴 복도>의 탐정은 유사-현전한 미군기지의 좌표를 통해 과거에 그곳에서 일하던 이들을 추적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대신 그가 찾아낸 것은 마찬가지로 온라인 상의 좌표로써만 현전하는 세계 곳곳의 미군기지들, 미군기지 내의 ATM이나 PX, 은행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의 흔적뿐이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이 실제 세계 위에 세워진 은폐된 공간을 온라인으로 탐험하는 작업이었다면, <긴 복도>는 오로지 온라인을 통해서만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을 추적하는 탐정물이다. 두 가지 작업은 얼핏 각자의 방식으로 미군기지라는 대상을 탐색하는 것만 같지만, 그와 동시에 오로지 온라인이라는 가상적 공간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곳을 가시화하려는 작업이다. 때문에 ‘탐정물’의 형식을 차용하는 <긴 복도> 또한, 현재에 비가시화된 과거인 철수한 미군기지를 되짚어보는 다큐멘터리적 기능을 수행한다. 홍민키와 정여름의 작업들은 온라인을 새로운 현장으로 인식하고 그곳을 경유한 사유를 풀어낸다. <리얼 서바이벌 가이드 공중도시>의 인스타그램 타임라인, <들랑날랑 혼삿길>의 화상회의 프로그램,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의 모바일 게임, <긴 복도>의 온라인 지도는, 얼핏 실재하는 현실과 상관없어 보이는 온라인 공간이 현실과 관계 맺는 방식을 보여준다. 홍민키의 두 작업은 그것이 현실과 얽혀 주고받는 영향을, 정여름의 두 작업은 오로지 온라인을 통해서만 발견되는 현실의 여러 가지 지표들을 탐구한다. 이러한 다큐멘터리들이 지금 등장한다는 것은 ‘메타버스’를 비롯한 여러 담론이 작품으로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들은 생의 대부분에서 온라인을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활동 영역으로 여겨온 이들이 온라인을 새로운 현장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 1) 빌 니콜스, 「다큐멘터리 입문」, 이선화 역, 한울아카데미, 2018, p.76 2) 이도훈 평론가는 이러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경향을 각각 "현장-기반의 다큐멘터리"와 "현장-전유의 다큐멘터리"라 명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도훈, "현장을 전유하는 다큐멘터리: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가 현장과 결합하는 방식", 「현대영화연구」, 한양대학교 현대영화연구소, 44호, 2021, p.125~150. 을 참고하라. 3) 마르크 오제, 「비장소」, 이상길, 이윤영(역), 아카넷, 2017, p.97. 4) 심혜련, "매체적 현전 시대에서의 공간과 지각의 문제에 관하여", 「계간 시청각 4호」, 서울: 시청각랩, 2019, p.24.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16년 정지돈과 오한기와 이상우와 나는 <펫 시티>라는 제목의 ‘페이퍼시네마’를 만들었는데, 앨런 튜링의 뇌를 쪼아먹은 앵무새 마부제가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게 되며 조류가 인류를 지배하게 된 세상에서 분투하는 주인공 잭(a.k.a. 짹)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그린 일종의 대체역사 SF였다. 벨라 발라즈는 옛날 영화가 우리에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라는 문화가 너무도 빠르게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래된 예술이 대개의 경우 지나간 시대의 정신을 거기에 합당한 형식에 담아 표현했다면,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자신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것, 아직 ‘역사’가 아닌 우리의 최근 모습이며 그 어색함이 우리를 웃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방금 <펫 시티>의 로그라인을 보며 슬쩍 (비)웃었다면 그 때문이다, 아마도…… 그러니까 문제는 웃음이고, 웃음의 종류다. 그게 처음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정지돈과 내게 ‘우리가 사랑하는 21세기 한국 영화’라는 주제로 한달씩 번갈아가며 연재할 것을 제안했을 때 우리가—적어도 나는—떠올린 것이었다. 사랑하는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일은 거의 언제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소위 영화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영화라는 우정 운운하면서도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난 모습을 보라. 소문난 영화사랑맨이자 시네마테크의 얼치기 인류학자였던 뤽 물레는 < 알카사르 작전 >에서 자신과 친구들을 한 마디로 묘사한다. 시네필들이 다 그렇듯이 그는 입냄새가 심했다, 라고…… < 인생은 소설이다 >의 개봉에 맞춰 알랭 레네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세르쥬 다네는 < 히로시마, 내 사랑 >이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주었던 충격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네는 말한다, 내가 말해서는 안 될 그의 어떤 무엇인가를 말했다는 듯이 그는 조금은 쌀쌀한 태도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마치 내가 그의 레인코트를 칭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유년기를 응시했던’ 영화들은 공유 불가능하다는 것, 심지어 그 영화들의 작가와도 공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데 그게 웃음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지돈씨가 물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모양이다. —두 종류의 한국 영화가 있습니다. 웃겨서 계속 보고 싶은 한국 영화와 웃겨서 더는 볼 수 없는 한국 영화. 전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후자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이) 그럼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서교동 콜마인에서 만났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친구들’(가제)이라고 이름 붙인 연재를 위한 일종의 기획회의? 작전회의? 나는 약간 복잡한 마음이었다. 오랜만에 둘이 하는 공동작업이 설레기도 했지만, 장 루이 셰페르의 말마따나, 나는 영화에 대해 특별한 이야기를 할 자격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관에 지나치게 자주 가는 지돈씨와 달리 마지막으로 영화관에 갔던 게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콘 에어>를 본 건 기억나는데…… —정연씨, 제발 니콜라스 케이지는 잊으세요.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나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 더 록 >, < 패밀리 맨 >, < 스네이크 아이즈 >, < 비상 근무 >, < 페이스 오프 >, < 시티 오브 엔젤 >,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 같은 영화들을 보며 생각했다. 왜? 왜 죄다 이 사람이 주인공인 거야? 그건 아직도 내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고, 사람이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좀처럼 잊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지돈씨에게 내가 가장 최근에 본 한국 영화인 < 남산의 부장들 >에 대해 말했다. 중반까지는 무척 몰입해서 봤다, 중반을 넘어가며 조금은 동어반복적이고 지지부진한 느낌이, 클라이막스 이후에는 뭔가 잘 정리되지 않은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전체적으로 재밌었다, 다만 어느 순간 —한국 현대사를 다룬 정치 영화가 아니라 가족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할까요. 이병헌이랑 이희준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계속 보다보니까 추석에 삼촌들이 고스톱 치다 싸우는 것 같고, 이성민은 꼰대 아버지고,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김소진은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일하는, 레비 스트로스적인 의미에서 족외혼을 통해 교환된, 문자 그대로 출가외인이며…… 겉으로는 세련된 척, 젠틀한 척, 서로 존중하는 척하면서 뒤로 은근히 견제하고 돌려서 까고 음모를 꾸며 뒤통수치는 외국의 정치물과 달리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보다 직접적이라는 감상이 남았다. 그리고 그건 내게 아쉬움보다는 한국에서 한국 영화 나온다, 같은 생각이 들게 했다. 이런 이야기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관객으로서 나는 정치라는 공적인 관계까지 가족이라는 사적 프레임을 통해 파악하는 관점이 너무 익숙하다. 혹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관객으로서 내게 한국 영화는 어떤 시대를 다루건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진다, 마치 가족처럼…… 그래서 우리는 한국 영화를 보고 한국 영화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작품의 매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종종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걸까? 우리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이 너무 좁아. 약간의 여유가, 숨을 돌릴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해. 늘 그랬던 것처럼 지돈씨는 자신에게 아이디어가 있다고 했다. 무려 세 개나! “봐, 나한테 아이디어가 있어”라고 말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들뢰즈는 묻는다.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은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고 자주 오지 않는 일종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은 뭔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 가끔은. 하지만 매번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지돈씨는 어떻게 아직도 매번 아이디어가 샘솟는 거지? 지돈, 유 돈 스탑 네버 스탑? —첫 번째, 22세기의 영화 청년들이 우연히 21세기 초반의 영화를 발견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는 설정이에요. 일종의 SF처럼.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베터 콜 사울>에 나오는 영화과 학생들이었다. 어쩐지 22세기에도 그들은 지금과 똑같은 모습의 영화과 학생으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천재 감독이 될 수 있었지만 전공을 잘못 택한 22세기의 사울 굿맨에게 착취 당하며…… —두 번째, 이건 방금 니콜라스 케이지 얘기하다가 떠오른 건데, 재밌게 봤지만 이상우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영화들이라는 컨셉인 거죠. 쉽게 말하면 길티 플레져 같은? 그런데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지돈씨와 나는 종종(실은 거의 항상) 글을 쓸때 서로를 등장시켜 할 말 못할 말 모두 하게 만들곤 하는데, 이상우를 등장시킬 때는 어쩐지 조심하게 된다. 상우씨가 특별히 뭐라고 한 적도 없지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점이에요, 지돈씨가 말했다. 여기서 이상우는 실존인물이 아닙니다. 정연씨와 저의 초자아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인 거죠. —세 번째, 각자 상대를 내세워서 서로가 본 영화에 대해 쓰는, 금정연은 정지돈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정지돈이 영화를 보고 느낀 걸 기록하고 정지돈은 금정연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금정연이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는 거예요. 3인칭 미니 픽션처럼. 물론 가장 내 마음에 든 건 세 번째였다. 22세기의 한국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시점에서 21세기 초반의 한국 영화를 보는 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지만 상상하긴 힘들었고, 이상우에게 절대 말할 수 없는 영화는 이상우에게 절대 말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영화 경험에 대해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등장인물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촌에 있던 녹색극장과 이대 앞 영화마당, 서울극장과 단성사와 피카디리와 씨네코아 같은 시내의 극장들에 대해 말했다. 비디오대여점과 극장에서 했던 아르바이트에 대해서도. 좌석들 사이에 떡하니 커다란 기둥이 있어 시야를 가리던 코아아트홀에서 < 버팔로 66 >을 봤다는 이야기를 하자 정지돈은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걸 극장에서 볼 수 있냐고 물었다. 얼마든지 볼 수 있죠. 내가 대답했다. 충분히 오래 전에 서울에서 태어나기만 했다면…… 정지돈이 영화를 본 곳은 대구극장과 한일극장과 만경관이었다. 그는 중학교 1학년이던 1996년 대구극장에서 < 미션 임파서블 >을 보며 처음 돌비서라운드를 경험했고, 그때부터 브라이언 드 팔마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질문. 만약 당시로서는 최첨단 음향시설이 설치된 대구극장에서 <미션 임파서블>을 보지 않았다면, 그와 드 팔마의 관계는 지금과 달랐을까? —귀를 중심으로 한 영화 경험은 관객의 자아로 깊숙이 진입한다고 토마스 엘새서가 말하긴 했죠. —그럼 지돈씨 자아 깊숙이 드 팔마가 있는 거예요? 와, 대박. —아니요. 제 자아 깊숙한 곳에는 드 팔마가 없습니다. 정지돈이 단호하게 말했다. —대신 탐 크루즈가 있죠. 귀와 음향은 영화 경험의 공간성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라고 엘새서는 쓴다. 우리는 모퉁이에서, 그리고 벽 뒤에서, 심지어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완벽한 어둠과 눈부시게 환한 환경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많은 전통적 접근 방식이 영화 관객을, 이성적으로 동기화되고 목적 지향적인 방법으로 관람하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존재로 간주한 반면, 귀는 균형 감각과 공간적 감수성과 같은 요소로 초점을 옮긴다. 관객은 더 이상 영화 밖에 머무는, 시각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한 이미지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음향적, 공간적, 육체적으로 영화적 조직과 엮여 있는 신체적 존재다…… 이듬해에는 피어스 브로스넌이 주연한 < 단테스 피크 >를 돌비서라운드로 보다가 등 뒤에서 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며 지돈씨는 쓸쓸하게 덧붙였다. —지금은 무엇에도 놀라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만요. 정지돈은 또 아버지와 함께 한일극장에서 < 클리프행어 >를 보기 위해 매표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일화를 들려주었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아무래도 못 보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아버지가 줄에서 쓱 나가 돌아다니던 암표상을 부르니 형님, 오셨어요? 하며 암표를 주었다고 했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가 비로소 아버지처럼 느껴졌던 몇 안 되는 기억이라고. 비슷한 무렵, 나 역시 아버지와 함께 < 쥬라기 공원 >을 보러 극장에 갔다. 마감에 허덕이는 만화가였던 아버지는 아는 암표상 동생이 있지는 않았고, 허름한 극장에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지도 않지만, 단순히 극장에 데려 갔다는 사실만으로 아버지와 얽힌 기억 중에 몇 안 되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밖의 다른 좋은 기억들은 집에서 비디오로 함께 < 구니스 >를, <레이더스>를, < 8번가의 기적 >을, < 어비스 >를, < 스플래쉬 >를, < 폴리스 아카데미 >를, < 오복성 >을, < 총알탄 사나이 >를, < 로보캅 >을, < 토탈리콜 >을, < 다이하드 >를, < 프레데터 > 같은 영화들을 보던, 보다가 어머니와 싸우기 전까지는 그래도…… 헐리우드파였던 내 아버지와 달리 지돈씨의 아버지는 장 가뱅을 좋아하던 유럽파였다. 이걸 헐리우드에서 헐리우드 나고 유럽에서 유럽 난다고 해야 할지. 정작 우리 부자는 헐리우드에 가본 적도 없지만…… 아무튼 우리는 헐리우드건 유럽이건 아버지들이 우리를 영화의 세계로 이끌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한국 영화는 아빠인가? 우리는 한국 영화를 죽여야 하나? —그건 < 화이 >에서 다 끝난 거 아니었어요? 친부 하나에 계부 다섯, 마지막에는 상징적 아버지까지 일곱 명이나 죽이잖아요. —정연씨, < 암살 >을 생각하세요. <화이>에서 친자인 여진구에게 죽었던 이경영은 <암살>에선 친자인 전지현(B) 대신 자기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 못하는 인물들이 모인 살부계의 일원인 하정우에게 죽습니다. 그건 수정주의죠. 영화라는 시간은 선형적이지 않아요. 지돈씨와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고 대신 연락을 끊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의 기원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를 영화 쪽으로 이끌었다는—엄밀히 말하면 영화 언저리에서 방목했다는—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세르주 다네는 시네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단지 학교 수업과 병행해서 행해지는 또 다른 수업이자 지식을 주입하는 과정이었으며 이 수업에서 노란 표지 시기의 <카이에>가 길잡이 역할을 했고 몇 사람의 성인 통행안내인들이 우리의 은밀한 공모자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시네필이 아니고 한 번도 시네필이었던 적은 없지만, 우리들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최초의 성인 통행안내인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정확히 다네적인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저기 어딘가에 발견해야 할 세계가 있고 ‘그’ 세계가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바로 그 세계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이거다! 그때 갑자기 정지돈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외쳤다. —한국의 영화는 일종의 교육-장치입니다. 남자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적교육체제인 거죠. 로라 멀비는 주류 영화가 남성의 판타지와 쾌락을 제공하며 남성의 응시를 위해 구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네는 시네필cinéphile을 영화-아들cine-fils라는 이보다 분명할 수 없는 자신만의 조어로 바꿔 말했고요. 아버지에서 아들로 내려오는 가부장적인 사적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한국에서 모두 두 곳입니다. 극장 그리고 목욕탕! —그건…… 마치 고대 로마 같은 이야기네요. —그렇죠! 캐롤라인 래빈에 따르면 학교는 열을 지어 정렬한 관객 개념을 고대 극장에서 빌려 왔습니다. 따라서 세 가지 학교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교, 감옥, 그리고 극장. 레프 마노비치는 스크린의 계보에서 영화 스크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람객이 자리를 뜨지 않고도 다른 공간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움직이는 가상의 시선이죠. 하지만 이 가상적 운동성은 새롭게 제도화된 관객의 부동성을 대가로 얻어진 것입니다. 전 세계에 수백만 명의 수감자를 수용하기 위한 대규모 감방, 즉 영화관이 지어진 거죠. 수감자-관객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 수도 자리를 옮길 수도 없습니다. 바로 그게 제가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싫어하는 것 치고 극장에 너무 자주 가는 거 아니에요? —정연씨,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사람은 없어요.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 없는 사람들의 사회, 푸코는 그걸 훈육사회라고 불렀다. 훈육사회는 감옥, 학교, 작업장, 병원 등 감금 환경의 구성으로 규정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극장이 추가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우리가 훈육사회를 넘어—윌리엄 버로스의 표현을 빌려—통제사회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건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감금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회다. 들뢰즈는 말한다. 통제는 훈육이 아닙니다, 고속도로로 사람들을 감금하지는 않지만, 고속도로를 통해 통제 수단을 늘릴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 고속도로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전혀 갇혀 있지 않고 무한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데도 완벽하게 통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입니다!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 극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소름…… 하지만 여전히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영화에 대해 말해야 하는 거지? 목욕탕이 배경인 곽경택의 < 억수탕 >? 하지만 그건 20세기 영화인데…… 아니면, 홍상수의 < 극장전 >……? 그날 밤, 책상 앞에 앉아 스포티파이가 추천하는 맞춤 플레이리스트를 듣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앨라니스 모리셋의 ‘넌 알아야 해You Oughta Know’를 흥얼거리는데, 등장인물들이 그 노래를 부르던 두 영화의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먼저 <투어의 끝>에서 제이슨 세걸이 분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와 일행들이 차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면. 그리고 < 북스마트 >에서 케이틀린 디버가 친구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가라오케 반주에 맞춰 열창하는 장면. 이어지는 것은 < 트립 투 이탈리아 >에서 롭 브라이든과 스티븐 쿠건이 차를 타고 가며 앨라니스 모리셋의 ‘Jagged Little Pill’ 앨범을 두고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다. 티키타카 끝에 둘은 CD를 트는데 “내가 당신을 열받게 하나요?Do I stress you out?”라는 첫소절이 나오자마자 브라이든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그래Yes, you do.” 그리고 장면은 다시 < 레이디버드 >에서 어린 주인공이 기타를 치며 ‘아이러닉Ironic’을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 다음에 떠오른 것들을 어떤 순서로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튀어올라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마치 작은 빅뱅처럼. 한 마디로 그건 들뢰즈가 말하는 “내게 아이디어가 있어”의 순간, 단지 영화적인 것밖에 될 수 없는 아이디어의 순간이었다. 톰 앤더슨, < 타짜 >, 한국, 그리고 노래방이 한데 섞인…… 톰 앤더슨은 로스앤젤레스가 등장하는 영화의 장면들을 이어 붙여 < 로스앤젤레스 자화상 >을 만들었다. < L.A. 컨피덴셜 >, <긴 이별>, < 블레이드 러너 >, <히트>, < 차이나타운 > 같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켄트 맥켄지의 <더 엑사일즈> 같은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도시의 장소들, 건물들, 거리들, 교통체제, 재개발, 도시의 기원을 둘러싼 신화, 도시를 통제하는 경찰 권력, 인종차별과 계급문제를 모두 아우르는 중층적인 영화-에세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톰 앤더슨의 영화를 본 이후로 언제나 하고 싶었던 일, <담배와 영화>라는 책을 통해 나름 시도했으나 결코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나는 지돈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니까 한국 영화 속에 나타나며 한국 영화를 한국 영화로 만드는 한국적인 장면들을 모은 일종의 에세이 영화를 만드는 거죠, 우리가 직접! 이번 연재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 기획 단계에서부터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한국 영화에 대한 한국 영화를 만드는 두 사람의 좌충우돌 편력기를 그린 일종의 제작 노트가 되는 거고요! 지돈씨는 동의했고, 나는 검색과 기억에 의지해 노래방이 나오는 영화(25개)와 목욕탕이 나오는 영화(12.5개)의 목록을 정리해서 지돈씨에게 메일로 보냈다. 왜 노래방이냐고? 목욕탕이 극장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인 사적교육체제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면, 노래방(룸싸롱이나 가요주점 등을 포함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장치가 구비된 방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은—정확히 말하면 한국 영화에서 재현되는 노래방은—한국의 남성들이 우애를 다지는 호모소셜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성 인물들이 함께 노래를 한다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 친구 >에서 유오성이 부르는 ‘마이 웨이’나 < 비열한 거리 >에서 천호진이 부르는 ‘올드 앤 와이즈’와 < 광복절 특사 >에서 송윤아가 부르는 ‘분홍 립스틱’이나 < 너는 내 운명 >에서 전도연이 부르는 ‘오빠’를 비교해보라.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꿀벌 이야기에 꿀이 빠질 수 없는 것처럼, 한국사람 이야기에 노래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그런데 왜 하필 박무석이 곽철용 앞에서 ‘불나비’를 부르는 <타짜>의 장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거에요? —지돈씨, 그건 말이죠…… (다음 회에 계속) *참고도서 [영화의 이론](벨라 발라즈 지음, 이형식 옮김, 동문선, 2003년)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세르쥬 다네 지음, 정락길 옮김, 이모션북스, 2013년)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장 루이 셰페르 지음, 김이석 옮김, 이모션북스, 2020년)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질 들뢰즈 지음, [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옮기고 엮음, 문학과지성사, 2011년) [영화 이론 –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토마스 앨새서.말테 하게너 지음, 윤종욱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년) [페미니즘 영화이론](쇼히니 초두리 지음, 노지승 옮김, 앨피, 2012년) [형식들](캐롤라인 레빈 지음, 백준걸.황수경 옮김, 앨피, 2021년) [뉴미디어의 언어](레프 마노비치 지음, 서정신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년)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순전히 입소문과 호기심만으로 영화를 찾아본 게 오랜만이다, 라는 점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 이 혼란에도 영화제를 ‘onsite’로 지켜낸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벌(에게 존경과 격려를!)에서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보다 표를 구하기 힘들었다는 입소문이 돌았고, 어떤 감독은 영화 보는 내내 언제 전지현 이 나오는지 기다렸지만 끝내 등장하지 않아 제목이 왜 저런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는 농반진반.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관객과 감독이 주고 받은 문답들이 알 수 없는 암호들이었다는 전언. 본 사람들은 다 재미있게 봤다며 말하지만, 막상 어떤 게 좋았는지 물어보면 영화 외적인 이야기만 하더라는 점이, 게으른 몸을 움직여 영화를 찾아보게 만들었다고 고백해야겠다. 카오스가 지구에 떨어져 고대인은 절멸의 위기에 봉착했다. 카오스가 통제하는 어둠의 별이 되어버린 지구지만 살아남은 소수의 고대인들은 영력을 하나로 모아 이곳 일랜시아를 창조하고 대피했다. 언젠가 지구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며. 저곳 세상에서 일랜시아를 창조한 이들은 생존한 소수의 고대인들이지만, 이곳 세상에서 일랜시아를 창조한 이들은 게임회사 넥슨이다. 1999년에 출시된 게임이니 이제 20년이 되었고 넥슨의 방치로 업데이트는 물론 아무런 서비스도 제공되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추억의 게임이 되었지만, 생존한 고대인들인 양 일랜시아를 지키고 있는 지구인들이 있다. 전쟁을 피해 산속 깊은 곳 동굴로 숨어들었다가 종전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탈영병처럼, 일랜시아를 지키는 이들은 기술과 자본이 결합해 창조하는 새로운 게임에는 관심이 없다. 약간의 자조와 은밀한 연대감과 결속력, 그리고 추억이 더해져 유지되는 일랜시아 공동체 일원들은 대부분 20대 중. 후반인데, 그 공동체에 속해 있는 감독이 직접 길드원들을 만나 각자 본캐들의 사연과 이유를 카메라에 담아낸다. 영화는 일랜시아를 지탱하는 세계관과 규칙을 보여주고, 이 세계를 창조한 게임회사 넥슨의 방치와 무관심에 분노를 표하고, 그 방치로 인해 형성된 그들만의 공동체에서 어떻게 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컴퓨터 화면이 종종 등장하고, 인터뷰와 길드원들의 MT장면들이 날 것처럼 담긴 영화. 어떤 게임이든 중독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야, 라는 이 영화에 대한 누군가의 평에 공감하려면 게임이든 뭐든 중독의 경험이 있어야 할 터. 화면 가득 등장하는 컴퓨터 게임화면과 난무하는 그들만의 용어라는 장벽을 건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공을 절감하며 좌절하는 순간들이 있다. 물론 쉬운 유혹들과 떡밥들은 존재한다. 98년 IMF시절에서 시작해 넥슨 노동조합의 이야기까지, 일랜시아라는 게임이 거쳐온 20년의 세월에 담긴 한국사회의 변화와 등장하는 청년세대의 불안의 징후들은 영화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맥락과 층위들을 제공한다. 이들에게 반칙은 매크로라는 신기술이고, 노력해서 성취한다는 기본 규칙에 위배되는 행위들. 이런 행위들은 현실세계뿐만 아니라 일랜시아라는 곳에서도 쉽게 통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와 일랜시아를 맞대어 비교하면서 이 영화를 이해해보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이들이 일랜시아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고 있는지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졸업영화로 만들어진 이 영화가 여기저기서 입소문을 타면서 게임 유저가 만든 최초의 게임다큐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게임회사 넥슨의 임원진들이 영화를 봤고, ‘버려진 게임’ 일랜시아와 같은 클래식 게임에 대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일랜시아를 지켜온 이들은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지가 너무 궁금해지는 대목. 전쟁을 피해 동굴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탈영병은 사회로 복귀해서 과연 행복해졌을까? 이렇게나 사랑스런 영화로 완성해낸 감독이 원하는 게 이런 변화들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