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의 젊은아내
- 감독
- 오사키 히로코지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린네 토우카, 타바타 아키라, 우에노 히데키
영화사에 관한 책을 보면 누구라도 마주치게 되는 영화. 보고 있으면 단지 압도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그 무게에 눌려서 질린 상태가 되어 보게 되는 영화. 말 그대로 모든 점에서 훌륭하고 심지어 지금도 어떤 의미에서건 예언적인 영화. 그런데 한 번 보고 나면 두 번 볼 엄두가 안 나는 영화. 데이빗 워크 그리피스의 < 불관용 >은 처음 볼 때 있는 힘을 다해서 보아야 하는 영화이다. 왜냐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책에서 이 영화를 <인톨러런스>라고 그냥 ‘音讀’한다. 여기서는 번역어로 옮길 생각이다) 단지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게다가 내내 스펙터클한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세트는 장엄하고 모든 장면들은 공들여 찍었다. 3,000명의 엑스트라들이 동원되었고, 바빌론 궁전 세트는 높이 90미터에 이르는 건축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불관용>은 (다른 그리피스의 영화가 그런 것처럼) 멜로드라마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두 번 보기가 힘든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관용>은 영화사에서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구태여 말하자면) 마치 미켈란젤로가 1508년에서 12년 사이에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천장화>와 같은 위치에 있다. 위대하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 천장을 3시간 30분 동안 반복해서 볼 자신이 없다. (<불관용>은 여러 판본이 있다. 좀 더 자주 시네마테크에서 볼 수 있는 버전은 상영시간 3시간 17분 판본이다) 그리피스는 1915년 < 국가의 탄생 >을 완성했다. 영화에서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에 겨룰만한 성취를 얻어냈다고 에이젠쉬테인은 찬사를 보냈다. 미국에서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언론과 지식인들은 <국가의 탄생>이 흑인에 대한 인종편견에 찬 영화라고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리피스는 이중적인 태도로 <불관용> 제작 연출에 착수하였다. 하나는 물론 알라바이이다. 자신이 인종편견주의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류애라는 휴머니즘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걸 영화로 증명하길 원했다. 속죄로서의 영화. 다른 하나는 그때 예술적으로 거의 정점에 올라온 그리피스는 자신의 영화적 가능성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불관용>은 거의 전례 없는 규모로 진행된 실험적인 영화이다. 모든 의미에서 <불관용>은 동시대 영화들과 차원을 달리한 영화였다. 아마도 <불관용>에 연출부였던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과 토드 브라우닝은 그때 많은 것을 훔쳤을 것이다. 그리피스는 서사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웠다. 서기 전 539년. 바빌론은 모든 것이 평화롭고 풍족한 왕국이었다. 벨샤자르 왕자는 펴민인 산골소녀를 돌보고 그녀는 왕자에게 사랑을 느낀다. 파국은 바깥에서 온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바빌론을 쳐들어온다. 서기 27년.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며 전도에 나섰을 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자들의 음모에 빠져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 매달리게 된다. 서기 1572년 8월 24일. 프랑스. 신교도 위그노들과 갈등을 빚어오던 가톨릭교도들은 그날 대규모의 신교도 학살을 한다. 1914년 현재. 가난한 젊은 청년은 공장에 다니면서 아내와 살고 있다. 공장에 파업이 일어나고 이에 연루되어 해고당한다. 이제 낯선 곳에서 먹고 살기위해 애쓰던 청년은 그만 범죄조직과 얽혀든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 그의 젊은 아내가 가련하게 애를 쓴다. 이제까지의 영화들은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서사를 가지게 되면 차례로 진행하였다. 그리피스는 야심적으로 이 네 개의 시대를 번갈아 오가는 구조로 재구성하였다. 다른 영화들이 이 쇼트와 저 쇼트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리피스는 영화 전체를 (아직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시간의 몽타주의 천장 벽화처럼 만들었다. 시간은 자유로이 여기서 저기로, 그리고 저기서 거기로, 그렇게 이동하면서 그 자체로 인류의 역사를 펼쳐보였다. 아놀드 하우저는 <불관용>을 본 다음 문학이 이제까지 이르려고 애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혹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영화는 시작하였다, 라고 탄식하듯이 썼다. 심지어 1916년은 제임스 조이스가 아직 <율리시즈>를 쓰고 있었고(이 소설은 1922년에 출판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두 번째 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를 발표했을 따름이다. (1912년에 초고가 끝났을 뿐이었다) 그리피스는 서사 전체의 시간, 차라리 인류의 역사 전체를 그렇게 잘게 쪼개놓은 다음 완전히 서사 바깥에 놓여있는 에피소드를 반복적으로 추가하였다. 릴리안 기쉬가 연기하는 어머니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어린 아기가 누워있는 요람을 흔드는 그 유명한 장면. (그래서 이제는 모든 영화교과서에서 문법처럼 인용되고 있는 장면) 그리피스는 여기서 우리에게 서로 다른 시대의 시간으로 산산 조각난 씬들을 하나의 고정점 아래 매듭을 만들어 새로운 질서를 세워 유기적 통일성을 부여하였다.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의 순간 중의 하나. 하지만 <불관용>은 그리피스의 알리바이를 증명하지도 못했고, 동시에 미학적으로 대중적 승리를 맛보지도 못했다. 이 영화는 자기의 시대로부터 멀리 떠나왔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오락이 예술적인 목표를 향해 도약하는 새로운 도전을 참지 않았다. <불관용>은 대중들의 ‘인톨러런스’ 앞에서 거의 재난에 가까운 박스오피스를 마주했다. <불관용>의 가장 열렬한 관객은 예상치 않게도 (어쩌면 충분히 예상대로?) 볼쉐비키 혁명에 성공하고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에 새로운 예술적 가치가 필요했던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레닌은 이 영화를 자본주의 역사의 ‘인톨러런스’로 읽어냈다. 그래서 <불관용>을 수입하여 러시아 전역에 대대적인 개봉을 했으며, 더 나아가 그리피스에게 새로운 소비에트 영화산업 위원장 자리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리피스는 이 자리를 거절했다. 나는 거절의 과정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이 제안을 수락하고 그리피스가 소비에트에 갔다면, 그래서 젊은 제자들, 에이젠쉬테인, 푸도프킨, 지가 베르토프, 미하일 롬, 도브첸코, 보리스 바르넷을 가르쳤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십년 후에 < 전함 포템킨 >을 보는 그리피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화사의 순간들의 우연이 만들어내는 별자리들. (계속)
해방 후 스무 번째 배출된 배우 최남현(崔湳鉉)은 해방 후 스무 번째 영화계에 진출한 배우이다. 주증녀(<돌아온 어머니>(이규환)), 황정순(<여성일기>(홍성기)), 주선태(<청춘행로>(장황연)), 황해(<성벽을 뚫고>(한형모))와는 1949년 데뷔 동기인 셈이다. 그가 첫 선 보인 <돌아온 어머니>는 남편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간 사이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던 아내(김연실 분)가 아편중독으로 죽고, 원양어선에서 돌아온 남편은 고아가 된 아들을 어렵게 찾게 된다는 얘기다.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내 역을 맡은 김연실(1911~1997)이 월북하고 최남현은 연극으로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가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기영(金綺泳)의 감독 데뷔작 <죽엄의 상자>(1955)부터였다. 이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1955)을 비롯,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유전의 애수>(유현목, 1956), <아리랑>(김소동), <잃어버린 청춘>(유현목), <봉이 김선달>(이상 1957, 한홍렬), <돈>(김소동), <자유결혼>(이병일), <인생차압>(이상 1958, 유현목), <오 내고향>(김소동), <젊은 아내>(이강천),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이상 1959, 전창근), <흙>(권영순, 1960), <어부들>(강대진, 1961), <인목대비>(안현철, 1962), <또순이>(박상호, 1963), <혈맥>(김수용, 1963), <추풍령>(전범성, 1965), <하숙생>(정진우, 1966), <싸리골의 신화>(이만희, 1967), <망각>(이만희, 1967), <내시>(신상옥, 1968) 등에 주연과 조연으로 기용된다. [사진] 영화 <돈>에서의 최남현, 왼쪽은 배우 김승호 최남현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최무룡 주연)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진섭은 그의 역할에 대해 “전 화면을 통해 압권이며 무대경험에서 쌓은 액팅이 오버함이 없이 적으나 자연스러운 연기” ( 「능한 연출, 능한 연기 / ‘유전의 애수’를 보고」, 『한국일보』, 1956.07.26) 였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런 호평에 힘입어 1년도 안 돼 타이틀 롤을 맡은 <봉이 김선달>로 ‘최남현이라는 배우의 하나의 지위를 주장’ (「비교적 정돈된 야담영화 / 최남현의 ‘봉이 김선달’」, 『한국일보』, 1957.10.25) 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이후 탈세와 횡령을 일삼다 법망에서 벗어나려 거짓 자살극까지 꾸민 아우(김승호)에게 "생눈 파먹은 날도적"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형 이중건(<인생차압>),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에 맞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스승(<이름 없는 별들>), 드센 아내의 성화 속에 품팔이로 어렵게 살아가는 남산기슭 해방촌의 ‘3.8따라지’ 깡통영감(<혈맥>), 국군 낙오병을 숨겨줘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결단을 내려야하는 산골마을의 강노인(<싸리골의 신화>) 등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진] <혈맥>에서의 최남현과 김승호(왼쪽) 이를테면 <봉이 김선달>, <인생차압> 등에서 보인 해학적인 요소, 처녀를 유린하고, 남의 애인을 가로챈 <유전의 애수>의 건달(인수 역), 피폐한 농촌에서 고리대금으로 농민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돈>의 억조, 딸(윤정희)을 왕의 후궁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을 시켜 딸이 사랑하는 하급 관리의 아들(신성일)을 성불구자로 만드는 <내시>의 김찬판 등 악역과 <이름 없는 별들>의 역사 교사 송선생,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싸리골의 신화>의 주인공 강노인이 보인 카리스마적 면모가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최남현. (사진제공 : 김종원) 그러나 최남현은 배우로서 절정기에 이른 1968년 어느 날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져 카메라 앞에 다시 나서지 못하게 된다. 10여 년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1977년 유현목 감독의 <문>을 계기로 재기, <한네의 승천>(하길종, 1977), <고가(古家)>(조문진, 1977), <족보>(1978, 임권택), <심봤다>(정진우, 1979), <짝코>(임권택, 1980), <물보라>(김수용, 1980) 등에 출연했으나 예전과 같은 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화의 물결 속에 전통을 고수하려는 <고가>의 주인공 김노인, 아집에 사로잡힌 <물보라>의 지초시, 뜬 구름 같이 살아온 <심봤다>의 조연, 인생을 달관한 <짝코>의 배역에서 열연하였다. [사진] <물보라>에서의 최남현. 아래는 하용수 광물성의 카리스마와 최다 출연 기록 노경에 접어들면서 기세가 많이 꺾이긴 했으나 누가 뭐라 하든 최남현은 개성이 강한 성격파 배우였다. 그의 연기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갱도의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광물성의 낮은 울림- 최남현 연기의 장점은 누구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내려 한 데에 있다. (김종원, 「인물영화사 / 중후한 조연 최남현」, 『일간스포츠』, 1987.07.08) 하지만 그에게는 1미터 75센티의 훤칠한 키와 상대를 꿰뚫어 보는듯한 눈매, 중후한 외모가 풍기는 무게감이 있는 반면 유연성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그 대신 뛰어난 연기감각과 형상력,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이런 결과는 결국 제1회 부일영화상 조연남우상(1958, <인생차압>), 제4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화부문 대상(1967, <싸리골의 신화>), 대종상 남우조연상(1966, <추풍령>) 등의 수상으로 나타났다. [사진] <싸리골의 신화>에서의 최남현. 왼쪽 박기태 최남현은 1918년 1월 7일 김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최찬수와 박이윤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나온 후, 법관이나 은행가를 지망하는 급우들과는 달리 무대를 동경했다. 해방 이듬해에 월남하여 극예술협회(신협의 전신)에 들어갔으나 한동안 잔심부름을 하며 따분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런 그에게 출연의 기회가 온 것은 1944년 스물여섯 살 때였다. <은하수>라는 연극이었다. <범선 천우호(帆船 天佑號)>(1949)의 무대에 오를 무렵 영화 <돌아온 어머니>에 발탁됐으나 6.25전쟁으로 후속작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 대신 <명우 추해당(秋海棠)>(상록극회, 1951), <통곡>(극협, 1952) 등 연극 활동을 하며 어려운 전란기를 보냈다. 영화 촬영이 계속된 뒤에도 <한강은 흐른다>(신협, 1958) 등에 출연하여 연극과의 인연을 끊지 않았다. 공연이 없는 날엔 주선태, 박암 등 극협 단원들과 술로 회포를 풀었다. [사진]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에서의 최남현 최남현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외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80년대 이후에는 술과 마작, 화투놀이로 소일하다시피 했고, 장기간의 투병으로 고급주택 등 모든 재산을 날렸다. 말년에는 양로원 생활을 하며 병상에 있는 아내까지 뒷바라지하다가 1990년 1월 7일 일흔 한 살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은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 사건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마유미>(1990, 단역)였다. 30대 초반부터 노역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스크린을 누볐던 최남현은 40여 년 동안 720여 편에 출연하는 최다 기록을 세웠다. *
“물속에서 눈을 뜨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여요” 사랑에 관한 가장 시적인 찬가 < 라탈랑트 >(장 비고, 1934)에서 이제 막 결혼식을 치른 젊은 아내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이야기를 그저 조롱하며 비웃는다. 영화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는 <라탈랑트>의 바로 이 장면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세수를 하는 남편에게 물속에서 눈을 떠보라고 말하는 아내, 그런 아내를 놀리는 남편의 장면이 이어질 때 화면 안으로 또 다른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온다. <라탈랑트>를 연출하던 29살의 청년 장 비고였다. 장 비고의 유일한 딸이었던 루스 비고는 < 라탈랑트 >의 현장 촬영분을 바라보며 여전히 젊은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애잔한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 비고의 여러 영화적 장면들에 대해 그녀는 애절한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 카메라가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현장에 있는 우리 아버지가 보일 텐데” 장 비고 감독 프랑스의 여성 감독 레일라 페로 레비의 다큐멘터리 <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는 우리에게 시적 리얼리즘으로 대변되는 장 비고와 그의 딸 루스 비고에 관한 영화이다. 1905년에 태어난 장 비고는 1934년, 고작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총 4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초현실주의와 아방가르드, 기존 예술가들이 영화라는 매체의 매혹과 실험으로 다양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던 그 시기, 장 비고는 보리스 카우프만이라는 예술적 동지(지가 베르토프의 동생. 장 비고 영화 전체를 촬영했으며, 이후에는 할리우드에서 오토 프레밍거 등과 작업했다. 시드니 루멧의 < 12명의 성난 사람들 >, 엘리아 카잔의 < 워터 프론트 >의 촬영 감독이다)를 만나 영화를 시작했다. 그의 영화들에는 국가와 체제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저항, 세상을 시적인 서정과 추상으로 사유할 수 있었던 예술가의 영감, 그리고 이십 대 청년의 맹목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매혹이 담겨 있었다. 니스라는 휴양도시에 관한 계급적이고 실험주의적 몽타주라 할 수 있는 < 니스에 관하여 >, 물에 대한 장 비고 특유의 매혹을 잘 드러내는 <수영왕 타리스>, 린제이 앤더슨과 고다르, 트뤼포의 오마주를 이끌어냈던 학생 반란에 관한 영화 < 품행 제로 >, 그리고 초현실주의와 계급적 현실을 넘나드는 사랑에 관한 찬가 < 라탈랑트 >까지. 장 비고의 영화적 필모그라피는 길지는 않았지만 강렬했다. '루스, 아빠, 엄마' <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는 바로 그 영화사의 전설이 된 장 비고를 아버지로 둔 루스 비고의 기억과 고백에 관한 영화이며 내밀한 가족사에 대한 진술이다. 루스 비고는 아버지를 세 살 때 잃었다. 그리고 얼마 후 병약했던 엄마 역시 사망한다(장 비고와 그의 아내는 결핵에 시달렸고, 이들은 각자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머물렀던 요양원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어 외조부의 손에 맡겨지지만 그 역시 금방 사망한다. 루스 비고는 어린 나이에 기숙학교 등을 떠돌며 성장해야 했다. 부모를 잃을 당시 그녀는 너무 어렸으며,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거의 지닐 수 없었다. 그러나 루스 비고는 아버지가 남긴 영화적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1931년생인 그녀는 이후 영화평론가로 성장했으며, 여러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도 활동하였다. ‘장 비고 상’ 수상위원회의 책임자이기도 한 그녀는 아버지로서의 장 비고와 영화사의 거장으로서의 장 비고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화 <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는 장 비고의 여러 영화적 주요 장면들과 루스 비고가 살고 있는 집 내부의 여러 사적인 공간과 흔적들을 정교하게 연결하고 교차 편집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루스의 집안은 흡사 수집가의 거대한 자료실처럼 빈 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영화인으로 80여 년을 살면서 쌓아온 삶의 흔적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보물처럼 자리하고 있는 장 비고에 관한 자료와 유품들. 그러나 이제는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루스 비고는 쌓아두었던 물건 중 가장 중요하게 간직했던 박스 하나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레일라 페로 레비의 카메라와 그녀의 아들 앞에서 처음으로 그 박스를 공개하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장 비고의 친필 시나리오를 비롯하여 각종 사진들, 여러 서한들, 비고의 영화에 실제로 쓰였던 영화적 소품들, 그리고 장 비고의 아버지였던 알머레이다에 관한 기록들. 알머레이다 비고는 프랑스의 정치적 스캔들을 일으킨 유명한 아나키스트였으나 삼십 대 초반에 검거되어 바로 다음 날, 수감된 감옥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다. 이 사건은 어린 장 비고에게 정치적, 경제적 트라우마로 남았고, 훗날 청년 장 비고의 영화적 세계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년기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장 비고의 삶은 고스란히 루스 비고에게도 이어졌다. 이 영화 속에서 루스 비고의 아들은 처음으로 알머레이다로부터 장 비고, 그리고 어머니로 이어지는 가족사의 내밀한 상처들을 직접 듣게 된다. 루스 비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그녀가 프로그래머로 수십 년을 일 하면서도, 그녀는 장 비고에 대한 그 어떤 프로그램도 진행하지 않았다. 아들은 어머니, 루스가 어떠한 성장기를 거쳤는지, 그녀에게 장 비고에 관한 자료가 어느 정도 남겨져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감히 물어볼 수 없었다. 박스를 공개한 후, 루스는 아들과 함께 장 비고의 영화들을 함께 보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영화감독 장 비고의 유산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루스 비고가 아버지의 흔적들을 아들에게 알려주는 과정에 가까우며, 이 영화에서 가장 애절한 순간이기도 하다. 루스는 장 비고의 영화 장면들 속에 감추어진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모습들을 발견해낸다. <라탈랑트>의 카페 신에 손님으로 앉아있는 어머니의 얼굴, 혹은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버지라는 사실, 또 단역으로 등장하는 피에로가 다름 아닌 장 비고임을 그녀는 알아채고 아들에게 알려준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장면들 혹은 다른 캐릭터들에 의해 얼굴이 거의 가려진 존재가 어머니임을 그녀는 알아본다. 아들이 루스에게 “어떻게 알았나요? 누군가 말해 줬나요?”라고 질문하자, 그녀는 처연한 눈빛으로 응답한다. “내가 딸이니까 알 수 있지”. 그리고 이어지는 루스 비고의 탄식, “아, 카메라가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현장에 있는 우리 아버지가 보일 텐데”. 그녀는 장 비고의 영화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 품행제로 > 이 영화 < 루스, 장 비고에 관하여 >는 공적인 역사가 되어버린 영화사의 거장 장 비고와 그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딸 루스 비고의 사적인 애정과 기억에 관한 기록이다. 절묘하게 편집된 장 비고의 영화 속 장면들과 루스 비고의 현재의 모습들. 알머레이다로부터 장 비고, 그리고 루스와 그녀의 아들로 이어지는 가족의 긴 역사와 상처, 그리고 남겨진 유산들에 대해 이 작품은 매우 담담하면서도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담아 묘사하고, 오마주를 바친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이어지는 <품행제로>의 기숙사 반란신. 여전히 유효한 장 비고의 시대정신과 영화가 묘사할 수 있는 매혹과 열정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ps. 이 영화 촬영이 끝나고 얼마 후(2017년 2월), 루스 비고가 사망한다. 루스의 집안을 정리하던 아들은 비단 루스가 그에게 공개한 상자만이 아니라 집안 곳곳에 엄청나게 많은 자료들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 자료들은 현재 시네마테크 혹은 다른 영화자료실 등으로 어떻게 기증할 것인지를 논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