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표정
- 감독
- 이성구
- 제작년도
- 1960
- 출연
- 이대엽, 엄앵란, 남양일, 김진규, 김혜정, 조미령, 문정숙, 김승호, 이민자, 김희갑, 안성기, 박암, 변기종, 장민호, 정철, 나옥주
1958년도에 데뷔하여 육십여 년을 작가로 활동하신 김지헌(본명 김최연)은 1930년 9월 26일 평안남도 진남포 비송리에서 태어났다. 작가는 어린 시절 사업을 하는 부친을 따라 진남포와 경성을 오가며 살았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소개령이 내린 경성을 떠나 아버지가 운영하는 광산이 있던 강원도 평창으로 피난을 떠나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사진1] <만추>(이만희, 1966) 작가 김지헌 [사진2] 김지헌 작가는 시나리오 지망생 시절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인 최인규를 무작정 찾아가 영화에 대해 물었다. 최인규 감독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극영화, <자유만세>(1966)을 연출했다. 최인규 감독은 김지헌 작가에서 숙제를 내줬고 그 숙제는 작가가 시나리오 작가의 길을 가는데 큰 가르침이 되었다.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작가는 소학교를 거쳐 명문 진남포공립중학교에 진학하여 수학했다. 당시는 일제말기로 대부분의 교사들이 일본인이었다. 때문에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수업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작가는 일본어를 쓰고 말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해방 후 작가와 가족은 서울, 장충동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작가는 경동공립중학교에 진학했다. 문학과 미술에 소질을 보였던 작가는 화가가 되기를 꿈꿨다. 화가가 되기를 꿈꿨던 작가는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무작정 부산으로 떠났다가 형님에게 발각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화가의 꿈을 접고 작가가 되기를 결심하게 된 것은 고향 형님의 권유였다. 형님은 소설이 아닌 시나리오를 써볼 것을 권유하였고 작가는 한달음에 국립도서관을 찾아가 시나리오와 영화에 관련된 책을 모두 섭렵하였다. 그 시절 처음 본 책이《키네마 순보》이다. 이 후 작가는 평생 《키네마 순보》를 구독하였다.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를 열망하며 당대 최고의 감독인 최인규 감독을 만나기 위해 고려영화주식회사에 찾아갔다. 몇 차례 문전박대를 당한 뒤에야 최인규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최인규 감독은 작가에게 한 영화가 몇 개의 커트로 구성되어있는지를 세어오라는 숙제를 내주고 돌려보냈다. 작가는 하루 종일 극장에서 영화의 커트를 세며 보냈고 결국 좋은 영화란 커트를 세기 어려울 만큼 흡인력이 강한 영화라는 결론을 얻었다. 작가가 터득한 결론에 최인규 감독은 관객을, 손님을 절대 놔주지 않는 흡인력 있는 시나리오를 쓰라는 것이 자신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전부라며 작가에게 좋은 시나리오를 써서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작가 김지헌은 본격적인 영화공부를 위해 서라벌예술학교의 전신인 서울예술학원에 입학했다. 1949년에 설립된 서울예술학원에는 이광래, 김진수, 백철, 양주동, 박목월, 서정주, 오영진 등 당대의 문인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작가는 학교에서 시나리오 부장을 맡는 등 학교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이러한 학교생활도 한국전쟁과 함께 일단락되고 만다. 하지만 학교에서 맺은 인연은 전쟁 중에 소중한 인연으로 돌아왔다. 9. 28수복 이후 작가는 친우들과 함께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였다. 하지만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전투에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작가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해 논산으로 떠난다. 논산에서 만난 이가 서울예술학원 동문인 시나리오 작가 하유상이다. 하유상의 도움으로 잠시 논산에 머물렀던 작가는 자형을 찾아 광주로 갔지만 도착했을 때 자형은 이미 광주를 떠난 뒤였다. 극심한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작가에게 도움을 준 이가 문학평론가 장백일이다. 장백일의 도움으로 건강을 추스른 작가 광주 군관학교에서 발행하는 정훈잡지 편집관 모집에 응시하여 편집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 면접관이 작가 선우휘이다. 편집관으로 일하면서 작가는 서울에서 피난 온 그리고 광주의 문학청년들과 어울렸고 이들을 따라 광주에 내려와 있었던 시인 서정주와 만난다. 서정주 시인에게 보여준 한 편의 시는 후일 서정주의 추천으로《현대문학》에 실렸다. 작가의 시 <종 鐘>은 정전 이후 출간된《현대문학》4호(1955년 4월호)에 미당 서정주의 추천시로 실렸다. 정전이 되고 서울로 돌아온 작가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창간한《중앙일보》에서 문화부 기자생활을 시작하였다. 작가는 문화부 기자생활을 하면서 당대의 문화계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작가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만난 인연들과 경험이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데 자양분이 되었다고 구술하였다. 기자로 일하던 중 작가는《조선일보》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이 신설된 것을 알고 오랜 꿈인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해 기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문학청년의 꿈을 일궈낸 광주로 내려가 응모작을 준비하였던 작가는 스승인 오영진의 부름을 받고 스승을 찾았다. 언론계에서 일한 탓에 아는 이가 많은데다가 스승인 유치진과 오영진이 심사위원이라는 것을 알고 예명으로 출품한 작품이 최종에 올라갔는데 심사위원인 오영진이 당선 후보자의 면모가 궁금하여 작가를 부른 것이다. 오영진 선생은 당선 후보자가 자신의 제자인 것을 알고 놀라면서도 당연한 결과라며 당선을 축하했다. 작가는 이때 사용한 예명인 ‘김지헌’으로 영화계에서 활동했다. [사진3] 해방 후 신세대 영화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신예프로덕션에 김지헌 작가도 참여하였다. 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영화의 포스터이다. 영화는 전후의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방황을 그렸다. 태양족 영화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태양족 영화를 만든 오시마 나기사의 찬사를 받았다. 시나리오 당선과 함께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가의 길로 들어선 작가는 이성구 감독, 이강원 감독, 제작자 전홍식 등과 함께 신예프로덕션을 창립하였다. 영화계에 새로운 세대의 바람을 일으켜보자며 의기투합한 이들을 당대의 영화인들은 영화계의 젊은 그룹이라 칭하였다. 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신예프로덕션의 창립작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은 평론가 이영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영일은《영화예술》에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의 특집을 게재하였는데 이제 진짜 영화가 나왔다는 평을 실었다. 영화계 원로들은 이영일의 사무실을 찾아가 젊은 영화인들에게 지나친 호평이라며 항의를 하기도 했다. 일본의 태양족 영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인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은 태양족 영화를 만든 장본인인 오시마 나기사의 찬사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영화를 만들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신예프로덕션의 작품들은 언론과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그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전후의 암울한 현실에서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는 이들 영화는 새로운 세대를 가로막는 당시의 불안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진4] 김지헌 작가의 대표작인 <만추>(1966)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 [사진5] 1966년 개봉한 신성일, 문정숙 주연의 <만추>(이만희)의 포스터이다. 안타깝게도 영화를 볼 수 없다. 작가는 이만희 감독의 세련된 감수성이 돋보이는 연출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사진6] 이만희 감독과 함께 한 또 하나의 작품 <원점>(1967)의 포스터이다. 설악산 여행을 함께 떠난 이만희 감독과 작가가 설악산을 배경으로 구상한 영화이다. [사진7] <용서받기 싫다>(김묵, 1964)는 작가가 가장 아쉬움을 갖고 있는 작품중 하나이다. 이만희 감독은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싶어 작가에게 전화를 했다. 작가가 이만희 감독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사진8] 1982년 김수용 감독이 리메이크한 <만추>의 포스터 이다. 원작에서 문정숙이 맡았던 혜림역은 김혜자가, 신성일이 연기한 훈은 정동환이 맡았다. [사진9] <만추>(이만희, 1966)는 2010년 다시한번 리메이크 되었다. 연출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김태용, 민규동, 1999)와 <가족의 탄생>(2006)을 감독한 김태용이 하였다. 영화의 배경은 시애틀로 바뀌었고 혜림 역은 중국배우인 탕웨기가, 훈 역은 현빈이 연기하였다. 김지헌 작가는 40년의 간극을 두고 만들어진 원작과 리메이크 작품이 두 감독의 개성과 시대를 잘 담아내었다고 이야기했다. 1960년대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영화에 대해 토론을 하고 상생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나는 것에 목말라 했다. 그 갈증을 해소시켜 준 이가 바로 이만희 감독이었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만희 감독은 <7인의 여포로>(1965)로 인해 고초를 겪을 당시 만났던 동료 재소자를 만난 일화를 들려주었고 이를 예사로이 넘기 않은 작가가 시나리오 만든 것이 영화 <만추>(이만희, 1966)이다. 작가는 이만희 감독을 누구보다 뛰어난 연출력과 창의력을 가진 감독이라고 회고했다. 영화는 대성공을 거뒀다.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야 하는 여자와 쫓기고 있는 남자가 함께 국수를 먹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울음이 터졌다. 역설적이게도 정작 스크린 안의 배우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이러한 연출이 이만희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작가는 설명하였다. <만추>(이만희, 1966)의 흥행이후 작가는 이만희 감독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설악산 여행을 떠났다. 이만희 감독과 작가는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종일 술잔을 기울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작가는 이를 시나리오로 썼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이만희 감독이 1967년에 연출한 <원점>이다. 갑작스런 이만희 감독의 죽음을 작가는 많이 안타까워했다. 아쉬움이 많았던 작품인 <용서받기 싫다>(김묵, 1964)를 영화화 해보고 싶다는 전화통화가 이만희 감독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만추>(이만희, 1966)는 일본에서 상영되어 큰 호평을 받았고 1972년 사이토 고이치가 <약속 約束>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하였다. 한국에서도 1981년에는 김수용의 연출로 그리고 2010년에는 김태용의 연출로 다시 만들어졌다. 영화가 세 번에 걸쳐 각기 다른 감독에 의해 재해석 될 수 있다는 것은 오리지널 시나리오 안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작품성이 숨 쉬 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유현목 감독이 연출한 <태양은 다시 뜬다>(1966)로 제5회 대종상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만추>(이만희,1966)의 흥행 그리고 <태양은 다시 뜬다>(유현목, 1966)의 대종상 수상까지, 1966년 한 해 동안 작가는 자신의 대표작들을 일궈냈다. [사진10] 1966년에는 김지헌 작가의 대표적인 두 작품, <만추>(이만희)와 가 개봉하였다. 작가는 <태양은 다시 뜬다>로 제5회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사진11] <태양은 다시 뜬다>(1966)를 연출한 유현목 감독은 당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특히, 문예영화 연출에 있어서 독보적인 감독이었다. 1960년대 작품성과 흥행성 있는 작품을 두루 발표하며 시나리오 작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작가는 1972년 한국영화인협회 시나리오분과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작가는 1973년 유신과 함께 개정된 4차 개정 영화법과 시나리오 사전심의제에 강력하게 저항하며 영화계 전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유신체제 하의 영화는 검열로 훼손되기 일 수였다. 작가는 이 시기 본인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차마 볼 수 없었다. 현대물에 대한 검열은 더욱 심해 이 시기의 작품 대부분이 시대물 혹은 코미디가 될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의 안타까운 현실을 작가는 이야기했다. 작가는 1973년 한일합작영화를 준비하였다. 한일 양국의 예인들의 삶을 다룬 영화는 연방영화사 주동진 사장이 제안하여 쇼치쿠 영화사와 합작을 계획한 영화였다. 시나리오의 원제는 <가야금-겨울의 가락>이다. 하지만 1973년 한일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영화의 합작계획은 표류하게 되었다. 작가는 국내영화사의 제안으로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을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유현목의 연출로 1977년 <문>이란 제목으로 완성되었다. [사진12] 1977년 개봉한 영화 <문>(유현목)은 김지헌 작가가 1973년 한일합작영화로 준비한 영화였다. 시나리오의 원제목은 <가야금-겨울의 가락>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예인들의 삶을 다룬 시나리오는 1973년 한일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제작의 어려움을 겪었다. 1977년 유현목 감독의 연출로 완성되었다. [사진13] 일제말기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 1977)는 극장 상영 중 상영금지처분을 받아 상영이 중지되었다. 후일 미국 이민을 떠난 뒤 비로소 본 영화는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다른 영화였다. 작가는 검열로 다른 작품이 된 영화를 이국 땅에서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하였다. [사진14] 김지헌 작가는 1972년 한국영화인협회 시나리오 분과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 유신과 함께 개정된 영화법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던 작가는 검열로 영화가 훼손되어가는 과정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1970년 대 후반 영화의 검열은 더욱 엄혹해졌다. <야시>(박남수, 1979)도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 사뭇 다른 작품이 되어버린 영화 중 하나이다. [사진15] 김지헌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망명의 늪>의 포스터이다. 작가는 1976년《조선일보》4월 23일자 5면에 「영화시책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국산영화 향상을 위한 제언’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에서 작가는 영화업의 허가제, 우수영화 수입추천제, 시나리오 사전 검열 한국영화의 발전과 창작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작가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영화인 모두가 공감하였던 것은 아니다. 일부의 영화인들은 박정희 정권과의 마찰을 두려워했다. 작가는 정부의 영화정책이 궁극에는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를 야기할 것이라 예견했고 결국 스크린 위의 검열로 훼손된 영화들을 통해 그 결과가 보여졌다. 작가는 1968년 통혁당 사건이 발생한 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소환의 이유는 영화 <학사주점>(박종호, 1964) 때문이었다. 통혁당 사건의 관련인이 명동에 학사주점을 하였는데 그것이 이유였다. 영화 속 주인공(신성일)이 군에서 제대하고 아버지(김승호)를 찾아갔는데 아들을 본 아버지의 첫 마디가 “쌀값도 비싼데 왜 벌써 제대를 했느냐” 였다. 군대에서 제대한 아들에게 쌀값 운운하는 것이 말이 안 되고 또 남한이 그렇게 못사는 나라라는 뜻인지, 이는 이적행위라며 작가를 불러간 이들은 추궁했다. 다행히 작가는 풀려났지만 엄혹했던 한 시절에 벌어진 웃지 못 할 일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영화가 상영 중에 금지를 당하는 일도 일어난다. 1977년 작품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은 검열에 합격해 극장에 상영되었으나 상영금지처분을 받아 결국 간판을 내려야 했다. 일제말기 신사참배에 저항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사전심의에서부터 불순하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기독교 측의 반정부 투쟁이 격렬했고 정부는 이 영화를 이러한 분위기를 부추기는 작품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국 영화는 상영이 취소되었고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뒤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에 합격하여 극장 상영을 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미 미국이민을 떠난 뒤였다. 작가는 미국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다른 영화가 되어있었지만 작가는 영화가 만들어진 지난한 과정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검열로 원안과 다른 작품이 되어버린 영화를 보는 것은 작가에는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야시> (박남수, 1979), <망명의 늪> (김수용, 1978) 등 작가의 많은 작품들은 검열의 과정에서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사뭇 다른 작품이 되어버렸다. [사진16]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1980년 김지헌 작가는 미국 이민을 떠났다. 이민 생활 중에도 쉬지 않았던 창작 활동의 결과물은 2013년 집문당에서 발간한 『한일대역시나리오선집』에 실려 있다. 시나리오 선집은 한일 양국에서 출판되었다. 작가는 1980년 짧은 서울의 봄을 뒤로하고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1980년 1월 작가는《조선일보》1980년 1월 27일 5면에 「80년대의 한국문화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나, (9) 영화 제작-표현의 자유를. 자질 향상 위한 해외연수-기금확보도」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새로운 정치권력에게 한국영화계의 문제점들을 타파하고 발전을 모색할 것을 제안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희망은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고 작가는 미국이민을 결심하였다. 뉴욕을 거쳐 LA에 정착한 작가는 미주 영화인들과 함께 영화화를 도모하는 한편 작품 창작도 쉼 없이 하였다. 작가는 각기 활동해 오던 한미영화학회와 미주한국영화인회의를 통합한 미주한국영화인회의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작가는 감독 홍의봉, 제작자 주동진 등과 함께 재미교포 이철수 사건을 영화화를 모색하였다. 또한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오는 한국영화인들을 지원하는 등 미국에 머물면서도 한국영화계와 밀접하게 지냈다. 작가는 1987년 미국에 머물 당시 <별의 유역>을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1989년 영화진흥공사 지원작으로 선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작가는 이민을 떠난 지 십년 만에 귀국하였다. <별의 유역>은 방대한 스케일 때문에 영화화되지 못하였지만 작품은 2013년 집문당에서 발간한 『한일대역시나리오선집』에 실려 있다. 한일 동시 출간된 이 작품집에는 미발표된 다수의 시나리오가 실려 있다. 십년 만에 돌아온 한국영화계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비디오 대여 시장과 케이블 TV의 영향으로 대기업이 영화제작투자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의 신진 인력들이 영화계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작가는 귀국 후 영화제작과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요동하는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였던 김지헌은 시나리오 작가의 삶을 꿈꿨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였던 작가는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종점에 피는 미소>가 당선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전후의 불안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당대의 젊은 이들의 삶을 스크린에 담고자 하였던 작가는 영화계의 신진들과 힘을 합쳐 신예 프로덕션을 설립,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을 만들었다. 전후의 영화계에서 새로운 영화의 바람을 일으켰던 이들은 누벨바그, 네오리얼리즘 등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바람을 한국영화계에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시도는 년 간 백 여 편 이상의 영화를 생산해내던 당시의 한국영화계가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것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바람은 기성의 영화인들에게는 불안함으로 느껴질 수 있었겠지만 영화에 대한 이들의 문제의식이 당대의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였음을 앞서 기술한 평론가 이영일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자리매김을 확고히 하고 대표작으로 <만추>(이만희, 1966)를 꼽았다. 또한 1960년대를 자신의 전성기라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유신체제가 시작되면 작가의 삶은 녹록치 않아졌다. 작가는 유신체제하의 엄혹한 현실에서도 창작자의 당연한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위해 날카로운 비판의 글을 쓰는 한편 검열과 싸우며 수많은 작품을 완성하였다. 1980년 짧은 서울의 봄이 지나가고 작가는 다시 겨울로 들어서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작가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1990년대의 한국영화는 사뭇 달라진 환경이었다. 영화사의 설립과 관련한 법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이 되었고 수입자유화와 외화 직배 그리고 비디오가 활성화되면서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이 시작되었다. 작가는 영화제작자로 다시 영화계에 돌아와 무엇보다도 시나리오 작가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고 영화계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노력하였다. 1958년 이병일 감독의 <자유결혼>의 각색으로 데뷔한 김지헌 작가는 1990년 <홀로서는 그날에>(석래명)의 윤색에 이르기까지 60여 편의 각본과 20여 편의 각색과 윤색을 담당하셨다. 1990년 이후로는 제작과 후학 양성에 힘써 오신 김지헌 작가는 2014년 영상자료원과 함께한 원로영화인 구술사 작업을 마치시면서 좋은 작가란 동시대를 고민할 줄 알아야한다고 했다. 한국영화와 60여 년을 동거동락한 작가의 경험이 깊이 새겨진 말이다.
< 만추 >( 이만희 , 1966)의 시나리오 작가인 김지헌 선생님을 만난 것은 2014년 생애사 구술을 통해서다. 1930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김지헌 작가는 광복 전 서울로 이주해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국립도서관에서 시나리오와 관련된 모든 책과 자료를 탐독하고 당대 최고의 감독인 최인규 감독을 직접 찾아가 영화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정도로 작가는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김지헌 작가는 시나라오 작가로 데뷔하기 이전에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다. 6.25 중 만난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종’이 실리면서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기 이전 상당 기간을 언론사에서 문화 담당 기자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폭넓은 경험이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는 동안 두루 자양분이 됐다고 김지헌 작가는 말씀하셨다. 영화의 동시대성을 고민하다 1958년 이병일 감독의 < 자유결혼 >의 각색을 맡으면서 시나리오 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이성구 감독 등과 함께 ‘신예프로덕션’을 설립해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세대로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 정열없는 살인 > < 젊은 표정 >(이성구, 1960) 등 신예프로덕션과 함께 한 작품에는 전후의 암울한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없이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세련되게 다루어졌다. 김지헌 작가는 세계 영화계의 경향을 동시대적으로 파악하고 한국영화도 세계 영화와 그 흐름을 같이 해야 할 것을 늘 고민하고 나아갈 길을 모색해왔으며 그 고민은 현재 진행형이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작가는 우연히 길에서 만난 이만희 감독이 들려준 일화에서 영감을 얻어 < 만추 >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한다. 단순한 이야기 구조와 인물이 물 흐르듯 만들어내는 깊은 정감과 정서는 <만추>의 시나리오가 영화 이전에 하나의 완성된 문학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추>는 김수용 감독, 사이토 고이치 감독, 김태용 감독 등에 의해서 다시 만들어졌는데 이는 원작이 가지고 있는 힘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가 영화의 진정성을 만들어내고 감독이 이를 영상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시나리오 작가의 역할이 영화의 토대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영화의 현실이 그렇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과거의 한국영화계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나리오 작가의 고뇌와 그들의 역량을 인정해주던 제작 환경이 있었음을 강조하셨다. 영화란 끝없이 ‘나’를 찾아가는 작업 이러한 의미에서 2013년 8월 출간된 <한일 대역 창작 시나리오 선집>(집문당)은 뜻깊은 의미를 지닌 책이라 생각된다. 작가의 대표작 5편이 실린 선집은 일본어로 번역, 한일 양국에 동시에 소개됐다. 책에는 < 만추 > 이외에 영화화가 되지 못한 작품이 다수 실려 있다. 일본의 중견 영화평론가인 사토 다다오(佐藤忠男)는 이 책의 서평에서 1969년에 씌어진 <돌이의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돌이의 전쟁>은 군사정권 시대에 반전적인 내용이라 영화화가 불가능했던 작품이다. 한국영화는 그렇게 검열과의 오랜 싸움 끝에 현재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사토 다다오는 영화화가 되지 못한 작품들이 씌어질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작품들을 통해 눈앞의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던 작가의 이상과 정열을 높이 평가했다. 또 다른 저명한 영화평론가인 우에노 고시(上野昻志)는 김지헌 작가의 작품을 시나리오라기보다는 문학의 길에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글을 쓴다는 것은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가로지르는 것인데 김지헌 작가는 이와 같은 물음에 정면으로 질문하듯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고 있다.”라고 평한 우에노 고시는 김지헌 작가의 작품이 시나리오를 넘어서는 작품성을 지니고 있음에 주목하했다. 2013년 8월에 출간된 <한일 대역 창작 시나리오 선집>은 한국영화계에서 50년을 몸담은 작가가 격동의 시대를 영화와 동고동락하며 쌓아온 열정과 이상을 담고 있다. 한국영화의 현재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는 책이라 생각하겠다.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 불었던 뉴 웨이브 운동의 중심이자, 1960년대 중반을 휘감은 청춘영화 장르의 효시작을 감독하였고, 1960년대 후반 < 장군의 수염 >이라는 걸출한 모더니즘 영화를 연출한 감독 등의 수식어로 소개할 수 있을 인물이 이성구 감독이다. 1928년에 태어난 이성구 감독은 이병일 감독의 조감독을 거쳐, 1960년 김지헌 이 시나리오를 쓴 청춘 영화 <젊은 표정>으로 감독 데뷔하였다. 데뷔작인 < 젊은 표정 >은 시나리오 작가 김지헌, 재일교포 출신의 프로듀서 전홍식 과 당시 조감독이던 이강원 , 이성구 등 당시의 젊은 영화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예 프로덕션’의 창립작으로, 오시마 나기사 등으로부터 시작된 일본 누벨 바그의 영향을 받아 한국 영화계에도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겠노라는 열정으로, 제작부터 화제가 되었고, 비록 흥행에는 실패하였으나 평단에서는 호의적인 평가를 이끌어낸다. 같은 해 연출한 < 정열 없는 살인 > 또한 역시 김지헌이 시나리오를 쓴 추리물로, ‘한국영화에 없던 새로운 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대표작으로 꼽히는 1968년의 연출작 <장군의 수염>은 영화 중반에 신동헌 감독의 애니메이션이 끼어들고, 스토리의 시간이 뒤얽혀 있는 등 형식적 특이성을 지닌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중 한 편으로 꼽히는 영화이다. 이쯤 소개하고 보면, 실험적인 영상과 반항적인 주제의식을 특징으로 지닌 작가이며, 매우 모던한 연출 스타일을 보여주는 예술영화 감독일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될 터이나, 실제 이성구의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영화들의 면면은 매우 다양해서,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영화에서 유행한 거의 모든 장르들을 두루두루 거쳐 왔다. 이성구 감독은 앞서 언급했듯 한국의 뉴웨이브를 표방하며 데뷔했으나, 흥행 면에서의 부진으로 이후의 연출작들은 멜로드라마, 서민가족 코미디, 청춘영화, 고부갈등을 다루는 가족드라마 등 당시 한국영화계와 TV/라디오 방송극에서 유행하던 장르들을 두루 거치며 연출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던 이상구 감독이 다시금 비평적 주목을 받게 된 계기가 1960년대 후반 이른바 문예영화 제작이 붐을 이루면서부터이다. 황순원 과 이효석 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1967년작 < 일월 >과 < 메밀 꽃 필 무렵 >에 대해 언론과 평단은 “오랫동안의 슬럼프에서 벗어난 견실한 연출력”, “오랜 침묵이 있은 후의 수확” 등의 문구로 반겼고, 흥행에 있어서도 비교적 성공한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68년, 이성구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 장군의 수염 >이 발표된다. 이어령의 동명소설을 김승옥 이 각색한 <장군의 수염>은 한 사진기자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두 형사가 추적하며 재구성하는 내용인데, 동시대 프랑스의 누보로망 마냥 시간순서가 뒤엉켜있는 내러티브 구성, 애니메이션과 회화를 이용한 화면구성과 편집이 등장하고, 결국 엔딩에 이르면 미스터리의 범인은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우리 사회전체라는 다소 관념적이고 사색적인 주제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는 “국산 최대의 문제작”이라는 평단의 흥분어린 평가를 이끌어 내었고,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무려 37만의 관객을 동원한) < 미워도 다시 한 번 >과 함께 그 해 “방화계의 두 경이”가 된다. 모더니스트, 형식실험가 등 이성구 감독에 대한 후대의 일반적 평가는 거의 이 영화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성구 감독에 대한 그러한 일반적인 평가에 비추어볼 때, 그의 후반기 필모그래피는 다소 의외일 수 있다. 이성구 감독의 연출 경력 가운데 후반기의 필모그래피들은 반공영화를 비롯한 프로파간다 성격의 작품들과 기술력과 자본을 필요로 하는 대작영화들에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 휴머니즘적 결말을 지향한 반공영화들은 원작소설들을 영화화한 문예영화의 연장인 경우가 많고, 그 중 < 지하실의 7인 >(1969)은 인간의 심리적 갈등과 양심, 전쟁으로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을 제한된 공간 내에서 연출한 작품으로 이성구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영화평론가 이영일과 김종원에 의해 언급되었다. 1970년대 이후 이성구의 관심은 기술력과 자본을 필요로 하는 대작영화로 향한다. 1971년 순수 국내제작 장비와 기술로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70mm 영화를 목표로 하여 의욕적으로 제작에 돌입한 < 춘향전 >은 연일 제작 상황이 지면에 오르내리는 등 화제를 모았지만, 개봉 이후 관람을 방해할 정도의 (특히 사운드 측면에서의 잡음 문제 등) 기술적인 결함들이 발견되었고, 흥행 역시 기대에 미치지는 못 한다. 이어 경제개발 선전의 일환으로 포항제철의 건설과정을 다룬 대형 국책영화 < 해벽 >(1972)은 태풍이 몰아치는 방파제에서 파도와 싸우며 해벽을 건설하는 장면을 스펙터클로 담아내고, 반공 소재의 대형 영화인 < 악마의 제자들 >(1974) 역시 인민군이 탈출해 내려오는 장면을 담은 대규모 군중 신과, 신문기사를 통해 인상적인 자동차 추격 신이 등장한다고 전해지는 < 빨간구두 >(1975) 등 이후의 연출작에서 꾸준히 확인되는 바는 스펙터클과 영화 기술에 대한 관심이다. 이러한 경력들을 인정받아 1970년대 말, 한국, 일본, 할리우드가 함께 제작하던 인천상륙 작전 소재의 전쟁영화인 <오! 인천>(1981)의 한국측 감독을 맡는다. 이 영화는 미국측 감독으로는 007 시리즈로 유명한 테렌스 영이 기용되었으며,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으로 나섰고, 무려 4천만 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투여된 초대작이었으나, 제작 과정 중 갖가지 난항을 겪은 후, 결국 테렌스 영 감독이 해고되기에 이른다. 이성구 감독은 테렌스 영을 대신하여 그 이후의 추가 촬영과 후반 작업을 맡게 되는데, 이 영화를 마무리하며 미국과 한국을 오가게 된다. 이 영화를 마무리짓고 난 다음 해인 1982년 브라질에 이민 가 있던 누나를 방문하고서 자신의 영화 < 오인의 건달 >(1966)들에서 주인공들이 꿈꾸던 것처럼 브라질로 이민 간다. 이렇게 다양한 영화들 속에서 이성구 영화를 규정지을 수 있는 키워드를 꼽자면, 흔히 알려진 것처럼 뉴웨이브적인 ‘실험’ 보다는 ‘유려함’이 될 것이다. 스타일은 세련되었지만 언제나 단정하고 주제의식은 타협적이며,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한국영화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기괴함이나 과잉적인 측면을 발견하기 힘들다. 혹은 줄여 말하자면, 이 얼마나 김기영 스럽지 않은 단정함이란 말인가. 이성구는 첫 영화 < 젊은 표정 >을 만들고 난 뒤 한 일간지의 기고문에서 4.19 이후 고무된 어조로 “옛 것과 결별하고 이상을 향해 매진하는 의욕”을 한국영화계에 촉구한 바 있으나,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인 이영일은 『한국영화전사』에서 <젊은 표정>을 두고 “젊은 세대들의 건강한 모럴을 담았다”라고 평가하였다. 여기서 보이는 그 의욕에 찬 선언과 다소 차분한 평가 사이의 간극을 살펴보면 이성구 감독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예컨대 1960년대 한국의 뉴웨이브를 위해 모인 영화 청년들, 그 가운데 한명이었던 이성구 감독이 원했던 이상은 실험과 전복 보다는 유려함과 세련됨이었다. + 사족을 붙이자면, 이성구 감독은 1961년 김기영 감독의 < 하녀 >에서 한국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여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힐 이은심 과 결혼하였으며, 1982년 브라질로 이민을 가서 2005년에 타계하였다. 부인인 이은심 여사는 여전히 브라질에 생존해 있다. / 글: 전민성